
퇴비젓
이종섶
잡초를 뽑아 담그는 식물들의 젓갈
알맞게 익었다 싶으면 속을 뒤집어본다
오젓이나 육젓은 건더기 하나 없이
부드럽게 삭아 흐물흐물 하지만
칠젓이나 팔젓은 녹지 않은 줄기가 많아
두세 달 더 참고 기다려야 한다
가을에 잡은 풀로 갓 담근 젓갈은
찬바람이 헤집어놓은 뼈와 살코기에
함박눈으로 여러 번 간을 해야
삼한사온을 겪으며 얼었다 녹았다 하는 동안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생젓이 된다
텃밭에서 자라는 채소들의 식욕이
더욱 왕성하게 살아나는 봄날
묵은 건초젓갈들을 한 곳에 쟁이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일하다 보면
고봉밥 한 그릇 뚝딱 비우게 만들
잘 익은 초젓 생각에
온 동네 가득 푸짐하게 번지는 향내
얼마쯤 젖었다 말렸다를 반복해야
찌르기 좋아하는 내 안의 가시들이 곰삭아
손끝으로 살짝 찍어 맛보기만 해도
감칠맛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흙 묻은 옷을 벗고 몸을 씻는데
향긋하게 풍겨오는 마음젓갈 냄새
어디서 나는 걸까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내 몸속 오래된 젓갈통 하나
-시에 2013 겨울호
빙어
이종섶
일조량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그해 겨울
앞이 보이지 않아 견디기 힘들었다
희미한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날은
온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야 겨우 살 수 있었다
뼈까지 녹아버리지 않을까 걱정이었지만
한 조각 햇살이라도 들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폭설까지 내려 얼음장을 뒤덮으면
하늘은 백태가 끼어 뿌옇기만 했다
햇빛부족현상은 호수를 온통 뒤흔들어
모든 기억을 남김없이 게워내도록 사주했으나
머릿속까지 말끔하게 비워낸 물고기들은
몸이 보이지 않아도 문제될 게 없었다
햇빛이 미치도록 그리워 죽고 싶을 때쯤
두개골을 때리는 맹렬한 굉음과 함께
커다랗게 뚫려버린 하늘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사이사이 끼어있는 미끼를 허겁지겁 빼먹는 동안
운 좋은 놈들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가
꿈에 그리던 빛의 세계로 떠날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출구를 기웃거리며
지긋지긋한 백야를 어서 탈출하고 싶었는데
느닷없이 찾아와버린 잔물결 이는 계절
탈옥을 꿈꿀 수 없는 감옥에서
수중낙원이라고 말하는 천국에서
다시 겨울을 기다리는
작은 물고기들의 눈은 한없이 맑았으나
머리는 텅 비어 있었다
-미네르바 2013 겨울호
우주를 연주하다
이종섶
낮의 오선 위엔 강렬한 음악을 연주하는 해, 밤의 오선 위엔 고요한 음악을 연주하는 달, 낮에는 지상의 모든 것들이 해의 장음계에 맞춰 소리를 낸다 밤에는 천상의 모든 것들이 달의 단음계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해와 달이 있어야 음정을 가지는 지상음계와 천상음계, 땅에서는 하늘을 향해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새가 날아다닌다 하늘에서는 무수히 많은 은하수 별들이 땅을 향해 고운 눈을 반짝거리며 내려다본다
오른손과 왼손으로 연주하는 높은음자리와 낮은음자리 사계(四季), 낮과 밤을 한 장씩 넘기며 연주하는 해자리와 달자리 하루하루, 연주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아도 관현악은 날마다 들린다 장대한 하모니가 천지에 울려 퍼진다
오선에 음표를 그려도 음자리표가 없으면 정체불명의 소리가 난다 땅과 하늘에 수많은 생물과 별들이 있어도 해와 달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온 우주에 흐르는 교향곡은 1악장부터 7악장
연주가 시작되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코스모스심포니, 몇 악장을 연주하고 있을까 귀를 기울이면 천체를 지휘하는 거대한 손이 보인다
-포엠포엠 2012 겨울호
사과
이종섶
그녀는 입과 항문만 있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버렸다
언제나 크게 벌리고 있는 입, 그 속에는
길고 가느다란 혀가 있다
혀로, 남자와 대화하고 남자를 받아먹는다
배설하는 기능조차 잃어버린 제법 쪼글쪼글한 항문,
그녀가 먹는 것들은 뱃속에 들어가는 족족
자궁과 씨앗으로 변해버려 밖으로 내보낼 필요가 없다
동그란 몸에 흐르는 붉고 푸른 윤기는
그녀가 아주 만족스럽다는 표정,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된다며
남자에게서 떨어져 나가 혀를 말린다
먹을 이유가 없는 입은 있으나마나,
스스로 재갈을 물어 식음을 전폐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후손들은 항문마저 없어질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동안 입만 벌리고 있으면 되고,
그 입속에 죽을 때를 아는 혀 하나만
독하게 내밀고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랫도리가 없어야 예뻐진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입과 항문이 다 막혀
온몸이 부풀어 오른다
입과 항문만 남은 채 버려지는
자서전 한 권
-시와시 2012 겨울호
바람의 구문론
이종섶
바람은 형용사다 나무를 흔들리게 하고 깃발을 휘날리게 한다 나무와 깃발 같은 것들 앞에 흔들린다와 휘날린다를 붙이는 것은 목숨과도 같아서 그런 표현이 사라지면 흔적조차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바람은 동사도 된다 바닥에 있는 것들을 날아가게 하고 무생물체까지도 움직이게 한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야 바람 따라 움직이지 않겠지만 생명이 없는 것들은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며 생명을 흉내낸다 바람을 통해 잠깐씩 살다 가는 목숨들이 아주 많다 바람은 접속사 역할도 한다 나무와 나무를 이어주며 꽃과 꽃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까지도 만나게 한다 바람이 없으면 외롭게 살다가 저 혼자 마감하는 세상 바람이 있어 서로가 손길을 스치고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은 그러나 명사는 아니다 명사의 형질이 없어 무엇이든 명사로 보이는 순간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꾸며줄 수도 있고 움직여줄 수도 있으나 대상 그 자체는 결코 되지 못하는 비문(秘文) 바람은 그러므로 존재사다 모든 것이 되고 싶으나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한 점 미련도 없이 대상의 존재를 다양하게 그려내는 문법에 만족한다 명사와 명사 사이에 불기도 하고 한 명사를 불어 다른 명사를 불게도 하는 구문론 읽을수록 끝이 없고 쓸수록 신비롭다
-애지 2012 봄호
경남 하동 출생.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기독교타임즈문학상, 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상 등 수상. 시집 <물결무늬 손뼈 화석>.
이메일: mybac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