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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주간
눅 24:1-12절) 예수님의 빈 무덤
죽음의 집(무덤 1평) 화장터 불속에는 사람들이 매일 자꾸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는 사람은 창세 이후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 막연하게 추측만 할 뿐, 자세한 사정을 모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생전에 그렇게 아끼고, 특히 여성들은 성형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사랑하던 육체(肉體)를 매미처럼 번데기를 벗고 날아갑니다. 이 육체는 죽으면 너무나도 빨리 부패하여, 3일이면 썩어서 지독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화장(火葬)을 하거나, 최대한의 예의를 다하여 시신을 매장(埋葬)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무덤을 열고, 시신을 꺼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체가 바뀌었다든지, 죽은 사람의 사인(死因)에 대해 경찰이 수사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아주 드물게 무덤을 파내곤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 눅9:22, 13:32, 18:33절 등에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을 인정(認定)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에서는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죽은 시체에 향(香)을 바르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몇 몇 여자들도 이 풍습에 동참하길 원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葬事)지낸 바 되었을 때, 여인들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에 향(香)을 바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해지기 전에 향(香)을 준비했다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안식 후, 첫날(주일)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열려 있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여인들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마도 이 예수님의 시신(屍身)을 다른 곳으로 옮긴 모양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안치(安置)했던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의 비싼 부자(富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들이 무덤에 나타나서 24:5-6절)...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직접 찾아와서 일단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이들의 이같은 행동은 이들 역시 여인들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인간 중에 누군가가 사망(死亡)의 세계로 넘어 갔다가 다시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해낼 수 있는 최고의 기록이요, 업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부활(復活)이라고 하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몇몇 사람들이 죽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자들이 있습니다(나사로/회당 장 야이로의 딸). 그러나 그들은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부활의 첫 열매는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로 부활(復活)은 일단 사람이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완전히 죽었다가 완전히 다시 살아나야 하는데, 이때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야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죽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산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확하게 죽음 너머의 세계로 가셨다가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찬송가 169절 *사망의 권세가*
그는 단지 의식이 없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세계에서 엄청난 일을 하시고, 다시 살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죽음 너머의 세계도 인간의 추측이나 공상이 아닌, 분명한 사실이 입증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2:9절)...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Ⅰ.무덤을 찾아간 여인들
24:1절)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위기 때, 여인들의 믿음의 용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자기들도 붙들려서 처형당할 것이 두려워서 모두 숨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이 여인들은 숨지 않고, 예수님이 운명하시자마자 곧바로 장례(葬禮)에 쓸 향품(香品)을 준비해서 안식일이 끝나기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다음 날(주일새벽)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3년간 따르던 제자들은 일제히 숨어서 일체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제자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생각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기도 했습니다(의리를 저버린 비겁한 먹튀들)
잠11:4절)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屍身)에 향품(香品)을 바르려고 무덤까지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거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었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 다른 데로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에 향품(香品)을 바르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매일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들에게 예수님 외(外) 다른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어떻습니까?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 무덤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조금씩 무덤을 찾아가는 횟수가 뜸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을까?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가치(價値)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특히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데, 가장 열심이었던 여자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자는 어떤 여자입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입니다.
귀신이 하나만 들어와도 정신이상이 되어 고통을 받는데, 일곱 귀신이 들렸으니, 이 여자가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았던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일곱 귀신이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이 온전하게 되어 참으로 가치(價値)있는 성도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외(外) 다른 삶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그녀에게는 예수님의 무덤 외에는 갈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을 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을 우리는 생각납니다. 요6:67절)...너희도 가려느냐? 이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68절)...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얼마나 많이 방황했고, 얼마나 무가치(無價値)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되찾았던 것은 너무나도 소중한 자기 자신(自身)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다른 데로 가라*고 해도 갈 데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어디에 가서 이런 *생명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누구에게 가서 그런 가치(價値)있는 삶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 여인들은 예수님 외(外)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에 관해서 두 가지 관점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①열광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죽으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미라(mirra)에 향을 발라 지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이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믿는 제자들이 그렇게도 없었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열광주의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었고, 신비주의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무서운 처형이 그들의 눈에는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조차 빼앗아갈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②막달라 마리아가 자기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요11:25절)..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죽은 오라버니(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체험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수 있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은 살릴 수는 있지만, 예수님 자신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의 비참한 죽음은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의 믿음을 송두리째 가져가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들었던 말씀의 힘이 그들을 지켜 주었던 것입니다.
6-7절)...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장부 남자가 두려워서 아무도 무덤에 가려고 하지 않았지만, 연약한 여인들은 용감하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은 큰 돌을 여인들이 옮기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치워져 있었고, 무덤 안의 예수님의 시신(屍身)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들을 두 번째 놀라게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이 너무나도 억울한 일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까지 어디론가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무덤이 열려 있고, 그 안에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도대체 누가 예수님의 무덤을 열고, 시체를 치워버렸을까? *로마인들일까? 아니면 *예수님을 미워하던 유대인들일까? 아니면 *무덤 주인일까?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도 슬퍼하고, 울었던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마음이 몹시 아팠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군병들이 돌문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돌문을 굴려버리는 바람에 군병들이 놀라서 달아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27:64-66절)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여인들이 본 것은 빈 무덤과 예수님의 시신(屍身)을 쌌던 세마포 옷이었습니다. 요20:7절)...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고 했습니다. 원래 시체를 놓았던 그 위치에서 몸만 옷에서 빠져나간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빈 무덤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빈 무덤은 우리의 모든 죄(罪)가 하나님 앞에서 다 사(赦)하여졌고, 이제 우리에게 다시는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위대한 부활의 빈 무덤이었습니다.
Ⅱ.천사들의 증거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크게 근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인들은 일단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옮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기까지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놀라운 말을 이렇게 했습니다.
5절)...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 말은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무덤에서 찾아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비행기가 추락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에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 아들도 그 비행기를 탔는데, 식구들이 아무리 사망자 명단에서 자기 아들 이름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영안실을 모두 다 뒤져도 자기 아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들은 사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타박상을 입고, 간단한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을 떠나서 집으로 갔기 때문에 사망자 명단에서 자기 아들 이름을 찾고, 영안실을 뒤져도 자기 아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인들이 아무리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屍身)을 찾고, 또 시체를 옮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물어보아도 알 수 없었던 것은 이미 예수님이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세상 어디엔가 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살아나신 후, 어디로 가신 것일까?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후, 곧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영광의 보좌에 가셨다가 곧바로 제자들을 부활체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마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쓸데없이 울면서 산(山)전체를 뒤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여인들이 이런 수고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을 보내어 제일 먼저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게 하셨습니다.
천사들은 부활을 믿도록 하기 위해 6-7절)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나 여인들은 잊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그 말씀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도, 죽으실 수도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그들은 좋은 것만 믿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들의 죄(罪)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생각을 믿지 말고, 철저하게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이 성경대로 이루어지고, 이 성경을 믿는 것이 성경적 올바른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한 대로 다시 사신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다시 사셨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중요한 것이 나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고전15:12절을 보면 *부활이 없다*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5:14-19절)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 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33절)속자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58절)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여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Ⅲ.제자들에게 알림
여인들은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천사를 통해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여러 명이었습니다. 즉 막달라와 요안나와. 야곱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인들로부터 이 엄청난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사탄의 억압(抑壓)중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가장 기쁜 *해방의 소식*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일제 36년 동안 압제(壓制)를 받다가 드디어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 같은 *해방의 기쁜 소식*입니다. 제가 *해방동이*입니다,원래 복음(福音)이란 *기쁜 소식* 이란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빚을 갚지 못해 종이 되었는데, 누군가가 그 빚을 다 갚아 주었을 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가 빚을 갚았다는 사실을 믿으면, 즉시 자유(自由)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罪)에 빠진 인간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입니다. 어떤 죄인(罪人)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면, 그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죄인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이 *기쁜 소식*을 듣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죄(罪)의 생활은 끝나는 것입니다.
요5:24절)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러나 감수성이 둔한 남자들, 즉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11절)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제자들은 여인들의 증거인 빈 무덤과 천사들의 증거를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만큼 그들의 마음이 둔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배운, 그들도 성령님의 깨우침이 없이는 깨닫는 것이 꼭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들은 말씀도 깨닫지 못하고, 들은 말씀도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자기 힘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인간의 생각은 아주 유치한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일이 가르쳐주고, 보여주지 않으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어지십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성령님께서 우리를 믿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모두 꼭꼭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현장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12절)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는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여자들이 이상한 소리한다고 의심(疑心)하지 않고, 무덤으로 직접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세마포만 있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겼다*는 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시신(屍身)을 옮겼다면, 세마포를 벗기고 알몸으로 가져가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신앙을 셋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최초로 빈 무덤을 발견하고,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무덤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장 먼저 빈 무덤을 찾게 되었습니다.
둘째 여인들의 증거를 듣고 무덤을 찾아간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이들은 직접 찾아가 세마포 옷을 보고 왔습니다.
셋째 이 두 사람의 증거를 듣고도 부활을 믿지 않고 계속 숨어 있던 제자들입니다.
Ⅳ.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사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신 후 곧바로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듣고 믿기만 하면, 죄의 올무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온 세상이 들어야 할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오늘날도 여자 성도들이 많이 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남자 성도들은 둔하기 때문일까? 성도들이 부활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과거에 얽매어 살게 됩니다. 즉 *믿는 다* 고 말하면서 여전히 낙심하고, 후회하고, 두려워하고, 연약함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 과거에 얽매인 사람은 낙심 때문에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즉 새로운 길도, 새 소망의 길도 보지 못합니다.
어느 교회의 70-80세 권사님들을 소개합니다. 그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과거를 이야기 하는 분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모두가 미래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기 위해 꿈을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 부활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부활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그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들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모이면, 또 세상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는 내용들이 무엇입니까?(돈, 부동산 투기, 출세)
사도 바울은 골3:12절)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에것을 생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불타는 심령을 갖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폭발하여 역사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지금도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의 내면(內面)을 수술하십니다.
낙심이 있다면, 그곳을 소망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있다면, 그것을 긍정적인 사고(思考)로, 과거의 모함(謀陷)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미래의 소망으로 변화시키십시오.그리고 패배 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은 하늘에 비-전 (vision)있는 사람으로 변화 시키는 것이 곧 부활의 주님이 하시는 사역(事役)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부활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삶이 변하고, 뜨거운 성도, 꿈이 있는 성도로 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찬송가 489장 *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진리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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