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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서울예술고등학교 서양화과 졸업 1986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1995 나고야 세계인테리어대전 한국 대표 현재 개오망디자인 대표이사 한국실내건축가협회 정회원 한국실내디자인학회 정회원 1993 KOSID‘BEST DESIGN AWARD OF 1993’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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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우연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전에 필연적인 시간의 긴 흐름이 있었다. 사춘기 때 사귀게 된 친구 김영민, 전시형 -서울예고 동창. 모두 어릴 때부터 ‘그리기와 만들기’를 유일한 ‘할꺼리’로 알고 살아온 괴팍한 놈들이다. 대학 3년 가을쯤 으로 기억된다. 전시형의 큰형이 당시 방배동 카페 골목이 막 형성되던 시기에 ‘회색도시’란 카페를 우리끼리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원래 전시형은 그 이전에도 이대 앞에서 카페를 만든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주도로 ‘회색도시’ 가 만들어졌다. 내가 담당한 부분은 약간의 공간 분할과 붉은 색 카운터. 전시형이 주도한 이 프로젝트의 결과는 대성공이 었고 ‘회색도시’는 꽤 유명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셋은 인테리어디자인이란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평소와 다름없 이 헐렁하게 술 마시고 기타 치며 늘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았다. 이제사 생각해 보니 그 시절 우리나 라에는 정식 인테리어디자인 전공 학과조차 없었다. 지금부터 약 20여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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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이다. 압구정동이 막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그곳에 ‘뮤즈’라는 카페를 김영민, 전시형이 완성하고 난 후였을 때의 일이다. 내가 참여한 것은 커다란 샤워기에 모니터를 매입해서 물 대신 빛이 나오게 하는 조형물 제작이 었다. 오픈 전날 저녁, 조용한 어둠 속에서 오직 셋만이 남아서 천장만을 바라보며 바닥에 누워있을 때였었다. 갑자기 문 이 열리면서 ‘이상한 사나이’가 실내로 들어섰다. 첫 마디는 “회색도시 팀이 맞는가? 한달 반을 수소문해서 오늘 겨우 찾 았는데 정말 회색도시 팀이 맞는가?” 였다. 이 ‘이상한 사나이’의 외모는-실례를 무릅쓰고 말한다면-어딘지 모르게 카바레 의 지배인 같은 모습을 연상케 했다. 심하게 볶은 머리를 약간 부풀게 빗질을 했으며 뚱뚱한 몸매에 일자바지와 딱 붙은 티셔츠를 입고 끝이 뾰족한 작은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잘 닦여져서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났다. 그는 잠시 후 어둠에 눈이 익은 듯 오픈 전의 ‘뮤즈’를 휙 둘러보더니 “맞구먼! 끝내 주는데!”라고 하면서 당장 이태원에 같이 갈 수 없겠냐고 물어 왔다. 외모에 마음이 언짢아진 우리는 처음에 꽤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는데 그 후 겪으면서 느꼈던 것은 외모와는 전혀 다르게 그렇게 사람 좋고, 매너가 좋을 수 없었다. 이 분의 도움으로 김영민, 전시형이 선보인‘도시선언’은 그 후 종로와 경희대에 체인점을 내게 되었고 이때 우리 셋은 본격적인 인테리어디자인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당연히 팀 이름도 필요하 게 되었다. 도시선언 사장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것은 이 분이 우리를 찾아내고, 믿고 아껴 준 덕분에 비로소 본격 적인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테리어디자인을 하기 전, 그러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 우리 셋은 화실을 만들고 아예 함께 먹고 함께 잠도 자며 생활하기로 하였는데 그때 화실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다. 내가 제안한 것은 서울예고 시절 각자의 별명 첫 글자를 따서 지은 ‘개ㆍ오ㆍ망’-전시형 별명‘개’, 김영민 별명‘오리’, 나는 ‘망둥이’-이란 이름이었고 둘은 B&B를 주장했다. 그 속뜻은‘X지 봐라’ 였으나 그 후 화실에 오는 사람들은 ‘바보 봐라’의 뜻으로 알고 있었다. 그 후 우리의 이름은‘개오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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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도시선언’이후에도 우리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아주 자유롭게 밑도 끝도 없이 이어져 갔다. 그때 우리 팀은 카 페‘릿츠’,‘샤갈’,‘OPS’,‘노팅힐빌리지’, ‘허드슨호크’라던가 전통음식점‘용수산 청담점’, 디스코텍‘월드팝스’ ‘시에스타’,‘바시아’, 안경점‘스트라우스’, 보석점‘디아망’등을 디자인했지만 여전히 만사가 무계획하였다. 무계획한 것도 있었지만 도무지 한번 개발한 디자인을 다시 가다듬어, 보다 발전된 디자인 언어로 써먹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늘 새로운 형태와 느낌을 디자인하는 것만이 우리들 존재의 이유가 된다고 믿고 있는, 체질적인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순수에 대한 열정, 그리고 포기할 수 없는 영원성에 대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었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의 내게 있어 디자인은 보다 현세적이고, 실용적인 구체성으로 인식되지만 그때는 순수미술 전공자로서의 기질적 성 향을 떨칠 수 없었다. 실제로 우리 셋 모두가 서로 뒤질세라 공사 완성 단계에 있을 때조차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 하나로 무자비하리만큼 부수고 다시 시작하기를 몇 차례씩 반복했기 때문에 우리가 나타나면 현장에서는 “구청 철거반 나왔다”고 수군거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하는 분들이나 클라이언트에게는 절대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양반 디자이너’란 소리 도 함께 들었다. 결과는 늘 빈털터리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서로를-어쩌면 보다 높은 가치를-확인하는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에 관한 구체적인 철학은 없었지만 늘 새로움이 있었다고 생각되며 특히 완 성된 후 영업이 무지하게 잘 되었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무슨 명절만 되면 곳곳에서 작은 선물들을 보내 왔다. 때 가 되면 클라이언트가 보내 오는 선물! 이것 말고도 개오망에는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신화가 있지만 정말 지면 관 계상 다 쓸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그 무렵-프로젝트가 많아지며 그리고 처음으로 주식회사와 비즈니스가 시작되면서, 우리들에게 조금씩 변화가 왔다. 우선 각자가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완성해야 했으며, 매뉴얼화 된 작업의 반복으로 인한 계획된 이미지의 통합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상당히 장식적이고 핸디 메이드적인 요소가 자주 표현되곤 했는데 전국적인 SHOP의 경우 보다 절제되고 미리 계획된 디자인이 요구되어졌던 것이다. 이때부터 서로 얼굴 볼 새 없이 바쁘게 일하며 보냈다. 중요한 사실은 그때까지 함께 어울려 만들던 과정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던 개오 망의 기본 질서가 무너지고 각자 프로젝트를 혼자 진행시켜야 되었던 것. 그리고 이제 디자인이 점차 일로써 인식되기 시 작했다. 그런데 1년 후 결산은 손실 억! 그전에도 손실은 있었다. 그러나‘용수산청담점’과‘월드팝스’를 끝낸 후의 손실과 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서로의 얼굴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관리 업무의 중요성을 억울한 표정으로 인정했다. 그때 초빙해 온 분이 지금은 고인이 된 이완형님. 개오망의 제2대 대표이사이다. 그리고 개오망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적 자 경영이 흑자로 돌아섰다. 원래 1대 대표이사는 김영민이였다. 어느 날 서류상의 필요 때문에 가위, 바위, 보를 해서 김 영민이 졌고, 그래서 그가 대표이사를 맞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쓰 발” 그러면서 언제나 처럼 입을 오리주둥이 처럼 내밀고 관공서를 왔다 갔다 했던 것이다. 어느 날 김영민이 회사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신앙과 자 유. 7년 전의 일이다. 나는 3일 동안 거의 잠도 자지 않고 함께 해야 할 필연성을 그에게 설득했었다. 그러나 그는 떠났 다. 필연적인 헤어짐을 온몸으로 말하듯, 그리고 작년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전시형이 떠나게 된 표면적 이유는 정확 치가 않다. 그는 별 말이 없었다. 그냥 “이제는 혼자 한번 해보고 싶다”가 전부였었다. 5년 전 그러니까 김영민이 떠나고 2년 후의 일이다. 그 후 그는 “전 디자인”을 설립해서 지금까지 경영해 오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정말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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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공간에서 인테리어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분명한 효과가 있을 것, 즉 장사 잘 되고 손님들이 오랫동 안 이용해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장기적인 목표는 브랜드의 이미지 정립과 유지 및 향상에 있다. 따라서 브랜드의 개념 정리와 소비자 분석이 으뜸이 되며, 디자이너의 개성은 그 다음이 된다. 또 한 가지, 개오망의 행동 방침에 ‘위험을 무릅쓰 고 창조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고객의 돈으로 위험하고 어설픈 순수 예술가가 되기를 경계해야 한다. 모든 디자이 너는 당연히 좋은 디자인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커머셜 아트에 있어서 프로의 진정한 가치는 브랜드와 맞는 디자 인을 얼마나 정확하게 제안하는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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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점 스트라우스-멋진 성공이다. 같은 장소에서 리뉴얼 했는데 오픈 두 달 후의 매출액이 전국 매장에서 1위임을 안경 사 협회에서 공식 발표했다. 리뉴얼 전 보다 2.5배의 매출 상승. 인테리어디자인의 위력을 극적으로 보여 준 사례라고 생 각한다. 패션점 타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갤러리아 백화점 오픈 후 타 브랜드의 10배 이상의 매출이 계속 되면서 백 화점이 생긴 이래로 최고의 매출을 이룩했다. 안경점 스트라우스가 특히 좋은 이유는 첫째, 매장이 작다. 둘째, 안경점으로 서는 국내 최초로 고객중심의 마케팅 방법을 제안. 셋째, 마음껏 디자인했다. 넷째,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클라이언트가 완 벽하게 신뢰를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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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지금까지 혼자 수행한 프로젝트 중, 월간 인테리어지에 화보로 나왔던 것들만을 한 번 간추려 보았다. 카페 OPSㆍ 허드슨호크ㆍ노팅힐빌리지ㆍ삿포로런던ㆍ라세나ㆍ인터페이스053ㆍ해뜨는 집(카페 및 베이커리 솔레일, 레스토랑 메종, 바 알로알로), 안경점 스트라우스, 디스코텍 시에스타, 패션몰 파시플라자ㆍ워너비, Fashion Exchange, 용수산 삼청점, 패션 숍 타임ㆍ마인ㆍ시스템, 부산 크라운호텔 등이다. 어느 것 하나같지 않다. 글쎄다. 내가 생각한 작품 변-그렇지 않아도 매 일 아침에 열심히 화장실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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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점-순수미술에 있어 표현의 은유와 상징성은 기본 요구이다. 공간과 평면, 기능성과 경제적 측면을 고려한 가장 합리 적인 디자인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인테리어디자인은 한 지역, 한 시대의 문화적 총합으로서 그를 표현하는 은유와 상징을 요구한다고 본다. 나쁜점-지나치게 개인적인 취향, 다르게 말하면 최소한의 객관적 상황마저 즉 브랜드가 요구하는 기본 사항마저도 개인적 표현 욕구에 의해 무시하려는 성향. 착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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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스탁’과 그리고 `존 모포드’필립 스탁의 작품 중 LA에 있는 호텔‘몬드리안’은 그동안 그가 해 온 아방가르드한 디자인-그의 말에 의하면‘돈키호테처럼 황당한’새로운 공간 체험-이 현재 지속되고 있는 문화적 조류 즉 모던 속의 내 추럴, 미니멀 그리고 그의 특성이기도 한 전위적 표현이 훨씬 성숙된 야함으로 정리되면서 이때까지의 그의 작품과는 조 금 다른 가볍고, 화려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또한 존 모포드의 도쿄 소재‘PARK 하얏트’의 경우 특히‘뉴욕 그릴’은 절제된 디자인이 갖는 최고의 품격과 역설적인 풍요로움, 고객의 접근 방식을 새롭게 하는 힘있는 공간 설정 그리고 소재 의 선택에 관한 깊은 애정이 감동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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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을 통해 직접 느낄 수 있으면 가장 좋다. 배낭을 메고 햄버거를 먹으며 장소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이 체험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저녁시간에는 정장을 하고 오페라나 연극을 보고 나이트클럽에서 재즈, 하드락을 듣는다. 또는 최고의 호텔 과 레스토랑 화장실을 이용하며 고급 브랜드의 상품을 사용해 보는 것. 중요한 체험이다. 갑부처럼 호사스럽게 소비하란 게 아니다. 비용을 합리적으로 지출하되, 적절한 배분을 통해 상급, 중급 또는 저급 문화의 적절한 소비자가 되어 몸소 체 험해야 된다는 뜻이다. 디자인은 다양한 문화 속에서 그룹화된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기본 바탕 위에서 시작된다. 디자인의 실체란 무엇일까? 디자인은 문화의 총합으로서 계층간 라이프 스타일에 따른 지역적, 시대적 적합성, 다르게 말하면 적절 한 시점에 맞는 타당한 기능과 아름다움을 제안할 때, 그래서 고전적인 미학의 개념이 아닌 실생활 속에서 즐겁게 사용되 어질 때 비로소 의미 있는 디자인이 성립되며 이와 같은 기본 바탕 위에서만이 개인적 취향의 표현, 나아가서 창조적 역 량을 가능케 하는 디자인의 장을 진정 얻게 된다. 같이 느끼고, 다르게 느껴라. 그것이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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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운 호텔 ] |
첫댓글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정말 입사 하고팠던 회사였어요 지금도 한번쯤은 개오망에서 일하고 싶네요 인상 깊네요
개오망디자인..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