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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굴목이재 개울물소리와 단풍지는 풍경
최 화 웅
투석치료가 비는 날 순천 조계산 굴목이재로 산행을 떠났다. 굴목이재 트레킹은 이번이 다섯 번째다. 일행은 산정회(山政會) 종길, 종환 선배와 영민과 우리 부부, 그리고 옵서버로 영권 등 여섯이다. 팔순을 넘긴 두 선배와 고희에 접어든 두 후배가 2018년 11월 9일 금요일. 새벽 6시 14분 부전시장을 여는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목포행 완행열차를 탔다. 간밤에 퍼부은 비로 새날은 더 없이 맑고 상쾌했다. 부전역을 떠난 열차는 평균시속 52km, 최저시속 30km의 편안한 속도로 달렸다. 기차여행은 언제나 설레고 즐겁다. 나는 삶은 계란과 합동사이다가 그리운 어린 날의 추억을 되살리는 기차여행을 좋아한다. 6·25 피난열차를 탄 이후 수학여행 때 불국사를 다녀왔고 비 내리는 날이면 동해남부선을 타고 기장과 포항을 돌아다녔다. 젊은 날 일 년에 한두 번은 목포행 완행열차를 타고 새벽에 구례에서 내려 지리산 피아골을 오르곤 했었다. 기자로 활동하던 때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해주 하바로브스크까지 오가며 자작나무숲과 아무르강에 취했었다. 오늘 다시 탄 목포행 완행열차는 사상, 구포를 거쳐 삼랑진까지 경부선을 따라 올라가서 서쪽으로 낙동강을 건넜다. 입동을 지난 들녘에는 어느 틈에 고즈넉한 늦가을 정취가 무르익어 새로운 계절, 겨울을 포옹하고 있었다. 완행열차는 멈춘 듯 조용히 흔들리며 나아가는 느림의 미학이 매력이다. 김해 한림과 진영역 부근의 터널을 지나 돌아가는 굽잇길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먼동이 트자 낙동강변 따라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는 겨울풍경이 내려앉았다. 차창으로 스치는 들녘이 모든 것을 내어준 듯 텅 비었다.
열차는 철길 따라 늘어선 크고 작은 정거장을 지나 반성역과 갈촌역에 들어서자 마지막 불타는 낙엽을 떨군 나목들이 삶의 이유를 나직이 속삭였다. 열차는 진주와 북천, 횡천을 지나 경상도의 끝자락 하동포구로 미끄러져 갔다. 차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섬진강 물길은 지리산의 정기를 윤슬로 피우며 멈춘 듯 흘렀다. 열차가 자벌레 자질하듯 섬진강을 뛰어넘어 전라도의 길목 진상으로 접어들자 순후한 산세 따라 옥곡과 골약, 광양이 차례로 이어졌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열차 안은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정겨운 이웃으로 어울린다. 이제 곧 그리운 순천에 다다르나 보다. 단출한 편성의 1941호 목포행 완행열차는 남도삼백리를 달린지 3시간 20여 분 만에 슬픈 역사의 땅, 순천에 닿았다. 순천역에서 택시를 타고 다시 선암사로 향했다.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난 조정래 소설가는 대하소설『태백산맥』에서 “순천에서 인물 자랑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 말고, 벌교에서 주먹 자랑 말라.”고 했다. 순천은 안개의 감성을 그린 김승옥의『무진기행』작품현장이기도 하다. 불자들은 조계산 산길 따라 걷는 순례길을 '천년불심길'이라고 부른다. 필 쿠지노(Phil Cousineau)는『순례(Pilgrim)』에서 "여행이 여유와 쉼을 찾으려는 수고라면 순례는 잃어버린 나의 영혼을 되찾으려는 머나먼 여행의 출발이자 영적 도전“이라고 했다. Pilgrim의 뜻은 ‘들판을 가로질러’라는 의미다. 깊은 계곡에는 바람이 일 때마다 흩날리는 낙엽과 청아한 개울물 소리가 나를 돌아보게 했다. 조계산(曹溪山, 884.3m)의 동쪽에 태고총림의 천 년 사찰 선암사, 서쪽으로는 조계종(曹溪宗)을 대표하는 성보사찰 송광사가 자리 잡았다.
삭풍 부는 겨울밤 간이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던 시인 곽재구의 시심이 연인들의 거침없는 고향이다. 시인 정호승은 ‘선암사 해우소, 뒷깐’을 두고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선암사를 지나 굴목이재로 접어드는 길은 맑고 청정한 개울물소리에 갈색낙엽이 깔려 그지없이 아름답다. 굴목이재 초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 승선교(昇仙橋)와 누각, 강선루(降仙樓)가 선녀의 이미지를 품었다. 왼쪽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이 산사로 들어오기 전에 해맑은 반야의 지혜로 어리석음을 씻어준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산길에서 명상에 들기 좋은 계절이다. 승선교는 계곡의 암반 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모습으로 쌓은 보기 드문 건축물이다. 승선교는 신선의 세계로 오르는 곳이고 강선루는 신선이 내리는 곳이리라. 일주문을 대신한 강선루가 성(聖)과 속(俗)을 가르는 경계로 드나드는 대중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강선루 뒤쪽으로 삼나무 숲이 울창하고 작은 연못 삼인당의 갈림길에서 경내로 들어서는 길과 굴목이재로 가는 길이 나누어진다. 왼쪽으로 접어들어 대승암·송광사으로 방향을 잡고 부도탑을 지나면 신선이 당도했다는 임선교(臨仙橋) 건너 억새 무성한 낙엽길에서 신선을 만날 것 같다. 송광사의 개산 당시에는 송광산이라 하였는데 그 뒤 조계종(曹溪宗)의 중흥 도장(道場)으로 삼으면서 조계산으로 산 이름마저 불심이 바꾸어 놓았다. 낙엽 오솔길은 오르막으로 대승암까지 이어진다. 조계산 자락의 어깨를 타는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고갯길이 '굴목이재'다.
산사 초입의 숲길은 참나무, 서어나무, 밤나무, 떡갈나무, 도토리나무, 편백나무, 삼나무가 터널을 이룬 선암사 총림(叢林)이 하늘을 가린다. 기어이 선암사 쪽을 들머리로 잡는 이유는 산길이 순후하고 봄에는 600년 묵은 고매화가 환하게 피고, 가을이면 금목서와 은목서의 향기가 낙엽길을 향기롭게 하기 때문이다. 길 왼쪽은 하늘 높이 솟은 삼나무가 숲을 이루고 발밑으로 밟히는 낙엽 깔린 흙길이 카펫처럼 푹신하고 부드럽다. 오솔길이 한참 동안 이어지다 암자 입구에서 만난 은행나무는 낙엽을 떨구며 청정한 늦가을의 참맛을 선사한다. 선암사를 떠나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옛 숯가마터 표지판이 나오고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전설이 깃든 호랑이 턱걸이 바위를 지나 처음 만나는 고개가 굴목이재다. 하늘이 열리기 시작하는 고갯마루에 우주가 텅 빈 공간으로 열린다. 굴목이란 이름은 '골짜기를 가로막은 나무'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굴목이재로 가는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르고 또 올랐다. 돌길이 끝나고 능선을 돌아 넘으면 낮은 목 깊숙이 엎드린 자연부락이 송광면 장안리다. 여기에 조계산 굴목이재의 명물 보리밥 집이 있다. 굴목이재를 넘는 이들에게 그냥 '보리밥집'으로 통하는데 식당 이름도 '조계산보리밥집' 또는 ‘보리원’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보리밥 집으로 접어드는 깔딱고개에서 힘에 부친 나를 걱정한 일행이 산행을 포기하도록 권했다. 산행을 한 이후 중도에서 포기하고 출발지로 돌아온 일은 처음이다. 돌길이 가팔라서 내가 너무 힘겨워 하자 일행들이 무리하지 말고 선암사로 되돌아가자고 제의한 것이다.
강행하다가는 건강에 무리가 오고 산행시간이 지연되어 돌아갈 열차마저 놓칠지 모를 일이었다. 일행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지만 꼭대기에 올라 멀리 펼쳐지는 원경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종길 선배는 발걸음만 재촉하는 일행을 향해 “발걸음을 멈추고 이 좋은 물소리 좀 듣고 낙엽 떨어지는 풍경을 즐기자.”고 촉구했다. 이번 산행에서는 순천 선암사가 우리나라 대표 산사로 지난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만추에 낙엽 지는 가을 산길을 내려오는 미완의 산행에서 효봉(曉峰) 선사의 “니나 잘해”를 말없는 화두로 삼았다. 효봉 선사는 산을 닮은 스님이라고 전해진다. 금강산에서 내려와 송광사 주지를 지낸 우리나라 불교 개혁의 신새벽을 연 고승으로 열반하신지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명문대학 출신 판사였다. 그러나 시형선고를 내린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엿판을 메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나이 서른여덟에 늦깎이 중이 된 그는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을 때 “중 벼슬은 닭 벼슬만도 못한 것.”이라며 직위와 명예를 마다했던 일은 우리네 세상살이에 큰 울림으로 전해진다. 그의 삶은 금욕과 수행이 빛을 잃어가는 종교계에 명예와 돈, 자리를 탐하는 추악한 시대에 던지는 경종이 아닐까? 또한 효봉 선사는 평소 남의 험담을 삼갔다고 한다. 어느 날 함께 산길을 걷던 수좌가 “술 마시고 여자를 가까이 하는 스님들을 가려내어 엄벌하심이 어떻습니까?”하고 여쭙자 “술 마시고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이 나쁜 짓이다. 이 말이더냐?”하고 되묻더란다.
그 수좌가 “예, 그렇습니다.”하자 효봉은 다시 “그럼 남의 험담만 하고 다니는 사람은 어떠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효봉은 대답이 없는 수좌에게 한참 뒤에 “니나 잘 하시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지 않던가. 인구에 회자하는 효봉 선사의 법문 “니나 잘해”를 묵상하며 걸었다. 굴목이재 보리밥집을 포기한 일행은 호랑이 턱걸이 바위 아래에서 집에서 준비해온 김밥과 과일로 즉석 간이식탁을 차렸다. 한결 여유가 생겨 선암사 주차장으로 내려온 일행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인근 식당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리 부부는 동동주와 도토리묵, 파전을 시켜놓고 주위의 나무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의 정취에 취한 채 미안한 속마음을 일일이 전했다. 오후 3시 30분 순천역으로 가는 16번 시내버스가 출발을 재촉했다. 5시 20분 부산행 열차 시각을 맞추느라 굴목이재 산행 때마다 땡초 소주를 즐겨 마시던 순천댁 밥집 ‘날마다 좋은 날’에도 들르지 못했다. 대신 순천역 앞 시장에 들러 가을에 거둔 감과 토란을 구경하고 후덕함 속에 묻어나는 짙은 유자향을 맡을 수 있었다. 부산에서 서울과 신의주를 거쳐 시베리아 열차와 이어지는 날 유럽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저녁 8시 37분 어둠이 깃든 부전역에 도착한 일행은 서면에서 맛있는 저녁을 나누며 다음 모임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하리라’라는 우리네 속담이 자꾸만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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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지요.
가을 아름다운 풍경을 잘 느끼고 갑니다.
국장님 건강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뒷다마에 남의 집문제에 끼어들어 대추 놓아라 밤 놓아라 하며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를 주위에서 자주 본답니다.
그럴 때마다 '지나 잘하지'라고 말하고 싶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