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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지 말아요(삼상1;9-18)==2017년 추석명절 감사예배
어느 신혼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시어머니가 맛있는 김치를 해가지고 아들 집에 갔습니다.
아파트 문이 열려 있기에 조용히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아들 무릎에 누워 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야... 자기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물론 당신이지”
“다음은?”
“우리 아이들”
“세번째는?”
“장인, 장모님”
“네번째는?”
“우리 집 강아지”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마지막 다섯 번째가 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시어머니는 너무 서운하고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김치를 경비실에 맡겨두고 이런 메모를 남겨 놓았습니다.
“1번아 잘 먹어라. 5번은 간다.”
사람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서운하게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일부러 서운하게 하는 것이야 아니지만 전혀 뜻하지 않게 서운함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추석명절과 연휴를 맞아서 서운함이 있다면 그 서운함을 풀어야 합니다.
서운한 감정을 푸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라야 합니다.
흔히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여인을 기도의 여인이라는 별명으로 부릅니다.
그러면 기도의 여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한나 여인이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 있다면 그 요인이 무엇일까요?
그 당시 사회 문화적인 배경에서는 1부 다처제는 일반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한나 여인의 남편 엘가나가 한나 여인 외에 브닌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집 살림 하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하면서 비난할 수 있었지만, 고고고고시대에는 일반적인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한나 여인은 자녀를 출산하지 못한 반면에 브닌나 여인은 여러 자녀를 출산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생겨난 문제입니다.
여인은 결혼하여 자녀를 출산해야만 여인으로서의 자존감, 가치관, 명예가 성립이 됩니다.
여인은 결혼하여 자녀를 출산하지 못하면 여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자긍심도, 명예로움도 없어지게 됩니다.
여인은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버지에게 속해 있고, 결혼하면 남편에게 속해 있습니다.
결혼하여 남편에게 속해 있다는 말은 남편의 자녀를 출산해야만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출산해도 딸이 아니라 반드시 아들을 출산해야 합니다.
아들이 없고 딸만 있게 되면 그 딸에게도 상속권이 주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남편의 형제들에게로 그 상속권이 넘어가버립니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딸에게는 상속권이 주어지지 않고 아들에게만 상속권이 주어집니다.
이 상속권이라는 것은 단순히 세상적인 생각으로 재산 상속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상속권은 가장(家長)으로 가지는 재산 상속권과 아울러 하나님 안에서 축복권, 신앙전수권, 자녀훈계권 징계권까지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지 못하면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 출산해야 합니다.
만약에 남편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계대법(繼代法), 수혼법(娷婚法)에 의해서 시동생과의 관계에서 남편의 상속권을 가진 아들을 출산해야만 됩니다.
이 법은 성경에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4장에 등장하는 수가성 여인도 이 법에 걸린 여인입니다.
흔히 수가성여인을 남자를 밝히는 창녀라고 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절대로 창녀가 아닙니다.
계대법에 걸려서 죽을 고생하는 여인에 불과합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도 이 법에 따라서 시동생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출산하려고 합니다.
모압 여인 룻도 이 법에 의해서 진행되어집니다.
사두개인이 예수님과 부활에 대해서 논쟁하면서 등장하는 한 여인과 7형제 이야기도 이 계대법, 수혼법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브닌나 여인은 여러 자녀를 출산했기 때문에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한 여인이라는 명예가 따라옵니다.
반면에 한나 여인은 자녀를 출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여인이라는 수치심이 따라옵니다.
그 당시 명예와 수치라는 두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만 되는 중동지역의 사회문화적인 특성 때문에 브닌나 여인은 명예로운 여인이 되었지만, 한나 여인은 수치스러운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남자를 각각 자신의 남편을 섬기는 두 여인은 은연중에 서로 헤게모니싸움, 주도권싸움을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브닌나 여인은 자신이 낳은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자연스럽게 주도권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브닌나 여인은 집에서 자연스럽게 자녀들 이야기를 하게 마련입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높은 지체의 사람이나 낮은 지체의 사람이나 가릴 것없이 한결같이 자녀양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갑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엄마가 자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어쩌면 남편이나 시댁에 대한 이야기보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합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자신이 낳은 자녀가 건강하게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함을 느끼며 합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자신이 낳은 자녀가 아프거나 잘 되지 않을 때, 가슴앓이를 하면서 자신이 아픈 것처럼, 자신이 잘 안 되는 것처럼 우는 여인이 바로 엄마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브닌나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낳은 자녀들을 키우는 이야기를 하면서 삽니다.
브닌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야 되는 한나 여인의 입장에서는 너무너무 브닌나 여인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얄밉기도 한 것입니다.
브닌나 여인이 아이 때문에 한 숨 못 잤다고 하는 말이, 아이 때문에 속상해 죽겠다는 말이, 아이가 똥오줌을 제대로 가리지 못해서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는 말이 한나 여인에게는 가슴을 후비며 아프게 만드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자녀를 낳았으면 자신도 자녀들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텐데...
나도 아이가 싼 똥냄새도 맡아봤으면 좋겠는데...
나도 아이들이 이불에 지도를 그리는 것을 봤으면 좋겠는데...
나도 아이들이 아파서 울고 있을 때 내 품에 꼭 안아서 같이 울어봤으면 좋겠는데...
브닌나 여인이 일부러 한나 여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녀를 출산하지 못한 한나 여인은 모든 것이 부럽고 대단해 보입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못마땅하고 가슴을 아프게 하는 가시로 콕콕 찌르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은 브닌나 여인보다 한나 여인이 훨씬 더 많이 받으면서 삽니다.
남편의 사랑이 아무리 높고 위대하고 좋아보여도 자녀를 출산하여 자녀를 키우면서 느끼는 모성애의 사랑에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엄마가 자녀를 낳아서 키우면서 느끼는 모성애라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우면서 모성애를 느끼는 여인은 자녀를 낳지 못하고 모성애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에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나 여인은 모성애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한나 여인은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 모성애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싶은데 그 사랑을 느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투정을 부려보기도 하고, 브닌나 여인에게는 여인으로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인 시기심, 질투심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나여인은 아무리 남편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면서 산다 해도 엄마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 모성애를 느끼는 사랑을 받는 것에 비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단합니다.
남편 엘가나는 레위지파 고핫자손의 후손인 고라의 후손이기 때문에 실로 성막에 올라가서 제사드릴 때, 찬양하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정해진 날짜에 실로 성막으로 올라갑니다.
이 때 한나여인도 동행합니다.
한나여인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딱한 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한나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가슴 저리게 토해내면서 아룁니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엌 엌’하면서 아픈 가슴을 토해냅니다.
자신이 처한 처지가 너무나 딱하고 기가 막혀서 한나 여인은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서 통곡은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 지, 옆에서 보는 사람의 눈에는 마치 정신 나간 여자처럼 보입니다.
술에 취해서 정신이 나간 여자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처한 처지가 너무나 기가 막하고 딱한 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하나님만 멍하니 바라보면서 ‘엌 엌’통곡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나여인은 한없이 통곡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백성들 때문에 통곡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지도자가 없고, 진정한 제사장이 없고,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백성들이 없는 것을 보시면서 통곡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지도자, 새로운 제사장, 새로운 백성을 새롭게 세우시려고 계획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엘리제사장으로는 하나님께 정결한 제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엘리제사장 가문을 폐하고, 하나님께 충성된 다른 제사장을 세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온전히 제사드리는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히브리민족을 이끌어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서 중동지역의 잡다한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한없이 통곡하면서 이제 하나님께 온전하고 정결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언약백성을 다시 세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낳지 못해서 성막으로 올라와서 울며 통곡하는 한나여인에게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한나여인의 태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나 여인의 태를 생각하시고 기억하시면서 사무엘을 잉태하여 출산할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면서 한나 여인도 하나님의 사랑, 모성애의 사랑을 직접 느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실로성막에서 자라게 하면서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 신령한 세계를 보여주면서 사무엘을 통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히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들고,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백성, 제사장의 나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축복해 주시는 백성으로 세워갑니다.
그러면 한나 여인이 실로성막으로 나와서 기도하는 기도의 여인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자기 자신의 딱한 처지, 수치심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딱한 처지, 기가 막힌 처지를 깨닫지 못했다면 한나 여인은 실로성막으로 올라갈 마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브닌나 여인 때문입니다.
브닌나 여인이 자녀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모습이 한나여인으로 하여금 실로성막으로 올라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심어주었습니다.
한나여인이 여인으로 태어나서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시피 받으면서 사는 것에 만족했다면 기도의 자리로 나올 이유가 없어지게 됩니다.
또한 브닌나 여인이 자녀들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기도의 자리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여인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서 기도의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과 아울러 브닌나여인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한나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계시는 실로성막으로 올라가서 제사드리며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여인으로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실로성막으로 올라가서 기도함으로 자신이 그렇게도 갈망하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모성애의 사랑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통곡하고 계시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나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자신의 문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어쩌면 원수처럼 여길 수 있는 브닌나 여인은 고마운 사람입니다. 감사를 드려야 될 대상입니다.
자신이 기도의 여인이 되고 후에 사무엘을 낳고 훌륭한 지도자의 엄마가 될 수 있었던 근본 요인이 브닌나에게 있었습니다.
소위 성공적인 기도의 여인, 믿음의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브닌나 여인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한나 여인에게 있어서 브닌나 여인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도록 해 주신 고마우신 여인입니다.
브닌나 여인이 아니었다면 성막으로 올라오지도 않고, 기도의 여인도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시기, 질투하면서 온갖 욕을 쏟아 붓는 대상이 아닙니다.
한나 여인에게 있어서 브닌나 여인이란 옆에 있어 줌으로 고맙고 감사하고 칭찬해 주고 사랑을 보여주어야 되는 여인입니다.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우리들 주변을 살펴봅시다.
우리들은 누군가 때문에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울고 통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은 그 누군가를 원망하고 온갖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은 그 누군가 때문에 이렇게 처참하고 처량하게 살고 있다고 하면서 모든 실패의 원인을 그 누군가에게 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누군가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들은 그 누군가 때문에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그 누군가 때문에 더욱 더 겸손하게, 겸허하게 우리들 자신을 낮추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들은 그 누군가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기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들은 그 누군가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들은 그 누군가 때문에 잘 되는 일들도 많습니다,
‘잘 안 되는 일만 있어.’하는 생각의 터널을 약간 바꾸어보면 오히려 그 누군가 때문에 오히려 잘 된 일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누군가 정치를 잘 못 했기 때문에 누군가는 대통령이 되어 온갖 권세를 부리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정치를 잘 못 한 그 누군가는 원망이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정치를 잘 했다면 자신은 절대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정치하는 어떤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사회에서, 우리들의 직장에서,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들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전임목사님이 목회를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되어서 그 교회를 목회하는 것입니다.
전임목사님이 목회를 잘 했다면 그 목사님이 사임해야 될 이유도 없고, 그러면 자신은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임목사님이 목회를 잘 못했기 때문에 그 교회를 사임해야만 되었고, 그 후임으로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사님에게 있어서 전임목사님은 원망이나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드려야 되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 때문에 아니면 당신 때문에 잘 못 되었다고 정죄하거나 비난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우리 자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누군가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할 수 있었고, 기도의 응답으로 이런 은혜와 축복을 받았노라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범사에, 모든 일에,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2;1-10은 한나 여인이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정말 깊은 샘물에서 생수를 퍼올리듯이 깊은 영성을 지닌 기도입니다.
한나여인이 이런 깊은 영성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요인은 자기 자신 때문에, 브닌나 여인 때문에 기도의 자리로 나와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한나여인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결코 이런 깊은 영성의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깊은 영성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기 때문에 이런 깊은 영성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의 어머니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한나여인은 사무엘 뿐만 아니라 3남2녀의 자녀를 더 낳은 출산의 여왕의 자리에 앉는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누군가에 대하여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을 하거나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 누군가를 붙여주심에 감사드리며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 주변에는 기도해야 될 상황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탄이 우리 신앙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발악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반도에 위치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치, 경제, 안보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통일을 위해서 기도의 자리로 올라가야 합니다.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법을 비롯한 악법들로 인해서 한국교회와 우리교회와 우리 신앙인들에게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칠 가능성이 아주 농후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와 같은 시기에 우리들은 전쟁의 왕이요 전능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는 것만이 살 수 있는 길입니다.
한나여인이 기도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은혜와 축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서 나라와 민족이, 교회와 우리 생업터전과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추석명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아멘.
와 ☺우리교회 (WA ☺WOORI) http://cafe.daum.net/GRACEOF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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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복된 추석연휴 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추석명절이 되세요
아메. 깊은 영성의 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