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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 에스더 : 역사 섭리를 통한 언약 | ||
창세기 1장 ~ 36장 : 하나님의 언약 섭리 창세기 37장 ~ 민수기 30장 : 자손언약 성취 섭리 | ||
창37장~출18장 : 언약자손의 번창 | ||
37장~50장 자손의 보호와 형통 | ||
37장~38장 언약자손들의 범죄 | 39장~45장 요셉과 형들의 화친 | 46장~50장 언약자손들의 형통 |
38장 말씀은 요셉 이야기로 계속 이어지지 않고 유다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셉에 대한 내용은 다시 39장에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38장의 유다 이야기는 무엇이며 37장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38장 내용은 한 마디로 유다의 단독 범죄에 관한 내용이며 37장은 유다와 형제들의 공범 내용으로써 두 장은 유다의 범죄 내용입니다. 그리고 38장은, 마태복음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베레스(마1:3)의 출생에 대해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추한 범죄에 대한 내용을 성경에 기록하시는가요? 그것도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에서 그리스도가 출생하는 유다지파의 조상 유다에 관한 이야기를 말입니다. 흔히 우리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족보는 깨끗하기를 원하고 그럴 것이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추잡한 여인들의 이름을 드러내시고 까발리시며 공개하십니다. 유다가 관계를 맺은 며느리 다말, 이방 여인이면서 창녀인 라합, 이방 여인 룻, 다윗이 신하 장군을 죽이고서 얻은 우리야의 아내 그리고 처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혈통적 계보를 타고 출생하셨습니다. 이러한 ‘죄의 족보’에 대해 몇 가지 정리해 보면, 첫째는, 예수께서는 왜 죄의 족보를 통해서 출생하시는가입니다. 그 이유는,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의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죄 짐을 지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드러난 예수님의 족보는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족보를 타고 언약대로 오셨으며 그리고 그들의 모든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왕으로 만들어지는 나라는 십자가 안에서 만들어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선민의 조상인데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만들어집니다. 이 나라의 특성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져 가며, 이는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니다는 것을 모형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저 믿음의 계보대로 출생하셔서 저들이 지난 모든 죄짐을 친히 십자가에서 감당하시고, 실체적이고 신령한 나라를 완성하십니다. 둘째는, 나는 죄인이다는 것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너무나 미화합니다. 언제나 자신을 포장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없는 척하고 거룩한 척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쁘고 악해도 나는 괜찮다라고 여깁니다. 아닙니다. 나 역시 죄인 중에 죄인이요 괴수입니다. 여기서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규정할 때에 일반적으로 윤리나 도덕적인 죄를 가지고서 죄를 규정합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죄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세상 윤리적으로는 돈 1000원 정도 훔쳐서 잡혔다고 가정할 때에 훈계와 훈방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1억 정도 훔쳤다면 일반법으로 처벌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성경에도 대입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적이요 신법적으로 적용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1억을 훔쳐도 죄지만 1원을 훔쳐도 죄입니다.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만 있어도 죄라고 성경은 규정하며 확정합니다(마5장). 그래서 예수님의 계보는 죄의 계보이며 그 짐을 지시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셋째는, 이와 같은 더러운 족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다 혈통을 보호하시고 잇게 하셔서 언약하신대로 메시야를 탄생시키셨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하시며 교훈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며느리와 통간을 하여 아들을 낳는데 쌍둥이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베레스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밝히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족보는 인간이 죄를 짓거나 말거나 무슨 짓을 하든지 계승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지, 우리가 잘나고 거룩하고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언약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
요셉이 애굽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다는 내용이 지난 37장 내용이었다면 이어지는 38장 내용도 역시 요셉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져야 함에도 성경은 이렇게 유다의 단독범죄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고 주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언약자손의 부패상을 37장에 이어서 밝혀주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자손의 부패상을 밝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앞으로의 번창이 그들 스스로의 의로움에 의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은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앞으로 자손이 번창하여 만들어지는 나라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나라는 깨끗하고 선한 자들로 만드시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유다의 더러운 죄마저 가감없이 폭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38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은 유다가 가나안 사람의 딸을 아내로 취해 아들을 낳는다는 내용입니다.
1절입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본문 서두에서 ‘그 후에’ 라는 것은, ‘요셉 사건 이후에 그리고 그 일이 있었다’라는 말입니다. 유다는 아둘람에 있는 친구 히라와 가까이 합니다. ‘아둘람’은 ‘피난처’ 또는 ‘보호처’라는 뜻을 가진 가나안 성읍 중의 하나입니다.
1절에서 주목할 단어 하나는, ‘가까이 하니라’입니다. 이를 원어로는 ‘나타(ה)’라고 하는데 뜻은 ‘내뻗다’, ‘펴다’, ‘늘이다’ 등입니다. 이를 다른 번역본에서 확인하면, ‘~함께 살았다’(쉬운성경), ‘~에게 붙어 살았다’(공동번역), ‘~화 함께 살았다’(표준 새번역)입니다. 즉 유다는 그의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 사람에게 가까이 접근하였다는 뜻이며, 가나안 사람은 그의 접근을 환영하였고, 유다에게 극히 우호적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거기서 유다는 언약자손 답지 않게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녀를 취하여 동침합니다(2절). 그리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서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고(3절), 그녀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4절), 그녀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합니다.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헤브론 동쪽에 있는 ‘거십’에 있었던 것을 보면(5절), 그가 형제들이 있는 곳에 오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은 언약 자손인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다말을 아내로 취하게 하였는데, 엘과 그 아우 오난이 죽으므로 며느리 다말을 그 아비 집으로 보내는 내용입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아내 다말을 데려오고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인해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십니다(7절). 그런데 유다는 장자 엘의 씨가 있게 하려고 그 아우 오난을 그 형수에게로 들어가게 합니다(8절).
이것은 ‘계대결혼(繼代結婚)’ 혹은 ‘수혼(嫂婚) 제도’라는 것으로서(마22:24~28 참조), 고대 근동 사회에 널리 시행되던 당시의 사회 풍습이었으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율법으로 후대에 모세를 통하여 성문화된 것입니다(신25:5~6). 이 계대결혼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시동생인 자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책임이자 의무였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제도는 윤리나 도덕적 감정으로 이해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린 결코 이 성경을 믿을 수가 없고 의지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 제도는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자손의 계대를 이어 번창하게 하시므로, 자손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시는 계시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할 성질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호와의 뜻을 오난이 거절하고 땅에 설정(泄精)한 그의 악행은 여호와께 용납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죽게 됩니다(9,10절). 오난이 고의적으로 자신의 씨를 땅에 설정한 이유는 자기가 낳은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 되지 않고 형의 아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유다에게 너무도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도 죽을까 염려하여 계대결혼을 포기하고 며느리 다말을 그 아비 집으로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다말은 수절하고 아비 집에 있으라는 유다의 말을 듣고 가서 아비 집에 있었습니다(11절).
언약자손 유다는 장자 ‘엘’이나 차남 ‘오난’의 죽음이,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했기 때문임을 알지 못하고서 며느리 다말이 불행을 가져왔기 때문이라 간주하고, 셋째 아들인 셀라마저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11절)하여 다말을 아비 집으로 돌려보내며 수절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언약자손 집안에 생긴 징계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사람에게 찾은 것입니다.
12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은 언약자손인 유다가, 아내가 죽은 후에 딤나로 갔다가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 다말에게 속아서 그에게 약조물을 주고 그를 취하여 잉태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12절의 ‘얼마 후에’라는 것은 며느리 다말이 아비 집으로 가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를 가리킵니다.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고 곡을 하는 기간이 끝났을 때에, 그의 친구 히라와 함께 자기 양털을 깎는 일꾼들이 있는 딤나로 올라갑니다(12절).
다말은 어떤 사람에게서 시아버지가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올라왔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13절), 과부의 옷을 벗고 너울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에나임 어귀에 앉아서 유다를 기다라며 있습니다. 이는 막내아들 셀라가 이미 다 컸는데도 유다가 자기와 셀라를 짝지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4절). 길을 가던 유다가 그를 보았으나, 다말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유다는 그가 창녀인 줄 알게 됩니다(15절).
그래서 유다는 그가 자기 며느리인 줄도 모르고 길가에 앉아 있는 다말에게 청하며,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16절)입니다. 그때에 다말은 유다에게,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고 묻습니다(16절). 이에 유다는 자신의 가축 떼에서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보내겠다고 하는데, 다말은 그 염소 새끼가 오기 전까지 담보물 줄 것을 요구합니다(17절).
그래서 유다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받고서 그에게로 들어가 임신하고서(18절)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습니다(19절). 이는 시부 유다가 딤나를 떠나자 다말도 즉각 그 곳을 떠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음을 보여 줍니다.
유다는 자기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다말에게 약조물로 주고 다말을 취하는데, 그 약조물 중 ‘끈’은 ‘팔찌’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도장’은 소유자의 신분과 권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각 개인의 기본적인 휴대품이자 상거래를 하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지팡이’는 여행자들의 보행을 도우며 또는 가축을 칠 때 사용하는 필수품입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의 ‘지팡이’는, 자기의 부족을 상징하는 일종의 신물(信物)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다말은 유다의 신분을 밝힐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로서 이것들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유다는 이런 추악한 범행을 단독으로 저지른 것입니다. 며느리 다말은 유다가 자기를 속인 것에 대하여 보복을 하려고 그가 변장을 하고 유다를 유혹한 것입니다. 유다나 다말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악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언약자손은 참으로 경건하고 깨끗하고 진실되고 의로운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자손 유다가 범한 흉측한 범행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레20:12 참조). 그러나 이러한 사건 역시 도덕이나 윤리적 차원에서 이해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계시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가 그런 흉측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여 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를 받아 후일에 그의 자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언약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이 그들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의한 것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유다가 범죄한 사실을 자세히 부각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언약자손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언약자손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만한 것이 있어야 하나님께 보호를 받고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아무런 소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약자손의 범죄와 악행들을 모두 더욱 자세히 소개하며 까발리는 것입니다. 본 장은 물론이거니와 앞서 37장도 함께 유다의 범죄를 노출시키며 그리고 마태복음 1장에서의,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0절부터 23절 말씀은 유다가 며느리에게 주었던 약조물을 찾지 못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언약자손인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 주었던 약조물을 찾으려고 친구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지만 그 친구는 다말을 찾지 못하고서(20절)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만 그들은 “여기에 창녀가 없느니라”고 말해 주었고(21절), 이에 유다 친구는 유다에게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곳 사람도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고 말해 줍니다(22절).
〈여기서 잠깐만!〉 유다가 본 창녀와(38:15) 유다의 친구 히라가 말하는 창녀(38:21)의 차이를 알아봅니다. 15절에서 유다가 보고 만난 창녀는 원문에 ‘조나(זגה)’라고 쓰여졌습니다. 뜻은 ‘간음하다’, ‘행음하다’란 뜻이며, 이들은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몸을 파는 여자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불법적인 성행위를 하는 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21절에서 유다의 친구 히라가 말하는 창녀는 원문에 ‘케데솨(קדשׁה)’라고 쓰여졌습니다. 뜻은 ‘거룩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을 가진 ‘카다쉬’에서 유래된 단어인데, 이는 ‘신께 헌신한 자’라는 뜻으로 이방 우상의 신전에 소속된 창녀를 가르킵니다. 이들은 일반 매춘부를 뜻하는 ‘조나’와는 달리, 가나안인들의 생식과 번성을 주관하는 것으로 믿었던 가나안의 여신 ‘아스다롯’의 종교 의식에서, 의식을 집전하는 여사제들이나 또는 아스다롯을 섬기기 위해 헌신한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음란한 행위를 통하여 여신을 섬기는 것이었는데(신23:18), 다산을 기원한다는 명목하에 음란한 춤이나 말로써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여신 아스다롯의 신상 앞에서 음란한 성행위를 합니다. 본문에서 유다의 가나안인 친구 히라는 유다가 만났던 창녀가 이러한 신전 소속의 창녀였던 것으로 짐작하여 부른 것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당시 가나안 사회에는 우상 신전과 더불어 신전 소속 창녀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유다는 늘 몸에 지니고 다녔던 도장과 팔찌와 지팡이를 아둘람 친구의 손을 통하여 조용히 되찾고 싶었지만 다말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가 다말을 더 찾으려 하다가 자기의 추행이 알려져 부끄러움을 당할까 염려스러워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23절).
24절부터 30까지의 말씀은 유다가 며느리에게서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낳는다는 내용입니다.
24절입니다.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본문의 서두는, 그로부터 석 달쯤 지났다는 시간적 흐름을 설명합니다.
이는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서 여성의 임신 여부를 확정한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석 달쯤 후에’ 유다는 어떤 사람을 통하여 자기의 며느리 다말이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까지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서 유다는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합니다(24절).
본문에서 ‘행음함으로 말미암아’라는 것은, 원문에서는 복수형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유다에게 보고한 ‘어떤 사람’은 다말이 한 번 행음하여 임신한 것이 아니라 아예 매춘부처럼 살고 있었다고 과장된 표현으로 알려준 것입니다. 이에 유다가 분노하여 며느리인 다말에게 ‘불사르라’는 화형을 선고하고 맙니다.
이에 다말이 끌려가다가 사람을 보내어 유다에게 도장과 그 끈(팔찌)과 지팡이를 보여주며 이 문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음을 말합니다(25절). 유다에게 보여준 ‘도장과 그 끈(팔찌)과 지팡이’는 유다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그래서 다말은 시아버지에게 사람을 보내어, “청하건데 보소서”라며 자세히 살펴 보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그 약조물이 자기의 것임을 즉시 알아채고서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하고 고백하면서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하지 아니합니다(26절).
그러니까 유다가 정죄하여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라고 하던 다말보다 자기가 더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죄를 모르고 의롭다고 생각하면 남을 정죄하며 저주하기 마련입니다. 유다는 자기가 더 큰 죄인이면서도 다말을 정죄하여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약조물을 보고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하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시부와 며느리와의 행음이 참으로 부끄러운 추행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아들 쌍태를 임신하여 하나는 베레스라 하고 또 하나는 세라라고 이름합니다(27~30절). 다말이 낳은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는 부정한 추행의 결과로 낳은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인 베레스의 계보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면 사단의 장난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일까요? 참으로 궁금한 일입니다.
만사와 만물을 주관하시며 다스리시는 전능자 하나님의 경륜 안에 우연과 자연(自然)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장난으로만 보기에도 무리가 따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없이 독단적으로 이런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획임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도덕이나 윤리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므로 계시적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유다와 며느리 다말과의 부정한 추행으로 얻어진 아들 베레스의 계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하시는 것은, 언약 자손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온갖 죄성을 대신 지신다는 사실을 계시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추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언약 자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호하시며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어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형제들과 함께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넘긴 행위나, 그가 단독으로 가나안 여인을 취한 것이나 며느리 다말과 추행을 저지른 모든 범죄 행위는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작정하신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7장과 38장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 자손으로 범죄가운데 있게 하시는 내용으로, 유다와 형제들이 공범을 하게 하시고 유다가 단독으로 범죄가운데 있게 하신 섭리 내용입니다.
이러한 섭리는 여호와께서 선민의 열조에게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계시하기 위한 섭리로서, 후일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택한 성도의 구원이 은혜에 기초할 것을 언약하시는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적 계시 섭리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는 유다와 형제들로 범죄가운데 있게 하시고, 이어서 요셉으로 하여금 시험하여 용서하게 하시는 섭리를 계속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