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8. 06;00
영하 5도와 함께 몰려온 바람은 낯선 바람이다.
늘 뜨거운 바람, 시원한 바람, 추운 바람 정도로만 삼등분할 정도로
바람엔 무심하였었지.
그러나 지금 내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은 매섭기도 하지만 한기(寒氣)를
오싹하게 느끼게 할 정도로 낯설다.
가로등아래 산길엔 수많은 보석들이 영롱하게 반짝 거린다.
땅바닥엔 윤슬처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보석이 깔렸고,
이에 질세라 구름 벗겨진 새벽하늘에선 개밥바라기별과 북두칠성이
묵언(默言)으로 나를 지켜본다.
무서리가 아닌 된서리가 내린 산길,
잔뜩 닳아빠진 등산화 밑창 덕분에 살짝 미끄러지며 온몸이 휘청거리는
산길을 오른다.
바람이 얼굴에 부딪치자 눈에서 눈물이 난다.
바람이 불어도 눈물이 나고, 슬픈 노래나 사연을 들어도 눈물이 찔끔 난다.
눈물이 나면 애써 안구건조증이라 에둘러대지만 나이가 들면 감정도 예민해져
눈물이 많아지는 건 사실이다.
17;00
MBN의 보이스 퀸(voice queen) 프로를 본다.
5살 때 유괴를 당했다가 혼자 살아 돌아온 아픔을 가진 여군 출신도 있고,
본인이 암투병중인 출연자도, 남편이 암투병중인 출연자도, 63세 출연자도,
그들의 사연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난감하네♪의 원곡자 조엘라,
절절한 목소리로 이혼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열창하는 출연자들은
스스로 감동을 하고 감정에 빠져 눈물을 흘리며 관중과 시청자들을 신나게
웃기고 울리는 묘한 마력(魔力)을 가졌다.
대한민국이라는 세상은 생각보다 공평하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하다.
또한 불평등과 불의가 색깔을 감추고 평등과 정의로 위선의 가면을 쓴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사연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의 목소리는 세상을 향해 절규(絶叫)를 하고,
노래를 통하여 아픔을 전달하려 애쓰는 모습은 차라리 처절하다고 표현을 하고
싶다.
너무 중후해 해석하기 어려워도 나는 서양의 클래식 듣기를 좋아했는데,
오늘은 엄마 손은 '약손'의 원곡자인 전영랑 출연자의 '배 띄워라'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배 띄워라'를 들으며 지나간 수십년 세월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
나는 지금 배를 저어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소회(遡洄)로 지나간 세월을
반추(反芻)하는 거다.
파도소리 들으며 애절한 노래속에 지난 세월을 생각하고, 가슴 아픈 사연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지나침일까.
지나침이라는 기준의 적정 수준이 뭔지는 모르지만 나이가 들면 점점 순수해진다고
생각을 한다.
오죽하면 나이 들면 아기가 된다는 말이 생겼을까.
이젠 숨기지 않고 감정의 크기만큼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는 거도 싫고,
남자라는 이유로 아버지라는 무게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게 싫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못하며 꾹 참는 거는 싫고,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싫다.
겨울의 짧은 하루를 마친 태양이 빛을 잃고 삼각산 너머로 떨어진다.
남은 생 내안의 감정을 잘 다독여주고, 스스로를 보살펴주고, 나 자신과 마주하는
일에 시간을 더 쓰리라.
2019. 12. 8.
석천 흥만 졸필
첫댓글 500회의 '느림의 미학' 대단합니다. 수고 많았네요.
5,000회를 기대합니다.
느림의 미학 500회, 정말 대단하이. 우리모두 박수를 보내며 한권의 멋진 책이 나오리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