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강. 이긴 자들이 부르는 찬송 (계 19:1-6) 계 19:1-7절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천국을 일컬어 영원토록 찬송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완성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끝은 안식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1장 창조 사역이 끝나고 일곱째날 안식하는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구약에서는 절기나 안식일에 성전에 모여서 축제하는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명절날 온 가족이 모여서 즐겁게 노는 것과 같습니다. 안식이란? 엿새를 지나고 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엿새란? 죄 아래서 수고하는 날들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사망이나 애통이나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눈물이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나를 괴롭히던 원수가 망하면 박수치면서 환호합니다. 그동안 쌓인 원한이 다 사라지니까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그래서 노래하며 춤을 추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들이 찬송을 합니다. 무엇을 찬송하고 있나요? 음녀의 멸망과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보고서 찬송합니다.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마음에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입술의 찬송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기뻐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 사람의 관심사에 따라서 다릅니다. 조각가는 멋진 작품을 만들고 나면 기뻐하고, 음악가는 좋은 곡을 연주하고 나면 기뻐하고, 발명가는 신기한 제품을 만들고 나면 기뻐합니다. 성도의 기쁨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하신 언약의 완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늘에 허다한 무리들이 부르는 찬송은 창세전 언약이 다 이루어진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찬송인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완성지점이 바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도 그 은혜의 영광을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찬미코자 하심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이 음녀의 멸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원수가 사라졌으니 찬미하는 것입니다. 찬미는 원수로부터 괴로움을 입은 사람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원수로부터 벗어남이 찬미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수는 우리가 이긴 것이 아닙니다. 어린 양이 이겼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을 통하여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할렐루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국회에서 대통령을 탄핵 했습니다. 대통령은 탄핵을 당하자 피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광장에 모여 있던 수많은 군중들은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면서 좋아 합니다. 극과 극입니다. 왜 상반된 반응들이 일어날까요? 그동안 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들은 권력을 사유화 하여서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얻고 왕 노릇하면서 희희낙락 하며 살았습니다. 마치 땅의 음녀들처럼 손에 금잔을 들고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여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서 여황으로 살았습니다. 땅의 상고들도 음녀의 품에서 자기들이 탐하던 것들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권력이 영원 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일순간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좋던 영화는 다 날아가고 이제는 철장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굴비 엮이듯이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서 감옥으로 갔습니다. 이건 마치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거짓선지자들을 무저갱으로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작금에 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일어난 모습은 음녀의 멸망 때에 땅의 상고들이 자기들이 탐하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나니까 통곡을 하고 있는 모습과 똑 같습니다. 왜 탄핵 당한 것을 원통해 하고, 왜 땅의 상고들이 음녀가 멸망당한 것을 통곡합니까? 이는 그것들이 마치 자기들 것이라고 믿었고, 자기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그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고 여겼으면 빼앗겨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어쩌면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작금에 일어난 국가적 사태를 우리의 신앙으로 이해해 봅시다. 우리들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인생을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인생은 영원한 것이라 생각하고 삽니다. 종말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짝하여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음녀가 멸망당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듯이 우리 역시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처럼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성막 중심으로 진 치고 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보면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는 너희들은 나의 언약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케 하심입니다. 그래서 율법 속에 여러 가지 구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날을 구별하여 지키라고 하셨고, 식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날을 탐하고 식물을 탐해서가 아니라 모든 날이 하나님의 것이고, 모든 식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날이 누구로부터 주어졌으며, 너희가 먹는 이 음식이 누가 주신 것인지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의 주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것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날도 하나님의 것이고 식물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날을 지키고 식물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이것들의 출처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율법에서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라는 말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안식일도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하고, 십일조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고 합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값을 주고 산 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날을 내 날로 살고 있고,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가 교회를 멀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행하는 각종 신앙의 삶들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 저! 이런 것 받았어요!” 라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각양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이걸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이렇게 은사로 행한 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갈 4: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도 주시고, 희락도 주시고, 화평도 주시고, 오래 참음도 주십니다. 자비도 주시고, 양선도 주시고, 충성도 주시고, 온유도 주시고, 절제도 주십니다. 은혜도 주시고, 긍휼도 주시고, 용서도 주시고, 구원도 주시고, 영생도 주시고, 천국도 주십니다. 매일 매일 만나를 주시듯이 계속하여 부어 주십니다. 마치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기쁨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화평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 주신 것입니다. 참는 것도 내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실력입니다. 어떤 일에 절제 하는 것도 내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실력입니다. 충성하는 것도 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성도가 누리고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신 결과물이고,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도 하나님이 교회에 다니도록 은혜를 주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행하는 모든 행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 이런 것을 받았어요!” 라는 감사의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에 속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신앙생활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도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호회 모임처럼 취미로 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서 행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교인과 성도는 다릅니다. 교인은 스스로 교회를 오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인은 교회를 여가생활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교회에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릅니다. 성도는 교회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나아옵니다. 교인은 교회 생활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성도는 반드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인은 세상 일이 우선이고, 교회는 차선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지 않습니다. 성도는 교회가 우선이고, 세상 일은 차선입니다. 교인은 시간 나면 교회를 오지만, 성도는 시간을 내서 옵니다. 성도는 교회의 모임을 명절날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으로 옵니다. 우리가 명절 때 고향으로 가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여도 달려가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고 설렘이고 기쁨이고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 년에 세 차례 명절을 주었습니다. 봄에는 무교절 절기로 주셨고, 여름에는 오순절 절기로 주셨고, 가을에는 초막절 절기로 주셨습니다. 세 절기는 율법으로 규정하여서 이스라엘의 남자는 아무리 먼 곳에 산다고 하여도 일 년에 세 차례는 의무적으로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너희는 비록 세상에 흩어져서 살지만 종국적으로는 모두가 함께 모여서 하늘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케 하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명절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서 일 년을 살았습니다. 일 년 중에 명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명절을 위한 일 년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목적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기다림이었고 살아가는 낙이었고 설렘이었고 삶에 목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삶의 포카스를 명절에 맞추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임이 그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외식으로 흘러서 문제였지만 말입니다. 자발이 아니라 법에 의한 것으로 변질이 되어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의 순수성이 변질이 되어서 외식으로 흘렀지만 성전에 모임을 생명처럼 여기고 살았습니다. 교회 생활은 성도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확인 받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고 그날이 가까이 옴으로 더욱 더 모이기를 힘쓰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서로 모여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생각하고 천국에 소망으로 위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인사가 “마라나타” 였습니다. 극심한 환란 속에서도 모이면 서로 서로 “주님이 곧 오시니까 소망으로 삽시다” 라고 격려하며 살았습니다. 초대교회 유일한 소망은 주님의 다시 오심이었습니다. 모든 삶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등따습고 배가 부르면서 외식으로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외식으로 흐르다가 급기야는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모임을 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급기야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인생을 살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죄가 뭐냐? 자기 것도 아닌데 자기 것으로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사는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들을 용서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고, 하나님의 찬송을 도적질하고, 하나님의 인생을 도적질 한 자들을 반드시 응징하십니다. 이것이 음녀의 멸망 사건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를 징치 할 때 뭐라고 했나요?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의 명을 전할 때 뭐라고 했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것이므로 내어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이게 멸망 받을 죄입니다. 바로의 모습이 바로 음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음녀의 멸망을 바로의 멸망과 같이 일순간에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가에서 노래를 불렀고, 애굽의 바로 왕은 바다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원하심에 대한 찬송을 불렀고, 애굽의 바로는 바닷 속에서 통곡하며 애곡하였습니다. 이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말로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살던 자들은 바로와 음녀처럼 슬피 울며 이를 갈 날이 속히 임할 것입니다. 그 날이 문 앞에 다다랐습니다. 만물이 갖가지 징조들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물이 종말을 알리는 소식은 성도들에게는 찬송이 됩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모여서 하늘에서 부를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이 땅에서 예행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구원 받은 성도들인 하늘에 허다한 무리들이 큰 소리로 “할렐루야” 라고 외치잖아요. 합창을 하잖아요. 그것도 네 번씩이나 말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찬송이 무엇인가 하면 음녀가 멸망당한 것에 대한 감사의 찬송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찬송입니다. 한마디로 성도의 구원과 음녀의 멸망에 대한 찬송입니다. 찬송이란? 하나님께서 구원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구원 받은 자만이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찬송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은 오직 산 자만이 부를 수가 있습니다. 마귀가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입니다. 마귀는 감사를 못해요. 마귀는 찬송을 못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죽은 자는 찬송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찬송을 받지 않아요. 시 115:17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못하리로다”
시편은 전부가 찬송이에요. 그런데 누가 찬송한줄 아세요. 대부분이 다윗의 찬송이에요. 다윗이 언제 찬송할 줄 아세요. 전부 어렵고 힘이 들 때에요. 이건 인간의 상식에 반하는 일이에요. 인간의 상식은 좋을 때 노래를 불러요, 슬플 때 노래 부르는 사람은 없어요. 사람은 슬프면 원망하고 울어요. 그런데 성도는 기뻐도 슬퍼도 하나님께 이야기해요. 이 기도가 찬송이에요. 기쁠 때 부르는 것은 찬송이고, 슬플 때 부르는 것은 기도에요. 성도는 기도하고 찬송하며 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시편은 기도와 찬송을 동일시하여서 찬송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찬송시란? 하나님께 대한 몸부림이에요. 하나님을 의식하고 토해내는 몸부림이에요. 다윗은 자기가 처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는 찬송을 룰루랄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분석학적인 정의이고, 영적 정의는 하나님께 대한 소리침이에요. 기도와 찬송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요. 하나에요. 바울과 실라를 보세요. 지하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했어요. 기쁠 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찬송이고, 슬플 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기도에요. 그러니까 기도나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죽은 자는 하나님께 찬송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죽은 자는 찬송도 할 수가 없지만 기도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영이 죽었다고 합니다. 기도와 찬송은 성도만이 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영이 살아 있는 성도는 기도하게 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와 찬송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는 영혼의 울림이에요. 소리침이에요. 살았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산 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의식하고 살아갑니다. 성도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순경에는 찬송하고 역경에는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성탄 메시지가 옵니다. 아~! 또 한 해가 가는구나! 2016년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한 해가 옵니다. 묵시 안에서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한 오늘 날이지만 우리의 몸은 역사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으므로 세상의 시작과 끝을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온다는 것은 그 만큼 세상의 끝이 다가온다는 소식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지나고 나면 다른 세상이 기다립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상의 종말이 멸망이나 저주가 아니라 감사이고 기쁨인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천국이 추상이고 저 하늘 멀리 있는 것처럼 여기고 살았는데, 나이가 들어가고 육신이 후패해져 갈수록 천국이 실상으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늙음이 감사이고, 아픔이 감사이고, 외로움이 감사이고, 세상에 대한 없음이 감사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을 때는 하나님이 멀리 계셨는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철이 든다는 말이 신앙도 동일합니다. 신앙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의 연조만 쌓여간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더 많이 알아간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의 어떠함을 알고, 또한 내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한 인생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 갑시다. 시편 90편입니다. 시 90:1-13=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 임이니이다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 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 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16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모세는 성령의 감동으로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애들아! 인생이 뭔 줄 아느냐? 산이 생기기 전에 주가 계셨고, 땅과 세계가 조성되기 전에 주가 계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주가 우리를 만드신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너희 인생은 풀 같다고 합니다.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들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풀 같은 인생을 홍수로 쓸어버리신다고 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합니다. 7-80년 사는 인생이 하나님의 분노 중에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 자체가 수고와 슬픔의 인생이라고 합니다. 수고와 슬픔인 인생이라고 한다면 돌아가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죄인에게 종말은 기쁜 소식으로서 복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의 삶을 청산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의 자리가 어디인가요? 그리스도 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왔다가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그리스도 안에서 섰다고 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라고 합니다.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듯이,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면 성도에게는 종말은 감사이고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저주가 아니고 축복인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을 떠나서 얼마나 외롭게 살았겠습니까? 다시 아담에게서 나온 하와가 아담 안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두려움과 외로움과 수고로움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을 떠나 산 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떠나 이 세상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주셨듯이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하와는 자신을 아담에게 이끌어 주신 하나님이 너무도 고마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가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이 하와의 고향이에요. 그러니 하와는 자신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고마웠겠어요. 감사하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슬픈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와처럼 두려움과 외로움과 수고로움으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예수에게로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고향이란? 나를 낳아준 부모가 계신 곳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향이 그리운 것입니다. 고향 그러면,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지는 겁니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포근함은 구원 받은 성도가 누리를 평안함과 같아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나요? 자기 백성 찾으러 왔어요. 자기 백성들을 찾아서 하늘나라로 데려가려고 오신 겁니다. 모세는 이를 알고 수고하고 슬픈 인생을 돌아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합니다. 이걸 좀 깨달으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이 지혜를 받았습니다.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이 영원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떠나야 할 것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했는지 들어봅시다. 벧후 3:8-13=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두 번째 편지를 전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 앞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합니다. 이 말은 주 앞에서는 시간의 의미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시간 밖에 계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천 년이란? 묵시의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는 천 년도 하루 같고 하루도 천 년 같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오래 살고 짧게 살고는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살이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세상 밖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게 마음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잠시 잠간 후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종말이 없다고 한다면 이건 저주 중에 저주에요. 저주 받은 세상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저주에요. 사는 것만큼 수고하고 슬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쫓기는 죄인의 몸으로 영원히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건 기쁨이 아니고 저주에요. 죄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죽음에 쫓기는 삶인데 이를 어찌 복이라고 할 수가 있나요? 죽음에 쫓기는 인생에게 복이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 해방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에 쫓기는 생명을 죽음에 넘겨주는 것입니다. 죽음을 죽임으로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으면 됩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는 세상에 연연하지 않아요. 그래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세상에 대하여 날마다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할 때 세상의 가치로부터 해방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법은 법에 사람이 죽어야 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요. 법은 법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쫓아다니면서 정죄를 해요. 법으로부터 정죄당하지 않으려면 법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법은 죽은 자에게 정죄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 시킨 것이 바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죽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었어요.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어요. 율법이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이라는 동네에 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이 세상은 지나가는 정거장에 불과해요. 그래서 베드로는 주께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봅시다. 계 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니다. 그 세상은 처음 세상과 다르다고 합니다. 처음 세상은 사망이 있고 애통이 있고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은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나 눈물 흘리는 것이 없는 곳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영생하는 곳이고 즐거워서 찬송하는 곳이고 기쁨으로 웃으면서 감사하고 춤을 추는 곳이에요.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몰고 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내려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현재 진행형이에요. 지금 오고 있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고 있으니까, 헌 하늘과 헌 땅은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헌 땅인 이 세상이 종말의 징후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가 각종 천재지변으로 이 세상의 끝이 다다랐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사람이 늙어 가면 몸이 갖가지 모습으로 죽음의 징후들을 쏟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우리 몸은 시력도 떨어지고, 이빨도 빠지고, 피부도 늙어가고, 기력도 떨어지고, 근력도 떨어지고, 몸에 온기도 떨어지고, 온 몸이 오그라들어요. 이건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베드로는 그게 슬픈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기쁜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나라로 갈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쁜일인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에서는 새로운 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헌 하늘과 헌 땅에서 살던 몸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새로운 몸이라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몸이에요. 늙고 병듦이 없는 몸이에요. 그런 몸을 예수님이 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종말은 기쁨이고 소망이고 감사인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말은 슬픈 일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종말은 기쁨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종말은 슬픈 일이지만,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종말은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서서 예수를 믿다가 먼저 하늘로 가신 성도들이 광의적인 의미에서 음녀인 이 세상의 멸망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늘에 거하는 성도들이 찬송을 합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바라던 것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고맙습니다 라고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봅시다.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다섯째 인을 떼니까 하늘에 모습이 보입니다. 구원을 받은 영혼들이 하늘에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빨리 자기들을 죽인 원수들을 갚아 달라고 합니다. 이들의 원수가 바로 음녀들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가 가진 증거란? 어린 양을 따르는 신앙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두 구조를 말해주고 있어요. 첫째는, 말씀을 지키다가 목베임 받은 성도들의 구원과, 둘째는, 성도들을 목베임 한 자들의 멸망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복수극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귀와 그 백성들에게 “너희들 왜 내 백성들을 괴롭혔느냐”고 죄 값을 묻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들을 멸망 시키기 위하여 성도들을 그들의 손에 붙여서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명분을 얻고자 성도들을 고난 가운데 두신 것입니다. 성도는 일종의 미끼에요. 성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악에 속한 자들이 발호를 하는 것입니다. 음녀는 성도들을 목베임 함으로서 스스로 마귀에게 속하였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끼로 오셨어요. 예수님이 오시자 그동안 숨어 있던 마귀가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이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자들이에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누가 마귀에게 속하였지를 몰랐어요. 모두가 거룩한 자들인 줄 알았어요. 마귀가 자기의 종들을 교회 안에 거룩한 자로 둔갑을 시켜서 둔 것입니다. 이들은 육으로는 알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오시자 그들이 정체가 폭로당한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마귀 새끼들이 예수님이 오시자 본색을 드러내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를 죽임으로서 자기들의 정체를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에 이 일을 하나님은 성도들을 가지고 하세요.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도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이 땅에 빛의 아들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를 가진 자들이 목베임을 당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한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 달라고 데모하는 영혼들에게 뭐라고 하는가요? 잠시 기다리라고 하지요. 저 아래 너희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목베임을 당하여야 할 동무들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들이 바로 우리에요. 우린 지금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성도들의 고난 장소입니다. 마귀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성도들에게는 지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천국이지만 하늘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예수 때문에 미움을 받고 고난당하고 죽임 당하여야 하는 지옥이에요. 마귀는 이 세상 주인이에요. 마귀를 따르는 음녀의 세력들에게는 이 세상은 천국이에요. 음녀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사치하고 살잖아요. 하지만 하늘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 고난의 장소이고 지옥인 것입니다. 이제 성도들을 괴롭히던 마귀의 세력인 음녀가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 “할렐루야” 라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라는 말이 네 번씩이나 연속하여서 나오지요. 이는 그만큼 기쁘고 즐거운 일이란 말입니다. “할렐루야” 라는 말은 “여호와를 찬양하라” 는 뜻입니다. 왜 여호와를 찬양합니까? 이는 여호와께서 홀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분입니다. 찬송을 받으셔야 하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찬송을 받고자 만물을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먼저 21절을 봅시다. “이 백성은 나의 찬송을 부르기 위하여 창조 하였다”고 하지요. 그리고 7절을 봅시다.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하지요.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야곱이에요. 그래서 1절에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하면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창조하고, 구속하고,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창조하고, 부르시고, 구속하고, 조성하셨다고 합니다. 이건 일종의 구원의 과정이에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서에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시고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말입니다. 야곱을 창조하여서 이 세상에 던져 놓았다가 때가 되매 부르시고 예수의 피로 구속하여서 하늘나라 백성으로 만들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왜 구원을 하셨는가 하면 여호와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원래 목자의 양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을 찾고서 목자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건 마치 강아지 주인이 강아지를 단장 시켜 놓고 “아~! 이쁘다” 라고 기뻐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시고는 “아~! 좋다” 라고 하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여호와를 위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죄와 사망의 주인은 마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던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것을 찾아 온 것에 대한 기쁨이 충만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성도들을 빼앗긴 마귀는 다릅니다. 마귀는 그동안 성도들을 자기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오셔서 “저 아이들은 내 것이니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원래 예수님의 것이었는데도 마귀는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통해 하고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애굽의 바로의 압제로부터 빼내심과 동시에 애굽과 바로 왕을 홍해바다에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은 장차 이 세상에 임할 멸망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이 세상은 애굽과 바로처럼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를 통해서 음녀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셨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종말의 교회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음녀의 멸망 사건은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봅시다. 출 15:1-2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5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7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같이 사르니이다 8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9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10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19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모세가 출애굽을 한 후에 찬송을 합니다. 이 찬송은 요한계시록에서 천상에서 불려지는 찬송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찬송과 같아요. 영적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잘 보시면 몇 가지 찬송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애굽에서 건져내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의 찬송이고, 둘째는, 자신들을 괴롭히던 원수인 바로를 홍해에 멸망시킨 것에 대한 감사의 찬송이고, 셋째는, 여호와의 기업의 산에 심고서 그의 다스림이 영원무궁하기 때문에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모세의 찬송을 보면 구원의 모습이 잘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어디로부터의 구원이며, 둘째는, 누구로부터의 구원이며, 셋째는, 무엇을 위한 구원이냐 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찬송과 같습니다. 음녀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을 찬양하고, 음녀에게 원수를 갚아 심판하신 것을 찬양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말 할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세 가지 시제로 이야기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계시하시기를 나는 시작과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이고 처음과 나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십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일의 시작과 끝을 내는 분이란 뜻입니다. 구원의 일을 계획 하시고, 계획한 대로 역사 속에서 이루시고, 반드시 성취해 내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계획은 과거이고, 이루심은 현재이고, 성취는 미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삼 시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구원을 받았느니라” 라는 “과거 시제”로 말을 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고 “현재 시제”로 말을 하고, “장차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는 “미래 시제”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걸 구약의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모습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에게는 출애굽은 이미 이룬 구원이고, 광야는 현재 이루어 가는 구원이고, 가나안은 장차 들어가야 하는 구원입니다. 애굽으로부터 건짐 받는 구원은 과거이고, 광야에서 죄와 싸우는 구원은 현재이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구원은 미래인 것입니다. 애굽으로의 구원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것은 단회적인 사건으로 단번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끝난 사건입니다. 두 번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고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과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출생은 단번에 이루어지고 한 번으로 끝이 납니다. 이를 언약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어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소가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제부터 부모의 도움으로 자라가는 과정이 기다립니다. 이게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과 같아요. 구약 이스라엘로 보자면 광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과정이 전쟁입니다. 광야는 구원을 받는 곳이 아니에요. 구원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곳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것을 실제 삶으로 체휼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막의 제사 제도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막에서 일어나는 제사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살아난 것을 날마다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 가운데 살면서도 정죄당하지 않고 사는 것은 어린 양의 피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린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은혜라는 동네로 이사를 왔어요. 은혜라는 동네로 이사를 왔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은 죄 아래서 난 몸이에요.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몸으로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원리적으로는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났지만 우리 몸은 여전히 죄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죄의 영향 아래 있다는 말은 사단으로부터 참소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단의 참소는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이길 수가 있어요.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이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곧 예수님의 오심과 같습니다. 성령이 왜 우리 가운데 오셨는가요?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을 우리에게 적용시키기 위함입니다. 마귀로부터 오는 참소를 막아 주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지불하셨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단번에 이루어 주신 과거 구원을 날마다 현재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구약에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들이 광야에서 날마다 성막의 제사를 통하여 지은 죄를 사함 받는 일들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막에서 일어나는 제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제사는 출애굽 시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짐승의 제사는 유월절을 현재화 하는 것입니다. 기념이란? 전에 경험한 것을 현재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통해서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만찬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이 되어지고 난 후 성찬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죄사함을 주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로 새로운 언약이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이걸 믿는 것이 성찬이에요.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졌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집니다. 짐승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지는 것은 옛 언약이고,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지는 것은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새 언약을 믿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만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인 것입니다. 성막이 이스라엘 진중에 거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과 같습니다. 성막에서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듯이, 지금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가 짓는 죄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는 비록 죄를 짓고 살지만 정죄당하지 않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피로 마귀의 참소를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날마다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재 구원은 과거 구원이 이루어진 자들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과거 구원이 없는 자는 현재 구원도 없습니다. 성령은 과거 구원이 이루어진 자들에게만 오십니다. 그래서 과거 구원을 받은 자는 반드시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재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완성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업의 산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는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은 성도들의 구원의 모든 과정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찬송은 어느 한 때에만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불려져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실제적으로는 장차 될 일을 말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그것이 미래에 국한 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시대이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현재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즐거움은 현재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받은 구원을 현재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며,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얻은 구원을 감사하고 찬송하여야 하고,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에 감사하고 찬송하여야 하고, 장차 이루어 주실 구원을 소망하면서 찬송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오늘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거를 현재로 사는 것이고, 미래를 현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은 현재로 살아가는 것이듯이, 구원도 현재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건강하였다 할지라도 지금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나중에 건강하여야지도 소용없습니다. 생명은 항상 지금 현재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금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과거에 아무리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주고 산을 옮기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할지라도 지금 무기력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현재 생명이 중요하듯이, 현재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불같이 뜨거운 마음으로 소리 높여 찬양하였어도 지금 내 속에 냉랭하고 식어져서 찬양이 사라졌다면 죽은 것입니다. 영이 병들었기 때문에 찬양이 사라진 겁니다. 영이 병들었기 때문에 감사가 사라진 것입니다. 영이 병들었기 때문에 기도가 사라진 것입니다. 영이 병들었기 때문에 열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영이 병들고 죽어 있으니까 말씀을 들어도 소 닭 보듯이 하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애통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경고를 보십시오. 세상 것에 취하여 육적으로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족하고 자긍하고 자만하고 자고하고 자랑하고 자위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소경이고 발가벗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열심을 내라는 말은? 마음이 뜨거워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서 주님께 돌아오라고 합니다.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찬송은 나중에 천국에 가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오늘 해야 합니다. 오늘 기뻐야지 나중에 기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여기서 찬송하는 사람이 나중에 천국에 가서도 찬양을 합니다. 여기서 찬양을 배우지 않으면 천국에 가서 부를 찬양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감사를 배우지 않으면 천국에 가서도 감사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찬송과 감사는 하나님에 대하여 의식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반응입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 속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 속에 내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드리는 감사 속에 내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을 이원론으로 하지 마세요. 마음과 몸이 하나로 하여야 합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어야 하고,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환경을 초월하여 감사 할 수가 있고 찬송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복을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난 얼마나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세어 보십시오. 우리는 천사도 흠모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무나 알 수 없는 천국의 비밀을 받았습니다. 세상적인 가치로 우리 인생을 보지 말고 하늘에 가치로 우리 인생을 보십시오. 물질적 가치로 보지 말고 영적 가치로 보십시오. 우리 인생은 세상적이고 물질적 가치로 보면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하늘과 영적 가치로 보면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으로 인하여 기죽지 마시고 힘을 내십시오. 우린 하늘에 신령한 것을 가진 자들이므로 세상의 환경으로 인하여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세상을 이기게 하는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비록 사도요한처럼 밧모 섬에 유배당하고 살지만 영은 천국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우리의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 속에서 찬송하는 나를 보십시오. 그리고 할렐루야 찬송하십시오. 찬송은 이긴 자만이 부를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찬송만 받으십니다. 산 자로서 마음껏 찬양하면서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가 우리의 찬송이 되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죽었던 자를 산 자 되게 하여서 아버지를 찬송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옵소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의 입술에서 찬송이 그치지 않고 늘 울려 퍼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