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창덕궁
비밀의 정원 '후원'걷기
창덕궁은 조선 태종때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에 이르러 재건됐다. 그 이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재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 역할을 하였으며,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 됐다.
창덕궁은 시간만 내면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있는 왕실 정원인 '후원'은 오로지 사전 예약으로만 볼 수 있다. 관람 희망일 6일 전 오전 10시 정각에 인터넷 예매 페이지가 오픈된다. 하지만 단 1분만에 그날 관람시간이 다 매진될 정도로 후원 예약경쟁은 치열하다. 물론 현장에서도 표를 구할수 있지만 매일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전 예약이 안심이다.
주말 후원 예약에 매번 실패해서 평일에 하루 휴가를 내기로 했다. 휴가 6일 전 아침 10시에 설레는 마음으로 후원 예약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래도 평일이라 그런지 바로 예약에 성공할 수 있었다. 복권 당첨이라도 된 것 마냥 기분이 좋다.
[창덕궁 후원 관람 안내]
• 입장료 : 5천원
• 입장시간 : 아침 10시~오후 3시
• 관람코스 : 후원입구-부용지-애련지-연견당-관람지-옥류천 (총 1시간 반 가량)
창덕궁 돈화문

9시 창덕궁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갔다. 평일 아침의 궁궐은 따사롭고 평화롭다.
서울에는 창덕궁 뿐만 아니라 경복궁, 덕수궁, 경희궁, 창경궁 등 총 5개의 궁궐이 있다. 한 도시에 5개의 궁궐이 있는 건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후원은 조선시대 왕실 정원으로, 왕가만 이용할 수 있었던 비밀 정원이다.
그래서 한동안 '비밀의 정원'이라는 뜻의 '비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낙선재를 지나면 후원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사전 예약자들만 들어갈 수 있고,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문화해설사의 동행하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
관람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족히 80여명은 되어보인다.
매 관람시간마다 이 정도 관람객이라면 하루에만 수백명이 후원을 찾고 있는 셈이다.
특히 단풍이 물든 후원이 멋있다고 해서 가을에는 유독 더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다. 나 또한 붉은 단풍이 어우러진 풍경을 보고 싶어 후원관람을 예약했다.
젊은 문화해설사는 본격적인 투어에 앞서 이렇게 설명한다.
"모두들 단풍 구경하려고 후원에 오셨죠? 가을의 후원도 좋지만 눈오는 후원의 풍경도 좋답니다. 그리고 꽃이 가득한 봄도 좋고, 싱그러운 여름의 풍경도 좋답니다"
아무래도 후원을 제대로 보려면 계절마다 와야겠다.
후원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은 감탄을 뿜어내며 사진찍기에 한창이다.
궁궐 담벼락에 걸쳐앉은 화려한 붉은 단풍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가을 바람. 코끝을 자극하는 청아한 향기까지. 가을의 후원은 완벽했다.
수백년 전 조선시대 왕들이 걸은 길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후원 입구


부용지
입구에서 5분정도 걸어가면 가장 먼저 부용지를 만날 수 있다.
부용지는 휴식과 학문, 교육을 하던 장소다. 호수 맞은편에는 규장각이 있다. 학문을 사랑했던 정조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고 조선의 문예부흥을 꿈꿨다. 지금은 서울대학교로 규장각이 옮겨졌지만 독서의 계절에는 간혹 한시적으로 이곳을 개방하며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간혹 우리 문화유산이 작고 소박하다며 실망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은 크기가 아닌 조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문화유산이 거대함과 위용에 주력한다면 우리의 문화유산은 주변과의 어울림이 포인트다. 어떠한 건물이라도 주변 풍경과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배치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아름다움이다.
바로 이곳 부용지의 아름다움 또한 그랬다.




불로문, 애련지
다시 5분쯤 걸어가면 불로문과 애련지가 나온다. 가는 길은 평지가 계속 되어 별로 힘들지 않다. 오히려 힘든 것이 있다면 후원의 비밀 스러운 곳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참는 일이었다. 간혹 자유관람이 가능한 시기가 있다니, 그때 다시 와야겠다.
불로문은 돌로 만들어진 문인데 이름처럼 늙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문화 해설사가 이 문을 지나면 늙지 않고 장수한다고 하니, 사람들 모두 우르르 문으로 모여든다. 나 또한 줄을 서서 슬쩍 불로문을 통과해본다. 후원의 멋진 풍경을 매일 볼 수 있다면 불로장생도 가능하지 않을까.
불로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작은 연못이 나온다. 숙종은 연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숙종은 이 연못을 애련지라 불렀고, 연못에 있는 정자를 애련정이라 이름붙였다. 숙종은 "내가 연꽃을 좋아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했다.


존덕정, 폄우사 그리고 연경당
애련지를 지나면 또 하나의 연못이 있고 이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몇개의 정자가 있다.
존덕정은 덕을 존경하는 뜻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건물이 특징이며, 관람정은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있다.
우리나라는 정자 문화가 특징이다. 지금도 시골 마을 입구에는 정자가 꼭 하나씩 있다. 꼭 시골이 아니라 아파트가 대중화된 대도시에도 공터 한켠에는 정자가 있다. 사람들은 정자에 모여 시간을 보낸다. 정자의 매력은 개방성에 있다. 비밀스럽지 않고 오픈되어 있다. 서로 어울리고 도와주기를 좋아했던 우리 나라 인심이 담겨있는 곳이다.
이번에 가볼 곳은 연경당이다. 조선 사대부의 살림집을 본때 만든 일종의 접견실이다.
일반 민가는 99칸 까지만 만들수 있었지만, 연경당은 무려 120칸이 있다.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가 중심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분리되어 있으나 내부는 연결되어 있다. 연경당은 외국손님들이 묵는 숙소인데, 국가 행사시 사신들로 가득했을 이곳은 얼마나 활기찼을까.





옥류천
후원의 마지막 코스는 옥류천이다. 옥류천까지 가는 길은 다른 곳과 달리 약간의 오르막길이다. 그래도 등산 정도로 힘들지는 않아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처음에 옥류천을 떠올렸을 때 웅장한 폭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는 옥류천은 예상외로 아담하고 소박하다. 문화해설사도 옥류천에 도착해서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한국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은 크기가 아닌 조화로움에 있다는 걸 떠올려본다면,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룬 옥류천은 한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바위에는 인조가 썼다는 옥류천이라는 글씨가 있고, 숙종이 지었다는 오언절구 시도 새겨져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은 수백년전 왕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나온다.



마른 단풍잎을 밟으며 후원을 거닐다보니, 벌써부터 다음 계절의 후원풍경에 설레여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