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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만난 영화] 계획의 오류 - 사랑의 블랙홀
일기예보에 따르면, 이번 주 날씨는 아주 화창하다. 눈, 비 소식도 없다. 새해가 되면 텔레비전에서 어김없이 틀어 주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성촉절[주님 봉헌 축일])의 ‘필코너스’(빌 머레이)는 기상 캐스터다.
오늘은 성촉절 행사를 취재하러 가는 날이다. 성촉절은 뚱뚱한 다람쥐처럼 생긴 설치 동물 그라운드호그를 이용해서 겨울의 마지막 추위가 얼마나 더 지속될지 예측해 보는 전통 축제다.
필은 방송국 직원에게 취재만 하고 바로 돌아와서 저녁 생방송을 진행하겠다고 다짐한다. 그가 간 곳은 펜실베니아의 작은 시골 마을인 펑추토니다. 이곳에는 ‘펑추토니 필’이라는 애칭을 가진 유명한 그라운드호그가 산다.
전설에 따르면, 펑추토니 ‘필’은 겨우내 동면하다가 2월 2일에 땅굴에서 기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굴에서 나오다가 자기 그림자를 보게 되면 다시 굴속으로 들어가 버려서 추운 겨울이 6주나 더 이어진다고 한다. 반대로 자기 그림자를 못보고 굴 밖으로 완전히 나오면 세상에 봄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날 행사에서 진행자들은 펑추토니 필이 자기 그림자를 봤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앞으로 6주간 겨울이 더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기상 캐스터 ‘필’은 이런 허무맹랑한 구닥다리 축제를 취재한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다. 그라운드호그가 자기 그림자를 봤다고 추운 날씨가 계속될 거라니, 어이가 없다.
그는 취재가 끝나자마자 펑추토니를 떠나 방송국으로 간다. 하지만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예기치 못했던 문제가 생긴다. 갑자기 눈보라가 치고 폭설이 내려 도로가 끊긴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필’은 펑추토니로 돌아가 하루를 더 묵는다. 날이 맑을 것이라던 기상 캐스터 ‘필’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고, 혹한이 지속될 것이라는 그라운드호그 ‘필’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미래 예측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한다. 심지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타인의 운명을 점치는 사람들이다. 사주팔자나 관상, 손금이나 타로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미래를 점친다. 여론 조사를 실시해 미래의 대통령을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경제학자들은 세계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예측한다.
직업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이도 있다. 바로 기상 캐스터다. 아침저녁으로 텔레비전에 나와서 앞으로의 날씨를 알려 준다. 미래를 예측하고, 그 결과를 대중에게 날마다 공표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사람들이다. 내일의 날씨는 물론, 한 주, 한 달, 심지어 한 해의 기상도 전망해 준다.
기상 캐스터나 점쟁이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며 산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미래를 계획한다. 이를테면, 토요일에 해야 할 일이 없고 날씨가 화창할 것이라고 예상하면, 나들이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언제까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예상하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계획의 오류
흥미로운 것은 앞날에 대한 예측을 토대로 한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호주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의 하나인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는 2007년에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57년에 오페라 하우스의 건축 결정이 내려질 당시, 총 700만 달러의 비용으로 1963년까지는 모든 공사가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이는 크게 빗나갔다. 실제로 소요된 건축비는 총 1억 2백만 달러가량 되었고, 197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개관할 수 있었다. 처음 예상했던 비용의 15배 정도가 추가로 들었고, 공사 기간도 10년이나 길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계획을 완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노력을 추정할 때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계획의 오류(planning fallacy)라고 한다. 계획의 오류는 오페라 하우스의 건설과 같은 대규모 사업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작은 계획을 세울 때도 일어난다. 휴가를 가기 일주일 전까지는 일을 쉽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휴가를 떠나는 날 새벽까지 밤새워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새해 계획의 오류, 작심삼일
우리가 연례행사처럼 범하는 계획의 오류가 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이 신년 계획을 세운다. 새로운 1년이라는 미래의 도화지에 자신의 계획을 새로운 마음으로 그려 보는 것이다. 날마다 30분씩 영어를 공부하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하루에 이 정도 시간을 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경험해 보았다시피 신년 계획은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다. 한 해가 지나고 나면 새해 계획 중에 제대로 실천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지박약이라고 자신을 비난하면서 한해를 마무리한다.
계획의 오류가 발생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때 예상외의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일이 예측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과정만을 머릿속에 그리며 계획을 세운다. 문제는 우리가 실제로 대면하는 현실은 예상외의 일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중간시험을 망쳤으니 기말시험 기간에는 공부만 하겠다고 계획을 세웠는데, 군 복무 중이던 절친한 친구가 시험 전날에 특별 휴가를 받고 자취방에 나타나는 것이다.
계획을 세울 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사전에 예측하여 이를 모두 반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계획에는 늘 오류가 따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획을 세울 때 이런 오류의 범위를 너무 좁게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계획대로 실천하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신이 아닌 이상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정확히 예측하고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전문가도, 심지어는 똑같은 일을 이전에 수행했던 사람들조차 계획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래서 계획의 오류는 쉽게 줄이기 힘들다. 사람들 대부분이 계획의 오류를 범한다. 최악의 경우를 고려하여 계획을 짜도 계획의 오류가 생긴다고 한다. 그러니 신년 계획이 작심삼일로 끝났다고 하여 스스로를 의지박약이라고 비난하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계획을 실천한지 삼 일도 되지 않아서 돌발 상황이 발생한 것이 작심삼일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계획의 오류를 줄이는 한 가지 방법은 지난날에 자신이 비슷한 계획을 세웠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를 참고하는 것이다. 그동안 영어책 한 권을 보는 데 3개월이 걸렸다면 이번에 비슷한 분량의 다른 영어책을 보는 데도 거의 3개월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 지난날의 결과를 무시하고 이번에는 한 달 안에 끝내겠다고 계획을 세우면, 조만간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는 자신을 다시 만날 확률이 높다.
미래의 불확실성과 희망
그렇다면, 계획의 오류가 없는 삶은 행복할까? 폭설 때문에 펑추토니에서 하룻밤을 묵은 ‘필’에게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덕분에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롭게도 예측하지 못했던 폭설 때문에 필이 받았던 스트레스보다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진 뒤 받는 고통이 더 크다.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있게 된 순간 필은 곧 절망에 빠진다. 미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불확실성은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원천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래 예측의 오류가 사라지는 순간, 미래의 희망도 함께 사라진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우리를 작심삼일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끔은 희망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이유다.
[심리학이 만난 영화] 부주의 맹시 - 감시자들
경찰청 감시반 소속 하윤주(한효주)의 기억력은 초능력에 가깝다. 마치 감시 카메라에 찍힌 장면을 보는 것처럼 자기 눈으로 본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하윤주의 임무는 지하철 2호선에 탄 목표물을 감시하는 것이다.
그녀는 사십대 후반 남성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기억해 낸다. 목표물의 인상착의. 그가 타고 있던 지하철의 객차 번호. 지하철에서 벌어진 사건과 거기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 목표물의 동선과 그가 움직인 정확한 시간. 심지어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번호부에 적던 목표물의 필압까지 확보해 두었다.
하윤주가 놀라운 기억력으로 목표물에 대해 설명할 때, 갑자기 감시반의 황 반장(설경구)이 목표물이 들고 있던 신문에는 뭐가 쓰여 있었는지 묻는다. 하윤주가 멈칫거린다. 목표물이 지하철에서 쇼핑백을 든 여자와 부딪히면서 신문을 떨어뜨리는 것을 분명히 봤다. 다시 한번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어 본다. 지하철에서 봤던 것들을 하나씩 지워 가면서 신문에 대한 기억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그녀의 이미지 속에 있던 모든 대상은 지워지고 신문만 남는다. 이제 신문의 내용을 읽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이 보여 준 것은 글자가 다 지워진 신문지뿐이었다. 하윤주의 기억에는 신문의 기사 제목이나 내용은 입력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때 황 반장이 소리친다. “부주의 맹시!”
부주의 맹시
조의석, 김병서 감독이 공동 연출한 2013년 개봉작 ‘감시자들’의 주인공은 경찰청 특수 조직인 감시반 요원들이다. 이들의 목표물은 초강력범들이다. 삼 분만에 은행을 털고, 특검 조사 대상의 서류를 탈취하면서 단서 하나 남기지 않는 무장 범죄 조직이 감시반의 상대다.
감시반이 사용하는 무기는 일반 경찰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감시반의 본부는 최첨단 기기를 활용해서 감시반을 지원하지만, 현장 요원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바로 그들의 눈과 머리다. 요원들은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감시용 기기의 사용을 최소화한다. 대신 개개인의 관찰력과 기억력을 이용한다. 요원들의 관찰력은 감시 카메라도 놓치는 범인을 찾아낼 정도로 뛰어나다.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기억력이다. 마치 사진을 찍듯이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낸다. 보고 기억하는 능력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지만, 감시반이 현장에서 사용하는 관찰력과 기억력이라는 무기의 성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는 사람은 경찰대를 갓 졸업하고 감시반에 선발된 하윤주다. 그런 하윤주도 목표물이 가지고 있던 신문의 내용은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이다, ‘부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 때문이다.
부주의 맹시는 우리가 주의를 두지 않은 대상을 지각하지 못하는 심리적 현상을 일컫는다. 황 반장은 하윤주가 목표물의 움직임에만 온 신경을 모으다 보니 신문에는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신문의 내용은 기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농구공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고릴라 복장을 하고 이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고 생각해 보자. 정상 시력을 가진 사람이 고릴라 차림을 한 이 사람을 못 볼 수 있을까? 더구나 한눈팔지 않고 농구공을 패스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의 대니엘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답은 ‘그렇다’이다.
이들은 연구 참여자들에게 세 명씩 한 팀으로 구성된 사람들이 농구공을 서로 패스하는 영상을 보여 주었다. 참여자들의 과제는 흰색 티셔츠와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두 팀 가운데 흰색 티셔츠를 입은 팀원들이 주고받은 공의 횟수를 정확하게 세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패스를 주고받는 중간에 등치 큰 사람이 고릴라 복장으로 등장해서 이들 사이를 통과한다는 것이다. 그냥 빠르게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멈춰 서서 카메라를 보고 진짜 고릴라처럼 자신의 가슴을 몇 번 두드리기까지 한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고릴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 영상을 본 사람들 가운데 50%가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영상을 보여 주어도 상당수가 고릴라를 보지 못한다. 나중에 다시 영상을 보여주면 자신이 보지 못한 고릴라가 얼마나 컸는지를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혹시 고릴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영상에 집중하지 않고 도중에 딴 짓을 한 것은 아닐까? 이들은 몇 번의 패스가 이루어졌는지를 거의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영상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눈 뜬 장님이 되는 이유
이 연구의 핵심은 패스의 횟수를 세도록 한 것이다. 참여자들은 두 팀 가운데 한 팀의 패스만 정확히 세려고 모든 주의를 기울여서 공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 결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대상인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이다.
부주의 맹시가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의 의식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눈을 포함해서 우리의 감각 기관에는 수많은 정보가 접수되는데, 이 가운데 의식적으로 처리되는 것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주의는 선택적인 속성을 갖는다. 우리가 선택한 대상(농구공 패스)에 주의를 집중하면, 다른 대상(고릴라)에는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그래서 눈은 뜨고 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대상은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부주의 맹시는 말 그대로 우리가 눈 뜬 장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운전 중 통화가 위험한 이유
대부분의 사람은 감시반 요원도 아니고, 평생 눈앞을 지나가는 고릴라를 볼 일도 없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도 부주의 맹시는 일어난다. 단지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일상생활 가운데 부주의 맹시가 일어나는 가장 흔한 상황은 전화 통화를 할 때다. 통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인지적 과제다. 상대방의 질문에 답하고자 기억 속에 저장된 정보를 찾아내야 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고 순간순간 판단과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이야기의 주제가 복잡해지면 상대방의 말에 숨은 진심을 찾아내야 하고, 가끔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통화는 농구공의 패스 횟수를 세는 것보다 더 많은 주의를 요구한다. 따라서 통화하는 동안 우리의 주의는 통화에 집중된다. 그 결과, 부주의 맹시에 빠지게 된다. 눈을 뜨고 앞을 보며 운전하고 있지만, 통화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눈앞에 나타난 고릴라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길을 걸으며 통화에 집중하면 눈은 자동차를 응시하고 있어도 우리의 뇌는 내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를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
운전 중 휴대 전화의 사용은 사고를 일으킬 위험이 네 배 정도 증가한다. 통화 때문에 반응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초보운전자나 경험이 많은 운전자나 마찬가지다. 운전을 잘한다는 사람들조차도 휴대 전화로 통화하다가 일어난 급박한 상황에는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다. 이는 운전을 잘한다는 택시 운전기사나 고속버스 운전기사의 경우에도 운전 중 휴대 전화를 사용하면 사고가 날 가능성이 그 만큼 커진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핸즈프리(맨손통화기)를 사용하더라도 통화는 운전자의 반응속도를 늦춘다는 것이다. 휴대 전화를 손으로 쥐고 있든 아니든 간에 통화하는 것 자체가 운전자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음주 운전만큼 ‘운전 중 통화’는 위험하다.
마찬가지로 무단 횡단만큼 ‘보행 중 통화’는 우리에게 큰 위험을 초래한다. 이제는 운전 중 통화와 보행 중 통화의 위험성과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려는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심리학이 만난 영화] 초점 주의의 오류
1920년대 파리로 가는 시간 여행
2010년 파리의 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밤거리를 홀로 헤매다 지쳐 길가의 계단에 걸터앉은 미국인 여행객 길(오웬 윌슨). 그의 앞에 푸조 자동차 한 대가 멈추어 선다. 돈 많은 자동차 수집광들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1920년대식 클래식 푸조. 자동차 문이 열리고 기분 좋게 술에 취한 사람들이 그를 초대한다. 푸조를 타고 길이 도착한 파티. 그곳은 놀랍게도 1920년대의 파리였다.
길에게 1920년대의 파리는 가장 카리스마가 넘치는 과거다. 그가 매혹된 헤밍웨이나 피카소와 같은 작가들이 걸작을 만들고, 인생과 예술에 대해 토론했던 그 시절. 푸조를 얻어 타고 길은 자신이 꿈꾸던 가장 아름다운 과거에 도착한 것이다.
그곳에는 길이 원하던 모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예술가들과의 만남이었다. 길은 피츠제럴드 부부를 만나고, 그들은 길을 헤밍웨이에게 소개시켜 준다. 헤밍웨이는 길이 쓴 소설을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비평가 스테인에게 봐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스테인의 집에서 피카소와 함께 온 아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아르)를 만난다. 아드리아나(감독이 만들어 낸 캐릭터로 실존하지 않은 인물)는 피카소의 연인이지만, 예전에는 모딜리아니와 사귀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피카소를 버리고 길에게 다가온다. 길은 1920년대로 가서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진다.
우디 앨런 감독의 2011년 작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는 파리의 아름다움을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낸다. 흥미로운 것은 길이 현재의 파리뿐만 아니라 과거의 파리도 찾아간다는 점이다. 그는 대낮에 환한 파리의 현재를 경험하고, 자정이 되면 어둠에 잠긴 파리의 과거를 맞이한다.
현재의 파리는 눈부시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파리에서 현재보다 더 눈부신 사람들을 만난다. 파리에서 숨 쉬며 살았던, 걸작들을 만들어 낸 수많은 천재들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벨 에포크의 파리
파리의 밤거리. 아드리아나에게 귀걸이를 선물하던 순간, 마차 한 대가 그들 앞에 멈춘다. 그 마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벨 에포크(Belle Epoque), 곧 ‘아름다운 시절’이라 불리던 1890년대의 파리이다.
아드리아나에게 그 시대의 파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시대다. 마차는 그들을 아드리아나가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시절’의 레스토랑 맥심으로 데리고 간다, 마치 푸조가 길을 그가 꿈꾸던 황금시대인 1920년대의 파리로 데려갔던 것처럼 말이다.아드리아나와 길은 맥심에서 아드리아나의 연인이었던 로트렉을 만난다. 로트렉은 그들에게 친구인 고갱과 드가를 소개한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던 1890년대의 파리에서, 자신의 마음속 영웅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살던 1920년대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아름다운 시절’의 파리에 남기로 결심한다.
흥미로운 점은 벨 에포크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고갱은 아드리아나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세대가 공허하고 상상력도 없다며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불평한다. 고갱에게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살던 르네상스 시대가 황금시대였던 것이다.
2000년대를 살던 길에게는 1920년대가 황금시대였지만, 1920년대를 살던 아드리아나에게는 1920년대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현재에 지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아드리아나에게는 1890년대의 파리가 황금시대였지만, 1890년대를 살던 고갱에게는 1890년대는 공허한 현재에 지나지 않았다. 도대체 왜 현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시절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주변 사건을 간과하는 초점 주의의 오류
현재의 삶에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사랑하고, 취직하며, 결혼하는 것 등이다. 이런 일은 우리 인생 이야기의 축을 이루는 중심 사건이다. 하지만 현재의 삶에는 중심 사건 외에도 주변 사건이 더 많다. 중심 사건을 완성하거나 삶 자체를 유지하려고 어쩔 수 없이 수행하고 겪어야 하는 일이 널려 있다.
이를 테면, 결혼이라는 중심 사건은 수많은 주변 사건을 수반한다. 예식장을 잡고, 청첩장을 돌리며, 신혼여행을 예약한다. 이 바쁜 와중에도 연말 정산 마감일은 하루도 봐주지 않고 다가온다. 음식물 쓰레기는 악취를 내뿜기 전에 내다 버려야만 한다. 결정적으로 결혼식 날 비가 내린다. 덕분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재의 중심 사건만 고스란히 즐길 수는 없다. 현재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시절이 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서 삶을 지켜보는 경우에는 주변 사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의 사건이나 다른 사람이 경험한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경우에 사람들은 중심 사건에만 주목하게 되고 주변 사건의 영향은 간과하는 경향을 초점 주의(focalism)의 오류라고 한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는 예쁜 신랑 신부의 아름다운 결혼식만 보이는 것이다. 당사자들이 결혼 과정에서 처리해야 했던 귀찮고 짜증 나는 수많은 주변 사건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하객들은 당사자들이 실제로 느낀 행복감보다 더 큰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과장된 예측을 하는 경향이 있다.
왜 내 인생만 우울하지
누리 소통망 서비스(SNS)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이유다. ‘남들은 다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우중충하지?’ SNS에 올라온 사진들은 모두 환하다. 해외여행에서부터 유명 음식점의 사진까지 승리의 환호를 올리며 활짝 웃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바로 인생의 승자라고 외치는 것 같다. 오늘 하루도 시시콜콜한 일상과 씨름하고 있는 내 인생만 복잡하고 골치 아픈 것 같다.
하지만 타인의 삶에서 우리가 주로 보게 되는 것은 중심 사건들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우리는 타인의 중심 사건만 보고 상대방이 얼마나 행복할지 추정한다. 그런데 SNS는 타인의 삶에서 중심 사건만 보는 초점 주의의 오류를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SNS에 올라온 사진들은 인생의 중심 사건 가운데 좋은 것만 고르고 고른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특정 부분만을 선택하고 편집해서 올린 것이다. 심지어 과장하기도 한다. 덕분에 우리는 상대방이 공개한 중심 사건에 대한 사진 몇 장만으로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보다 엄청나게 더 행복할 것이라 착각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는 것이다.
현실에는 현실의 비가 내린다
길과 아드리아나, 그리고 고갱이 열망하는 시대는 그들의 기억 속에 오직 중심 사건만으로 구성되었다. 자신들이 흠모하는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이라는 중심 사건만 있기 때문에 그 시절이 황금시대로 보이는 것이다. 골치 아픈 주변 사건으로 넘쳐 나는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시절이 옛날에는 있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옛날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것도 중심 사건만 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부모님 세대만 해도 꿈과 낭만이 있었는데,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하루하루 팍팍하기만 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아름다운 시절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길은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그녀와 함께 길을 걸으려는 순간,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도 없는데 사랑이라는 중심 사건이 시작되려는 순간에 비라는 번거로운 주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사랑의 시작을 망칠지도 모르는 비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것을 걱정하는 길에게 그녀가 말한다. 젖어도 상관없다고, 파리는 비가 내릴 때 가장 아름답다고 말이다.
현실에는 현실의 비가 내린다. 그래서 현실은 늘 완벽하게 만족스러울 수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즐길 수 있다면, 가끔은 비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더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심리학이 만난 영화] 학습된 무기력, 내 깡패 같은 애인
“그래도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착혀. 거 테레비에서 보니까 그 프랑스 백수 애들은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 부수고 개지랄을 떨던데. 우리나라 백수들은 다 지 탓인 줄 알아요. 응? 지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아유, 새끼들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 야, 너도 너 욕하고 그러지 마. 취직 안 된다고. 응? 니 탓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살어. 힘내!”
김광식 감독의 2010년 작 ‘내 깡패 같은 애인’의 삼류 깡패 동철(박중훈). 그는 업계에서는 퇴물이 된 지 오래다. 깡패인데도 일반인과 싸워서 터지기 일쑤다. 그의 삶에서는 ‘열심’이나 ‘성실’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그런 그가, 노력하면 결국에는 이루어진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지만 아직 취직하지 못한 ‘옆집 여자’ 세진(정유미)에게 위로랍시고 건넨 말이다.
내부 귀인 대 외부 귀인
과연 세진이 취직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못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부가 잘못했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그 사건의 원인은 무엇인지 추론한다. 이를 ‘귀인’(歸因)이라고 한다. 원인을 어디로 돌릴지 판단하는 과정이다.
사람들이 귀인을 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능력이나 노력과 같은 개인의 내적 요인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내부 귀인). 다른 하나는 상황이나 환경과 같은 개인 외부의 요인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외부 귀인).
이를테면, 축구 대표 팀이 경기에서 패한 이유를 선수들의 실력 부족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표 팀의 실패를 내부 귀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 때문에 경기에서 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판이라는 외부 요인에 실패를 귀인하는 것이다.
문화와 귀인 양식
귀인에 대한 연구 결과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동철이의 주장처럼 귀인 방식이 국가나 문화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처럼 집단주의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긍정적 사건을 외부 귀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미용실 원장님 덕분에 미스 코리아 ‘진’에 뽑힐 수 있었다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집단주의 문화에서 전형적으로 관찰되는 외부 귀인이다.
반대로 자신에게 일어난 부정적 사건은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내부 귀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동철이의 말처럼 취직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 또는 노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등 개인주의 문화권의 귀인 방식은 집단주의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과는 정반대다. 자신에게 일어난 긍정적 사건은 내부 귀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서양의 올림픽 메달 수령자들의 인터뷰를 들어 보면 주로 자신이 올림픽을 위해서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했는지를 설명한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노력과 실력이 메달 획득의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의 원인은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의 삶이 곤경에 빠진 이유가 정부 정책의 실패나 세계의 경기불황과 같은 상황적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는 집단주의 문화권에 속하기에 자신의 성공은 외부 귀인하고, 실패는 내부 귀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부정적 결과를 지속적으로 내부 귀인하도록 요구하는 문화는 치명적 결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학습된 무기력
우리에 갇힌 강아지 한 마리를 생각해 보자. 우리의 한가운데를 칸막이로 막아서 둘로 나누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쉽게 뛰어넘어 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 바닥에는 전기 충격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둘 중 어느 한쪽에 강한 전류를 흐르게 할 수 있다.
한쪽에서 평화로이 있는 강아지 쪽에 강한 전기 충격을 주면, 놀란 강아지는 바로 칸막이를 뛰어넘어 다른 쪽으로 이동한다. 문제는 강아지가 칸막이를 뛰어넘을 수 없도록 줄로 묶어 놓을 때 발생한다. 줄에 묶인 상태에서 전기 충격을 주면, 처음에는 줄 때문에 칸막이를 뛰어넘을 수 없는 데도 칸막이를 뛰어넘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칸막이를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이를 넘으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비극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헛수고라는 것이 뚜렷해지면, 더 이상 전기 충격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하고 전기 충격을 담담히 견디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배를 깔고 엎드린 채로 전기 충격이 주어질 때마다 가끔 움찔거릴 뿐 일어서려고도 하지 않는다.
만일 이때 줄을 풀어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놀라운 것은,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칸막이를 뛰어넘어 전기 충격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탈출할 수 있는 데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강아지는 지속적인 좌절을 통해서 자신이 칸막이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전기 충격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줄이 풀어져도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다. 지속적인 좌절을 통해 무기력을 학습하게 된 것이다.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만은 학습된 무기력에 관한 연구에서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삶을 포기하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사람도 자신의 삶을 제 뜻과 노력에 따라서 통제할 수 없다는 무기력을 학습하게 되면, 우울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울은 청년 자살의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꼽히는 심리적 증상이다.
청년 자살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자살하는 사람은 1만 5천 명이 넘는다. 2003년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 사망률 부문에서 계속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자살은 20대의 사망 원인 가운데 40% 이상을 차지하고, 30대도 가장 많은 사망 원인이다. 이들의 주요 자살 동기는 염세나 비관이다. 도대체 무엇이 20-30대의 청년들을 염세와 비관으로 몰아가는 것일까?
‘내 깡패 같은 애인’의 세진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공정한 사회’에 대한 믿음을 가진 청년이다. 실제로 그녀는 능력과 노력 면에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면접을 제대로 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과 이력서에 적힌 출신 대학이 서울 이외의 지역에 위치한다는 것 때문에 면접관들은 그녀에게 직무와 관련된 질문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수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를 춤추며 불러 보라고 해 놓고 키득거린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취업 원서를 낸다는 것은 한 번 더 좌절을 맛보기로 결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개선의 여지없이 번번이 거듭되기만 한다.
이런 조건에서 실패를 외부 요인이 아닌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과 같은 내적 요인에 귀인하는 것은 자존감을 고갈시키고 수치심을 증가시킨다. 수치심은 우울과 자살을 증가시키는 주요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세진과 같은 상황에서 실패에 대한 내부 귀인은 자기 파괴의 안내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청년 자살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지만, 청년들이 자신의 실패를 개인의 무능과 노력 부족에 내적 귀인하도록 유도하는 문화도 청년 자살이 급증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내 탓이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태도는 존경할 만하지만, 가끔은 스스로에게 “너는 잘못이 없다.”고 다독여 줄 필요도 있다. 개인의 노력이 너무나도 쉽게 좌절되는 시절에는 삼류 깡패 동철의 귀인 방식이 삶의 끈을 놓지 않는 힘을 주기도 한다.
[심리학이 만난 영화] 자기 충족적 예언 매트릭스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예언자 ‘오라클’(글로리아 포스터)을 찾아간다.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유일자인 바로 그 사람, ‘더 원’(The One)이 맞는지 물어보려고 말이다. 긴장한 표정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간 네오 앞에는 마음씨 좋게 생긴 아주머니가 쿠키를 굽고 있다. 그녀가 바로 모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오라클이다.
대개의 예언자들이 그렇듯이 오라클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말만 한다. 네오가 진짜로 듣고 싶은 것은 자신이 ‘더 원’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이다. 그런데 그녀는 답을 주지는 않고 오히려 네오에게 되묻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네가 ‘더 원’이라고 생각해?”
네오는 솔직히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이때 오라클이 자기 집 방문 위에 걸린 현판을 손으로 가리킨다. 고개를 들어 현판을 바라보는 네오. 거기에는 라틴어로 쓰인 글귀가 하나 있다. ‘Temet Nosce’(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의 진짜 의미
주제 파악 못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에게 해 주는 바로 그 말이다. 오라클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사람이라는 ‘모피어스’(로렌스 피쉬번)의 말에 거의 설득당한 네오였다. 오라클이 그 믿음에 방점을 찍어 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갔던 것인데, 너 자신을 알라니.
오라클은 네오가 ‘더 원’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는 듯이 그의 눈과 입, 그리고 손바닥을 자세히 관찰한다. 마치 소의 건강을 확인하려고 눈과 치아 상태를 검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던 오라클이 네오에게 말한다.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어.”
자기 눈을 쳐다보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오라클에게 네오는 말한다.
“저는 ‘더 원’이 아니군요.”
1999년 워쇼스키 형제가 공동으로 제작한 ‘매트릭스’(The Matrix)는 믿음에 관한 영화다. 그 중심에는 네오가 인류를 구원할 ‘더 원’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가장 먼저 놓아 버린 사람은 바로 네오 자신이었다. 자신이 ‘더 원’이 아니라고 말하는 네오에게 오라클은 “Sorry.” 하고 대답한다.
오라클은 왜 네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것일까? 네오는 ‘더 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찾아온 자신에게 ‘더 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줘야 하니 오라클이 “미안하다.”고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라클의 “Sorry.”는 ‘안타깝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오라클은 네오가 ‘더 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네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더 원’이 아니라고 말하는 네오가 안타까웠다. 그래서 “Sorry.”라고 했던 것이다.
오라클은 ‘더 원’이 된다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아무도 말해 줄 수 없고 스스로 온몸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면 누가 뭐라고 이야기한들 소용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라클은 네오가 안타깝고 안쓰러웠던 것이다.
네오에게는 자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자신이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믿지 못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네오의 삶은 지금까지의 특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이고, 밤에는 컴퓨터 해킹이나 하던 그런 인생이었다. 그런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니,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네오 곁에는 그가 인류를 구원할 존재라고 굳게 믿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네오가 ‘더 원’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사람은 바로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다.
트리니티의 입맞춤
‘스미스’ 요원(휴고 위빙)에게 붙잡힌 ‘모피어스’를 구하려고 매트릭스로 들어간 네오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여 주지 못한 능력으로 모피어스를 구해 낸다. 네오가 ‘더 원’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스미스 요원마저 제압하고 매트릭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전화기가 설치된 303호 방문을 열어젖힌 네오!
놀랍게도 그곳에는 따돌렸다고 생각했던 스미스 요원이 총을 겨누며 네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에 맞은 네오는 자신의 몸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본다. 자신도 결국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는 죽음에 이른다. 모피어스를 포함해서 그동안 네오가 ‘더 원’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이들에게 그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모두가 네오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였을 때 트리니티는 숨이 끊어진 네오에게 다가가 말한다, 자신이 사랑에 빠지는 남자가 바로 ‘더 원’이 될 것이라고 오라클이 예언했다고. 그러니 당신은 죽을 수 없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러고 나서 네오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네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네오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부활한다. 트리니티의 믿음이 결국 네오를 진짜 ‘더 원’으로 만든 것이다.
자기 충족적 예언
사람들은 자신의 기대나 믿음을 품고 상대방을 바라보며, 상대방의 행동이나 미래를 예측한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대는 우리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우리의 변화된 행동 때문에 상대방의 행동이 변화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의 행동과 미래는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품은 기대와 일치하는 방향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고 한다. 곧 자신의 예언이 실제로 현실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자기 충족적 예언에 대한 고전 이론 가운데 하나로, 미국의 로젠탈과 제이콥슨의 ‘피그말리온 효과’가 있다. 이들은 한 초등학교의 전 학생을 대상으로 일종의 잠재력 검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주 높은 점수를 받아서 앞으로 1년 안에 성적이 크게 향상할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이 누구인지 선생님들에게 알려주었다. 곧 학생들 중에 꿈나무가 누구인지 알려 준 것이다.
8개월 뒤 실시한 검사에 따르면, 꿈나무로 지목된 학생들은 평범하게 분류된 학생들보다 학업 수행은 물론 지능 검사에서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연구자들이 꿈나무로 지목한 학생들이 실제로는 처음에 실시한 잠재력 검사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은 이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은 잠재력 검사를 토대로 꿈나무를 가려낸 것이 아니고, 무작위로 학생들을 꿈나무와 보통 나무로 나누었던 것이다.
이 연구에서 꿈나무로 불렸던 학생들은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는 보통 나무로 불렸던 학생들과 성장 잠재력이나 지능이 비슷했다. 하지만 선생님들의 믿음이 보통 나무를 꿈나무로 성장시킨 것이다.
개구리 왕자
네오와 트리니티의 관계는 개구리 왕자 이야기와 닮았다. 마법에 걸려 개구리가 된 왕자에게 공주가 입을 맞췄더니 왕자로 변한다는 이야기. 개구리에게 입을 맞춘다고 정말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이야기는 개구리처럼 생긴 남자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개구리처럼 생긴 외모 때문에 잠재력은 평가 절하되고 남들이 다 무시하는 남자였지만, 공주는 그가 ‘더 원’이라고 믿고 지지해 주며 사랑했을 것이다. 덕분에 그는 공주의 믿음대로 실제로 왕자의 위치에 올라설 정도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온통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스미스 요원과 하루하루 힘겹게 싸우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려면 우선 자신의 잠재력에 대해 스스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너 자신을 알라.”의 의미를 기억해 두자.
하지만 이것만으로 스미스 요원의 주먹 세례를 견뎌 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나를 나보다 더 믿어 주는 사람의 사랑 말이다.
[심리학이 만난 영화] 차별과 사랑
“신은 우리를 닮았겠지. 물론 당신보다는 내 쪽을 더 닮았을 가능성이 높고.”
미국항공우주국(NASA)비밀 실험실의 보안 책임자 스트릭랜드. 그는 신이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백인 남성인 자신이 신과 닮았을 것이라는 그 믿음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믿음은 그 자체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믿음에 신과 닮은 자신은 우월하고, 자신과 다른 모습을 한 존재는 열등하다는 생각이 덧붙여질 때는 문제가 생긴다. 더구나 열등한 존재는 차별을, 심지어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생각은 세상을 위험에 빠뜨린다. 신의 피조물로 가득 찬 바로 그 세상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다.
차별은, 이를 합리화할 수 있는 ‘다름’을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장 쉽고 확실하게 그 다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상대의 외모다. 이러한 이유로 피부색과 성별이 차별의 근거로 가장 쉽게 이용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2017년 작 ‘셰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는 다름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되던 1962년 미국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한다. 흑인이 법적으로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던 시절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령이 선포되었지만, 흑인은 실질적인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투표 세금을 부과하고, 투표 자격시험을 통해 흑인이 투표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흑인이 자유로이 투표할 수 있게 만든 투표권법은 1965년에 통과되었으니, 영화는 차별이 정상으로 인식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차별은 모든 다름을 겨냥한다
차별은 흑인만이 아닌, 모든 다름을 겨냥한다. 언어 장애인인 일라이자와 함께 비밀 실험실의 청소부로 일하는 흑인 여성 젤다, 그리고 백인 남성 동성애자 자일스는 모두 차별의 대상이다. 그 이유는 다름에 있다.
다름을 확인하는 순간 다정함은 적의로 돌변한다. 자일스는 친절한 파이 가게 백인 총각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다. 바로 그때 흑인 부부가 파이 가게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중산층 이상의 전문직으로 보이는 옷차림의 흑인 부부에게 백인 총각은 앉지 말라고 단호히 말한다. 매장에는 자일스가 이미 앉아 있었고, 빈좌석들도 많았던 터다.
여기는 포장 주문만 하는 매장이라며 다시 소리친다. “어서 나가!” 그리고 자일스에게 말한다. “당신도 나가 줘. 여긴 가족 식당이야.” 그렇게 친절하고 다정다감했던 청년에게 흑인과 게이는 가족들이 봐서는 안 될 존재였던 것이다.이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는 바로 비밀 실험실의 수조에 갇힌 생명체다. 브라질의 아마존에서 잡아 온 생명체로, 파충류의 피부에 아가미가 달렸다. 인간처럼 얼굴과 팔다리를 지녔지만, 도마뱀과 인간을 합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생명체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이 생명체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잔인한 폭력이 이루어진다. 아마존의 원주민들에게는 신으로 추앙받던 존재지만, 비밀 실험실에서는 조롱과 폭력의 대상일 뿐이다. 이 생명체를 해부해 버리겠다는 결정도 쉽게 이루어진다.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존재로, 더욱이 나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에 큰 고민이나 갈등, 죄책감 따위는 수반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수많은 폭력과 대규모의 학살은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이기 시작할 때 이루어진다.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수많은 학살은 무차별적이다.
사랑과 유사성
모두가 이 아마존 생명체와 인간의 차이점에 주목할 때, 둘의 유사성을 본 사람은 바로 청소부 일라이자다. 일라이자는 자신처럼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처럼 입을 뻥긋거리고 소리를 못 내요.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 일라이자는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이 괴물이 아니듯, 실험실의 생명체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과 생명체의 유사성에 대한 발견은 이내 사랑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하지만, 서로 교감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달걀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데이트를 즐긴다. 낯선 외모가 주었던 공포는 점점 사라진다. 친숙함은 안전감을 증가시키고, 사랑의 감정을 강화한다. 이제 두려움은 설렘으로 바뀌고, 물고기처럼 깜박거리는 눈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일라이자가 이 생명체와 사랑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장애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줘요.”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장애인으로 여기는 여느 사람들과 달리, 실험실의 생명체는 일라이자를 그의 존재 자체로 인식한다. 사랑은 상대가 나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지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향한다.
사랑이 만들어 낸 아가미
둘의 사랑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지만, 사실 둘은 다르다. 물속에 있어야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는 생명체와, 물속에서는 숨을 쉴 수 없는 인간이니 말이다. 둘의 사랑은 비극적 결말을 예상케 한다. 둘의 사랑이 영원할 수는 없을까?
깊은 물속으로 이 생명체를 껴안고 함께 가라앉기 시작한 일라이자. 갑자기 일라이자의 목에 있던 상처에서 아가미가 돋아나더니 그가 물속에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사랑은 둘을 실제로도 비슷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여 목에 아가미가 생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서로 비슷하게 만든다.
미국의 로버트 자이언스를 비롯한 여러 심리학자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 함께 살다 보면 얼굴이 비슷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연구자들은 결혼한 지 25년 정도 된 실제 부부와 무작위로 짝지어진 남녀의 25년 전쯤의 사진과 최근 사진을 준비하였다. 누가 부부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사진을 보여 주며 얼굴이 닮은 정도를 판단하게 하였다.
결과에 따르면, 실제 부부의 사진들의 경우에는 젊었을 때 사진보다 나이가 든 뒤 찍은 사진이 더 닮은 것으로 지각되었다. 하지만 무작위로 짝을 이룬 남녀의 경우,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든 뒤의 사진은 모두 유사성의 정도가 낮은 것으로 지각되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부부의 얼굴이 닮아가는 이유는 함께 사는 동안 서로의 정서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정서는 전염된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하면서 부부는 같은 얼굴의 근육을 사용하고, 이러한 역사가 천천히 얼굴을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실험에 사진을 제공한 실제 부부들에게 자신들의 얼굴이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정도, 결혼 생활의 만족도, 행복감, 그리고 살면서 겪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사건의 수 등에 대해 질문하였다. 결혼한 지 25년 된 부부들은 서로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할수록 더 행복한 것으로 나타났고, 걱정이나 근심도 더 많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서로의 정서를 많이 공유할수록 부부는 더 행복해지고 얼굴은 더 닮아 가는 것이다.
물의 형태와 사람의 형태
물의 형태는 다양하다. 실험실 수조에 담긴 물과 버스 창에 떨어진 빗방울은 모양이 다르다. 어떤 모양의 컵에 담겨 있는지에 따라 물의 외형은 크게 달라진다. 하지만 물이라는 본질은 동일하다.
사람의 형태도 다양하다. 다른 피부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 다른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하지만 인간이라는 본질은 동일하다.
차별을 없애는 것은 그도 나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생각이다. 사랑은 차별 없는 마음에서 자라난다. 그리고 사랑은 내 얼굴에 그의 모습이 새겨지는 것을 허락한다.
[심리학이 만난 영화] 자폐의 심리학, 레인 맨
팜스프링스로 여자 친구와 주말여행을 떠나던 찰리(톰 크루즈)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다. 그는 바로 차를 돌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집이 있는 신시내티로 향한다.
차가운 추억
고향은 따뜻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간이지만, 찰리에게 고향 집은 차가운 기억만 남아 있는 곳이다. 찰리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자식보다 장미와 자동차를 더 사랑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1949년형 뷰익 로드마스터 컨버터블을 가지고 있었다. 8천 대 정도만 생산된 8기통의 클래식 자동차. 하지만 아버지는 차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찰리는 거의 전과목에서 A학점을 받았다. 자신의 성취를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친구들에게도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한 번만 그 차를 몰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안돼.” 사춘기였던 찰리는 아버지의 자동차 열쇠를 몰래 훔쳐 친구 네 명과 함께 자동차를 몰고 나갔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동차를 몰고 나갔을 것이라는 말은 쏙 뺀 채, 자동차를 도난당했다고 신고한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가 보석금을 내서 그날로 풀려났지만, 찰리는 이틀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아버지가 보석을 신청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찰리는 아버지를 떠났다. 그 뒤로도 아버지를 찾지도, 연락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차가운 사람들
장례식에 참석한 찰리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 준 친구와 여자 친구는 찰리를 걱정하지만, 사실 그는 어떤 슬픔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유언을 확인하려고 온 것뿐이었다.
담당 변호사가 찰리에게 아버지의 유언장을 읽어 주었다. 유언장에서도 아버지는 찰리에 대한 그리움이나 미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래전 아버지와 같았다. 아버지는 찰리에게 뷰익 자동차와 장미를 물려주었다. 그 외의 모든 재산, 그러니까 집을 포함한 3백만 달러 상당의 유산은 다른 상속인에게 물려주었다.
“장미? 장미라니!” 찰리는 유언장의 내용을 듣고 아버지를 저주한다, 만일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버지는 거기에 있을 거라고, 그곳에서 지금 자신을 바라보면서 비웃고 있을 거라고. 아버지는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찰리에게 냉랭함을 유지했던 것이다.
사실 찰리는 아버지만큼 냉정하고 타인의 마음에 무관심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일과 돈이 전부다. 수입차 딜러인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사람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에게 여자 친구는 일을 함께하는 동료이자 성적 대상일 뿐이다. 여자 친구는 늘 따뜻한 대화를 원하지만 그에게 대화는 돈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단일 뿐이다. 여자 친구와 1년 넘게 사귀면서도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레인 맨’과 레이먼
찰리는 유산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유언장 속 3백만 달러의 상속자를 찾아 나선다. 그 사람은 바로 레이먼(더스틴 호프만), 알고 보니 찰리의 친형이었다. 자신이 외아들이라고 생각하던 찰리에게 형이 있었던 것이다.찰리의 기억 속에도 레이먼이 희미하게 남아 있기는 했다. 찰리는 자신이 무서워할 때마다 노래를 불러 주던 ‘레인 맨’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지만 그저 자신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노래를 불러 주며 어린 찰리를 달래 주던 친형 레이먼이 레인 맨이었다. 어린 찰리는 레이먼을 ‘레인 맨’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찰리가 세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자폐증을 앓던 레이먼을 시설로 보내면서 둘은 헤어졌다.
서번트 증후군
“그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요.” 레이먼을 9년 동안 돌본 간호사가 레이먼의 증상을 말해 준다. 자폐증의 큰 특징은 타인과의 의사소통 장애이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못하고, 보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상호 작용이 불가능하고 동료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말 그대로 자신만의 세상에 스스로 갇혀서 살게 되는 것이다.
자폐증의 증상은 매우 다양하다.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이라고 부르는 자폐증은 특정 영역에서 매우 뛰어난 기술이나 재능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 예로, 다니엘 타밋이라는 사람은 운전은 커녕 왼쪽과 오른쪽조차도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3.14로 시작하는 파이(π) 값의 소수점 아래 22,514자리 수를 5시간 9분 54초에 걸쳐서 정확하게 기억해 내서 유럽 신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레이먼도 전화번호부에 나온 사람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정확하게 기억할 정도로 엄청난 기억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문제는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체계자와 공감자
흥미로운 사실은 자폐증에 성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폐증은 여아보다 남아에게서 나타날 가능성이 네 배가량 더 높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자폐증 전문가 사이먼 배런-코헨(Simon Baron-Cohen)은 극단적인 남성 두뇌를 타고났기 때문에 자폐증이 발생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남성은 체계화하는 두뇌를 가진 체계자(systemizer)로 태어난다. 남성은 대상을 규칙에 따라 지각하고, 수학적이며 기계적인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에 특화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 반면, 여성은 공감하는 두뇌를 가진 공감자(empathizer)로 태어난다. 여성은 타인의 얼굴 표정과 몸짓을 쉽게 읽어 내는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남성들 중에도 공감자의 두뇌를, 여성들 중에도 체계자의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배런-코헨 박사는 체계자의 두뇌를 가진 두 명이 만나서 아이를 낳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유사한 사람들끼리 매력을 느끼고, 짝을 맺는 경향 때문에 두 명의 체계자가 결혼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체계자의 뇌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아이는 극단적으로 남성적인 뇌를 가지고 태어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곧 공감하는 능력은 제로에 가깝고, 규칙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능력만 극도로 뛰어난 뇌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자폐적 인간
배리 레빈슨 감독의 1988년 작 ‘레인 맨’(Rain Man)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사람은 레이먼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찰리나 찰리의 아버지도 자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레인 맨은 체계자의 뇌를 가진 세 남자들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들 세 남자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조금씩 자폐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과 논리만을 주장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증상 말이다.
찰리는 유산을 받으려고 어쩔 수 없이 레이먼과 함께 아버지의 유산인 뷰익 로드마스터를 몰고 대륙 횡단 여행을 떠난다. 이 과정에서 찰리의 닫혔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린다. 여행의 출발은 ‘자폐증 환자’ 레이먼과 함께 시작했지만, 여행의 끝에서 그는 ‘형’ 레이먼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따뜻함
레이먼은 놀라운 관찰력과 기억력을 보여준다. 레이먼이 보여 준 천재적인 능력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찰리를 감동시키고 그의 마음을 연 것은 어린 동생이 뜨거운 물에 델까 봐 걱정하고, 무서워하는 동생을 달래려고 노래를 불러 주던 레이먼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자폐증이었음에도 본능적으로 아기였던 동생을 보호하려 했던 레이먼. 세상을 향해 굳게 닫혀 있던 레이먼의 마음도 아기였던 동생 찰리에게만은 열려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성인이 된 찰리의 닫힌 마음을 여는 것은 따뜻했던 레인 맨에 대한 추억이었다. 유능함은 감탄을 자아내지만, 정작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따뜻한 마음이다.
[심리학이 만난 영화] 상상 훈련, 올드보이
“10년 동안의 상상 훈련, 과연 실전에 쓸모가 있을까?”
다섯 명의 깡패에게 둘러싸인 오대수가 깡패들을 향해 주먹을 날리기 직전 외친 한마디다. 복수를 꿈꾸며 10년 동안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상상 속에서 싸우는 훈련을 했던 그다. 과연 상상 훈련은 실전에서도 효과가 있었을까?
일순간에 깡패 무리를 쓰러뜨린 오대수. 그가 말한다.
“있다!”
오대수는 자기 이름을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살자.’라는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아내와 어린 딸아이와 함께 사는 지극히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도 크게 잘한 일도, 그렇다고 큰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오대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납치된다. 깨어난 곳은 싸구려 모텔방처럼 생긴 여덟 평짜리 사설 감옥.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누군가를 강제로 감금시키는 곳이었다. 누가, 왜 자신을 납치해서 감금했는지조차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다. 그는 하루에 세 번 넣어 주는 중국집 군만두만을 먹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텔레비전에 자신의 아내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뉴스가 나온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집을 나간 지 1년이 된 남편 오대수. 사설 감방 안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그가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내를 죽인 살인자가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자살을 시도해도 누군가 들어와서 그를 살려 놓고 간다. 자기 마음대로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오대수는 만일 자신이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자신을 이 감방에 처넣은 인간을 찾아내서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오대수가 날마다 상상 속의 적을 대상으로 훈련하는 이유다.
박찬욱 감독의 2003년 작 ‘올드보이’는 자신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로 누군가는 마음의 상처를 받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 상처는 더 커져서 처절한 복수로 이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설정은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오대수가 사설 감옥에 갇힌 동안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갖춘 싸움꾼으로 재탄생한다는 것이다. 장도리 하나만 가지고도 수십 명의 조직폭력배를 제압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과연 상상 훈련만으로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까? 만화나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7년 동안의 상상 훈련
현실에서 10년 동안 상상 훈련을 한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7년 동안 상상 훈련을 한 사람은 찾을 수 있었다. 류치쿵(Liu-Chi Kung). 그는 1958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콩쿠르에서 2등을 수상한 피아니스트다. 하지만 중국의 문화 혁명이 시작된 다음 해에 투옥되어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피아노를 치기는커녕 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석방되자마자 순회 연주회에 나섰다.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피아노를 만져 보지도 못한 사람이 출옥하자마자 관객들 앞에 선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연주력이었다. 피아노를 7년간 만져 보지도 못했지만 그의 연주력은 오히려 전보다 향상되어 있었다. 평론가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류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날마다 피아노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건반을 누르면서 연습할 수는 없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상상 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연주해 보았던 모든 곡의 음 하나하나를 마음속에서 연습했다고 말했다. 피아노를 만질 수 없는 현실에서도 그는 마음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뇌는 상상과 실제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의 뇌가 상상에 속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상상 훈련을 실제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훈련의 기록을 남겨 두는 것이다.
덕분에 상상을 통해서 우리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지식과 행동의 연결 고리를 강화할 수 있다. 류치쿵처럼 자신이 연주했던 곡을 상상 속에 반복해서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피아노 연주에 필요한 주요 지식과 행동의 연결이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 트레이닝
상상을 통해서 정신 표상에 있는 행동 간의 연결 고리를 강화하는 훈련은 스포츠 선수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실행되어 왔다.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부르는 데 이는 정신적인 이미지를 이용해서 행동이나 기술을 연습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미지 트레이닝이 스포츠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는 가장 큰 이유는 수행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지 트레이닝은 연습을 통해서 습득한 새로운 운동 기술을 실전에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고, 일단 획득한 운동 기술을 유지하는 데에도 효과를 발휘한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윗몸 일으키기와 같은 단순한 운동에서부터 골프나 체조의 안마, 미식축구와 같이 다양한 종목에서 수행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테네시대학교 여자 농구 팀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기존 연습에서는 자유투 성공률이 52퍼센트였지만 야유를 퍼붓는 관중 앞에서 경기하듯 떠올리며 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이 추가되었을 때는 그 성공률이 65퍼센트로 증가했다.
성공을 만드는 상상 기법 ‘과정 시뮬레이션’
우리가 자주 하는 상상 가운데 하나는 성공에 대한 상상이다. 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공의 결과를 상상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하거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를 상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축하와 환호, 그리고 스스로 경험하게 되는 자부심을 상상하는 것이다.성공에 대한 또 다른 상상은 성공으로 가는 길을 상상하는 것이다. 대학에 합격하고자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녁까지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 그리고 공부하지 말고 놀자는 친구들의 유혹에는 어떻게 대처할지 등을 상상하는 것이다. 곧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하는 것이다.
미국의 셸리 테일러(Shelley Taylor)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시험을 일주일 앞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뮬레이션의 효과에 대해 실험했다.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받은 이후의 결과를 상상하는 결과 시뮬레이션 조건, 시험 준비 과정을 상상하는 과정 시뮬레이션 조건, 또는 상상에 대해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은 통제 조건 가운데 하나에 무작위 할당되었다.
결과 시뮬레이션 조건의 참여자들은 날마다 5분간 긍정적인 결과에 대해 상상하게 했다. 점수가 발표되고, A학점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환호하는 가운데 자부심을 느끼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상상하게 했다.
그 반면, 과정 시뮬레이션 조건의 참여자들은 날마다 5분간 A학점을 받고자 교과서를 열심히 읽고, 노트 내용을 보며, 과제에 집중하고, 공부하는 데 방해되는 유혹을 거절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상상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통제 조건의 참여자들은 시험 전 자신의 공부 과정을 모니터링하게 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과정 시뮬레이션을 한 참여자들이 다른 조건에 비해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더 높은 성적을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과정 시뮬레이션은 시험에 대한 계획과 준비를 구체화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곧 시험에 더 철저히 대비하게 한 것이다.
결국 과정 시뮬레이션이 학생들의 시험에 대한 불안을 줄일 수 있었고, 계획 활동을 증가시킴으로써 성적 향상에 도움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10년 동안의 상상 훈련, 과연 실전에 쓸모가 있을까?”
“있다!”
“만일 실전 과정을 상상했다면!”
[심리학이 만난 영화] 복종의 심리학, 밀그램 프로젝트
마이클 알메레이다 감독의 2015년 작 ‘밀그램 프로젝트’는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연구와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물론 영화의 중심에는 심리학 역사상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복종 실험이 있다.
복종 실험의 시작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처벌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역 주민이 실험실에 찾아간다. 그곳에는 또 다른 사람이 실험에 참여하려고 와 있다. 실험은 두 명이 함께하는데, 한 사람은 연구자의 지시에 따라 연기할 가짜 참가자 곧 공모자였다. 제비뽑기로 교사와 학생 역을 맡을 사람을 정했는데, 진짜 참가자는 교사로, 공모자는 학생으로 뽑히도록 미리 조작해 두었다.
이 실험에서 교사는 학생에게 학습 과제를 주고, 학생은 이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역할이었다. 실험의 주된 목적은 처벌을 받으면 학습이 더 잘되는지 알아보는 것이므로 학생이 기억과제에서 오류를 범하면 교사는 학생에게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이 실험에서 처벌은 전기 충격이었다. 전기 충격은 서른 개의 스위치가 달린 기계 장치로 전달되었다. 1번 스위치를 누르면 15볼트의 전기 충격을, 30번 스위치를 누르면 무려 450볼트의 전기 충격을 전달하는 기계 장치였다. 스위치 위에는 전압이 일으키는 충격의 강도가 쓰여 있었다. 이를테면 15볼트에는 ‘약한 충격’, 330볼트에는 ‘극도로 강한 충격’, 그리고 450볼트에는 그저 ‘XXX’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연구자는, 교사 역의 진짜 참가자가 보는 앞에서 학생 역의 공모자 손목에 전극을 부착한 뒤 학생을 의자에 묶었다. 학생은 사실 자기가 심장이 안 좋은 편이라며 괜찮겠는지 묻는다. 물론 연구자는 괜찮다고 답한다. 교사는 실험 전에 자신의 손목에 전극을 연결해 전기 충격을 실제로 체험해 본다. 깜짝 놀라는 교사에게 연구자가 몇 볼트인지 맞춰 보라고 한다.
“150볼트 정도는 될 것 같은데요.”
“아니요, 지금 충격은 45볼트에 불과합니다.”
도대체 45볼트가 이 정도라면, 450볼트는 얼마나 충격적인 것일까? 교사는 체험을 통해 진짜 전기 충격을 가한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학생이 전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교사와 학생은 각기 분리된 방으로 들어갔고, 교사가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학생은 전기 충격의 강도에 맞게 신음과 비명 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 주었다.
피해자의 저항
연구자는 교사에게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전기 충격을 한 단계씩 높이라고 지시했다. 학생은 연구자와 모의한 대로 점점 더 많은 문제를 틀렸고, 그때마다 교사가 줘야 하는 전기 충격의 강도도 높아졌다.
교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스위치 누르기를 망설이면, 연구자는 “당신이 계속하셔야 실험이 됩니다.”라고 하거나 “당신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습니다.”와 같은 명령으로 압박했다.
전기 충격이 세질수록 학생의 신음 소리도 커졌다. 150볼트에는 “내가 심장이 안 좋다고 했었죠. 심장의 느낌이 좋지 않아요. 그만둘래요. 내보내 주세요.” 하고 외쳤다. 이후 학생은 지속적으로 실험 거부 의사를 밝히고 전기 충격을 가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밀그램의 연구가 불편한 이유
만일 우리가 이런 실험에 참여해서 교사역을 맡았다면 학생 역을 맡은 사람에게 최대 몇 볼트까지 전기 충격을 주었을까? ‘나라면 450볼트까지 주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밀그램은 실험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이러한 실험에 450볼트까지 충격을 줄 사람이 얼마나 될지 예상해 보라고 하였다. 조사 대상자들의 대답을 알아본 결과 그럴 사람은 3%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밀그램의 실험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62.5퍼센트가 ‘처음 보았고, 인상이 좋게 생겼으며, 심장이 좋지 않고, 전기 충격을 멈추라고 애원했던 중년의 남성’에게 450볼트의 전기 충격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학생이 전기 충격 판에서 손을 떼지 못하도록 참가자에게 절연 장갑을 끼고 강제로 학생의 손을 붙잡아 전기판에 누르게 한 연구에서도 30% 가량의 참가자들이 끝까지 연구자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밀그램의 연구는 여느 선량한 사람도 그가 놓인 상황에 따라서 대량 학살의 하수인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종 실험의 결과가 발표되자 많은 사람이 연구 결과에 충격을 받은 동시에 불편해했다. 연구 결과는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믿음과 정면으로 배치되었고,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이 권위자의 명령에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신도 악마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듯한 밀그램의 연구는 자신이 선한 존재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나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방법, 책임 전가
밀그램의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무고한 상대에게 전기 충격을 가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고통을 호소하는 상대방의 외침을 들으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갈등했다. 이러한 스트레스와 갈등을 해결해 준 것은 바로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한 연구자의 말이었다.
예일대학교 소속의 과학자가 “내가 모든 책임을 질 테니 계속하세요.” 하고 말했을 때, 참가자들은 책임감의 측면에서 면죄부를 받은 느낌이었다. 명령을 내린 권위자에게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피해자에게 가하는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력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150볼트의 전기 충격은 이 참가자가 전기 충격을 450볼트까지 줄지를 예측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150볼트의 충격을 가하면 공모자는 강력히 실험을 거부한다. 이 시점이 바로 참가자가 가장 크게 갈등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에 멈추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80% 가량이 450볼트까지 충격을 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50년 뒤, 21세기의 복종
밀그램의 실험이 이루어진 지도 어느덧 50년이 넘었다. 그동안 개인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인식은 훨씬 높아졌다. 만일 밀그램의 복종 실험을 지금 다시 한다면 이전처럼 많은 사람이 권위자의 비합리적인 명령에 순순히 따를까? 시대가 변했으니 권위를 대하는 사람들의 방식도 변했을까?
미국 산타클라라대학교의 제리 버거(Jerry Burge) 박사는 21세기에 밀그램의 실험을 다시 재현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밀그램의 실험 이후 심리학 연구에서 실험 참가자에 대한 보호 조치는 실험 수행의 가장 중요한 선결 요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제리 버거는 대학교의 생명윤리위원회로부터 전기 충격의 최대치를 150볼트까지로 제한하기로 하고 실험을 승인받았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150볼트 스위치를 누르자 학생 역할의 공모자가 고통을 호소하며 실험을 멈춰달라고 했으나 참가자의 70% 가량이 실험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150볼트는 참가자가 전기 충격을 450볼트까지 줄지를 예측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따라서 제리 버거의 연구 결과는, 밀그램 실험 이후 5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선량한 시민들이 권위자의 명령에 따라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또 다른 선량한 시민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고통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저항의 결정적 시기
인류의 역사에서 벌어진 많은 폭력과 학살의 출발은 권위자의 작지만 부당한 명령에서부터 시작된 경우가 많다. 권위자의 부당한 명령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점 강한 폭력과 학살의 수준에까지 도달한다. 따라서 부당함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스스로 심리적으로 갈등을 경험하는 순간(밀그램의 실험에서는 150볼트 충격을 준 직후)이 바로 저항의 결정적 시기가 된다.
이 순간에 저항하지 못하면 우리는 끝내 저항하지 못하게 된다. 작은 부당함에 바로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는 머지않아 더 큰 부당함에 매우 쉽게 복종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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