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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순 목사
전도서에 대하여 아십니까? 전도서는 잠언과 함께 솔로몬이 노년에 기록한 성경으로, 사람에게 인생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회고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의 책입니다.
그런데 잠언과 전도서는 공통점도 있지만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자면, 잠언의 경우는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라거나, “내 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식으로 직설적이고 교훈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돈이 좋다면 실컷 모아봐라. 얼마나 행복한지 한번 느껴봐라.”라고 말했다가, 나중에 “결국은 다 미친 짓이다.” 라고 말하거나, “젊었을 때 즐길 수 있는 쾌락을 다 즐겨봐라.” 라고 말하고는, “다 허망하고 바람을 잡는 짓이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할 테면 해봐라. 갈 데까지 가봐라.” 라고 부추겨놓고는 “그래 어떻더냐? 허무하지? 그래,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일은 다 그렇게 헛된 것뿐이야.” 라고, 다소 비아냥거리는 투로 결론을 맺어 줍니다.
전도서는 인간이 추구하는 피상적인 소망과 행복을 다 짚어주고는 어느 것도 행복이 아니더라고 말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회의와 절망과 시도를 보여주고는, 해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결국은 다 헛것이더라고 짚어주는 책입니다. 배워보고 싶지 않습니까? 전도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전체를 통해서 “해아래서” 라는 단어를 29회나 반복하였습니다.
‘해 아래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다’고 하면서 ‘해아래서’ 라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목적은 ‘해 위에서의 삶’입니다. 해위에서의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 해 아래서의 삶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헛된 인생을 말하지만 사실은 헛되지 않은 삶을 말하기 위해서 헛된 삶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생각을 깊이 해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인간이 그렇게도 추구하는 물질이라든가 쾌락이라든가 지혜라든가 성취욕 같은 것들을 다룹니다. 그리고는 한 가지 한 가지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폭로해 버립니다.
그러면, 전도서가 해아래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 ‘너에게는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을 다 추구해 봤자 그것은 너에게 유익하지도 않고, 진리의 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에 헛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아무데도 갈 데가 없다. 행복도 보람도 가치도 진리도 없다.”고 말함으로서, 이것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죽으란 말이냐” 라고 묻게 만듭니다.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무엇을 해야 보람이 있고, 어디에 즐거움이 있고 의로움이 있고 행복이 있단 말이냐,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내 인생에서 참된 가치가 무엇이란 말이냐,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고,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이런 목마름이 생기라고 전도서를 기록해 준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 중에 하나가 목마름의 힘입니다.
큰일을 이룬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더 목말라 했던 사람입니다. 목마름이 있어야 성취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했다면 그 사람이 성공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교회가 부흥했다면 그 교회에는 부흥에 대한 애타는 목마름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우리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붙여주소서,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소서, 전도해야겠으니 능력을 주소서”라고 애타고 목마르게 간구했다는 증거입니다. 누가 전도를 잘하고 누가 영혼을 살려냅니까? 불신자를 볼 때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전도 못합니다. 불신자를 바라볼 때 “저 영혼을 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는 사람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는 “주여, 저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아니면 제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런 목마름이 있어야 사람들을 살려내고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집단은 목마름이 있는 집단입니다. 과거에 민주주의를 위해서 뛰던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정착될까 하고 목말라했습니다. 독립운동 했던 분들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사나’ 하고 자기 안일만 생각했지만, 독립 운동가들은 나라의 해방과 독립에만 목이 말랐습니다. 핍박이나 회유나 고문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고, 자기 재산과 생명을 쏟아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그분들의 덕에 우리나라가 독립을 이룬 것입니다. 목마름이 강한 집단에게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일신의 영달과 출세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쓰레기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삶, 양식이나 축내고 오염물질이나 생산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이 땅과 백성들을 하나님께 이끌어야만 한다는 목마름이 있는 젊은이는, 교회와 나라의 장래를 아름답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무기력합니까? 그것은 배부름 때문입니다. 아쉬울 게 없다는 태도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예수 우리 왕이여,”라고 노래하고, “주님 없이는 살수 없다.”고 노래 하지만, 입술로만 그렇게 말할 뿐이지 가슴으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배운 것도 많고 돈도 있는데 주님이 없으면 어때?”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에 대한 목마름, 주님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롬3:20에 보니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들여다보면 내가 지독한 죄인이어서, ‘나’ 라는 사람은 도무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에 목마르게 합니다. 율법을 읽지 않았을 때에는 “나는 꽤 착한 사람이고, 어디에 내어놓아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었는데, 율법을 알고 나니까 자신의 죄 된 모습에 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꼬.” 라고 탄식하는, 구원에 목마른 사람이 됩니다. 율법의 목적은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합니까? 기도에 목마른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누가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까? 우리말로 목마른 사람이 샘 판다고, 무엇인가가 간절히 아쉬운 사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아쉬운 사람이란, 바로 무엇엔가 목이 마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목마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옳은 일에 대한 목마름을 가진 사람이 의로운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월1일 날, 등산을 갔다가 오는 길에 어떤 장로님이 말씀하기를, 사회생활 하다 보니까 세상에는 별 별것에 인이 박혀 사는 사람도 있더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에 인박혀서 사는데, 그 사람은 술이 없으면 사람이 아무 힘도 없고 다 죽어가는 것 같다가도 술만 들어가면 힘이 솟는답니다. 어떤 사람은 고스톱에 인이 박혀서 화투장을 손에 쥐면 신들린 듯이 신바람이 나는데 그것만 손에서 놓으면 맥이 풀리는 사람이 있더랍니다. 어떤 사람은 여자에 인이 박혀서 사는데, 다른 때에는 맥이 탁 풀려서 말도 안하다가 여자만 눈앞에 나타나면 보이면 금세 생기가 돌고 말도 잘하고 힘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가 인박힌 것에 목이 마른 사람입니다.
그들을 일컬어서 술에, 노름에, 이성에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마름이라고 해서 다 같은 목마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진 목마름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와 가치가 달라집니다. 돈이 최고인줄 아는 사람, 예쁜 여자, 멋진 남자가 최고인줄 알고 그것에 목마른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그것은 잠시 후에 허망해지는 목마름이요,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나중에는 더 큰 갈증을 불러오는 목마름일 뿐입니다.
마 5:6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의로운 삶, 의로운 일에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이 그 의로운 일을 마음껏 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올바르게 살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의로운 생각으로 목마른 사람이어야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가, 의에 목말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멍한 모습으로 지낼 때가 있습니다. 의에 대한 목마름이 없고,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위해서입니다. 성경말씀은 읽으면 읽을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목마름이 생기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읽으면 마음에 갈증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요셉이나 모세 한사람을 통해서도 그렇게 큰일을 행하셨는데 나는 이게 뭔가, 내가 더 기도하고 더 헌신해서 더 큰일을 해야겠다는 목마름이 일어납니다. 마5:6의 말씀은, 우리가 바로 그런 목마름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목마름도 너무 늦게 가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언제 의에 주리고 목이 말랐습니까? 죽기 직전입니다. 솔로몬을 솔직하게 평가하자면 그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는 마음껏 의를 행할 수 있는 기회와 조건들을 가졌음에도, 수천의 궁녀들과 함께 쾌락을 얻는데 젊은 시절을 다 바쳤습니다. 사람이 언제 목마름을 체험하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언제 인생의 목마름, 의에 대한 목마름을 언제 경험하는 게 좋겠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만약 20대 초반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된다면, 그 일생에 얼마나 큰일을 해내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사람이 나이가 50이 넘고 60이 넘어지면 자연히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집니다. 술에 절어 살고 죄 속에서 살다가도 나이가 들어가면 “이게 인생이야? 나는 실패했어.”라고 한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께 돌아오지 못하면 지옥 가는 것이고, 다행히 돌아오면 부끄럽지만 구원은 받겠지요, 그러나 그가 흘려보낸 그 인생은 가치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사무엘처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 의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게 된다면, 대단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인생을 어리석게 살아버린 한 늙은이의 뒤늦은 후회스런 고백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는 이 말씀이 실감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70이 넘으신 성도님이 읽으면 쏙쏙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서의 목적은 70이 되어서야 깨달을 것을 20에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인생 예습서’라고 해도 됩니다. 전도서는 나이 많으신 분도 읽어야 하지만, 젊은이들이 읽어야 합니다. 전도서를 읽고 이해하면 그만큼 자기가 살아갈 인생을 예습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는 “영원한 것이 무엇이냐.” 는 질문도 던집니다.
4절에 보면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던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으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영원한 것이 무엇이더냐, 해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더라.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무거운 돌덩이를 등에 지고 원뿔형의 산으로 올라가서 돌을 내려놓게 합니다. 그러면 그 돌은 다시 데구르르 굴러서 아래로 내려오고, 그러면 죄수는 다시 내려와서 그 돌을 다시 져다 정상에 올려놓아야 하고, 그러면 돌은 또 다시 굴러 내려옵니다. 세상 사람이 사는 모습이 이와 같다는 비유입니다. 먹고 일하고 자고, 먹고 일하고 자고, 세상에는 모든 것이 반복될 뿐이라는 지적입니다.
시베리아 감옥에서 가장 큰 벌은 얼어버린 땅을 파냈다가 다시 묻는 일을 반복해서 시킨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되기만 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반복하여 시키면 그 사람이 미쳐버린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고 무의미한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좀 다르게 사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겉으로 보면 똑같습니다. 똑같이 공부하고, 때가 되면 똑같이 직장에 가고, 때가 되면 똑같이 결혼하고, 때가 되면 똑같이 자식 낳아서 그것들 기르느라고 수고하고, 똑같이 늙고 똑같이 병들고 죽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한 사람은 일요일에 놀러가지만 한 사람은 주일에 교회 간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나 정말 똑같을까요? 믿는 사람은 공부를 하고 직장에 가고 결혼을 하고 늙어질지라도 다 사명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공사 현장에서 간부가 인부들을 불러서 일을 시키는데, “땅을 팠다가 다시 묻고, 묻고 나면 다시 파서 다시 묻으시오.” 라고 반복되는 일을 시켰다고 합시다.
똑같은 일을 하루 종일 반복해서 하니까 인부들은 지쳐버렸습니다. 그래서 항의하기를 “아무리 돈을 받고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무의미한 일은 더 이상 못하겠소, 이게 뭐하는 짓이요.” 라고 대들었습니다. 이때 현장소장이 와서 설명을 해줍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가스가 새는 곳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가스가 터지면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됩니다. 그러니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가스관을 따라가면서 땅을 파서 확인하고는 거기서 가스가 새지 않으면 메우고 다시 그 옆을 파야 합니다. 어서 하세요. 사람의 생명이 달려있습니다.”라고 알려줍니다. 그러자 조금 전 그렇게 불평하던 인부들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더 열심히 일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아 보이지만, 똑같은 의미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에도 사명이 있고, 공부에도 사명이 있으며, 직업에도 부르심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의 의를 이루라고 하셨기에 하는 것이지 남들이 하니까 따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 없이 세상을 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헛되게 인생을 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늙어서 후회하지 말고, 젊어서부터 목마름을 안고 의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전도서가 해아래 영원한 것이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만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한 수고는 영원한 보상이 있습니다. 고전 15:58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하십니다.
전도서가 제기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무엇이 새것이냐’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해 아래는 새것도 없다. 다 돌고 도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지요? 해 아래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새것이 없습니다.
60년대는 맘보바지라고 해서 바지통을 크게 만든 핫바지를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70년대에 와서는 바지통이 좁아졌습니다. 그리고 70년대 말에 와서는 바지 끝만 넓어진 나팔바지가 유행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부터는 다시 바지통이 좁아졌습니다. 그러다 90년대부터는 ‘힙합’이라는 아주 헐렁하기 짝이 없는 옷을 입고 다닙니다. - 힙합바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국의 흑인들이 제 몸에 맞는 옷을 사 입을 돈이 없으니까 형이나 아버지 바지를 함께 입습니다. 그런데 허리가 넓어서 흘러내립니다. 든든한 가죽혁대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마저 없어서 바지를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고 다리를 넓게 벌려서 어기적거리며 걷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백인 아이들이 그게 무슨 유행인줄 알고 따라합니다. 그것이 힙합바지입니다.
재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월에 뉴욕에 갔다가 수요일에 할렘가의 흑인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수요일 낮에 예배를 드린다면서 그들이 모였는데, 8명, 10명씩의 성가대 둘이 복음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배에 찬양하러 앞으로 나온 그들이, 회중앞에서 서로 쓰다듬고 인사를 하고, 카메라폰을 새로 샀는지 그것을 열어서 서로 사진을 찍느라고 찬양은 딴전이었습니다. 자기들 차례가 되면 노래를 부르고는, 다른 팀이 찬양할때는 먼저 부른 팀은 자기들끼리 끌어안고 이야기 하거나 밖으로 들랑거립니다. 질서란 단 한조각도 없고 정말 개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복음 송은 타고난 음악적 재능 때문인지 화음이 꽤 멋졌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노래는 자기들 마음대로 부르는 자유노래였습니다. 행동도 자유, 노래도 자유였습니다.
그것을 백인들은 또 뭐나 되는 줄 알고 따라 부르는 것이 ‘재즈’라는 음악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행은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서 이리 돌고 저리 돌아갈 뿐이지, 눈을 씻고 보아도 해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전도서가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께는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5:17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과거에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는데, 그 안에 복음이 들어가니까 사람이 새로워졌습니다. 과거에는 인격 파탄자였는데 그 안에 복음이 들어가니까 새로운 성품이 생겼습니다. 악독으로 가득 찼던 사람에게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힙니다.
계시록 21장 5절을 보면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고 하셨고,
겔36:26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시면 누구나 새로워집니다. 기독교는 새 사람 만드는 운동입니다. 복음은 새롭게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새로운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누구나, 무엇이나 새로워집니다. 전도서가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새것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전도서가 해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고 강조하는 것은, 헛되지 않은 것에 목이 좀 마르자고 하는 자극입니다. 무엇 엔가에 목이 마른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목마른 만큼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목마름을 갖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돈에 목마른 자가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이어야 하고, 그 영적 목마름은 늙어서가 아니라 젊어서 일찍 가져야 합니다. 해아래 세상에는 새것도 없고 영원한 것도 없지만 주님 안에서는 무엇이나 새로워지고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목마르고, 의로운 삶과 교회부흥에 목마른 능력의 사람이 되어 남들은 허망하고 헛되다고 하는 세상에서 의롭고 결실있는 삶을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