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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85:1-4 여호와여 주께서 : 칼빈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새로운 역경과 환난으로 연단받습니다.
첫째로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왜 은혜의 사역을 계속하지 않으시는가 라는 논조로 말합니다.
둘째로 자기들의 환난이 오래 계속되는 것을 탄식합니다.
셋째로 소망과 확신에 감동되어 자기들에게 약속된 복으로 승리의 개가를 부릅니다.
그 백성들의 나라 회복은 그리스도의 왕국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백성들은 이 왕국에서 모든 풍성한 좋은 것들을 즐거이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 본문 1절은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입니다.
이 말씀을 미래 시제로 번역하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합니다.
이 시는 잔인했던 폭군 안티오쿠스에게 핍박당한 백성들이 지난날 받았던 구원을 통해 그들은 앞날에 새롭고 계속된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을 바라는 데 힘을 얻습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통하여 자기들의 죄가 아무리 많고 막중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시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냉혹하게 대하거나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 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토록 현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증거를 전에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현재 당하고 있는 환난의 짐으로 인해 또 그 환난이 매우 오래 계속됨으로 인해 완전히 쓰러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길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자신의 땅에 긍휼을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서 기도할 때 확신을 가집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전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도록 효과적으로 용기를 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시편 85 편
만일 우리가 과거의 체험으로부터 하나님은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상황이 긴박할 때 항상 도우심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역경으로 인해 곧 넘어져 버리고 슬픔이 가슴을 메우고 말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심을 계속 베푸시는 근거가 항상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옛날 자기 조상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총들을 그 당시의 신자들에게 적절하게 적용시킵니다.
그들이나 그들의 조상이나 모두 똑같은 기업의 소망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3절은 “(2)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3)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입니다.
성도들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놀라고 당황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에 주시는 값없는 용서의 확실한 증거를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서 그들을 넘어뜨릴 만한 모든 생각들을 제거합니다.
선지자는 앞서 이 구원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값없는 은혜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백성들의 죄악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기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죄가 필요 불가결하게 되었습니다.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라는 말씀에서 시인은 성도들이 자기들의 죄에서 다시 지음 받거나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중생의 영으로 그들을 성결케 하사 실제적으로 그들에게서 죄를 제거시키는 사역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곧 이어서 말합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께 유대인들과 화목하신 것은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는 방법으로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덮으셨나이다” 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숨기셔서 우리가 시편 32편에서 보다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들이 심판대에 나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포로 생활을 통하여 벌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도말하사 돌아오는 일에 대한 큰 장애물을 제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신비나 되는 것처럼 말하는 소피스트(Sophists)들의 어리석은 속임수에 대해 반박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악을 용서하시긴 하지만 여전히 형벌은 내리고 계시며, 그의 모든 말씀 마디마디에서 사죄하는 것이 자기의 바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와 동시에 형벌을 경감시켜 주려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85 편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 구절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사 그들을 벌하려는 그의 손을 거두셨다는 또 하나의 확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 후에 자기 공의의 엄격한 요구에 따라 형벌을 가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한 분이라고 말하는 소피스트들이 이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로 그럴듯한 답변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까?
사죄의 결과는 하나님이 더 이상 불쾌히 여기지 않으심은 자신의 죽음으로 증거합니다
3. 본문 4절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입니다.
성도들은 이제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기 백성들에게 아버지의 온유하심을 나타내 보여주신 사실에 대해서 암송했던 것을 자기들의 지금 처지에 적용시킵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이전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라고 함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소망에 스스로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이성의 눈에는 형편이 호전될 만한 분명한 근거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안전하게 달려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어느 때나 쉽고도 신속하게 우리를 구원하실 방도를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해줍니다.
“주의 분노”는 모든 환난의 원인이요, 기원이 되기에 성도는 하나님께 분노를 거두어 주시라고 간구합니다.
이 순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는 겁을 먹게 되고 연약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새끼 손가락으로 우리를 치시기만 해도 우리는 비통과 탄식의 부르짖음으로 우리를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마음에 주로 품어야 할 생각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곧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책과 정죄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잊어버립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 달려가서 자신을 검토해 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85 편
시85:5-8 주께서 우리에게
시인은 과거 주의 은혜를 근거로(1-3), 현재의 역경을 주께 부탁합니다(4-8).
이와 같은 기도는 특별히 시편에 많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원리에 의해 캄캄한 미래에도 해결이 있을 줄 믿는 기도입니다.
1. 본문 5-6절은 “(5)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발분하시겠나이까
(6)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입니다.
1) 경건한 자들은 오래 계속되는 환난을 몹시 슬퍼하면서도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하나님의 본성에서 기도의 논리를 이끌어 냅니다.
곧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6,7) 입니다.
시편 30편 5절은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해서 적절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서 과오를 찾으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밝히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셨음에도 그 성품대로 행하시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과적으로 유혹을 이겨 나아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함으로서 구원에 대한 소망을 얻게 된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분노를 품으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고정된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어떻든 그들은 이런 식의 기도를 통해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환난의 짐에 눌려 있었던 사실이 분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그의 은총을 돌이키시는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 가장 진지하게 기도드리는 일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웁시다.
만약 이 사실을 반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분노를 잠간 동안만 내리겠다고 하신 것은 헛된 약속이 되어 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시편 85 편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죄를 잘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총의 영원한 연속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의 분노하심이 단지 한 순간에 불과하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부패한 성품은 항상 그 방종 된 본래의 성벽에 빠져들기에 그 본성을 철저히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로 수정하는 일들이 필요 불가결합니다.
2) 성도들은 여전히 같은 주제로 말하면서 6절에서는 ‘주께서 우리를 다 살리시지 아니하시겠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이 말에는 중요한 원리에 대한 진리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하시는 형벌은 일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금은 그들을 미워하시고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려 버리신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할 때에는 그들을 영접하시고 죽은 자들을 다시 생명에로 일으키사 그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도록 해주신다는 확실한 소망으로 그들은 용기를 낸다는 말입니다.
“살리사” 라는 말로 그들은 자기들이 거의 죽은 자와 같이 되었고, 또 그들이 매를 맞아 괴로움으로 넘어졌다는 사실을 하소연합니다.
또 그들이 기쁜 일을 다짐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동안 얼마나 슬픔에 지쳐 있었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본문 7절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입니다.
이 말씀에는 앞선 말씀과 같은 대조가 있습니다.
그들은 긍휼이 자기들에게 미치고 구원이 자기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함으로서 자기들이 이 두 복의 모든 의미를 빼앗겨 버렸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옛 성도들의 상태가 이러했습니다.
우리도 극한 환난에 눌려 절망에 빠져서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법을 배웁시다.
“인자” 라는 말이 먼저 언급된 것은 적절합니다.
다음에 인자의 일이며 열매가 되는 “구원” 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의 구원자로 보여주시고 자신이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다른 이유로서는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 은총을 받기 위해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의 길에서 가로막힌 자들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3. 본문 8절은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입니다.
시편 85 편
1) 본문 8절 상반은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입니다.
선지자는 실예를 통해 교회의 지체들에게 조용하고 평안하게 인내할 것을 권면합니다.
선지자는 강한 감정의 영향을 받아 격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마치 재갈이 물려진 것처럼 자신을 억제시킵니다.
우리는 불경건하고 거룩하지 못한 우리의 모든 욕망 속에 과도히 치우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죄악에 빠져들면 쉽사리 부당한 열정으로 절제의 경계를 넘어 버립니다.
이에 선지자는 모두가 하나님의 정한시간을 인내로 기다리며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안정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즉 계속 침묵을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살피심이 그의 교회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선지자가 세상을 주관하는 것은 운명이요, 인류는 맹목적 충동에 의해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면 선지자는 자기가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을 주관하시는 기능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실 것” 이란 ‘명령하는 것’ 또는 ‘지명하는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나는 우리가 현재 당하는 환난들을 제거해 주실 능력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확신하므로 적당한 시기가 되어 교회가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잠잠히 있을 것이다’ 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무법(無法)한 감정들이 하나님을 대적해 수군거리고 소란을 일으킨 것처럼 침묵을 통하여 경건한 자들은 자신들이 인내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합니다.
2) 본문 8절 중반은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입니다.
시인은 교회의 형편이 장차 더욱 번영해 가리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사를 다스리시는 최고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인 교회에 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화평” 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인들은 ‘번영’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뜻은 교회가 하나님의 복으로 형통케 될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이라는 단어도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지 않으실 리 없음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가 미친 것에 명확하게 말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실 것인지를 바라보리라’ 가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복이 하나님의 약속에서부터 흘러나와 교회에 베풀어졌기에 하나님의 ‘손’에 대해서보다 하나님의 ‘입’에 대해 언급합니다.
시편 85 편
동시에 시인은 인내란 신자들이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의 귀를 기울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화평을 말씀하신 자들을 “그 백성” 이라고만 하지 않고 “그 성도”라 한 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백성들은 이름만 가진 자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위선자들은 오만하게도 교회의 모든 특권들이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하나님의 약속에서 마땅히 제외되었음을 그들에게 알게 해주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랑이 전혀 근거가 없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3) 본문 8절 하반은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그리하여 저희는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기지 아니하리로다 - 칼빈)”입니다.
‘그리하여’로 번역된 접속사는 ‘저희가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도록’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결과를 말하기 위해 덧붙여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 자기에게 끌어들여 계속 순종하게 하시기에 그들이 결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을 것으로 주석가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마치 그들에게 재갈을 물리듯 그들을 붙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은 가능하지만 이 구절에 포함된 모든 주제를 다 말하지 못합니다.
이 구절의 포괄적인 해석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충분히 징계하신 후에 마침내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는 점과 이 징계로 성도들은 장차 보다 더 정신을 차려 경계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왜 하나님이 은혜의 전달을 중지하고 지연하는가 이유를 보여줍니다.
의사들은 환자가 차도를 보인다 해도 만일 환자에게 그가 원하는 대로 음식을 먹게 한다면 즉시로 그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기에 그 환자가 완전히 완쾌되고 그 병의 원인이 제거되어 그 육체가 회복하게 될 때가지는 계속해서 치료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하루 동안에 죄에서 완전하게 영적인 건강을 되찾을 수 없음을 아시고 그의 채찍을 계속 하시사 다시 망령된 데로 쉽게 떨어져 버리는 위험이 없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환난을 당하는 동안 계속 신자들을 압도하려 했던 슬픔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치료와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성도들이 바라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계속해서 그들을 바르게 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진지한 마음으로 회개하도록 하고 앞으로 더욱 경계하도록 자극시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85 편
시85:9-13 진실로 그의 구원이
시인은 하나님이 장차 그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실 사실을 확신합니다(9-13).
1. 본문 9절은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입니다.
시인은 앞 절에서 말했던 것을 확고히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비록 겉으로는 그의 백성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구원이 임박해 있다는 소망으로 자신과 하나님의 다른 종들을 격려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돌봐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에게도 신실하게 보살펴 주시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אך (아크) 라는 접속사를 서로 상반되는 의미로 보고 ‘그러나 그의 구원이 .......’ 로 번역하면 히브리어에서는 가끔 이런 의미로 쓰입니다.
선지자는 이제 방금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새로운 죄악으로 넘어지기 쉽다고 여길 때에는 계속 채찍을 가하신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그의 손의 채찍을 천천히 거두시어 백성들이 너무 지쳐 인내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장 느리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여 앞서 한 말을 인증(引證) 합니다.
시인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라고 내다본 하반절의 “영광”은 그 당시 눈에 비쳐졌던 황무한 광경, 즉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증표였고, 그 땅에 수치와 비방이 임하도록 했던 광경과는 분명히 반대가 됩니다.
시인은 이 말씀으로 자신과 순전한 신자들이 용기를 얻어 회개할 수 있게 해주고 원수들의 강포로 당하고 있는 모욕과 조소를 동반한 쓰라린 압제는 전적으로 자기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떠나 버린 데서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2. 본문 10-11절은 “(10)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만날 것이며 - 칼빈)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11)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 하였도다” 입니다.
이 구절에 동사들은 과거 시제인데 내용상 미래 시제로 번역해야 합니다.
시편 85 편
우리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견해를 진심으로 받습니다.
성도들은 자기들의 믿음에 용기와 교회의 회복에 보장이 필요할 때, 특별히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동시에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의 교회와 화목하신 이후로 교회를 얼마나 사랑스럽게 대하시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이 화목에서부터 나오는 열매로 말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는 것’ 입니다.
둘째로 그것은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것’ 입니다.
이 말씀에서 어거스틴은 아름다운 감정, 즉 감미로운 위로의 말씀을 이끌어 냈습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은 모든 약속의 근원이요 원천이므로 이것에서부터 복음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의가 나오며 한편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의롭게 하실 때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화평은 바로 이 의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의는 하늘에서부터 하감” 하는 것으로 묘사했는데, 그 이유는 의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사요, 행함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본성적으로 의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로 설명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신실하심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를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심으로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련된 해석을 추구하는 것보다 바른 진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자연스럽게 의미하는 것, 즉 긍휼, 진리, 화평, 의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별 짓는 장엄하고 고상한 요소들이 될 것이라는 의미로 만족합시다.
선지자는 사람들에 대한 찬송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에 바라고 있었던 은혜, 즉 하나님께만 간구했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이 모든 복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명확한 진리로 여겨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 구절은 일부분의 것들을 사용해서 전체를 가리키는 제유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네 단어를 사용해서 참된 복의 모든 요소를 말합니다.
잔인함이 죄악을 불러일으키고 진리가 무시를 당하며, 의가 압제를 당하여 뿌리째 파헤쳐지고 모든 것들이 혼란 속에 뒤엉켜 버린다면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상이 종말을 고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복된 생활을 가장 효과적으로 촉진시켜 주는 것은 이 네 가지 미덕이 조장되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통치하심이 매우 비슷한 찬사로 장식되었습니다.
시편 85 편
그러나 “긍휼과 진리” 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과 더불어 논란을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 하였도다”는 말씀은 진리와 의가 온 우주에 분산되어 있는 것, 즉 위와 뿐 아래, 곧 하늘과 땅에 충만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서로 다른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 땅의 어느 모퉁이든지 이런 요소들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리라는 점을 확인합니다.
3. 본문 12절은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더우기 여호와께서 번영을 주시리니 - 칼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입니다.
이 구절을 비유로 보는 자들은 이 말씀은 영적 복이 증가할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더우기’(칼빈) 라고 번역된 접속사 גם(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이 말을 사용해서 자신이 말한 그 복의 완전함을 말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탁월한 복에 대한 추가 증거로 ‘땅의 사물’을 말합니다.
교회의 주된 복은 선지자가 특별히 열거했던 네 가지 복 속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를 지탱해 나가는 데는 양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을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적절한 범위 내에 불러들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요소, 즉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와 충만한 땅의 소산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반대한다면 쉽게 답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영적인 복을 베풀어 주시는 동안 덧붙여 육신의 생활과 관계를 가지는 외부의 복 가운데서 자신의 아버지같이 돌봐주시는 사랑을 어느 정도 맛보도록 해주신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증거로 볼 때 더욱 분명한 사실입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세에 약속이 있느니라” 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런 것들을 단지 잠시동안 이 세상의 생명을 편안케 해주는 데만 제한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주의합시다.
성도들은 땅의 것들에 매혹되어 깊은 잠에 빠져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땅에 머무는 동안 오직 하나님 아버지같이 보살피시는 사랑을 맛보는 정도에서 그칠 뿐 이 세상의 좋은 것들에 넘치도록 풍성한 짓으로 채워주심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 육체를 지탱하기 위한 열매를 길러내는 이 땅의 권세와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한꺼번에 주어진 것이 아닌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시편 85 편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모든 요소마다 그 고유의 직분을 부여해 주시고 지금은 하늘에 앉아서 게으르게 휴식이나 취하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해마다 하나님의 은밀하신 영향을 힘입어 땅이 열매를 맺음과 같이 하나님은 그의 인자하심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4. 본문 13절은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정확하고 단순한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서 질서는 아주 견고히 세워져서 의는 하나님 앞에 행할 것이며 모든 길은 주님 자신의 의로 점령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는 성도들의 관심을 복의 주요 요소들을 구성하고 있는 주의 의에 돌립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육체를 지탱해 나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실지라도 그들이 이것들에 마음을 두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등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단지 동물적인 욕망만을 위해 배불리 먹게 하는 대신 우리의 생각이 보다 높고 보다 중요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라는 말씀은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는다’ 는 말씀과 같이 의의 탁월하고 방해가 없는 길은 하나님이 친히 세워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사야는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는 대신에 공평이 공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금지되어 누구에게나 거절을 당한다고 탄식합니다.
선지자는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 하는도다” 라고 탄식했습니다(사59:14).
이런 말씀들은 신자들, 곧 교회가 나아갈 방향과 그 열매에 관한 말씀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