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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6-23
광야와 가나안 최후의 승리자
며칠 전, 아이들과 함께 전도사 시절 함께 신앙 생활하던 권사님 댁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대전에 다녀왔었습니다. 저희가 몸담고 있었던 교회가 가까워오면서 많은 감회가 교차했습니다. 그때, 아들 승훈이가 "아빠! 그때는 교회가 굉장히 컸었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까 별로 크지 않은 것 같아요?"라고 말을 던졌습니다. 그 교회에서 사역을 마치고 공주로 부임할 때, 승훈이 나이가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눈에 비친 교회가 아주 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교회의 모습이 성장한 아들의 눈에는 아주 작고 초라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넓고 넓던 운동장과 학사가 지금 찾아가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겠죠?
인생을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살다가 너무 힘들고 막막한 문제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날들이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별 것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당황하고 걱정을 했는지"라는 씁쓸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나보면, 부딪쳐보면, 별 것 아닌데, 지레 겁을 먹고 힘들어하던 기억들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가나안 땅을 모두 정복하고 난 후의 회고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오랜 기간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모든 힘든 전쟁을 승리하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승리하고 안식하기까지 그들도 매우 불안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각 지파별로 12명의 젊은 청년들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40일 동안 정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은 그들이 보고 온 대로 가나안 땅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고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이다. 그러나 그 땅의 거민은 강하고 성읍한 크고 견고하며 신장이 장대한 거인 족속인 아낙 자손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 앞에서 메뚜기 같아 보였다"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이 악평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백성들은 "차라리 애굽이나 광야에서 죽을 것을 여기까지 데려와 죽게 하느냐"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40년간을 광야로 다시 내쳐져서 원망과 불신앙으로 일관하던 출애굽 1세대들은 다 심판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그렇게 두렵고 무섭던 가나안 땅에 들어와 가나안의 온 족속을 다 물리치고 안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40년 전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과 40년이 지난 지금, 가나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 사람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1. 믿음의 차이입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누구와 약속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은 것이 벌써 500년이 다 되어갑니다. 500년이란 세월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그 약속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한 긴 세월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약속은 없었던 일로 이제 이루어지기는 틀린 일이라고 포기할 수도 있는 약속인 것입니다. 500년을 한결 같이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약속을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처지를 돌아보셨습니다(출2:24-25). 그리고 모세를 불러 약 500년 전에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실행하시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도 똑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수아 1장 6절 이하에 보면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즉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500년이 다 되어 가도록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때를 정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의 새 주인이 되어 안식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신한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끌려나온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차라리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민수기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민수기 14:2-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여러분,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들을 구원하여 내시고 지금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약속한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하시려고 하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망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죽이려고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향해 돌을 던져 죽이려 합니다. 이보다 더한 불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광야의 인생으로 마감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은 불신앙의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중심으로 그를 따르던 출애굽 2세대들이 가나안의 새 주인이 되어 그 땅에서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원리는 정직합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서로 다릅니다. 그 믿음의 있고 없음에 따라서 광야의 인생인가? 가나안의 인생인가 판가름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불변의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 불변의 진리를 우리에게 확인해주는 가르침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중풍병에 걸린 하인이 즉시 나았습니다. 두 소경에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자 둘은 금방 밝은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은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잣대로 하나님의 세계를 재려들지 마십시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상식의 원리와 작별할 때, 믿음의 세계가 열리며 거기에서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기적의 세계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방 뚝 까지 차 올라온 요단강이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밟자마자 갈라지고 마른땅이 됩니까? 어떻게 일주일 동안 성 주변을 돌았다고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이 무너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대낮에 우박 덩어리들이 떨어져 그것도 이스라엘의 대적들만 죽게 만들 수 있습니까? 어떻게 변변치 않은 군사력을 가지고 기병과 마병을 포함한 30만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세상의 상식과 원리너머에 있는 능력의 세계입니다. 이 믿음을 붙잡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의 새 주인이 되어 안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겨자씨만한 믿음을 여러분의 가슴에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가슴속에 심어진 그 작은 믿음이 인간의 상식과 세상의 원리를 뛰어 넘는 엄청난 능력의 세계를 보게 할 것이며,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2. 꿈(비전)의 차이입니다.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의 특징은 미래를 보는 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 같으니(민13:32-33)"
가나안의 축복에 대한 희망보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아낙 자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광야에서 죽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민14:7-8)"
똑같은 눈으로 보았는데, 어떤 이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닫혀지고, 어떤 이들의 마음에는 희망으로 열려졌습니다.
지금 가나안에서 승리의 기쁨과 안식을 누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꿈(비전)을 갖고 도전한 사람들입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에 대한 꿈과 비전을 품고 전진한 사람들이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평범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꿈입니다.
평범과 비범의 차이는 꿈에 있습니다.
보통 사람을 탁월하게 만드는 것도 꿈입니다.
꿈을 품으면 인생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계란이라고 다 같은 계란이 아닙니다.
유정란이 있고, 무정란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계란이 있고 생명이 없는 계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1동안 어미 닭의 품속에 넣어보면 생명이 있는 유정란은 병아리가 되어 나오지만 생명이 없는 무정란은 썩어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유정란과 같습니다.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그 인생에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의 미래에는 새 생명이 탄생하듯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찰리 패덕]이라는 유명한 달리기 선수가 어느 날 '클리브랜드'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 가서 연설을 하는 중에 "바로 이 강당 안에 미래의 올림픽 챔피언이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연설이 끝난 후, 언제나 주변만 어슬렁거리는 아주 여의고 껑충한 흑인 아이 하나가 찰리 패덕에게 다가와서 수줍어하며 "제가 미래의 어느 날엔가 최고의 달리기 선수가 될 수 있다면, 저는 그 일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찰리 패덕은 "할 수 있네 젊은이! 자네가 그것을 자네의 목표로 삼고 모든 것을 그 일에 쏟아 붓는다면, 분명 자네는 그렇게 될 수 있네." 얼마 후 1936년 뮌헨 올림픽에서 그 젊은이, [제시 오웬즈]는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고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제시 오웬즈]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날 껑충한 또 다른 한 흑인 소년이 사람들의 틈을 헤집고 다가와 [제시 오웬즈]에게 말했습니다. "저도 꼭 언젠가는 올림픽 출전 달리기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제시는 옛날을 생각하면서 그 소년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얘야 큰 꿈을 가져라. 그리고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그것에 쏟아 부어라." 1948년, 그 소년 [헤리슨 달라드]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리스트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꿈은 강한 전염성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꿈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킬 수 있으며, 그들이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그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가졌다고 다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저 산너머에는 아름다운 골짜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려면 저 산에 올라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가나안 족속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그 대가를 치르면 반드시 꿈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형제들의 미움과 비난, 모함을 당하고 옥살이를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여기고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곧바로 왕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의 시기와 미움 때문에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고서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을 지나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꿈은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꿈의 대가로 여기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인생을 멋지게 승리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꿈을 꾸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송악교회를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교회로,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며, 다음 세대의 영적 지도자를 배출하며, 이 지역 사회를 아름답게 섬기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겠다는 꿈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송악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는 이 꿈을 붙잡고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2000년을 축복의 원년이 되게 합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2000년의 비전을 붙잡고 기도합시다.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3. 순종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여호수아를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끊임없이 요구하시는 것이 한가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말씀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때부터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에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한 순종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 아이 성을 정복할 때, 그리고 가나안 남부의 연합군과의 싸움, 북부 연합군과의 싸움 등, 지금까지 전 과정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었기에 오늘의 평안과 안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했으며, 그들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불평과 원망으로 불순종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죽고 싶었겠습니까? 그들이라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낙 자손들과 맞붙어 싸울 것이 두렵고 귀찮았던 것입니다. 힘든 일 하기가 싫었습니다. 희생하는 것이 싫고 전쟁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는 싶은데, 결정적으로 순종하는 문제 앞에서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제 아닙니까?
목사가 설교하고, 가르치면 이해를 합니다. 알아듣기는 잘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기도하는 것 몰라서 못합니까? 기도하려면 피곤하거든요. 일부러 시간을 내서 교회 와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야 하는데 마음은 있어요. 그런데 순종이 안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십일조 몰라서 안 합니까? 주일 성수 몰라서 안 합니까? 아깝거든요. 손해보는 것 같거든요. 자기가 계획하고 생각한 것이 있거든요. 그래서 결정적으로 불순종합니다.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 손해가 되는 것 같아도, 목사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자식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까지 순종한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순종까지는 요구하시지 안잖아요. 겸손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세요. 가나안을 차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똑같이 애굽에서 나와 어떤 이는 가나안 땅의 새 주인이 되어 안식과 축복을 누리지만 어떤 이는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어떤 이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살지만 어떤 이는 독같이 믿으면서도 매일 광야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살고 있습니다.
무엇의 차이입니까?
①믿음의 차이입니다.
②꿈(비전)의 차이입니다.
③순종의 차이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