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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4
껍질을 벗어 버리십시오 / 권오서 목사
들어가는 말
<에니메이션 영상 - 정신병원인 세상 : 2분 51초>
내용 :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은 피터진트라는 사람이 정신병원을 방문했을 때 병원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전혀 미친 사람들 같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분별력이 있었고 그들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터진트는 그들이 전혀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는 의사에게 그러한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그들은 미쳤어요. 그들이 다 분별력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두 자기 이야기들뿐입니다. 사실 그들은 지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이 빠져 있는 자들입니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그리고 저녁에도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선생님 말씀 대로 그들은 분별력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에게 미쳐있습니다.”
세상은 피터진트가 방문한 병원과 같습니다. 보기에는 정신이 온전한 것 같지만 가까이 가보면 모두 자신에 미쳐 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오로지 감정이나 정치, 전쟁, 예산, 돈 등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정신이나 신경 또는 감정 불안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중심이나 자기 삶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격언을 들어 보았을 겁니다. “신경성 환자는 그 성을 허공에 쌓는 사람이요. 정신병자는 그 성으로 이사 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정신과 의사는 그 성을 세놓은 사람이다.”
오늘 새생명 축제를 맞이해서 저희 춘천중앙교회를 찾아오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간 저희들은 여러분들이 이곳에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을 뵐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정말 바쁘실 텐데 귀한 시간 내셔서 이곳까지 나오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귀한 시간을 내신만큼 오늘 하루가 여러분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고 의미있는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 론
함께 짧은 영상을 보셨는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공감되는 부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대단히 화려하고 멋지게, 또 그럴듯하게 살아갑니다. 때로 근심도 걱정도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문제없는 사람이 없고 고민 없는 사람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함께 읽은 말씀에는 나아만 장군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역시 겉은 참 화려하고 멋진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 즉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방부 장관의 책무를 맡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그에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요즘은 문둥병이라고 하지 않고 한센병이라고 하지요. 오늘날 태어났다면 별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당시로써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그의 집에 이스라엘에서 붙잡아온 여자 아이가 하나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살 길을 알려 줍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나아만 장군은 이 어린 아이의 말을 귀담아 들을 정도로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온전히 치유받기 위해서는 벗어버려야 할 껍질들이 많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어떠한 껍질을 벗어 던짐으로써 문둥병을 치유받았는지 살펴봄으로써, 여러분들도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치유 받기까지는
1. 지위의 껍질을 벗어야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러 오면서 은 십달란트(342kg=91200돈, 한 돈 3.75g=1520원, 현재시가 : 138,624,000 금 육 천개(68.4kg=18240돈, 한 돈 3.75g=74800원, 현재시가 : 1,364,352,000), 의복 열 벌을 싣고 왕의 친서를 손에 들고 거대한 껍질부대를 거느리고 왔습니다. 현시가로 계산해 보니까 약 15억에서 16억에 달하는 돈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나아만 장군의 처지에 놓인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서라도 고침을 받으려고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엘리사가 이것들을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만 장군의 바램처럼 안수는 해주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했습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나아만 장군은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엘리사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엘리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이 가지고 온 예물들이 정말로 필요 없을 정도로 넉넉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역시 그 정도 예물이 있다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숙사를 지으려고 할 때, 도끼가 없어 빌려와야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받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나와야 할 것은 돈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살 수 없습니다. 지위가 높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잠언 3장 34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뭐라고요?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은 이외에도 성경에 수도 없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은 구원해주시고(욥22:29), 소원을 들어주시며(시10:17),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며(시147:6), 지혜를 주십니다(잠11:2). 그뿐 아니라, 잠언 22장 4절은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옛 중국의 대학자인 양자(楊子·이름 朱)가 어느 날, 여행 중에 제자들과 같은 여관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관 주인은 아내를 둘 데리고 살고 있었으니, 하나는 아주 미인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못 생긴 추녀였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미인 아내 보다 못생긴 아내를 더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양자가 여관 하인을 불러 조용히 그 까닭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인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미인은 자기가 미인인 줄 알고 교만하여 도리어 미움을 사고, 추녀는 겸손함으로 얼굴 못 생긴 것을 감추기 때문이지요.” 이 말을 듣고 양자는 제자들에게 “어진 일을 행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은 어디를 가도 사랑을 받느니라!"고 가르쳤습니다.(biblenet.co.kr 주제 : 겸손, 못생긴 아내)
여러분, 사람도 교만한 사람은 미워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교만한 사람을 사랑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세상적인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자 하신다면 겸손해야 합니다. 지위의 껍질을 벗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바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치유받고 문제해결을 받기 위해서 나아만 장군은) 생각의 껍질을 벗어버려야 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을 본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합니다. 더욱이 엘리사 자신은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채로 사환을 통해서 말합니다. 이때 나아만 장군이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참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고침을 받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파서 병원을 찾는 경우, 의사에 따라 처방이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의사의 처방에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진단을 하고 처방을 합니다. 감기가 심하게 걸려 병원을 찾았으면서도 막상 병원에서 처방을 내려주면, ‘내 몸 내가 알아서 한다’며 고집을 피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나아만의 모습이 딱 이 꼴입니다.
은혜를 받고자 주님 앞에 나왔다면, 주님께서 내려주는 처방전을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해서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한 승무원이 기차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표를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연신 혼잣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큰일 났군, 큰일 났어!” 이윽고 기차의 한 칸을 모두 검사하고 나서 승객들을 향해서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승객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반대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셨으니 다음 역에서 내려서 갈아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침 기차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는데, 이 기차가 브뤼셀로 가는 기차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기차를 잘못 탄 것은 승객이 아닌 승무원 이었던 것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승객 모두가 브뤼셀로 가는 기차표를 지니고 있었다면 “아니 이거 내가 기차를 잘못 탔나?”하고 생각해 볼 일이건만, 이 승무원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나 강한 확신을 지닌 나머지 이런 실수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예화노트, 검색어 : 고집, 제목 : 브뤼셀로 가는 기차)
그런데, 바로 이 승무원과 같은 모습을 한 채로 사는 사람들이 우리일 수 있습니다. 자기 확신에 갇혀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만 옳을 수 없습니다. 옳은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비롯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 밖에는 그 누구도 자기가 최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루시의 아기’라고 불리는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몇몇 진화론자들은 이 화석을 토대로 인류의 진화를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사진 보여주기)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인류의 조상이 원숭이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렇다면 왜 성경이 말하는 창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지금 진화론과 창조신앙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숭이가 인류의 조상이라면, 뭔가 우리에게 득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삶이 보다 나아지도록 간섭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본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역사하십니다. 이 역사를 주관해 나가십니다. 여러분들이 마음먹은 대로 일이 진행됩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3. (치유받고 문제해결을 받기 위해서 나아만 장군은) 경험의 껍질을 벗어버려야 했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라는 말은 나아만 장군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단강은 참 형편없는 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본 바로는 요단강보다 자신의 나라에 있는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이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12절 말씀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무엇입니까?
자신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는데 필요한 것은 경험이 아닙니다.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서 우리에게도 좋은 계획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경험상으로 이런 경우, 이렇게 일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1970 년대 로버트 루카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를 필두로 등장한 ‘합리적 기대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 이 이론은 경제학계에 일대 혁명을 몰고 왔습니다. 이 이론의 요지는 “경제주체들이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활용해 경제상황의 변화를 합리적으로 예측해 행동하기 때문에 정부가 내놓는 어떤 경기 대책도 무력화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합리적 기대(rational expectations)를 하는 사람은 새로운 움직임의 낌새만 있어도 척하니 알아채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때문에 정부가 내놓는 어떠한 정책도 실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적응적 기대’(adaptive expectation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대개 보통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로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입장을 조정해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서 과거의 경험을 너무나 중시한 나머지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해 쓴맛을 보는 것을 뜻합니다.(예화노트, 검색어 : 경험, 제목 : ‘비합리적 기대’ 중에서)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그래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변화에 뒤처지면서 실패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경험만을 내세우면, 내가 경험한 것들만 내세우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더 큰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어떠한 경험을 했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을 뿐만 아니라, 떠돌이에 불과한 그들로 하여금 철옹성이었던 여리고성을 함락시키셨습니다. 경험의 껍질을 벗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더 큰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나아만 장군은) 판단의 껍질을 벗어버려야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일곱 번까지 요단강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을 살펴봅시다. 분명, 나아만 장군은 매번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자기의 수하들에게 낫는 기미가 있는지 물어봤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볼 때, 상처라는 것이 점진적으로 낫는 것이지 어느 한 순간 말끔하게 낫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여섯 번째 들어갔다 나왔는데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벌써 여섯 번씩이나 들어갔다 왔어. 그런데도 전혀 소용이 없잖아.”라며 판단하고 포기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자 한다면, 판단의 껍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이 정도 했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는 판단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때를 기다리며 인내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쪽에 작은 섬 하나가 있습니다. 일찍이 이 섬은 무거운 죄를 지은 죄수들을 수감하는 교도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섬에서 육지까지의 거리는 육안으로도 빤히 보일 정도로 먼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죄수들이 교도관들의 눈을 피해 교도소를 탈출하고 바다로 뛰어 들어 헤엄쳐 도망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도망자마다 섬을 굽이도는 급류 때문에 단 한명도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교도소 문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이 섬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섬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변화되는 길 외엔 어떤 길도 없다는 뜻입니다.(류영모 목사의 ‘껍질을 벗어라’라는 설교중에서)
여러분, 세상 참 살기 힘들죠?
저도 가끔은 힘들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그때마다 힘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내 모든 삶의 문제를 맡아주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로 어느 순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새 힘이 솟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이 이 은혜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판단을 보류하세요. 지금 당장의 모습만 보고 ‘나는 안 된다’고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결 론
우리는 너무 많은 껍질로 우리를 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은혜를 얻고 살아야 함에도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껍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변화되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지위의 껎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생각의 껍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경험의 껍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경험 때문에 오히려 갈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판단의 껍질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다른 삶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이제까지 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능력, 나의 생명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