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비가 내린다. 빗소리에 맞추어 사그락사그락 댓잎 비비는 소리가 들린다. 댓잎 비비는 소리를 잘 들어보면 비가 올 때와 오지 않을 때, 햇빛이 날 때와 바람이 불 때 들리는 소리가 다르다.
대숲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는 대금의 첫 출발신호인지 모른다. 저취, 평취, 역취의 주법으로 음색을 내는 대금 소리는, 고단한 삶의 고리를 풀어내는 애잔함이 가슴에 젖어 든다. 둔탁한 빗소리는 수면 아래 깔린 어두운 음색이다. 그 음색이 저취가 아닐까. 저취에는 가슴 한구석에 멍을 새겨넣는 듯한 서러움이 담겨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비애의 흐느낌이다.
댓잎이 바람에 스치는 듯한 잔잔한 운율은 평취일 것이다. 일상의 반듯함 속삭임의 정겨움, 그 음색은 연하디연한 풀잎 같은 아련함이 깃든다. 역취는 울리는 갈대 청으로 대나무가 바람에 휘어지는 소리다. 비가 억수로 내리칠 때 대나무 끝이 휘어지도록 음폭이 절벽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아닐까. 그 소리는 폭포수처럼 맑고 아름답다.
빗물이 바다로 몰려드는 물목엔 기다란 통 대나무로 둥글게 엮어서 박아 올린 죽방렴이 있다. 들물과 날물이 드나드는 죽방렴 안엔 물살도 고기도 생의 갈림길에서 불안하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죽방렴의 들물과 날물의 소용돌이처럼 휘말릴 때가 있다. 마음속 들물과 날물을 저울질하며 빠져나갈 궁리를 하지만 한번 걸려들면 소용돌이는 놓아주지 않는다. 우리는 늘 밀어내기 작업에 몰두한 나머지 때로는 미는 자와 밀려나지 않으려는 자와의 싸움에서 죽방렴에 갇힌 물고기가 되기도 한다.
무안 앞바다는 새만금이란 이름표를 달고 밀어내기 작업에 들어갔다. 바닷물을 밀어내려고 덤프트럭은 돌을 산더미같이 실어 바다에 쏟아붓고 새 지도를 만들고 있다. 막혀가는 물길 속 바다의 생물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덕이고 물살은 갈 곳을 잃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인간에게 그토록 많은 혜택을 주고도 저토록 힘없이 물러난 저 망연한 갯벌의 눈, 배은망덕의 길이 인간과 인간 사이만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행위에도 그렇듯 무참히 행해지는 것이다.
무안 앞바다의 은빛 물결이 서해 끝 수평선을 향해 마침내 가야 할 길을 내고 떠나고 있다. 해넘어 길을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서둘러 떠나야 하는, 것이다. 모든 걸, 다 주고 긴 수로를 따라 흘러가는 물소리는 합주곡의 이별곡이다. 떠나는 그 여정의 길은 외롭고 쓸쓸하다.
문둥이 성자 다미안은 남양의 하와이군도 뜨거운 적도 몰로카이섬에서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적도에 격리된 문둥병자들의 마지막 안식을 위해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바치고, 자신도 문둥병자가 되었다.
문둥병자들이 떼 지어 살아가는 남양군도 몰로카이섬이 커다란 죽방렴이란 생각을 해 본다. 섬에 갇혀서 파닥거리는 고기떼처럼 살과 살을 부대끼며 상처를 파내고 파먹는 삶, 그들이 망망대해를 향해 흘려보낸 질곡의 생의 아픔을 어찌 말로서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못 견디는 울분으로 들물과 날물 따라 수없이 바닷가를 들락거려 보지만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어쩔 수 없이 최후를 맞이하는 그들.
다미안 신부는 그곳을 스스로 선택했고, 단 혼자뿐인 성한 사람이 수백 명의 눈둥병자와 함께 부대끼며 그들의 문드러진 몸을 치료하고 살아갈 터를 개간하고, 날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땅 속에 묻고 또 묻으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밤이면 절벽으로 부딪쳐 떨어져 내리는 무시무시한 파도 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제대로 잠잘 방이 없어 나무 밑에서 풀과 벌레와 함께 자면서, 여기저기 않는 신음에 잠을 설쳐야 했던 험난한 성자의 길,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향해 만신창이가 된 젖은 가슴을 철썩철썩 사정없이 치다가 하얀 포말로 떨어져 내리는 슬픈 운명. 문둥병자의 손 마디마디가 휘어지는 고통의 소리, 그 절정의 흐느낌은 칠흑의 밤을 그렇듯 아리게 수놓아 갔다.
떠나지 않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그토록 발버둥 치는 물살과 생물들, 문둥병자들의 살과 살의 부대낌의 신음 소리가 죽방림 소용돌이 속으로 미끄러지듯 둥글게 감아 돌아내려 간다. 어둠 속으로 대금의 이별 곡 한줄기 깊이 잠긴다.
비가 그치지 않는다. 사그락사그락 비벼대는 소리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이 바다를 향해 빠르게 날린다. 바다는 석양을 이고,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대나무 숲 사이로 들려오는 빗소리가 저녁 안개에 젖는다. 비벼대던 댓잎이 잠시 손을 놓고 고요한 시간에 든다. 안개에 휘감겨 노을이 돌고 안개비의 은은한 풍경 속으로 떠오르는 몰로카이섬, 대금 한 소절 길게 펼쳐놓는다.
첫댓글 '대금 소리에 젖어' 를 읽으며 황 작가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것 같습니다. 참으로 따뜻하고 잔잔하신 분임을............
이 아침 이 글을 읽으므로 제 마음도 정화가 되는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