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작사 왕 평, 작곡 전수린)는 1928년 「이애리수」가
발표하여 4년 후 1932년 앨범으로 발매되어 무려 5 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리면서 최초로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대중 가요로
평가 받습니다.
1928년 늦가을, 악극단 취성좌[翠星座] 멤버들이 지방 공연을 위해
황해도 배천에 왔을 때, 비가 내려 공연을 할 수 없어 모두 여관에서
할일 없이 죽치고 있게 되었습니다. 악극단의 배경 음악 연주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전수린'은 창가에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이곳에 오기 전에 전속 극작가 '왕평(王平)'과 함께 들렀던 자기
고향인 개성의 만월대와 고려 성지(城址)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500년 전에 번성하던 고려 왕도 개성의 영화(榮華)는 온데 간데 없고,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있는 옛 궁궐의 주춧돌과 흐트러진 성벽의
일부만 초라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권력의 무상함과 나라 잃은
사람들의 아픔이 지금 일제(日帝) 치하에 있는 우리 민족과 자기들의
서글픈 신세와 다르지 않음을 떠올리며 쓸쓸히 돌아 왔던 기억들이,
창밖에 내리는 빗 속에서 어른거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수린'이 바이올린을 들어 그 착잡했던 심정을 연주하기 시작
하였는데, 그 소리를 들은 '왕평'이 이 선율을 악보화 하도록 하고
스스로 가사를 지어 붙인 것이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즐겨 부르고 있는
『황성옛터』[처음 제목은 "황성의 적(荒城의 跡)"]가 된 것입니다.
당시 새 노래가 나오면, 신파(新派)연극 공연의 막간에서 부르는 막간
가요로서거나, 아니면 활동 사진이 상영되는 극장 무대 아래서 반주
팀이 부르는 주제가로서 불리어져 대중에게 전달, 확산되었는데,
"황성의 적(荒城의 跡)"은 막간에서 앳띤 미녀 가수 「이애리수」가
막간에 나와 불러 인기를 끈 막간 가요였습니다.
이후 앞서 언급한데로 1932년 일본에서 '레코딩' 해 온 앨범이 당시
로서는 엄청난 기록인 5만장(현재 기준 500만 장)의 음반이 팔려나갈
정도로 히트함으로써 이 노래는 일약 민족의 가요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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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이루어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 깊이 묻어 놓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