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신태식은 신학문이 아닌 구학 , 즉 한학을 배운 사람이다. 사서삼경을 배우고 문장을 갈고 닦은 그는 격동의 시기에 지행일치를 삶을 살은 사람이다. 신태식은 1864년 문경시 가은읍 민지리 186번지에서 태어났다. 평소 곧은 성품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은 문장가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격동의 역사 속으로 뛰어든 것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진 1895년 때 의병항쟁이다. 1902년에는 내부주사와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고종황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1907년 그는 다시 의병을 일으킨다. 이강년의진과 연합하면서 갈평전투를 비롯, 죽령·소백산맥을 중심으로 울진, 평해, 영양, 영월, 산동, 제천, 원주, 홍천, 철원, 가평, 영평, 양양, 강계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 갈평전투 뒤 단양에서 의병을 모아 부대를 편성한다. 이강년 부대와 연합해 후군소모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07년 말에는 서울진공작전을 위해 북상하기도 했다. 1908년 7월 이강년이 붙잡힌 뒤, 신태식은 9월 횡성으로 퇴각하다가 어깨 부상을 입지만 양주 안산전투에서 일본군 장교를 생포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1908년 12월 경기도 영평군 이동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결국 붙잡혔다. 1909년 1월 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지만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10년형을 선고 받는다. 신태식이 감옥을 나온 것은 나라가 일제의 손에 넘어간 지 이미 7년이 넘은 1918년이다. 독립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신태식은 1920년 비밀결사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 이하 의용단)을 조직한다. 당시 비밀결사의 결성은 3.1운동 직후 활발하게 이뤄졌다. 1919년에만 30여 개, 1920~22년 사이에 60여 개가 결성돼 활동한다. 3.1운동으로 일어난 독립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 중 의용단은 신태식을 비롯 김찬규, 이응수가 주축이 돼 결성한 조직이다. 1920년 9월 김천 이응수의 집에 모여 비밀결사를 결성하기로 뜻을 모은 이들은 동지를 규합해 유력한 단체를 조직한 후,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든다. 신태식은 경북단장을, 김찬규는 경남단장을, 이응수는 경북총무를 각각 맡는다. 의용단은 군자금을 모집해 서로군정서를 지원하고자 했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무장단체다. 3.1만세운동 뒤 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들어왔고, 만주지역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독립전쟁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신흥무관학교를 확대 개편하는 한편, 자치단체 한족회를 꾸리고, 4월 군정부도 세웠다. 이후 군정부는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한편 명칭을 서로군정서로 바꾼다. 군자금 모집,무장활동,선전활동 등을 활발하게 펼친 서로군정서는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신태식이 바로 이 단체를 지원하고자 나선 것이다. 의용단은 1920년 9월에 결성돼 1922년 12월까지 활동한다. 경북지역 인사들이 주축을 이룬 의용단은 단원 모집에 주력한다. 이들이 단원 모집에 주력한 것은 단원자체가 곧 자금을 해결해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군정서 및 임시정부 명의로 된 군자금 사령서, 경고문, 사형선고서 등을 자금모집에 활용한다. 이 문건은 대구나 김천 등지에서 우편으로 발송하는 방법을 썼다. 대구의 계림여관이 활동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여관 경영자 박호진이 바로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친동생이었다. 경주에도 그 지국이 만들어졌다. 신태식은 경북단장을 맡아 동지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이듬해 겨울 일제 경찰에게 기밀이 탐지된다. 의용단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거나 배후세력으로 지목받은 사람은 대략 4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이계원(이상룡), 노백린, 김응섭, 김시현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국내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신태식도 이때 붙잡혀 1922년 12월 대구감옥에 수감됐다 징역 1년을 언도받는다. 1924년 출옥 뒤에도 신태식은 항일투쟁을 이어가다 1932년 69세로 서거한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