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1911-1995)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장기려는 6.25 전쟁을 맞아, 차남만 데리고 먼저 남하하게 되는데, 이것이 가족들과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이후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된다.
부산에 도착한 장기려는 1951년 6월 20일 영도에 있는 교회 창고를 빌려 ‘복음병원’을 세운다. 이 복음병원이 바로 오늘날 고신대 병원이다. 이곳에서 장기려는 유엔에서 원조받은 약을 가지고 피란민을 돌봤다. ‘치료비를 받지 않는다’는 소식에 수많은 환자가 몰렸다. 그에게 도움받은 환자들의 일화는 수없이 많다. 한 환자가 치료받고도 돈이 없어 눈치를 보자 장기려는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주며 “빨리 집에 돌아가서 푹 쉬고, 돈이 없어도 괜찮으니 며칠 뒤 꼭 다시 찾아오라”고 했고, 또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가 ‘돈이 없어 먹을 걸 구할 수가 없다’고 토로하자, 처방전에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어주시오’라고 쓰기도 했다
장기려는 1968년 동료 의사들과 함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한다. 의료보험은커녕 보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였다. 하지만 장기려는 ‘누구나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당시 담뱃값 100원에도 못 미치는 월 60원의 보험료만 받고 민영 의료보험을 운영한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성공은 영세민에게 의료혜택을 주는 걸 넘어서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에 대한 필요성을 널리 퍼뜨렸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고신대 병원에서 마련한 20여 평의 옥탑방에서 지내며 환자를 돌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