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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심축구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일심축구전설(박용희)
무명의 한 축구선수가 있었다. 이 선수는 학창시절 내내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도 없고 몇 번의 시련을 겪으며 축구를 그만둘 위기까지 맞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팀에서는 전력외 취급을 받았고 그마저도 방출 당해 갈 곳이 없었지만 혼자 자비를 들여 운동을 하며 꿈을 쫓았다. 그리고 지난 21일 그는 거짓말처럼 ‘별들의 잔치’라는 K리그 올스타전에 섰다. 처음 그를 본 관중은 어리둥절했지만 경기가 끝날 때는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좌절을 딛고 인간 승리 드라마를 쓰고 있는 K리그 챌린지 부천FC1995 골키퍼 김덕수에 관한 이야기다.
시작부터 우여곡절이었던 김덕수의 축구 인생
김덕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처음 시작했다. 학교가 끝난 뒤 친구들과 모여 축구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그는 본격적으로 축구를 배우기 위해 축구부가 있는 경기도 군포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또래보다 키도 작고 힘도 약했던 그는 필드 플레이어로 동료들과 경쟁했지만 축구부에서 그리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김덕수는 오히려 필드 플레이어보다는 골키퍼를 맡는 게 더 즐거웠다. 친구를 운동장으로 데리고 나가 혼자 재미 삼아 골문을 지키며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이쪽으로 차 봐.” 초등학교 시절 감독은 남들이 다 싫어하는 골키퍼를 자처한 그에게 포지션 변경을 권유했다. “덕수야, 이제부터 네가 골키퍼 보는 거야.” 김덕수는 골문 앞에서 몸을 날리는 게 골을 넣는 것보다 더 좋았다.
하지만 워낙 역사도 짧은 신생팀인 탓에 군포초등학교 축구부는 강하지 않았다. 김덕수는 그중에서도 그리 빛나는 선수도 아니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과천 문원중 축구부로 진학한 그는 중학교 1학년을 마칠 쯤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덕수야, 엄마하고 아빠가 직장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가야 해. 너도 이제 축구 그만두고 같이 가야 한단다.” 그리 풍족하지 못한 생활을 하던 그의 집안은 부모님의 일 때문에 결국 경기도에서 땅 끝 마을 전남 해남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저는 여기에 남아서 축구를 더 할래요.” 김덕수는 한사코 축구를 포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부모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렇게 그는 축구부가 없는 해남의 한 중학교로 전학을 가 축구와의 인연을 놓게 됐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다시 해남에서 곧바로 전남 영광으로 한 번 더 이사를 가게 되면서 그는 학교를 한 번 더 옮겼다. 김덕수는 이곳에서 그저 평범한 일반 학생으로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서서히 축구를 잊게 됐다. 그런데 2학년이 끝날 때쯤 인근의 고창중학교 축구부에서 김덕수를 찾아왔다. 같이 학교를 다니다 이 학교 축구부로 옮긴 후배가 김덕수를 추천한 것이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 한 형이 골키퍼를 했다고 들었어요.” 축구부 감독과 축구부 학부모 회장이 직접 김덕수를 찾아와 이렇게 설득했다. “우리 학교에 골키퍼가 없단다. 와서 같이 운동해 보지 않겠니?” 이미 축구를 잊고 살던 어린 김덕수는 축구부에 들어가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도왔다. “덕수야, 전학을 와 하지 못했던 축구를 여기에서 한 번 해보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무명 골키퍼
그렇게 김덕수는 1년 만에 학교를 옮겨 다시 골키퍼 장갑을 끼게 됐다. 하지만 김덕수는 그때도 여전히 기량이 부족했다. 필드 플레이어보다 키가 작은 골키퍼였다. 그저 축구부에 골키퍼가 없다는 이유로 스카우트된 것이었다. 적응도 쉽지 않았다. 매일 죽어라 뛰고 혼나는 게 일상이었다. 기량도 돋보이는 편이 아니어서 축구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서울에서 행복하게 축구를 했던 시절과는 달랐다. 김덕수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 번은 합숙을 하다 외박을 나와 집에 왔는데 다시 복귀하는 게 너무 싫은 거예요. 아버지께 ‘안 가겠다’고 떼를 썼는데 결국 아버지 손에 이끌려 다시 숙소로 들어가게 됐죠. 그만큼 중학교 때는 축구가 싫었어요.” 김덕수는 팀 사정상 주전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키도 작고 힘도 부족했던 탓에 경기 중 골킥을 직접 차 본 적이 없다. 킥이 좋은 수비수가 그의 골킥을 늘 대신했을 정도다.
그런 김덕수가 축구에 재미를 갖게 시작된 건 고창북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였다. 2학년 선배 골키퍼가 열심히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그를 따라 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형, 어디 가세요?” 김덕수는 늘 이 선배를 뒤쫓았다. “응. 지금 줄넘기하러 가.” 밤마다 혼자 공터에 가 줄넘기하는 선배를 보고 김덕수는 그를 따라가 옆에서 똑같은 운동을 따라했다. 가장 먼저 훈련장에 나타나고 철저하게 자기 관리하는 선배를 보며 ‘언젠간 저 선배를 넘고 싶다’고 다짐했다. 그랬더니 실력이 쑥쑥 늘기 시작했다. “제가 나아지고 있는 걸 스스로 느낄 정도였어요.” 운동에 집중하고 나서부터는 키도 눈에 띄게 자랐다. 처음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167cm였던 김덕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는 178cm로 성장하더니 3학년에 올라가자 184cm까지 컸다. 김덕수는 이때부터 허리에 통증을 느꼈고 ‘성장통’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몸 담았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축구부처럼 고등학교 축구부 역시 강팀은 아니었다. 그 선배가 졸업하고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나선 김덕수는 전국대회 8강에 한 번 오른 게 전부였다. “쟤가 김진현이라며? 진짜 엄청나대.”, “너 조수혁 하는 거 봤어? 역시 고교랭킹 1위답더라.” 전국대회에 나서면 또래 중 유명했던 골키퍼들이 주목받는 동안 김덕수는 늘 소외돼 있었다. 그 누구도 약체 팀의 평범한 골키퍼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친 김덕수는 우석대에 입학하게 됐다. 비슷한 몇 군데 대학에서 제의가 있었지만 집안 사정을 고려해 체육특기생으로 학비를 면제해 주기로 한 우석대를 택했다. 우석대 역시 이제 갓 창단한 신생팀이었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할 거라고 미리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저 내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 먹었죠.” 김덕수는 대학교에서도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다.
대기만성형 김덕수의 크나큰 위기
그는 대학교에 가 아침 5시면 새벽잠과 사투를 벌이며 혼자 학교 앞 매점으로 향했다. 새벽 개인운동을 위해서였다. 매일 혼자 해가 아직 뜨지도 않은 이 시간에 매점 앞 계단을 오르내리며 체력과 힘을 길렀다. 밤이 되면 또 혼자 공터로 나가 운동을 했다. 그랬더니 고등학교 때보다 실력이 확 늘어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2학년 선배가 부상을 당해 김덕수는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2년 연속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할 정도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지금 너한테 오라는 K리그 팀이 있어. 하지만 몇 년 더 하고 가자. 우리 학교도 우승 한 번 해야 하지 않겠어?” 대학교 2학년 때부터 K리그 몇몇 구단에서는 김덕수를 주목하고 있었지만 우승에 목이 마른 학교 측에서는 김덕수를 일찌감치 보내고 싶지 않았다. 김덕수도 대학 무대에서 더 멋진 활약을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그는 팀과 함께 동계훈련을 떠났다.
그런데 자꾸 허리가 아팠다. 고등학교 시절 ‘성장통’을 겪었던 그는 대학교에 와서도 키가 계속 커 190cm에 이르는 장신이 됐다. 허리의 고통은 ‘성장통’이라고 여겼지만 도무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동계 전지훈련에서 고통을 참고 골문을 지킨 김덕수는 인천유나이티드와의 연습경기에서도 눈 부신 선방을 펼치며 다시 한 번 입단 제의를 받게 됐다. 인천 구단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년에 드래프트 넣어. 그러면 우리가 뽑아줄게.” 하지만 그는 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허리 통증이 점점 더 극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병원을 찾은 김덕수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됐다. “저런. 이 상태가 될 때까지 왜 병원을 찾지 않으신 겁니까. 허리 디스크가 심각하고 척추측만증까지 있네요.” 의사는 말을 덧붙였다. “약물 치료와 재활로만 1년 정도 소요될 겁니다.” 그는 선수 생활에 처음 찾아온 전성기를 이렇게 흘려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충격에 빠져 있을 틈이 없었다. 2008년 3학년이 돼 대회를 치러야 할 상황에서 후배 골키퍼들이 모두 부상을 당해 골문을 지킬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 딴에는 팀을 위해 책임감을 갖는다고 생각했어요.” 허리 디스크로 전혀 운동을 하지 못했던 그는 결국 시즌 첫 대회에서 골키퍼 장갑을 낄 수밖에 없었다. 진통제 투여도 없이 오로지 근육 테이핑만 하고 경기에 나선 그는 킥이나 다이빙은 물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김덕수는 연이어 실수를 연발하며 중앙대와 홍익대에 각각 0-3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안 아팠으면 먹지 않을 골을 엄청 먹었죠. 그래도 어떻게 해요. 골키퍼가 없는데 저라도 골문을 지켜야죠.” 경기가 끝난 뒤 김덕수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를 직접 보고 스카우트하려 했던 K리그 구단에서 실망스러운 김덕수의 경기력을 보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실수 연발, 벤치에도 앉지 못하는 철저한 후보
이때부터 김덕수는 서울 고모 집에서 지내며 약물 치료와 재활로만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축구공은 아예 만지지도 못했다.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1년 뒤에 4학년이 돼 그라운드에 복귀했는데 경기력과 자신감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진 거예요. 제가 생각해도 한심한 경기력이었어요.” 그가 돌아올 때쯤 대학 축구는 U리그를 출범하며 판이 더 커져 있었지만 김덕수가 보여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 우석대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이 대폭 물갈이 돼 김덕수는 적응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때 잊지 못할 경기가 펼쳐졌다. 2009년 U리그 호남권역에서 1위를 차지한 우석대는 같은 권역 2위였던 전주대와 또 다시 토너먼트 8강에서 마주했다. 이 경기에서 우석대는 1-1로 팽팽하던 후반 13분 김덕수가 상대의 평범한 슈팅을 잡으려다 놓치는 결정적인 실수로 골을 허용한 뒤 2-2까지 따라 붙었지만 결국 승부차기 끝에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선수였나.’ 김덕수는 심하게 자책했다. 이제는 성인 무대 진출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3학년과 4학년 때 경기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그를 선택할 K리그 구단은 없었다.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K리그 구단들은 그의 경기력에 실망하고 이미 다른 선수를 점찍어 놓은 상황이었다. ‘어차피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넣어도 불러주는 곳이 없을 거야.’ 결국 김덕수는 K리그 드래프트를 포기하고 유일하게 그를 불러준 내셔널리그 신생팀 목포시청에 입단하게 됐다. 하지만 김덕수는 내셔널리그 최약체의 신생 구단에서도 세 번째 골키퍼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시즌 개막 전 치른 몇 번의 연습경기에서 최악의 실수를 연이어 범하며 주전 경쟁에서 아예 멀어졌다. “태어나서 한 번 하기도 어려운 실수를 그때 다 해봤죠.” 그는 평범한 슈팅을 잡으려다 속된 말로 알을 까 골을 먹기도 했고 골킥한 공이 바로 앞 상대 공격수에 떨어져 실점을 하기도 했다. 공중볼을 잡았다 놓쳐 어이없는 골도 허용했고 백패스를 롱킥으로 연결하려다 빗맞아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김덕수는 허리를 다친 뒤 최악의 상황을 걷고 있었다. 이전까지 K리그 여러 구단에서 군침을 흘리던 골키퍼가 아니었다. 경기력과 자신감 모두 최악으로 떨어졌다. “프로에서 온 형들한테 기도 눌렸고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은 있는데 몸도 예전 같지 않았어요. 목포시청 김정혁 감독님과 코치님들한테는 ‘실수가 많은 선수’라는 낙인이 찍혔죠.” 결국 김덕수는 시즌이 개막한 뒤 벤치에도 앉지 못하고 경기를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신세가 됐다. 원정을 떠나는 날이면 쓸쓸히 숙소에 남아 따로 운동을 하는 철저한 후보였다. 목포시청이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0년 FA컵 32강전 FC서울과의 경기에서 승부차기 혈투를 벌이는 동안에도 그는 외롭게 목포 숙소에 남아 이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김덕수는 2010년 내셔널리그와 전국체전에서 두 경기씩 나선 게 전부였고 이듬해에는 단 한 차례도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내셔널리그에서의 방출과 스키장 아르바이트
좌절하고 있던 김덕수는 축구를 포기할 생각에 이르렀다. 2011년 오랜 시간 고민을 하다가 임관식 코치를 찾아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저 이제 축구를 그만둘까 합니다.” 임관식 코치는 아쉬워했다. “조금만 더 해보자.” 하지만 김덕수는 완강했다.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제는 다른 일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 길로 김덕수는 짐을 싸 숙소를 나왔다. 준비하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텼지만 이미 한 번 큰 부상을 당한 이후 4년째 정상적인 경기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방황하던 김덕수는 나흘 뒤 계약해지를 위해 잠시 목포 숙소에 들렀다. 그런데 이때 김정혁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왜 나가려고 그래?” 김덕수는 속마음을 털어놨다. “축구는 계속 하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안 돼 이제는 포기하고 싶어요.” 그러자 김정혁 감독이 말을 이었다. “이번 여름에 열리는 내셔널선수권대회에서 기회를 주려고 했어. 다시 팀에 들어와.”
김덕수는 사실 축구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축구를 너무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축구를 놓으려던 것이었다. 그렇게 계약해지를 하러 간 길에 김덕수는 다시 팀에 눌러 앉았다. 잠시나마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2011년 6월 26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내셔널축구선수권대회 본선 토너먼트에서 목포시청은 창원시청과 맞붙었다. 이날은 날씨가 무척이나 흐렸다. 김덕수는 후보 명단에 포함돼 기회를 얻는 듯 했지만 결국 그는 1-2로 팀이 뒤지고 있던 후반 종료 직전에야 그라운드에 들어설 수 있었다. “덕수, 경기 출전해.” 시계를 보니 종료까지는 딱 7분이 남아 있었다. ‘이건 정말 아닌데. 이게 나에게 온 마지막 기회인가.’ 결국 김덕수는 이 7분을 끝으로 팀에서 방출 통보를 받고 완전히 팀을 떠나야 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원망도 했지만 제가 너무 준비가 안 돼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전남 영광 부모님 댁에 내려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에만 처박혀 있었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 방황했다. 잠시 고등학교 은사의 도움을 받아 운동을 하다 중학교에서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곧 26살이 되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김덕수는 마땅한 수입도 없었다. 결국 그는 모든 자존심과 축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2011년 겨울 곤지암 스키장으로 향했다. 손님들이 리프트를 타는 곳에서 “어서오세요”라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리프트 승차 보조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위해서였다. 김덕수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뭐라도 해야 했어요. 수입이 전혀 없으니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먹고 살죠.” 그렇게 김덕수와 축구가 서서히 멀어질 즈음 학창시절 은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헝가리 진출 실패, 그리고 벼랑 끝 마지막 도전
설명은 이랬다. 한 스포츠 에이전트 회사에서 테스트를 통해 뽑히면 유럽 진출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스키장에는 하루 휴가를 내고 경기도 파주로 가 대신고와 연습경기를 했다. 이 모습을 여러 축구 관계자가 지켜보고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테스트를 마치고 다시 스키장에서 일을 하는데 또 연락이 왔다. “1차 테스트에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2차 테스트까지 합격한 그는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3차 테스트에도 나섰다. 한남대와의 경기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경기장에서 그는 러시아 CSKA모스크바에 진출한 김인성과 한 팀에 속해 있었다. 김덕수는 3차 테스트에서 합격한 뒤 부랴부랴 비자를 만들어 이탈리아로 떠날 수 있었다. 모아 놓았던 돈과 부모님이 보태준 돈까지 다 털었다. 곤지암 스키장 아르바이트생에서 졸지에 유럽으로 입단 테스트를 떠난 축구선수로 다시 변신한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한 달가량 머물다가 헝가리로 떠났다. 헝가리 2부리그 팀 입단 테스트를 받기 위해서였다. 처음 그의 플레이를 지켜본 구단 관계자는 대뜸 “나이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한국 나이로 26살, 외국 나이로는 24살”이라고 답하자 구단 관계자의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연령별 체계가 확실한 유럽에서 만23세 이하로 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성인팀에서 뛰기에도 애매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김덕수는 유럽 진출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유럽으로 날아가며 마지막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이쯤 되니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김덕수에게 또 다시 한 통의 연락이 닿았다. 목포시청에서 같이 운동을 했던 후배였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져 오는 내용은 이랬다. “형, 경기도 일산에서 같이 운동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도전해보지 않을래요? 여기 트레이닝센터가 있거든요.”
이 곳은 YMCA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뛸 팀을 구하지 못해 축구를 그만둘 위기에 놓인 젊은 선수들의 부활을 돕는 팀이었다. 이미 실패를 맛본 선수들이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곳이었다. 김덕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저는 축구계에 전혀 인맥이 없거든요. 어떻게라도 축구를 계속하고 싶은데 방법이 따로 없잖아요. 그래서 여기저기 테스트를 다닌 거죠.” 김덕수는 이곳에 합류해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다 떨어진 인조잔디에서 몸을 날리면 팔꿈치가 까지고 골키퍼가 혼자 뿐이어서 따로 골키퍼 훈련도 할 수가 없었지만 끝까지 참고 버텼다. 보통 이곳에서 잘 풀려 내셔널리그나 챌린저스리그(과거 K3리그)로 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마땅한 수입 없이 힘겨워하다가 꿈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덕수는 1기로 뽑혀 3기가 수료를 마칠 때까지 무려 1년이나 이곳에서 버텼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마저 포기한다면 그때는 정말 축구선수로 끝이었다.
챌린저스리그 꼴찌팀 골키퍼가 된 김덕수
열심히하는 김덕수를 보고 이곳 센터장이 일자리를 소개했다. “덕수야, 용돈이라도 벌 겸 챌린저스리그 팀에서 뛰어보지 않을래? 경기 수당이 많지는 않은데 그래도 생활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거야.” 김덕수가 소개받은 팀은 대한민국 최하위리그 최하위팀 고양시민구단이었다. 2010년 25경기에서 무려 86골이나 먹으며 리그 꼴찌를 했던 고양시민구단은 2011년에도 22경기에서 56실점하며 최하위에 머문 약체 중의 약체였다. 하지만 김덕수는 더 이상 상할 자존심도 없었다.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2012년 8월 후반기 선수 등록을 마치고 고양시민구단에 합류했다. 대학 시절 한 번의 부상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 김덕수는 그렇게 2012년 8월 18일 최하위리그인 챌린저스리그 꼴찌팀 골키퍼로 골문을 지키게 됐다. 김덕수는 그라운드에 나서면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만년 꼴찌 고양시민구단은 2012시즌 김덕수가 팀에 합류하기 전까지 17경기에 무려 52골이나 내주며 역시나 꼴찌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김덕수가 온 뒤 팀은 몰라보게 변했다. 첫 경기에서 3위 팀 양주시민구단을 3-1로 제압한 고양은 4위 팀 경주시민구단과도 0-0으로 비겼고 1위를 내달리던 파주시민구단을 상대로도 1-1 무승부에 성공했다. 김덕수는 챌린저스리그에서 가장 약한 고양 골문을 지키며 8경기에서 단 8골만을 내주는 놀라운 선방을 이어나갔다. 이전까지 17경기에서 단 세 번 이긴 고양은 김덕수 합류 후 8경기에서 2승 5무 1패를 기록하며 다른 팀으로 변모했다. 물론 수당은 많지 않았다. 경기에 나서면 5만 원, 이기면 10만 원을 받는 게 전부였지만 김덕수는 돈보다는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제가 팀에 합류하고 딱 한 번 졌어요. 한 달에 40만 원까지 번 적도 있죠.” 고양 김진옥 감독은 적지 않은 나이에도 팀에서 맹활약하는 김덕수를 위해 용돈을 조금씩 더 챙겨주기도 했다.
그런 김덕수에게 운명 같은 경기가 열린 건 2012년 11월 3일이었다. 챌린저스리그 마지막 라운드 부천FC와의 원정경기였다. 오랜 만에 천연잔디에서 뛰는 경기라 경기 전부터 마음가짐을 다졌다. 처음 그가 그라운드에 등장하자 꼴찌팀 골키퍼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꽁지머리를 한 김덕수를 보며 “쟨 또 뭐야?”라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김덕수는 이날 부천의 파상공세를 온몸으로 틀어 막았다. 공중 경합 상황에서는 과감히 튀어 나와 모든 공을 잡아냈고 공격적인 골킥으로 역습 상황까지 여러 차례 만들었다. 그가 찬 골킥은 상대 골문 앞에까지 떨어졌다. 후반이 되니 그의 등 뒤에서 부천 팬들의 원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골킥을 그렇게 차는데 너 같으면 어떻게 수비하겠어? 야, 살살 좀 해.” 전반 시작 전 아무도 그를 몰라봤지만 그는 후반이 끝날 무렵 가장 관심을 받는 선수가 돼 있었다. 비록 경기는 2-2 무승부로 막을 내렸지만 고양이 부천 원정에서 이렇게 선전할 것이라 예상하는 이는 없었다.
김덕수의 처음이자 마지막 K리그 드래프트
그렇게 2012년 챌린저스리그가 막을 내렸다. 김덕수에게는 이제 시간이 많지 않았다. 마땅한 소속팀 없이 이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대학교 2학년 이후 제대로 대우를 받으며 정기적으로 경기에 나선 적도 없었고 그러면서 나이는 한 살 한 살 먹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허리 디스크 당시 충분한 군 면제 사유가 됐음에도 그는 “당당히 프로에 입성해 상무에 가겠다”는 꿈을 품고 신체검사를 다시 받지 않아 현역 입영 대상자였다. 김덕수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2012년 겨울 K리그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넣었다. 여기에서 선택받지 못하면 김덕수를 기다리는 곳은 군대 뿐이었다. 하지만 김덕수는 큰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챌린저스리그에서 잠시 뛴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부천과 안양이 K리그 챌린지(2부리그)에 편입되면서 드래프트 수요가 늘기는 했지만 이건 다 남의 이야기였다.
K리그 드래프트를 하루 앞둔 2012년 12월 9일 그가 1년 동안 운동했던 경기도 일산 트레이닝센터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덕수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어서 이곳으로 와 봐.” 한걸음에 달려간 김덕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락이 왔어. 널 뽑고 싶대.” 그는 귀를 의심했다. “어떤 팀에서요? 저를 어떤 팀에서 원해요?” 트레이닝센터 관계자의 답변은 놀라웠다. “부천에서 뽑겠대.” 챌린저스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맞붙었던 부천이 K리그 챌린지에 입성하면서 김덕수를 점찍었다는 소식이었다. 맞대결에서 보여줬던 김덕수의 활약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김덕수는 눈물이 날 만큼 기뻤지만 아무에게도, 심지어 부모님에게도 이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잘 못 될 수도 있으니 내일까지는 조용히 기다리자.’ 이 소식을 듣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내가 힘들었던 밤은 오늘이 마지막일까. 만약 내일 선택받지 못하면 어쩌지. 정말 내가 부천에 입단할 수 있을까. 만약 선택받으면 뭐부터 해야 하지.’
날이 밝았다. 오전에 비가 살짝 내리면서 강당에서 동료들과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드래프트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달됐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관계자가 급하게 강당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덕수야, 됐다. 부천에서 널 지명했어.” 이제야 비로소 김덕수는 웃을 수 있었다. 동료들로부터 진심 어린 축하를 받았고 곧바로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비록 연봉 2천만 원의 번외지명 선수였지만 김덕수는 부천에 합류해 단숨에 주전 자리를 꿰찼다. 그동안의 울분을 토해내는 맹활약이 이어졌다. 대학교 2학년 이후로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던 김덕수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내셔널리그에서 벤치에도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했던, 최하위리그 꼴찌팀에서 뛰어야 했던 김덕수가 이제는 프로팀의 주전 수문장이 된 것이었다. 김덕수는 K리그 챌린지 위클리베스트에 13라운드까지 2차례 선정되는 등 눈부신 선방을 이어갔다. 그의 활약 속에 부천은 현재 리그 3위까지 치고 올라간 상황이다.
‘별들의 잔치’에 초대된 무명의 골키퍼
김덕수는 그저 다시 고민 없이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경기장에 들어서면 그 자체로도 너무 좋아요. 포기할 뻔했던 꿈을 다시 꿀 수 있게 됐잖아요. 이렇게 하루 하루가 감사하는 마음 뿐이죠.” 하지만 김덕수의 비상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K리그 챌린지 올스타 후보에까지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비록 이미 K리그 무대에서 많은 걸 보여주며 팬들에게 각인된 김호준(상주상무), 유현(경찰축구단)과 골키퍼 후보에서 경쟁을 펼쳐 3위를 기록하긴 했지만 무려 11,671표를 기록하며 2위 김호준(13,437표)과 2천여 표도 안 되는 격차로 선전했다. 인기 투표 방식으로 진행된 올스타 투표에서는 밀린 뒤 이후 올스타 선정위원회가 한 차례 더 열려 올스타전에 나설 선수를 추가로 선발하는 방식이 남아 있었지만 김덕수는 여기에는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그냥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했어요.”
부천 동료들과 함께 휴식기를 맞아 가까운 곳으로 잠시 여행을 떠났다. 같이 여행 중인 팀 동료 한종우와 허건이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올스타전 명단 발표되는 날 아니야? 한 번 찾아보자.” 김덕수는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말을 흘려 들었다. 그런데 이때 한종우와 허건이 스마트폰으로 올스타 명단을 확인하고 놀라며 말했다. “덕수야, 여기 네 이름 있어. 너 올스타에 뽑혔어.” 올스타 선정위원회에서 김덕수를 K리그 챌린지 올스타로 선발했다는 소식이었다. 불과 1년 전, 아니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뛸 팀이 없어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축구를 포기할 뻔했던 김덕수가 ‘별들의 잔치’에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김덕수는 동료들과 함께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렇게 김덕수는 올스타전이 열리기 하루 전인 지난 20일 팀 동료 임창균과 함께 올스타전 출전 선수에 소집됐다.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김덕수도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저녁 식사 하시고 다시 모여 주세요.” 프로축구연맹 관계자가 소집된 선수들에게 말했다. “창균아, 우리 콩나물 국밥 먹으러 갈까?” 친분 있는 선수가 별로 없던 탓에 팀 동료 임창균과 둘이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임창균은 “감자탕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렇게 숙소 인근 감자탕 집에 가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 임창균이 놀라며 화들짝 인사를 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임창균의 시선이 쏠린 쪽으로 눈을 돌리니 전설적인 골키퍼 김병지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김덕수도 놀라 꾸벅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김병지가 김덕수를 몰라보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K리그 챌린지에서 뛰고 있는 김덕수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공교롭게도 김덕수는 김병지 바로 뒤에서 등을 맞댄 채 식사를 했다. 김덕수로서는 이 모든 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지금 저런 훌륭한 선배님과 내일 맞대결을 하다니.’
김덕수, 35분 만에 관중을 사로잡다
올스타전 당일이 됐다. 라커룸에 들어가니 올스타전에서 한 팀으로 뛰기로 한 구자철과 기성용, 이청용, 윤석영 등 해외파가 먼저 와 있었다. 그저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선수들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그라운드에 나가 몸을 풀었다. 지난 2010년과 2011년 그가 몸 담았던 목포시청은 이곳에서 FC서울과 2년 연속 FA컵 승부를 펼쳤지만 김덕수는 그때 이곳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오지 못한 채 목포 숙소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했었다. 하지만 김덕수는 불과 2년 만에 올스타전이라는 꿈의 무대가 열리는 서울월드컵경기장 잔디를 밟고 있었다.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몸을 풀던 김덕수가 유현을 대신해 경기장에 투입됐다. 부천 팬들은 김덕수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관중에게 김덕수는 철저한 무명이었다. “저 선수 누구야? 올스타전에 저렇게 안 유명한 선수가 나와도 되는 거야?”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덕수는 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보산치치와 데얀의 슛을 연속적으로 막아내며 놀라운 선방을 이어갔다. 김덕수의 믿기지 않는 선방에 놀란 데얀은 슈팅을 날린 뒤 김덕수에게 하이파이브를 요청했을 정도다. 정대세와 지쿠의 놀라운 슈팅도 연이어 막아냈다. 그의 이름 석자도 제대로 모르던 관중은 불과 김덕수 투입 20분 만에 모두 열정적인 팬이 돼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김덕수”를 연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기 종료 10분을 남긴 상황에서 마무리 된 기자단 MVP 투표에서는 구자철이 가장 받은 표를 받았지만 투표 용지가 걷히고 난 뒤에도 김덕수의 선방쇼는 이어졌다. 기자석 여기저기에서는 “김덕수를 뽑았어야 돼”라는 아쉬움 섞인 소리가 흘러 나왔다. 비록 경기 종료 직전 정대세의 강력한 슈팅에 한 골을 허용했지만 김덕수는 올스타전에서 진정한 별이 되기에 충분한 활약을 선보였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내셔널리그의 철저한 후보였던 그는 이제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주인공이 돼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그의 플레이에 감명 받은 관중은 김덕수의 이름을 연호했다. “경기 중에는 제 이름을 외치는 분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어요. 그런데 경기 끝나고 나서는 정대세 선수에게 허용한 골이 너무 아쉬워서 제 응원 소리를 못 들었거든요. 정신이 있었으면 인사라도 드렸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너무 아쉽습니다.” 김덕수는 불과 35분 만에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구자철에 이어 기자단 MVP 투표에서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은 게 바로 김덕수였단다.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그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던 김병지는 경기가 끝난 뒤 김덕수의 이름을 정확히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덕수라는 후배가 선보인 선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단한 활약을 펼치면서 팀 챌린지의 무승부를 이끌었다.” 김덕수는 이날 경기가 끝난 뒤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에서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물론 그를 검색해도 아직은 인물 정보조차 뜨지 않지만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는 올스타전을 통해 서울월드컵경기장 잔디를 처음으로 밟았다. 불과 2년 전 숙소에서 텔레비전으로 바라보던 바로 그 경기장에 서게 된 것이다. (사진=부천FC 1995)
김덕수가 좌절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김덕수는 지난 날을 회상하면 지금이 꿈만 같다. “대학교 시절 허리를 다쳐 경기력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와 목포시청에서 실수를 연발하고 관중석으로 밀려 났을 때가 생각나요. 그럴 때마다 항상 경기장에 서 있는 제 모습을 그렸거든요. 지금 이렇게 제 이름을 알아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팬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꿈만 같아요. 너무 얼떨떨해서 구체적인 목표를 정할 틈도 없었지만 오랜 시간 축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 만은 간절합니다. 팀도 구하지 못해 방황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해요. 그리고 선수 입장에서 더 좋은 팀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에게 이렇게 기회를 준 부천에서 오랜 시간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이 팀에서 오랜 시간 선수로 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저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지금 과거의 자신처럼 좌절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게 아니고 살아 남는 자가 강한 거라는 걸 느껴요. 참고 버티면 반드시 웃는 날이 옵니다. 저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루 하루 사는 것도 버거운 사람이었어요. 힘들지만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그 고통이 행복이 돼 돌아올 거라고 믿습니다.” 축구선수로서 바닥까지 경험하고 팀이 없어 좌절하던 김덕수는 다시 일어서 ‘별들의 잔치’의 주인공으로 성장했다. 김덕수의 축구 인생 자체가 한 편의 인간 승리를 그린 드라마다. 그가 앞으로 더 멋진 활약을 이어가는 것이 그를 바라보며 힘을 얻는 이들에 대한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좌절을 경험하고 다시 일어선 김덕수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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