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래 글은 현재 뉴욕 뉴스쿨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사이먼 크리칠리(Simon Critchley) 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소설가로 알려진 필립 K. 딕(Philip K. Dick, 1928-1982)의 철학자적 측면에
관해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에세이를 옮긴 것이다.
1부: 빛나는 물고기에 관한 명상
믿고 있을 때, 나는 광인이다.
믿고 있지 않을 때,
나는 우울증을 앓는다.
― 필립 K. 딕(Philip K. Dick)
필립 K. 딕은 거의 틀림없이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소설 작가이다.
유성같은 짧은 경력동안 그는 121편의 단편소설과 45편의 장편소설을 저술했다.
생전에 그의 작품은 성공적이었는데, 1982년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영향력이 급격히 증가했다.
딕의 작품은,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가 원작), "토탈 리콜(Total Recall)",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스캐너 다클리(A Scanner Darkly)", 그리고 가장 최근에, "컨트롤러(The Adjustment Bureau)" 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그의 작품들에 대한 현기증이 날 정도로 성공적인 할리우드의 각색을 통해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딕을 사상가로 여기는 사람을 거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오류일 것이다.
딕의 생애는 오래 전에 광기와 약물 중독에 관한 화려한 이야기들이 가미된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런 전설을 딕의 문학적 탁월함이라는 특성에서 전환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조너선 레뎀(Jonathan Lethem)은, 내가 보기에 올바르게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딕은 전설적 인물이 아니었으며 광인도 아니었다.
그는 우리들 속에서 살았으며 천재였다."
그렇지만 딕의 생애는 그의 작품에 대한 어떤 평가에도 계속해서 상당히 많이 끼어든다.
여기서 모든 것은 "황금 물고기"라고 줄여서 언급하는 한 사건에 의존한다.
1974년 2월 20일, 딕은 깊숙이 파고 든 사랑니 때문에 치과의사를 찾아가서 펜토탈나트륨을 투여받은
후에 특별한 계시의 힘에 강타당했다.
한 젊은 여성이 캘리포니아 주 풀러턴(Fullerton) 시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다르본 알약 한 병을 배달했다.
그 여성은 1960년대 말의 예수 대항문화 운동이 채택했었던 고대 그리스도교 상징인 황금 물고기 장식을
단 목거리를 걸고 있었다.
딕의 설명에 의하면, 그 물고기 장식은 황금색 빛살을 방출하기 시작했고, 갑자기 딕은 그가 플라톤에
동의하며 상기라고 불렀던 것―지식 전체에 대한 회상 또는 토탈 리콜―을 경험했다.
딕은 철학자들이 "지성적 직관(intellectual intuition)"―마음에 의한 현상의 영사막 배후에 놓여 있는
형이상학적 실재의 직접적 지각―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을 얻었었다고 주장했다.
칸트 이래로 많은 철학자들이 그런 지성적 직관은, 엠마누엘 스베덴보리(Emmanuel Swedenborg)의
천사 군집의 환영처럼 일반적으로 종교적 경험 또는 신비한 경험으로서 부정한 몽매주의의 탈을 쓴
인간들만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칸트가 자아가 문자 그대로 신에 홀리는 상태인 일종의 집단적 열광을 나타내는 "die Schwarm
erei"이라는 멋진 독일어 낱말로 불렀던 것이다.
딕은, 칸트가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현상계와 본체계의 상이한 영역들에 두었던 주의 깊은 한계들과
균열들을 퉁명스럽게 일축하면서, 그가 "진정한 실재"라고 불렀던 것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을 주장했다.
그러나 황금 물고기 일화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후 여러 날과 여러 주 동안 딕은 환상적인 광선 쇼로 인한 밤새도록 계속되는 현란한 여러 영상을 경험
했으며 사실상 즐겼다.
팔 년 후에 53세로 죽을 때까지 이런 최면적 일화들은 환청과 예지몽들과 함께 끊어졌다 이어졌다 계속
된다.
딕이 "호 온(Ho on)" 또는 "오 호(Oh Ho)"라고 불렀던, 성급하고 성마른 목소리로 다양한 영적인 심오한
쟁점에 관해 그에게 말하는 토기를 비롯하여 매우 기묘한 일들이 많이―너무 많아서 여기에 나열할 수
없다―일어났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나쁜 산이었던가 아니면 좋은 펜토탈나트륨이었던가?
딕은 진정으로 광인이었던가?
그는 정신병자였던가? 그는 정신 분열증 환자였던가?
(그는 이렇게 적었다. "정신 분열증 환자는 실패한 도약이다.")
그 환영들은 단순히 몇몇 사람들이 T.L.E.―측두엽 간질(temporal lobe epilepsy)―라고 부르는 일련의
뇌 발작의 효과였는가?
이제 우리는 뇌에 관한 어떤 더 나은 신경과학적 이야기로 딕의 계시적 경험을 설명하고 해명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인과적 설명들이 딕이 서술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현상들의 풍부함을 놓치고 그것
들을 서술하기 위한 그의 독특한 수단도 간과한다는 점이다.
사실은, 그가 "2-3-74"라고 부르게 되는 것의 사건들(그해 2월과 3월의 사건들)을 경험한 후에 딕은
자신의 여생을 자신에게 일어났었던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바쳤다는 점이다.
딕에게 이해는 글쓰기를 의미했다.
딕은 2-3-74에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만성 글쓰기 중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증상을 겪으면서 자신의
경험에 관해 8,000쪽 이상의 글을 썼다.
그는 밤새도록 글을 쓰곤 했는데, 행간을 띄우지 않은, 여백이 좁은 20쪽을 한번에 생산하였으며 대체로
손으로 적었고 특별한 도표들과 수수께끼 같은 스케치 그림들이 산재했다.
사후에 대략 91개의 폴더로 정리된 산더미 같은 미완성 원고는 "주해(Exegesis)"라고 불렸다.
그 단편들은 딕의 친구 폴 윌리엄스(Paul Williams)에 의해 정리된 후에 여러 해 동안 캘리포니아 주
글렌 엘렌(Glen Ellen)에 소재하는 그의 주차장에 보관되었다.
마침내 2011년 말에 황금 물고기가 표지에 새겨진, 멋지게 편집된 이 텍스트의 선집이 출판되었는데,
그 책의 쪽수는 엄청나게도 950쪽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딕은 이렇게 쓴다.
"그런데 내 주해는 내 자신의 이해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 책은 가장 특별하고 방대한 자기해석 행위,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듯 보이는 2-3-7의 사건에 관한
명백히 끝없는 사유이다.
"주해"는 흔히 지루하고, 반복적이며, 과대 망상증의 발작들을 다루곤 하지만, 진정으로 탁월한 행들도
많이 실려 있으며 철저하고 완전히 무장 해제시키는 성실성으로 특징지워진다.
때때로, 앞의 인용 구절에서처럼, 딕은 낙담과 절망의 울증에 빠진다.
그러나 때때로, 후대의 시몬 마구스(Simon Magus)처럼, 그는 자아가 팽창하여 신과 통일되는 조증에
사로잡힌다.
"나는 신의 마음 속에 있다."
2-3-74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해하기 위해 딕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고 가장 좋아했던 자원들을
이용했다.
이것들은 1974년 말에 딕이 구입했던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15판의 완전한 전집과 1967년에 8권의 멋진
책으로 출판되었던 폴 에드워즈(Paul Edwards)의 거의 틀림없이 탁월한 "철학 백과사전"―여태까지 생산된 가장 풍부하고 가장 방대한 철학적 문헌들 가운데 하나―이었다.
딕은 두서없이 다방면으로 읽었다.
백과사전들 덕분에 딕은 광범위한 강박에 어떤 형식적이고 체계적인 정합성을 부여하는, 명백히 지도받지
않은 빠른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백과사전의 다양한 항목들을 훓어 보면서 딕은 모든 곳에서 관념들의 연결과 대응을 발견했다.
또한 그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특히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플라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스피노자, 헤겔, 쇼펜하우어, 마르크스,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그리고 한스 요나스―의 원전들과 마주쳤다.
그의 해석은 때때로 상당히 황당하지만 흔히 설득력이 있다.
이것 덕분에 나는 중요한 지점에 이른다.
딕은 순전한 독학자였다.
그는 1949년에 버컬리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한 학기도 마치지 않았는데, 몇 주 동안 그 대학에서
철학 10A 강좌를 듣다가 그만두었다.
딕이 담당교수에게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형상론―딕에게 그것의 진리는 나중에 2-3-74의 경험에 의해
증명되었다―의 타당성에 관해 물었을 때 드러난 그 교수의 무지와 불관용에 진저리나서 그는 교실을
떠났다.
딕은 분명히 철학자 또는 신학자로서 훈련받지―나는 학자들을 길들여진 애완동물인 것처럼 들리게 만드는 "훈련받다"라는 동사를 혐오하지만―않았다.
딕은 아마추어 철학자였고, 또는 "주해"의 편집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에릭 데이비스(Erik Davis)의
어구를 차용하면, 그는 가장 빛나는 것, 즉 차고 철학자였다.
딕은 학문적이고 학술적인 엄밀함에 있어서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상상력과 풍부한 횡적인 누적적
연상의 힘으로 넘치게 보상한다.
그가 더 많이 알았었더라면, 그 때문에 그는 덜 흥미로운 관념들의 연쇄를 산출했었을 것이다.
"주해" 후반부의 한 진술에서 딕은 이렇게 쓴다. "
나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철학자이지 소설가가 아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계속해서 덧붙인다.
"내 글쓰기의 핵심은 예술이 아니라 진리이다."
우리는, 철학자의 고전적인 목적인 진리에 대한 관심이 허구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허구의
작업으로 판단되는 명백한 역설을 대면하고 있는 듯 하다.
딕은 자신의 소설 쓰기를 자신이 진정한 실재로 식별하는 것을 서술하고자 하는 창의적인 시도로 여겼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기본적으로 분석적이지 창의적이지 않다.
내 글쓰기는 그야말로 분석을 다루는 창의적인 방법이다."
2부: 미래 영지주의자
그렇다면, 딕이 2-3-74의 현란한 환영들을 경험하는 동안 직관했다고 주장하는 진정한 실재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무형의 외침과 광란으로 펼쳐지는가 아니면 그것은 어떤 사유 또는 믿음의 전통을 시사
하는가?
나는 후자라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서 사물들은 이미 기묘한 우주 속에서 명백히 약간 더 기묘해지는데, 그래서 꽉 붙잡자.
"주해"의 바로 그 최초의 행들에서 딕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로고스(Logos)가 수많은 살아있는 존재자들에 대해 고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로고스는 "주해"의 본문에 산재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닌 낱말인데,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사실상 "말"이다.
또한 그것은 언술, 이성[라틴어로 라티오(ratio)] 또는 무언가에 대한 설명을 의미한다.
딕이 자주 언급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우에 로고스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나른하게도 무지한 질서정연
한 우주(코스모스)를 지배하는 보편 법칙이다.
확실히 딕은 이 마지막 의미를 염두에 두지만―가장 중요하게도―로고스는 요한복음의 첫번째 절을 가리
킨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그리스도라는 인격 속에서 살이 된다.
그런데 딕의 환영의 핵심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전적으로 기독교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영지주의적이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지성인데, 그것이 가장 고양된 순간에는 로고스와 동일시되고 빛살의 형식으로 또는
딕의 경우에는 환각적 환영들의 형식으로 인간들과 소통할 수 있는 세속을 초월한 또는 외계의 신과
융합된다.
"주해" 전체에 걸쳐 일원론적 우주관(이 관점에 따르면 우주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을 뿐인데, 그것은
자연으로서의 신이라는 스피노자의 관념, 과정으로서의 실재라는 화이트헤드의 관념, 그리고 "진리는
전체"라고 하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딕의 언급에서 볼 수 있다)과 이원론적 또는 영지주의적 우주관
(이 관점에 따르면 하나는 사악하고 나머지 하나는 인자한 두 개의 우주적 힘이 갈등 상태에 있다)
사이의 긴장이 있다.
딕에 대한 나의 독법에 따르면 후자의 관점이 승리한다.
이것은, 가시적인 현상적 세계는 타락한 상태이고 사실상 일종의 감방, 새장 또는 동굴이라는 점을 의미
한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기독교는 형이상학적 일원론이라는 점인데, 여기서 모든 것은 신의 작업이기 때문에
창조의 모든 측면들―가장 더럽고 가장 불쾌하더라도―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기독교도들의 의무이다.
악은 실체적인 것이 전혀 아닌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히 선한 신에 의해 초래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맞서, 영지주의는 이 세계를 창조한 거짓 신―일반적으로 "조물주"라고 불리는―과 이 세상에서는
알 수 없는 외계의 참된 신 사이의 본원적인 이원론을 선언한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에게 악은 실체적이고 그것의 증거는 이 세계이다.
가능한 한 창조물과 접촉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타액으로 씻곤 했던 한 급진적인 영지주의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영지주의는 세계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에 의한 외계의 신에 대한 숭배이다.
딕의 영지주의의 새로운 점은 신이 정보를 통해서 우리와 소통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딕의 지속적인 주제이며, 그는 우주를 정보로 간주하고 신도 정보로 간주한다.
그런 정보는 그가 직교 시간(orthogonal time)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이론과 연결된 일종의 정전기적
생명을 갖는다.
직교 시간은, 시간을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뻗어 있는 현 시점들의 연쇄로서 간주하는,아리스토텔
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표준적인 선형적 개념과 어긋나는 풍성하고 기묘한 시간 관념이다.
딕은 직교 시간을 양쪽 끝이 무한히 펼쳐지는 선이라기보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원으로 설명한다.
눈길을 끄는 이미지로, 딕은 직교 시간이 "LP 위의 홈들이 이미 연주되었던 음악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존재했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늘이 홈들을 지나간 후에 홈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비틀즈의 "어 데이 인 더 라이프(A Day in the Life)"에서 감쇠함에 따라 더욱 더 많은 모멘
텀과 음악적 복잡성을 결집시키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마지막 구절과 같다.
달리 말해서, 직교 시간은 토탈 리콜을 허용한다.
그의 더 격정적인 순간들―정직하게 말해서, 그것들은 꽤 자주 일어난다―에서 딕은 직교 시간이 황금시대,
즉 타락이 일어나기 전의 시대이자 원죄가 있기 이전의 시대가 복귀할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단언한다.
또한 그는, 직교 시간에서는 미래가 현재로 되돌아와서 실현된다.
확실히 이것 때문에 딕은 자신의 소설이 진리가 될 것이라고, 즉 미래가 자신의 책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현대 세계의 보안 기술이 이미 날마다 더욱 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의
2055년과 어떻게 흡사한 듯 보이는지에 관해 잠깐만 생각해보면, 딕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는 미래를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해"의 끝부분에서 딕은 1958년에 영어로 먼저 출판되었던 멋진 책인 한스 요나스의 "영지주의적 종교
(The Gnostic Religion)"로부터 자유롭게 차용하고 인용하기 시작한다.
요나스의 책이 얼마간 앞에서 언급한 토기처럼 딕에게 말하는 까닭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요나스는 신성한 빛살에 의한 계몽, 신에 대한 신비스러운 영지(신에 대한 지식, 영지주의적 신조),
신성한 실재의 직접적인 이해라는 관념의 힘과 지속성―역사적인 그리고 개념적인―을 보여준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신과의 이런 직접적인 접촉인데, 그것 자체가 영혼을 신성화하고 영혼으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비열한 세계―아무것도 아님―를 볼 수 있게 한다.
요나스에게 영지주의의 핵심은 허무주의의 경험인데, 즉 현상계는 아무것도 아니며 참된 세계는 현상적
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 비밀스러운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유보되어 있는 신성한
조명이 필요하다.
딕의 "주해"는 영지주의적 세계관에 관한 독특하게 강력하고 날카로운 재서술이다.
옳든 그르든―명백히 나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내가 보기에 영지주의는 여전히 비판하기 전에 이해할
필요가 있는 강력한 유혹을 나타낸다.
딕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데, "주해"의 도처에서 이와 같은 행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비밀 속에 비밀이 있다.
제국은 하나의 비밀(그것의 존재와 그것의 힘, 그것이 지배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은밀한 비합법적인
기독교도들이 그것에 대항했다.
그래서 은밀한 비합법적인 기독교도들을 발견한 덕분에 그들이 비합법적으로 존재한다면 더 강한 사악
한 것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즉각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은 딕의 영지주의 정치학에 관한 간결하고 계시적인 진술이다.
여기서의 논리는, 발렌티누스파 교도들과 마니교도들처럼 초기 기독교 시기의 다양한 영지주의적 분파
들에서 카타리파 교도들과 몇몇 역사가들이 13세기와 14세기에 유럽 전역의 보이지 않는 제국과 같았
다고 주장한 몹시 두려웠던 "자유 정신 이단(Herecy of the Free Spirit)"에까지 이르는 신비주의적
이단 형식들에 가깝다.
이단의 핵심은 원죄의 부정에 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있으며, 세계는 참된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성 바울이 유사
영지주의적인 한 순간에 "이 세계의 신"이라고 부른 사악한 조물주의 창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계라는 사악한 환영을 꿰뚫고 외계의 신의 참된 세계를 봐야 한다.
현상계는 나쁜 신의 창조물이고 영지주의자들이 "아르콘"이라고 불렀던 조물주의 대리자들, 딕이 예지적
으로 "제국"이라고 부르는 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대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우리가 죄의 참된 세속적 원천을 식별하게 될 때 현상계와 결별함으로써 신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과정이 끝날 무렵에 우리는 스스로 신이 되어 세계를 통치하는 사악한 제국의 지배를 폐기할 수 있다.
신비주의적 경험과 정치적 반란 사이의 이런 연결은 "주해"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제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제국의 노예들이고, 세계는 우리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는 감옥, 즉 영지주의자들이
"창조주 신의 보잘것 없는 감방"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관념이다.
그것은 딕이 BIP, 즉 깜깜한 철의 감옥(Black Iron Prison)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PTG, 즉 야자수 정원
(Palm Tree Garden)의 영적 구속에 대립되는 것이다.
비밀 엄수에 대한 강조를 주목하자.
첫번째 비밀은 세계가 함께 일종의 비밀 집단을 형성하는 사악한 제국 또는 정부 엘리트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자체는 돈으로 연결된 기업들의 자치 조직이고 기업 지도자들과 주주들의 이해관계에만 봉사한다.
두번째 비밀―"비밀 속의 비밀"―은 빨간 약을 삼켜서 마야의 장막을 찢어버린 소수들에 속한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매트릭스"―제3부의 글을 좇는 다면, 영지주의적 세계관의 놀라운, 심지어 걱정스
러운 몇 가지 현대적 함의들에 이를 수 있는 대중문화적 암시―를 보았다.
3부: 꿈 공장에서의 모험
이전의 포스트 글에서 우리는 초기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필립 K. 딕의 지적 유대와 철학적 유대를 살펴
보았다. 이제는 최소한 문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거울 속의 그 영지주의자를 살펴볼 때이다.
계속 읽어주세요.
필립 K. 딕의 명백히 독특하지만 열정적으로 고수된 세계관과 그것이 구현하는 영지주의는 몇몇 사람들
이 1960년대 이후 과학소설에서 디스토피아적 전환이라고 부르는 것 이상을 설명하며, 또한 거의 틀림
없이 우리 시대에, 문자적이든, 예술적이든 또는 영화적이든, 허구에 관한 지배적인 이해 양식이 된 것을
제공한다.
이것은, 현실은 치명적인 환영, 즉 상황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찢어야 할 필요가
있는, 꿈 공장에서 생성되는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매트릭스라는 관념이다.
그리고 정직하게 말하자면, 환영의 장막을 찢고 진리를 바라봤다는 관념에 몰두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
나게 즐겁다.
"나는 선택받은 자들에 속하고, 알고 있는, 영지 속에 있는 소수들에 속한다."
또한 딕의 영지주의 덕분에 우리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실존적으로 가장 고된 가르침―죄는 원죄의 형식
으로 우리 안에 있다―을 새로운 견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일단 영지주의를 수용하면, 사악함의 원천은 인간의 마음 속이 아니라, 기업자본주의의 부패한 아르콘
들이든 누구든 그들과 함께 저쪽에 있다.
우리는 사악하지 않다.
사악한 것은 이 세계이다.
이것은, 타고난 인간의 선함과 어린 시절의 순결이라는 관념에 의존하는 여러 하인츠의 낭만주의들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전에 루소에게서 최초로 그것의 근대적 목소리가 발견되는 통찰이다.
성인의 삶은 대단한 재앙인 듯 보이기 때문에 우리 성인들은 어린 시절을 이상화한다.
우리는 어린이라는 것―무력한 존재라는것―이 흔히 그것 자체로 재앙이라는 점을 망각한다.
영지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일단 사악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뒤로 물러나서 우리의 본질적인
선함,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불꽃, 우리의 순수성, 우리의 진정성을 회복할 수 있다.
뉴에이지 몽매주의의 비열한 산업 전체와 그것의 다양한 영적 및 물질적 "해독" 기법들, 그것의 유사컬
트적,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비밀 강조를 추동하는 것은 바로 순수성과 진정성에 대한 이런
욕망이다.
이런 유독한 세계관에 맞서 나는 우리가 대단히 불순하고 진정성이 없는 생물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내부에 어떤 불꽃이 있든 간에 그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다.
"매트릭스" 삼부작과 딕의 소설의 직접적인 영화 각색본들 외에도, 덴마크 영화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인 라스 본 트리에(Lars von Trier)의 가장 최근의 두 편의 영화에는 강한 영지주의적 주제들이 있다.
이 글의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은 간단한 몇 줄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안티크리스트(Antichrist)"(2009)에서 샬롯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가 연기한 배역은 이렇게
말한다.
"자연은 사탄의 교회다."
다른 한편으로, "멜랑콜리아(Melancholia)"(2011)에서 키르스텐 던스트(Kirsten Dunst) 배역은 샬롯
갱스부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지상에서의 삶은 사악하다는 것이다."
폰 트리에에서 영지주의적이지 않는 것은, 삶이 사악하다면 어디에도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가
주장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지구와 멜랑콜리아라는 불량 행성의 충돌을 환영해야 한다.
영지주의적 진정성 이데올로기의 더 순수한 판본은 미국에서 전대미문의 가장 큰 흥행 수익을 올린
영화인 제임스 캐머런(James Cameron)의 2009년 서사시 "아바타(Avatar)"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54년에 지구의 자원은 다 소진되었고 자연은 더러운 유독한 빈 껍데기로 바뀌었다.
부패하고 전권을 가진 RDA 코퍼레이션은 판도라 행성에서 적절하게 명명된 언옵테이니움(Unobtainium,
얻을 수 없는 물질)을 채굴하고 있다.
이 행성은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이와(Eywa)라는 모신을 숭배하는 나비족―피부색이 파랗고,
아름다우며, 키가 10피트인 존재자들―의 고향이다.
하반신이 불구인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Jake)는 결국 외계인 나비족 아바타가 되고, 그의 참된 연인 네이
티리(Naytiri)와 결합하며, 사악한 기업의 극악무도한 인간 세력을 패배시킨 후에 자연과 하나가 된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외계인이 되며, 지구라는 끔찍한 고향을 떠나 외계의 신성한 땅을
향한다.
핵심은, 자연과의 진정한 조화는 세속적 성질의 의복을 벗어버리고 외계인이 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
는 것이다.
또한 딕의 영지주의 덕분에 편집증적인 양식의 미국 정치―그리고 미국 정치만이 아닐 것이다―를 다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딕은 워터게이트라는 주제로 그리고 닉슨 대통령의 하야는 동굴의 그릇된 우상들을 넘어서는
참된 신의 재확인이라는 약간 기묘한 관념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말하자면, 현상계는 부패하고 비밀스러우며 사악한 엘리트들의 지배를 받는 감옥이다.
이런 견해에 대한 정치적 유사물들이 너무 많아서 여기서 나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인터넷의 방대한 리좀적 번성과 병행해온 음모 이론들의 끊임없는 등장에 관해 생각하자.
미국은 비밀스러운 전능한 엘리트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널린 퍼진 관념―우파와 좌파에서―에 관해
생각하자.
이들은 아이비리그 출신의 WASP들 또는 프리메이슨 회원들 또는 유대인들로 식별되곤 했는데, 이제는
일반적으로 골드만 삭스의 전직 고위 간부들로 식별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알려질 수 있는 비밀이 있고 그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비밀 소집단의
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본질적으로 영지주의적인 사유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는 불순한 진정하지 않은 세력에 대한 순수성의 옹호가 되고, 참된 지도자는 거의 초인간적인
해결책으로 악의 세력과 싸울 수 있는 진정한 영웅이어야 한다.
미트 롬니(Mitt Romney), 이쪽으로 오세요.
또한 영지주의의 도덕은 기묘하게도 우리의 현 상황과 관련이 있다.
한스 요나스가 강조하듯이, 영지의 소지자들은 인류의 더럽혀진 거대한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살아간다.
또한 세계에 대한 증오는 세속적인 도덕에 대한 경멸이고, 그래서 이것은 두 개의 동등하지만 반대되는
윤리적 반응―금욕주의와 방종주의―을 초래한다.
금욕주의자는 영지에 접속함으로써 세계는 가능한 한 거의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오염된 유독한 기계
라고 추론한다.
거의 틀림없이 이것은, 내면의 신성한 불꽃을 발견하고 지키기 위해서 환경적 접촉과 영양적 접촉, 성적
접촉에 맞서 육체와 영혼을 정화하는 것을 역설하는 현대의 전체 문화 및 "해독" 컬트와 일관성이 있다.
현대 금욕주의의 놀라운 진실은 다른 한 영화, 토드 헤인즈(Todd Haynes)의 뛰어난 영화 "세이프(Safe)"
(1995)에서 강력하게 연출되는데, 그 영화에서 줄리안 무어(Julianne Moore)가 연기하는 배역은 생명에
대한 전면적인 과민 반응을 나타낸다.
"환경성 질환"이라고 지칭하는 것 때문에 그는 결국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자조 컬트에 빠지게 되어 거울
속 자신의 영상에 "나는 자신을 사랑한다"라는 말과 다른 주문들을 중얼중얼 읊조리면서 저자극성 꼬투리
안에서 홀로 살아간다.
금욕주의자의 이면은 방종주의자인데, 방종주의자에게는 자신의 영지에 대한 접속이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보호 둘 다를 의미한다.
"그대가 뜻하는 바를 행하라!"는 알레이스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의 신비주의적 협잡에 관해 생
각하자.
또한 의도적으로 술에 취하거나 다가오는 차량들에 뛰어들어 돌아다니는 엄청나게 부유한 금융인에 관한
뉴욕의 도시 신화―나는 흔히 늦은 밤에 셀 수 없이 많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에 관해 생각하자.
그는 자신이 위해로부터 안전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운명은 자신의 편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는
자유롭게 자신이 "뜻하는" 바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여러분이 일단 비밀에 접속하게 되면 우주의 힘들은 여러분의 욕망에 동조한다.
유독하고 소외시키는 세계에 직면했을 때는 과민 반응에 안전한 거리로 물러서거나 아니면 인류의 바이
러스적 소용돌이 속으로 저돌적으로 뛰어들 수 있다. 어떤 식이든, 나는 내가 괜찮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명백히 미친 듯 들리겠지만, 나는 딕의 영지주의가 우리의 후기 근대 시대의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불안에
대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결정론적 과학적 세계관의 억제할 수 없는 등장은 문학, 문화, 역사, 종교 등과 연관되는 모든 인간 활동
영역들을 침범하여 압도할 조짐을 보인다.
스스로에게 묻자. 모든 것을 소진하는 일원론적 자연주의에 직면했을 때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저명한, 흔히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이 저술한, 밝게 채색된 양장본으로 판매되는 뇌 또는
우주에 대한 탐구서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경이와 의미의 파편들을 무엇이든 입수할 것이라고 바라면서
그 견해를 수용할 수 있다.
또는 어떤 판본의 이원론으로 복귀함으로써 과학적 결정론을 거부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이든 설탕이 발린 영적 또는 종교적 형이상학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또는 이른바
카프카나 베케트의 좌절당한 모더니즘에 대한 향수를 여전히 품고 있다면 가치 혼란의 무정한 세계
속의 고독한 소외된 자기로 복귀함으로써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길, 즉 전적으로 자연주의적이지도 않고 종교적이지도 않고 모더니즘적 비참주의
(miserabilism)의 어떤 재현도 아닌 길이 열려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한스 요나스을 인용하면, "철학이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기회에 논의할 다른 이야기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