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내력
진득거리는 머리카락이 자꾸만 목에 휘감겼다. 성하의 햇발을 고스란히 받은 정수리에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사방 천지에 뻗친 빛줄기가 출렁거리는 물결처럼 쏟아지는 신작로를 걸어가자니 멀미가 날 듯 어지러웠다. 길은 끝이 보이지 않고 멀기만 했다.
엄마가 말해준 곳에 아버지는 없었다. 아버지가 있어도, 없어도 내겐 어려운 임무였다. 그곳에 아버지가 있다고 내 손 잡고 집에 올 리도 없었고, 아버지가 없었다고 말하면 엄마는 또 복장이 터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헛걸음만 시켰네”라고 엄마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 앞에는 아버지의 구두가 놓여 있었다. 종일 달궈진 사택의 방문 하나가 바람 한 점 들어갈 틈 없이 굳게 닫혀 있다. 엄마랑 아버지는 그새 또 싸웠나 보다. 울다가 잠들었는지 방바닥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동생들에게 땀내가 났다. 밥상 앞에 앉아 물에 만 밥을 넘기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헛고생한 게 억울했고 이렇게 뜨거운 날에도 차갑기만 한 집안 공기가 서러웠다.
아버지는 늘 밖으로만 돌았고 집에 오면 공부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남들에게는 환하게 잘도 웃어주면서 엄마에게는 비틀거리는 등만 보여줬다. 제자나 후배들에게는 입버릇처럼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 같은 존재가 되라고 격려하고 훈화하면서 정작 우리에게는 어두운 낯빛일 때가 더 많았다. 아버지는 엄마나 동생들에게는 어려운 숙제였다.
몹시 열이 나던 어느 날이었다. 어쩐 일인지 그날은 아버지가 자꾸 까라지는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병원에 데려갔다. 아버지와 단둘이 가는 게 어색했다. 자전거가 덜컹거릴 때마다 엉덩이도 아프고 아버지 허리를 움켜잡아야 하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아버지 등에 자꾸 얼굴이 닿으려고 해서 고개를 곧추세우려고 했지만, 열에 취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얼굴을 대곤 했다. 열꽃이 피어서 그랬을까. 그 등은 따뜻했다. 병원을 오고 가는 동안 지척에 보이는 바다가 줄곧 우리를 따라왔다. 까치놀이 출렁거리던 그 바다는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잔영으로 남았다.
중학교에 입학한 해 초여름, 처음으로 글짓기 대회에 나갔다. 대회가 열리는 공원은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떤 내용으로 글짓기를 해야 할까, 원고지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아이들 손을 잡고 공원에 놀러 온 가족들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병원에 갔던 그 날의 아버지와 나의 이야기를 썼다. 상을 받았다. 상장을 보여드리자 아버지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잘했네. 근데 글짓기 대회에 나온 사람이 너 하나뿐이었냐?”
칭찬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칭찬만 해주면 어때서. 꼭 저렇게 사람 약을 올린다, 니 아버지는. 남이었으면 벌써 번쩍 안아주고도 남았겠지. 저번에 정희가 무슨 상인가 탔을 때는 그렇게도 칭찬이 늘어지더니.”
엄마가 계속 구시렁거렸다. 차라리 엄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갑내기 사촌 정희가 상 받았을 때는 자기 일처럼 좋아하더니 어쩌면 우리에게는 그리도 칭찬이 인색할까. 엄마도 아버지도 다 싫었다.
우리는 아버지 집을 떠났다. 그곳에 아버지와 함께 남은 달보드레한 무화과나무와 알알이 푸른 청포도나무가 아버지보다 더 많이 생각났다. 그리고 사택의 지붕보다 더 높이 자란 우람한 오동나무도 자꾸 떠올랐다. 종 모양의 보랏빛 꽃을 송이송이 매단 나무에서는 진한 향기가 났다. 커다랗고 푸른 잎사귀도 좋았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닥쳐와도 인생의 바다를 잘 헤쳐가길 바란다.”
그런 요지의 장황한 편지가 인생을 알 리 없는 내 앞으로 도착했다. 일용할 양식이 되지 못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허망했고 모래처럼 서걱거렸지만 열다섯의 나는 어쩐지 그 편지를 버리지 못하고 책갈피에 내내 간직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치른 언론사 입사시험에 떨어지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밑도 끝도 없이 어떤 섬의 중학교에 교사 자리를 알아놨으니 바로 목포로 오라는 거였다. 교사는 싫다고, 더구나 섬마을 선생은 상상도 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타박이 계속 이어졌다.
“니가 맏인데 빨리 벌어서 동생들 앞가림도 해 줘야지. 언제까지 감나무 아래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릴거냐? 선생이 왜 싫어. 여자 직업으로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다고.”
할 수 없이 집을 나섰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직장도 알아놨는데 면은 세워줘야지, 하면서 엄마가 등 떠민 것도 한몫했다.
목포까지 가서 다시 퉁퉁배를 타고 찾아간 섬마을 중학교는 생각과 달리 아늑했다. 학교 담을 둘러가며 서 있는 나무들이 해풍에 시달리면서도 훌쩍 키를 키운 모습이 짠하면서도 정겨웠다. 운동장을 걸어가는 아버지가 턱없이 위풍당당해서 도리어 나는 주눅이 들었다. 아버지는 다짜고짜 교장실 문을 열었고 난데없는 침입자에 놀란 교장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누구냐고 물었다.
“새로 온 국어선생이오. 얘기 다 들었지요? 야가 국문과 수석 졸업했단 것도?”
더러 장학금을 받긴 했지만 내가 수석이라니, 나는 어리둥절했고 교장은 당황해서 교감을 호출했다. 그는 아버지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확실히 알아보지도 않고 그 먼 섬까지 나를 데려가기부터 해 놓고도 아버지는 끝내 미련을 못 버리고 불퉁거렸다.
“애초에 니가 그렇게 쪼그맣게 생긴 게 사달이다. 다 된 밥인데 면접에서 배려분 거지. 덩치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멸치처럼 삐쩍 말라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일이 아득했다. 그 옛날 아버지를 찾아다니느라 뙤약볕 쏟아지는 한 길을 헤메던 것처럼 멀미가 났다. 옆에 앉은 아버지는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라 면접에서 떨어진 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맏이니까 엄마한테 잘하라고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파도 소리에 묻혀버리는 아버지 말을 건성건성 듣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 운동장의 나무들이 자꾸 떠올랐다. 옛집 마당에 가득했던 무화과‧청포도‧오동나무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무사할까 궁금했지만 아버지도 그 사택을 떠난 지 한참 됐다.
우리는 목포항에서 헤어졌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다가 돌아보니 멈칫 서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등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색한 부녀의 모습이 지문처럼 남아 있었다. 괜히 눈물이 났다. 나는 달려가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가 빨개진 눈으로 돌아봤다.
“아버지, 저랑 같이가요. 엄마도 점점 나이들어 가는데.”
아버지가 쓴 웃음을 지었다.
“맏이는 그래야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야지. 나는 없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아버지는 다시 돌아섰다.
“니 아버지 하는 짓이 그렇지 뭐. 남한텐 간도 쓸개도 다 빼주는 사람이니까. 누군지 받아 먹은 게 많으니 공수표 남발했을 거고.”
사건의 전말을 들은 엄마는 탄식했지만 교사가 되겠다는 말에 더없이 좋아했다.
나는 청보리가 파도처럼 일렁이는 논배미들 옆에 아담하게 들앉은 중학교의 국어선생님이 됐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버지의 긴 편지가 떠오르곤 했다. 아버지는 어떤 선생님이었을까. 어떤 아버지가 되고자 했을까. 알 수 없지만, 섬으로의 동행이 나를 교사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 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한 세월을 통해서 알게 됐다. 내 집에 켜 둔 불빛 하나가 길잃은 누군가의 행로를 밝혀주는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는 걸. 우리에게 아버지는 풀기 어려운 숙제였지만 누군가에게는 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잊고 사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 생신 같은 때, 일년에 한 번 만나던 게 몇 년에 한 번으로 틈이 벌어지고, 그나마 내 삶에 닥친 이러저러한 파고에 흔들리고 비틀거리다 보니 옆에 있지도 않은 아버지를 내 마음에서 내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가 떠오르면 우리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으로 나의 찜찜함을 정당화해 버렸다.
남동생에게서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말을 들은 건 6월의 끝자락이었다. 주말이면 남편과 같이 종종 올라가던 대구 근교의 함지산에서였다. 그날따라 산자락 끝에 서 있던 오동나무에서 유난히 많은 보라색 꽃들이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옛날 사택의 지붕 위를 온통 덮었던 오동나무꽃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등줄기로 오소소 한기가 타고 내려갔다.
늙은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남편이 내 손을 잡아 아버지 손에 놓으면서 큰딸 왔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합죽한 입으로 자꾸만 어린 나를 불러댔다. 공부도 잘하고 참 이뻤다고, 칭찬 한 번 제대로 해주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자분치 허연 나에게 자꾸만 웅얼웅얼 늘어놓았다.
몇 달 후 아버지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엄마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내며 많이 울었다. 그리움과 미움이 반반이었을 뜨겁고 쓴 눈물을. 어린 나를 자꾸 불러 대던 그날, 어쩌면 아버지는 가슴 깊이 품고 있던 그리움을 그렇게 풀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내 오래된 책갈피에서 낡은 시간을 붙들고 있는 아버지의 편지를 꺼내 본다. 보푸라기가 인 누런 편지지. 어쩌면 나는 그 옛날부터 아버지라는 나무의 그늘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 나무에 기대어 벗나가지 않고 나의 꽃을 피우고 있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