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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신문 땅이름 기고문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서울경기신문 `청와대 터 2203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청와대 터 일대
-북악(백악)-팔도배미-더운우물골(온정동)-궁정동
국민이 새로 선출한 대통령- 이제 다시 청와대의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광화문 앞이 이를 대신할 것인가? 광복 이후부터, 아니 조선시대에도 나라님이 자리잡았던 그 곳, 과거엔 어떤 곳이고 어떤 역사를 간직해 온 곳일까?
‘청기와의 건물’이라는 뜻의 청와대(靑瓦臺)의 위치는 법정 주소로는 종로구 효자동 1번지이다.
북악과 인왕이 뿜어 낸 땅의 기운이 좋았던지 조선시대부터 이 일대에 많은 인물이 났다. 산세가 좋아 영조, 정조, 순조 임금 등이 거둥하여 경치를 즐겼고, 문인들도 찾아 글로써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 중에도 궁정동 일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자하문 터널의 남쪽, 청와대의 서쪽 동네 궁정동은 인왕산과 북악산 기슭이 안고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동네이다. 지금은 서울 종로구에서 인구로 보아 가장 작은 법정동이 돼 버린 궁정동(宮井洞)이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엔 한성의 북부 순화방(順化坊)의 지역이었다. 궁정동 대은암 부근엔 숙종 때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집이 있었는데, 여기에선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가 태어났다. 그 옆엔 또 선조 때 학자 구봉 송익필(宋翼弼)이 태어난 집터가 있었다.
궁정동 2번지엔 중종 때 서윤(庶尹) 김번(金藩)의 집이 있었다.
학조대사가 조카 김번을 위해 이 터를 잡아 주었는데, 북악(北岳)의 모양이 목성(木性)이어서 그 기운을 받아들이는 형세로 집을 지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인조 때의 정치가 김상용(金常容), 한학자 김상헌(金常憲), 현종 때의 정치가 김수항(金壽恒) 등이 나와 세칭 '장동김씨(莊洞金氏)' 명가를 이루었다.
청와대 옆에는 경농재(慶農齋)라는 재실이 있었고, 그 앞에는 '팔도배미'라는 논이 있었다. 이 논은 우리나라 8도의 모양을 따라 여덟 배미를 만들어 놓은 것인데, 임금이 몸소 이 논에서 농사를 지어 농사의 중요성을 알리고, 농민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조선 말까지도 많은 기와집들이 있었던 이곳에는 일제 때 근처에 총독부가 들어서고 나서부터 쇠락해지더니 8·15 광복과 6·25 이후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마을이 없어져 갔다.
특히, 근처에 청와대 일대의 정화와 궁정동 안가의 확장 등으로 해서 주민들은 하나하나 마을을 떠나고 지금은 몇 채의 건물만이 남아 있어 그 옛날의 기와집들의 위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궁정동의 더운우물골(마을)자리에는 무궁화동산(공원)이 들어섰다. 더운우물골은 한자로 온정동(溫井洞)인데 일제 강점기에 그 옆의 육상궁(毓祥宮)과 합하여 궁정동(宮井洞)이 되었다.
근처 서촌 지역에는 새다리(신교.新橋), 박우물골(박정동.朴井洞), 동골(동곡.東谷), 샛골(간곡.間谷), 띳골(대동.帶), 매젓골(매동.梅洞골), 누각골(樓閣洞.누각동), 버드나뭇골(유목동.柳木洞.), 오거리(五巨里) 등의 마을들이 있었다. ///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220215
위례신도시 일대
- 잔버드리-복우물-창말(창골)-은행정이-주막거리-진터벌
서울 송파구 거여동, 장지동, 경기도 하남시 학암동,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 복정동 일대, 즉 남한산성 청량산 서쪽 너른 평야는 2000년대 초에 '송파신도시'가 형성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지역에 들어설 신도시 이름 '송파신도시'를 다른 이름으로 바꾸게 된 것은 이 지역을 삼분하고 있는 경기도 성남시와 하남시가 신도시 이름에서 '송파'를 빼 달라고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송파 신도시는 '송파-거여 택지개발 예정지구(205만평)'가 정식 명칭이었다. 그러나 성남시와 하남시에서 3개 지자체에 걸친 이 지역 이름이 '송파신도시'인 것이 걸맞지 않다 하여 변경을 요구했다. 이에, 전문 학자 등 11명으로 명칭공모 심사위원단(위원장 배우리)을 구성, 2007년 5월 위원단에서 심사 끝에 ‘위례 신도시'로 결정했다.
위례성은 백제 건국 초기의 도성(都城)으로 원래 한강 북쪽에 있었으나 온조왕 때에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의 이성(二聖)산성으로 옮겨왔다. 기록에는 위례성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는 이름이 함께 나오는데, 흔히 한강 북쪽에 처음 만든 왕성을 위례성 혹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이라 부르고, 한강 남쪽의 새 왕성은 하남위례성이라 불렀다고 보고 있다. 위례(慰禮)는 우리말 '울타리'를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위례신도시 일대는 대체로 남한산성 서쪽으로 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중부면, 서부면 일원이었다.
이 지역의 옛 마을 이름들을 살펴보자.
서울 송파구 장지동(長旨洞)은 잔(작은) 버들이 많아 ‘잔버드리’로 불러 왔다. 주막거리, 새말, 웃구석, 웃말과 매착이의 일부를 병합하여 일제 때 장지리라 하다가 지금은 장지동이 되었다. 남쪽으로 창고가 있었던 창말이 있었다.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로 들어간 복정동(福井洞)은 본래 광주군 세촌면의 지역인데, 큰 우물이 있어 ‘복우물(복정,福井)이라 했던 곳이다. 근처에는 가마절, 기와골, 안골, 양지말 등의 마을이 있었다.
성남시 수정구의 단대동(丹垈洞)은 본래 광주군 세촌면의 지역으로서 붉은 고개 밑이 되어 단대골(단대.丹垈)라 하였는데, 일제 때인 1914년에 은행정이, 논골, 금광리를 병합하여 단대리라 하여 중부면에 편입하였다. 여기에도 양지말이 있었는데. 따로 웃말(상촌.上村)이라고 하였다. 그 남쪽으로는 응달쪽에 있었던 응달말(음지촌.陰地村)과 은행나무가 있었던 은행쟁이(으능쟁이)가 있었다. 주막거리와 논골도 단대동에 있었던 마을이다.
광주군 서부면에 있었던 학암리(鶴岩里)는 학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학바위(학암.鶴岩동)라 하였는데, 뒤에 군용지가 되었다. 학암리에서 가장 큰 마을은 돌무데기였다.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 창말 앞에 있는 들인 진터벌에는 육군교도소가 있었다. 이 곳은 병자호란 때 청군이 진을 쳤던 곳이다. ///
서울경기신문 `남대문시장 2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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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시장 일대
- 남대문시장-칠패시장-창골(남창동-북창동)-상정승골(상동)
숭례문 앞 저자가 이른 새벽 열리어
칠패 사람들의 말소리 성 너머로 들려 오네
바구니 들고 나간 계집종이 늦는 걸 보니
신선한 생선 몇 마리 구할 수 있겠구나.
-다산 정약용의 시 <춘일동천잡시> 중
배오개와 종루 그리고 칠패는
도성 안의 유명한 3대 시장이라네다
온갖 공장(솜씨 좋은 장인)과 상인들이 많이도 모여들고
이문을 쫓는 만물화가 수레바퀴 돌듯 하네다
-정조 때 중신 박제가의 <한양성시전도가>(漢陽城市全圖家)
남대문시장은 조선 초부터 뜨내기 장사치들이 비정기적으로 모여든 허름한 시장이었다. 그러다가 영조 2년, 1726년, 세곡 수납소가 이곳에 세워지면서 번창하게 된다.
남대문(숭례문) 주변은 조선 건국 때부터 인근 종로 시전행랑(市廛行廊)의 영향으로 장들이 섰다. 시장다운 시장이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였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정기적인 한양장시(漢陽場市)는 4곳으로. 현 종각 주변인 종루가상(鐘樓街上)과 종로4가 부근 배오개(이현.梨峴), 서소문 바깥 소의문외(昭義門外), 남대문의 칠패(七牌)였다. 배오개시장과 남대문 밖 칠패시장은 각각 오늘날의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의 모태가 된다.
남대문시장 근처에는 관리들에게 봉급을 주던 선혜청(宣惠廳)이 있었다. 관리들은 봉급표를 선혜청에서 쌀로 바꿨는데, 봉급 때에 쌀을 바꾸러 온 관리들을 상대로 거래가 이뤄지면서 선혜청시장(센청시장)이 생겼다. 이를 창내장(倉內場)이라고 했고, 근처 마을은 창골(창동.倉洞)이라 했다. 창골이 두 마을로 갈리면서 지금의 북창동과 남창동이 되었다.
1950년대 말부터 남대문시장은 서양 물건을 많이 팔아 ‘양키시장’이라 했고, 도깨비방망이처럼 뭐든지 구할 수 있고, 단속반을 피해 잽싸게 치고 빠진다고 해서 ‘도깨비시장’이라고도 했다. 월남한 실향민이 다수 정착해 ‘아바이시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남대문시장 근처에는 옛날에 여러 마을들이 있었다.
시장 동쪽, 지금의 남대문로1가쯤엔 상정승골(상동=尙洞)이 있었다, 조선 인조 때 상진(尙震) 정승이 살았던 곳이다. 여기에는 지금 상동교회가 있다.
선혜청 근처의 창골(창동.倉洞)을 비롯하여 한국은행 부근의 솔고개(송현.松峴). 신세계 백화점 자리의 수각다리(수각교.水閣橋), 남대문 밖의 연못골(연지동.蓮池洞)이 시장 근처에 있었다. 남지(南池)라는 연못이 있어 나온 이름인 연못골은 남대문과 서울역 사이에 있었다. ///
서울경기신문 `대청호 `금강 220115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대청호 주변
- 대청호-대첨댐-금강-느릅고지-삼정골-마름골-배말
충청 지방에는 2개의 큰 호수가 있다. 하나는 한강 줄기의 충주호이고 다른 라나는 금강 줄기의 대청호이다.
대청호(大淸湖)라는 이름은 이 호수가 있는 대전(大田)의 대(大)와 청주(淸州)의 청(淸)자를 한께 취한 이름이다.
대청호가 있는 금강은 남한 세번째의 큰 강이다. 이 강은 전북 장수 고을 수분리(물뿌랭이)에서 발원하여 북진하다가 충남·북 경계에서 방향을 바꾸어 서진하여 충남 서천의 장항과 전북의 군산 사이를 지나 서해로 빠져나간다. 국가하천인 갑천, 유등천, 미호천, 논산천 등이 모두 이 금강의 갈림내이다.
대청호는 행정적으로는 대전시와 청주시 사이에 있다. 그래서 이 호수의 위치를 말할 때 대전의 대청호, 청주의 대청호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금강유역에는 덕유산(1,594m), 백운산(1,279m) 등 험준한 산들이 있다. 이들 산을 깎아 흐르는 많은 지류는 감입곡류(嵌入曲流)하면서 무주구천동, 영동의 양산팔경(陽山八景) 등의 아름다운 계곡을 이룬다. 특히, 대청댐 광장 맞은편 북쪽의 구봉산 중턱의 현암사와 대청댐 물홍보관, 대청댐 전망대, 취백정, 청남대 등은 좋은 문화관광자로 손꼽힌다.
다목적댐인 대청호는 하류지역의 홍수 피해를 경감시키고 하류지역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며, 대전, 청주, 전주, 군산 등 충청, 호남 지역에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한다.
‘금강(錦江)’이라는 이름은 현재의 공주 인근을 가리키는 말로 예로부터 웅진(熊津), 적등진(赤登津), 백마강(白馬江), 심천(深川)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 대청호 일대에 많은 토박이 이름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물에 잠겨 없어진 마을도 많다.
우선 대전 대덕구의 마을들이 많이 잠겼다. 호수 북쪽의 마을 ‘느릅고지(황호동.黃湖洞)는 조금 높은 부분만 오똑하게 남아 작은 섬처럼 되었다. 그 서쪽의 마을 삼정골(삼정동.三政洞), 그 남쪽의 갈밭(갈전동.葛田洞), 배고개(이현동,梨峴洞)의 땅이 거의 모두 호수로 들어갔다.
전에 청원군이었던 문의면은 지금은 행정상으로 청주시로 들어갔는데, 이 지역의 뒤골(후곡리.後谷里), 가여울(가호리.佳湖里), 안탑골(내탑동.內塔洞) 마을들 일대도 물에 잠겼다.
호수 남쪽의 법수골(법수동.法守洞)은 전에는 충북 중원군 상모면 중산리였는데, 지금은 회남면 법수리로 행정구역이 달라졌다. 근처의 ‘마름골’은 한자명으로 사음리(舍音里)인데, 본래는 회인군 강외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마름처럼 생겨 그 이름이 나왔다.
근처 고해산 밑에는 지형이 배와 같다 하여 이름붙은 ‘배말’이 있는데, 한자로는 주촌(舟村)이라 한다. 본래 회덕군 주안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 때 오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주촌리라 하여 대덕군 동면에 편입되었다.
서울경기신문 `명례방 `명동 `북고개 2201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명례방골과 북고개
- (명동) 명동성당-북고개-진고개-당핏골-모시전골
서울의 명동(明洞)은 조선 초 한성부의 5부(部) 49방(坊)의 하나인 명례방(明禮坊)의 ‘명(明)’자를 딴 것으로, ‘명례방골‘이던 것이 변한 이름이다. 일제시대에는 ‘명치정(明治町.메이지마치)’으로 불리다가 광복 후인 1946년에 명동(明洞)‘이 되었다.
명동은 조선시대에 종현(鐘峴)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이곳에 진을 치고 남대문에 있던 종을 옮겨 달아 ‘북달재(북재)’라 한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종현’이 되었다.
명동은 조선시대는 주택지였으나, 일제 때 충무로 일대가 상업지역이 되면서 상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1885년 무렵부터 일인들은 남산 산기슭에 자리잡고 한국인을 상대로 거래를 하더니 청일전쟁 이후부터 그 입지를 굳혀 나갔다. 1894(고종31년) 청일전쟁으로 불리해진 청국 장사치들이 자취를 감추자, 기세가 올라간 일본 상인들이 진고개 일대에 일본식 가게들을 차리면서 상권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 지역의 상가는 그 특성에 따라 크게 세 지역으로 분포된다. 종로 중심의 전통적인 한국인 시전가, 진고개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일본인 상가, 소공동 일대의 청국인 상가.
일제 때의 명동은 다방, 카페, 주점 등으로 형성되어 충무로에 예속된 유흥 오락가였다. 그러나 정자실백화점(현재 영플라자 자리)이 생기고, 명동 입구에서 명동성당까지 10m도로가 새로 나면서 독자적인 상가를 형성하였다.
광복 후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 말 경제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남대문로2가와 을지로2가의 금융업무 활동이 활발해져 금융가로 발달하였다. 그 후 1956년 말, 충무로가 쇼핑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명동이 새로운 쇼핑 중심지역으로 변화했고, 당시의 많은 주점들은 서린동, 청진동 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1970년대는 젊음의 낭만이 넘쳐났던 사회 분위기에 여세를 몰아 통키타 시대가 도래했다. 60년대 중반의 ’심지다방’을 시작으로 통키타의 원조를 자부했던 ’오비스캐빈’, ‘금수강산’을 비롯해 명동 통키타의 전성기를 장식한 ’쉘부르’까지 지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며 ’문화의 꽃’을 피웠다.
‘명동’ 하면 머리에 금방 떠올리는 것이 있다. 바로 명동성당이다.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북고개(종현.鍾峴) 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시작되어 건립된 이 성당은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대규모의 고딕 양식 천주교 성당이자, 한국 최초의 본당(사제가 상주하며 사목하는 성당)이다. 1945년 광복 후 종현성당(鐘峴聖堂)에서 명동성당(明洞聖堂)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명동성당 근처로는 중심 마을인 명레방골을 비롯해 ‘종현’이란 이름의 바탕이 된 ‘북고개’가 있었다. 물감과 중국의 과일을 파는 ‘당핏골(당피동.唐皮洞)’, 모시를 파는 ‘모시전골(저동,苧洞)’도 있었고, 거기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진고개 신사’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진고개’가 있었다.
서울경기신문 (김포) 새모랭이 구두물 김포 토박이 땅이름 211215
새모랭이와 사우동
- (김포) 한강 하류 지역이라 저지대 관련 지명 많아
김포시의 '새모랭이'는 물가 지역이라 ‘새(모래풀) 언덕’의 뜻으로 붙은 이름인 듯하다. ‘새모랭이’의 한자 표기가 '사우(沙隅)'로 지금의 사우동이다.
김포 지역은 지대가 낮아 물이 잘 안 빠지는 지역이 많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낮은 지역’임을 말해 주는 땅이름들이 많다.
사우동 근처의 감정동은 ‘구두물’이라고 부르는데, 이 이름은 ‘굳’과 ‘물’이 합쳐서 된 땅이름이다.
굳+(의)+물>구드물>구두물
‘굳’은 구덩이와도 같은 낮은 지역임을 나타낸다. ‘구두물(굳의물)’은 물이 모이는 지역의 뜻이다. 이 이름은 한자로 ‘굳(구덩이)’의 뜻인 ‘감(坎)’과 ‘우물’의 뜻인 ‘정(井)’을 붙여 ‘감정(坎井)’이 되었다. 바로 지금의 김포시 감정동이다.
‘굳’은 ‘굳이(구지)’로 연철되어 지금의 김포 양촌읍에 ‘구지(九之)’라는 이름을 낳았다. 낮은 지역의 뜻인 ‘굳’이 개음절화(開音節化)한 것이 ‘굴’인데, 구래리(九來里)가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구래리는 ‘구래골(구랫굴, 구럿굴, 구럿골)’로 불렸다. 본래 통진군 상곶면의 지역으로서, 낮은 지역의 뜻인 ‘굴’과 마을의 뜻인 합쳐져 ‘구랫골’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굴+(의)+골>구래+골>구래골(九來-)
구래골의 한자식 이름 ‘구래(九來)’를 ‘아홉(九) 번을 찾아와(來) 살아도 좋은 곳’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지명을 미화시킨 억지 해석이다.
구래골 근처에는 가우대, 구물, 웃말, 중말, 진절우, 쪽지미, 큰우물, 타작재, 하가머리, 가우대 등의 토박이 땅이름이 있다.
운양동(운양굴)에서 대표적으로 많이 불려 온 땅이름에 감바위가 있다. 감바윗개, 감암(甘岩), 감암포(甘岩浦), 등으로도 불리던 마을이다. 샘재 북동쪽에 있는 이 감바위(대감바위)‘는 한강 쪽으로 불쑥 나가 있다.
선조 때,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에만 급급하고 국방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이에, 벼슬을 내놓고 이곳에서 낚시질을 하며 지내고 있던 중봉 조헌은 앞으로 있을 왜적 침입을 미리 알고 조헌이 상소를 하였으나 도리어 혐의만 받다가, 마침내 임진 왜적 침입을 당하게 되었다. 조헌은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회복하는 등 공을 세웠으나 끜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뒤, 조헌이 생전에 자주 올랐던 이 바위를 대감바위라 하였는데, 나중에 감바위(감암.甘岩)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 곳에 김포에서 파주로 건너가는 감바위나루터(감암지.甘岩津)가 있었다. 감바위 위쪽 산인 감박산 앞의 나루인데, 근처에는 골말, 샘재, 독구리, 뒷굴, 바리미, 벌말(벗말) 안말, 운양굴, 점말 등의 마을이 있다.
김포시 장기동의 원래 이름은 ‘장텃거리’이다. 이 곳은 본래 김포군 석한면 지역으로서, 시장이 섰던 곳이어서 장터, 장거리, 장텃거리(장기.場基)라 하였다. 1914년 운유하리와 고창리를 병합하여 장기리라 해서 군내면(김포읍)에 편입되었다. 장텃거리 근처에는 건너말, 고창, 고창리, 골말, 구석말, 도곡, 도티울, 서당말, 아랫말, 운곡, 웃말, 지경 등이 있다. ///
서울경기신문 `말죽거리 `역말 2112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말죽거리와 역말
- 서울 양재동 -
'역(驛)'이라고 하면, 지금은 보통 지하철역이나 철도역을 생각하지만, 옛날의 역은 공문을 전달할 목적으로 다니는 사람에게 말을 제공해 주거나 바꾸어 주던 일을 했던 곳이다.
전국에는 '역말', '역촌', '역곡' 등 '역(驛)'자가 들어간 땅이름이 무척 많은데, 대개 옛날에 역이 있던 곳이다. 서울의 '역촌동'이나 경기도 부천의 '역곡동' 같은 이름도 옛날에 역이 있었다.
옛날 관리들은 나라의 일로 먼 길을 갈 때 말을 주로 이용하였는데, 먼 길에 말이 자주 지치므로 길 중간중간에 말을 바꾸어 주는 역을 마련했다. 역에는 역마(驛馬)가 상비되어 있었고, 역졸들이 있어서 말을 교환해 주고 먹여서 보호해 주는 일을 했다.
조선시대엔 역참의 하나로 중요한 도로에 파발을 두어서 선전관의 통행을 편하게 했는데, 이 때 이용된 말이 파발마이다. 이 파발은 원래 선조 38년(1605)에 국토 북쪽이 소란해져 중앙으로의 신속한 연락이 필요해짐에 따라 설치한 것이었다.
서울 서초구의 '양재동(良才洞)'은 옛날에 양재역이 있어서 나온 땅이름이다. 옛날, 서울에서 남쪽 지방을 가려면 남대문을 나와 동작나루(동작진.銅雀津)나 한강나루(한강진.漢江津)를 건너 남도길에 올랐다. 당시 동작나루를 건너서 첫번째 만나는 역은 과천역이고, 두뭇개(두모포.豆毛浦) 근처의 한강나루를 건너서 첫번째 닿는 역은 양재역이었다. 한강나루를 건너 너른 들을 지나 우면산의 동쪽 기슭을 넘어서면 양재천을 만나게 되는데, 그 냇가에 양재역이 있었다. 이 양재역은 조선시대 교통기관이었던 역참의 하나로 서울 이남 경기도 일대를 관할하였다.
이 양재역 근처의 마을이 '역말(역촌.驛村)'로, 말에게 죽을 먹이는 집이 많아 '말죽거리'라고도 불렀다.
본래 이곳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는데, 일제 때인 1914년에 역말(말죽거리),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등 세 동네를 합해 '역삼리(驛三里)'라 하였다. 1963년에 서울로 편입되어 '역삼동'이 되었다.
'말죽거리'는 이름 그대로 '말에게 죽을 먹이는 거리'라 해서 나온 것이지만, 이와는 설도 있다. 조선 인조2년(1624) 2월 8일에 인조(仁祖)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도로 가는 길에 양재역에 이르러 기갈을 못 이기자, 유생 김이(金怡) 등이 급히 팥죽을 쑤어 임금에게 바치니, 인조가 말 위에서 그 죽을 다 마시고 과천쪽으로 갔단다. 그래서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시다'의 뜻으로 '말죽거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역사적 사실 하나를 '말죽거리'라는 이름에 결부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부터 ‘말죽거리’란 이름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대의 옛 마을로는 지금의 양재동에 '말죽거리' 외에 '비석거리', '잔디말'이 있었고, 도곡동엔 '독부리(독구리,독골)' 마을 등이 있었다. ///
서울경기신문 `삽다리 `삽교 211115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삽다리와 삽교
- 충남 예산군 -
내 고향 삽교를 아시나요
맘씨 좋은 사람들만 사는 곳
시냇물 위에 다리를 놓아
삽다리라고 부르죠
서울역에서 장항선 타고 천안을 지나고 온양을 지나 수덕사 구경을 하려거든 삽다리 정거장서 내리란다. 1.4 후퇴 때 이곳에 내려간 조영남의 노래이다. 흐르는 물에 다리를 놓아 ‘삽다리’라 했단다. 내에 삽을 다리처럼 놓아서 ‘삽다리’라 했다기도 하고.
그런데 다리가 있기 전에는 이름이 없었을까? ‘삽다리’의 ‘삽’은 ‘사이’라는 뜻의 ‘샅’이 변한 것이다. 샅바, 사태살(샅애살), 고샅 등의 ‘샅’은 ‘사이(間)’의 뜻이다. 같은 예산군의 예산읍 향천리의 ‘삽티’(고개)도 ‘사이의 재’란 뜻인데, ‘새재’와 같은 뜻의 땅이름이다.
예산군의 삽다리는 본래 덕산군 대조지면의 지역이었다. 이 삽다리(삽교.揷橋) 마을은 일제 초기인 1914년에 신흥리와 평촌, 상성리, 하성리의 각 일부와 장촌면의 도리 일부를 병합하여 삽교리가 되어 예산군 삽교면(읍)에 편입된 곳이다. ‘삽다리’에서 ‘다리’는 ‘들’의 뜻이며, 삽다리는 ‘삽들’이 변한 이름이다. ‘삽교’에서 ‘교(橋)’는 ‘다리’가 아니라 ‘사잇들’의 뜻인 ‘삽들’의 ‘들’이 ‘다리’와 음이 비슷하여 의역하여 붙인 것이다. ‘넓은 들’의 뜻인 ‘널들(너다리.너더리)’이 ‘판교(板橋)’가 된 이치와 같다.
‘삽다리’는 전국 여러 곳에 있다.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춘천시 북산면, 충남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 등.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도 삽다리가 있는데, 역시 ‘사이의 들’이란 뜻이다.
샅+다리 > 삽다리(삽교)
우리말에선 ‘샅’이 ‘삽’으로 잘 변한다. ‘샅’이 ‘사이’의 뜻임은 우리말의 ‘사태(샅+애)’나 ‘샅바(샅+바)’란 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사의’의 뜻인 ‘샅달’이 ‘샅다리’가 되고 다시 ㅂ이 첨가되어 ‘삽다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ㅂ 첨가’의 예로는 대싸리(대+싸리.댑싸리), 메쌀(메+쌀.멥쌀). ․저때(저+때.접때)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예산의 삽다리 근처에는 벌판에 새 마을이었다는 ‘신뜸’, ‘새뜸’이 있고, 그 북동쪽 삽교천 물가에는 전에 장터였다는 ‘구장터’ 마을이 있다. 삽교천을 따라 더 북쪽으로 가면 ‘새터말’, ‘양지뜸’, ‘두루머리’, ‘보안말’, ‘떼말’ 등이 있다. 삽교읍 일대에는 ‘안뜸’, ‘새뜸’, ‘신뜸’, ‘양지뜸’, ‘외뜸’과 같이 ‘뜸’이 들어간 이름의 마을이 많은데, 여기에서 ‘뜸’은 본 마을에서 따로 떨어진 작은 마을 단위를 말한다. /// (글.배우리)
서울경기신문 `모래내 `가재울 2111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모래내와 가재울
- 서울 서대문구 -
"이 너머 개울에 가재가 많았대지, 아마."
가재울 마을 이름의 내력을 물으면 대개 비슷한 대답이다. 그러나, 대개 '가재울'과 가재는 별 관계가 없다.
'가잿골', '가재말' 등 '가재'가 들어간 땅이름이 무척 많은데 서울의 북가좌동에도 있다. 서대문구의 '가재울(가좌리-가좌동)'에 대한 어느 설명.
-'가재울 加佐里'(마을) : 경티말 너머의 마을. 가재가 많고 산에 둘러싸여 '가재울(가좌리.加佐里)‘이라고 한다.
북한산쪽에서 홍제동을 거쳐 흘러오는 '모래내(홍제천)'가 한강으로 흘러드는, 북가좌동의 한 마을이 ‘가재울’이다.
‘가재울’은 주로 ‘가장자리’의 뜻인 '갓(갖)'에서 나온 것인데, 이런 이름은 수도권만 해도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의 가재리(佳才里), 용인시 원삼면의 가재월리(加在月里), 인천시 서구의 가좌동(佳佐洞) 등 여러 곳에 있다.
그렇다면 서울 서대문구의 ‘가좌동’의 본래 이름 ‘가재울’은 어떻게 해서 나왔을까? 북가좌동 일대는 옛날 고양군 연희면 지역으로, 그 남쪽에는 ‘잔들(잔다리)’이라는 벌이 펼쳐져 있다. 벌 가장자리 언덕쪽에 있어 이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 벌 남쪽에 궁말(궁동.宮洞)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궁동근린공원이 있다. 남쪽의 내(홍제천.弘濟川) 건너쪽이 세교리(지금의 동교동-서교동)이고. 다시 그 남쪽이 노고산과 와우산이다.
궁말 남쪽의 내가 홍제천인데, 홍제동을 지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옛날에는 ‘모래내’라고 불러 왔다. 서울 사람들은 지금도 모래내라고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전통 깊은 모래내시장도 있다.
모래내는 종로구 구기동-평창동에서 시작하여 홍제동-남가좌동-성산동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데, 세검정의 맑은 냇물이 홍제동에 이르면 모래 밑으로 스며든다는 데서 ‘모래내’라 했단다. 한자로는 사천(沙川)이며. 지역에 따라 홍제내, 성산천, 세검천, 홍은천으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모래내의 중-상류, 지금의 서대문구청 부근에는 ‘응달말(음얼리.陰月里)’이 있었다. 그 남쪽이 궁말(궁뜰)이고, 여기서 동교동쪽으로 넘는 고개가 ‘기레미고개’이다. ‘기레미고개’는 질러 넘는 고개, 즉 ‘지레미고개(지름이고개)’가 변한 이름이다. 지금의 동교동-서교동 지역은 고양군 시절이었을 때에 ‘잔다리(세교.細橋)’였는데, 그 중 위쪽의 웃잔다리는 서교동, 아래쪽 아랫잔다리는 ‘동교동’이 되었다.
모래내 하류쪽으로는 벌판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로는 ‘성미(성산.城山)’라는 작은산이 솟아 있다. ///
서울경기신문 `용산 `용마루 211015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용산과 둔지산
- 서울 구용산과 신용산 -
지금의 용산구 원효로4가, 산천동과 마포구 도화동, 마포동 사이에는 용산(龍山.78m)이란 산이 있다.
경치가 좋았던 그 용산 산억덕은 일제 강점기 이후 무방비로 서서히 무허가 주택들로 덮여 가더니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되어 버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용산 양쪽 산비탈에는 낮은 집들만 가득차 있어서 용산의 형상은 거의 제대로 나와 있었다.
일제 강점기 무렵부터 한강로쪽에 용산역이 생기고 상권 지역이 돼 가면서 ‘용산’이란 이름은 하나의 지역 이름으로 옮겨가 버리고, ‘구용산(舊龍山)이니 신용산(新龍山) 이름으로 구분지어 불려지기도 했다. 지금은 용산 산마루에 유서깊은 '용산성당'이 ’용산‘이란 이름의 뿌리를 설명해 주고 있다.
용산은 서울의 주산(主山)인 북악(北岳-인왕산(仁王山)-추모현(追慕峴)-약현(藥峴)-만리현(萬里峴)으로 이어지는 한양 우백호(右白虎)의 끝자락으로. 물을 먹는 용(龍)의 머리 모양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산수의 형세가 매우 좋아 고려시대부터 그 위치의 중요성이 인정되었고, 귀인들의 별장지로 이용되기도 하였었다. 일대에는 삼호정(三湖亭), 함벽정(涵碧亭), 심원정(心遠亨) 등의 정자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삼호정과 심원정에서 이루어지던 명사 미인들의 시회(詩會)도 유명하였다. 용산팔경(龍山八景)이 전해 오는 것을 보면 용산 산마루에서 바라보는 주위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음을 말해 주고 수 있다.
‘용산’이란 산이 구용산의 산이라면 ‘둔지산(屯之山.68m)’은 신용산이 산이라 할 수 있다.
둔지산은 서울 남산의 지맥이 한강으로 이어져 용산구 이태원동과 용산동 일대에 큰 언덕(산)인데, 현재 미8군과 용산 국방부가 사용하고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둔지산 일대는 일본군이 주둔하였는데 그 자리에 미군이 다시 주둔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이 일대에 군량을 조달하기 위한 둔전(屯田)을 두었다고 하나, ‘둔’은 땅이름에서 언덕이나 산을 말하므로, 그와는 관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전국에는 ‘둔지미’ 또는 ‘둔지산’ 등의 이름이 많은데, 이 이름들이 거의 ‘산- 언덕’과 관련이 있다. 대개 외따로 따로 떨어진 산, 둥그스럼한 모양의 산들이 이런 이름을 달고 있다.
둔지산 일대의 토질이 좋아 조선시대 벽돌을 생산하였고 명동성당을 건축하는 벽돌도 여기서 생산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둔지산 동남쪽 서빙고초등학교 근처에는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氷庫)가 있었다. 산 남쪽 완만한 평지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가족공원이 위치하고 있고, 북쪽 비탈 아래로는 전쟁기념관이 있다. ///
서울경기신문 `배다리 ‘모전다리 / 2110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배다리와 모전다리
서울 청계천
“오늘 이 팥죽골 마을이 떠들썩하곘어. 김진사 댁 환갑 잔치야.”
“탑골 사는 김진사 딸도 아침 일찍 모전다리를 건너오더구만.”
“며칠새 비가 많이 와서 개천에 물이 엄청 불었어. 갓무물골 옆동네에 또 배다리가 놓였다는데..”
서울에서 '개천'이라고 하면 청계천을 일컬었다. 즉, 청계천의 옛 이름이 개천(開川)이다. 서울의 북악과 인왕산 남쪽 골짜기의 물, 남산 북쪽 자락의 물까지 몽땅 받아 물줄기를 이룬 청계천은 비가 많이 오면 크게 물이 불어 한양의 북촌과 남촌 사람들의 왕래에 불편을 주곤 했다.
청계천은 청계 이름 그대로 맑은 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전후해 물이 심하게 오염되었다. 이렇던 청계천은 1958년 복개공사로 냇줄기가 묻혀 버렸다. 복개 당시 청계천변과 다리 밑에는 바라크 병영이라고 불리는 판잣집, 토막집 등 무허가 불량 주택이 1천여 가구 이상 들어서 있었고, 그들이 버린 갖가지 오물로 악취가 코를 찌를 정도로 오염이 극에 달해 있었다.
'청계천'이란 이름은 그 상류의 '청풍계천(淸風溪川)'이라는 이름에서 나왔다. 청풍계는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일대, 즉 지금의 청와대 서북쪽 북악산 바로 남쪽 기슭 일대의 골짜기이다. 이 내는 남쪽으로 흐르다가 광화문 앞 황토마루 앞에서 동쪽으로 꺾여 흘러가다가 왕십리 밖 전곶교(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남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들어간다.
청계천에는 다리가 많았고, 그 냇가로는 작은 마을들이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의 무교동의 한 마을 팥죽골 동쪽으로는 과일 파는 모전(毛廛)이 있었던 모전마을과 모전다리가 있었다.
광통교와 광교에서 더 가면 장통교가 나오는데, 이 다리는 장찻골다리라고 불러 왔다. 삼일교에서 조금 더 가면 수표교가 되는데, 이 다리는 청계천의 물높이를 측정하기 위해서 옆에 물재기기둥(수표.水標)을 세워 놓아 붙은 이름이다. 다리 남쪽으로는 우물물이 먹처럼 검게 보여 ‘먹우물’이라 부르던 마을이 있었는데, 이 이름이 바탕이 되어 묵정동(墨井洞)이 되었다.
청계천의 흐름은 그 유역 사람들이 늘 신경을 쓰고 살펴야 했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치지나 않을까, 물흐름이 바뀌어 마을을 덮치지나 않을까? 그렇게 해서 물을 살핀다고 나온 이름이 지금의 종로구 관수동(觀水洞)이다. 근처로는 벙거짓골(모곡동.帽谷洞), 비팟골, 웃너더리(상판교.上板橋) 등의 마을이 있었다.
청계천에는 '배다리'가 여러 곳 있었다. 배를 길게 다리처럼 이어 내를 건널 수 있게 만든 다리가 배다리인데, 이런 다리는 물이 불어날 때만 일시적으로 놓는 수가 많았다. 중구의 주교동(舟橋洞)은 배다리 이름의 한자 표기이다.///
서울경기신문 `내 ‘하천 `수원 / 210915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버드내와 먼내
경기도 수원시
우리 땅에 냇줄기가 없는 곳은 없다. 어디나 내(하천).는 흐른다.
내 이름을 보면, 그 크기와 모양에 따라서 붙기도 하고, 그 냇줄기의 위치(장소)에 따라서 붙기도 한다.
우선, 모양에 따라서 붙은 이름이 많다.
길게 흘러서 붙은 이름인 버드내(유천.柳川), 먼내(원천.遠川), 진내(장천.長川)이 있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 진평리의 진물은 원래 길게 흐른다 해서 붙은 ‘긴물(長水)’이 변한 이름이다.
작거나 좁아서 붙은 이름인 솔내(송천.松川), 가는내(세천.細川)가 있고, 크거나 넓어서 붙은 한내(한천.漢川)나 너르내(광천.廣川)가 있다.
휘돌아 흐르거나 구불구불한 내라고 해서 두레내(회천.回川), 구븐내(곡천.曲川)가 있으며, 반대로 곧게 흘러서 이름붙은 고든내(직천.直川)나 고등이내(고등천.高等川) 같은 이름도 있다. 깊은내-지프내(심천.深川), 오목내(오목천.悟木川)는 깊거나 오목해 붙은 이름이고, 아우라지(병천.竝川), 아우내(병천.竝川), 아오지(아오지.탄광), 두무개(두모포.斗毛浦), 두물머리(양수리.兩水里) 등은 물줄기가 서로 아울러 붙은 이름이다.
장소(위치)에 따라서 붙은 이름도 아주 많다.
사이(間)에 있는 사이내(사이곡천.沙而谷川), 새내(간천.間川-신천.新川)가 있는가 하면 모래땅을 흐르는 모래내(사천.沙川), 모라내(사천.沙川)도 있다. 골짜기에 흐르는 골지네(골지천.骨之川), 고샅내(고사곡천.古寺谷川)가 있고, 들(벌판)에 흐르는 벌내(벌천.伐川), 버리내(벌리동.伐里洞川), 달내.들내(달천.達川)가 있다.
경기도 수원시의 삼국시대 땅이름은 매홀군(買忽郡)인데, 이는 물이 많은 고장의 뜻이다. 여기서 ‘매’는 ‘물’을, ‘홀’은 ‘골(고을)’이어서 ‘매홀’은 ‘맷골’의 음차(音借)이다,
수원에는 광교산에 물뿌리를 둔 수원천이 지나는데, 상류쪽으로 두 개의 큰 지류가 있다. 하나는 북동쪽의 원천저수지를 거쳐오는 물줄기, 다른 하나는 북서쪽의 광교저수지를 거쳐오는 물줄기이다. 그 상류의 이름이 각각 먼내(원천.源川)와 버드내(유천.柳川)인데, 이 두 이름은 모두 길게 뻗어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먼내는 멀리서부터 내려온다는 뜻이고, 버드내는 ‘벋은 내’ 즉 길게 뻗어서 내려온다는 뜻이다. ‘버드내’는 사실 버드나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버드내’와 ‘먼내(머내)’는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 있다.
<버드내(유천.柳川)>
대전시 중구, 경기도 여주시, 평택시 유천동, 전북 순창군 쌍치면 전암리, 전남 화순군 화순읍 유천리, 신안군 자은면 유천리, 등.
<먼내(머내)>
경기도 파주시 천현면 직천리,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대성리(원천)
서울경기신문 `정동 ‘정동길 / 2109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정동과 정릉동
- 서울 중구
중구 정동(貞洞)과 성북구 정릉동(貞陵洞)은 이름 첫 글자가 똑같이 '정(貞)'자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두 동이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구의 정동은 조선 이 태조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康)씨의 한이 깊게 서린 곳이다. 강 왕후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태조가 왕이 되던 해에 현비(顯妃)로 책정되었다.
태조 원년 8월에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다. 왕위 계승 문제로 복잡한 궁내의 사정을 남겨 놓고 차마 감을 수 없는 눈을 감은 것이다.
태조는 왕비의 죽음 이후 슬픔을 못 이겨 열흘 동안이나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경복궁에서 바라보이는 가까운 남쪽 언덕인 황화방(皇華坊;지금의 정동)으로 능 자리를 정한다. 능터는 도성 밖에 정하는 것이 관례인데도 태조는 이를 무시하고 불쌍하게 죽은 아내를 가까이 두고 싶어 여기에 능을 썼다. 능침 꾸미는 일까지 친히 감독하였다.
태조는 능소 바로 동쪽 모퉁이에 원당인 흥천사(興天寺)를 짓는다. 이 절을 세우고 경상도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전해 오는 단 하나인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일부 옮겨 사리전(舍利殿)을 절 북쪽에 세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주 왕비의 능을 찾고 절에 들러 왕비의 명복을 빌었다.
이 태조 7년(1398) 8월, 마침내 궐내에서는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세자 책봉에 누구보다 불만이 많았던 방원이 칼을 휘둘러 배다른 동생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만 것이다. 상심에 빠져 있던 태조는 결국 왕위에서 물러나 궁에서 나와 멀리 함경도 함흥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태종 때인 1408년 5월, 태조는 세상을 떠난다. 신덕왕후를 잃은 지 12년 뒤이고, 왕자의 난으로 두 아들을 잃은 지 10년째이다. 태종은 그 해 9월, 양주 검암산.지금의 동구릉)에 부왕을 장사지낸다. 태종은 우선 대궐 가까이 있는 계모 신덕왕후의 능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부왕의 장례를 치른 지 불과 5달만에 정릉을 동소문 밖 살한이(지금의 정릉동)에 옮겨 버린다. 죽은 신덕왕후로 보아서는 배다른 아들로부터 당하는 큰 수모가 아닐 수 없다. 옮기고 난 뒤에도 능지기도 두지 않은 채 돌보지 않았다. 묘 앞에 누구 묘라는 표석도 세우지 않았고, 태묘에 배향하지도 않았다.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하였다.
신덕왕후의 능이 있었던 원래의 정릉터는 원래 정릉동이었다가 정동(貞洞)이 되었다. 정릉의 원당으로 지었던 정동의 흥천사도 정릉 석문(石門) 밖 함취정(含翠亭) 자리에 옮겼다가 정조 18년(1794) 9월 지금의 정릉동으로 다시 옮겨 이름까지 신흥사(新興寺)로 바꾸었다.
옛날의 정릉이 있던 근처 덕수궁 돌담 근처에 ‘정동길’이 있지만, 이곳이 채조 왕비 신뎍왕후의 능이 있었던 것을 아는 이가 별로 많지 않다. 정릉동이 원래 여기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별로 없다. ///
서울경기신문 `새술막 ‘과천 / 210815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새술막과 찬우물
- 경기도 과천시
과천은 삼국시대애는 고구려의 '율목(栗木)', 또는 '동사흘(冬斯 )'이었다. 이를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친 것을 고려 초에 '과주(果州)'로 고쳤고, 8대 헌종 9년(1018)에 이를 광주(廣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 3대 태종 13년(1413)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果川)'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는데, 다음 해에 금천(衿川.지금의 서울 금천구와 시흥시 일부)에 합쳐 '금과(衿果)'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복구되고, 7대 세조 때에 다시 금천에 합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또 복구하였다.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었던 것을 일제 때인 1914년 시흥군에 편입하여 면(面)이 되었다.
1982년 6월 과천지구 출장소로 승격하였는데, 이 때에 정부 과천청사와 서울대공원이 들어섰고, 1986년 1월 시로 승격하였다.
현재 과천시와 군포시, 안양시, 서울의 강남구, 금천구, 관악구의 각 일부가 옛날 과천군에 속했던 곳이다.
과천의 옛 땅이름 '율목(栗木)', '율진(栗津)'에서 ‘율’은 그대로 '밤(栗)'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데, 이 이름이 ‘과천’이란 이름의 바탕이 되었다.
또 다른 옛 이름 '동사홀'은 이두식 풀이로 '돋골'에 해당하는데, ‘돋’은 ‘높은 땅’의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한양의 남쪽 관문이었던 과천은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고을이었다. 옛날 삼남(三南. 충청-전라-경상) 지방의 길손들은 서울로 올라오려면 대개는 이 과천 땅을 지나야 했다. <대동여지도> 등의 옛 지도를 보면 천안 삼거리쪽으로 이어진 남도길이 직산, 진위(평택), 수원을 거쳐 이 과천 땅을 지나 서울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한다.
<춘향전)에 보면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로 내려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기에 과천 땅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다.
"동자기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예전에 남도 사람들은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천의 통과세(?)를 때문에 어지간히 신경을 썼다. 그래서 '서울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 '현감이면 다 과천 현감이냐?' 하는 속담까지 나왔다.
옛 과천읍의 중심 마을은 지금의 과천시 관문동(官門洞) 일대이다. 그래서, 전부터 이 곳을 '읍내(邑內)'라 했다.
지금의 정부 과천청사가 있던 자리네는 남양홍씨가 많이 살아 이름붙은 ‘홍촌말(洪村)’이 있었고, 그 앞의 큰길가에는 원래 두 집밖에 없었다는 ‘두집메’라는 작은 뜸이 있었다. 여기서 과천읍내쪽으로 가는 어름에는 ·새술막(신주막.新酒幕. 외점.外店)이 있었는데, 옛 행인들이 잠시 쉬어 갔던 곳이다.
인덕원쪽으로 가는 길 옆으로는 전에 과것길 길손들이 많이 이용했다는 ‘찬우물(냉정.冷井)’이 있다. 마을 이름도 ‘찬우물’이다.
그 밖에 이 일대에서 잘 알려진 마을은 다음과 같다.
-향교말(교동,校洞) ; 향교가 있어서
-베레이(별양동.別陽洞) ; 청계산 골짜기 안 벼랑쪽 마을. '배랭이'
-한내(한계.漢溪) ; 옛날 하리(下里) 지역. 큰 내(양재천)가 지난다.
-선바위(입암.立岩) ; 산등성이에 바위가 서 있어. 근처에 지하철역.
-줄바위(주암.注岩) ; 바위가 줄지어 있어서 '죽바위'라고도 한다.
서울경기신문 `남산 ‘누에머리 / 2108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남산과 누에머리
- 서울 중구와 용산구 사이
북악산이 서울의 뒷산이라면 남산은 서울의 앞산이다. 그러기에 예부터 서울 사람들은 뒷산인 북악보다는 남산을 더 가까이 했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변방에서 전해 들어오는 봉화 신호가 마지막으로 가장 남쪽에 닿는 산이어서 '종남산(終南山)'이라고도 했다. 또 조선 초에 도읍을 개성에서 이곳으로 끌어왔다 하여 '인경산(引京山)'이라고도 했다. '마뫼'로 불렀는데, ‘마뫼’의 ‘마’는 ‘남쪽’이고 ‘뫼는 ’산‘이니 결국 ’남산‘의 순 우리말 이름이다.
남산은 봉우리가 둘이다. 지금 전망대를 세워 놓은 큰 봉우리와 그 북서쪽에 뻗은 작은 봉우리. 그 모양을 멀리서 보면 누에머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작은 봉우리의 둥그스럼한 산머리를 '누에머리(점두.蠶頭)'라 했다.
마포 도화동 출생인 나는 이 봉우리를 늘 보고 자랐다. 당시 복삿골(도화동)과 삼개(마포) 사람들은 용산(龍山) 산마루에 올라 남산의 두 산봉우리에서 떠오르는 해돋이를 보곤 하였는데, 당시에는 이곳을 ‘냅머리’라고 많이 불렀다. 이 이름은 ‘누에머리’를 줄여 부르던 것이었음을 나중에서야 알레 되었다.
옛날 서울 사람들은 음력 4월 8일 밤, 이 봉우리에 올라 종로의 등불놀이 불빛 야경을 즐겼다.
남산은 백악(白岳.북악산), 인왕산(仁王山), 낙산(駱山)과 함께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백악을 주산으로 하는 풍수적 지형의 안산(案山)이 된다.
풍수적으로 남산은 말이 안장을 벗고 홀가분하게 달리는 모습의 주마탈안형(走馬脫鞍形)이다. 조선 초의 풍수가인 무학대사는 지금의 회현동2가쪽으로 벋어나온 남산 줄기를 보고 거북이 엎드린 모습의 복구형(伏龜形) 명당이라고 극찬했다. 그 등성이에 자리한 두 선비의 집이 거북의 양쪽 눈자리라 했다.
<조선실록>엔 세종대왕이 남산에 올라 풍수지리를 살핀 기록도 있다.
풍수적으로 좋아서인지 이 복구형 등성이 밑이 '마른내(건천동.乾川洞)'에선 조선 초에서 중기에 이르기까지 큰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단종 때의 김종서, 정인지, 세조 때의 양성지, 명종 때의 노수신, 선조 때의 유성룡, 이순신, 원균 등이 태어나거나 자랐다.
인현동쪽의 남산 기슭에선 중기부터 벼슬에서 밀려난 글쟁이나 가난한 선비들이 골짜기에 숨어 들어와 관직(官職)의 기회를 노리면서 제각기 글공부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 세상 물정도 모른 채 자고 나면 글만 읽는 사람을 '남산골 샌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샛님’은 ‘생원님’이 변한 말이다.
지금의 인현동2가에 있는 작은 고개는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의 저택이 근처에 있어서 '인성붓재'라 하였다. 이 이름이 줄어서 '인현('仁峴)'인데, 이것이 지금의 '인현동'이란 이름의 바탕이 되었다. ///
서울경기신문 `김포 `금포 / 210715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김포는 검개(검포-금포)에서 나와
- 경기도 김포시
‘김포’라는 이름은 ‘검개(금개)’가 그 바탕이다.
김포 고을 땅이름이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삼국사기 지리지>이다. 김포가 고구려에 속해 있었던 삼국시대 초기에는 ‘검포현(黔浦縣)’이었다. 지금은 인천시로 들어간 ‘검단면(黔丹面)’의 그 ‘검(黔)’자와 똑같은 한자다. ‘검(黔)’은 검은색을 뜻하는데, ‘검개’라고 하면 ‘검은 개펄’의 뜻으로 풀 수 있을 것 같다.
이 고을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금포(金浦)가 되어 장제군(長堤郡=부평)으로 합해 들어갔지만, 고려 명종 2년(1182)에 비로소 감무를 두고, 20대 신종 원년(1198)에 임금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여 현령으로 올려진다. 조선 태종 14년(1414) 8월 양천현을 합하여 그 각각의 첫 글자를 따서 금양현(金陽縣)이라 했다.
고대 지리지나 고지도 등의 문헌에 나타나는 한자식 지명들은 대부분 우리의 원이름(토박이 땅이름)을 음역(音譯) 또는 의역(意譯)해 기록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노루목’을 ‘장항(獐項)‘, 감바위’를 ‘감암(甘岩)’ 식으로 표기하는 식이다.
지금은 우리가 거의 모두 ‘김포’로 부르지만,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일제 때까지도 ‘금포’로 많이 불려 온 듯하다.
일제 때인 1914년에 발행한 1;25,000의 지도에 보면 당시에 ‘김포’가 ‘금포’로 불렸음을 알게 해 주는 일본의 가타카나 표기가 발견된다. ‘金浦’라고 한자로 표기된 밑에 아주 작은 글씨로 적은 ‘구무포(クムポ)’가 보인다. 이것은 ‘금포’의 일본식 표기이다. 당시에 ‘김포’라고 했다면 ‘기무포(キムポ )’라고 썼지 이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당시에 발행한 가타카나의 표기는 대개 그 지역 주민들이 부르는 음(音)에 근거하였다. 예를 들어, 김포 고을의 곡촌(谷村)은 ‘골말(골자기 마을)’의 표기인 ‘고루마루(コルマル)’로 표기되었고, 감암(甘岩)이 ‘가무바우(カムバウ)’로 표기되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김포 곳곳의 땅이름들이 거의 한자식으로 바뀌어 있지만, 원래 토박이 땅이름에서 한자로 올라간 것이 대부분이다.
*풀뭇골 > 풍무동(豊舞洞) -원래 이름 ‘풀미(풀의 산)’
*새모랭이 > 사우동沙隅洞 -모래가 많아서
*북녘말 > 북변동(北邊洞) -북쪽의 마을
*장텃거리 > 장기동(場基洞) -장터가 있어서
*돌우물 > 석정동(石井洞) -돌로 된 우물이 있는 마을
*구랫골 > 구래동(九來洞) -구룽(우묵한 곳)의 마을
*황개(한개)> 대포리(大浦洞) -큰 개펄이 있는 마을
*마리미 > 마산리(麻山洞) -산이 있는 마을
*개안말 > 포내리(浦內洞) -개(물가) 안쪽의 마을
*보습고지 > 보구곶리(甫口串里) -보습처럼 생긴 마을
*갈뫼 > 갈산리(葛山里) -갈(물)이 많은 산의 마을
*들뫼(들미) > 동을산리(冬乙山里) -들의 마을
*독우물 > 옹정리(瓮井里) -독처럼 생긴 우물의 마을
*돌여울 > 석탄리(石灘里) -여울이 돌아드는 마을
*감바위 > 시암리(枾岩里) -큰 바위, 신성한 바위
*뒷들 >후평리(後坪里) -뒤쪽에 있는 들의 마을
서울경기신문 `용머리 `벼랑창 2107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용머리와 벼랑창의 여울목
- 서울 용산구 한강변 일대 -
자연 경관이 뛰어나고 산수의 형세가 매우 좋았던 용산 지역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그 위치의 중요성이 인정되었고, 그 빼어난 경치로 인해 귀인들의 별장지로 이용되기도 하였었다. 삼호정(三湖亭), 함벽정(涵碧亭), 심원정(心遠亨) 등의 정자들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삼호정과 심원정에서 이루어지던 명사들의 시회(詩會)에선 용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들이 많이 나왔다.
문헌 자료에 예부터 용산팔경(龍山八景)이 전해 오는 것을 보면 용산 산마루에서 바라보는 주위의 경치가 무척 볼 만했음을 알 수 있다.
용산팔경.
1경 청계조운(淸溪朝雲)-청계산의 아침 구름
2경 관악만하(冠岳晩霞)-관악산의 저녁 안개
3경 만천해화(蔓川蟹火)-만천의 게잡이 불빛
4경 동작귀범(銅雀歸帆)-동작나루의 돌아오는 돛배
5경 율도낙조(栗島落照)-밤섬의 지는 해
6경 흑석귀승(黑石歸僧)-흑석동의 돌아오는 스님
7경 노량행인(露梁行人)-노량진의 길손
8경 사촌모경(沙村暮景)-새남터의 저녁 경치
한강 중에서도 용산 지역 앞을 흐르는 강을 따로 용산강, 용강(龍江) 또는 용호(龍湖)라고도 불렀다. 조선 후기까지 이 지역에는 인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용산강으로는 만초천(蔓草川)이 흘러드는데, 이 내는 일제 강점기에 욱천(旭川)으로도 불려 왔다. 1960년대에 복개되어 한때 농수산물 시장이었는데, 그 시장이 가락동으로 이사간 후에 지금은 용산전자상가가 되었다.
지금의 용산성당 근처, 한강으로 불쑥 머리를 내민 산자락은 용의 머리 같다 하여 ‘용머리(용두.龍頭)’라 하였다. 이곳은 인왕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애오개와 만리재를 지나 서남쪽으로 달리면서 한강변에 이르는 곳으로, 북악(北岳)을 주산으로 하는 서울의 우백호(右白虎)의 끝자락이다. 우백화 산줄기와 한강이 만나는 용머리 부분은 경치가 좋아 자유당 시절의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근처에 일제 강점기에 세운 수위측정소가 있다. 한강 수위를 살피기 위해 한강변에 최초로 세운 관측소인데, 1976년 9월까지 수위 관측이 이루어지다가 1977년 폐쇄되었다. 등대처럼 생겨 이를 등대로 아는 사람도 있다.
근처의 한강변 벼랑을 ‘벼랑창’이라 했다. ‘벼랑(비탈)’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 아니고 군대 별영(別營)의 창고인 별영창(別營倉)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근처에 ‘여울목(탄항.灘項)’이 있는데, 워낙 물살이 심한 곳이라 해마다 물사고가 잦았다. ///
서울경기신문 `달안 `벌말 210615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벌말과 달안
- 경기도 안양시 평촌 일대 -
땅이름에 '다리'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무조건 '다리'와 연결짓곤 하는데, 그렇지 않은 곳이 참 많다.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외룡리 연암 남동쪽에 ‘다릿골’이란 마을이 있다. 예전에 산과 산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놓아 한자로는 ‘운교(雲橋)’라고 쓴다. 옛날에 구름다리가 있었다는데 이걸 어떻게 믿을까?
‘다리’와 관련되는 이름처럼 보이는 땅이름들 중에는 ‘다리’가 한자의 ‘월(月)’로 옮겨가 있는 것을 적잖이 본다.
충남 금산군 진산면 두지리(두지골) 동쪽 마을인 다릿골에서는 이상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뒤에 덤바산이 있고, 마을 앞에 다리가 있는데, 예전부터 이 다리 안쪽으로는 14 집 이상으로는 집을 더 못 짓게 한단다. 15 집이 넘으면 마을에 불상사가 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란다. 달이 15일(보름)이 지나면 기우는 형태이니 15 집이 넘는 순간부터 마을이 쇠한다는 것이다.
‘달’, ‘다리’가 ‘들(野)’의 뜻으로 남아 있는 곳으로 경기도 안양시의 평촌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북쪽과 동쪽에 각각 관악산과 모락산이 가까이 있고, 서쪽으로 수리산이 멀리 보이는 너른 벌판인데,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래서, 이 벌판 주위의 ‘벌말(평촌.坪村)’, ‘날미(비산.飛山)’, ‘한벌말(관양동.冠陽洞)’, ‘범내(호계동.虎溪洞)’ 등의 토박이들이 농토를 내어놓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이 벌판 가운데에 ‘달안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여남은 채의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는데, 30 년 전쯤에 내가 찾아갔을 때에는 사람들이 떠나 서너 집 정도가 빈 집이었다.
당시 한 주민으로부터 ‘달안이’라는 마을이름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가 평평한 들 가운데라 비만 오면 물이 안 빠져 길까지 진구렁창이었대요. 살기 힘든 동네라며 주민들이 딴 곳으로 달아났다죠. ‘달아나는 마을’이라 하여 ‘달안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누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역시 이 마을에서도 믿기 어려운 지명 유래를 남기고 있었다.
이 마을은 들의 안쪽이었다. ‘달안이’는 아마도 ‘들 안’이란 뜻의 ‘달안(들안)’이었던 것이다. 옛날 지도에 보면, 이곳의 한자식 지명이 ‘월내(月內)’로 나오는데, 이것은 ‘달안’을 그대로 의역한 것이다.
서울시 마포구에는 ‘잔다리’라 불렀던 세교동(細橋洞)이 있었다.
옛날에는 고양군 연희면 서세교리라 하다가, 1943년 11월 1일, 경성부 마포구 동교, 서교, 합정, 망원동으로 편입되고,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 때 위 4개 동을 합하여 세교동이 되었는데, ‘잔다리’의 윗동네 ‘웃잔다리’는 동교동이 되었고, ‘아랫동네 ’아랫잔다리‘는 ’서교동‘이 되었다. 역시 들이 있어서 나온 땅이름이다.
원래 경기도 본래 광주군 낙생면의 지역이었던 판교동(板橋洞)은 ‘너더리’, ‘너다리’ ‘너덜(너들)’식으로 불러 왔던 곳인데, 지금은 성남시 분당구의 판교동이 되었다. ‘너더리’는 ‘넓은 들’의 의미였다. ///
서울경기신문 `황토마루 `육조거리 2106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육조거리와 황토마루
- 서울 종로구 광화문 근처 -
서울 광화문 바로 앞에서 서울역 사거리(서울 중구)의 길이 세종대로이다. 전에는 광화문 바로 앞에서 세종로 네거리까지를 세종로라 했고, 그 남쪽부터 남대문까지는 태평로, 남대문에서 서울역까지는 남대문로였는데, 새주소를 매길 때 이 길을 모두 아울러 세종대로(길이 2.1km)라 하였다.
광화문과 세종로 네거리 사이의 넓은 길은 일제 때에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 했다.
세종로 네거리 바로 남쪽이면서 지금의 덕수궁 북쪽 언덕, 즉 조선일보사 사옥 뒤편으로는 누런 흙 빛깔의 등성이가 있었는데, 여기를 황토마루(황토현.黃土峴)'라 했다. 이곳의 서쪽 마을을 동령골(동령동.銅嶺洞)이라 하였는데, 이는 황토가 구리빛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자하문 터널 앞쪽에서 흘러오는 청계천도 이 황토마루 때문에 물줄기의 방향이 바뀌었다. 북악산과 청운동의 한 골짜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청계천은 남쪽으로 계속 흘러내리다가 이 황토마루를 만나 동쪽으로 방향으로 돌려 동대문 남쪽으로 빠져 나간다. 다시 말해서, 황토마루 언덕은 청계천의 남행(南行)을 동행(東行)으로 바꾸어 놓았다.
황토마루 북쪽 지금의 세종로는 조선이 건국된 후 양쪽으로 들어선 큰 관청들로 인해 한성의 심장부가 되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남쪽 양편으로 의정부, 육조, 중추원, 사헌부, 한성부 등의 관아 건물들이 있어 이를 '육조거리'라 했다.
육조거리는 정치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의 시위 현장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민심의 공감이 분출되는 장소로, 개인의 억울함이 목소리로 달래지는 한풀이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도학정치를 펴던 조광조(趙光朝)가 모함으로 옥에 갇혔을 때 성균관을 비롯한 장안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대궐문(광화문)을 밀치고 쳐들어가 대궐의 병사들과 큰 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병자호란 때는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가면서 광화문을 향해 한없이 눈물을 뿌리기도 했다.
육조의 벼슬아치들이 왕래하던 거리여서 시골의 현감이나 군수들이 올라와 행렬을 하기도 했다. 큰 양산에 자신들의 치적을 적은 베헝겊을 주렁주렁 메어달고, 삼현육각을 앞세우고 '○○고을 ○○○의 만인산 나들이요!' 하며 이 거리를 수십 차례 왕래하곤 했었다. 이를 '만인산(萬人傘) 행렬'이라 했는데, 자신들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쇼'였다.
8.15 광복 때는 많은 시민들이 이곳에 몰려나와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그 후에 4.19나 6.3 학생 데모도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날이 오면 / 육조(六朝) 앞 넓은 길을 / 울며 뛰며 뒹굴어도 / 그래도 넘치는 기쁨을 못 참겠거든 /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추어 메고 / 행렬에 앞장서겠노라. <시인 심훈>
서울경기신문 `임나루 `어을매 `파주 210515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임나루와 어을매
- 임진강과 파주의 교하 -
임진강은 남한에서는 가장 북쪽에 있는 강이다.
이 강은 함남 덕원군 아호비령에서 발원한다. 남쪽으로 흘러 강원도 이천, 금천, 연천과 경기도 연천 고을 등을 지나며 고미탄천, 평안천, 역곡천, 한탄강 등의 지류를 합해 남서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 서해로 들어간다.
임진강의 ‘임진(臨津)’은 본래 고을 이름이었다. 고구려 때는 '진임성(津臨城)' 또는 '오아홀(烏阿忽)'인데, 신라 경덕왕 때 '임진'으로 고쳐서 개성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신라 문무왕 때인 667년, 신라가 당나라와 더불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칠중성(七重城)'(지금의 파주 적성) 부근에서 이 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격한 일이 있는데, 당시 이 강을 '칠중하(七重河)'라 했다. '호로하(瓠蘆河)', '표하(瓢河)', '과천' 등으로도 불러 왔는데, 강의 흐름이 굴절이 심하다 해서 당나라 사람이 ‘칠중하’라 했다고 한다.
<대동여지도>에 강 하류에서는 '낙하(洛河)', '탄포(炭浦)', '정자포(亭子浦)', '저포(楮浦)', '임진(臨津)' 등으로 나오고, 상류에서는 '고랑진(高浪津)', '여의진(如意津)', '신지강(神知江)', '유연진(楡淵]津)', '등파강(등澄波江)', '시욱진(時郁津)', '동대천(東大川)', '고성진(古城津)', '덕진천(德津川)' 등의 이름이 나온다. 모든 강이 다 그렇지만, 임진강도 그 부분에 따라서 이처럼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러 왔다.
임진강의 갈림내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한탄강(漢灘江)이다.
옛날에는 강을 나타낼 때 '하(河)'와 '강(江)'이란 말을 썼고, 나루를 나타낼 때는 '도(渡)', '진(津)', '포(浦)' 등의 말을 썼다. 가장 큰 나루를 의미한 것이 '도(渡)'였는데, 이는 '강(江)'과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임진강도 원래 '임진(臨陣)'으로만 불러오던 것을 뒤에 '강'이란 말이 덧붙어 '임진강'이 되었다.
임진강이 한강과 만나는 곳인 파주의 '교하(交河)'는 고구려 때는 '어을매(於乙買)'인데, 이 역시 '물이 어울림'을 뜻한다. '어을'은 '어울다(어우르다)', '매'는 '물'을 나타내는데, 이 ‘어을매’를 의역해 붙인 이름이 ‘교하(交河)’이다.
'임진'은 '임나루'를 한자로 적은 것인데, 여기서의 '임'은 '앞의 뜻으로, ‘앞나루’임을 의미한다
임진강을 건너면 도라산이 나온다.
도라산은 고려 때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일으킨 현장으로, 무신(武臣)정치가 시작된 곳이다. 고려 의종(毅宗)이 이곳 달령(獺嶺)에서 문신들과 더불어 술과 시로 밤을 지새우자, 이를 경호하던 무신들의 불만을 정중부가 수렴, 난을 일으킨 것이다.
도라산 인근에 개울이 하나 있어 못을 이루고 있었는데, 정중부는 문신들을 잡아다가 이 못에 집단 생매장을 했단다. 이 못은 사라지고 없고 <여지승람>에선 조정의 문신들을 모조리 묻어 조정침(朝廷沈)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 ///
서울경기신문 `붙임바위 `부암동 2105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붙임바위 ; 아들 낳으라 빌던 바위
- 서울 종로구 부암동
'애기빌이'라는 말이 있다. 애기를 낳아 달라고 하늘에 빈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옛날에는 시집 온 여자들에게 그 가정의 중요한 덕목처럼 여긴 것이 애기를 낳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애기를 못 낳는 아낙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원 잘 들어 준다는 바위를 찾아 애기빌이를 하기도 했다.
서울 자하문 밖의 붙임바위(부침바위)는 애기 못 낳는 아낙들이 애기빌이를 위해 많이 찾아간 곳이다. 서울 경복궁 서쪽의 자하문길을 따라 북쪽으로 달려 창의문(자하문)을 지나 세검정 로터리에 이르면 ‘부침바위 터’라는 안내 표석이 나온다. 부침바위는 이 근처 부암동 134번지, 약 2m 정도로 비스듬히 서 있던 바위였는데, 1970년에 큰 도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아기낳기를 원하는 여인들은 이 바위에 돌을 붙여 소원을 빌었디. 작은 돌을 가져와 혼신의 힘으로 비벼서 비스듬히 기운 바위에 붙게 하였다. 음(陰)을 상징하는 바위구멍에 양기(陽氣)로 발기한 돌(음경)이 삽입돼 아기를 만든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그 돌이 바위에 붙지 않고 미끄러져 내리면 허사가 된다고 믿었다. 어찌나 비벼 댔던지 바위 곳곳이 옴폭하게 패일 수밖에. 그래서 바위는 벌집과도 같은 곰보 얼굴이 되었다.
"우리 집안에 제발 떡두꺼비같은 아들 하나 낳게 해 주소.“
이 바위는 ‘붙임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인근 지역뿐 아니라 서울 장안 에까지도 널리 알려졌다.
이 바위는 50여 년 전에 도로 확장으로 이미 없어졌다. 그러나 ‘붙임’과 ‘바위’의 뜻을 담은 한자 이름 부암(付岩)은 지금 서울 종로구의 한 동이름(부암동)으로 남게 되었다.
부암동 일대는 서울 장안에선 ‘자문밖’이라는 이름으로도 통해 왔다. ‘자문’은 ‘자하문(紫霞門)’이 줄어서 된 말이다. ‘자하문‘은 서울 사소문(四小門.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 창의문)의 하나였는데, 이 이름은 이 일대가 송악(개성)의 명승지인 자하동의 경치와 같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자하문 밖의 부암동과 세검정 일대는 6․25 한국 전쟁 전후만 하여도 자두나무와 능금나무가 무성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두나 능금을 사러 이곳을 찾았다. 당시 서울에선 ‘자문밖 능금’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붙임바위 일대의 부암동은 산세가 매우 좋다.
북악산의 북동쪽이면서 인왕산의 북서쪽 기슭인 이곳에는 바위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데, 그 중에도 백석동천(白石洞天)은 조선시대부터 알려진 명승지였다. 인근의 석파정(石坡亭)은 1800년대에 조성된 대원군의 별서(별장)로, 수려한 자연 경관 안에 건물터(사랑채와 안채)와 연못, 육각정자의 초석 등이 남아 있다. ///
- 서울경기신문 `팔당 `바댕이 210415
바댕이 팔당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1974년 5월, 경기도 하남시와 남양주시 사이의 한강에 팔당댐이라는 큰 댐이 하나 생겼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과 하남시 천현동(배알미리 근처) 부근을 가로지르는 댐인데, 한강 본류에선 유일의 다목적 댐이다.
한강 물줄기에서 마지막으로 건설된 이 댐은 1966년 6월 착공, 무려 8년의 긴 공사 기간 끝에 준공되었다. 워낙 큰 공사여서 당시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서울 한강에 물난리를 막기 위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팔당 지역에 이 댐을 건설하게 된 것이지만, 부족한 전기를 더 생산하고, 수도권 상수원의 확보와 관광자원 개발의 목적도 있었다.
댐이 완성되면서 팔당은 수도권 사람들에게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팔당의 원래 이름은 바댕이.
여기서의 '받'은 우리말에서 '산'의 뜻이고, '~앵이'는 땅이름에 많이 붙는 지명형 접미사이다. 바댕이는 ‘산모퉁이’의 뜻인 셈이다.
받+앵이=받앵이>바댕이(파댕이)>팔당(八堂)
'팔당(八堂)'을 한자 풀이로 보면 8개의 당(堂)이 있는 곳으로 알기 쉽지만, ‘팔당’은 ‘바댕이’의 음차 표기일 뿐이다.
이 팔당 근처에는 나루도 많았다. 그 중에 바댕이나루(팔당나루)가 유명하고, 근처에는 두물머리나루(양수리.兩水里), 소내나루(우천.牛川)와 움앞나루도 있었다. 두물머리나루는 마재 앞의 나루이고, 소내나루는 옛 광주군 남종면 우천리 소내로 건너가는 나루였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움앞나루는 광주시 동부읍으로 건너가던 나루였다.
‘두물머리’와 비슷한 뜻을 가진 땅이름으로는 합수(合水). 어우내, 아우내, 아우라지, 아울목, 어을매(교하)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물이 합친다는 의미를 갖는다.
팔당 근처에는 '능안(능내.陵內), 마재(마현.馬峴), 노루목, 다래골, 막은데미, 장승배기 등의 땅이름이 있다,
팔당이라고 하면 수도권 사람들은 예봉산을 떠올린다.
높이 683미터의 예봉산(禮峯山)은 '사랑산'이라고도 불러 왔다. 산에 아름드리 나무가 많았는데, 조선시대의 손님맞이 관아인 예빈시(禮賓寺)를 짓기 위해 나무 벌채를 허가하여 예빈산으로도 불렸단다.
또, 예봉산은 옛날에 사람들이 한양을 떠날 때 임금님에게 예(禮)를 갖춘 곳이라 해서 나온 이름이라고도 하고, 영서지방을 오가던 길손들이 삼각산이 보이는 여기서 임금에게 예를 갖추어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팔당대교 근처에는 미사대교도 있는데, 서울에서 춘천 갈 때 첫번째로 건너는 다리이다.
2008년 10월, 이 다리 완공 후에 다리 이름을 덕소대교와 미사대교 중 어느 것으로 할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많았는데, 교량명 제정위원회(위원장 배우리)에서 미사대교로 최종 결정하였다. ///
서울경기신문 `이태원동 1찬바람재 2104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찬바람재
-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근처 - 210401
서울의 용산은 예부터 군사 교통의 중심지이면서 한강과 도심을 잇는 관문이었다,
용산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사>에는 '용산원자' 이야기도 나온다.
용산원자는 고려 충숙왕과 그 왕비 조국공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충숙왕이 송악(개성)에서 한양에 행차했을 때 용산 행궁에서 낳은 아들이어서 '용산원자'인데, 불행히도 이 아들은 17세에 죽고 만다
조선시대는 한양 사람들이 삼남 지방으로 갈 때는 용산 지역을 거쳐가는 이들이 많았다.
<춘향전>에도 이도령이 전라도 남원으로 가는 대목에서 용산 지역을 거친 것으로 나온다.
"--고사당에 하직하고, 전라도로 나려갈 제 청파 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자기 밧비 건너 승방들,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여기서, '쪽다리'(청파동 2가쯤), '청파배다리'(청파동 3가쯤), '돌모루'(지금의 남영역 근처), '밥전거리'(지금의 한강로), '모래톱'(지금의 한강 모래밭) 등이 모두 용산 지역의 옛 땅이름들이다. 당시에도 용산 지역이 일반인들이 많이 이용한 남행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밥전거리는 삼각지 근처쯤으로 보이고, 모래톱은 지금의 동부이촌동쯤으로 보인다. 그 길을 지금의 위치로 대강 그려 본다면 대충 다음과 같이 선이 그려진다.
청파동-삼각지-녹사평역-용산구청 앞-둔지산(국방부 근처)-동작대교 북단,
그런데 옛 지도를 놓고 보면 이 길 어름에 '찬바람재'라는 고개가 하나 보인다. 지금의 녹사평 근처의 고개인데, 남산과 그 남쪽 둔지산과 이어지는 지맥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이 찬바람재는 한자로는 한풍현(寒風峴)이라고 하는데, 바람이 차게 부는 고개라 해서 붙은 땅이름이다. 이 고개는 지금의 구용산(원효로 일대)에서 동작나루로 가는 이들이 많이 넘던 고개이다. 통행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용산 사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던 고개였는데, 툭히 둔지산 아래 둔지미 마을이나 한강로쪽의 새풀이 마을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였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이 일대가 군사 기지가 되고 일반인들의 통행이 많지 않게 되자, 우리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이 고개에 지금은 '녹사평역'이 있다. ‘녹사평’은 옛 문헌이나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출처 불명의 이름이다. 차라리 이곳의 역이름을 '찬바람재역'으로 했더라면 조상들이 많이 불러 왔던 옛 땅이름이 다시 우리 곁으로 가까이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