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5일 사순절 넷째 주일예배
성경: 갈5:13-18(신309)
제목: 사랑과 성령의 자유 (나경수 목사)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4:28)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아담의 저주(심판)과 바벨탑의 심판 아래에 있었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일방적으로 주신 복(성령의 약속이 포함)의 약속입니다(창12:2-3). 이것은 모든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한 복음’(3:8)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3:13-14).
바울은 이 약속과 430년 후에 생긴 모세의 율법을 대조하는 결과로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아브라함의 자녀)’이며(4:28), ‘그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자유자)’(4:31)라고 하였고, 그의 논증의 결론적 요약으로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으로 우리에게 주신 ‘율법으로부터 자유’(1a)의 근거하여 율법주의에 대한 권면과 경고를 하였습니다(5:1-12).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포함하는 ‘5:13~6:10’은 ‘자유 방임주의(무 율법주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유 접속사인 ‘왜냐하면(가르)’로 시작하여 1a에서 선언되는 ‘자유’라는 주제를 재도입하여 2-12의 권면과 설명에 대한 이유를 다시 제시하며,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이며(4:28), ‘그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자유자)’(4:31)의 이유를 제공합니다. (5:1은 접속사가 없기에 4:21~31에 속한지 아니면 5:2-12에 속한 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우리는 5:1-12의 전체를 율법주의에 대한 바울 논증의 요약적 결론으로 간주한다).
1. 우리의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이 되는 자유입니다(13-15).
“형제들아, (왜냐하면)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왜냐하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그러나)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먼저, 명령(권면)의 기초가 되는 직설법의 복음 진리입니다(13a). “형제들아, (왜냐하면)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과거에 일어난 유일한 사건을 의미하는 부정과거 수동형입니다.
이것(13a)은 1a와 같이 ‘복음의 진술(구원의 동일한 과정의 부분)’인데, 1a는 그리스도가 그 진술의 주어로서 그의 사역을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를 위하여 부르셨습니다”(13a). 여기의 ‘자유’는 ‘율법의 저주와 의무로부터의 자유’(5:1a)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여 살 수 있는 자유’(2:19), 즉,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과 이웃을 점점 ‘사랑할 수 있는 자유(성화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부패와 무능력으로부터 자유’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부르심’은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부르심’이면서 동시에 그 결과도 보장되는 ‘효과적인 부르심’입니다. 롬8:28-30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의 주어는 ‘약속의 하나님’입니다.
첫째로 이 복음의 진리에 근거한 부정과 긍정의 명령입니다(13b).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그)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너희 서로에게 종이 되어라).” 여기서 ‘육체(사륵스)’는 단순히 신체(body)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성령) 없이 자기 능력만으로 사는 이기적인 존재(죄와 자기 욕망에 지배된 인간의 타락한 본성)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랑(아가페)’의 반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2:20)과 우리의 믿음의 열매인 사랑(6)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이 ‘자유’는 자기를 위하여 마음대로 하는 자유, 즉 방임주의의 자유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서로에게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랑의 자유’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친히 십자가에서 본을 보이셨고(막10:45, 빌2:7), 부활의 그와 우리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 복음을 알고 믿는 자는 이제 자신만을 위하여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롬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성도 여러분,
복음의 자유를 ‘서로에게 종이 되어 사랑의 자유’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그 이유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이기 때문입니다(14).
“(왜냐하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여기서 ‘이루어져 왔다(페플레로타이)’는 완료 수동태로서 과거에 모든 율법이 이루어졌고(완성되었고), 그 결과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수동태인 것은 율법이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우리)를 사랑하사 나(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2:20)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졌고’(롬10:4), 또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6)의 ‘우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롬13:8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완료시제).”
이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레19:18)’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말씀’은 이웃(우리)을 사랑하사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온 율법을 이미 완성하신 ‘한 말씀(한 계명, 한 문장)’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우리를 통하여 온 율법을 이미 성취한 ‘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의 십자가에서 모든 율법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가 현재 서로 사랑하는 우리를 통하여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의 자유는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롬3:31) 자유입니다.
셋째로 풍자적인 경고입니다(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여기서 ‘서로 물고 먹는다’는 먹이를 놓고 서로 먹으려고 싸우는 동물을 연상하는 것으로 ‘서로에게 종이 되어 사랑의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서로에 의해서 멸망할까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곧 믿은 자는 결코 짐승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자유는 성령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기는 자유입니다(16-18).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왜냐하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왜냐하면)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먼저, 명령(권면)의 근거가 되는 직설법의 복음의 진리입니다. (이것이 생략되었는데, 바울이 앞에서 이미 말하였기에 그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3:13-14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엡1:13-14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성령)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자유의 복음(13)을 믿는 우리는 이미 ‘약속의 성령’을 받았습니다(3:2-5, 롬8:9, 14).
첫째로 이것에 근거한 명령(권면)과 약속입니다(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성령’은 단순한 영적 감정이나 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행하다’(16a)는 성령의 인도와 그의 능력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도 많이 하는 것, 종교적 활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욕심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서로에게 종이 되어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b)는 약속입니다.
둘째로 그 이유입니다(17). “(왜냐하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육체는 성령을 대항하여 그리고 성령은 육체를 대하여 욕망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육체와 성령’의 싸움은 불신자가 아니라 믿는 자인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는 성령은 믿는 우리 안에만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완전히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성령이 싸우시고 육체도 우리 안에서 성령의 원하심을 계속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육체와 성령이 서로 대적한다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성령 하나님이 이기실 것입니다. 특히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결판이 났기 때문입니다. 5: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것은 아직 육체가 우리 안에 아직 남아 있지만, 이미 결정적으로 심판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로 육체의 소욕을 이기게 하사 서로에게 종이 되어 사랑하게 하심을 확신하시며 절대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요(롬1:17), 새 언약의 축복입니다(고후3:5-11). 천지가 흔들려도 새 언약대로 될 것입니다.
셋째로 결론적인 요약입니다(18). “(그러나)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너희가 성령의 인도 된다’는 현재 수동태로서 인도받는 우리의 믿음의 자발적 순종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율법의 저주와 의무로부터 자유롭다(1)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신 바가 되어 서로 사랑으로 모든 율법을 이미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복음을 통한 율법으로부터 자유가 자신만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스스로 서로에게 종이 되어 사랑하는 자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롬14:7-9).
성도 여러분,
‘사랑의 원자탄’의 ‘손양원목사님’이 우리가 닮을 수 없는 영웅이 아니라 우리가 그와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보통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약속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그와 같이 성령을 통하여 사랑하게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구원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직 육체가 우리에게 남아 있기에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짐승과 같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