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백경자
아기가 태어나면서 첫호흡과 함께 탯줄이 잘리기도 전에 품에 안아주는 사람이 엄마이다.
인류의 창조는 엄마에서 시작된다. 하나의 어린 개체는 엄마라는 한 여인이 생사의 고비를
통과하면서 고귀하고 존엄한 새생명으로 태어난다. 이 새생명은 누군가의 아기가 되고
엄마라는 제뿌리를 만나 인생이라는 광장으로 들어가 새 삶을 시작한다.
나도 그러했다. 세상의 땅을 딛는 첫 발걸음부터 엄마의 손은 내 피부와 마찰했다. 엄마의
심장이 뛰는 소리와 엄마의 육향(肉香)이 혼합하면서 나는 엄마의 분신이 되어서 인간이라는
명분을 갖추어 나갔다.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한 어미의 임신이 해산에
다다르기까지 신비한 경로를 지나야하며 세상으로 반출되는 태아 역시 하늘의 섭리를 따라야
하는 신비성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지않는 또 하나의 생명체이다.
나의 인생 경험은 다양한 삶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병원이라는 일터에서 이루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회는 실로 만남과 헤어짐이 누구의 의지없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곤 하는 현장이었다. 은퇴가 가까이 올 나이에 내가간 곳은 출산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신생아와 엄마라는 복합체가 이루어내는 삶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눈으로 가슴으로 궁구해보았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극심한 진통을 이겨내고 아기를
보지못하고 죽는 미완성의 만남도 보았다. 홀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새생명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한 만남을 슬픔이라는 언어외에 무어라고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바로 인생이며, 그래서 만남은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겠다.
아직도 눈을 뜨지못하는 아기에 닥쳐온 운명과 병실밖으로 도도히 흘러가는 세상의 소리에
나는 곧잘 내직업에 대한 회의에 빠진다. 성서에는 많은 만남이 기록되어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극적인 만남에서 그들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고통은 기쁨으로, 두려움은 희망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것이 어찌 그것으로 끝날 일이었던가. 세계는
그로부터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으며 21세기의 오늘날 그 기록은 삶의 지침을 말해주고있다.
인류는 지난 3년간 뜻밖에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의 침투로 단절된 인생을 맛보았다.
요양원에 있는 노부모들은 아들을 기다리고 딸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이루어지지못하고 애타게 기다리던 늙은 목숨은 이세상을 하직했다. 아니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스크낀 괴물처럼 눈으로만 서로를 인지하고 짧은 만남을 끝내야했다. 예상도 못한
바이러스와의 만남이다. 지구환경이 변화면서 인간의 개성도 따라 변해가는지 빨간신호가
깜박거리고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마주보는 사람을
피했다. 공기를 제대로 마시지못하고 마주보는 인간의 정체는 이제 하나의 사물로
보일뿐이다. 나는 너를 모르고 너도 나를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정당한 이치로 되어
가고있다.
이웃에 갑자기 스케치를 공부하는 친구가 있다. 대면이 아닌 영상으로 배운다고 했다.
어찌된 영문인가하는 질문에 그녀는 아들을 만나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했다. 타지에 있는
아들을 펜데믹으로 만나지못하고 있던 중 그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못한 가슴이 찢어진다. 마스크를 쓰지않으면 안되는세상에 어찌 무슨말로 그
아픔을 표현할 수 가있을까. 그녀는 가슴으로 아들을 기다리다가 연필을 들었다. 형체없는
아들을 백지위에서 형상화한다. 연필끝이 난다. 직선으로, 원으로, 눈과 코를 그리면서 오열을
삼키는 일상을 보낸다고 했다. 그림으로 만나지 못하는 아들을 곁에 앉혀 인생독학을 하자는
엄마의 마음이다.
그녀는 그림을 통한 아들과의 만남에 간곡한 희망을 걸고 있었을것이다. 만남이란
희망에의 첫걸음이 되고 삶의 알맹이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