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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 강의
요엘의 시대에 관해서는 직접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없고,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서 생각하는 두 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매우 이르게 이스라엘의 남북 분리 이전이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매우 늦게, 바빌론 포수(捕囚)이후라는 것이다. 그렇게 조만(早晚) 두 설(說)이 대립하는 이유는 본서 중에 왕정(王政)에 관한 것이나, 남북 분립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바빌론, 앗시리아의 압박에 인(因)한 정치적 고민(苦憫)의 모양도 나타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본서에는 다른 예언서와 공통되는 어구가 많다. 고로 저는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하는 모든 예언자보다 앞서 있었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보다 훨씬 후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요지(要旨)인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보면 아무리 하여도 바빌론 포수 후라 할 수밖에 없다. 이 ‘여호와의 날’의 사상은 남북분립 이전에는 볼 수 없고 아모스, 호세아 이후에 발달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서의 내용으로써 미루어 판단한다면 저가 살던 시대는 이사야, 예레미야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절박한 위기 공기 중에 사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보다 차라리 극도의 정신적 이완상태(驰緩狀態)에 있었던 듯하다. 그가 책망을 하되 일반으로 “거룩히 금식하라” 할 뿐이오 특별한 죄목을 지적(指摘)하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의 인심이 어디라 할 수 없이 일반적으로 침체(沈滯)하고 부패(腐敗)하고 무원기(無元氣) 무열심(無熱心)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포수 이후 시대야말로 그러한 조건에 가장 들어맞는 시대라 할 수밖에 없다. 종교, 도덕은 그것이 어떤 지상적 행복의 가능성과 결탁(結托)이 될 때는 허다 열심 있는 귀의자를 가질 수 있다마는, 그것이 환멸에 돌아갈 때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정신적 이완(弛緩)에 빠진다. 이스라엘 민족이 종교에 의한 국가의 발전, 민족의 대성을 꿈꾸었을 때는 좋았다. 그러나 포수라는 비참한 사실에 의하여 그러한 이상은 여지(餘地)없이 파괴(破壞)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에 있어서는 신앙까지도 그것과 한가지로 부서지고 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이 있었다. 그 포수의 고난 가운데서와 포수로부터 돌아온 후의 정신적 가사상태(假死狀態)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잊지 않는 몇 개의 눈이 있었다.
그들에 의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은 유지 되었고 유지될 뿐만 아니라 일단 진보를 하였다. 물질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는 살아 있다는 신앙, 이스라엘에만 아니라 전 인류 전 세계에 하나님의 감시는 떠나지 않는다는 신앙이 이 비참한 경험 중에서 자라났다. 자단(紫檀)이 찍혀서 향기를 발하듯이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죽어서 신앙의 정(精)이 피어올랐다. 실로 가는 일선(一線)이다. 그러나 또 형용할 수없이 굵은 일선이다. 이 일선에 세계의 정신적 생명사(生命史)는 달린다. 이 일선을 저들은 ‘여호와의 날’ 이라는 말로써 파악(把握)하였다. 요엘은 이 신앙의 줄을 붙든 사람이오 이것을 굵게 기른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독특(獨特)한 것은 없다. 그가 외친 ‘여호와의 날’은 아모스, 호세아가 이미 포고(布告)한 것이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이 다 같이 크게 부르짖은 것이다. 그러나 독특이 아닌 것이 그의 위대를 상(傷)하는 것은 없다. 마땅히 잡을 것을 잡고 마땅히 가르칠 것을 가르친 그는 그 때문에 위대하다 함이 옳다. 세례 요한도 그의 뒤에 있고, 예수도 그 뒤에 서시고, 가장 빛나게 가장 장려하게 그날을 그리는 사도 요한도 그 뒤에 선다. 아니다, 창조 있은 이래, 불의한 칼날에 찍히고 사악한 발아래 짓밟힌 억만만의 영혼이, 암연 속에 흐느적이는 해조(海藻)와 같이 이 역사의 광파(狂波)속에서 뒤흔들리면서 그 줄을 붙들고 있다. 죽지 않는 진리를 붙든 자는 위대하다.
하여간 요엘은 한마디로 하면 나라가 망한 때에 났다. 국가가 없어지고 민족이 부서지고 문화가 없어지고 타고 남은 기와조각만 남은 것 같은 시대에 났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의 위대한 의미를 읽어냈다. 석가가 나시고 공자가 나시는 세계사상에 한 독특한 기원전 5,6세기의 의미를 본 사람이었다. 나라도 없고 문화도 없는 그때에 그는 메뚜기의 재난(災難)이라는 일개 천연현상 중에서 그것을 읽어냈다. 그리하여 경성(警醒)을 말하고 희망을 가르쳤다.
제1장 재난
늙은 자여 너희는 마땅히 들으며, 이땅의 모든 거민(居民)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 생전에나 너희 열조의 생전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너희는 마땅히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그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하게 하라. 팟종이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늣이먹고 늣이 남긴 것은 황충이가 먹었도다.
늙은 자를 찾고 모든 거민을 부르는 것은 그 일이 심히 놀랍기 때문이요, 자자손손이 전하라 함은 잊을 수 없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전고(前古)없는 대충재(大蟲災)를 보고 맘에 심히 놀랐다. 이는 심상(尋常)한 일이 아니라고, 경청(傾聽)하여 명심(銘心)하지 않으면 안되는 신의 말씀이 들어 있음을 알았다. 자연현상이라 하여 일시(一時) 후에 잊어버리는 자는 무심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미미한 어느 사상(事象)하나가 가경(可驚)할 것 아닌 것이 없거늘 하물며 이렇듯 비상(非常)한 일 중에 비상히 큰 의미가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 없는 민족은 신앙 없는 민족이다. 신앙이 있으면 자손에서 자손에게로 영원히 전할 일이 끊임없이 있다. (팟종이. 메뚜기. 늣, 황충이 하는 것은 원어로는 각각 다른 벌레가 아니요 다 같이 메뚜기의 변태 성장하는 시기를 따라 다른 명사다.)
무릇 너희 취한 자는 깨어 울 것이요 너희 술을 마시는 자는 새 술을 위하여 부르짖을지니 이는 술이 너희 입에서 끊어짐이라.
예언자의 가슴은 놀라는 데만 그치지 않고 슬퍼한다. 반드시 술을 마시는 자만을 향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술이란 생의 향락을 대표한 말이다. 생을 즐겨할 온갖 물자가 다 메뚜기의 해(害)한 바 되었다. 그 참혹(慘酷)한 해(害)가 어떠한 것을 6절 이하에서 말한다. 그리고 그 기록이 결코 과장(誇張)도 아니요 허언(虛言)도 아닌 것은 오늘날 이 지방을 실지로 가보는 사람은 넉넉히 아는 바라고 한다.
너희는 애곡하기를 정절녀가 어려서 남편이 죽으매 굵은 베띠를 띠고 슬피 우는 것같이 하라.
하는 것은 그의 비통이 얼마나 지극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 나라는 망하였을망정 구차(苟且)한 생활이라도 그 땅에 붙어서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그 땅조차 천재를 맞아 유리아사(流離餓死)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예언자는 단장(斷腸)의 느낌을 불금(不禁)하였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물질적 결핍(缺乏)에만 있지 않았다. 보다 더 큰 것이 있었다. 그는 정신적인 애통이다.
모든 제사장들아 굵은 베띠를 띠고 슬퍼하며 제단에 시중드는 자여 너희는 부르짖을 것이요 하나님께 시중드는 자들아 와서 밤이 맞도록 굵은 베옷을 입고 누울지니 대개 소제와 번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들이지 못함이라.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길에 거꾸러지고 산야가 푸른빛을 볼 수 없이 소리 없이 울고 탄식하고 섰는 그것도 견딜 수 없이 비통한 일이거니와, 그보다도 더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의 생명보다 더 중하게 아는 하나님의 단에 날마다 드리는 제사조차 할 수없이 되었다는 일이다. 고난은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고난에 의하여 마음에서 신의 그림자가 떠나가 버림이다. 재난의 끔찍한 것은 여기 있다. 고로 저는 배가 주린 것을 위하여 말할 사이가 없이
너희는 거룩히 금식하라 하고, 한 성회를 열고 장로와 이 땅 모든 거민을 모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간구(懇求)하라.
고 한다.
이것으로써 우리가 배우는 것의 하나는 재난은 우선 아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요엘은 심히 아파하였다. 애통이 극한 그의 눈앞에는 산(山) 그것이 바로 울고, 나무 그것이 바로 부르짖으며, 들짐승조차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는 것이었다. 심중에 경이념(驚異念)이 없어진 사람은 아픈 것에 대하여도 감각이 없어진다. 현대인의 특징(特徵)의 하나는 아픔 을 모르는 것이다.
저들은 홍수가 나도, 지진이 나도, 전쟁이 나도, 그리하여 생지옥을 안전에 보아도 잠시(暫時) 그때뿐이요, 돌아서면 곧 술잔을 들고 희희담소(嬉嬉談笑)한다. 양심이 그렇게까지 마비(痲痺)된 그들은 그들이 얼마나 신에게서 멀어졌는지 그들의 생이 얼마나 부평화(浮萍化)하였는지 그들의 애국심이 얼마나 거품 같은지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일 살아있다고 믿으면, 인생이 만일 실(實)인 것을 요구한다면, 동류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언어에 절(絶)하는 그 사실을 경험하고 그 심장에 구멍이 뚫리고 거기서 선혈(鮮血)이 끊을 수없이 흘러남을 깨닫고야 말 것이다. 슬퍼할 줄을 모르는 시대, 이는 분명히 신에게 버림을 당한 시대가 아닌가. 그러나 중첩(重疊)하는 재난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신이 오히려 이 시대를 전연 버리지 않은 증거다. 흔들려도 감각이 없는 아들을 안은 자부(慈父)가 침으로 그 신경을 찔러 자극(刺戟)하듯이 하나님은 현대를 꼬집는 듯하다. 요엘의 말과 같이 우리는 베띠를 띠고 밤새도록 울어야 한다. 울어도 모자란다.
다음에 또 저에게서 배우는 것은 재난은 정신적으로 대함이다. 홍수 나면 치수를 다시 하고 지진 나면 건축을 개량하는 것은 물론 할 것이나 그보다도 더 잊지 말 것은 그 안에 있는 신의 질문에 대답함이다. 워싱턴은 곤란(困難)에 닥칠 때마다 항상 그것을 단련(鍛鍊)의 자료로 삼아서 마침내 아메리카 건국 대사업의 책임 있는 지위를 맞게 되었다고 한다. 재난은 그것을 정신적으로 해석하는 자에게는 도리어 순경(順境)에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정신적 태도의 구극(究極)은 회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재난은 회개에 대한 독촉(督促)이다. 재난을 아파함은 그 안에 있는 신의 말씀을 찾는 태도요, 회개는 그 말씀의 의미가 알려진 때에 발하는 영혼의 대답이다. 고로 회개는 공포의 감정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그 밑에는 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 기쁨 ―신의 말씀 중에 들어 있는 그 무한의 사랑을 느끼는 기쁨 없이는 회개는 불가능하다. 회개는 엄동에 떠는 고가(枯柯)의 울음은 아니다. 첫 봄 양기에 녹아서 얼음 밑에 흐르는 시내의 소리다. 고로 제1장에서 아파하는 예언자는 제2장에서 회개를 부르짖는다.
제2장 여호와의 날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聖山)에서 호각을 불어 그 땅 거민이 다 떨게 하라.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름이니 그날이 임박함이라. 이는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낀 날이니 산꼭대기에 새벽이 덮임같이 많고 강한 백성이 있으니 자고(自古) 이래(以來)로 이런 것이 없고 이후에도 이런 것이 없으리라.
요엘이 정신적인 태도로 재난의 날을 볼 때 그는 단순히 지면의 일부분에 일어나는 초충(草蟲)의 소위만이 아니요 그대로 곧 여호와의 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세상의 불의를 질책하는 무서운 그날이다. 3절 이하는 직접 육안으로는 메뚜기의 모양을 모사(模寫)한 것이요, 메뚜기 문학으로는 고금에 또 볼 수없이 우수한 것이라 하겠으나, 벌써 이미 이때에 요엘의 눈에 메뚜기는 메뚜기가 아니요 여호와의 명령대로 심판의 집행을 하는 그의 군대였다. 한폭(幅) 장엄하고도 무서운 활화(活畵)다. 고로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려우니 누가 능히 당하리오” 한다. “어리석은 자는 심중에 하나님이 없다” 한다. (시편, 제 14편 1절) 그러나 눈이 있는 자에게는 모든 천연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무신론자라는 평을 듣던 셸리조차
노래로는 못내 부를 슬픔에 목이 메는
거친 바람,
암담한 구름을 밤새도록 애곡(哀哭)시키는
미친바람,
슬픈 눈물을 속절없이 뿌리는
사나운 풍우,
헐벗은 수풀의 엉성한 가지,
깊은 굴(窟), 음침(陰沈)한 바다,
이는 다 세상의 부정을 울부짖는 통곡(慟哭)이런가!
라고 불렀다.
이 세계에는 분명히 잘못된 곳이 있다. 꽃이 웃고 새가 노래하고 별이 반짝이는 데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희열(喜悅)이 있건만, 또 어딘지 부조화가 있다. 귀 있는 자는 그것을 듣는다. 천변지재는 분명히 이를 말한다. 자연현상으로서는 하등(何等) 변(變)이랄 것도 없고 재(災)랄 것도 없다고 자연학자는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공중에 새 한 마리도 까닭 없이는 아니 떨어뜨리고 들의 풀도 그 천성을 다할 때까지 키우시는 하나님이거든 넓은 천지에 하필 모진 풍우를 조선 함경도의 가엾은 사람 위에 떨으칠 것은 무엇인가. 네가 만일 동류상애(同類相愛)하는 맘이 없다면 그만이다마는 있다면, 그를 보고 괴이(怪異)히 여길 것 없는 당연한 현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면 산(山)이 악의(惡意)있고 물이 노심(怒心)있고 메뚜기가 적의(敵意)있느냐. 아니다. 산은 그 창조 당시에 네가 명명한 것이 아니며 물은 네가 알아본 것이 아니며 만물은 네게 속할 것으로 허락받은 것 아니냐. 그것들이 네 원수는 아니다. 그러나 부정은 분명히 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적의 있는 듯이 일으키게 하는 이 세계에 부정은 어디인지 분명히 있다. 정직한 양심이 그 문제에 안온(安穩)하지 못하고 두루 번뇌(煩惱)할 때, 다윗의 코끝을 가리키는 나단의 손가락같이 무서운 한 손가락이 그 심장을 내찌르며,
“네가 아니냐!”
하고 소리를 친다.
그 소리를 들은 자는 화 있을진저. 또 복 있을 진저, 요엘은 그 사람이었다. 그는 안전(眼前)에 펼쳐지는 참담(慘憺)한 광경을 보고 놀라고 슬퍼하고 번민(煩悶)하였다. 그럴 때 한 빛이 살별같이 그의 흉중을 스치고 지나가며 이는 이 백성의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럴 때 그 순간(瞬間)에 천지는 그대로 있으면서 변하였다. 그 눈앞에, 백리의 산천을 평면 위에 압사(壓寫)한 투시도(透視圖)같이 영원의 시간이 압축(壓縮)되어 직시(直時)로 ‘여호와의 날’이 되었다. 아, 무서운 여호와의 날, 회개하지 않으면 이것이다. 문제는 메뚜기에게 침략된 전지(田地)에 있는 것 아니요 여호와의 군대에 노(怒)염을 당하는 인생에 있으며, 양식에 주린 창자에 있는 것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에 주린 영혼에 있다. 맘에다, 맘에다. 여호와의 군대는 발 앞에 있다. 일각(一刻)의 유여(猶餘)가 없다. 아, 벌써 늦은 것이 아닌가. 그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시기를
너희는 ‘이제라도’ 내게 돌아오라. 너희는 ‘맘을 찢고 옷을 찢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대개 그는 은혜로 오시며 자비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스스로 그 재앙(災殃)을 뉘우치는 자시라. 주께서 돌이켜 뉘우치사 그 뒤에 복을 주실는지 누가 능히 알겠느냐, 곧 너희 하나님께 드릴 소제와 번제로다.
‘이제라도’다. 여호와의 날은 무섭다. 그러나 이제라도 늦지 않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사(容赦)하신다. 그는 벌(罰)하기를 즐겨하시는 이는 아니다. 문제는 너희 마음에 있다. 너희게 종교가 없다는 것 아니다. 곡식(穀食)이나 짐승으로 바치는 제물이 문제 아니다. 회개하는 형식으로 옷을 찢는 것이 귀한 것 아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영혼의 맨 속에서부터 정말 나를 위하고 내게 돌아오라. 너희 마음에 부정이 있는 것을 통회(痛悔)하여 그 심장을 찢어 내 앞에 놓으라. 그것이 참 재물이다. 그리고 그 제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드릴 수 있다. 깨달은 그 순간이 곧 제사시간이요 깨달은 그 장소가 곧 성전이다. 그 대신에 일각의 지체(遲滯)도 허(許)할 수 없다. ‘이제라도’ 라는 일어(一語)는 이 황량(荒凉)한 정신적 가사(假死)의 시대에 있는 예언자의 가슴 밑에 어떻게 복음적 애(愛)의 따뜻한 빛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을 잘 말하여준다. 마치 그가 보는 거친 들에 메뚜기가 다 깎아먹고 남은 것 속에 오히려 내춘(來春)을 기다리는 생명의 뿌리가 있었던 것과 같다. 사랑의 빛이 있는 곳에 회개의 싹이 움직이고 회개의 새싹에 희망의 열심이 있다.
시온에서 나발을 불어 거룩히 금식하라 하고 한 거룩한 성회를 열고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하게 하며 장로를 모으며 어린아이와 모든 젖먹는 자를 모으고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여호와께 수종(隨從)드는 제사장들은 행각과 제단(梯團)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용서(容恕)하여 주의 기업(基業)을 욕보여 열국이 관할하지 말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만민중에 이르기를 그 하나님이 어디 있나뇨 하겠나이까 할지니라.
‘거룩히’ 금식하고 ‘거룩한’ 성회를 열고 그 회를 ‘거룩하게’ 하고 거룩히, 거룩히, 거룩히 라고 반복하는 것을 보면 예언자가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유일의 조건은 ‘거룩’ 이다. 저가 거룩한 고로 저에게 가는 자는 거룩할 수밖에 없다. 저는 반드시 많은 선물을 요구치 않는다. 다만 남김없이 찢어서 거룩히 구별한 심장을 원한다.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만을 보는 것, 하나님만이 있는 곳을 거룩한 곳이라 한다. 저 이외의 일물(一物)이라도 있어서는 안된다. 심판의 자리에서 신생하는 자의 유일의 길은 스스로 자기를 거룩한 것으로 바치는 데 있다. 개인에 있어서는 개인의 전 생명을 요구하는 것이나 전체로서는, 이 구약시대에 있어서는 민족 그것을 전체로 성별(聖別)함이 필요하다. 고로 회개하는 이 예배(禮拜)에는 장로로부터, 어린아이, 젖먹이, 전쟁이 나도 그 사람만은 출정을 면제하라고 한 신혼부부까지 다 참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대표자인 제사장을 시켜 통곡하여 여호와께 간구해야 된다. 그렇게 하면
그때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사 그 백성에게 응답하여
양식을 주시고 새 술을 주시고 기름을 주시며, 즉 모든 생활자료를 풍성하게 주시며, 열국의 침해를 면케 하시고 천재를 제하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중심이 회개자의 기도로 뜨거워진다는 것은 놀라운 말이다. 아버지의 눈초리는 탕자의 돌아옴으로 인하여 뜨거운 눈물이 괴인다. 세상에 감사한 일은 하나님이 벌을 하시다가도 뉘우치는 하나님이요, 추상(秋霜)같이 노하시다가도 우리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시기만 하면 또 춘양(春陽) 같은 그 가슴을 벌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일양(一陽)이 내귀(來歸)하여 만물이 광휘(光輝)를 발하듯이 신의 심중에 일온(ᅳ溫)이 동하여 세상은 낙원이 된다. 21절 이하는 회개로 인하여 축복받은 후의 유다를 그린 것이다.
천재(天災)가 신노(神怒)라 하고 사람의 회개에 의하여 그 재난을 면할 것이라 하면 사람들은 미신이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설혹 현상은 공기나 수증기(水蒸氣)나 지각(地殼)의 물리적 화학적 변동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왜 그 사건이 하필 그때에 그곳 그 사람에게 그처럼 그보다 더도 아니요 덜도 아니요 그만큼 나타나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른다마는 만일 사랑한다면 그것이 내 무릎에서 빼앗겨갈 때 거기 신의(神意)를 읽지 않고야 무엇으로써 내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나오는 이성의 질문에 만족한 해답을 줄 수 있는가. 네가 만일 인생을 사랑하지 않거든 천재(天災)를 가지고 우연이라 하고 그는 인류의 영원히 면치 못할 것이라고, 안듯이, 그러나 잔혹(殘酷)히 말하라마는 네가 만일 인생을 사랑하거든 그럴 수는 없다. 천재가 신의에 의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 자는 모르나 믿는 자는 충분한 실증을 역사상에 가진다. 좋을 것이다. 계급과 계급간 민족과 민족간에 연대관계가 없다 하고, 인생과 자연간에 혈맥이 통하는 것이 없다 하는 자에게는 천변은 단순히 운명의 악희(惡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산 관계가 있음을 아는 자는 천재는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요, 따라서 우리 취하는 태도에 따라 면할 수 없는 것 아니다. “천재를 면한다”고 하면, 곧 “과학에 의하여”라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 옳은 말이다. 그러나 과학의 원천(源泉)도 가치도 다 같이 기술에 있는 것 아니요 정신에 있다. 과학이 천재를 방지(防止)함은 기술로 인해서가 아니요 정당한 적용에 의하여서다. 이것은 오늘의 과학이 기다(幾多)의 재난(災難)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알 일이다. 고로 과학에 의한 천재의 방지도 결국은 마음 문제에 귀착(歸着)하고 만다. 적용으로만 아니라 발달로도 연구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을 이만큼 성결(聖潔)해진다면, 금일의 것으로는 비할 수 없는 더욱 놀라운 발명 발견이 있을 것이다. 과학의 발달을 방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과학자가 생각하듯이 신앙이 아니요 도리어 신에게서 떨어져나간 인심의 오탁(汚獨)이다. 옛사람이 일러 말하였다 ——불탐야식금은기(不貪夜識金銀氣)라고.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 아니라 더 큰 것을 믿는다. 지구 위에서 죄가 끊어지는 날이면 세계 그 자체가 완전 조화의 지경에 가리라고. 심중에 악의를 품으면 얼굴에 살기가 나타나고 사모하는 사람을 따라 용모(容貌)를 닮는다고 한다. 이미 부분에 있어서 사실인 것을 우주 전체에 있어서 사실로 믿는다고 하여서 불합리할 것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을 바라보는 예언자들이 송아지가 사자(獅子)와 같이 눕고 아이가 독사(毒蛇)의 굴에서 놀 것을 말함은 반드시 공상이 아니다.
이상에 있어서 요엘은 메뚜기의 재해가 어떻게 참혹한 것과 그 의미를 지적하였고 또 거기 대한 회개의 필요와 그로 인한 신의 축복을 말 하였다. 영의 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목하(目下)의 사건은 단순히 목하의 사건에만 그치는 게 아니요 동시에 영원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의 과정의 각 부분은 부분이면서 또 직(直)히 전체를 그 안에 가지는 것이다. 고로 요엘의 예언도 당시 목하의 문제였던 메뚜기 재해에만 그칠 수 없었다. 메뚜기의 일에 관한 한 예언은 2장 27 절로 다 되었다 할 수 있다. 거기까지에 있어서 저는 이미 그 재난(災難)이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 때문인 것, 그를 통회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중심이 뜨거우시어 모든 죄를 사(赦)하시고 메뚜기의 해하였던 것을 다 풍족하게 갚아주실 것을 다 말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주석학자들 중에는 제 1 장 첫머리에서부터 여기까지와 이 이하 3장말까지를 나누어 서로 의미가 연락(聯絡)되지 않는다하여 두 사이에 궐문(闕文)이 있다고 상상(想像)하는 이, 두 부분이 서로 딴 제목에 관한 딴 저작(著作)이라는 이가 있고, 심지어는 서로 딴 저자의 것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이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무용한 의혹이다. 모르는 말이다. 만일 예언자의 심중(心中)을 이해했다면, 하나님의 말씀하시려는 것의 진의(眞意)를 헤아렸다면 그런 말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려는 것은 일시적(一時的)인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 혹은 세계 역사 전체 영원에 관한 것이다. 저가 말씀하시는 언언구구(言言句句)에는, 마치 현명(賢明)한 맹모(孟母)의 개개의 처사에 맹자 일생의 목적이 들어 있었던 것같이 그 크신 경륜(經綸)의 전부가 항상 들어 있다. 고로 2장27절까지의 말은 그 말씀하시려는 것의 전제(前提)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교재를 제시한 것뿐이다. 이제 그 제시된 교재를 이해시키는 것이 2장 28절이하다. 그러기 때문에 두 사이에 중단을 생각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문체로 하면 혹 그런 것이 있을는지 모르나 적어도 사상상(思想上)으로는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다. 혹은 사실로 서로 다른 저자(著者)의 말이라 하더라도「요엘서」의 뜻으로는 아무 지장(支障)이 없다. 하나님은 두 저자만 아니라 억만의 저자로 합작을 시켜서라도 두미일관(頭尾一貫)하여 그의 말씀하실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할 때 재난은 보복(報復)이 아니요 징계(懲戒)다. 보복은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요 징계는 사랑에서 나온다. 외양으로는 다를 것이 없으나 속마음으로는 다르다. 그리고 맘의 다른 것이 다른 결과에 도달하게 한다. 보복이 멸망을 가져오는 대신에 징계는 완성을 가져온다.「히브리서」의 저자가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練達)한 자에게는 의(義)의 평강(平康)한 열매를 맺는다”(히브리서, 제12장 11절) 하였는데 그 마음을 가지고 이 메뚜기의 재난을 당할 때 장차 도달할 결과를 미리 말한 것이 예언서의 2장 28절 이하의 말이다.
지금 우리 잘못한 것을 미워하시어서 하시는 것이 아니요 우리로 하여금 선민의 사명을 다하도록 하시기 위하여서다. 이 불신을 회개한 대가로 목하에 당한 해를 보상하여주실 뿐 아니라, 더욱더 정신적 축복을 내리시고 자기의 의를 완성하신다 ——하는 것이 그 뜻이다.
이후에 내가 내 성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여자들이 장래 일을 말 할 것이요 너희 늙은 자는 꿈을 꾸고 너희 젊은이는 이상(異像)을 볼 것이요 또 그때에 내가 내 성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요 내가 이적(異蹟)을 하늘과 땅에 베풀되 피와 불과 연기기둥이라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함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있으리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지니 대개 여호와의 말씀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하는 자가 있을 것이요 또 남은자 중에 여호와께서 부르실 자도 있음이라.
이후에, 즉 징계를 받아 통회한 후에다. 저희가 순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육 목적이 제대로 달성되면 말이다. 하나님이 문제삼는 것은 저희의 어떤 특정한 죄악만이 아니다. 그 죄악만 처분되고 그로 인한 불행만이 복구(復舊)되면 그만이라는 것 아니다. 그보다도 그 어떤 특정의 죄악 불행으로 인하여, 그것을 계기(契機)로 삼아 저의 마음의 정결(淨潔)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가 고대(苦待)하시는 것은 그것이다. “이후에” 하는 말에는 그와 같이 하나님의 고대가 포함(包含)되어 있다. 이 말은 또 달리 번역(翻譯)하면 ‘끝날’이라고 된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누구나 생각날 것은 저 유명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일 터인데 그가 그때에 이 구를 인용할 때는 이 뜻으로 하였다. 그러나 끝날이라거나 이후라거나 근본 의미에 있어서 변동은 없다. 문제는 시간에 있는 것 아니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있다. 마음이 정결하여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기계적으로 고정불변(固定不變)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반응 여하에 따라 신축(伸縮) 가감(加減)된다. 여호와의 날은 어떤 미래의 한 날에 고정한 것 아니다. 그렇게 믿는 데서 수자로 계산을 하는 미신이 나오고 성서를 점서(占書) 보듯 하는 일이 생긴다. 여호와의 날은 멀다면 영원이요 가깝다면 바로 발 앞이다. 사람의 하는 일을 따라, 곧 오려면 이제 선 자리에서 임할 것이요 연기되려면 무한히 연기될 것이다. 고로 베드로가 오순절의 일로써 이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믿은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또 그때에 되었다고 하여서 금후(今後)에는 적용될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예언은 참서(讖書)는 아니다. 항상 살아 적용되는 것이 예언이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의 오신데서 새 시대의 시작을 보고 오순절에서 이 크고 놀라운 날의 어떤 부분을 본다. 그러나 또 그날이 장차 올 것을 지금도 기다린다. 우리의 취할 태도는 그날을 맞춰 보려 할 것이 아니요 그날이 오기를 우리 심적 태도로써 촉진(促進)하도록 할 것이다.
내 성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징계의 의미를 알아 회개하면 물질적 축복을 얻고 한시대의 불행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산생명의 성신을 받는다. 만민(혹은 모든 육체)이 다 받는다고 한다. 예언자 같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던 그 은혜를 남녀, 노소, 귀천의 차별이 없이 다 받는다고 한다. 어떻게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이것이 놀라운 일로 보이는 것은 죄에 속한 우리 눈에요 하나님의 눈에는 아니다. 그에게는 차라리 당연한 일이다. 그의 성신을 받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맘을 완고하게 함으로 인하여 그 은혜를 거부하고 받지 않는 것이 도리어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준비되신 손을 가지고 ‘이후에’ ‘이후에’ 하시며 ‘그날에’ ‘그날에’ 하시면서 기다리신다.
그리고 사람이 그 성신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성신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심중을 이해시키기 위하여서다. 하나님의 심중에는 무엇이 있나. 영원의 세계, 실재의 세계가 그대로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녹아 있는 세계다. 선과 악이 한데 녹아 사랑으로 있는 세계다. 이루어질 역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있는 세계다. 그 세계를 본 자는 생명의 진상을 본 자요 우주의 의의를 안자요 역사의 의미를 안자다. 그것을 본 것이 꿈이요 이상이요 그것을 말한 것이 장래 일이다. 넓은 의미에서 예언이다. 예언이란 다른 것 아니요 역사의 의미를 독파(讀破) 한 것이다. 역사의 의미를 안 고로 창조의 날에 하나님 곁에 서지 않았어도 그 만물이 무엇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고, 몸이 시공에 얽매여 있으면서도 세계 완성의 날을 보고 있을 수 있다. 이 예언은 경험에 의한 것도 아니요 학식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특별한 소질로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 성신을 부어주심으로 된다.
그리고 그를 위한 유일의 조건은 마음이 정결한 것이다. 역사상에 이런 예언자는 간간이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이 장차 나타나려 할 때 믿는 모든 사람이 다 이러하리라고 한다. 세계가 완성되려 할 때 모든 영혼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이때까지 어지러이 부는 바람을 따라 분주(奔走)히 거래하는 음운(陰雲) 밑에서 때때로 그 터진 사이사이로 몽롱(朦朧)하게 잠깐잠깐 보이던 푸른 하늘을 그 구름이 걷히는 날에 제대로 완전히 보는 셈이요, 거기 겸(兼)하여 거리로 인하여 제한되지 않는 초광선적 시력을 가지고 억만만의 우주가 무한공창(無限空蒼)에서 소녀의 때처럼 춤추는 것을 보는 셈이다.
그것이 여호와의 날이 오는 데 전행(前行)되는 조건의 첫째다. 그 둘째는 재난이 크게 일어나는 일이다. 피와 불과 연기(烟氣)기둥으로 하신다고 한다. 아마 이는 전쟁을 표시한 말이다. 이 전쟁이 어느 때 어디서 일어나며 누구와 누구가 싸울 것인지 그는 우리 알 바 아니다. 또 반드시 전쟁이겠는지 아니겠는지도 알아보려 고심할 필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땅 위에 큰 환난이 일어난다 하는 것이요 그로 인하여 천지에 대(大)기적(奇蹟)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 일이 필요하냐. 대(大)소제(掃除) 때문이다. 불신과 간음(姦淫)과 질투(嫉妬)와 불의와 기만과 허망(虛妄)탐욕(貪慾)의 온가지 죄로 더러워진 이 세계가 어린 양의 신부에 합당한 신장(新裝)을 하려면, 닦고 씻고 긁고 짜 내고 일고 휘저음을 당하는 고통이 없이는 될 수 없다. 성신을 받은 자는 이것을 알 것이요, 아는 자는 겁(怯)하거나 미혹(迷惑)하지 않을 것이다. 환난이 오는 것은 아는 자로 하여금 확신하여 구원 얻게 하기 위하여, 알지 못하는 자를 흔들어 떨어뜨리기 위하여서다. 고로 이 환난의 날에 살아 날 자는 이 예언자와 한가지 ‘여호와의 날’의 줄을 잡고 견디는 자다.
세째 조건은 이스라엘의 회복(恢復)이다.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앙을 아름다이 여겨 특히 약속함으로써 일어난 민족이요 모든 나라 중에 격별(格別)히 빼어 자기 백성이라 하여 눈동자처럼 사랑한 백성이다. 그런데 그 백성이 지금은 나라는 망하고 문화는 깨어지고 사람은 사방으로 유리(流離)하여 종노릇을 하고 있다. 일찌기 약속하여주신 땅이라는 데는 믿지 않는 이방인이 들어와 맘대로 짓밟고 “모든 족속 중에 내가 너만을 알았노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던 사람들은 큰길가에 창녀 모양으로 오고가는 모든 민족이 마음대로 농락(弄絡)하고 학대(虐待)하고 멸시(蔑視)한다. 요엘의 시대에 메뚜기의 재해로 거민이 일시 사방으로 흩어지던 모양은 바로 이스라엘의 그전 후 수천 년간의 역사를 표징(表徵)하는 듯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비참이 비록 저들의 불신 때문이라고는 하더라도 그들을 불러 ‘내 아들’ 이라 하고 ‘내 아내 ’ 라 하신 하나님이 영구히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고로 그는 그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온가지 방법을 쓰신다. 적국을 침입시킨 것도 그 때문이요 이국(異國)에 헤매이게 한 것도 그 때문이요 천재지변을 내리신 것도 그 사랑 때문이다. 이 메뚜기의 해도 이로써 저희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 해(害) 받은 것을 다 갚아주실 뿐 아니라 성신으로 전민족에 부어 주시고 마지막 날에 구원을 얻어 돌아올 것이다一이것이 저들의 신앙 이었다. 적어도 그 예언자의 신앙이었다. 그리고 이 신앙이 그들의 역사의 척주(脊柱)였다. 이집트의 압박 밑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이 신앙 때문이요 바빌론 사람의 모욕 밑에서 거문고를 시냇가 버드나무에 달고 애끊는 생각을 하면서도 멸망하지 않고 남은 것은 이 신앙 때문이다. 고로 이 예언은 실현될 것을 우리는 믿는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이라면 유대인이다. 그렇게 애국심이 있으면서도 나라는 못 이루고 그렇게 학대받으면서도 멸종되지는 않고, 한편으로 하면 분명히 저주(咀呪)받은 민족이나 또 한편으로 하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어떤 손이 지배함을 받는다고 할 수밖에 없는 민족이다. 불가사의의 원인은 이 보이지 않는 손에 있다. 그 손은 무슨 손이냐. 하나님의 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또 말고라도 적어도 모세, 엘리야로부터 요한, 바울에까지 이르는 역대의 모든 예언자들이 전주(電柱)같이 벌려 서서 혼신의 힘을 두 팔에 올려가지고 서는 것은 사실이다. 위대한 신앙을 가진 민족은 복 있도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반드시 회복(恢復)된다는 예언의 진의는 거기 있지 않다. 우리는 유대 민족의 부흥을 미신적으로 믿으려는 사람 아니다. 이제라도 유대인이 회개하면 부흥할 터요, 이보다 몇 배 되는 세월을 지나고라도 종내 회개치 않으면 별(別)수 없다. 우리는 유대인에 무한한 동정을 한다. 더구나 우리 자신인 것 같아 그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저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굽히게 하는 특권까지를 허(許)하고 싶지는 않다. 육(肉)인 이상 그것도 아무 특별할 것 없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육을 받은 것이 그 의미가 아니요 신의 약속을 얻은 것이 그것이다. 고로 유대인이 반드시 이스라엘이 아니요 믿음으로 약속을 받아 아브라함에 영적으로 연결한 자가 참 이스라엘이다. 유대인의 시온운동이 이 예언이 완성되려는 시작인지 아닌지 우리는 모른다. 혹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혹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다른, 보다 진실한 의미에서 시온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요 그것이 완성 될 것은 확실한 일이다一하나님을 믿는 자가 세상 불의의 박해(迫害)에서 구원되고 그의 의가 완성되는 날이 오는 일이다.
성서조선 1939.1 120호 - 1939.2 121호
저작집30;18-259
전집20;11-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