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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49. [역경의 열매] 유이상 (1-23) “좋은 열매 수확하려면 씨 뿌리고 땀 흘려 가꾸어야”
40년 사업하며 큰 사건 사고 없었던 건
주님의 특별한 보호·은혜 있었기에 가능
평생 원칙 지키며 주어진 소명에 최선
유이상 풍년그린텍 대표가 지난 14일 경기도 안산의 계란판 제조공장 앞에서 크리스천 기업인으로서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 안산=신석현 포토그래퍼
하루 세끼 식탁 앞에 앉는 이들이 가장 익숙하게 마주하는 음식 중 하나가 계란이다. 계란 프라이, 계란찜, 계란말이는 물론 계란이 중심이 아니라 부재료로 사용되는 음식은 수도 없이 많다. 이토록 우리에게 친숙한 계란이 어떻게 내 눈앞까지 왔을까.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얘기가 아니다. 계란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 대한 얘기다. 동시에 나의 삶과 신앙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란판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이 회사 정문을 빠져나간다. 하루 평균 20대, 많을 때는 30대 분량의 트럭이 전국 각지로 향한다. 하루 평균 100만장, 3000만여개의 계란을 담을 수 있는 양이다. 국내 계란판 수요의 65%를 공급하고 있으니 혹여라도 우리 회사에 변고가 생기면 우리네 식탁에 적잖은 혼란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1948년 세상 빛을 본 뒤로 어느새 다다른 일흔 중반의 나이. 그중 절반 이상을 사업가로 살아왔다. “장사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란 말은 결코 쉬이 넘길 말이 아니다. 기업을 운영해 온 사람으로서의 입장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상황과 사람들의 입을 통해 증명된 진리 같은 명제다. ‘매출’ ‘영업 이익’ ‘투자’ ‘손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돈과 자본의 문제다. 세상이 진리인 것처럼 추앙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기업의 운영이란 것이 굶주린 채 먹잇감 사냥하듯 돈에 달려드는 영역에서 이뤄지다 보니 고소 고발 사건에 연루되는 일들이 태반이다. 그런 점에서 감사하다. 4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도 경찰서나 법원 한 번 드나들 일 없었던 것이 말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하심과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삶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평생 해왔던 모든 일이 씨앗을 뿌리는 일이었다. 열매와 수확을 생각한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은 씨앗 뿌리는 일이다. 씨를 뿌린다는 건 가능성과 희망 없이는 시작할 수조차 없는 일이며, 열매란 자고로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눈물겨운 선물이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 물론 씨를 뿌렸다고 언제나 열매와 수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씨 뿌리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씨를 뿌리고 땀 흘려 가꾼 만큼 거둔다는 것은 평생 내가 지켜 온 원칙이자 소망이다. 그 과정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열매를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일을 소명이라 생각하며 모든 일에 임했기에 지금껏 달려올 수 있었다.
1948년 5월은 여느 봄날과 다른 봄이었다. 그해 5월 10일 대한민국에선 8·15 광복 후 유엔의 감시 아래 제헌국회를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소련의 거부로 북한 지역에서는 선거가 불가능했고, 남한에서만 단독 선거가 치러졌다. 투표율은 경이적이었다. 600만명 정도가 참여할 것이란 ‘뉴욕타임스’의 예상을 깨고 800만여명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해 무려 95.5%라는 기록적인 투표율을 남겼다. 그리고 같은 달 31일 마침내 제헌국회의 첫 번째 회의가 열렸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시동을 건 그해 5월 23일 나의 인생도 시작됐다.
약력=풍년그린텍 대표,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경기서부연합 회장, 스리랑카 국제관광학교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겨자씨사랑의집 초대 이사장 역임
* [역경의 열매] 유이상 (1) "좋은 열매 수확하려면 씨 뿌리고 땀 흘려 가꾸어야"
* [역경의 열매] 유이상 (2) 소풍 갔다 고무신 밑창 떨어져… 험한 산행에 발 '퉁퉁'
* [역경의 열매] 유이상 (3) "일하든 공부하든 하루라도 일찍 서울 갈래요" 독립선언
* [역경의 열매] 유이상 (4) 학원 일 도우며 무료수강… 상경 4년 만에 대학 배지 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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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유이상 (23·끝) 함께 일하고 서로 섬기며 다같이 성장하는 풍년그린텍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유이상 (2) 소풍 갔다 고무신 밑창 떨어져… 험한 산행에 발 ‘퉁퉁’
칡넝쿨로 고무신 묶었지만 결국 맨발
6학년 수학여행 땐 집안 형편 때문에
가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난 안 가요”
유이상 풍년그린텍 대표가 지난 14일 경기도 안산의 본사 사무실에서 유년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자신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안산=신석현 포토그래퍼
지금도 4월이 되면 전북 고창 도솔산의 선운사에서 동백꽃 축제가 열린다. 하지만 내게 선운사는 동백꽃이 아니라 ‘검정 고무신’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그곳으로 원족(遠足)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소풍을 원족이라 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인솔해 산이나 들, 명승지를 찾아 줄지어 걸어갔다가 밥을 먹고 오는 행사였다.
한 번은 도산초등학교에서 12㎞나 떨어진 선운사로 1박 2일에 걸쳐 다녀오는, 조금 특별한 원족을 다녀오게 됐다. 선운사로 가는 길은 비포장 들길과 험한 산길을 3시간 넘게 걸어야 했다. 당시 내 발엔 검정 고무신이 신겨 있었다. 지금처럼 고무 품질이 좋지 않았던 때라 산길을 걷다 보니 밑창이 떨어져 나가 버렸다.
궁여지책으로 산에 있던 칡넝쿨을 고무신과 발에 꽁꽁 묶었다. 야속하게도 걸으면 걸을수록 칡넝쿨은 자꾸만 풀어졌고 수없이 다시 매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내 발은 맨발이나 다름없는 꼴이 돼버렸다. 그해 소년 이상이의 기억엔 동백꽃이 없다. 그저 퉁퉁 부은 발과 해진 검정 고무신이 맴돌 뿐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내게 수학여행은 그림의 떡이었다. 96명의 졸업생 중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아이는 24명에 불과했다. 빠듯한 집안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부모님께 수학여행이 있다는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경비를 마련하자면 가계에 무리가 됐을 것이고 안 보내자니 자식에게 미안함이 컸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단체여행이라 어느 정도 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가가호호 방문해 부모님을 설득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수학여행 경비는 400원 정도였는데 선생님께서는 절반인 200원만 내도록 할 테니 수학여행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셨다.
“저는 수학여행 안 가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나는 선생님과 부모님 앞에서 똑 부러지게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친구들이 볼 서울역과 남대문, 동물원, 전차를 나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누나와 형, 동생들도 같은 상황이었다. 뻔히 보이는 집안 형편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다녀온 수학여행. 내게는 그 여행이 빈 좌석으로 남아 있다.
모든 게 부족한 시절이다 보니 땔감도 늘 구하러 다녔다. 나무하러 가는 문수사 쪽은 집에서 10㎞ 이상 떨어져 있는 먼 곳이었다.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갈 때는 괜찮았는데, 나무를 잔뜩 지고 내려올 때는 지게 목발이 땅에 걸리곤 했다. 그럴 때면 나무가 얹어진 지게와 함께 구르기 일쑤였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감당하기엔 가혹한 노동 같지만 당시엔 그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어느 날 세 살 위 형과 함께 나무를 하러 갔다. 집에 오고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그날은 산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도로 밑에 배수로가 있어서 양쪽을 막으니 나름 아늑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온종일 나무를 한 탓에 녹초가 되어 정신없이 잠에 들었다. 그런데 밤중에 비가 많이 와서 순식간에 배수로로 물이 흘러들어왔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3) “일하든 공부하든 하루라도 일찍 서울 갈래요” 독립선언
농사 거들며 공부했지만 늘 상위권 성적
친구들처럼 타지 고교 진학 어려워지자
대학 못갈 바에야 내 길 찾겠다 포부 밝혀
유이상(왼쪽) 대표의 딸 세인의 1992년 초등학교 졸업식 모습. 유 대표는 자신의 삶이 초등학생 시절 끝났을 수 있었을 시대상을 회고하며 지금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세 살 위 형과 땔감 나무 작업을 마치고 잠을 청하러 배수로에 들어갔지만, 순식간에 쏟아진 비가 배수로로 흘러들어오면서 우리는 물벼락을 맞은 꼴이 됐다. 잠에서 조금 늦게 깨어났거나 배수로에 조금만 더 빨리 물이 들어찼다면 내 삶의 기록은 12세 소년으로 끝이 났을 거다. 형과 나는 캄캄한 밤, 비에 홀딱 젖은 채 추위에 떨며 10㎞ 이상을 걸어와야 했다. 불빛 하나 없는 산길과 들길을 온몸이 젖은 채 십대 소년 둘이 걸어온 것이다. 그때 탈진해 쓰러지지 않은 것도, 저체온증으로 동사하지 않은 것도 돌아보면 주님의 은혜로 밖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창읍 주곡리는 고흥 유(柳)씨 집성촌이라 마을에 두세 집을 빼곤 모두 유씨들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쉰 뒤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선생님들은 시험 성적 결과를 늘 벽에 붙여 학생들을 자극했다. 학년별로 전교 1등부터 10등까지 이름을 써 붙였고 우리 학년의 6~7명은 모두 유씨였다.
중학교에 갔다고 해서 공부에만 집중했던 건 아니다. 집에서는 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고, 시험 기간이라 해도 공부에만 매달릴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중학교에서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반에서는 늘 상위권을 유지했고 일등을 한 적도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은 금방 지나갔다. 집안 형편이 좋은 몇몇 친구들은 광주나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타지로의 유학이라니.’ 우리 집안에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고민의 밤이 이어졌다.
“고창에서 고등학교만 다니고 대학을 못 갈 바에는 서울로 가겠습니다. 일하든 공부를 하든 일단 하루라도 빨리 갈게요.” 고창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라는 어머니에게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일찍 서울로 가서 내 길을 찾겠다는 독립 선언이었다. 부모님은 놀라며 난감해 하셨다. 열여섯 어린 아들이 그 멀고도 위험해 보이는 서울로 가겠다니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걱정이 앞서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내 결심엔 흔들림이 없었다. 이대로 살지 않겠다는 인생 최초의 선택이었고 더 넓은 세상으로 가야겠다는 포부를 펼친 첫 결단이었다.
1964년 12월 24일. 중학교 3학년 마지막 겨울방학을 하는 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와 함께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생애 처음 가는 서울길이었다. 어머니 손에는 혼자 살아갈 둘째 아들을 위해 어렵게 마련한 쌀 한 가마니 값 3000원이 들려 있었다.
새벽녘 서울역에 내리니 네온사인이 번쩍였다. 어머니는 나를 맡기기 위해 돈암동에 있는 이모집을 찾아갔다. 시내에서 들어가자면 아리랑고개를 넘기 전 왼쪽 산꼭대기에 있는 신항사 근처였는데, 시멘트 블록으로 벽을 세우고 루핑(섬유 소재에 아스팔트 코팅을 한 방수포)을 지붕으로 덮은 작고 초라한 산동네 집이었다. 작은 방 두 칸에 이모 부부와 딸 5명, 아들 1명 등 여덟 식구가 사는 좁은 집이었다. 이모님은 그렇게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나를 받아들인 것이다. 헤어지기 전 어머니는 3000원을 내 손에 쥐여주며 당부하셨다. 의외의 한 마디가 뇌리에 와 닿았다. “객지에서 사춘기를 보내야 할 텐데 부디 여자를 조심해라.”
***[역경의 열매] 유이상 (4) 학원 일 도우며 무료수강… 상경 4년 만에 대학 배지 달아
신문 배달하다 서울대 배지 단 친구 만나
대학 입학의 꿈 각오 다지며 공부에 박차
재수하던 고향 친구와 함께 나란히 합격
유이상(뒷줄 오른쪽) 풍년그린텍 대표가 1970년 서울 영등포구의 한 사진관에서 고창 동창들과 찍은 기념사진.
서울에 올라온 지 햇수로 3년이 되던 1967년. 당시 내가 살던 모습은 농촌에서 홀몸으로 상경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형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살며 가까스로 미래를 준비하던 터라 사는 데 꼭 필요한 소비재의 구입 단위는 언제나 최소였다. 쌀은 한 됫박씩, 연탄도 한두 장씩 사서 썼다. 밥 위에 올린 마가린, 거기에 간장 몇 숟가락을 끼얹어 비벼 먹으며 끼니를 채웠다.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았다.
이모 댁에서 거처한 지 3년여 만에 집안 어른이었던 아저씨네로 거처를 옮겼다. 신문 배달일을 배우는 동안 아저씨가 숙식을 해결해줬다. 일을 배우는 사람들의 시작은 대개 비슷했다. 처음엔 일한 삯을 받기에 앞서 밥을 해결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 했고 차츰 일한 대가라기보다는 용돈에 가까운 품삯을 받았다.
신문 배달 일을 하던 종로에는 학원이 많았다. 유명한 선생님의 강의에는 200~300명씩 수강생이 몰렸고 입구에서는 일일이 한 사람씩 수강증을 검사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을 ‘기도’라 불렀다. 극장이나 유흥업소 등의 출입구를 지키는 사람을 일본어로 ‘기도’라 부른다는 걸 그때 알았다. 신문 배달하는 고학생들은 기도 일을 하면서 학원 강의를 무료로 듣곤 했다.
신문 보급소에서 먹고 자는 시원찮은 환경에다 새벽부터 뛰어다니며 200부 이상의 신문을 돌리고 저녁에는 신문 대금을 수금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보면 몸은 언제나 지쳐 있었다. 그 중간에 학원에서 강의를 듣는다고 기도 일을 한 후 맨 뒷자리에 앉아 강의를 들으면 곧 졸음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1968년 2월. 그날도 신문 묶음 덩어리를 메고 광화문 앞을 지나던 길이었다. 그때, 노란색 서울대 배지를 단 청년 셋과 마주쳤다. 중학교 동창들이었다. 집성촌이었던 고향의 나와 같은 유씨 셋이 서울대에 합격해서 입학 전 서울 구경을 하던 중이었다. 어깨에 짊어진 신문 덩어리가 그들의 노란색 배지 앞에서 더욱 무겁고 아프게 느껴졌다.
친구와 반갑고도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집마다 신문을 던져 넣으며 묘한 기분을 떨쳐버리려 했지만, 친구의 노란색 배지가 오래도록 나를 흔들었다. 그래서 대학을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반드시 대학에 들어간다’는 각오로 그때부터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신문 보급소를 나와 방을 하나 얻어 살고 있었는데 재수를 하는 다른 중학교 동창 친구 2명이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우리 셋은 그해 12월 대학 입학 고사를 봤다. 이른바 ‘예비고사’라는 시험이 처음 생긴 해였다. 그해 11만2000여명의 수험생이 예비고사를 봤고 6만1000여명이 합격했다. 셋방의 수험생 삼총사는 나란히 합격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본고사가 남아 있었지만 드디어 대학생이 될 자격을 얻었다는 생각에 삼총사는 펄쩍펄쩍 뛰며 기쁨을 만끽했다.
결국 우리 삼총사는 국민대 행정학과에 최종 합격했다. 첫 등록금은 4만2000원 정도였다. 그중 절반을 스스로 마련하고 고향에 있는 형과 누나들이 기특하게 여기며 절반을 보내주셨다. 그렇게 서울에 올라온 지 4년 만에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5) 학비 마련하려 휴학… 다방에 커피 팔다 계란과 인연 시작
미군 PX서 커피 떼다 다방에 판매하다
의외로 달걀 소비량 많다는 사실 알고
본격적으로 장사, 식당까지 납품 늘려
유이상(오른쪽) 풍년그린텍 대표가 1976년 국민대 졸업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휴학했다. 신문 배달만 해서는 대학 생활을 유지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당시 신문을 인쇄하고 타 지역으로 배송하는 부서에도 고창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인연으로 종종 의정부나 동두천 쪽으로 배송 나가는 차량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 중 흔히 접할 수 없는 것들이 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미군 PX에서 나오는 커피를 구입해 다방에 되파는 일을 몇 차례 했다. 그러면서 다방이라는 곳에 대해 모르던 사실들을 알게 됐다. 그중 하나가 다방에서 계란을 많이 소비한다는 사실이었다. 오전 10시 전에 오는 손님들에겐 계란 노른자를 넣은 모닝커피를, 낮에는 뜨거운 물에 계란을 넣어 반숙 계란을 팔았다. 문득 신문 배달보다는 계란을 도매로 사다가 다방에 납품하는 게 수익 면에서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란은 내 인생에 그렇게 처음 들어왔다.
다방 몇 군데를 돌면서 계란을 납품하면 받아 줄 수 있는지 시장조사를 하고, 서대문 영천시장의 계란 도매상에서 계란 공급을 받기로 한 뒤 짐 싣는 자전거를 한 대 사서 계란 장사를 시작했다. 다방에서 음식점으로 계란 납품을 확대해 가면서 수익은 늘어났지만 결국 이것이 계란 장사를 그만두는 계기가 됐다.
그때만 해도 양계가 활성화되지 않아 시골 가정집 닭이 낳은 달걀을 모아 시골 장날에 10개짜리 한 꾸러미를 상인에게 팔고, 그것이 모여 완행열차로 서울로 보내졌다. 생산에서 판매까지 계란 한 줄이 유통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간혹 변질된 계란이 나왔다. 식당에선 썩은 계란이 한 알만 나와도 고객들의 원성이 자자했고 그럴 때마다 납품한 계란 값 일체를 못 받는 일이 생겼다. 계란 장사에 어려움을 겪던 중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계란을 납품하던 다방 주인이 종로에서 새로 여관을 하게 됐다며 일을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학생 같은 든든한 청년이 여관에 딱 버티고 있으면 마음이 얼마나 든든할까. 전등 나가면 바꿔 주고 집안에서 남자들이 처리해주는 잡다한 일을 좀 처리해 주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옥상에 방 하나 만들어 주고 용돈이랑 학비는 내가 책임질게.”
숙식 용돈 학비가 모두 해결된다니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제안을 수락하고 짐을 꾸려 여관 건물 옥탑방으로 처소를 옮겼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여관엔 상주하면서 매춘을 하는 여성이 서너 명 있었는데, 그들이 옥탑방에 수시로 올라와 마음이 영 불편했다. 하나같이 나를 ‘가지고 놀 남자’ 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춘 여성을 찾는 남자 중에는 변태적 취향을 가진 이들도 있어서 아가씨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그때마다 아가씨들은 도망치듯 내 옥탑방으로 올라와 살려달라고 했다. 제대로 공부 좀 해볼 요량으로 이곳을 선택한 게 뼈저리게 후회됐다. “여자를 조심해라.” 어머니 말씀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1개월여 만에 말없이 짐을 싸서 그곳을 나왔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6) 내 인생 길잡이 어머니, 천국 확신하며 주님 품으로
중풍 걸려 헛헛함 달래볼 요량으로
교회 출석했지만 날로 신앙 깊어져
부흥회 때 금가락지, 금비녀도 헌물
유이상 대표 모친의 장례식 모습. 고창 성북교회장으로 치러진 1992년 당시 성도들과 마을 주민들이 모두 흰색 상복을 입은 채 상여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마을 들길을 걸었다.
큰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둘째인 아버지가 장손 역할을 하셨다. 아버지는 ‘근면성실’이 몸에 밴 농부였고, 어머니는 언제나 강단 있는 모습으로 집안 대소사를 통솔하셨다. 엄격하고 바르며 소신이 뚜렷한 천생 리더였다. 부모님이 보여주신 삶의 태도는 내 인생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됐다.
우리 8남매의 자녀가 총 32명이다. 이렇게 대가족이 살다 보면 이런저런 애환이 있기 마련인데, 부모님은 형제 중 어려운 일이 생기고 우환을 겪으면 작은 것이라도 꼭 성의를 표시하라고 가르쳤고, 이는 우리 형제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내가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68세의 나이에 위궤양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어머니의 적적함을 달랠 겸 시골집을 개축했다. 본채를 헐고 짓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작은 채에서 지내셨는데 불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주무시다 그만 중풍에 걸리셨다. 당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나는 어머니에게 교회에 나가실 것을 권했다. 다른 이유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간다는 기다림이 어머니에게 살아가는 힘을 될 것 같아서였다. 헛헛함을 달래볼 요량으로 교회 출석이 시작됐지만 어머니 신앙은 날로 깊어졌다. 부흥회 때 현금이 없을 때 자식들이 맘먹고 해준 금가락지, 금비녀 같은 귀한 것들도 아끼지 않고 헌물을 드렸다.
어머니가 한 차례 중풍에서 회복된 지 10여년이 지나고 78세 때 다시 중풍이 발병했다. 이번엔 죽음을 예견하셨는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절대 병원에 가지 않는다. 너희 8남매 모두 출가시켰고 어미로서 소임을 다했다. 저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데 병원에서 주삿바늘 꽂아 놓고 몇 달 더 살겠다고 왜 고생을 하겠냐. 너희들도 객지 생활하느라 바쁜데 어미가 병원에 있으면 되레 수시로 들여다 봐야 할 게다. 그런 일은 안 하련다.”
어머니는 죽음 직전까지도 자녀들의 객지 생활을 걱정하셨다. 어머니는 고향 집에서 미국에 있는 막내 동생을 제외한 7남매가 지켜보고 잔잔하게 찬송이 흐르는 가운데 내 품에서 영면하셨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셨던 어머니, 천국을 확신하시며 죽음을 맞이하신 믿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내 기도 제목은 딱 하나였다. ‘하나님, 어머니의 믿음을 제게도 주옵소서.’
장례는 어머니가 다니시던 고창성북교회 주관으로 진행됐는데 그 과정들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교회를 담임하시던 전대웅 목사님은 집례하는 모든 과정마다 땀을 뻘뻘 흘리시며 정성을 다하셨다. 하얀 상복을 갖춰 입은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은 상여에 하얀 줄을 연결해 1㎞가 넘는 들길을 찬송하며 걸었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온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 소와 돼지를 잡고 문상 오신 분들을 풍성하고 살뜰하게 챙겨주셨다. 온 마을 사람들이 가족처럼 애정을 갖고 장례에 참여해주시면서 그러잖아도 대가족이던 우리 식구는 마치 하나의 작은 민족을 이룬 듯했다. 애도해 주신 모든 분이 어머니가 살아오신 삶을 기리는 말씀을 하실 때마다 어머니가 더 그리웠다. 그 장면들이 평생을 품고 가야 할 감사가 됐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7) 아내는 가치관이나 생활양식 잘 통하는 최고의 동반자
대학 4학년 때 이종사촌 소개로 만나
가식 없는 서로의 진실한 태도에 끌려
반려자로 확신하고 2년 교제 후 결혼
1978년 10월 서울 종로 YMCA 강당에서 부부의 연을 맺은 유이상 풍년그린텍 대표의 결혼식 기념 사진.
젊은 시절부터 어떤 반려자를 만나는 게 가족의 화목에 도움이 될지를 많이 생각했다. 누구든 머리로는 화목하게 살겠다고 생각하지만,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향이 다르면 실제 행동은 생각과 다를 수 있다. 나쁜 사람이라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여러 부분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아내는 가치관이나 생활양식 등에 대해 따로 이해를 구하거나 장황한 설명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냥 통했다.
1976년은 대한민국이 생산한 최초의 승용차 ‘포니(pony)’가 출시된 역사적인 해다. 이 ‘조랑말’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고유 모델의 자동차를 만드는 국가가 됐다. 포니가 대한민국 사람들을 설레게 하며 도로를 달렸듯 나 역시 인생길을 함께 달릴 운명의 조랑말을 만나게 됐다.
아내를 처음 만난 건 1975년, 대학 4학년이던 해였다. 이종 동생은 나와 생각이 잘 맞을 거라면서 자기 친구를 소개해 줬고 그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우리 둘은 결혼 전 만 2년여를 연애하면서 1년에 300여일을 만났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거의 매일 만난 셈이다. 보통의 연인들처럼 다방에서 차를 마시거나 술집에서 술잔을 나누진 않았다. 대신 만날 때마다 꽤 오랜 시간을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당시 나는 마포에 살았고 아내는 마포에 있는 직장에 다녔다. 우리는 마포에서 만나 마포대교를 건너 아내가 살던 구로동 쪽으로 걸으며 하염없이 대화의 행복을 누렸다. 아내는 너무 많이 걸어서 구두 굽을 수없이 갈았다고 연애 시절을 추억하곤 한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가끔 돼지고기 연탄구이 집에 가서 수다 떨며 고기 한 점을 주고받는 게 소박한 행복이었다. 그야말로 가식 없이 서로 진실한 태도를 향한 시선이 꽂혔던 연애 과정을 지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하며 서로를 인정하곤 한다. 시쳇말로 뜨겁게 사랑을 나눴다기보다는 서로의 삶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 했고 인생이란 경주를 함께 손잡고 달려갈 반려자로 안성맞춤이라고 말이다.
젊어서부터 견지했던 생각 중 하나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받는 게 진정한 성공’이란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가장 가까이 머무는 사람이 나를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아내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남편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게 똑같은 사람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그랬다. 한 마디라도 약조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와 내 앞에서 하는 행동이 한결같다. 술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거니와 늘 착실함을 엿보였다.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가 확실한 사람이어서 믿음이 갔다.”
과분하게 감사한 평가다. 내게 가장 가까운 편에 서 있는 이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이다. 그렇게 선하고 야무지며 소박한 품성을 소유한 아내와 1978년 10월 7일 종로에 있는 YMCA 강당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8) 박스 공장 인수… ‘풍년기업사’ 이름 걸고 생애 첫 사업
막 시작하는 공장 관리직 직원으로 취직
적자 나자 사장으로부터 인수 제안 받아
유이상 풍년그린텍 대표가 경기도 안산 계란판 공장에서 제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안산=신석현 포토그래퍼
“주변에 박스공장에서 책임자로 일할 괜찮은 친구 있으면 좀 소개해 줄 수 있겠나. 이제 막 시작하는 공장인데 관리직 직원을 찾는 분이 있거든.”
신문 배달을 하며 서울 홍제동에서 형님 가족과 세 들어 살고 있을 때였다. 집주인은 잘 아는 인쇄소 사장이 박스공장까지 하게 돼 사람을 구하고 있다며 소개를 부탁했다. 알고 보니 인쇄소 사장은 박스공장에 인쇄물을 납품했는데 대금을 받지 못하게 돼 그 공장에서 박스 만드는 기계를 가져와 운영하게 됐다는 것이다. 고정 거래처가 있는 만큼 사업 영역을 넓혀 보고 싶었던 셈이다.
나는 지인 소개 대신 공장 관리직 직원으로의 도전을 택했다. 사실 월급은 신문 배달하며 받던 것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도전을 택한 건 당시 제조업 분야였던 박스 제작에 성장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1976년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 곡선은 가파르게 상승 중이었다.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대적 상황이 제조업 분야에서 놓칠 수 없는 호기라 판단했다.
하지만 아무런 경험 없이 공장을 책임지기에 나는 많이 부족했고 사장님 역시 박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서 흑자를 내진 못했다. 결국 사장님은 결단을 내렸다. 박스공장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예상치 못했던 기회가 찾아왔다. 사장님이 내게 박스공장 인수를 제안한 것이다. 인수 조건은 두 가지였다. 인수 대금으로 박스 제조 기곗값 250만원을 지불하고 나이가 많아 은퇴한 자신의 형님에게 월급을 지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인수자금 확보가 문제였지만 백방으로 뛰어 자금을 융통했다. 생애 첫 사업의 시작이었다.
공장을 인수하면서 회사 이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주 거래처였던 세광알미늄은 당시 최고 히트 상품 풍년압력솥을 생산하고 있었다. 나 같은 농촌 출신들은 ‘풍년’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기분이 좋아진다. 노랗게 익어 가는 가을 들판의 넉넉함이 배어 있다. 사업을 시작한 78년은 정부에서 쌀 자급 시대의 개막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해이기도 하다. 나의 삶도, 국민의 삶도 모두 넉넉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회사 이름을 ‘풍년기업사’로 정했다.
그해 3월 15일. 나의 첫 회사이자 풍년그린텍의 모태가 된 풍년기업사의 개업식이 열렸다. 교회에 다니지 않을 때였기에 눌린 돼지머리 고기와 막걸리, 떡을 놓고 손님들을 초대했다. 세광알미늄 회장님이셨던 고 유병헌(도림교회) 장로님도 참석해주셨다. 당시 유 장로님의 형님이 도림교회를 담임하시던 유병관 목사님이었고 장로님의 부인도 권사로 신앙생활하고 있던 터였다. 사업의 시작이 신앙의 시작과 자연스레 맞닿게 된 배경이다.
세광알미늄이라는 안정적인 거래처를 기반으로 출발하긴 했지만, 소규모 제조업체로 사업을 시작한 나로선 물건을 납품하는 입장에서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포장 박스 납품이라는 사업의 특성이 결국 사업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9) 거래처 담당자의 부당한 납품 갑질에 사업 접을까 고민
수익 많지 않고 경쟁 심한 포장박스사업
납품처 결정은 담당자 심사에 따라 좌우
무리한 요구 거절하자 주문량 점점 줄여
유이상 풍년그린텍 대표가 경기도 안산 계란판 공장에서 제품 생산 공정과 유통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안산=신석현 포토그래퍼
포장박스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거래처에서 어떤 주문을 하든 대부분 맞출 수 있다. 그만큼 경쟁이 심한 사업 분야라는 뜻이기도 하다. 풍년기업사 같은 납품업체는 거래처에서 주문을 받아 생산하면 수익이 나는 품목 외에 별 수익이 없는 몇 가지 제품도 같이 제작한다. 수익이 별로 나지 않는 품목도 주문을 받는 이유는 이익을 내는 품목의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납품처를 결정하는 담당자의 의사 결정이다. 담당자에게 밉보이면 수익이 나는 주문을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담당자가 수익 나는 주문의 견적을 받고, 자신이 밀어주려는 업체에게는 그보다 낮은 가격의 견적을 받는다. 자연스럽게 밉보인 기존의 업체는 견적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아무리 사장과 친분이 있다 해도 견적에서 차이가 나면 어떤 사장도 우리 회사를 납품업체로 선정하기 힘들다. 이런 구조에서 납품업체들은 담당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뒷거래도 서슴지 않는다. ‘납품’이란 구조는 시스템으로 투명성을 확보하지 않는 한 이 같은 비리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늘 마음의 갈등이 있었다. 사장은 나를 신뢰하고 일을 맡기는데, 내가 담당자에게 뒷돈을 주고 납품을 계속하게 해 달라고 해야 할까. 결정권을 가진 담당자는 자신의 힘을 믿고 납품업체에 이런저런 무리한 요구를 하고,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사장에게 “납품업체에 문제가 많다”고 험담을 하면서 업체를 바꾸려고 한다. 회사의 신뢰도와 제품의 경쟁력, 직원들의 성실함과 실력이 아닌, 담당자의 심사에 따라 계약이 좌우된다는 현실이 너무 큰 안타까움으로 느껴졌다.
담당자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다 보니 고수익이 나는 주문은 점점 줄어들었다. 별로 수익이 나지 않는 소량의 품목들을 주문받았을 때는 손해가 나더라도 장래를 내다보고 울며 겨자 먹기로 감수해야 했다. 한 회사와 오래 거래를 하다 보면 포장박스의 수요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주문량이 적은 포장박스도 어느 시점에 소진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제작해 둔다. 그런데 담당자의 마음이 바뀌어 그마저도 제작업체를 교체해 우리 회사에 주문하지 않으면, 그 재고는 모두 우리 회사가 떠안아야 하는 손실이 되고 만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서서히 포장박스 사업에 매력을 잃어 갔다.
영세한 사업장엔 운영자금이 항상 부족했다. 기계도 시설도 좋지 않으니 좋은 거래처를 얻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중 봉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던 대형 회사에 새로 납품을 하게 됐다. 우리 회사는 수출용 골판지로 박스를 만들어 납품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장에서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그 회사와 거래하던 업체들이 조용히 거래를 정리해 가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던 나는 속사정은 전혀 모른 채 큰 회사라는 것만 보고 거래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엔 현금 결제 대신 결제 대금을 4~5개월짜리 어음으로 받았다. 그 회사에 5개월간 납품을 했는데 일이 터졌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10) 납품한 업체 부도로 인생 최대 위기… 3년 반 만에 재기
납품 5개월 만에 휴지조각이 된 어음
실질적 피해 입은 원자재 공장 찾아가
공장 설비 담보로 상환시기 유예 요청
각고의 노력으로 4200만원 모두 상환
유이상 풍년그린텍 대표가 경기도 안산 계란판 공장에서 폐지가 어떤 공정을 통해 계란판으로 제작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안산=신석현 포토그래퍼
어음을 받고 납품을 한 지 5개월 만에 상장업체였던 기업은 허망하게 부도가 났다. 받아 뒀던 어음은 휴짓조각이 됐다. 무려 4200만원어치였다. 1981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한 채가 3000만원에 거래되던 때였다. 이른바 대기업 부도와 함께 하청업체들이 연이어 도산하는 연쇄도산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내가 가진 전 재산을 털어도 감당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인생 최대 위기였다. 아마 그런 부도를 맞게 된다면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개의 경우는 그런 상황에서 그 바닥을 떠나 종적을 감추고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위장해 살아가거나 감옥에 가게 된다.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면 3차 피해자가 또 생길 것이 뻔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이 위기에서 도망치지 않고 수습할 길을 찾아야 했다.
우리 회사가 받은 어음은 박스를 만드는 원자재인 골판지 공장에 물품대로 지불했기 때문에 현실적 피해는 골판지 회사로 돌아갔다. 굳게 결심을 하고 골판지 공급업체 사장을 찾아갔다.
“사장님. 어떻게든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돈을 벌어서 갚겠습니다. 우리 회사의 박스 제작 설비가 좋은 기계는 아닙니다만 공장 설비를 양도받으시고 대신 원자재를 계속 공급해 주십시오. 완전히 상환하게 되는 날 설비를 다시 양도받겠습니다.”
내가 부도를 내고 잠적해 버리는 경제사범이 되지 않고 어떻게든 사안을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명의만 내 이름이었을 뿐 모든 권한을 골판지 회사에 넘겼다. 사장님은 부도 금액의 5분의 1도 안 되는 우리 공장 설비를 담보로 원자재를 공급해 주고 내게 상환 시기를 유예해줬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주신 덕분에 매달 발생하는 수익으로 골판지 회사에 조금씩 상환할 수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날이 허다했다. 끼니를 거르고 차비를 걱정하며 구두 뒤축이 닳도록 뛰어다닌 나날들이다. 그렇게 3년 반을 끊임없이 경주한 끝에 4200만원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결국 ‘풍년기업사’가 살아남은 것이다. 3년 반 만에 마지막 부채를 모두 상환하던 날 골판지 회사 사장님과 한 중국집에서 마주 앉았다. 사장님은 짜장면 먹던 젓가락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유 사장만 같으면 그래도 사업할 만하겠어.”
사업 시작한 지 3년 만에 겪은 부도, 부도 상황을 정리하는 데 걸린 3년 반의 시간, 그리고 오늘까지 나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밑바닥에 떨어졌다가 재기하는 3년 반 동안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고 원망하거나 한탄한 적은 없었다. 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은 기쁨을 알지 못한다. 어려움을 헤치고 일어난 사람만이 감사하는 법을 배운다. 밑바닥이라고 느껴질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이 시련이 나를 더 단단하게 해줄 것이라고, 또 내가 속한 공동체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기초라고 생각했다.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자세. 하나님께선 내게 다른 달란트를 주신 게 아니라 그와 같은 긍정적인 태도를 주신 게 아닐까 싶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11) 생후 22개월, 내게 신앙 주고 떠난 첫 아들 희웅이
감기로 병원 갔다 희귀병 진단 받은 후
손쓸 틈 없이 뇌에 바이러스 퍼져 악화
발병 24시간 만에 기능 장애로 숨 거둬
유이상(왼쪽) 대표가 1990년 캐나다 여행 당시 아내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온 가족이 함께한 이 여행을 통해 그는 돈이 행복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1978년 3월 풍년기업사를 개업하고 그 이듬해 사랑스러운 딸 세인이를 낳았다. 30대 초반 가장의 삶에 본격적인 시작을 맞은 것이다. 아내는 나의 그 시절을 ‘무던히 열심히 살면서 항상 뛰어다녀서 구두 뒤축이 다 닳았던 때’로 기억한다.
부족한 돈으로 사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새벽에 나가면 한밤중에 들어오는 일이 예사였다. 눈앞의 일과 돈을 좇느라 주변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온 정신이 사업에만 팔려있었다. 아내는 집안 살림에 육아까지 모두 짊어진 채 묵묵히 내조를 했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희웅이가 감기에 걸린 것 같아요.”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애들이 자라면서 감기도 좀 걸리고 그러는 거지’ 싶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낌새가 들었는지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동네 소아과로 달려갔다. “얼른 큰 병원에 가보십시오.”
아들은 급히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걷잡을 수 없이 상태가 나빠졌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숨을 붙이고 있었다. 의사는 알아듣기도 힘든 병명을 말하며 뇌에 바이러스가 침투해 기능 장애가 왔다고 설명했다. “생존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희웅이는 증세가 나타난 지 24시간이 채 되지 않아 숨을 거뒀다. 생후 22개월 만이었다. 형님과 친구들이 희웅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수습했다. 아내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에 앉아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일찍 부모를 떠나 서울에서 혼자 객지 생활을 하면서 집 없고 배고픈 나날들을 많이 겪었지만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던 나였다. 아내의 어깨를 다독이며 쉬이 멈추지 않는 눈물을 삼키고 또 삼켰다. 태어나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그 날, 아이를 잃고 나서야 내가 부모임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께서 내 가슴에 새겨준 사건이었다.
첫아들 희웅이는 짧은 시간 내 곁에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아들 노릇을 하고 갔다. 내게 신앙을 주고 간 것이다. 아들을 잃은 뒤 나는 오늘을 살고 있지만 내 생명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신앙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아들을 잃은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 후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당시 출석하던 교회 목사님께선 우리 아들에게 성은(成恩)이란 이름을 지어주셨다.
우리 가족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을 묻는다면 아마도 1991년 캐나다를 떠올릴 것이다. 사실 당시 형편이 좋지 않아 혼자 가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가족 모두가 함께 가는 것으로 신청을 했다.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회원들과 동행하는 일정이었는데 알고 보니 전체 40여명 중 자녀와 함께한 가족은 우리를 포함한 네 가정뿐이었다.
대형버스를 타고 2000㎞ 정도를 여행했는데 버스 안에서 회원들의 간증이 이어졌다. 그중 평창동 저택에 살며 모든 가족이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던 부유한 가정이 있었다. “허름한 단칸방에 살아도 우리 가족만의 삶을 살아 보는 게 소원이에요.” 마이크만 잡으면 눈물을 쏟아내 말을 잇지 못하는 그 부인의 모습을 보며 돈이 행복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12) 안산 반월공단에 공장 분양… 청년CBMC 안산지회 개척
거래처 유대표의 CBMC 모임 초대받은 후
꾸준히 참석하며 기독 사업가로 원칙 지켜
유이상(왼쪽) 풍년그린텍 대표가 1998년 9월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안산지회 설립 감사예배에서 지회 깃발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아들을 잃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시작했을 즈음 우리 회사의 가장 큰 거래처인 세광알미늄 유재원 대표가 서울 광화문 코리아나호텔에서 행사가 하나 있다며 초청장을 건넸다. 행사는 한국기독실업인회(CBMC)의 청년 지회 회원 확대 만찬이었다. 청년기독실업인회(YCBMC)는 부친들이 CBMC 활동을 하면서 2세들을 위한 모임으로 창립한 단체였다. 대성그룹, 벽산그룹 등 내로라 하는 회사 2세가 모이는 45세 미만의 젊은 그룹이었는데, 1987년만 해도 우리 회사는 그 자리에 모인 회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회사였다.
무엇이든 한번 시작하면 꾸준히 하는 편이라 CBMC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CBMC의 7가지 핵심 가치 중 첫 번째로 제시하고 있는 ‘성경적 원리가 사역과 사업의 기준’이 모든 크리스천 사업가의 고민과 해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성경적 원리와 원칙대로 사업하며 생존하기에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난무하던 시절이었고 사회에 투명한 곳이 드물었다. 크리스천 사업가로서 항상 거룩한 부담을 갖고 살아야 했다.
93년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 2차 공장 분양이 있었다. 계약금만 내면 분양을 받을 수 있어서 분양 신청을 하고 대지 1500평을 받았다. 그때 서울청년기독실업인회 측에서 제안을 해왔다. 안산 공장 땅도 분양받았으니 안산 CBMC를 개척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거룩한 부담이었다. 하지만 오랜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고인 된 이충구 천세산업 사장과 함께 안산지회를 세웠다. 지회 파송 예배 당시 CBMC 중앙회장을 맡고 있던 강성모 린나이코리아 회장님이 격려금 30만원을 챙겨주셨는데 파송예배를 드리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 회사 공장 짓는 일만으로도 벅찬데 CBMC 안산지회 설립까지 맡다니….’ 그날로 새벽기도에 나섰다.
기도 끝에 화분을 하나씩 사 들고 안산 지역 명망이 있는 교회들을 찾아갔다.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CBMC 안산지회 설립을 알리고 동역할 사업가를 두 명씩만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유는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알게 됐다. 목사님들 중엔 교인들이 외부 활동하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
다행스러운 건 두 분의 목사님께서 동역자를 보내주셨다는 것이다. 김인중 안산동산교회 목사님과 김학중 새안산교회(현 꿈의교회) 목사님이었다. 두 동역자가 마중물이 되어 8명이 함께 청년CBMC 안산지회를 출범시켰다.
전도에 능숙하지 않았던 내게 CBMC 활동은 하나님이 주신 ‘맞춤 전도옷’ 같았다. 회원들이 모여 성경공부도 하고 중보기도 시간을 갖기도 했는데 하루는 한 회원이 자기 회사 독일 기계가 고장을 일으켜 어려움이 있으니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시간이 되는 몇몇 회원과 그 회사를 방문해 기계에 손을 얹고 합심해 기도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온몸이 떨리며 전율이 왔다.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멈춰 있는 기계가 정상 작동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13) 사업 변신의 길 모색 중 ‘펄프몰드’에 눈길 사로잡혀
세계 포장박람회서 ‘펄프몰드’ 관람 후
친환경적이고 재활용 가능한 점에 끌려
미래 풍년기업사의 새로운 활로로 구상
풍년그린텍에서 펄프몰드(pulp mold) 방식으로 제작되는 계란판 공정 모습. 안산=신석현 포토그래퍼
1990년대 초중반 포장박스 제조업은 돈과 인맥만 있으면 누구나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소위 진입 장벽이 낮은 사업 영역이었던 셈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풍년기업사는 시설이 좋은 것도 아니고 자본이 확실해서 포장박스의 원자재를 저렴하게 확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접대를 하거나 뒷돈을 주는 등 담당자에게 계산된 호의를 건네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우리 회사를 잘 소개해 주더라도 납품으로 연결되는 일이 별로 없어 힘이 들었다.
당연히 수익이 별로 안 나는 주문만 받기 십상이었다. 회사가 생겼다가 금세 문을 닫는 일도 잦아서 납품 대금을 떼이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수시로 부도 위기에 내몰리거나 납품업체가 부당한 요구를 하는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포장박스 사업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하나님, 포장박스 사업하는 거 너무 힘듭니다. 우리 회사 직원이 뒷거래가 있는 업체에 주문을 받는다면 저는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작은 바늘을 만들어 팔더라도 당당하게 제 물건을 팔게 해 주십시오. 제 기술로 양질의 제품을 만들어 당당하고 떳떳한 사업을 하게 해 주세요.”
답답함이 깊어질수록 기도는 더 간절해졌다. 그리고 변신의 길을 모색했다. 이는 과감한 변신, 아니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여건이 전혀 안 되는 상황에서 시도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말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을 주셨다.
고민이 깊어지던 중 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포장박람회 팩 엑스포 인터내셔널(Pack Expo International)을 방문하게 됐다. 포장재 산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팩 엑스포는 세계 3대 포장박람회 중 하나로 포괄적인 대규모 패키징 박람회로 유명하다.
첫날 혼자서 전시장 곳곳을 둘러봤다. 아이디어 넘치는 신기한 첨단 포장 기술과 포장재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양한 패키징 기술과 포장재들을 구경하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다. 폐지를 이용해 모양을 만드는 펄프몰드(pulp mold)였다. 펄프몰드로 만든 다양한 포장재들을 보고 관심이 생겨 짧은 영어를 동원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펄프몰드는 폐지를 물에 녹여 액체처럼 만든 후 금형으로 모양을 만들고 건조시켜 완성된 제품을 포장재나 완충재로 사용하는 것이다. 포장재나 완충재로 사용한 스티로폼이나 플라스틱이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를 일으키면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제품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펄프몰드는 사용 후 재활용, 소각 등 처리가 용이해 환경친화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한국에도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스티로폼 포장재에 대한 규제가 생기고 스티로폼을 대체하는 포장재에 대한 관심이 막 생기기 시작하던 때였다.
‘바로 이거다. 풍년기업사에 업그레이드 날개를 달 수 있는 열쇠다!’ 다음 날 펄프몰드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시카고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서 경제기획원 공무원으로 유학 중인 친구에게 통역을 부탁하고 함께 전시장을 다시 찾았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14) 가능성 확인한 ‘펄프 몰드’… 계약 성사 위해 심혈
공장 견학하며 ‘펄프 몰드’ 관심 어필 후
한국 공장으로 기술 전수 해 달라 요청
유이상(왼쪽) 풍년그린텍 대표가 1993년 세계 포장박람회가 열린 미국 시카고에서 펄프 몰드 회사 사장 가정을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통역을 위해 동행해 준 친구와 팩 엑스포 인터내셔널(Pack Expo International)전시장 내에서 방문한 곳은 독일계 미국인이 운영하는 펄프 몰드(pulp mold) 회사였다. 회사 관계자를 만나자마자 한국에서 펄프 몰드 포장재를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술 이전 등에 대해 줄기차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생산 공정을 직접 볼 수 있도록 공장 견학을 요청했다. 펄프 몰드 포장 산업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공장 견학은 어려울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진돗개 기질이 발동했다. 나흘 동안 열리는 엑스포 마지막 날, 다시 펄프 몰드 회사 부스를 찾아가 공장 견학을 간곡히 요청했다. 처음에는 강경하게 반대 의사를 표하던 관계자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결국 회사 관계자는 견학을 허락했고 3시간쯤 후 우리는 함께 공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공장은 가동 중이었다. 엑스포 부스에서 채 물어보지 못했던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고 펄프 몰드 포장재에 관심이 있다는 진심을 말했다. 더불어 우리는 한국에서 이 사업을 할 예정이라 그 회사의 경쟁 상대가 아니니 기술을 전수해달라고 요청했다.
뜻밖에도 펄프 몰드 회사 사장은 한국과 인연이 있었다. 사장의 딸이 아이 둘을 입양해 키우고 있었는데 모두 한국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태권도장에서 태권도를 배우고 있었다. 그 사장은 직접 손자들을 태워다 주곤 했던 터라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펄프 몰드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자 사장은 자기 손자들이 다니는 태권도장의 이재규 관장을 소개해줬다. 미국 땅에서 사업의 명운이 갈릴 수 있는 시기에 언어 소통의 답답함이 짓누르고 있을 때 만난 한국인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 느껴졌다.
이 관장은 멀리 한국에서 온 사업가에게 큰 도움을 줬다. 적극적이고 배려심이 몸에 밴 분이었다. 그는 호텔에 묵지 말고 자기 집으로 가자면서 가방을 손수 옮겨줬다. 공장도 자기가 몇 번이고 데려다줄 테니 마음 놓고 잘 견학하라고 독려해줬다. 운영하는 기업에 놓칠 수 없는 기회를 발견했다고 느꼈기에 나는 수차례 견학과 질의에 나섰고 그럴 때마다 이 관장에게 신세를 졌다.
이 관장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에 펄프 몰드 회사에 풍년기업사 사장으로서의 관심을 충분히 피력할 수 있었다. 사장이 한국과의 인연이 남다르기도 하고 나의 적극적인 노력을 알기 때문에 계약까지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들은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선을 그었다.
그 후로도 나는 다섯 차례 미국을 오가며 계약 성사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기계 판매와 기술 이전이 함께 이뤄지는 까다로운 사업 계약이었기에 미국 회사도 치밀하게 협상에 나섰다. 자신들의 수익과 우리의 지불 능력을 철저하게 계산한 협상 끝에 30만 달러의 각서와 계약서를 작성했다.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좋아. 이제 돈만 지급하면 펄프 몰드 사업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는 거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15) 대출 막혀 계약 물거품… 미국서 기술 산 호주 회사 수소문
펄프 몰드 기술 보유한 회사 찾았지만
낮은 수익성과 화재로 사업 접은 상태
당시 제작했던 기술자 찾아 사업 물꼬
풍년그린텍 안산 공장에서 펄프 몰드 방식으로 계란판이 제조되고 있는 모습. 안산=신석현 포토그래퍼
당시 30만 달러는 우리 회사에 굉장히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하지만 꼭 펄프 몰드(pulp mold) 기술을 도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한국에서는 계약 전 대출을 타진했고 은행에서도 별 문제 없이 대출해 줄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막상 계약하고 나니 은행이 한발 물러나 대출 불가 결정을 내렸다. 낭패였다. 1차로 지급해야 할 대금을 미국 회사에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계약은 파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1년 뒤, 다시 그 회사를 찾았을 때 그들은 30만 달러 분할 지급 방식이었던 것에서 입장을 바꿔 50만 달러 일괄 현금 지급을 요구했다.
‘세상에. 30만 달러를 5년 걸려 분할 지불하기도 힘든데 일시불로 50만 달러를 달라니.’ 우리 회사 형편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5번이나 미국을 방문하면서 작성한 계약은 그렇게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펄프 몰드 사업은 꼭 해 보고 싶었다. 야심 차게 도전했던 일이라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펼프 몰드 회사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던 건 공장의 시스템이었다. 한국은 종이 만드는 회사는 종이만, 박스의 원자재가 되는 판지 만드는 회사는 판지만, 박스 만드는 회사는 박스만 생산했다. 제지공장 판지공장 박스공장 등 3단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미국 회사를 보니 그 3가지를 모두 제지공장과 계열사에서 소화하고 있었다. 이것이 매우 합리적인 방식으로 여겨졌다.
계약은 무산됐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그때 미국 회사와 계약할 때 미국 측 자문 변호사가 다른 회사와의 계약서라며 초안을 보여줬던 일이 떠올랐다. 계약서 사본은 중요한 회사 정보들을 매직펜으로 지운 상태여서 내용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시 변호사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힐끗 계약서를 보고 회사 이름을 메모해뒀던 게 생각난 것이다. 당장 메모장을 찾았다. 그러곤 회사 이름과 호주에 있는 펄프 몰드 회사를 대조해가며 수소문을 시작했다. 코트라(KOTRA)에도 수차례 확인 요청을 했다.
그렇게 결국 미국 회사가 펄프 몰드 기술을 팔았던 호주 회사를 찾아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고 했다. 그길로 호주로 날아가 회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술을 산 호주 회사는 펄프 몰드 사업을 접은 상태였다. 예상보다 수익성이 떨어진 데다 공장에 불이 나서 더 이상 사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호주 회사와 사업을 계약해 보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또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귀국해 기도하던 중에 호주 회사에서 펄프 몰드 기계를 다뤘던 기술자를 찾으면 뭔가 해법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호주로 갔다. 미국 회사에서 도면을 받아 펄프 몰드 기계를 제작했던 기술자를 찾아냈다. 펄프 몰드 사업을 여는 첫 번째 입구의 열쇠를 확보한 기분이었다.
호주와 한국을 6번 오가며 펄프 몰드 기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호주에서 제작해 들여오고 도면 구입 비용으로 5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계약했다. 오로지 펄프 몰드 사업을 하고 싶다는 열망, 그리고 무모함에 가까운 도전 의식이 낳은 성과였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16) 펄프 몰드 후발주자 풍년그린텍, 계란판 시장 업계 1위로
이미 최신 시설·규모로 선점한 큰 회사
무리한 투자로 자금 압박에 부담 늘어
유이상 풍년그린텍 대표가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계란판 공장에서 제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안산=신석현 포토그래퍼
깨지기 쉬운 아주 작은 물품을 깨지지 않도록 대량으로 보관하거나 운송할 때 완충재의 역할은 더 분명해진다. 풍년그린텍이 만드는 계란판이 대표적이다. 1960년대만 해도 시장에서 계란을 팔 때는 볏짚으로 만든 줄계란으로 유통됐다. 하지만 수백만 개의 계란을 운송해야 하는 이 시대에 줄계란이 유통될 수는 없다. 전국 양계 농가에서 나오는 계란을 소비자에게 안전하게 배송하려면 계란이 깨지지 않도록 안전한 방어막이 필요하다. 그 방어막이 계란판이다.
풍년그린텍은 한 달에 많게는 계란판 3500만장 이상을 생산한다. 생산된 계란판은 물 99%에 종이 1%를 섞어 곱게 갈아 만든 펄프 몰드(pulp mold)로 만들어진다. 1997년 당시 계란판은 모두 플라스틱이었고 이미 상당한 최신 시설과 규모를 자랑하는 큰 회사들이 펄프 몰드 계란판 시장에 진출해 있었다. 풍년그린텍은 1년 정도 후발주자였지만 지금은 계란판 시장의 업계 1위 자리를 공고히 다지고 있다.
20년이 흐르는 동안 꽃길만 펼쳐지지는 않았다. 돌밭, 가시밭길이 수시로 튀어나와 한시도 긴장을 풀어 본 적이 없다. 펄프 몰드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진단한 건 우리 회사만이 아니었다. 몇몇 회사들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설비를 갖추고 많은 인력을 고용해 펄프 몰드로 생산하는 계란판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수백억 원씩 투자한 만큼 계란판으로 수익을 내려면 계란판 단가를 낮출 수가 없었다. 고가의 기계에 대한 감가상각도 부담이었다. 무리하게 투자한 기업들은 사방에서 자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인건비도, 투자 상환 시점이 도래하는 것도 더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반면 풍년그린텍은 기계를 자체 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계와 설비에 대한 투자 비용을 낮출 수 있었다. 게다가 계란판과 병행하던 박스 제작 사업에서 남은 종이를 계란판 제작에 사용할 수 있어 원가 절감도 가능했다. 은행 대출로 고가의 기계를 구입한 회사들은 하나씩 도산 위기에 몰렸고, 파산한 회사가 갖고 있던 고가의 기계들이 고철값에 나왔다. 아무리 성능 좋은 기계 설비라 해도 정말 필요한 곳에 가지 않으면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제빵사에겐 오븐이 필요한 기계지만, 시루떡을 파는 가게 입장에선 쓸모없는 기계인 것처럼 말이다. 풍년그린텍 입장에선 헐값에 시장에 나온 펄프 몰드 기계를 저렴하게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2003~2004년엔 다른 공장에서 쓰던 기계를 10대 이상 구입했다. 당시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제작된 검증되지 않은 기계들도 샀는데 가동해보면 실제로 우리 회사에서는 쓸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우리 회사의 생산 전략과 용도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실패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방식이 전혀 다른 타입의 중고 펄프 몰드 기계를 다 뜯어서 새로 개조해보고 재가동하는 피땀 어린 과정을 통해 풍년그린텍은 기회비용을 훨씬 초과하고도 남을 실력과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돌아보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한 주님의 기업과 일꾼들에게 하나님이 지혜와 용기를 주신 것 같다. 하나님은 순전한 마음으로 노력하는 우리 모습을 지금도 보고 계신다고 믿는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17) ‘겨자씨’ 초대 이사장 맡아 주님 주신 소명 기쁘게 감당
장애아를 친자식처럼 돌보는
원장의 모습에 감동해 후원하던 중
재단 지원 받아 시설 재건축 소식 듣고
건축 허가부터 법인 설립 등 난관 해결
유이상(앞줄 오른쪽 세 번째) 풍년그린텍 대표가 2009년 7월 사회복지법인 겨자씨 발족식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외형적으로 고도성장을 하던 대한민국은 1997년 IMF 금융위기를 당해 전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풍년그린텍도 자금과 기술이 부족한 상태에서 새로운 사업 펄프 몰드를 시작해 난관에 봉착하던 시기였다. 당시 차를 타고 가며 기독교 방송을 듣는데 우연히 어떤 분이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친구들과 생활하는 모습이 소개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내용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경기도 북부 어디쯤 동네 이름이 ‘발랑리’라는 게 어렴풋이 떠올라 수소문 끝에 파주 광탄면에 동네가 있다는 걸 알아냈다. 전화번호도 모르고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라 순전히 지도에 의지해 찾아갔다. 차량 통행이 뜸한 좁은 도로 위엔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의 눈까지 내렸고 제설작업도 돼 있지 않아 안산에서 꼬박 4시간이 걸렸다.
기관에 방문했을 때 그곳 아이들은 동그란 상에 놓여 있는 양푼 하나에 밥을 비벼 6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몸에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몸놀림도 어눌하고 언어 구사도 어려웠다. 그중 한 아이가 숟가락으로 밥을 먹다 바닥에 흘렸는데 곁에 있던 한 여성이 주워 자기 입으로 가져가는 게 아닌가. ‘요즘 엄마들은 자기 아이가 흘린 밥도 안 먹는데….’ 그 여성이 지금의 겨자씨사랑의집 박미종 원장이다.
감동을 줬던 첫 만남이 인연이 되어 분기에 한 번씩 그곳을 찾았다. 어느 초여름 날 방문했을 때 한 재단의 지원을 받아 그 집을 헐고 새로 건축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녹록지 않을 건축 과정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겠다고 약조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건축 허가부터 주변 땅 소유자들과의 마찰, 도로 개설 등 숱한 난관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기업 운영으로 분주한 가운데서도 이 일은 꼭 열매를 맺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소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눈앞에 놓인 과제들을 해결해나가고 건축 과정에서 사기당할 뻔한 일을 막기도 했다. 기관을 좀 더 견고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법인화하는 과정에도 힘을 보탰다. 6명이었던 원생이 늘어나면서 정부의 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로 겨자씨사랑의집을 운영하는 것이 점점 힘든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법인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우선 2년 동안 직원들의 급여와 원생들의 생활비가 미리 마련돼 있어야 법인 설립 허가 요건이 충족됐다. IMF 직후라 풍년그린텍도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았던 데다 거리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쁜 마음으로 모든 일을 감당했다. 매달 지속적으로 도우면서 주변 이웃들에게도 알려 후원과 봉사로 이어지게 하는 게 초대 이사장으로서 내게 맡겨진 중요한 역할이었다.
아이들에게 진심이었던 박 원장의 변치 않는 모습도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정신지체 발달장애아들이라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폭력을 행사할 때도 있었지만 박 원장은 늘 아이들을 차분하게 달래며 친어머니처럼 양육했다. 박 원장이 고맙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격려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저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며 동역의 길을 걷는 겁니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18) 공장 큰불로 전소…“주님, 불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근길 김제공장 화재 소식 듣고 달려가
처참한 현장 보며 모두 주님 뜻이라 생각
큰 손실 났지만 직원들과 함께 감사기도
2012년 1월 전소된 풍년그린텍 김제 공장 모습.
2011년 11월은 유난히 바빴다. 풍년그린텍 김제 공장에서 일이 바쁘게 돌아가고 옆의 대지 3000평에 건물 1000평 되는 공장 하나를 경매로 낙찰받아 회사를 확장하는 시기였다. 언제나 분주함과 활기가 넘쳤다. 그해 설날엔 성과급도 100% 챙겨 주겠다고 직원들에게 약속한 터라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던 때였다. 그렇게 희망찬 꿈에 부풀어 2012년을 맞았다.
1월 2일 오전 6시 안산 공장으로 출근을 서둘렀다. 머릿속에는 시무식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양재나들목에서 과천 방향으로 우회전하는데 새벽부터 길이 꽉 막혀 있었다. 평소 새벽 시간엔 막힌 적 없는 구간이라 의아했다. 잠시 후 보게 된 건 대형 교통사고 현장이었다. 자동차 여러 대가 완파돼 엉켜 있었다.
‘저들 모두 새해 새 꿈을 갖고 길을 나섰을 텐데 어쩌다 이런 변을 당했을까.’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차 안에는 늘 그랬듯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라북도 김제시 오정동 계란판 공장 화재로 공장은 전소됐고 현재 잔불 정리 중입니다.” 잠시 멍했다. 우리 회사 풍년그린텍 김제 공장의 화재 소식이 분명했다.
안산 공장에 도착해 보니 공장은 가동 중이었고 관리 책임자들은 급히 연락을 받고 김제 공장으로 내려가 있었다. 직원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나 역시 서둘러 김제로 향했다. 오전 10시, 아직도 공장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소방차 3대가 잔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전라북도 내 소방차가 모두 출동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새해 벽두에 날아든 날벼락이었다. I빔으로 지은 1600평 규모의 건물은 엿가락처럼 휘어진 채 주저앉아 폐허가 돼 있었다. 하지만 처참했던 현장과 달리 마음은 의외로 차분해졌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하나씩 떠올랐다.
재산 손실은 100억원 정도로 추산됐다. 공장 부지 6000여평에 보이는 것이라곤 재뿐이었다. 모든 게 타버렸다. ‘내 능력이 부족하니 김제 공장은 포기하라는 하나님의 예시일까.’ 경매로 받은 옆 공장의 잔금과 기계 처분, 구조 변경 문제 등이 스쳐 지나갔다. 직원들 모두 막막하고 허탈한 표정이었다. 평소 공개적으론 회사에서 기도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이날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기도라는 생각뿐이었다.
회사 전 직원들을 모아 둥글게 둘러선 채 손을 잡았다. 기독교 신앙이 없는 직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두 한마음인 듯했다. 그러곤 큰 소리로 함께 기도했다. 직원들이 황당하게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기도의 시작은 감사였다. “하나님, 저희가 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서 한번에 불태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회사를 인수해 기계를 고치면 양질의 제품을 생산할 줄 알았는데 예비하신 길이 아니었나 봅니다. 기계를 고치기보다 저희의 기술력으로 새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는 게 더 나은 길임을 보여주신 것이라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추운 겨울입니다. 모든 직원이 하나 되어 속히 복구해 어려움을 겪는 양계 농가를 도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역경의 열매] 유이상 (19) 기도와 격려의 힘으로 전소 4개월 만에 공장 재가동
투자한 돈 아까워 ‘계륵’ 되어버린 공장
갈등하다 뜻밖의 화재로 골칫거리 해결
경찰조사·보험문제도 순조롭게 잘 풀려
2012년 1월 화재로 불탄 풍년그린텍 김제 공장 외부 모습.
공장이 전소됐는데 잿더미 위에서 감사 기도라니. 정신 나간 사람이라 생각하기에 십상일 것이다. 하지만 화재 이전의 상황을 알고 보면 이 감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본래 김제 공장은 풍년그린텍보다 수십 배 많은 자본으로 시작한 곳이었다. 그 회사는 초기에 공격적으로 투자해 덴마크에서 기계를 수입하고 공장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기계 성능이 우수했겠지만 수익이 줄고 리더십 교체기를 맞으면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기계가 점차 망가졌다.
그 공장을 풍년그린텍이 인수하면 기계를 잘 수리하거나 개조해 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판단 미스’였다. 거금을 들여 보수했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계륵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그때 불이 난 것이다. 투자한 돈이 아까워 버리지도 쓰지도 못하며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태워 버린 것이다. 만약 화재가 없었다면 그 기계를 끌어안고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을지 모른다.
감사 거리는 또 있다. 김제 공장 바로 옆에는 다른 회사의 공장이 있었는데 소방관들의 필사적인 저지로 불이 옮겨붙지 않아 불길이 확산되지 않았다. 만약 그때 이웃 회사 공장에 피해가 생겼다면 법적 소송에 휘말렸을 것이다.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점은 그중에서도 가장 감사해야 할 부분이었다.
경찰 조사와 보험금 지급 문제도 순조롭게 풀렸다. 특히 보험 사정에 있어서는 사고의 고의성 여부가 핵심이었는데 감사하게도 무리 없이 증명이 잘 됐고, 건물을 새로 짓고 기계를 설치하는데 자금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됐다. 안산 공장에서 우리가 기계를 직접 제작해 생산했기 때문에 그 도면으로 한쪽에서는 건물을 짓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계 부품을 여러 공장에 분산 발주해 한마음으로 점검하며 복구에 힘썼다.
불과 4개월 만에 1600평짜리 건물을 짓고 기계 1대를 가동시켜 생산을 시작했다. 기계 제작은 대성공이었다. 이전 기계에서는 제품이 뒤틀려 불량률이 높은 편이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양질의 제품이 생산된다는 입소문도 나서 2차, 3차 라인을 연이어 가동해야 할 상황이 됐다. 이런 기계들을 다른 업체에 발주해서 제작했다면 1년이 걸려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장 전소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지난 연말 직원들에게 했던 성과급 100% 지급 약속은 그대로 지켜졌다. 절망하고 힘 빠지는 게 당연할 것 같았던 분위기는 사기 진작으로 급반전했고, 전 직원이 함께 먹고 자며 복구에 온 힘을 다할 수 있었다.
화재와 복구 과정에서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닥쳤나 원망한 적도 없다. 혹한 속에서 복구 작업을 해야 했지만 안전사고도 없었고 힘들다며 사직한 직원도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 비밀을 알게 됐다. 기도 덕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이 참 많았다. 가족은 물론 겨자씨사랑의집 가족들, 교회 식구들, 김제 현장을 방문해 준 기독실업인회(CBMC) 가족들 등, 소식을 알게 된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지속적으로 기도와 격려를 전했다. 그 모든 것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이 분명했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20) 베다니 예수마을 조성… 주님의 자녀로 깨어난 산족 주민
CBMC서 만나 동역자 된 피터 강 부부
태국서 산족 섬기고 있다는 소식 접하고
현장 둘러본 뒤 교육·예배 위해 시설 지어
태국 치앙마이에 사는 산족 주민들을 위해 지어진 베다니교회 전경.
피터 강 부부는 한국에 있을 때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가정환경도, 교육 여건도 부족함 투성이었지만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1996년 당시 연 매출 500억원에 달하는 사업을 일궈냈다. 나와는 1980년대 말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청년지회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뒤 사랑을 흘려보내는 일에 동역자가 되면서 그 연이 더 끈끈해졌다.
정서적으로 교감을 나눴던 그에게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호주에서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가 어느 날 태국 산족을 섬기는 선교사가 됐다는 것이다. 그가 보낸 이메일에는 산족 선교를 하며 겪는 어려움과 기도제목이 담겨 있었다.
호주 이민 후 3남매를 양육해 낸 두 사람은 마지막 남은 사재를 털어 치앙마이에 대지 1만여평을 구입했다. 거기에 작은 마을을 만들어 산족들이 산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척박한 땅 위에 길을 내고 60평씩 땅을 나눠 60호가 살 수 있는 마을을 설계했다. 그곳에 산족들이 생활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기숙사와 교실을 건축했다.
피터 강의 사역을 좀 더 알아보고 싶어 아내와 함께 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눈으로 확인한 현장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놀라웠다. 그는 내게 “CBMC 일을 하고 있으니 혹시 기념교회를 지어 줄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청했다.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땅이 잠들어 있을 때 헌신적인 서양 선교사님들이 우리를 잠에서 깨운 것처럼 그들도 잠에서 깨어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태국에서의 교회 건축이 시작됐다.
처음 짓게 된 교회 건물은 평소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 교육이 이뤄져야 해서 200여명이 예배드릴 수 있을 만큼 제법 크게 지었다. 산속에는 학교가 없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었고 학교에 가려면 산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그들에겐 돈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을 했다. 그런 아이들이 내려와 살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기숙 시설도 하나 지었다. 그렇게 5개의 교회와 1개의 기숙사가 지어졌다.
마을 이름은 베다니 예수마을로 정했다. 교회는 베다니마을의 중심이었다. 베다니마을이 지금은 큰 동네가 됐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기가 부족해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국가에서 전기 시설을 증설하지 않아 동네에서 가전제품을 쓸 수 없고 가끔 큰 집회를 하는데 전기가 없어 주민들이 은혜를 누릴 수 없었다. 그 소식을 접하곤 바로 ‘전기 배선 후원금’을 보냈다. 얼마 후 사진 한 장과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렇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성도들이 너무너무 기뻐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달된 사진에는 환한 전등 아래서 마을 주민 모두가 활짝 웃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베다니교회가 건축된 이후 치윗교회, 빠방마이교회, 빠마이댕교회, 위앙빠빠오교회, 베다니 드림홈 등이 차례로 지어졌다.
치앙마이에 갈 때마다 절로 힘이 난다. 그들이 희망을 찾아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찾아 열심히 살아가는 산족 교인들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
***[역경의 열매] 유이상 (21) 중국서 주영삼업공사 창립… 북한 선교의 문 두드리다
북한과 직접 거래 불가능한 신분이라
미국 시민권자인 막냇동생 내외 통해
평양 양각도에 덴드로븀 농장 열어
유이상 풍년그린텍 대표가 2010년 8월 중국 단둥 주영삼업회사 창립예배에서 현장을 찾은 도림교회 성도들에게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북한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중국 단둥에 만든 회사 이름이 주영삼업유한공사다. 중국 사람들도 ‘주영(主榮: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브랜드를 기억해 주길 바라며 상표와 상호를 주영이라 정한 것이다. 중국 내에서 주영이라는 상표가 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영광스러울 것 같았다. 중국에서 기독교는 인정하지 않지만 한자를 쓰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주영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된다.
‘주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라는 의미를 담아 주영이라는 브랜드로 중국에서 했던 일은 건강기능식품 제조와 판매였다. 백두산의 중국 명칭인 장백산 아래에는 인삼밭이 많은데 그 중국 인삼을 농축액으로 만들어 먹기 편하게 파우치 형태로 가공해 판매하는 일이다. 백두산 아래서 재배한 인삼을 농축한 다음, 물로 농도를 낮춰 인삼 파우치로 가공한 뒤 ‘주영’이라는 브랜드로 시판한 것이다.
처음부터 중국에서 사업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원래는 북한에서의 사업을 구상했었다. 2000년대 초반 북한과의 직접 거래는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미국 시민권자였던 막냇동생 내외를 통해 창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수씨는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가질 정도로 뛰어난 성악가였는데 평양 윤이상음악제에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른 것을 계기로 자주 북한의 초청을 받던 터였다.
막냇동생은 북한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뉴욕순복음교회 부목사였다. 당시 부부는 뉴저지에 농장을 구입해 어떤 작물을 재배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북한에는 김일성화김정일화위원회라는 큰 조직이 있는데 동생이 위원회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대표가 김일성화를 재배해 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김일성화는 우리나라에서 덴드로븀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북한 교과서에서 기르는 방법을 교육할 정도로 중요한 꽃이다. 이 일로 동생 내외가 북한을 오가는 일이 잦아지게 되면서 나는 동생에게 개성공단 근처에 농장을 확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거기서 덴드로븀과 호접란 묘목을 길러 수입하면 남북협력사업으로 안성맞춤이라 판단한 것이다.
평양 양각도에 땅 1만2000평을 40년 동안 사용하는 권리를 얻어 미국 동생 명의로 온실 사업을 시작하고는 중국 단둥에 회사를 세워 북한 김일성화위원회와 합작회사를 만들게 됐다. 하지만 평양에서의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온실은 겨울에 24시간 난방을 해야 하는데 북한의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았다. 자가발전을 해야 한다며 추가 금전 요구도 이어졌다. 결국 평양 사업을 완전히 접게 됐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내가 직접 북한과 소통하는 데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북한 측이 소개해 준 조선족 직원을 시켜 북한 사업과 중국에 공장 짓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는 북한 미술품이 한국에 이런저런 경로로 많이 들어올 때라 북한에서 유명한 만수대 창작사 그림을 판매하기로 하고 단둥에 그림 판매점을 열었다. 그리고 단둥 압록강변 건너편 신의주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한번은 단둥에서 직원을 만난 뒤 호텔로 들어왔는데 북한 말을 쓰는 어떤 여성에게 전화가 왔다. 좀 만나자는 것이다. 순간 의아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22) 믿음·소망·사랑으로 ‘누구와도 법적 다툼 않는다’ 원칙 지켜
일 맡겼던 조선족 직원, 비리 탄로 나 잠적
수습 할 사람 찾던 중 동생 친구 사무실서
지내던 박씨와 이야기 하다 적임자로 확신
단동주영삼업유한공사 마당에 사훈을 적어놓은 비석. 믿음 소망 사랑을 뜻하는 신(信) 망(望) 애(愛)가 새겨져 있다.
내게 전화한 북한 여성은 자신이 나를 만나려는 게 아니라 조선족을 도와주는 중국 관리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약속을 잡아 만난 자리에서 중국인 관리가 전해 준 얘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믿고 일을 맡겼던 조선족 직원에 대한 얘기였다. 중국 공장 건축, 평양 온실 사업, 중국에서의 물품 구매, 만수대 창작사 그림 등등 그에게 일임해 놓은 모든 일이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북한과 중국에서 진행되던 사업과 관련해 모든 비리가 탄로 나자 그 조선족 직원은 잠적하고 말았다. 이 일로 북한과 중국 내 사업에 대한 적잖은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다. 되돌아보면 어떤 이들은 나와 관계를 맺으며 경제적인 수익이 좀 생기고 더 큰 수익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기도 했으며 일을 부풀리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경쟁이 생기기도 하고 서로를 배신하는 일도 있었다.
후에 내막을 전부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들 중 누구도 고발하지 않았다. 사업을 하면서 누구와도 법적 다툼을 벌이지 않는다는 게 내 원칙이었고 이 원칙은 조선족이거나 중국인이어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때 알게 된 사람이 박남수씨였다. 옌볜에서 경찰서 과장을 지내고 러시아에서 철강 수입업을 했던 그는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하지만 나를 만났을 당시엔 하던 일이 잘못돼 한국으로 유학 보낸 딸의 결혼식에도 가보지 못할 상황이었다.
동생 친구가 근무하던 단둥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박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우 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박씨 표정이 눈에 선했다. 나는 그에게 연락해 딸의 계좌번호를 물어 예비 신랑의 양복값과 예물 마련에 필요한 돈 일부를 송금해줬다. 아버지로서 딸을 향한 안타까움을 읽었기 때문이다.
당시 잠적한 조선족 직원 때문에 사업적으로 뒷마무리가 필요한 시점이라 믿고 맡길 사람을 찾아야 했다. 내 판단에 박씨가 그 일을 맡기에 최적이었다. 결국 그에게 기회를 줬다. 박씨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게 나의 몫이었다. 성장하고 성공을 이루면서 그 역시 믿음을 배워갈 것이라 믿었다. 그가 어떻게 일하고 결정하며 돈을 쓰는지 묵묵히 지켜봤다. 심지어 장부 열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일의 결과를 확인하는 의미에서 보고서를 받는 정도였다. 그런 믿음에 화답하듯 박씨는 모든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며 중국 사업장을 견고하게 다져갔다.
박씨는 그 후 주영삼업유한공사 대표로 세워졌다. 미리 내다보고 결정한 일은 아니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국 현지를 방문하기 어려웠을 때 박씨가 없었다면 사업에 큰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을 것이다.
일을 맡겨놓고 의심을 하면 어떤 일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다. 의심할 바에는 일을 맡기지 않아야 한다. 단둥의 주영삼업유한공사 입구 초석에는 신(信) 망(望) 애(愛)가 새겨진 돌판이 있다. 믿음 소망 사랑을 뜻한다. 하나님을 모르던 그들을 하나님이 세우고 이끌어가는 회사로 인도했으니 그들을 신뢰하고 밀어주는 게 내가 할 일이다.
***[역경의 열매] 유이상 (23·끝) 함께 일하고 서로 섬기며 다같이 성장하는 풍년그린텍
직장 분위기는 서로 섬길 때 가장 원만
회사의 성장은 직원의 노력으로 이뤄져
주인의식 가져야 기업과 함께 직원 성장
유이상 풍년그린텍 대표가 지난달 17일 더행복한교회(손병세 목사)에서 열린 ‘2022 신앙과 비즈니스 스쿨’에서 강연하고 있다. 더행복한교회 제공
직원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 사장으로서 중요한 과업이다. 직원들이 즐겁게 일하려면 직원들도 자신이 일하는 회사에서 무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회사에서 일할수록 발견하게 되는 무언가를 말이다.
적은 돈이라도 꼬박꼬박 적금을 붓는 직원이 있었다. 그에겐 그 적금이 희망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희망을 붙들고 신나게 일하는 모습엔 아름다움이 어려 있다. 반면 매사에 불평이 많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어떤 재미도 느끼지 못하고 목표도 없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달려갈 곳이 없으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불평하느라 전진하지 못한다.
내가 말하는 목표는 거창한 게 아니다. 먼저 성취 가능한 목표를 세운 다음, 그곳을 향해 주저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뚜벅뚜벅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우리 직원들에게도 항상 소박하지만 작은 목표를 세운 뒤 그것을 이루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도록 유도한다. 그들의 성취는 나의 성취요, 우리 회사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풍년그린텍의 경영 방침은 ‘함께 일하고 서로 섬기며 함께 성장하는 기업’이다. 회사의 성장은 직원의 노력으로 이뤄진다. 그러므로 성장하는 회사라면 직원들도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야 한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낸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나 직장 내 분위기는 서로 섬길 때, 즉 서로 존중할 때 가장 원만하고 좋다. 또 직원들이 기업과 함께 자신도 성장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주인의식을 바탕으로 일할 수 있다. 그래서 기업과 직원의 성장은 분리될 수 없다.
모든 도전이 성공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결국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이긴다.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성공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 크리스천 기업가라 해서 따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 사업가라고 특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사업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천 기업가들의 모임인 기독실업인회(CBMC)에서도 많은 이야기와 기도제목들이 오간다. 기업가들의 기도제목은 주로 당면한 사업 문제와 관련된 것들이 많은 편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사업을 비롯해 가정과 교회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업 영역에 충실하게 매달리지 않은 채, 기도제목으로만 사업이 잘되고 성공하게 해 달라고 부르짖는 회사 대표들을 종종 보게 된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사업에 매진하지 않으면서 성공을 바라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과 같다. 공부는 제대로 하지도 않고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학생과 다를 바 없다. 교회 봉사에 모든 시간과 정성을 쏟으면 하나님이 사업까지도 성공하게 해줄 것이라 생각하는 성도들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을 때도 있다.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면 기업의 성공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게 맞다.
크리스천에게 일터는 곧 교회다. 일터에서 생활하는 모습, 의사 결정, 경영 방식에 신앙 고백이 있는 것이다. 일상 속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곳을 교회라 생각하며 섬기고 사랑하고 일하는 것이 크리스천이 지향해야 할 ‘일터 신앙인’으로서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