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 백장 선사의 말입니다. 노쇠한 백장이 걱정된 상좌 스님이 쟁기를 숨겼을 때 백장은 그날 밥을 먹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게 백장은 죽는 날까지 쟁기를 들고 노동을 하다 입적했습니다. 백장은 무엇을 알려고 주고 싶었을까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 이 짧은 사자후에는 많은 함의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노동윤리에 대한 것이죠. 먹기 위해서는 스스로 땀흘려 일하라는 것이죠. 즉, 스스로 밥벌이를 하지 않으며 삶을 이어가지 말라는 의미이지요.
두번째는 권력에 대한 경계입니다. 일하지 않고 먹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것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죠.착취는 권력 없이는 불가능하지요. 권력은 어디서부터 올까요? 그것은 땀흘려 일하지 않고 먹고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옵니다. 지위가 높건 낮건, 모두가 스스로 일해 삶을 유지하려한다면 착취를 가능케할 권력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지요.
세 번째는 깨달음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승려들은 모든 세속의 번뇌와 집착을 끊고 깨달음에 이르려하지요.그 깨달음에 어떻게 이를 수 있을까요? 수행遂行을 통해서입니다. 수행遂行은 수심遂心아닙니다. 즉, 수행은 행동行을 갈고 닦는 일이지, 마음心을 갈고 닦는 일이 아닙니다. 수행은 무엇일까요? 고즈넉한 사찰에 앉아 참선(명상)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 역시 수행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행동을 갈고 닦는 일의 근본은 '명상'이 아니라 '노동'에 있습니다. 노동해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한다면 명상은 애초에 불가능하니까요. 먹고 사는 일은 모든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지요. 이 실존적 조건을 초월한 명상으로는 허황된 망상에 이를 수 이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깨달음에는 가닿을 수는 없습니다. 삶의 진실에 이르는 깨달음은 언제나 몸을 움직여 삶을 이어가는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백장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던 겁니다. "삶은 잘산다는 건 스스로 밥벌이를 하며 산다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 안락하게 살고 싶을 때, 네 속의 권력자가 자라는 중이다!" "깨닫고 싶다면 땀을 흘려라!" 백장은 죽는 순간까지 몸을 움직여 노동함으로써 제자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겁니다. 백장은 죽는 순간까지 밭가는 농부 農夫였다.
첫댓글 一日不作一日不食은 인도불교의 전통이 아닙니다. 붓다시대 부터 하루 한번 오전에 일곱 집을 넘지 않는 탁발이 전통입니다. 그 것은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출가는 모든 노력을 통한 물질의 취득이나 소유를 부정하기 때문이죠. 승가가 형성 되고 보시하는 땅이나 건물이 생겨 그 관리를 맡는 승려들의 규율이 율장에 나타납니다. 중국불교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특성에 따른 특별 케이스 입니다. 탁발전통은 남방의 테라와다 불교가 지금도 잘 전승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64년 까지는 더러 탁발승 들이 있었으나 조계종을 비롯한 주요 종단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해서 금지했습니다. 요즘 승복 입고 목탁치며 탁발하는 사람들은 모두 탁발을 업으로 하는 가짜 승려입니다. 조선시대 억불 정책으로 절 살림들이 어려워지자 중국 전통에 따라 일일부작 일일불식이 고승들에 의해 행하여 졌습니다. 보통 손수 땅을 일궈 논밭을 만들고 농사를 졌습니다. 그래서 선농일체(禪農一體)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깊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평화 가득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