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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서상돈(왼쪽)과 김광제(오른쪽) | 대한매일신문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양기탁 |
그 후 3월 9일에는 대구 서문밖 수창사(壽昌社)에 국채보상지원금 수합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여기에 영세상인, 짚신장이, 부녀자, 선비 등 각계각층에서 성금을 들고 수전소(收錢所)로 몰려왔다. 이에 남일동 부녀자들이 ‘남일동패물페지부인회’를 결성하여 이 운동에 동참하는 취지서(한글)를 발표하였는데 그 주된 내용은 ‘나라사랑에 어찌 남녀가 다르겠는가.’라고 했다. 이러한 여성참여로 더욱 확산되어 ‘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脫環會)’ ‘남산국체보상부인회’ 등이 이어 조직되자 다른 지역에서도 이를 본받아 많은 여성단체가 결성되었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각지로 파급되어 전개되기에 이르렀고, 당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하여 황성신문, 만세보, 제국신문 등이 이를 즉각 보도함으로써 국민의 호응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고종황제도 금연을 결심했고, 전 참정대신 김성근은 100원을 성금으로 내었고, 아산군에 사는 부인도 제국신문을 통해 20원을 보내오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학생, 노동자, 농민, 여성단체 그리고 해외동포와 외국인까지 참여하여 후원하였다. 이와 같이 남자는 단연(斷煙), 절주(節酒)를 통해 모금하고, 여자는 절미(節米), 패물헌납(佩物獻納) 등으로 동참하여 1년 3개월을 경과한 1908년 4월 30일현재 대한매일신보사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에서 모금된 총액은 14만3천5백42원33전이었으며, 이어서 3개월이 지난 7월27일현재 일본헌병대가 집계한 자료에 의하면 전국 모금총액이 18만7천8백42원78전5리에 달하였다. 일재(日宰)는 금연운동을 가볍게 생각하고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나 국권회복을 위한 염원과 단결로 열기가 고조되자 탄압과 저지로 언론인을 구속하고 대한매일신보 사장인 베델(Bethel: 英)을 추방하기에 이르렀고, 양기탁은 신문사에서 모금한 돈을 불리기 위해 수안광산의 주식을 사두었다가 횡령혐의로 구속하였으나 증거가 없자 무혐의로 석방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을 통한 애국시민정신을 알아보았고
2. 이어 2.28학생의거를 통한 대구의 나라사랑운동을 살펴보면
제4대 대통령선거(1960. 3.15)를 앞두고 자유당수뇌부는 일당독재체제를 계속유지하기 위해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연로하여 후계자로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불행하게도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趙炳玉)박사가 신병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여야(與野) 모두 부통령선거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대구는 전통적인 야당도시로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여기에 민주당 대통령후보연설이 대구 신천변에서 1960년 2월28일 일요일에 있게 되자 학생들의 유세장 참관을 막기위해 당국의 등교지시에 학생들이 항거하며 분연히 일어섰다. 여기 경북고등학교 학생 약700여명은 교문(현 대명동소재, 대구고등학교 교정)을 박차고 나와 명덕네거리를 거치면서 대구고등, 대구상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이 합세하여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도청앞(현 경상감영공원)에서 항의시위를 펼쳤으며 중학생까지 가세하였고 또 사대부고는 시가지 진출에 실패하자 본관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2.28 대구학생의거를 시작으로 3월초에는 서울, 부산, 대전, 수원 등지에서도 여러 번 일어났고 선거당일(3.15) 마산에서 시위가 크게 일어났다. 그후 마산앞바다에 참혹하게 살해된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올라 선거에 불만을 가진 국민과 학생들을 흥분시켰고, 이어 서울에 고려대생 시위(4.18)를 시작으로 일어난 4.19학생의거에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결국 자유당정권이 무너지는 결과(4.26)를 초래하였다. 이날로 과도정부(수반: 許政)가 수립되어 다음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나 오랜 독재정권에 쌓인 불만을 투쟁과 항거로 이어지는 집단적 의사표시가 일반화되어 또다시 혼란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노동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와 대학, 중고등학교에서는 어용교직자 축출을 외치는 등으로 초,중등학교에서는 「교직원 노동조합」이 결정되었으나 그 후 군사혁명(쿠데타라고도 함)으로 ‘교원노조’관련자가 교직에서 축출당하는 사태는 역사적 상처로 기록된 바 있다.
위와 같이 소개된 내용을 살펴보면 대구란 도시와 시민 모두는 이 나라, 이 민족이 어렵고 힘들 때 마다 남 먼저 일어나 앞장서 나아가는 자랑스러운 시민이요 지역이라고 자부하면서
『2월 21일 대구시민의 날』 지정과 함께 2.21〜2.28을 대구시민주간이라 지정한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라 할수 있겠다.
첫댓글 귀하고 소상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2.28 대구학생의거 부터는 대구상고 3학년으로 직접 체험한 세대 였지요., 당시 민주당 신천변 선거유세장에 참여를 막기위해 일요임에도 전교생을 학교에 출석시켜 강당에 집합되어 있을 때 였습니다.명분은 단체로 앞산에 토끼를 잡으러 간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경북고등 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뛰어나오면서 우리학교 담장넘어로 빨리 빨리 합류하라는 소리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우리도 강당을 뛰쳐나가 교문을 향해 달렸지만, 교문이 봉쇄되어 있어 잠시 우왕좌왕 했었지요. 그러자 후문으로 우루루 달려갔으나 후문도 막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중 일부학생들이 담장을 밀어보자고 해서, 야구장 남편 학교담장을 전교생들이 함께 밀어서 100여m 이상을 넘어뜨렸지요. 그 공간으로 물밀듯이 달려나가 경고생들과 합류하여 시내로 달렸지요. 그러자 부고, 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등의 학생들이 박차고 나와 함께 시내로 나가 합세하면서 경찰의 저지망이 무능화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연약한 여고생들이 합세 하므로서 그 분위기는 더욱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지요. 그 위세가 대구시 전역을 압도할 수 있었고, 나아가 2.28 및 4.19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6.25, 자유당시절, 2.28, 4.19, 5.16 등의
국가의 위기상황들과 함께 살아온 세대이기에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어, 생각나는 부분을 올려 보았습니다.
청암님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