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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중국의 삼국(위촉오) 관계
글의 순서
1. 고구려와 중국의 삼국(위촉오) 관계
2. 고구려와 중국의 삼국(위촉오) 관계기록
1. 고구려와 중국의 삼국(위촉오) 관계
고구려는 위나라와 오나라 하고는 관계가 있으니 촉하고는 외교 관계가 없다.
촉은 위나라가 가로 막혀서 갈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위(조조의 위나라)와 화친한다.
그래서 손권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그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낸다.
게다가 사마의가 공손연을 치자 동천왕은 군사를 보내 같이 공손연을 친다.
그런데도 위나라는 아무런 대가를 보내지 않자 요동의 서안평을 쳐서 차지한다.
그러자 위나라는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한다.
동천왕은 위나라 관구검을 맞아 두 번에 걸쳐 승리를 한다.
이렇게 되자 동천왕은 드디어 위나라 군대를 깔보았고 철기군으로 위나라 군대를 덮쳤는데 위나라 군사는
사지에 빠져 결사적으로 싸우니 고구려군이 패하고 동천왕이 달아난다.
관구검은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왕기를 보내 동천왕을 뒤쫓는다.
밀우가 추격군을 막기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여 나가 싸우고 밀우가 자객으로 왕기를 찔러죽이고 함께 죽으니
위나라군이 어지러워졌고 그때를 타서 동천왕이 세 방면으로 공격하여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로써 위나라 군대가 패주하였다.
중국을 석권하다시피한 위나라도 고구려에게 조공이니 책봉이니 이런 소리가 없었다.
2. 고구려와 중국의 삼국(위촉오) 관계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본기 >
8년(234)에 위(魏)나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위 기록에 관하여
1) 자치통감: 기록없음 2) 삼국지: 기록없음(혹시 못찾은 것인지도 모르겠음)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본기 >
10년(236) 봄 2월에 오(吳)나라 왕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그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가을 7월에 목을 베어 머리를 위나라로 보냈다.
위 기록에 관하여
1) 자치통감: 기록없음 2) 삼국지
< 삼국지 권3, 위서3, 명제기 > 청룡 4년(236년) 7월 고구려의 왕위궁이 손권의 사자 호위등을 참수하여 그들의 머리를 보내고 유주에 도착하였다. 秋七月,高句驪王宮斬送孫權使胡衞等首,詣幽州。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본기 >
11년(237)에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연호를 바꾼 것을 축하하였다. 이 해가 경초(景初) 원년이다.
위 기록에 관하여
1) 자치통감: 기록없음 2) 삼국지: 기록없음(혹시 못찾은 것인지도 모르겠음)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본기 >
12년(238)에 위나라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치니,
왕은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 군사 천 명을 이끌고 그것을 돕게 하였다.
위 기록에 관하여
1) 자치통감: 기록없음 2) 삼국지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전>
경초(景初) 2년(238년) 에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니, [위(位)]궁(宮)이 주부(主簿)와 대가(大加)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사마선왕(司馬宣王)의] 군대를 도왔다.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본기 >
16년(242)에 왕은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위 기록에 관하여
1) 자치통감: 기록없음 2) 삼국지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전> 정시(正始) 3년(242년)에 [위(位)]궁(宮)이 서안평(西安平)을 노략질하였다.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본기 >
20년(246) 가을 8월에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로부터
침범하여 왔다.
왕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서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또 군사를 이끌고 다시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서 또 이기고,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위나라의 대군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대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 [그의]
목숨이 내 손아귀에 있다.” 그리고는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형의 진[方陣]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니, 우리 군대는 크게 궤멸되고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으며, 왕은 기병 1천여 기(騎)를 데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
겨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사람들을 죽이고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쫓았다.
왕은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이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
(密友)만이 곁에 있다가 왕에게 말하였다.
“지금 추격병이 가까이 닥쳐 와서 형세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이 죽을 각오로 막겠습니다. 왕께서는 달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과 함께 적진으로 가서 힘껏 싸웠다.
왕은 몰래 빠져나가 산 골짜기에서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 호위하면서 “밀우를 찾아오는 자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겠다.”고 말하였다.
하부(下部)의 유옥구(劉屋句)가 나서며 “신이 가보겠습니다.” 하고, 전장에서 밀우가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업고 돌아왔다.
왕은 그를 무릎에 눕혔는데, 한참만에 이윽고 깨어났다.
왕은 몰래 이리저리 돌아서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나라의 군사가 좇아오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은 방도가 막히고 기세가 꺾여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동부사람 유유(紐由)가 나서며 말하였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에게 제공하면서 틈을 엿보아 그 장수를 찔러 죽이려고 합니다.
만약 신의 계책이 성공하면, 왕께서는 분연히 공격하여 승부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좋다”고 하였다.
유유가 위나라 군대로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얻어서 도망쳐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땅이 없어서 장차 진영 앞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목숨을 맡기려고,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을 가지고 와서 부하들에게 먹이려 합니다.”
위나라 장수가 그 말을 듣고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는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서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함께 죽으니, 위나라
군대가 마침내 어지러워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공격하니, 위나라 군대가 소란해져서 군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
(樂浪)으로부터 물러갔다.
왕은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하였는데, 밀우와 유유를 으뜸으로 삼았다.
밀우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유]옥구에게는 압록원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을 식읍으로
주었다.
유유에게 벼슬을 추증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고, 그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이 전쟁 때 위나라 장군이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겼으며, 또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
이전에 [동천왕의] 신하 득래(得來)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득래가 한탄하여 “이 땅에 장차 쑥대가 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 하고, 결국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 묘를 무너뜨리지 말고 그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를 포로로 잡았으나 모두 놓아 보내 주었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렇게 쓰여 있다. 『불내성은 곧 국내성인데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이것은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양서(梁書)에 이렇게 쓰여 있다.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토벌한 틈을 타서,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자, 관구검이 내침하였다.』
통감(通鑑)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을 왕 위궁(位宮)[산상왕] 때의 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위 기록에 관하여
1) 자치통감 2) 삼국지
1) 자치통감 (위기7 소릉여공 정시7년, 246년-월일은 없음)
유주자사 관구검은 고구려왕 고위궁(高位宮)이 자주 침략하고 배반하였으므로 제군을 독려하여 토벌하였다. 고위궁은 패하여 달아났고, 관구검이 드디어 환도를 도륙하고 머리를 베고 포로로 잡아온 수가 천 명을 헤아렸다. 구려의 신하 득래가 자주 고위궁에게 간언하였으나 고위궁이 좆지 아니하였다. 득래가 한탄하며 말하였다. “일어나서 이땅을 보니 장차 잡풀만 무성하겠구나!” 마침내 먹지않다가 죽었다. 관구검은 제군(諸軍)에게 그의 무덤을 파헤치지 말라고 하였고 무덤가에 있는 나무도 베지 않게 하였으며 그의 처자를 잡았으나 모두 놓아 보내주었다. 고위궁이 단신으로 처자를 거느리고 도망하여 숨어버리자 관구검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얼마있지않아 다시 그를 공격하니 고위궁이 드디어 매구로 달아났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파견하여 그를 추격하게 하였는데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가서 숙신씨의 남쪽경계 지역까지 갔다가 돌에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 이때 죽이거나 잡아온 사람이 8천여 명이었다. 공로를 평가하여 상을 받으니 후작을 받은 사람이 100 여명 이었다.
2) 삼국지
<①: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전>
정시(正始) 3년(242년)에 [위(位)]궁(宮)이 서안평(西安平)을 노략질하였다. [정시(正始)] 5년에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에게 격파되었는데, 그 때의 사실은 [관구(毌丘)]검(儉)의 열전(列傳)에 실려 있다.
<②:삼국지 위서 관구검전(‘史랑방’의 글을 복사해 온 것임)>
정시 중(正始中: 240-248) 관구검은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반(侵叛,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킴)하였으므로 제군(諸軍)의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구려왕(句驪王) 궁(宮)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梁의 음은 渴) 궁(宮)이 연달아 격파되어 패주했다. 그리하여 관구검이 속마현거(束馬縣車,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여 환도(丸都)(산)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수천명을 참획했다. 구려(句驪)의 패자(沛者)로 그 이름이 득래(得來)인 자가 있어 수차례 궁(宮)에게 간언했으나 [1] 궁(宮)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했다, “이 땅이 (폐허가 되어) 장차 봉호(蓬蒿,쑥)가 자라나는 꼴을 곧 보겠구나.” 그리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죽으니 온 나라에서 그를 현명하게 여겼다. 관구검이 제군(諸軍)에 명해 그의 묘(墓)를 허물지 않고 그곳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고 그의 처자들을 모두 풀어서 보내주었다. 궁(宮)은 홀로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었다. 관구검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정시正始) 6년(245년),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왕기가)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돌을 새겨 공적을 기록함)하고 환도(丸都)의 산(山)과 불내(不耐)의 성(城)에 글자를 새겼다. 주륙하거나 받아들인 이가 모두 8천여 구(口)에 이르렀고, 공을 논해 상을 주어 후(侯)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從諸道討之.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進軍沸流水上,大戰梁口,梁音渴.宮連破走.儉遂束馬縣車,以登丸都,屠句驪所都,斬獲首虜以千數.句驪沛者名得來,數諫宮,[一]宮不從其言.得來歎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擧國賢之.儉令諸軍不壞其墓,不伐其樹,得其妻子,皆放遣之.宮單將妻子逃竄.儉引軍還.六年,復征之,宮遂奔買溝.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二]過沃沮千有餘里,至肅愼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諸所誅納八千餘口,論功受賞,侯者百餘人.穿山溉灌,民賴其利. |
고구려와 공손씨와의 관계
글의 순서
1. 고구려와 공손씨와의 관계
2. 고구려와 공손씨와의 관계 기록
1. 고구려와 공손씨와의 관계
공손씨는 난하 동쪽인 요동을 점령해 나라를 세운 세력이다.
189년 공손도가 요동태수에 오른 다음 세력이 커지자 왕을 자칭한 이후 3대에 걸쳐 238년까지 50년 동안 요동에서
세력을 떨친 것이다.
고구려 10대 산산왕(이름 연우)의 형인 발기가 공손도에게 군사를 빌려 자기 나라인 고구려를 친 사건이
있었다.
물론 발기는 억울한 일을 당해서 그랬지만 억울한 일은 당한 것은 형수와 동생에게 당한 것인데 그것을 외부의
힘을 끌어다 해결하려는 매우 큰 잘못을 저질렀다.
어째든지간에 발기는 실패하여 죽고 빌린 한나라 군사는 대패하였지만 발기는 자기조국을 팔아먹고 반역이라는
큰 죄를 지었고 산상왕 연우는 형수와 야합하였으며 공모하고 형의 자리를 빼앗는 불의를 저지르는 큰 잘못을
하여 외부세력이 내부의 일에 간여하게 한 큰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있었다.
이것은 내부관계이고 외부적으로 고구려와 공손도(공손씨)의 관계는 발기가 고구려 땅과 주민을 내어주고
군사를 빌린 관계는 있었으나 그 이상의 관계는 없었다.
굳이 못박아 말하면 조공이니 책봉이니 하는 그런 것이 없었다.
2. 고구려와 공손씨와의 관계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 본기 >
원년(179년) 고국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고국천왕(故國川王), <혹은 국양- 國襄 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남무(男武)이다.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은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였으므로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에 발기가 형으로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가에 머물렀다.
위 기록에 대하여
위에 나오는 공손강은 공손도의 아들인데 공손도는 요동태수에 올랐다가 자립하여 왕을 자칭한 사람이다. 먼저 공손도가 요동태수에 오른 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 권8 위서8 공손도 전(傳)에 의하면
『그와 같은 군郡 출신인 서영이 동탁의 중랑장으로 임명되자 공손도를 추천하여 요동태수가 되게 하였다.(同郡徐榮為董卓中郎將,薦度為遼東太守)』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동탁이 집권한 해는 189년(중평 6년, 8월)이고, 서영이 동탁의 중랑장이 된 때는 기록에 없다. (근거: 삼국지 권6 위서6 동탁전)
그리고 역시 공손도 전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공손도는 중평6년(189년)에 요동을 점거한 이래 공손연에 이르기 까지 3대를 지나 50년 만에 멸망하였다. (始度以中平六年據 遼東,至淵三世,凡五十年而滅)』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위의 두 기록에 의하면 공손도가 요동태수에 처음 오른 때가 빨라야 서기189년 말 임을 알 수 있고, 공손씨가 요동을 점거한 기간은 서기 189년부터 238년임을 알수 있다.
그리고 공손도가 죽고 그의 아들 공손강이 그의 자리를 이은 것이 건안 9년인 서기 214년 이다. (근거: 공손도전, 따라서 공손도의 집권기간은 189~214년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발기(拔奇)가 공손강에게 항복했다고 한 것이 서기 179인인데 179년은 공손강이 자리를 잇기 35년전이고 그때는 아마 공손강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엣날에는 3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르는 일이 드물었다.) 그때는 공손강은 커녕 그의 아버지 공손도 마저도 요동을 점거하지 못한 때였다.
또한 삼국사기 산상왕 본기를 보면 발기는 산상왕 원년인 197년에 죽은 사람이다. 그리고 공손강은 214년에 공손도의 뒤를 이은 사람이다. 따라서 공손강이 집권하기 17년전에 죽은 발기는 공손강에게 항복하기는 커녕 공손강의 모습도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국천왕 원년인 179년조에 있는 「발기(拔奇)가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했다는 기사는 오류임에 틀림없다.
위 기사는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에 나오는 '희평 연간(172~177년)에 백고가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는 기사와 그 기사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기사인 '공손도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하자'라는 기록을 '희평 연간(172~177년)에 공손도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했다'는 것으로 착각해서 일어난 일이다.
'희평 연간(172~177년)에 백고가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는 시기와 '공손도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한 시기가 다른데도 그 둘을 같은 시기로 착각하여 삼국사기에 베껴 씀으로써 일어난 일이다.
이와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 것은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에 있다. 그 밑에 나오는 삼국지의 기사를 보면
'백고는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라고 되어 있으니 백고와 공손도가 마치 같은 시기의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위에 나오는 삼국사기 고국천왕 본기를 보면 백고는 신대왕의 이름이고 신대왕은 179년에 죽은 임금이다. 그리고 공손도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189년 말에 요동태수에 올라 요동에 웅거한 사람이다.
다시말해서 신대왕 백고는 공손도가 요동에 웅거하기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그런데도 신대왕 백고와 공손도를 같은 시점에 살았던 사람으로 삼국지가 씀으로써 김부식으로 하여금 이러한 착각을 하게 한 것이다.
또한 김부식도 잘 따져보지 않고 중국사서를 무조건 믿고 따라, 베껴 쓰는 잘못을 저질러 이러한 잘못된 오류가 나온 것이다.
<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전 >
희평(熹平) 연간(172~177년)에 백고(伯固)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도(公孫度)의 세력이 요동(遼東)에 웅거하자, 백고(伯固)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파견하여 [공손(公孫)]도(度)를 도와 부산(富山)[註039]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拔奇)는 어질지 못하여,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伊夷模)를 옹립하여 왕(王)으로 삼았다.
백고(伯固)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遼東)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胡)[族] 5백여 호(戶)를 받아들였다. |
< 삼국사기 고구려 제10대 산상왕 본기 >
0 년 (AD 197) : 산상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산상왕(山上王)은 이름이 연우(延優)<또는 위궁(位宮)이라고도 이름하였다.>이고 고국천왕의 아우이다.
위서에 이렇게 쓰여있다.
『주몽의 후손 궁(宮)은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었는데 이 사람이 태조이다.
지금의 왕은 태조의 증손인데 역시 나면서부터 사람을 보는 것이 증조 궁과 비슷하였다.
고구려에서 서로 비슷한 것을 불러 위(位)라고 하므로 이름을 위궁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고국천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연우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에 왕후 우씨는 죽음을 비밀로 하여 발설하지 않고,
밤에 왕의 아우 발기(發歧)의 집으로 가서 “왕은 아들이 없으니 당신이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합니다.”고
말하였다.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였다.
“하늘의 운수는 돌아가는 데가 있으므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부인이 밤에 다니는 것을 어떻게 예(禮)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왕후는 부끄러워하고 곧 [연]우의 집으로 갔다.
연우는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고, 문에서 맞이하여 들여앉히고, 잔치를 베풀어 [함께] 마셨다.
왕후가 말하였다.“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큰 동생으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
으나, 첩에게 딴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무례하므로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그러자 연우는 예의를 더 [중하게] 하고 친히 칼을 잡고 고기를 베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주고, 돌아가려 할 때 연우에게 “밤이 깊어서 예기치 못한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그대가 나를 궁까지 전송해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연우는 그 말에 따르니 왕후가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에 [왕후가] 선왕의 명령이라고 사칭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연우를 왕으로 세웠다.
발기가 이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를 동원해서 왕궁을 둘러싸고 소리쳐 말하였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것이 예이다. 너는 차례를 뛰어 넘어 찬탈하였으니 큰 죄이다.
마땅히 빨리 나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주멸함이 처자식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연우는 3일 동안 문을 잠그고 있었다. 나라 사람들도 또한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도망가서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뵙고 고하였다.
“나는 고구려 왕 남무(男武)[고국천왕]의 친동생입니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었는데, 나의 동생 연우가
형수 우씨와 왕위에 오를 것을 공모하여 천륜의 의를 그르쳤습니다.
이 때문에 분하여 상국에 투항해 왔습니다.
엎드려 원컨대 병사 3만을 빌려 주어, 그들을 쳐서 난을 평정케 하십시오.” 공손도가 그 말에 따랐다.
연우는 동생 계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계수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 패잔병을 추격하니, 발기(發歧)가 계수에게 말하기를 “네가 지금 늙은 형을 차마
해칠 수 있느냐?”고 하였다.
계수는 형제에 대하여 무정할 수 없어 감히 해치지 못하고 말하였다.
“연우가 나라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비록 의가 아니지만, 당신은 한 때의 분노로 조종(祖宗)의 나라를 멸하려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뵙겠습니까?”
발기(發歧)가 그 말을 듣고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계수는 슬퍼 통곡하며 그 시체를 거두어 짚으로 가매장하고 돌아왔다.
위 기사에 대하여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삼국사기는 이 대목을 우리측의 사료인 구삼국사, 해동고기 등에서 인용한 것이 틀림없다.
<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전 >
건안(建安) 연간(196~219년)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拔奇)는 형(兄)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대(大)]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명을 이끌고 [공손(公孫)]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호(胡)[족(族)]도 이이모(伊夷模)를 배반하므로 이이모(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註042]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拔奇)는 드디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고(高)]구려(句麗)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교위거(古雛加 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玄菟)를 공격하므로 현도군(玄菟郡)과 요동군(遼東郡)이 힘을 합쳐 [고구려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
고구려와 후한(後漢)의 관계
글의 차례
1. 고구려와 후한(後漢)의 관계
2. 고구려와 후한(後漢)의 관계 기록
1. 고구려와 후한(後漢)의 관계
고구려와 후한은 서로 공격을 주고 받은 관계이다. 요동과 현도를 차지하기 위한 고구려의 공격이 많았다.
특히 고구려는 제5대 모본왕 때 후한의 땅을 깊숙이 쳐들어갔다.
북평(北平: 당산시)·어양(漁陽: 북경시)·상곡(上谷: 창평)·태원(太原: 산서성 태원시)까지 쳤다.
이어서 제6대 태조대왕 3년(서기 55년)에는 요서까지 고구려의 영역으로 확보하고 요서에 10개성을 쌓았다.
그러나 태조대왕 53년(서기 105년)부터는 밀려서 요동과 현도를 차지하려는 싸움을 벌렸다.
서로 공격을 주고받은 관계이니 무슨 책봉이니 이런 것이 없었다.
무슨 광무제가 고구려의 왕호를 회복시켰다는 소리는 그들의 상투적인 수작이다.
그들이 왕호를 쓰라고 해서 왕이라고 한것도 아니고 왕호를 쓰지 말라고 해서 왕이라고 못한 것도 아니다.
고구려 스스로 왕이라고 칭한 것이지 그들과는 아무상관이 없는것이다.
그러한 말은 그들이 스스로 천하의 주인인 양 착각하고 아무한테나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제멋대로 지껄인 것에 불과하다. 천하의 주인은 자기네들이 아니라 힘있는 자가 주인이다.
광무제가 고구려를 힘으로 꺾은 일도 없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젖먹이 아기들에서 보이는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착각을 하다가 송나라는 황제라는 자가 둘씩이니 금나라에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였고 황후와 처첩들은
무자비한 강간을 당한 것이다.
원나라 때는 송나라의 황제라는 작자들은 물론 일반 백성까지 초야권을 몽골족에게 바쳐야 했다.
뭐 청나라에게 당한 것, 요나라에게 당한 것, 흉노에게 당한 것 등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중국인(한족)이
처참하게 당한 것은 바로 위와같은 착각에서 비롯되었고, 돼먹지 않은 태도에 기인한 것이며 그들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한번 못박아 말한다면 종속이니 지방정권이니 하는 말은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2. 고구려와 후한(後漢)의 관계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 본기 >
11 년 (AD 28) : 7월에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쳐들어 왔다.
[번역문]11년(서기 28) 가을 7월에 한나라의 요동(遼東) 태수(太守)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거나 지키는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하였다. “신이 듣기를,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이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벌같이 일어나는데 명분없이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이것은 임금과 신하들이 결정한 책략이 아니라, 필시 변방 장수가 이익을 노려 멋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늘을 거역하고 인심에 어긋나므로 그 군대는 반드시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험한 곳을 의지하여 기발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깰 수 있습니다.”
좌보 을두지가 말하였다. “작은 적은 강해도, 큰 적에게 잡히는 법입니다.
신은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의 군사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많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꾀로는 칠 수 있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왕은 “꾀로 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고 물었다.
[을두지가] 대답하였다. “지금 한나라의 군사들이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나가서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왕은 그렇게 여기고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일 동안 굳게 지켰다. 한나라 군사들이 포위하여 풀어주지
않았다.
왕은 힘이 다하고 병사들이 피로하므로 을두지에게 “형편이 지킬 수 없게 되어가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을]두지가 대답하였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 땅이 돌로 되어서 물나는 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때문에 오래 포위하고 우리가 곤핍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맛있는 술 약간과 함께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 먹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을 따라 하면서 글을 보내었다.
“과인이 우매하여서 상국에 죄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에서 이슬을 맞게
하였습니다. 후의를 감당할 길 없어서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부하들에게 제공하려고 합니다.”
이리하여 한나라 장수는 성 안에 물이 있으므로 단번에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였다.
“우리 황제께서는 신을 둔하다고 하지 않고 군대를 출동하도록 영을 내려 대왕의 죄를 물었습니다.
국경에 다다른 지 열흘이 지났으나 요령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보내]온 [글의] 뜻을 들으니, 말씨가 공순
하므로 어찌 이대로 황제께 아뢰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위 기사에 대하여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우리측 사료인 구삼국사 또는 해동고기 등에서 가져온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나 후한서에는 그 내용이 없다. |
15년(서기 32)12월에 사신을 한(漢)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고구려의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 때가 건무(建武) 8년이었다.
위 기사에 대하여
<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
[후(後)]한(漢) 광무제(光武帝) 8년(32년)에 고구려왕(高句麗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면서 비로소 왕(王)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건무(建武) 8년(32년)에 고구려(高句驪)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王號)를 회복해 주었다. |
27년(서기 44) 가을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
으므로,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위 기사에 대하여
이런 기사는 중국측 사료에서 가져오는 내용인데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후한서에 없다. 즉, 광무제 본기나 동이열전 고구려전에도 없다. 또한 자치통감에도 없다. (자치통감 한기35 광무제 건무 20년-44년조는 물론 어디에도 없음) 위 기사는 출처가 없는 매우 의심스런 기사로 보인다. |
< 삼국사기 고구려 제4대 민중왕 본기 >
4년(서기 47) 겨울 10월에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 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구(口)』라고 하였다.>
위 기사에 대하여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건무(建武)] 23년(47년) 겨울에 구려(句驪)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 대승(戴升)등 만여명이 낙랑(樂浪)에 투항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 제5대 모본왕 본기 >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위 기사에 대하여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건무(建武)] 25년(49년) 봄에 구려(句驪)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이 은의(恩義)와 신의(信義)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 후한서 권1 광무제 본기, 하 >
(건무) 25년 봄 정월 요동 변방 바깥의 맥인이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입하여 약탈해서 요동태수 제융이 초유하니 항복하였다. (건무) 二十五春正月,遼東徼外貊人, 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 |
< 삼국사기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 본기 >
3년(서기 55)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위 기사에 대하여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우리측 사료인 구삼국사 또는 해동고기 등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후한서에는 위의 내용이 없을 것이다. |
53년(105)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요동에 들어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태수 경기(耿夔)가 군사를 내어 막으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에 경기가 맥인(貊人)을 격파하였다.
위 기사에 대하여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화제(和帝) 원흥(元興) 원년(元年)(105년) 봄에, [고구려인이] 다시 요동(遼東)을 침입하여 여섯 현(縣)을 노략질하므로, 태수(太守) 경기(耿夔)가 격파하고 그 우두머리를 참살(斬殺)하였다. |
57년(109) 봄 정월에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안제(安帝)가 원복(元服)을 입은 것을 축하하였다.
위 기사에 대하여
< 후한서 권5, 효안제 본기 > 영초 3년(109년) 봄 정월 경자일에 황제가 원복을 입었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중략).......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三年春正月庚子,皇帝加元服。大赦天下。 賜王、主、貴人、公、卿以下金帛各有差;男子為父後,及三老、孝悌、力田爵, 人二級,流民欲占者人一級。遣騎都尉任仁討先零羌,不利,羌遂破沒臨洮。 高句驪遣使貢獻。 |
59년(111)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복속하기를 구하였다.
<통감(通鑑)에 이르기를 『이해 3월에 고구려 왕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으므로,
혹 속하기를 구하였는지 또는 침략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는 잘못일 것이다.>
위 기사에 대하여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111년)에 궁(宮)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예속되기를 구(求)하였다.
< 자치통감 한기41 >
효민제 영초 6년(111년) 3월 고구려의 왕 고궁(高宮)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침략하였다. |
66년(118) 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름 6월에 왕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의 현도를 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위 기사에 대하여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원초(元初) 5년(118년)에는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玄菟)를 침략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
69년(121) 봄에 한나라의 유주(幽州) 자사(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서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아 갔다.
왕은 이에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은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것을 믿었다.
수성은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자리잡고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대현(遼隊縣)을 쳤다.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하여] 막았으나 모두 진영
에서 죽었으며,
[이때]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위 기사에 대하여
<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
상제(殤帝)와 안제(安帝) 연간에 [고(高)]구려왕 궁(句麗王 宮)이 자주 요동(遼東)을 침입하였으므로, 다시 현도(玄菟)[군(郡)]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遼東太守 蔡風)과 현도태수 요광(玄菟太守 姚光)은 궁(宮)이 두 군(郡)의 해(害)가 된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宮)이 거짓으로 강화(講和)하기를 청(請)하자, 두 군(郡)은 진격하지 않았다. [그 틈을 이용하여] 궁(宮)은 몰래 군대를 파견하여 현도군(玄菟郡)을 공격해 후성(候城)을 불사르고, 요대(遼隧)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그 뒤 궁(宮)이 다시 요동(遼東)을 침범하자, 채풍(蔡風)이 가벼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다가 패하여 죽었다.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건광(建光) 원년(元年)(121년) 봄에,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과 현도태수(玄菟太守) 요광(姚光)과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거사-渠師)를 붙잡아서 목베고 병마(兵馬)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궁(宮)은 이에 사자(嗣子) 수성(遂成)에게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요광(姚光)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遂成)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니 요광(姚光) 등은 이를 믿었다. 수성(遂成)은 이 틈을 타 험요지(險要地)를 점거하여 [요광(姚光) 등의] 대군(大軍)을 막고는 몰래 3천여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玄菟)와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성곽(城郭)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살상(殺傷)하였다.
이에 [후한(後漢)은] 광양(廣陽)·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탁군(涿郡)· [요동(遼東)]속국(屬國)에서 3천여명의 기마병을 출동시켜 함께 [요광(姚光) 등을] 구원케 하였으나, 맥인(貊人)이 벌써 돌아가버렸다.
여름에 다시 요동(遼東)의 선비(鮮卑)[족(族)] 8천여명과 함께 요대(遼隊)[현(縣)]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蔡諷) 등이 신창(新昌)[현(縣)]에서 추격하다가 전사(戰死)하였다. 공조(功曹)인 경모(耿耗)와 병조연(兵曹掾)인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인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蔡諷)을 가리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사람이 백여명이나 되었다.
< 후한서 권5 효안제 본기 > 건강 원년 봄 정월 유주자사 풍환이 2개 군의 태수를 거느리고 고구려 예맥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建光元年春正月,幽州刺史馮煥率二郡太守討高句驪、穢貊,不克。 |
12월에 왕은 마한(馬韓),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위 기사에 대하여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馬韓)· 예맥(濊貊)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포위하였다. 부여왕(夫餘王)이 그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2만여명을 거느리고 [유(幽)]주(州)·[현도(玄菟)]군(郡)과 함께 힘을 합하여 [궁(宮)을] 쳐서 깨뜨리고 5백여명을 참수하였다.
<후한서 권5 효안제 본기 >
건강 원년 겨울 12월에 고구려, 마한, 예맥이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을 보내어 주군(州郡)과 힘을 합쳐 쳐서 깨뜨렸다. 建光元年 冬十二月,高句驪、馬韓、穢貊圍玄菟城,夫餘王遣子與州郡并力討破之。 |
70년(122)에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깨뜨렸다.
위 기사에 대하여
<후한서 권5 효안제 본기 >
연광 원년 봄 2월 부여왕이 아들과 군대를 보내 현도를 구하고 고구려 마한 예맥을 쳐서 깨드리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延光元年春二月,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擊高句驪、馬韓、穢貊,破之,遂遣使貢 |
72년(124) 겨울 10월에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위 기사에 대하여
이런 기사는 중국측 사료에서 가져오는 내용인데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후한서에 없다. 즉, 효안제 본기나 동이열전 고구려전에도 없다. 또한 자치통감에도 없다. (자치통감 한기43 효안제 연광 3년조는 물론 어디에도 없음) 위 기사도 출처가 없는 매우 의심스런 기사로 보인다. |
94년(서기 146년)가을 8월에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후한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에 고구려 왕 궁이 죽어 아들인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현도태수 요광이 아뢰기를 ‘그들이 상(喪) 당한 것을 타서 군사를 내어 공격하려고 합니다.’고 하니,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였다. ‘궁이 전날에 교활하게 굴 때에는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책망하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뒤에 잘되는 쪽을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은 한나라의 산 포로를 돌려보냈다.』
위 기사에 대하여
<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
궁(宮)이 죽고 그 아들 백고(伯固)가 왕(王)이 되었다. 순제(順帝)와 환제(桓帝) 연간에 다시 요동군(遼東郡)을 침공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노략질하고, 또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도중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妻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순제(順帝) 양가(陽嘉) 원년(元年)(132년)에 현도군(玄菟郡)에 둔전(屯田) 육부(六部)를 설치하였다. 질제(質帝)· 환제(桓帝)의 시대에 다시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妻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중략).......
이 해에 궁(宮)이 죽고, 아들 수성(遂成)이 왕이 되었다. 요광(姚光)이 상서(上書)하여, 그들의 초상을 틈타 군대를 출동시켜 공격하고자 하니, [후한(後漢)의 조정에서] 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가(可)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궁(宮)이 생전에 악독하여 요광(姚光)이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그가 죽은 것을 이용하여 치는 것은 의리(義理)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절(使節)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지난날의 죄(罪)를 꾸짖고는 그 죄를 용서해 주어 이후 그들이 선(善)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안제(安帝)는 그 의견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遂成)이 한(漢)나라의 포로(捕虜)를 송환(送還)하고 현도(玄菟)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수성(遂成) 등이 포악 무도하므로 목을 베어 젓을 담아서 백성에게 보임이 마땅할지나, 다행히 용서함을 얻어 죄(罪)를 빌며 항복을 청하는도다. [그러나] 선비(鮮卑)· 예맥(濊貊)이 해마다 노략질하여 백성을 잡아가 그 수가 수천명이나 되었는데 [이제] 겨우 수십명만을 보내니, 교화(敎化)를 받을려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지금 이후로는 [후한(後漢)의] 현관(縣官)들과 싸우지 말 것이며, 스스로 귀순(歸順)하여 포로를 돌려보내면 [그 숫자만큼] 모두 속전(贖錢)을 지불하되, 한 사람당 비단 40필(匹)을 주고 어린이는 어른의 반을 주겠다.” 하였다. |
< 삼국사기 고구려 제8대 신대왕 본기 >
4년(168)에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침략해 와서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되기를 빌었다.
위 기사에 대하여
<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
영제(靈帝)의 건녕(建寧) 2년(169년)에 현도태수 경림(玄菟太守 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 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백고(伯固)가 항복하여 요동(遼東)에 속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건녕(建寧) 2년(169년)에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고구려(高句驪)를] 토벌하여 수백명을 죽이니, 백고(伯固)가 항복하여 현도(玄菟)에 예속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
5년(169)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위 기사에 대하여
<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
희평(熹平) 연간(172~177년)에 백고(伯固)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도(公孫度)의 세력이 요동(遼東)에 웅거하자, 백고(伯固)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파견하여 [공손(公孫)]도(度)를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
8 년 (AD 172) : 한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번역문]
8년(서기 172년)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모두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군대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것은 소위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수가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군대를 내어서 막기를 청합니다.”
[명림]답부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지금 강병을 거느리고
멀리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의당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의당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날랜 군사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
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웠는데,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위 기사에 대하여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우리측 사료인 구삼국사 또는 해동고기 등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후한서에는 위의 내용이 없을 것이다. |
< 삼국사기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 본기 >
0 년 (AD 179) : 고국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고국천왕(故國川王), <혹은 국양- 國襄 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남무(男武)이다.
<혹은 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하였다.>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은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였으므로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에 발기가 형으로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가에 머물렀다.
위 기사에 대하여
<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拔奇)는 어질지 못하여,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伊夷模)를 옹립하여 왕(王)으로 삼았다.
건안(建安) 연간(196~219년)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拔奇)는 형(兄)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대(大)]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명을 이끌고 [공손(公孫)]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
6년(서기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은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친히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대와 좌원에서 싸워서 이겨 벤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위 기사에 대하여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우리측 사료인 구삼국사 또는 해동고기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후한서등에는 없을 것이다. |
19년(서기 197년)에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투항해 오는 자가 심히
많았다. 이 때가 한나라 헌제 건안 2년이었다.
위 기사에 대하여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우리측 사료인 구삼국사 또는 해동고기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후한서등에는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