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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철 시집 『내 인생의 대본은 누가 쓸까』/ 안분지족을 실행하는 구도자적 자세
이두철 시집『내 인생의 대본은 누가 쓸까』 해설 (2023. 등대지기)
안분지족을 실행하는 구도자적 자세
마경덕(시인)
지난여름 집 앞 골목이 아스콘으로 포장을 했다. 보도블록 틈에 터를 잡은 민들레가족, 냉이, 씀바귀도 모두 집을 잃었다. 해가 바뀌고 새봄이 오자 군데군데 풀꽃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해마다 담벼락에 붙어 꽃대를 밀어 올리던 뽀리뱅이 가족도 돌아왔다. 오늘 아침 만난 길 가장자리 민들레 한 포기, 온몸을 바닥에 활짝 펼치고 짧은 꽃대에 작은 꽃 한 송이를 피워 올렸다. 포복의 자세였다. 살기 위해 스스로 키를 낮춘 풀꽃 한 포기의 단호한 결단이 눈물겨운 한 편의 시였다.
시 쓰기도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일이어서 “행동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같은 출발선에서 동시에 출발한 문우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실력을 겨루다가 까마득히 앞서가면 따라잡을 수가 없다. 연극에서도 행동은 “목적이 담긴 동사”이기에 결국 이 ‘행동’이 모여서 연극은 진행되고 정해진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 ‘행동’을 찾지 못하면 장면엔 분위기만 남고 연극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고 한다.
이처럼 몸으로 행동하는 시인이 있다. 2017년「미래시학」으로 등단한 이두철 시인이다. 일주일에 시 한 편을 꼬박꼬박 쓰고 일 년에 시집 한 권을 출간하는 일을 6년째 어김없이 지키고 있다. 이두철 시인의 이미지는 “성실함과 꾸준함”이다.
자신과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며 쉬지 않고 행동하는 이두철 시인의 시 세계는 참된 삶의 길을 안내하는 “인간의 자세”에 주력한다. 시인은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현시대의 피폐한 정신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할 방법을 모색한다. 과유불급의 현시대에서 불필요한 세속적 욕망이나 집착에서 벗어나면 완전한 마음의 자유에 이르게 된다는 무소유사상(無所有思想)이 시의 저변에 깔려있다.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오는 마지막 지점을 상기시키며 부질없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한다. 삶과 죽음은 분리될 수 없기에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일이며 잘 죽는 것 역시 잘 사는 일”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대척점에 있는 것들을 감싸고 이해하는 태도는 한층 깊어진 연륜의 힘이다. 그동안 살아낸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시인의 내부에는 참된 삶을 “격려하는 사유들”이 적재되어 있을 것이다.
40여 년 지갑을 지키던 명함이
직책과 함께 사라졌다
없는 명함은 아침을 먹고
넥타이 메고 출근할 곳도 없다
명함도 없는 지갑이
간편한 복장으로 문화센터도 가고
칠보산을 오르고 탁구 테니스도 치러 간다
문우들과 한두 줄 시 쓰는 얼굴이
대신 명함이 되었다
칠순에 등단하고
매년 오두막 같은 시집을 짓는다
미분양되어 한뎃잠을 자는 시집
명함이 되어 낯선 손으로 건너간다
웃으며 감사히 받아갔는데
잘 읽었다는 소식은 없다
― 「시집이 명함이다」 전문
「시집이 명함이다」는 명함이 “있던 때”와 명함이 “없는 때”로 분류된다. 개인의 외적 신상 정보를 담아 타인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명함은 사회적 관계를 원활하게 이어주는 도구이다.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어 퇴직 후 직장이 없어지면 명함도 사라지고 인맥마저 단절된다. 경쟁력은 연결된 힘에서 나온다. 신뢰로 이어지는 인맥 또한 ‘제3의 자본’이라 불리는 사회적 자본이다. 한 개인이 참여한 사회적 관계를 통해 개인에게는 없는 다른 사람의 자원을 동원해 협동으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결된 힘이 모든 분야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등장하고 연결된 사람과 연결되지 못한 사람의 격차는 더욱 크다고 한다. 경력이 단절되고 명함을 주고받아야 할 자리에서 나를 대신할 것이 없을 때 자존감은 추락한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초대관장과 안산시청 주민생활국장을 역임한 시인은 직책이 사라지자 40년을 함께한 명함도 떠나갔다. 넥타이 메고 출근할 곳이 사라진 시점을 계기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명함도 없는 지갑을 들고 간편한 복장으로 문화센터를 가는 일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지만 직책이 없다는 허전함이 뒤따른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시 쓰기였다.
늦깎이로 당당히 등단한 시인은 이제 시집이 명함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시집 속에는 살아온 지난날의 족적이 선명히 찍혀있으니 이보다 확실한 명함이 어디 있으랴. 한 편의 시를 위해 새벽 산을 오르고 잠을 설치며 시편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을 완성하지만 시인의 노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별반 관심이 없다. 시집을 받아가고도 아무 반응이 없으니 시인은 섭섭함을 감출 수가 없다. ‘쓸모없는 힘’으로 시는 살아간다고 한다.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 시가 어떤 부나 권력의 쓸모로 쓰였다면 시는 일찍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대다수에게 외면당하면서도 시를 끔찍이 사랑해주는 소수의 독자와 시인이 있기에 시는 아직 존재한다. 세상의 가치 기준과 시인이 살아가는 기준이 다르기에 명함으로 건네준 시집의 행방이 궁금해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미분양되고 한뎃잠을 자도 피와 땀이 깃든 시집은 시인에게 세상의 어떤 명함보다 소중한 명함이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마음껏 활짝 웃어보고 싶었다
남들이 호탕하게 웃거나
시원하게 입 벌리고 말을 쏟아낼 때
자꾸 밖으로 나오려 안달을 해서
미소로 대신하거나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꼭꼭 감추고 싶은 이
가지런한 이로 바꾸고 싶은 때도 있었다
윗니는 요철이 심한 아버지 닮았고
아랫니는 삐뚤빼뚤한 어머니를 닮았다
숨기고 구박하며 칠십오 년을 살았다
오랜 세월을 씹어서 아플 때가 되었는지
못난 앞니들은 멀쩡한데
가지런한 어금니들이 말썽을 부린다
다섯 개를 뽑아내고 새 이로 갈아 끼웠다
굽은 소나무 선산을 지키듯
못 배운 자식 고향 노부모 봉양하듯
홀대받은 삐뚤빼뚤한 앞니가
남은 생을 힘겹게 보듬고 간다
― 「 홀대해서 미안하다」 전문
누구에게나 ‘드러내고’ 싶은 것이 있고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 부끄럼을 타는 사람이나 치열이 고르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자신의 약점을 타인과 비교하며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기도 한다. 요즘은 치과 기술이 발달해 희고 가지런한 이로 바꿀 수도 있고 튀어나온 치아도 감쪽같이 교정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그 흔하던 뻐드렁니도 이가 다 빠진 오무래미 노인도 보기 힘들다.
시인 역시 꼭꼭 ‘감추고 싶은’ 것이 있어 호탕하게 웃지도 못하고 미소로 대신한다. 웃을 때마다 들쑥날쑥한 치아가 콤플렉스로 작용한다. 정도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열등감을 품고 살아간다. 열등감은 성장 과정에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한 열등감은 생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의 열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미국의 정신의학자인 제롬 프랭크는 “모든 정신장애는 기가 죽어서 생기는 병이며, 기를 살리는 것이 모든 치료 방법의 공통적인 요인”이라고 했다. 건강백과에 실린 글을 살펴보니 자신의 운명을 역전시킨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수학을 못 하는 열등생이었고, 특허수가 1000종이 넘는 발명왕 에디슨은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고, 인종차별이 심하던 때에 천대받던 흑인 음악 로큰롤로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은 엘비스 프레슬리는 첫 오디션에서 다시 트럭 운전이나 하라는 악평을 들었다고 한다. 1990년대 현대 대중음악에 막대한 영향력을 남긴 K팝의 시초이며 문화 대통령으로 불리는 가수 서태지 역시 첫 방송 오디션에서 혹평으로 쓴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열등감을 뛰어넘어 그 열등감을 동력 삼아 끝내 성공을 쟁취했다.
오랜 세월을 사용한 가지런한 어금니들이 말썽을 부려 다섯 개를 뽑아내고 새 이로 갈아 끼웠다는 시인, 이제는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홀대받은 삐뚤빼뚤한 앞니가 남은 생을 보듬고 있다.
주량을 지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어서 번번이 실수를 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술은 적당하면 약이 되지만
너무 마시면 독이 된다
어떻게 하면
적당히 기분 좋게 마실 수 있을까
딱히 묘약은 없다
주님 선물 하나 주세요
그렇게 좋은 술을 주셨으면
적당히 마실 수 있는 묘약도 주셔야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고생을 하며 떠나갔나요
너무 과하게 마시면
빨간 불이 들어오는 신호등 하나 주세요
기도가 통했는지,
어느새
내 얼굴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 「주酒님의 선물」 전문
자신의 주량을 지키는 것도 중용(中庸)이다. 절제(節制)라는 말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특히 술자리에서 절제는 쉽지 않다. 쾌락은 인간의 삶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쾌락을 최고선으로 추구하게 되면, 개인의 보람된 삶과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많은 선(善)들이 피해를 입거나 희생당한다고 한다. 주변에서 다른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음주운전, 주취폭력도 발생한다.
중용(中庸)은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이른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은 모든 사물이 정도(程度)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의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갑골문에서 중(中)은 깃대를 뜻한다. 깃대에 매달린 깃발은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지만 깃대는 중심을 잡고 움직이지 않는다. 이처럼 중용은 부족함이 있는 것인지 지나친 것인지를 살펴서,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행하는 판단력이다.
얼마 전 만취한 운전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홉 살 아이를 치여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한 개인의 쾌락이 꽃봉오리 같은 아이의 일생을 처참하게 짓뭉개버렸다.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대가는 술이 사람을 마셔버린 끔찍한 결과이다. 이두철 시인도 주량을 지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어서 번번이 실수를 한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하면 적당히 기분 좋게 마실 수 있을까 궁리해도 딱히 묘약은 없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의지뿐이다.
“너무 과하게 마시면 / 빨간 불이 들어오는 신호등 하나 주세요//기도가 통했는지,//어느새/내 얼굴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주(主)님과 주(酒)님이라는 동음이의어를 능청스럽게 슬쩍 접목시켜 버렸다.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주(主)님과 연결한 재치가 뛰어난 작품이다.
칠보산에 오늘이 솟았다
동쪽 하늘이 열리면 아침이 떠오른다
어둠을 깎아 새벽을 연
오늘은 근육질이다
세찬 비바람이 불어도
폭설이 퍼부어도
아침은 어김없이 오고
밤새 불을 밝혀 또 하루를 만든다
선물처럼 날마다 오지만
오늘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을 짓기 위해
나는 소중한 하루를 꺼내 뼈를 깎고 피를 말린다
선물 같은 오늘을 보내면
여생이 하루 줄어든다
―「오늘의 성분」 전문
새벽마다 칠보산을 오르는 이두철 시인은 칠보산을 품고 사는 시인이다. 늘 오는 아침이지만 어둠을 밀어내고 아침이 오기까지는 세상을 다스리는 절대자의 힘이 작용한다. 누가 감히 태양을 밀어 올려 아침을 부르겠는가. 한번도 우주의 질서는 무너지지 않았다. 어둠을 깎아 새벽을 연 오늘은 근육질이다. 선물처럼 날마다 거저 받는 오늘을 받아보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시인 역시 오늘을 짓기 위해 잠을 털어내고 게으름과 싸우며 힘든 이른 산행을 하는 중이다. 그는 안일함에 빠지려는 자신과 타협하지 않는다.
소중한 오늘을 받았으니 남은 여생에서 또 하루가 빠져나갔다.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줄어드는 시간들, 하루가 다르게 근육이 빠져나가고 병들고 지쳐가는 육신들, 태어남과 동시에 누구나 소멸을 향해 가고 있다. 청춘을 지나 나이가 들면 젊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아는 것처럼 시인은 하루의 소중함을 ‘깨닫는 나이’에 와있다. 오늘의 성분을 분석해보니 “하루라는 선물”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오는 아침은 남은 목숨에서 ‘하루를 제하고’ 받는 것이었다.
기력이 예전만 못 하다
아주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팔십을 바라보는 망팔의 나이
안경 너머로 예쁜 꽃을 볼 수 있고
좁아진 귀로 휘파람새 노래도 들을 수 있고
보수한 이로 고기도 씹을 수 있고
부실한 다리로 지팡이를 짚고 칠보산도 오를 수 있으니
아직 살만하다
굳어버린 머리로 시도 한두 줄 쓰고
노래 부르며 기타도 치고
매일 탁구도 치고
매달 한두 번 테니스도 치고
매일 새벽 칠보산을 오르는 일상은 편안하다
경로당 요양원은 가고 싶지 않지만
어디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그러나
아직은 살만하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 「아직은 살만하다」 전문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은 선비의 절제할 줄 아는 태도를 나타낸다. ‘안분지족’이 심리적인 평온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와 비슷한 안빈낙도(安貧樂道)는 현재 가난한 상황에서도 편안한 마음을 가지며 도를 즐긴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아직은 살만하다」 는 기력이 예전만 못 하다로 시작한다. 못 하지만 아직은 살만하다고 시인은 스스로 위로하며 안경을 낀 눈과 어두워진 귀와 보수한 이, 부실한 다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열한다. 아직은 경로당 요양원은 가고 싶지 않아 굳어버린 머리로 시를 쓰고 시들어가는 몸으로 노래도 부르고 기타도 치고 운동도 하니 아직은 살만하다고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안분지족’과 ‘안빈낙도’가 다 포함된 시인의 일상은 긍정적인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불평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유유자적 살아가는 시인은 행복하고 바람직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신약 마태복음(6:34)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본다. 어떤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느 영역 바깥쪽에 있는 관측자에게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때, 그 시공간의 영역의 경계가 “사건의 지평선”이다. 아무리 근심을 하여도 정작 영역 바깥쪽에 있는 근심의 대상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니 쓸데없는 지나친 근심은 건강만 해칠 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chronos)이며 다른 하나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하였다. 그저 흘러가는 인생은 ‘크로노스’의 시간이지만 그 인생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한다. ‘안분지족’을 실행하는 이두철 시인은 분명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른 갓 넘은 아낙이 죽었다
어스름한 남산 기슭 농약을 마시고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열 손가락 손톱에 검붉은 피멍이 들었을까
두어 평의 풀이 다 뽑혀버렸다
죽을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는 없었을까
나고 죽는 일은 하늘의 뜻
몸뚱이가 내 것이라고
함부로 다루면 큰 탈이 난다
다산 정약용은 남쪽 바닷가에서
십팔 년 긴 세월 책에 혼을 불어넣었고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대정마을에서
세찬 바닷바람에 붓을 갈아 추사체를 완성했다
바닥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사람도
차별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다 받아주지만
바닥은 낯을 가린다
바닥을 딛고 일어선 자만이 하늘을 볼 수 있다
― 「바닥은 낯을 가린다」 전문
우리 선조들은 세상에서 누리는 오복 가운데 ‘오래 사는 것’을 으뜸으로 치며 목숨 수(壽)를 그릇에 새기고 이불 베갯닛에 수를 놓았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은 삶에 애착을 지닌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죽음은 “휴식이 아닌 재앙”이었던 것이다.
한창인 나이에 죽어야 했던 여인, 목숨을 끊는 고통이 얼마나 센지 두 평의 풀이 다 뽑히도록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고 한다. 이 여인도 들이닥친 죽음을 거부하기 위해 손톱에 멍이 들도록 애꿎은 풀만 붙잡고 버틴 것이 아닐까. 힘이 센 죽음에게 끌려 이승의 경계를 넘어버린 여인은 다시 돌아올 길이 없다.
누구나 죽는다는 명제 앞에서 대다수는 죽음은 남의 일인 양 죽음에 대한 준비도 없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
목숨은 하늘의 것, 시인은 자신의 몸뚱이도 함부로 버려선 안 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 고통을 이기고 세상에 큰 업적을 남겼다. 바닥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다 받아주지만 바닥은 일어선 자에게만 하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까지 남에게 신세를 끼치며 떠나는 죽음은 실패한 삶이기에 바닥은 낯을 가린다.
사람도 사람답게 무르익으면 ‘세상의 본’이 되지만 부패하면 ‘사회에 악’을 끼치는 쓰레기 같은 존재로 타락해버린다. 「바닥은 낯을 가린다」 는 한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 여인의 덧없는 죽음을 통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이어지는 「죽음도 삶의 일부」 라는 작품에서도 때가 되면 알아서 세월이 데려갈 테니 너무 힘들어도 죽을 이유 없다고 한다. 아프지 않으면 죽은 것이니 살아있어 아픈 건 당연하며 죽음은 굴곡진 삶의 허리를 펴는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한다.
몽테뉴(Montaigne, M.)는 그의 『수상록(隨想錄)』에서 “어디에서 죽음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곳곳에서 기다리지 않겠는가.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자유를 예측하는 일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잊고, 죽음의 깨달음은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킨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두철 시인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담담하게 죽음마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눈 덮인 광야를 걸을 때는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은
이 발걸음이 훗날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리니*
발걸음 모여 길이 나고
발소리 쌓이면 편안하고 안락한 길이 된다
길도 다니지 않으면 없어지듯
사람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인연이 끊어진다
홀로 세상에 나와 돌아갈 때까지
수많은 갈림길
더러는 좋은 인연을 만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에움길을 간다
편안한 길 만나지 못해
힘들게 물어물어 걸어왔지만
어느 길이 정답인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도 내 발걸음에
누군가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바르게 걷는다
*서산대사의 답설야중거 중에서
― 「이정표」 전문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핏줄처럼 이어져 있다. 길을 찾지 못하면 눈앞에 길을 두고도 헤매거나 먼길을 돌아야 한다. 태초에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환경과 조건을 찾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인류는 길을 만들며 길 위의 삶을 살아왔다. 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마을이 나오고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길과 사람은 하나로 이어진다.
강을 끼고 인류의 역사가 생성되었듯이 길을 통해 인류의 문화는 발전되었다. 하여 길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길을 만들었다. 분명 누군가는 앞서 길을 만들고 누군가는 뒤따라가며 그 길을 밟고 지나가며 길이 된 것이리라. 그러기에 앞서 걷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길은 달라진다. 길도 다니지 않으면 잡초에 덮여 사라지고 사람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점점 멀어져 인연도 끊어진다니 길은 ‘소통이며 서로에게 닿는 통로’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道)는 마땅히 지켜야 할 이치. 만물을 만드는 원리 또는 법칙. 우주의 근본적인 원리를 뜻한다.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마치 어떤 절대적인 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道가 실현되기에는 세상은 너무 어지럽다. 지금 걷는 이 길이 과연 옳은 길인지 끝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평생 걸어야 하는 길, 시인은 어느 길이 정답인지 모르기에 내 발걸음에 누군가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바르게 걷는다고 한다. 이정표가 사라진 세상에서 갈등하는 시인은 올바르게 살기 위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가난한 농부 아들은 유명한 작가를 쓸 여력이 없다 중학 졸업으로 끊긴 짧은 가방끈은 손수 대본을 쓸 능력도 없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대본은 도대체 누가 쓰는 걸까 75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누구인가 또 어디로 가는가” 화두를 던진다
뒤돌아보면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비료값을 벌던 일, 군대 제대하고 책과 담 싼지 6년이 넘은 나를 공무원 시험보라고 밀어 넣는 일은 작가의 무모한 통찰력이 빛나는 대목이다 발령난지 몇 달 만에 장남을 숙직실에 두고 집 전답을 모두 팔아 도시로 떠나버린 가족들 숙직실에서 자고 식당에서 끼니 해결하기를 삼 년 연고지 배치 공문 한 장이 가족이 있는 성남시로 발령을 냈다
누명을 쓰고 대부도로 귀양 갔던 일, 감사받았던 일, 보이지 않은 손이 잘 마무리했던 일들은 작가의 솜씨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순간순간 힘들게는 했지만 흠잡을 데 없는 무난한 작품이다
서산 노을에 걸린 한 인생의 마무리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작가님 지금까지는 연기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제2의 인생을 시인으로 살게 해주었듯 마무리 배역도 잠자듯 떠날 수 있게 잘 좀 써주세요
― 「내 인생의 대본은 누가 쓸까」 전문
이 시집의 표제작인「내 인생의 대본은 누가 쓸까」는 삶의 비의(悲意)와 결핍을 드러낸 상처의 목록’이다. 내면에 잠복한 파문이 번져가고 전심전력으로 살아낸 삶의 저력(底力)이 드러난다.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작가는 인간이 아닌 절대자이다.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난 시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한 채 공장에서 일하느라 책과 담 싼지 6년이다. “그런 나를 공무원 시험보라고 밀어 넣는 일은 작가의 무모한 통찰력이 빛나는 대목이다” 라고 한다. ‘무모한 도전’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으니 오히려 고맙다는 것이다. 누명을 쓰고 대부도로 귀양 갔었지만 보이지 않은 손이 잘 마무리했던 일들은 작가의 솜씨가 돋보이는 대목이어서 흠잡을 데 없는 ‘무난한 작품’이라고 한다. 자신의 운명을 대본으로 쓰고 있는 작가에게 통찰력이 빛났다고 넉살을 떤다. 힘든 환경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온 시인은 “제2의 인생을 시인으로 살게 해주었듯 마무리 배역도 잠자듯 떠날 수 있게 잘 좀 써주세요” 라는 부탁도 잊지 않는다. 훑어보면 결코 녹록지 않은 지난한 삶이었다. 어찌 삶의 고비마다 슬픔이나 고통이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연기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같은 조건이라도 선택한 쪽의 기울기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시인인 ‘랠프 에머슨’은 “얄팍한 사람은 운을 믿고, 환경을 믿는다. 그러나 강한 사람은 원인과 결과를 믿는다”고 했다. 결과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에 요행은 없다. 현실에 굴하지 않고 환경을 초월한 시인의 원동력은 “끈기와 성실”이다. 시인은 상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열정, 그 이상의 기운을 시의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내 인생의 대본은 누가 쓸까」 는 자신에게 배당된 슬픔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작품이다. 이런 의연한 태도가 이두철 시인의 넉넉한 인품을 짐작하게 한다. 한층 사유가 깊어진 6시집은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삶의 성찰을 구도자(求道者)적 시선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두철 시인
전북 고창 출생
「미래시학」으로 등단
시집『계단 끝에 달이 뜨네』
『소반』
『붉은 찔레꽃』
『가을 벚꽃』
『달동네에 달이 없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초대관장 역임
안산시청 주민생활국장 역임
홍조근정훈장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