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020 / 인생은 나그네 길 (창47:7-10)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 애굽 전역에 큰 가뭄이 들었던 때 되어진 일로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사연을 듣게 된 야곱이 요셉의 권유로 기근을 피해 온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주한 후 애굽 왕 바로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연로한 야곱을 만난 바로는 야곱에게 나이가 얼마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말해도 됐을 것을 야곱은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 조상들이 평균 구백 살 대를 살았고,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175년, 아버지 이삭이 180년을 산 거에 비하면 130의 나이가 짧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바로에게 했던 대답에서는 야곱이 자기 나이가 얼마인지를 알리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나그네 길의 세월’을 살았다는 것과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에서 우린 인생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야곱은 자기의 인생을 ‘나그네 길의 세월’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야곱은 자기 인생은 물론이고 조상들의 인생까지도 ‘나그네 길’이라고 했던 것일까요?
인생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티비 사극 같은 데서 보면 과객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나그네를 지칭하는 옛말입니다. 그런데 ‘과객’ 그러면 사람들은 ‘지나가는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의미상으로는 맞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과객이라 할 때의 ‘과’는 ‘지날 과’가 아니라 ‘과거 시험’을 가리키는 과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과객은 아무나가 아니라 ‘과거를 보러 가거나 또는 과거를 보고 돌아가는 선비’를 칭했던 말이었기에 이 과객이 어디선가 잠시 머물렀다면 이는 거주하기 위함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잠시 거쳐 가기 위함이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과객 곧 나그네라는 말은 분명한 목적지가 있었기에 현재 자리에서 ‘머무는 자’가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지나간다고 하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이 또한 지나 가리라.’는 유명한 명구가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이 현자들을 불러 놓고 자신이 고통의 순간을 만났거나 혹여 자만이라도 하게 될 때면 이를 깨닫고 극복하게 해주는 경구를 추천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한 신하가 ‘이 또한 지나 가리라.’는 문장을 제시했고 이에 알렉산더가 만족을 표했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합니다.
주위에서도 이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엔 이 경구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 가리라.’는 말에서 ‘주어’가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할 때면 고난의 때가 그치거나 멈추기까지 인내하며 낙심하지 말자는 의미로 사용합니다만, 현실에서는 이미 찾아온 고난이 저절로 지나가 주는 법은 없습니다. 이미 실패한 일이 알아서 지나가고 성공이 찾아와 줄 리도 만무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지나가는’의 주어가 고난이나 역경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실패나 환난의 때를 만나게 되면 ‘이 또한 지나 가리라.’가 아니라, 주어를 나 자신으로 하여 ‘이 또한 지나가자.’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나가고 내가 극복할 일입니다. 이는 수동적으로 역경이 물러나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역경을 극복해서 지나가려고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린 세상을 나그네 길로 살되 천국이라는 분명한 목적지를 잃지 말아야 하며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인생이기에 어떤 고난이나 어려운 순간에서라도 거기 머물며 당하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발동하여 그 순간을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그네는 지나가는 사람일지언정 결코 ‘떠돌이’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잘 아시는 방랑 시인 김삿갓을 예로 들자면 우선 방랑이라는 말 자체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뜻하는 말이고, 실제로 그가 쓴 시조를 봐도 ‘차죽피죽 화거죽, 풍타지죽 낭타죽.’이라 해서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나는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김삿갓은 가고자 하거나 가야만 하는 목적지가 없이 그냥 여기저기를 떠도는 인생이었기에 떠돌이인 것입니다.
반면에 나그네는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잠시 머무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떠돌이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나그네 역시도 당장엔 떠돌이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나그네에겐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야곱이 조상들과 자기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 했던 것은 자신들이 돌아갈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천국 곧 ‘하나님 나라’였던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까지 얻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만 문제는 아직은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상태를 신학적으로는 ‘already, but not yet.’라고 하는데, 번역하면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인생은 누가 됐든지 현재는 ‘나그네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떠돌이 인생은 아닌 것이 성도에겐 가게 될 분명한 목적지 곧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야곱은 자기가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로서 세상을 헤치며 살아온 인생이 130년 되었지만, 살아온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기에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렸을 때 누군가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내 인생도 나그네 길이란 말인가?’라고 물으신다면, 맞습니다.
그럼 또 ‘내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면 내 인생도 험악한 세월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물으신다면, 이것도 맞을까요?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이 험악한 세월을 살지 않으려면 어찌하면 될까요?
이 답을 찾기 위해 우린 야곱의 인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야곱은 신앙적으로나 세상적으로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욕심이 많았습니다. 나만 잘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랬기에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 형, 아내, 외삼촌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까지 속였던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는 이런 인생을 ‘부메랑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메랑이란 기역자로 구부러지게 깎아 만든 도구로 사냥할 때 사냥감에게 던져서 맞춰 잡는 무기인데, 이게 목표물에 맞지 않으면 공중에서 빙 돌아서 던진 사람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이처럼 과녁에서 빗나가면 되돌아온다고 했을 때, 이런 상태가 바로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의 헬라어 ‘하마르티아’입니다. 그리고 이 하마르티아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를 뜻합니다.
이 부메랑의 원리에 의해 신앙 안에서도 과녁을 빗나간 죄는 내게로 되돌아와 그 죗값으로 세상을 죽겠다. 죽겠다 싶은 험악한 세월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우린 죽겠다 죽겠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이제라도 과녁을 제대로 맞히면 됩니다.
그렇다면 알아야 할 것이 인생에서 과녁을 제대로 맞힌다는 것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을 보셨겠지만,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절대 강자인 종목이 양궁입니다. 그런데 한국 양궁에서는 ‘올림픽 메달 따는 것보다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게 더 어렵다.’고 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한 선수가 올림픽 양궁에서 금메달을 따기까지 예선에서부터 결승까지 그리고 그 전에 국가대표로 선발되기 위한 각종 대회를 통틀어 양궁 선수들은 매일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아왔을까요?
과녁, 그것도 10점의 정중앙인 엑스 텐을 맞추기 위해 날마다 과녁 앞에 서서 매 순간을 과녁에만 집중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훈련과 노력과 열심히 있었기에 정작 시합에서는 과녁을 빗나가는 법이 없게 된 것입니다.
죄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양궁 얘기가 왜 나오냐고 하시겠지만, 과녁을 맞힌다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 우리도 과녁을 빗나가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면 과녁을 맞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과녁을 빗나간 것’을 죄라고 한다면, ‘과녁을 맞히는 것’은 무엇이라 할까요?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양궁 선수들은 시합 때 과녁을 빗나가지 않기 위해 평소에 늘 눈만 뜨면 과녁 앞에 서고, 과녁을 맞히는 훈련으로 매시간을 보냄은 물론, 과녁에 집중하기 위해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과녁만 생각합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자니 우선은 우리가 인생에서 빗맞추지 않기 위해 우리가 늘 집중해야 할 과녁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뭘까요? 우리가 인생에서 빗나가지 말아야 할 과녁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 믿음이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늘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선다면, 우리의 믿음 역시나 하나님을 빗나가는 일이 없게 될 것이고 결국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에게 제대로 꽂혔기에 우리 인생엔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은 그렇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그런 야곱에게는 믿음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야곱은 ‘믿음의 울타리’ 안에는 있었으나 야곱 ‘자신의 믿음’은 없었다는 게 야곱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믿음의 울타리 안에만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믿음이 확고하십니까?
우리 인생이 험악한 세월이 되지 않으려면 이 둘 사이에서의 확실한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과 자기 믿음 안에 있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야곱을 보세요. 그는 자기 믿음이 없었기에 그가 했던 모든 행동은 다 하나님과 연결되는 믿음이 되질 못하고 하나님을 벗어나는 죄로 연결되어 버립니다.
물론 세상적인 방법으로 형과 아버지를 속이는 일엔 성공했기에 야곱은 장자권에 축복권까지, 얻고자 한 모든 것을 얻긴 했지만, 야곱의 그런 모든 행동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것이었기에 그의 인생은 죄로 연결되었고 그 결과 얻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송두리째 잃은 채 도망치듯 가출해야만 하는 험악한 세월로 빠져들게 된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살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믿음은 없이 살았더라도 믿음의 울타리 안에는 있었다는 것이 야곱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야곱이 그저 믿음 없이 살았다면 한 시대 속에서 숱한 불신자 중의 하나로 인생이 끝났겠지만,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손을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그 믿음의 울타리 안에 있었기에 믿음이 없었음에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야곱과 함께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야곱은 가는 곳마다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어느 한 번도 야곱이 먼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께 기도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이 말인즉 그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그를 찾아내셨고 하나님 편에서 먼저 그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저나 여러분 각자의 믿음 여부를 떠나 어쨌든 우리가 교회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울타리 안에 있는 한은 비록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인생이 험악한 세월을 만났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중단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불신자를 위한 중보기도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불신자라도 우리가 그를 위해 중보기도의 울타리를 쳐 준다면 하나님은 블신자가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하는 나에게 응답을 주시기 위해서라도 내가 중보한 그 불신자를 위한 역사를 발동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전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장에 상대방이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가 믿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만 있다면 그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죄를 짓는 것은 불행이지만, 그 죄를 회개하고 극복한 사람에게는 훗날에 간증이 됩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면 그는 실패가 있었던 사람이었으나 그 실패를 딛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실패와 승리의 분깃점이 그의 인생 중에서 어느 부분이었는가가 중요한데, 그 순간이 바로 얍복강 가에서의 ‘강제 기도’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얍복강 가에서 야곱의 했던 일을 ‘강제 기도’라는 말을 쓰는데 이유는 성경을 보면 얍복강 가에서도 야곱은 여전히 소위 잔머리를 굴립니다. 가족과 소유를 분산해서 시간차로 강을 건네 보내는데 그렇게 했던 의도는 혹시라도 형이 자기 뇌물을 받고 자기를 죽이려는 마음이 변하지는 않을지, 혹은 형이 죽인다 해도 자기가 아닌 가족과 소유가 먼저라면 자기 살길을 찾을 시간은 생기겠지 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꾀 저 꾀 다 짜내서 살길 찾으려고 홀로 남은 야곱에게 ‘어떤 사람’ 곧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찾아옵니다.
창세기 32장에서는 그 사람이 야곱과 날이 새도록 씨름했다고 했는데 이게 하나님이 야곱에게 강제로 시키신 기도였던 겁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이 시키신 강제 기도였지만 그래도 기도한 야곱이었기에 드디어 하나님은 야곱에게 기도 응답의 복을 주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다시 말해 끝내 믿음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강제로라도 복을 주시기 위해 강제로라도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야곱은 실패한 사람이지만 순간의 과정만 놓고 보면 자기가 생각했고 실행했던 일에서는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다만 야곱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일이 틀어졌기에 최종적으로는 실패한 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찾아야 합니다. 야곱이 다 성공한 듯했다가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알지 못해서 못 한 일이 무엇인지를.
야곱은 계속적으로 ‘기도의 타이밍’을 놓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기도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누구라도 인생을 하나의 선분으로 놓고 볼 때 그 선은 ‘험악한 세월’과 ‘복 있는 인생’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뉘는 지점’이 바로 ‘기도의 타이밍’입니다.
예를 들어 인생을 80으로 놓고 볼 때 기도의 타이밍에 따라 험악한 세월과 복 있는 세월의 분량이 반비례하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기도한다면 80년 내내 복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80이 다 되도록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평생 나는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는 후회밖에는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한 번 따라 하세요.) “기도의 타이밍은 / 빠를수록 좋다.”
야곱이 바로 앞에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한 것과 그가 바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바로를 떠날 때 그를 위해 축복 기도를 했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전엔 기도의 타이밍을 놓치고 살았기에 험악한 세월을 살았지만 얍복강 가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강제 기도 이후 야곱은 매사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점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우리의 인생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 길이기에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믿음이라는 피난처’가 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방패’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내 앞에 있는 문제를 험악하다고만 하지 말고 여러분에게 있는 믿음을 발동해서 인생의 험악한 것들 모두를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강제 기도 시키시는 기도 제목이라 여겨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이제부터의 삶이라도 복 있는 인생으로 바뀌어 살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