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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河陽) 금호서원(琴湖書院) 갑자년에 세웠다. : 허조(許稠) 세종조의 정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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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917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 10월 27일 갑술 1883년 光緖(淸/德宗) 9년
○ 咸陽幼學許寅斗疏曰, 伏以臣, 遐土之愚夫, 名祖之不肖孫耳。 懵蔑知識, 何敢發言於重大之禮? 而粗具彝性, 疾痛則必呼天呼父母, 今玆之冒瀆, 便是疾痛之呼也, 欲望聖明之垂察焉。 臣之先祖左議政文敬公臣稠, 本河陽人也。 資稟純粹, 識度淵亮, 童丱志于學, 日誦小學·大學·中庸, 旣長, 師事文忠公臣權近, 篤修聖賢之業, 精思力踐。 文忠亟稱之曰, 異日典禮我國者, 必斯人。 太祖丁丑, 典成均館簿, 釐正釋奠儀, 太宗丁亥, 以書狀官, 朝京師, 凡事涉於制度者, 悉採悉書以東還。 過闕里, 謁宣聖廟, 見江都相董氏, 齋許氏從祀, 楊雄被出, 建白于朝, 施行。 後爲禮曹參議, 慨念麗季五禮儀失傳, 乃援唐·宋典, 取朝廟禮樂士庶喪祭, 酌古參今, 悉加撰定。 自是常提調儀禮詳定, 上書建學堂, 又請置學四部, 皆從之。 其提調, 奉常寺也, 奉常之事, 悉心措劃, 謬者正之, 廢者擧之, 巨細畢張, 俱中儀式。 壬寅, 太宗賓天, 朝儀百官喪制, 衆曰, 旣葬釋衰, 淡服陪祭原廟。 文敬駁曰, 君臣一體, 今聖孝篤至, 衰絰三年, 獨群臣旣葬卽吉, 可乎? 請治事服淡, 陪祭着衰終制, 上從其議。 世宗癸卯, 承命撰續大典曰, 是書培養國脈之本, 不可苛刻, 凡一時畯法, 竝改之。 時俗有爲父母, 只行百日喪, 文敬諭民以禮, 勸行三年喪, 時俗治喪尙浮屠, 文敬丁內外艱, 一依朱文公家禮, 士庶遵用。 戊午拜右議政, 陞左議政, 與領相翼成公臣黃喜, 同心輔政, 措一世於三代之治。 儒先錄云, 世宗大王誠東方之舜·湯也, 三十餘年之太平, 莫不以得賢相爲本, 故如許稠之正大, 黃喜之識大體, 出而爲相, 當時人才之盛, 不容勝言。 故許稠之卒, 虛其位者二年, 是以配享於世宗廟庭, 賜額於琴湖書院, 朝家之崇報, 士林之尊慕, 如是其重且大焉, 而四百餘年, 奉以俎豆之禮矣。 書院則年前混入於撤罷之中, 非但多士之齎鬱, 抑亦朝家之欠典, 實爲子孫之痛恨也。 故相臣李瀰, 敍文敬遺事曰, 國朝相業, 輒曰, 黃·許爲首, 黃翼成, 以器量, 文敬, 以禮行, 同居三年, 贊成隆治。 自當時觀之, 器量之得力於事功者, 顯而易見, 禮行之受效於家國者, 微而難知, 禮行之效, 非事功之所軒輊也。 以古聖賢經訓, 律心而勵行者, 獨文敬先倡之, 其後寒暄·一蠹·靜庵·晦齋·退溪諸賢繼出, 大闢洙·泗·洛·閩之統, 士林以尊奉晦·退之心, 奉慕於公者, 不亦宜乎? 以此觀之, 文敬之與黃翼成同功一體, 而學問禮敎之功, 則尤有別焉。 夫何翼成之院, 則依舊奉享, 文敬之院, 則鞠爲茂草, 得無有損於朝家一視之禮乎? 臣情理所感, 不避猥越之誅, 號泣而陳之。 伏乞聖明, 俯垂鑑諒, 特降文敬公書院復設之命, 則神靈亦必感泣於九泉之下, 而遺孫輩, 生當殞首, 死當結草矣。 臣等無任屛營祈懇之至。 臣無任云云。 省疏具悉。 復院與否, 非本孫所可陳疏也。
20-10-27[34] 선조인 문경공 허조를 배향하는 서원을 다시 세우라는 명을 내려 줄 것을 청하는 함양의 유학 허인두의 상소
○ 함양(咸陽)의 유학 허인두(許寅斗)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먼 지방의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훌륭한 조상의 불초한 손자일 뿐입니다. 지식은 아무 것도 없는데 어찌 감히 중대한 예(禮)에 대하여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대략 타고난 성품을 갖고 있는 자는 병으로 아프면 반드시 하늘과 부모에게 호소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지금 번독함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은 바로 병으로 아파서 호소하는 격이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의 선조 좌의정 문경공(文敬公) 신 허조(許稠)는 관향(貫鄕)이 하양(河陽)입니다.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식견과 도량이 깊고 밝았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날마다 《소학(小學)》ㆍ《대학(大學)》ㆍ《중용(中庸)》을 외우고, 장성해서는 문충공(文忠公) 신 권근(權近)을 스승으로 섬기며 성현의 사업을 독실히 닦고 정밀히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니, 문충공이 자주 칭찬하기를, ‘뒷날 우리나라에서 예를 맡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태조 정축년(1397)에 성균관 전적이 되어 석전의(釋奠儀)를 개정하였고, 태종 정해년(1407)에 서장관으로 중국에 조회를 가서는 제도에 관계된 일은 모두 채집하여 기록해 가지고 귀국하였습니다. 궐리(闕里)를 지나다가 공자묘(孔子廟)를 배알하였는데, 공자묘에 강도(江都)의 정승 동씨(董氏)와 노재 허씨(魯齋許氏)를 종사(從祀)하고 양웅(揚雄)을 내친 것을 보고, 조정에 건의하여 문묘(文廟)에도 이와 같이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뒤에 예조 참의가 되었는데 고려말의 《오례의(五禮儀)》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개탄하여 당송(唐宋)의 법전을 끌어다가 조묘(朝廟)의 예악(禮樂)과 사서인(士庶人)의 상제(喪祭)를 취하여 고금(古今)을 참작해서 모두 찬정(撰定)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항상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의 제조를 맡아 학당(學堂)을 세울 것을 상소하고 또 사부(四部)에 학당을 둘 것을 청하니, 모두 따랐습니다. 봉상시 제조가 되어서는 봉상시의 일에 대해서 마음을 다해 조처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폐지된 것은 일으켜서 크고 작은 것이 모두 펴지게 되었는데, 모두 의식(儀式)에 맞았습니다.
임인년(1422, 세종4년)에 태종이 승하하자 조정에서 백관의 상제(喪制)를 의논하였는데, 뭇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미 장례를 지냈으니 최복(衰服)을 벗고 담복(淡服) 차림으로 원묘(原廟)에 배제(陪祭)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문경공이 반박하기를, ‘군신(君臣)은 일체이다. 지금 성상의 효성이 독실하고 지극하여 최질(衰侄)을 하고 삼년상을 마치려고 하는데, 유독 신하들만 이미 장례를 지냈다고 길복(吉服)을 입어서야 되겠는가. 정사를 볼 때는 담복을 입고 배제할 때는 최복을 입고 삼년상을 마치소서.’ 하니, 상이 그 의논을 따랐습니다. 세종 계묘년(1423)에 명을 받들어 《속대전(續大典)》을 만들고 말하기를, ‘이 책은 국맥(國脈)을 배양하는 근본이니 가혹하고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무릇 당시의 엄격한 법을 모두 고쳤습니다. 당시의 풍속이 부모를 위해 단지 백일상(百日喪)만 지냈는데, 문경공이 예로써 백성을 타일러 삼년상을 지내도록 권하였습니다. 당시의 풍속이 초상을 치르는 때에 부처를 숭상하였으나, 문경공은 부모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를 따르니 사서인(士庶人)도 그것을 준용하였습니다.
무오년(1438, 세종20)에 우의정에 제수되었고, 좌의정에 올라서는 영상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함께 한 마음으로 정사를 보필하여 일세(一世)를 삼대(三代)의 다스림에 두었습니다. 《유선록(儒先錄)》에 이르기를, ‘세종 대왕은 참으로 동방의 순(舜) 임금과 탕(湯) 임금인데, 재위 30여 년 동안 태평을 누린 데는 어진 재상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조 같은 이는 공명정대함으로, 황희 같은 이는 식견과 체통으로 나아가 재상이 되었으니, 당시 인재의 성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허조가 죽은 뒤에 2년 간 그의 자리를 비워 두었고, 이러므로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금호서원(琴湖書院)에 사액(賜額)을 내렸으니, 조정의 숭보(崇報)와 사림의 존모(尊慕)가 이와 같이 중하고도 컸으며 4백여 년 동안 제사를 받들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원(書院)이 몇 해 전에 철폐하는 대상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많은 선비들이 답답한 마음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조정의 흠이 되는 일이어서, 실로 자손이 통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미(李瀰)가 문경공의 유사(遺事)에 서문을 쓰기를, ‘국조(國朝)의 재상의 사업은 번번이 「황희와 허조가 으뜸인데, 익성공 황희는 기량(器量)으로, 문경공 허조는 예행(禮行)으로 3년 동안 조정에 함께 있으면서 융성한 정치를 도와서 이루었다.」 하였는데,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기량으로 공로를 세운 것에 득력(得力)한 것은 드러나서 알기가 쉽고, 예행으로 집안과 나라가 효험을 받은 것은 미세하여 알기 어려우나, 예행의 효과는 공로를 세우는 것과 우열이 없습니다. 옛날 성현의 경서(經書)의 가르침을 가지고 몸을 단속하고 행실을 닦는 일은 유독 문경공이 맨 먼저 주창하였고, 그 뒤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잇따라 나와서 수사낙민(洙泗洛閩)의 계통을 크게 열었으니, 사림이 회재와 퇴계를 높이고 받드는 마음으로 공(公)을 받들어 사모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경공은 익성공 황희와 공(功)은 마찬가지이지만, 학문과 예교(禮敎)의 공은 더욱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익성공을 배향하는 서원은 예전처럼 봉향(奉享)되고 있는데, 문경공을 배향하는 서원은 무성한 풀로 가득차 있습니까. 이것은 조정에서 차별없이 대우하는 예에 손상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신은 인정과 도리상 느끼는 바가 있어 외람되고 참람하다는 책망을 피하지 않고, 성상께 목놓아 울면서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굽어살피고 양찰하시어 특별히 문경공을 배향하는 서원을 다시 세우라는 명을 내려 주신다면, 신령(神靈)도 반드시 저승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며, 후손들도 살아서는 목숨을 바칠 것이며 죽어서는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신 등은 두려움에 떨며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서원을 다시 세울지의 여부는 본손(本孫)으로서는 상소할 문제가 아니다.”
하였다.
[주-D001] 공자묘에 …… 종사(從祀)하고 : 강도의 정승 동씨는 동중서(董仲舒)를 말한다. 그는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의 학자로 처음에는 강도의 정승이 되었고, 뒤에는 공손홍(公孫弘)의 미움을 받아 교서왕(膠西王)의 정승으로 옮겼다. 무제에게 상주(上奏)하여 유교(儒敎)를 국교로 정하게 하였다. 노재 허씨는 허형(許衡)을 말한다. 그는 원(元) 나라 때의 학자로 세조(世祖) 때에 집현대학사 겸 국자좨주(集賢大學士兼國子祭酒)가 되고 중서 좌승(中書左丞)까지 올랐다. 경전(經傳)ㆍ자사(子史)ㆍ예악(禮樂)ㆍ명물(名物)ㆍ성력(星曆)ㆍ병형(兵刑)ㆍ식화(食貨)ㆍ수리(水利)에 널리 통했고, 특히 주자학(朱子學)을 신봉하여 유인(劉因)과 함께 원대(元代)의 이대가(二大家)로 일컬어졌다. 이와 같은 공로로 동중서와 허형을 공자묘에 종사한 것이다.
[주-D002] 수사낙민(洙泗洛民) : 공자(孔子)의 학문과 정주(程朱)의 학문을 말한다. 수사의 제현과 낙민의 제유는 공자 및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여러 제자들로서, 염락관민은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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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919책 (탈초본 134책) 고종 20년 12월 1일 정미 20/23 기사 1883년 光緖(淸/德宗) 9년
○ 慶尙道儒生生員權心夔, 幼學金洪洛·金洪宜·金在天·金在雲·金在玉·金在衡·金在璣·金在英·金在秀·金有秀·金有基·金有仁·金有信·李萬修·李萬英·李秀英·李秀應·李秀八·李秀仁·李仁一·李仁萬, 李仁律·李仁得·李仁賢·李基信, 李基仁·李基德·金聲有·金聲大·金聲遠·金聲達·金相玉, 進士金炳奎, 生員金奎炯, 進士朴遇尙, 生員金禧淵, 幼學金相穆·金相賢·金相仁·金相稷·金相禹·金相義·金相然·金相七·朴秀英·朴秀仁·朴秀三·朴秀達·朴在仁·朴在奎·朴聖天·朴聖仁·朴聖九·朴聖七·朴聖奎·朴聖達等疏曰, 伏以尊賢重道而崇報之, 卽有國之常典, 而不以久遠爲難, 爲賢請陳而進達之, 卽士林之公議, 而不以疎逖爲嫌, 凡有屈而不伸, 廢而不擧, 爲聖朝之欠典, 爲後學之齎鬱者, 則安得不𨃃蹶奔走, 不顧猥越之誅, 齊口仰呼於仁天覆庇之下, 如孺子之有訴於父母之前也哉? 臣等俱是草野賤品, 家地單平, 性天愚駭[愚騃], 雖不能與論於聖朝之美典士林之大議, 而惟是愛君希道之衷慕賢崇奉之誠, 無有間焉。 臣等近伏見先正臣文敬公許稠之後孫許寅斗所上疏批旨下者, 若曰, 復院與否, 非本孫所可陳疏也。 臣等雙擎伏讀, 三復莊誦, 因可以仰認聖念之所在矣。 臣等乃敢繼陳一言, 伏望聖明, 更加垂察焉。 文敬公臣許稠, 卽開國名相, 學問宗師也, 姿質純粹, 識度淵亮, 自童丱志于學, 日誦〈小學〉, 次讀大學·中庸, 文理早透, 旣長, 師事文忠公臣權近, 篤修聖賢之學, 精思力踐, 文忠亟稱之曰, 異日我國典禮者, 非此人而誰也? 逮夫太祖朝丁丑, 典成均簿, 釐正釋奠儀式, 梓布于中外, 太宗朝, 以書狀官, 朝京師, 凡事涉於制度者, 悉採悉書以東還, 過闕里, 祗謁宣廟朝, 見江都相董氏·魯齋許氏從祀, 楊雄被黜, 建白于朝, 施行。 後爲禮曹參議, 慨念麗季五禮儀失傳, 乃援唐宋典故, 採洪武舊制及東國儀禮朝廟禮樂士庶喪制, 參酌損益, 悉加撰定, 自是常提調儀禮評定所, 又上書建學堂, 請置四部學, 皆從之。 其提調奉常寺也, 奉常之事, 悉心措劃, 謬者正之, 廢者擧之, 巨細畢張, 俱十儀式, 惟以輔君澤民, 爲己任, 以定制度, 興禮樂爲根本, 歷事四朝, 憂國如家, 慮事深遠, 知無不言, 言無不盡。 其於興學育才善俗之道, 尤銳意焉, 上顧謂世子曰, 斯人眞宰相也, 柱石也, 又曰, 社稷之臣, 又問世子, 僚友孰賢? 世子擧文學以對, 時文敬以文學, 入侍書筵故也。 太宗賓天朝儀百官喪制, 衆曰, 旣葬釋衰淡服, 陪祭原廟, 文敬駁曰, 君臣一體, 今聖孝篤至, 衰絰三年, 而獨群臣, 旣葬卽吉, 可乎? 請治事以淡服陪祭, 以着衰終制, 上從其議。 世宗朝, 承命撰讀六典[續六典]曰, 是書培養國脈之本, 不可苛刻, 凡一時峻法, 竝改之。 時俗有爲父母只行百日喪, 文敬諭民以禮, 勸行三年喪, 又治喪尙浮屠, 文敬丁內外艱, 一依朱文公家禮, 自是士庶遵行之。 至拜右議政, 陞左相, 與領相翼成公臣黃喜, 同心輔政, 措一世於三代之治。 儒先錄云, 世宗大王, 誠東方之舜·湯也, 三十餘年太平之治, 莫不以得賢相爲本, 故若許稠之正大, 黃喜之識大體者, 出而爲相, 當時人才之盛, 不容勝言, 故許稠之卒, 虛其位者二年。 是以配享於世宗廟庭, 賜額於琴湖書院, 朝家所崇奉, 士林所尊慕, 若是其重且大焉, 而四百年, 奉以俎豆矣。 嚮來諸書院撤罷之時, 表忠賢之尤者以存之, 而文敬之院, 混入於如掃之中, 殆同凡他鄕賢之祠, 而向之英靈陟降之所, 變而作頹垣敗址, 昔之章甫蹌趨之地, 鞠而爲蓬藁之場, 非但多士所抑鬱, 亦爲朝家之欠闕者也。 故相臣李瀰序文敬遺事曰, 國朝相業, 輒曰黃, 許爲首, 黃翼成以器量, 許文敬以禮行, 同居三事, 贊成隆治。 以此觀之, 文敬之與翼成, 同功一體, 而翼成之院, 依舊奉享, 是朝家之所勸忠遂良之義, 而特出於報之以禮待之殊恩也。 奈之何文敬, 則獨不被殊遇之恩, 寧不有損於朝家一視之禮乎? 我東人士之以古賢聖經訓, 律心而勵行者, 實文敬倡之, 其有功於斯文, 著勳於邦家, 豈不章章然可考哉? 嗚乎, 勝國之末, 禮學廢壞, 龍飛之初, 凡百草創, 而文敬獨立凝然, 駐脚於萬馬奔中, 回瀾於百川注裏, 以啓我靑邱三千里禮義之俗, 以開我五賢諸先正之統, 而惟其崇奉之節, 不有表章於存拔之中, 慕向之道, 無有可寓於虔奉之地。 是無他也, 只緣本孫之孱替, 而至於士林之慕向, 則惟以先賢道德學問之繼開, 而不以子孫之隆殺, 則矧乎當今邦運丕昌文化克顯之時, 安可以含默因循, 以避冒瀆之嫌, 而不爲一白於紸䌙之下, 以彰先賢尸祝之暫時沈替哉? 伏乞聖明, 俯憐本孫之零丁, 軫念多士之誠意, 特降文敬公臣許稠書院復設之命, 則不惟斯文之大幸, 抑爲聖朝之盛典, 不惟有光於殿下之德化, 抑亦有辭於祖宗之遺旨矣。 臣等不勝瞻天望雲而千希萬望, 無任云云。 省疏具悉。 建撤無常, 果非重其事之義? 爾等退修學業。
고종 20년 계미(1883) 12월 1일(정미) 맑음
20-12-01[20] 문경공 허조의 서원을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하는 경상도 유생 생원 권심기 등의 상소
○ 경상도 유생인 생원 권심기(權心夔), 유학 김홍락(金洪洛)ㆍ김홍의(金洪宜)ㆍ김재천(金在天)ㆍ김재운(金在雲)ㆍ김재옥(金在玉)ㆍ김재형(金在衡)ㆍ김재기(金在璣)ㆍ김재영(金在英)ㆍ김재수(金在秀)ㆍ김유수(金有秀)ㆍ김유기(金有基)ㆍ김유인(金有仁)ㆍ김유신(金有信)ㆍ이만수(李萬修)ㆍ이만영(李萬英)ㆍ이수영(李秀英)ㆍ이수응(李秀應)ㆍ이수팔(李秀八)ㆍ이수인(李秀仁)ㆍ이인일(李仁一)ㆍ이인만(李仁萬)ㆍ이인율(李仁律)ㆍ이인득(李仁得)ㆍ이인현(李仁賢)ㆍ이기신(李基信)ㆍ이기인(李基仁)ㆍ이기덕(李基德)ㆍ김성유(金聲有)ㆍ김성대(金聲大)ㆍ김성원(金聲遠)ㆍ김성달(金聲達)ㆍ김상옥(金相玉), 진사 김병규(金炳奎), 생원 김규형(金奎炯), 진사 박우상(朴遇尙), 생원 김희연(金禧淵), 유학 김상목(金相穆)ㆍ김상현(金相賢)ㆍ김상인(金相仁)ㆍ김상직(金相稷)ㆍ김상우(金相禹)ㆍ김상의(金相義)ㆍ김상연(金相然)ㆍ김상칠(金相七)ㆍ박수영(朴秀英)ㆍ박수인(朴秀仁)ㆍ박수삼(朴秀三)ㆍ박수달(朴秀達)ㆍ박재인(朴在仁)ㆍ박재규(朴在奎)ㆍ박성천(朴聖天)ㆍ박성인(朴聖仁)ㆍ박성구(朴聖九)ㆍ박성칠(朴聖七)ㆍ박성규(朴聖奎)ㆍ박성달(朴聖達)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엎드려 생각하대, 현인을 받들고 도를 중시하여 숭덕보공(崇德報功)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으므로 오래되었다고 해서 어렵게 여기지 않으며, 현인을 위한 청이 있어 이를 진달하게 되면 이는 곧 사림들의 공의(公議)이므로 멀다고 하여 혐의를 두지 않습니다. 무릇 굽혀져서 뜻을 펴지 못하거나 폐해져서 일으키지 못한 것이 있게 된다면 성스러운 조정의 흠전(欠典)이 되며 후학들이 억울함을 품게 되는 것이니, 어찌 외람되고 분수에 넘친 데 대한 처벌도 두려워하지 않고서 지쳐서 넘어지더라도 쉬지 않고 분주하게 같은 목소리로 인자하신 하늘이 덮어 주고 보살펴 주시는 아래에서 우러러 호소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 앞에서 호소하는 것과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모두 시골에 묻혀 사는 천한 성품들로서 가문과 지위는 한미하고 평범하며 타고난 성품은 어리석어 비록 훌륭한 조정의 아름다운 제도와 사림들의 커다란 의론에 참여할 수는 없겠으나, 오직 임금을 사랑하고 도를 구하는 마음과 현인을 사모하여 숭배하여 받드는 정성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신들이 근래에 삼가 선정신(先正臣)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의 후손 허인두(許寅斗)의 상소에 대해 내리신 비답을 보건대, ‘서원의 복원에 관한 여부는 본손(本孫)들이 상소하여 진술할 일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신들은 두 손으로 받들어 엎드려 읽고 세 번 반복하여 공경히 읊조리고는 우러러 성상의 생각이 어디에 계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이에 감히 한 마디 말을 이어서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한 번 살펴주소서.
문경공 신 허조는 새로 나라를 세울 때의 이름난 재상이며 학문에 있어 존경할 만한 스승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였고 학식과 도량이 깊고 총명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어 날마다 - 원문 빠짐 - 암송하고, 이어 《대학》과 《중용》을 읽어 문리(文理)가 일찍 통하였으며, 성장하여서는 문충공(文忠公) 신 권근(權近)을 스승으로 섬겨 성현의 학문을 독실하게 닦아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였습니다. 문충공이 자주 칭찬하여 말하기를, ‘후일 우리나라의 예를 주관하게 될 자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하였습니다. 태조조(太祖朝) 정축년(1397)에 이르러 성균부(成均簿)를 관장하여 석전(釋奠)의 의식을 바로잡았고, 또 이를 간행하여 중외에 널리 펼쳤습니다. 태종조(太宗朝)에는 서장관으로 경사(京師)에 조회를 가서 무릇 제도에 관계된 일이면 모두 채집하고 모두 베꼈으며, 돌아오는 길에 궐리(闕里)를 지나면서 선성묘(宣聖廟)를 배알하였는데 강도상(江都相) 동중서(董仲舒)와 노재 허씨(魯齋許氏 허형(許衡))가 종사(從祀)되고 양웅(揚雄)이 파출된 것을 보고는 조정에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후에 예조 참의가 되었는데 고려 시대의 《오례의(五禮儀)》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을 개탄스럽게 생각하고는, 이에 당 나라와 송 나라의 전고(典故)를 사례로 인용하고 홍무(洪武)의 옛 제도나 우리나라의 의례, 조정과 묘정의 예악, 사서인의 상제(喪制)를 채집해서, 참작하여 더하고 덜어내어 모두 찬정(撰定)하였으며, 이로부터 항상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제조의 임무를 담당하였습니다. 또 학당(學堂)을 건립하고 사부학(四部學)을 둘 것을 상소하여 청하였는데, 모두 따라 주었습니다. 그가 봉상시(奉常寺)의 제조로 있을 때에는 봉상(奉常)하는 일들을 온 마음으로 조처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폐한 것은 일으켜 세워서 크고 작은 것들이 모두 펼쳐져서 십의식(十儀式)이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오직 임금을 보필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고, 제도를 정하고 예악을 일으키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습니다. 내리 네 조정을 섬기면서 국가의 일을 걱정하기를 마치 집안의 일을 걱정하듯이 하였고 일을 생각함이 깊고 원대하였으며, 아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을 하면 극진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는데,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육성하며 풍속을 잘 교화하는 방도에 대해 더욱 마음을 썼습니다. 상이 돌아보며 세자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진정한 재상이며 주석(柱石)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직의 중책을 맡은 신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세자에게 관료 중에 누가 현명한가를 물으니, 세자가 문학(文學)을 들어서 대답하였는데, 당시에 문경공이 문학으로서 서연(書筵)에 입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의식과 백관들의 상제(喪制)에 대해 모두들 말하기를, ‘이미 장사를 치르고 나면 최복(衰服)을 벗고 담복(淡服)으로 원묘(原廟)에 배제(陪祭)합니다.’ 하였는데, 문경공이 논박하여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는 일체입니다. 지금 성상의 효성이 지극하고 독실하여 최질(衰絰)을 3년 간 입는데, 유독 신하만 장례를 마치자 즉시 길복(吉服)으로 바꾸어 입는다면 옳겠습니까. 청컨대 일을 처리할 때는 담복을 입고 제사에 참석할 때는 최복을 입어서 상제를 마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의견을 따랐습니다. 세종조에 명을 받들고 《속육전(續六典)》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국가의 명맥을 배양하는 데에 근본이 되는 책이므로 너무 가혹하고 각박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한때의 엄정한 법을 아울러 개정하였습니다. 당시의 풍속이 부모를 위하여 단지 백일 간 상례를 행하는 일이 있었는데, 문경공이 예를 가지고 백성들을 깨우쳐서 삼년상을 행하도록 권하였습니다. 또 상을 치를 때에 불교의 의식을 숭상하였는데, 문경공이 부모의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의거하자 이로부터 사서인들이 이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우의정에 제배되고 좌의정에 오르게 되자, 영상(領相)인 익성공(翼成公) 신 황희(黃喜)와 더불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보필하여 한 세상을 삼대(三代)의 태평한 시대로 만들었습니다. 유선록(儒先錄)에 이르기를, ‘세종 대왕은 진실로 우리 동방의 순 임금이나 탕 임금과 같은 분이다. 30여 년 간 태평한 정치를 폄에 어진 재상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지 않음이 없었다.’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조(許稠)와 같이 공명 정대하고 황희와 같이 대체(大體)를 알았던 자들이 나와서 재상이 되었던 것으로, 당시 인재가 번창하였음을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조가 죽자 그 자리를 비워 둔 것이 2년이나 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금호서원(琴湖書院)에 사액(賜額)을 내렸던 것입니다. 조정에서 숭배하여 받든 바와 사림들이 존경하여 사모한 바가 이처럼 중대하였던 것이며, 4백 년 간을 제사하여 받들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여러 서원들을 훼철할 때에 한층 더 충성스럽고 어진이는 드러내어 그대로 보존케 하였습니다마는, 문경공의 서원은 비로 쓴 듯이 한꺼번에 섞여 들어가서 마치 다른 향현(鄕賢)의 사당과 다를 바가 없이 헐리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영령(英靈)이 오르내리던 곳이 이제는 변하여 담도 헐리고 터도 무너져 버렸고, 옛날에 관을 쓴 유생들이 위의를 갖추고 추창(趨蹌)하던 땅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으니, 비단 많은 선비들이 억울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시 조정의 흠결이 되고 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미(李瀰)는 《문경유사(文敬遺事)》의 서문에서 이르기를, ‘국조 재상의 업적에 관해 말할 때는 문득 황희와 허조를 으뜸으로 꼽고 있는데, 황 익성공은 도량과 재간을 가지고, 허 문경공은 예를 행하는 것으로써 함께 의정(議政)이 되어 융성한 정치를 도와 이루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를 가지고 본다면 문경공과 익성공은 공로가 한가지로 똑같은 것인데, 익성공의 원우(院宇)는 여전히 옛날처럼 봉향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에서 충직한 이를 권면하고 어진이를 끌어올리려는 뜻이 있는 것으로서, 특별히 예로써 보답하고 특별한 은혜로써 대우하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문경공의 경우는 유독 특별히 대우하시는 은혜를 입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조정에서 한가지 예로 대우하는 뜻에 결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동방의 인사들이 옛날 성현들이 경전에 남긴 뜻을 가지고 마음을 단속하고 힘써 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문경공이 이것을 수창한 것으로서, 우리 사문에 공을 끼치고 나라에 끼친 공훈을 어찌 뚜렷하게 상고할 수 없겠습니까. 아, 고려 말에 예학이 모두 무너져 버려, 태조가 즉위하던 초기에는 모든 사업이 시작되는 시기였는데, 유독 문경공이 홀로 서서 침착하게 만마(萬馬)가 치닫는 가운데 다리를 딛고 서고, 폭주해 쏟아지고 있는 수많은 시냇물의 물결을 되돌려서, 우리 삼천리 청구(靑丘)를 예의의 풍속으로 이끌고 우리 오현(五賢) 선정(先正)의 계통을 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이를 숭봉하는 의절에 있어서는 빼거나 넣는 과정에서 드러내어 표창함이 있지 않았고 사모하여 숭상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경건히 받드는 지경에 붙이지 못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본손들이 잔약한 때문이었습니다. 사림들이 마음을 기울여 사모함에 있어서, 오직 선현의 도덕과 학문을 계승하고 새로 이어 주는 것만을 생각하였지 자손들이 융성해지고 쇠미해지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현재 국가의 운세가 크게 번창하고 문화가 지극히 밝게 나타난 시대에 있어서야 어찌 감히 예전처럼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외람되게 번거롭게 한다는 혐의를 피하여, 성상께 한 번 아뢰어서 잠시 침체되고 있는 선현의 제사를 드러내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외롭게 영락한 본손들을 굽어 불쌍히 여기시고 많은 선비들의 성의(誠意)를 생각해 주시어서 특별히 문경공 신 허조의 서원을 다시 설치하라는 명을 내려 주신다면, 비단 사문(斯文)에게 커다란 다행일 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성스러운 조정에 성대한 의식이 될 것이며, 비단 전하께서 덕행으로 펴시는 교화에 있어 영예일 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역시 조종(祖宗)이 남겨 준 뜻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신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구름을 바라보면서 이를 데 없이 바라고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세우고 허무는 일에 일정함이 없는 것은 과연 그 일을 중시하는 뜻이 아니다.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용남 (역) |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