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5xjGEFGV
서술자 문제 뒤흔든 '메타-메타 소설'의 출현
심아진 '후예들', 한국소설 최초의 '메타-메타 소설'
(임우기 문학평론가)
G. 루카치, M.바흐찐 같이 걸출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의 소설론에서만이 아니라, 소위 신비평이나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자들의 문학론에서조차 ‘소설의 서술자narrator’ 문제를 깊이 다룬 소설론은, 과문한 탓인지 찾아보기 힘들다.
SNS에서 이 문제를 깊이 다루긴 어렵고, 다만 동학사상의 ‘탈근대적’ 재해석을 통해, 졸저 <<유역문예론>>에서 나름껏 다루고 있음을 먼저 밝힐 수밖에 없다.
저명한 독문학자 안삼환 선생의 가문소설 <<도동사람>>의 서술자를 ‘이상적(理想的) 서술자’로 높이 평가하거나 작가 한강, 김이정, 김애란 등이 낳은 뛰어난 ‘소설’의 ‘서술자’에는 작가의 오랜 절차탁마의 수심(修心 진심ㆍ성심)에서 나오는, 어떤 ‘영혼’의 그림자로서 ‘은폐된 서술자’가 깊이 묘용(妙用)한다는 점을 비평적으로 논한 바 있다.
M. 세르반떼스의 <<돈 끼호떼>>(1605)는 서구 근대소설의 효시로 추대된 인류사적 문화유산이다. 1605년에 발표된 이 경이로운 소설에서 형식적 특성들 중 하나는, ‘전지적 시점(全知的 視點)의 서술자’가 이야기를 하는 중에 ‘작가 세르반떼스’의 존재를 몇 군데에서 드러낸다는 점이다.(민용태 譯, 창비판 <<돈 끼호떼>>, 1권 95~96쪽, 2권 61쪽, ‘작가 세르반떼스’의 다른 별칭으로서 ‘번역자’가 나오는 75쪽, 79쪽 참고)
작가 세르반떼스가 소설 <<돈 끼호떼>>를 쓰는 이야기 안에, 자기 자신 곧 ‘세르반떼스’와 자신이 쓰고 있는 이야기인 <<돈 끼호떼>>를 등장시킨 것이다. 이러한 소설 형식은 일종의 ‘메타 소설meta fition 형식’의 일종으로서 현대소설론에 와서는 이제 특별하거나 ‘새로운 형식’으로 주목받지 못할 듯하다.
하지만, 소설novel의 효시로 인정받는 소설 <<돈 끼호떼>>의 ‘전지적 서술자narrator’가 허구적 이야기 안에, 허구의 바깥에 존재하는 작가 ‘세르반떼스’ 혹은 ‘역사 이야기의 번역자’로서 ‘작가 세르반떼스’를 등장하게 한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돈 끼호떼>>에 등장하는 ‘작가 세르반테스’는 역사적 인물로서 작가 세르반떼스와 동일인(同一人)이지만, 소설의 ‘허구적(초월적, 신비적)’ 시공간을 사는 동안에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의 ‘이상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세르반떼스의 <<돈 끼호떼>>에 대한 세계문학사에서 주어진 비평적 공통점은 ‘본질적 모호성’과, 독자에게 상상의 자유를 주는 ‘비이성적 이성의 문체의식’(숱한 ‘기괴한 말놀이’들), 그리고 광기(狂氣) 어린 기사도(騎士道) 내용이 지닌 상징성 등이다.
이러한 문학적 특징들은 <<돈 끼호떼>>의 ‘서술자’가 소설 속에 불러들인 ‘작가 세르반떼스’는 바깥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 세르반떼스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는 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돈 끼호떼>> 중, ‘서술자’가 호명한 ‘작가 세르반테스’는 ‘서술자 안에 은폐된 신이한 서술자’이라는 점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돈 끼호떼>>의 경우는 그 서술자가 ‘애매모호한 존재’이긴 하지만, 이 모호함 역시 세르반떼스가 창작에 임하는 시간 안에 작동하는 작가 의식의 복합적 변화성 또는 그 역동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돈 끼호떼>>의 플롯 안에 작가 세르반떼스의 존재는,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서술자’의 변화 운동의 흔적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하게, 과연 세계소설사에서 대문호 세르반떼스가 ‘근대 소설의 선구자’라고 칭송되는 것은 이러한 작가의 표면과 이면간의 불화와 부조리의 존재론을 일찌감치 통찰하고 있는 사실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달리 설명하면, 소설 <<돈 끼호떼>>의 서술자 안에 ‘보이지 않는’ ‘神異한 서술자’로서 ‘자기’를 ‘은밀하게’ 등장시킴으로써 광기 들린 騎士 ‘돈 끼호떼’의 엉뚱하고 불합리한 모험 행각에서 ‘신비에 쌓인 존재’의 비밀에 대해 서술할 수 있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역문예론-‘귀신론’의 관점에서 보면, 세르반떼스의 소설가적 천재성은 자신이 쓰는 소설에 세르반떼스를 등장시킨 점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다.
<<돈 끼호떼>>의 이면에 그늘처럼 움직이는 ‘은폐된 서술자’는 귀신의 하나로서 변화에 능하고 예측하기 힘든 존재이다. 세르반떼스를 높이 찬양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 전반에 걸쳐서, 존재론적으로 ‘다면체적이며 다성적(多聲的) 서술자’ 존재의 변주(變奏)로서 나타나고, 중국 근대소설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대문호 루쉰魯迅의 걸작 <<아Q正傳>>에서도 또 다른 형식의 ‘은폐된 서술자’로서 변주되기도 한다.
그 ‘은폐된 내레이터’ 즉 예측 측정이 어려운 목소리의 주인은,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소설 <<아Q정전>>의 서두에 썼듯이, 서술자의 마음 깊이에서 ‘거주하는(里)’ ‘鬼’(귀신)의 존재이다.
내가 유역문예론을 구상하게 된 시점은 2000년 초경이었다. 누군가의 소설을 읽다가 내 뇌리를 스친 것이 전통 판소리의 서술자(소리꾼)처럼 소리꾼이 소리 사설(辭說)의 안팎에서 ‘자유롭게 변신하는 서술자의 존재’ 문제였다.
작가 세르반떼스가 자신이 소설 <<돈 끼호떼>>를 쓰는 중에, ‘작가 세르반떼스’와 ‘<<돈 끼호떼>>’를 생뚱맞게 등장시키는 것은, 자아ego가 아니라 초월적 자아 즉 자기Selbst(C.G.Jung의 개념으로, 무의식의 兩極을 통합하는 성숙한 ‘自己’)이며, ‘유역문예론’에서 보면, ‘은폐된 서술자concealed narrator’(神異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후예들', 심아진 장편소설, 솔출판사. 2023)
심아진의 장편소설 <<후예들>>(2023)에서 ‘은폐된 서술자’가 플롯 안에서 ‘작가’라는 존재로서 등장한다. 작가 심아진이 <<후예들>>이라는 소설 안에 작가 자신이 ‘신이한 존재’로서의 ‘작가’가 되어 등장한다는 의미이다.
작가의 수심修心에 마침내 접하게 되는 ‘신령한 존재’로서 ‘작가’가! 그렇기 때문에 소설 <<후예들>> 안에서 ‘魂어미’라는 神들린 듯한 인물이 등장하여 ‘작가’와 만나고 대화하며, 소설의 시공간에서도 동유럽의 헝가리와 한국을 오가는 광활한 무대 위에 세 여성 주인공들이 고난과 애증 어린 삶을 열심히 이끌어가는 ‘변화하고 역동하는 현실’ 속에, 동시적으로, 아득한 역사 속에서 만주 유역의 북방 초원에서 유럽 대륙의 헝가리 사이를 出征하듯 치열하게 가로지르던 옛 先人들의 魂이 ‘이야기 안에 은폐된 작가’에 의해 수시로 소환된다.
여기서 <<돈 끼호테>>나 <<아큐정전>>에서 보듯이, 옛날과 현재의 시공간들을 자유로이 오가는 시간의 형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은폐된 서술자의 존재론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합리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류의 소설은 ‘애매모호한’ 자유로움을 구가한다! 소설의 제목이 ‘후예들’이라는 것은 이러한 유럽과 북방 초원을 오가던 몽골족이나 북방 초원의 민족의 역사와 내면적으로, 정신적으로 이어진 인간 존재로서 ‘후예’를 가리키는 셈이다.
그러므로 장편소설 <<후예들>>은 ‘소설을 다루는 소설’ 곧 메타소설을 넘어, 아마도 한국소설사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은폐된 서술자’인 ‘신이한 작가’에 의해 이야기되는,--- ‘메타 소설’ 형식 안에 다시 ‘신이한 작가의 관점’이 작용하는, ‘메타-메타소설’(문학평론가 고종석의 <해설> 참고)이라고 말하는 것도 충분히 타당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