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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4: 30 동네에서 나와 - 요 4: 35 추수할 때
요 4: 30 동네에서 나와 -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수가성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도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했고 메시아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사모하고 기다렸던 것 같다.
그들이 그렇게 준비되지 않고서는 그 여자의 말에 그렇게 반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1]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들에게 만나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구원하신다.
사람의 준비란 자신의 죄악 됨과 허무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 마 5: 3-6 –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준비된 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다.
2] 능력이 나타나는 전도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이 이 여인의 전도로 구원받게 되었다.
(1) 전제 - 변화된 삶
이 여인은 예수를 만난 후에 많은 변화를 보였다. 먼저 그의 삶의 목적의 변화를 보아야 한다. 그녀는 삶의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에게 달려간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삶이 전도의 믿거름이다. 그러므로 내가 체험한 것을 증언하는 것이 전도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구원의 체험은 은혜를 깨닫게 하고 은혜를 감사할 대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2) 담대한 증거
이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치부를 주님께서 드러내셨다고 증언하였다. 복음은 자기의 약점을 최고의 강점으로 변화시켜준다.
이처럼 담대하게 증언할 때 전도의 능력이 된다. 바울 사도도 왕이나 총독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증언하여야 한다.
(3) 강권적인 초청
그 여인은 사람에게 강권하였다. 와서 보라. 이 한마디가 듣는 이의 심정을 변화하도록 하였다. 전도는 강권할 때 능력이 나온다.
성도는 강권하여 데려다가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한다. 강권할 때 사람들이 나왔다.
요 4: 31 제자들이 청하여 -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
마을로 음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마을에서 돌아와 스승을 향하여 랍비여 잡수소서였다.
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한낮이 지났으므로 예수와 제자들은 시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에서 구한 음식을 빨리 스승에게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2] 랍비여 잡수소서.
랍비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1: 38, 49. 3: 2, 26. 4: 31. 6: 25. 9: 2. 11: 8)
* 마 23: 7-8 – 7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마 26: 25, 49 –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 막 9: 5 -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요 4: 32 알지 못하는 양식 -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그의 일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 요 6: 29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1]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여기에서 너희는 이 세상의 보통의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아직도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은 영적인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아직도 육적인 것만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말씀을 했으나 제자들은 이 세상의 것에만 집착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 지도자라 할지라도 때로는 촌부나 이름 없는 한 여인의 깨달음보다 못할 때가 있다. 진리만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복음만이 외치게 하고 진리만이 사람을 불타오르게 하고 은혜를 체험하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생명의 말씀, 신앙의 안목이 열려서 알지 못하는 이 양식을 여러분들은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이 생명의 양식을 먹을 줄 알아야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이것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우리의 육신은 하루 세끼 양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양식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다. 그것은 복음이며,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것을 먹어야 영생을 얻게 된다.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이 밥을 안 먹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 억지로라도 먹이고 싶고, 많이 먹이고 싶은 것이 심정이다.
예수님의 마음도 또 주님의 말씀을 받드는 목사의 심정도 다를 바 없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는 주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 세상의 안목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 양식을 풍성히 받아먹고 우리의 영적인 삶도 튼튼해 질 뿐 아니라, 이 영적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한다.
2]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한복음 6: 39에 보면,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하고 말씀하셨다.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와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을 행하며 그것을 완수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요, 그것은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루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만족이 없어야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양식이라 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 이를 온전하게 이루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 하셨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여 영혼이 구원받게 되도록 힘쓰는 것이 성도에 주어진 양식이요 일이다.
(2) 우선순위
예수님은 한 여인을 구령하시기 위하여 수가 성으로 가셔서 한 영혼을 구원하셨다. 구령은 모든 일보다 가장 우선적으로 실시해야 할 양식이다.
구령이 없는 성도는 양식이 없는 삶이다. 교회도 구령이 우선적인 사역이어야 한다.
(3) 항상 있어야 할 일
양식은 끊임없이 차고, 넘쳐야 한다. 양식이 떨어지면 죽게 되듯이 구령이 없으면 모든 심령은 죽게 된다.
요 4: 33 누가 잡수실 것을 -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
1]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제자들은 모두 음식을 구하려고 마을에 내려가서 각자 흩어져 음식을 구하려 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가 앞 절에서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2]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그러므로 제자중 한 사람이 먼저 음식을 예수께 드린 것으로 오해하였다.
요 4: 34 예수님의 양식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만을 양식으로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 양식을 참된 양식이라고 생각하셨다. 영적 양식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구속사업을 완성하심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주님은 육신을 위한 음식이 아니라 영을 위한 영적 양식을 의미하셨다.
2]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슐라텔(Schlatter)은 이 귀절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생명의 근거가 되며, 그의 능력의 원천이 된다"라고 하였다(Dieses Einssein mit dem gottlichen Willen, das ihn dem gottlichen Wirken dienstbar macht, ist der Grund seines Lebens und der Quell seiner Kraft.-Der Evangelist Johannes, P.130).
이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특수한 의미로 그러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 신자도 하나님의 일을 하므로 하늘의 생명력을 받는다.
음식을 먹음으로도 육신이 생명력을 얻음과 같이, 성도는 하나님의 일을 참되이 할 때에 영적 생명력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하는 자에게 한하여 이런 귀한 은혜를 주신다.
그런데, 우리 성도가 이룰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요 6: 29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라고 하였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금보다 귀하다.
* 엡 2: 8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벧전 1: 7 -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우리가 전쟁하듯이 힘쓰지 않으면 믿음을 지킬 수 없다. 딤전 6: 12에 말하기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였으며, 히 12: 4에는 말하기를, 피 흘리기까지 죄를 대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자는 믿음으로 남들을 위하여 행해야 될 선한 일들도 책임을 지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실상 죽은 믿음이다.
* 약 2: 17, 26 –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엡 2: 10에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하였다.
요 4: 35 추수할 때 -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
유대 땅에서 추수는 4월 초에 보리 추수가 시작되고 5월 말에는 밀 추수가 시작된다. 추수 시기는 산지나 들판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추수는 보통 8월 말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추수하기 넉 달 전은 12월이나 1월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사건은 요한복음 2: 13에 언급된 첫 번째 유월절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때에 있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4월 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3: 22에 “이 후에[이런 일들 후에]”라는 표현에서 암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또 이 말은 요한복음 5: 1에 나오는 ‘유대인의 명절’을 또 다른 하나의 유월절로 볼 수 있게 만들며 예수님의 전도사역의 기간을 3년 이상으로 만든다. 물론 그 명절을 오순절이나 초막절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 해도 유월절이 하나 생략된 것이어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 이상이 된다.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는 말은 영적인 의미이다. 곡식 추수는 넉 달이 지나야 하지만, 영적인 추수는 이미 때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1]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이것은 하나의 속담으로서, 사람들이 추수 때를 고대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이 구절의 뜻은,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일에 대하여는 미리부터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영적 추수에 대하여서는 등한히 생각한다는 것이다.
영적 추수의 때는 그때가 임박하였으니만큼, 예수님은 황급히 일하여야 할 것을 느끼고 일하셨다.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의 보는 시각을 교정시켜 주셨다. 사람들은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며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도 아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서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영적인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같은 것을 보고도 시각의 차이가 있다. 선생님이 보는 시각이 있고, 학생이 보는 시각이 있으며, 교역자가 보는 시각이 있고, 평신도가 보는 시각이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가 보는 시선은 희어져 이미 추수하게 된 선교의 밭을 바라보아야 한다.
추수하게끔 희어져 있는 중국의 밭이나 예수를 갈망하는 중동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미 추수하게 될 북한이나 일본을 보아야 한다. 목사만 선교의 밭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시선이 같아야 한다. 아직도 아니라 말하지 말고 천천히 하겠다고 말하지 마시고 지금 시작해야 한다.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된 사마리아같은 이방인의 밭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다.
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것은, 영적 추수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영적 추수는 무엇인가? 선지자들이 예언해 두었던 진리가 이제 예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는데, 제자들이 그 성취된 진리, 곧,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 영적 추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