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주택가격 한번 오르면 쉽게 내려가기 어려워 공급망·원자재난 이어 장기적 물가 상승 요인으로
연준 `오판`에 비판 목소리 헤지펀드 대가 레이 달리오 "현금에 인플레稅 부과된 꼴"
일요일인 12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뉴욕주 로클랜드카운티에 있는 도요타 딜러숍. 평소보다 차량이 많이 보였다. 알고 보니 차를 사려고 온 사람들의 차량 때문에 혼잡한 것이었다.
반도체 공급난에 극심한 차량 수급 불균형이 빚어진 지 반년 이상이 지났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니밴 도요타 '시에나'는 한국인 사이에서는 '(씨)가 아(예) 말랐(나)'의 줄임말이라는 푸념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이날 딜러숍에 시에나 신차 2대가 보였다. 가물에 콩 나듯 공급되는데, 마침 입고된 것이다. XSE형 이륜구동 모델 권장소비자가격(MSRP)은 4만2100달러인데, 딜러는 배짱을 부렸다. 매장 관계자는 "그 가격엔 팔 수 없고 7000달러 정도 더 주면 고려해 보겠다"며 "반도체 공급난으로 앞으로 두 달간 시에나는 더 공급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차량에 붙은 부품별 원산지를 가리키며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생산된 차량이지만 일본산 부품을 25% 쓰기 때문에 공급망 차질에 계속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웃돈(프리미엄)을 MSRP 대비 17%나 더 받고 있는 셈이다. 팬데믹(전염병 대유행) 전에는 딜러 재량으로 MSRP 대비 수천 달러씩 할인해줬던 것을 고려하면 실제 인상률은 20~30%에 달한다.
지난 11일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에서 '오픈하우스(매물로 나온 주택 개방 행사)'를 하는 주택이 있어 방문해봤다. 입구에서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 겨우 집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중개인 케이티는 "벌써 10명 이상이 집을 보고 갔다"며 "이 동네 주택 매물이 거의 없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테니 관심 있으면 빨리 연락 달라"고 말했다.
가계 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거비, 차량 가격의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뉴욕 일대를 다녀본 결과다.
지난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39년 만에 최고치인 6.8%(전년 동월 대비)를 기록하는 등 미국이 전례 없는 인플레이션에 신음하고 있다. 11월 CPI를 뜯어보면, 인플레이션이 단기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식품을 제외한 근원 CPI가 전년 대비 4.9% 상승해 1991년 6월 이후 3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중고차(31.4%), 신차(11.1%), 주거비(3.8%) 등이 오른 것은 우려스럽다. 에너지·식품 가격과 달리 이런 요소들은 한 번 가격이 오르면 좀처럼 내리지 않는 품목이기 때문이다.
CPI에서 주거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다. 팬데믹 이후 제로금리 정책 영향으로 렌트비를 내는 것보다 모기지(주택담보대출)를 받아 주택을 매수해 원리금을 갚는 것이 유리해지자 주택 매수 열풍이 불었다. 미국에서 전국적으로 올해 주택 가격이 전년 대비 약 20% 상승했다. 이는 다시 렌트비 상승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내년에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집주인들은 렌트비에 부담을 전가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중산층과 서민층의 주거비 부담은 더 커지는 악순환이 계속될 전망이다.
월가에서는 내년 이후 인플레이션이 가속화할 폭탄으로 '임금 인상'을 꼽고 있다. 원자재 가격은 등락이 있기 때문에 수요가 진정되고, 공급이 원활해지면 내릴 수 있지만 임금은 그렇지 않다.
월가는 특히 지난달 논란이 됐던 미국 농기계 중장비 기업 존 디어 사례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이 355억달러에 달한 대기업이다. 존 디어 근로자들은 인플레이션에 임금을 올려달라고 나서며 집단 행동을 벌였다. 근로자들은 회사 측의 10% 임금 인상안도 거부했다. 전미자동차노조 근로자 1만여 명이 파업을 했다. 회사 측은 백기 투항했고, 내년 10%, 2023년 5%, 2025년에는 5%를 올려주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20% 임금 인상을 해준 셈이다.
스타벅스에서 50년 만에 노조가 결성된 것도 이런 흐름으로 볼 수 있다. 뉴욕주 버펄로 스타벅스 매장 바리스타들은 모바일 주문인 사이렌 오더로 업무량이 늘어나자 집단 반발하며 노조까지 만들었다. '드라이브 스루' 주문이 몰려드는 것도 한 원인이었다. 이 매장 바리스타인 제임스 스크레타는 "시한폭탄을 해체하려는 압박감 속에서 음료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나넷 제이컵슨 웰링턴자산운용 글로벌투자전략 담당 전무는 지난 10일 KIC 뉴욕지사가 주관한 '뉴욕국제금융협의체'에 참석해 "퇴사율이 높아질수록 임금은 오를 수밖에 없다"며 "경영진과 근로자 간 힘의 균형에서 팬데믹 이후 근로자가 더 강해지는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제이컵슨 전무는 "인플레이션이 시장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경직적(stickier)으로 변하고 있다"며 "임금 인상, 원자재난, 물류 공급난 등 3대 악재는 여전하며 5% 수준의 물가 상승이 수년간 지속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BNP파리바는 미국 CPI 상승률이 올해 4분기 6.7%에서 내년 1분기 6.8%로 상승세가 지속될 것으로 봤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를 만든 레이 달리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말 CNBC 인터뷰에서 "현금에는 인플레이션세(稅)가 부과된다"고 강조했다. 지난 9월에는 "현금은 쓰레기"라고 언급하며 현금 보유는 가장 어리석은 투자라고 강조했다.
월가에서는 이번 인플레이션에 대해 1965~1982년 17년간 200% 이상 물가가 올랐던 '그레이트 인플레이션(Great Inflation)' 시대에 빗대 '뉴 그레이트 인플레이션' 시대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것은 연준이 상황을 오판한 것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달까지 계속해서 이번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라고 강조해왔다. 모하메드 엘-에이런 알리안츠 수석경제고문은 CBS에 출연해 "이번 인플레이션을 일시적이라고 판단한 것은 연준 역사상 최악의 진단"이라고 비판했다.
백악관은 가시방석에 앉았다. 지난 10~11일 진행된 미국 ABC·입소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69%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인플레이션 대처에 불만이라고 응답했다. 연준은 14일부터 이틀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를 열고, 불길이 점점 커지고 있는 인플레이션에 대응할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월가에서는 내년에 두세 차례 기준금리 인상을 예상하고 있다. 특히 3개월 만에 업데이트 되는 '점도표'(연준 위원들의 무기명 금리 인상 전망)가 시장 전망치에 부합할지가 최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https://www.mk.co.kr/news/world/view/2021/12/1133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