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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옹이가 많은 고목(古木)이 숲보다 오래 살아남는다(2)
영빈관에 손님이 한 사람 더 늘어났다. 그는 장염을 만나기 위
해 태산에서 달려온 서검자였다. 서검자는 장염과 그 일행을 만나
본 뒤 곧바로 거처를 영빈관으로 정했다. 물론 무림맹의 어느 누
구도 서검자가 영빈관에 머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무림에서
서검자의 배분이 높기도 했지만, 현재 정파 무림의 최고고수가 서검
자였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무림 최고수가 영빈관에 머물겠다는
데 감히 반대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서검자는 영빈관에 머물며 장염과 기천검의 검의(劍意)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물론 대부분 서검자가 묻고 장염이 대답하
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침부터 장염과 기천검을 토론하던 서검자의 안색이 울그락 붉
그락 해졌자.
"아니, 나는 자네가 터득한 검의를 묻는데, 어지 내가 가르쳐 준
구결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건가?"
서검자는 장염에게 무언가 색다른 기천검의 해석을 원했건만
장염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서검자가 자신을 한껏 낮추
어 장염에게 기첨검의 검의를 물으면, 장염은 앵무새처럼 구결을
반복해 설명했다. 그러나 그 구결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서검자가
장염에게 전수해 준 것이니 가슴이 터질 노릇이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서검자에게 장염이 느긋하게 말했다.
"어르신, 어르신의 구결이 검의를 가장 바르게 표현한 것이라.
사실 더 이상의다른 말은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장염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서검자로서는 달리 푸념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네가 자네 나름대로 깨달은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그 과정은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천검
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몸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안다고 해서 누구나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는 말입니다."
"……."
장염이 여기까지 말하자 서검자는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다. 사실 오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구결을 묵상하고 연마하
여 앞으로도 뒤로도 다 외울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비단 그뿐
이랴! 누군가에게 자세히 가르쳐 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서
검자 자신의 몸으로 펼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알고는 있는데 펼
쳐지지 않으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일찍이 장염이 고민하던 바로 그 문제 앞에 서검자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하되 펼칠 수 없는
경지였다. 한마디로 머리 따로 몸 따로라는 말인데, 이 부분에 있
어서는 장염도 서검자에게 마땅히 더는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것
이었다. 장염 자신도 극복하지 못한 부분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
명할 수 있단 말인가?
보통 서검자와 장염이 기천검을 놓고 토론할 때면 으레 향이와
영화, 그리고 하후연과 지염도가 멀찍이서 구경을 했다. 그들은 서
검자와 장염이 나누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잘 새겨 들었다. 두 사
람의 말이 일상적인 무학의 경지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어서,
들어두기만 해도 언젠가 크게 소용되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검자와 장염은 그들의 사람됨과 무공에의 열의를 알고 있었
으므로 종종 알기 쉽게 무공의 도리를 풀어주었다. 어려운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어려운 것은 어
려운 것을 알기 쉽게 표현하는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중간중간 장염은 서검자가 무학의 일대 종사라
는 것을 알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으나 서검자는 그렇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이처럼 심오막측한 무공의 도리를 머리에 담고
다닐 수 있다니…….'
한때는 장염을 제자로 삼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빈관
에 머물며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장염
의 무공 수위는 놀랄 만한 것이었으며, 더불어 세상을 관조하는
눈도 그가 일찍이 접해보지 못한 경지였다.
'이 기회에 의형제라도 맺자고 해볼까?'
서검자는 장염을 볼 때마다 의형제를 맺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이 차이도 문제였지만, 의
형제를 맺는다는 일은 단지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화
산파 장문인의 스승이며 현존하는 무림 최고의 배분을 지닌 사람
이다. 괜히 의형제를 맺었다가 장염의 생활이 복잡해지고 피곤해
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무리 장염이 세속의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해도 '나 때문에
그가 번거롭게 될 수도 있다' 고 생각하자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서검자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거의
동생에게 대하듯 하는 것이라 주변 사람들은 간혹 머리를 갸웃거
릴 때가 있었다.
오늘도 지염도가 머리를 긁으며 하후연에게 속삭였다.
"형님, 아무리 봐도 서 어르신이 장 소협을 대하시는 게……."
하후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서검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모습
만 따로 떼어내서 생각한다면 서검자는 정파 최고의 배분을 가진
고수가 아니라 옆집 할아버지쯤이다.
"그러게 말이야. 아무리 봐도 검선(劍仙)께서 장 소협에게 투정
을 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이거 내가 벌써 노망이 나서 헛
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지염도의 고리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러고 보니 하후연의
설명이 가장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검선
서검자가 장 소협에게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후연이 고민하고 있는 지염도의 어깨를 툭치며 중얼거렸다.
"신경 쓰지 말아라. 어디 두 분 다 보통 분들이시냐. 신선들의
세계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거라구."
말을 마친 하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뜰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검을 뽑아 들고 검결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염도가 멀리서 바라보니 하후연의 신형이 나무 사이를 오락
가락하는데, 마치 골짜기를 굽이굽이 감도는 한줄기 강물 같았다.
'형님의 태극양의검법이 벌써 삼성에 이르셨구나!'
자신도 향이에게 같은 검법을 전수받았지만, 아직 이성의 경지
였다.
'나도 질 수야 없지. 향 사부를 위해서라도 더욱 정진해야겠다.'
지염도는 박도(朴刀)를 움켜쥐고 하후연의 맞은편 구석으로 갔
다.
휘이잉-! 휘잉-!
박도의 바람 가르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려퍼졌다.
하후연으로부터 '검법에 맞게 검을 사용해 보라'는 귄고를 받
았지만, 야리야리한 검은 왠지 그의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지염
도는 어디선가 자기의 생김새처럼 우직하게 생긴 박도를 구입한
뒤로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고집불통(固執不通)의 지염
도는 검법을 수련하는 지금도 도(刀)를 휘두르고 있었다.
지염도의 진전이 느린 것은 도(刀)로 검법을 연마하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수련한 무공이 하후연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하후연
은 비록 하수(下手)였지만 무가(武家) 출신으로 기초가 튼튼했으
며 몸놀림이 유려했다. 그에 비해 지염도는 살상력 높은 마교의
무공만을 집중적으로 배운 터라 패도적이고 딱딱했다.
출신 배경만큼이나 성격도 각각 달라서 하후연이 부드럽고 섬
세한 반면 지염도는 단순하고 거칠었다. 자연히 장염의 무공은
하후연에게 더욱 적합한 것이었다. 그나마 지염도가 장염의 무공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향이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과 순종 때문이
었자. 향이의 자상한 지도가 없었다면 지염도는 벌써 익히기를 포
기하고 마교의 무공을 연마했을 것이다.
지염도에게 있어 향이는 어머니나 누이 같았고, 장염은 아버지
와 같은 존재였다. 본래 지염도는 남을 쉽게 믿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내다. 그러나 장염과 동행하면서부터 자기 주변의 사람
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지염도는 태평객점에 여장을 푼 뒤 하후연을 형님으로, 그리고
향이를 스승으로 모셧다. 저염도로서는 태어나 처음으로 의지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셈이다.
하후연은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지염도의 순수함을 아는지라 결
국 그를 받아들였다.
향이도 지염도를 볼 때마다 사별한 동생들이 생각나는지 툭하
면 눈물을 글썽거렸다, 처음 지염도의 절을 받으며 '이제는 서로
가족처럼 의지하며 지내보자'고 한 향이의 말은 그런의미에서
각별한 것이었다.
그 앞에서 지염도가 어울리지 않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
어뜨림며 '네, 사부님' 이라고 대답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입에 두
고두고 오르냐렸다. 그날 이후로 지염도는 향이에게 무공을 전수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흥경궁(興慶宮)에서
장염을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염도
가 상상하기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그간 장염에게 무공 이상의 것을 배웠다. 그것은 한마디로 '어
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그런 것을 생각하
며 살지 않았지만, 장염을 만나 무림맹까지 오는 동안 그것은 어
느새 자신의 최대 관심사가 되고 말았다.
부웅! 붕!
쉬지 않고 혼신의 힘으로 박도를 휘두르던 지염도가 마침내 움
직임을 멈추었다.
"헉헉……."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무작정 땀을
흘리기로 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자신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한동안 장염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서검자가 돌아갔다.
장염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향이와 영화가 어떤 주제를 놓고
열심히 토론 중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하후연과 지염도가 검
과 도를 열심히 휘두르고 있었다.
'어디, 그럼 나도 하던 일이나 끝내볼까?'
장염이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장염이 하던 일이란 다름
아닌 태극양의검의 보완이었다.
그 무렵 장염은 새로운 무도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전이(轉移)의 수련으로 얻게 된 원융
지의(圓融之意)를 자신의 모든 삶에 접목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전이가 정신적인 측면의 수렴이었다면, 윈융지의로 자신의 삶을 조명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장염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문자(文字)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전에는 경천일기공 '만물일체(萬物一體) 심물일여(心
物一如)' 의 법문을 통해 '모두가 하나다' 라고 생각해 왔으나, 언
제부터인지 그의 눈에 세상을 가득 메운 그물[天網]이 보였다. 그
그물에는 자신을 포함한 자연, 이를테면 구름과 바람과 바위조차
도 한 덩어리로 얽혀 있었다. 이전에는 텅 빈 공간이 보였는데, 이
제 장염의 눈엔 세상 어디에도 빈 공간이 없었다.
'모두가 저 거대한 그물에 촘촘히 얽혀 있으니 이것이 하늘의
그물[天網]이라는 것인가!'
무심코 그물의 이 끝을 당기면 저 끝에 있는 사물이 반응을 했
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조차도 그물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늘의 그
물 안에서 장염은 만물일체 심물일여의 실제를 체험하고야만 것
이다.
그때부터 경천일기공은 단지 내공 수련에서 벗어나 삶을 이끌
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장염은 지금가지 자신이 얼마나 무공에
천착했었는가를 반성하며, 생각과 무공을 새로운 그릇 속에 충실
히 담아 나갔다.
태극양의검의 보완은 그러던 중에 떠오른 것이다. 장염은 태극
양의검에 원융지의를 도입하여 태극양의검 후반 삼검식을 창안했
다. 이미 무공의 이론과 구결의 정리는 끝났고, 그것이 적용만이
남았다. 그러나 적용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무학
의 대가가 무공을 창안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대성하기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장염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태극양의검의 후반식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장염의 눈이 스르륵 감겨졌다. 그는 눈에 보이
는 이 세계 너머에 있는 곳에서 자신이 추구하던 무(武)와 도(道)
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아주 가끔씩 그의 손이 살짝 들어 올려졌다가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마침내 장염의 두 손이 무릎 위에
고정되었다. 그때부터 장염은 마치 한 개의 석상(石像)인 양 미동
도 하지 않았다.
장염은 눈을 뜨자마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왜 이곳에 모여 계시는 겁니까?"
장염의 앞에 서검자는 물론 향이와 영화까지 모여 앉아 있었다.
"장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좌선을 시작한 지 오늘로 삼 일째랍
니다."
향이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밤이구요. 장 동생, 지금 자정(방 12시)이 넘었다는
거 알아요?"
장염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까?"
영화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벌써 사흘 전의
일이다. 식사 시간이 되어도 장염이 나오지 않아 살짝 들어와 보
았다. 처음에는 그저 방에서 혼자 묵상 중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장염이 그렇게 하루를 다 보내자 영화는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아무리 불러도 장염은 귀가 먼 사람처럼 대답이 없었다.
죽은 사람처럼 가슴의 기복이 보이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았다.
이틀이 되어도 장염의 몸에 변화가 없자 서검자가 달려왔다. 그
러나 서검자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몇 사람이 번갈아가며 장염의 방을 지켜왔던 것이다.
장염의 얼굴을 지켜보던 서검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허! 자네의 수련은 참으로 묘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구먼. 그러
나 그렇게 요상한 수련을 자주 하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피가
말라 죽게 될 게야."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장염이 눈을 뜨자 떠들썩하게 소란을 떨다가 하나둘
씩 빠져나갔다.
장염은 삼 일을 연공했다고 하지만 피로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
았다. 본래 무공에 집착하지 않기로 다짐했으나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다. 태극양의검의 후반 삼검식을 연구하다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나저나 배가 고파오는군."
장염이 허기진 배를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조용한 음
성이 들렸다.
"오라버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식사를 하셔야죠?"
"아! 물론 먹어야지요. 꼭 먹을 겁니다."
장염이 대답과 함께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영화가 음식이 가득
담긴 작은 상을 들고 서 있었다.
영화가 음식상을 장염의 손에 쥐어주고는 속삭였다.
"훗! 오라버니, 무공을 많이 연마하면 곧 부자가 되시겠어요."
"네?"
"밥을 삼 일에 한 번씩 먹으니 재물이 모이지 않겠어요?"
"하핫! 그럴 리가요."
다음날 날이 밝자 장염은 자신의 일행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을 불러 모았다. 완성한 태극양의검 후반부 삼검식을 전수해 주기
위해서였다.
현재 태극양의검을 익히고 있는 삶은 네 사람뿐이었다. 향이
와 영화, 하후연과 지염도가 모두 태극양의검을 배웠다. 그들 중
지염도는 향이에게 무공을 배웠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장염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염도의 얼굴은 흥미진진해 보였다. 드디어 장
염에게 직접 무공을 전수받게 된 것이다.
장염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후반 삼검식을 가르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극양의검의 전반(前半) 사식과 후반(後半) 삼식을 모두 익
히고, 마침내 검과 뜻이 통하면 어의통검(於意通劍)의 경지에 이
르게 될 것입니다."
"어의통검의 경지란 무엇입니까?"
하후연이 궁금한 듯 되물었다. 무림의 경험이 적지 않은 하후연
에게 어의통검이란 말은 낯설었기 때문이다. 곁에서 듣고 있던 영
화의 표정도 어리둥절해졌다. 어의통검이라니, 자신도 무당산에서
십 년이란 세월을 공부했지만 아직까지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하하, 어의통검이란 말 그대로 '뜻으로 두루 검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지요."
말과 함께 장염의 손이 맞은편 담장 아래의 자작나무를 가리키
자 그곳에서 한 자루 장검이 빛살처럼 날아와 장염의 등 뒤로 파
고들었다.
찰칵!
그것은 청명검이었다. 어느 틈엔지 공동파의 보물 청명검이 날
아가 자작나무를 한 바퀴 돌고 되돌아온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마
치 검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후연이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장염의 등뒤로 삐죽이 튀어나
온
청명검의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꿀꺽, 전설의 이기어검(以氣御劍)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어의통검(於意通劍)입니다. 어의통검은 기운
[氣]이 아니라 뜻[意]으로 검을 다루는 것입니다. 기운과 뜻의 차
이는 훗날 여러분이 알게 될 것입니다."
어의통검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마침
예고없이 서검자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서검자가 찾아오자 장염은
얼이 빠진 표정의 사람들을 뒤로하고 장내를 벗어났다.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무공 지식을 가지고 이기어검술과 어
의통검에 대해 토론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시원스런 답을 찾지
못했다. 사람들의 혼란은 결국 향이와 지염도에 의해 매듭 지어졌
다.
"장 동생이 칠식을 다 터득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했으
니,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군요."
하후연이 듣기로 향이 소저의 말은 매우 합리적인 것 같아 보
였지만, 사실 대부분의 검사들이 평생을 수련해도 이르지 못할 단
계가 이기어검이었다.
하후연은 '그 말씀을 들으니 속이 후련해지는군요' 라고 회답하
는 지염도의 넓은 등판을 '펑!' 소리가 나도록 친 후, '너의 사대
후손이라면 혹시 알지도 모르겠구나' 라고 말했다.
향이는 그제야 자신의 말이 얼마나 요원한 경지인가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향이가 강호인으로 살게 된 것이 얼마 전이니, 그
경험이나 지식이 일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쨋든 사람들은 그 뒤로 저마다 어의통검의 경지에 이르기 위
해 칠식의 검법을 연마했다. 향이는 영화와 짝을 이뤄 검술을 수
련했고, 하후연은 지염도와 함께 익혔다.
향이와 영화가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린 지는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하
후연과 지염도가 어울려 다니며 뻔질나게 영빈관을 드나드는 것
은 하남성 무림인들에게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무
림인들 사이에 하후연이란 존재는 각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남성에서 하후연과 지염도의 일상이란 무척이나 단도로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영빈과으로 찾아와 날이 저물도록 무공을 익히
거나 장염과 서검자가 나누는 논검을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매일 태평객점과 영빈관을 뻔질나게 오가니 자연히 사람들의 눈
에 드러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무림맹에서는 이 두 사람을 문무쌍치(文武雙恥)
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무림맹 정문에서 방명록을 작성하던 원룡
서생이 장난삼아 출입자의 명부에 기록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누
구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갔는지 모르게 무림맹에 널리 퍼진 것이
다.
하후연은 무공에 있어 무(武)의 수치였고, 지염도는 글을 모르
니 문(文)의 수치였던 셈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문무쌍치라고 불
리게 된 배경에는 하후연의 낮은 무공 실력과 지염도의 문맹(文
盲)을 넘어선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강호엔 하후연보다 무공이 떨어지는 사람이 많았고 글을 모르
는 무인은 그보다 더 많았다. 그럼에도 마치 이 두 사람만이 오늘
날 문무(文武)의 수치로 대표되고 있다는 것은, 무림맹 내어세 양
빈관을 출입하는 장염 일행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
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어쨋든 강호에서는 아직도 하후연을 섬서주접이라고 놀려댔지
만, 적어도 하남성에서는 문무쌍치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했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문무쌍치라고 불리는 사실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염도로서는 태어나 처음으로 이름을 사해(四海)에 드높이게
된 셈이라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고, 하후연은 장염에게 무공을
전수받으면서부터 상한 감정의 치유가 끝난 셈이라 피식 웃기만
했다.
간혹 지염도가 '나는 본래 출신이 험악해서 저보다 더한 소리
도 좋게만 들리지만 형님은 속도 좋으십니다' 라고 할 때마다 하
우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명줄이 쉽게 끊기지 않지. 강호도
마찬가지라 상처가 심할수록 그 명성이 오래가는 법이다."
신선한 바람이 무공산(武功山)에 자라고 있는 나무를 세차게
흔들었다.
촤아아아!
공야숙(公冶宿)은 숲이 우는 소리를 듣고 힘겹게 눈을 떴다. 고
개를 들고 보니 조금이라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오직 자
신뿐이었다. 사방에 가득한 것은 짖어지고 으깨진 시체들이었고,
자신은 그 한가운데쯤 위치한 바위 위에 흡사 드려진 제물인 양
누워 있었다.
청정한 생활만 해오던 공야숙이 언제 이런 복마전을 상상이나
해보았던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시산혈해(尸山血海)를
만들어낸 주인공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때부터 공야숙은
모습이 없는 상대와 싸워야 했다.
'언제 다시 나타날까? 제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공포는 형체도 없이 다가와
공야숙과 그가 잠시 몸을 기대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집어삼켰다.
"끄아아아아! 너는 누구냐!"
공야숙은 공포에 맞서기 위해 철검을 빼 들었다. 매화 문양이
해 곧추세워졌다. 그러나 철검은 곧 맥없이 지면을 행해 수그러들
었다.
공야숙이 입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비칠거리기 시작했다. 그리
고 다음 순간 쓰러질 뜻휘청거리는 공야숙의 검무(劍舞)가 시작
되었다.
"헤에…살고 죽는 게 다 뭐냐! 더 이상은 나도 모르겠다. 우헤
헤…키킥! 개 한 마리를 훔치면 불인(不仁)이라 하지만 한 나라
를 훔치면 의(義)라 한다네. 그럼그럼,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라
지만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네. 으흐흣! 도(道)가 어디에 있
는가! 도가 어디에 있는가! 도가 어디에 있는가! 반평생 도를 찾
아다녔지만 정작 나는 영웅이 되고 말았네. 헤헤…본래 나는 도
인(道人)인가? 본래 나는 영웅인가?"
공야숙의 검긑이 허공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매화(梅花)가 피어
났자. 마침내 꽃이 서른여섯 송이가 되자 공야숙은 더 이상 움직
이지 않았다. 서른여섯 송이의 매화가 서늘한 그림자를 이끌고 떨
어져 내렸다. 공야숙의 눈이 꽃을 따라 작게 흔들렸다.
이제 혈기 왕성한 이십 대의 도사가 매화나무 그늘 아해에서
스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입산(入山)한 지 십 년이 지났을 때 젊은 도사도 다른 사령들의
뒤를 따라 죽음의 동굴에서 사십구 일(四十九日)을 보냈다. 한줄
기 빛도 스며들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동굴에서 나와 스승을 찾아
뵈었을 때 스승이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못했습니다."
제자의 입에서 기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였을까? 스승의 얼
굴이 살짝 굳어졌다.
젊은 도사는 아무것이라도 보았노라고 답했어야 하는 것이 아
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 스승을 소일 수는 없었다.
죽음의 동굴이 수행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르쳐 준다
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것은 본 것이며 보지 못한 것
은 보지 못한 것인다. 스승은 못내 아쉬웠던지 제자에게 거듭 물
었다.
"동굴 안에서 정녕 아무것도 없너냐?"
젊은 도사는 잠시 동굴을 떠올려 보고는 정중히 대답했다.
"네, 그저 어둡기만 했을 뿐 눈에 보이는 것은…없었습니다."
그제야 스승의 안색이 조금 펴졌다.
"그렇다면 너는 어둠을 본 것이로구나."
스승은 그 말을 끝으로 무엇을 보았는지 더 묻지 않았다. 젊은
도사는 스승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
었다.
"그런데 사부님, 보통 사람도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不老長生)
할 수 있습니까?"
"너는 신선이 되고 싶은 것이냐?"
젊은 도사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스승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
공(武功)이든 법술(法術)이든, 도가(道家)의 공부를 하고 있는 사
람들치고 신선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던가? 다만 신선이 된
분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너무도 다른 세상의 사람들인 것만 같
아 '과연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고 궁금
할 뿐이었다.
세상에 홀로 남은 그에게 불로장생은, 먼저 간 가족들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 바라던 단 하나의 소원이기도 했다.
젊은 제자의 마을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승은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옹이가 많은 고목은 결이 많아서 나무꾼의 톱이 소용없고, 또
너무 휘어서 목수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그래서 숲보다도 더 오
래 살아남게 되는 게지. 허허헛! 지금 네가 바라는 불로장생이란
바로 그 정도인 것 같구나. 어둠이 네 운명에 있으니 언젠가 네가
그것을 극복한다면 혹시모르지, 바라던 대로 신선이 될 수 있을
지도…一."
마침내 매화가 모두 땅에 떨어져 내렸다.
공야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나 사부, 제자는 이렇게 옹이가 많은 나무가 되고 말았소."
멍하게 서 있던 공야숙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쩝, 뭐야? 그런데 대체 나의 사부는 누구지?"
공야숙이 깊게 함몰된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기억이
오락가락하고 도통 생각나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분명 이 부서
진 머리의 흔적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자신
의 이름만 가끔씩 떠오를 뿐 왜 머리가 부서져야 했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조각은 과연 자신의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렇게 또렷한 정신도 조금 후면 온데간
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누구냐?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알 수도
있으련만.'
공야숙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텅 빈 기억들 사이
로 훌쩍 지나고 말았다.
잠시 후 멍하게 서 있던 공야숙의 신형이 검과 함께 하늘로 날
아올랐다.
"나는 누구지? 나는 정말 공야숙이라는 사람인가? 아니면 피에
굶주린 악마인가? 나는 누구냐! 아니지, 아무려면 어떠냐! 나는
나다! 우헤헤헷!"
검과 하나가 된 공야숙이 무공산 꼭대기로 가볍게 날아 올라갔
다.
언제부터인지 무공산은 강서성의 절대 금역으로 불리기 시작했
다. 무공산에 들어간 무림인치고 살아서 나온 사람이 없었지 때문
이다. 그렇다고 무공산 근처에서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
니다. 강서성의 무림인들은 조마조마한 가운데 그저 무공산의 공
포가 강서성 전체로 확산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경재학은 무관에서 출관한 이후에 가신(家臣)이자 무림맹의 총
관인 산전수전(山戰水戰) 목불인(木不忍)을 만났을뿐, 한동안 외
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 보고 무림맹의 사람들은 '과
연 맹주는 심기가 깊으시다' 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맹주가 이
처럼 미묘한 시기에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천마후와 장염의 문
제' 에 대해 차분히 대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부에서는 장염이 구대문파 장문인보다 더 명성을 떨치고 있
는 시기이니 '맹주가 무림맹의 권위를 위해서도 쉽게 모습을 나
타내지 않는 것이좋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실제로 경재학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장염
과 천마후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 내면적인 이유는 세인들의 상상
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미 출관한 지 오 일이 넘었지만 경재학은 맹주의 관사에 칩
거한 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연공의 후유증
으로 보신(保身)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무검의 경지에 이른 경재학이 따로 보신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경재학에게는 단지 장염과 관계된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휴우,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녀석과는 타협점을 찾을 수가
없군'
그것이 며칠간 고심한 끝에 내린 경재학의 결론이었다. 재물이
나 권력에 미련이 없는 자가 자신에게 원한만 가득 품고 있으니
대체 무슨 대화가 되겠는가! 타협이 불가능하다면 그를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가지 경재학이 무림을 지배해 온 법칙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년 전에 경세적인 무공을 지니고 있던 녀석이
니…….'
경재학이 끙끙거리면서도 칩거를 깨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
유가 비로 이것이었다. 도무지 장염의 무공 수위를 예측할 수 없
었다. 이년 전에 마교 교주와 합공했으나 장염을 어쩌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무검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하나 상대도 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장염은 자신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림맹으로 태연히 걸어 들어왔다. 무공에 대한 절
대적인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재학은 지난 오 일 간 쉬지 않고 장염의 무공과 자신의 무공
수위를 비료해 봤지만, 아직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
고 해서 마냥 손을 놓고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에
처리해야 할 혈마사와 마교의 문제가 눈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
다. 서둘러 무림맹을 이끌고 이 불씨를 진화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구대문파에 의해서라도 자리에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타
인에 의해 권좌를 내어준다는 것은 경재학에게 있어 죽으라는 말
과 다름없었다.
'놈이 삼대문파 장문인과 손을 섞었으나 낭패를 본 것은 오히
려 장문인들이라고 했게다…….'
자신과 삼대문파 장문인들의 무공을 비교해 보았다. 지금이라면
자기도 그들 정도는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
신이 장염을 만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것
만으로는 부족했다. 장염과 자신은 그야말로 불공대천의 원수였기
때문이다.
경재학의 심사를 알 길 없는 목불인이 찾아왔다. 그는 요즘 아
침저녁으로 찾아와 경재학에게 무림맹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
고 있었다.
"맹주님, 아무래도 서둘러 회의를 주재하셔야겠습니다."
경재학은 제법 심각한 표정의 목불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재학의 눈빛은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보라는 뜻을 담고 있었
다. 가신 따위에게 어줍잖은 염려의 대상 따위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차 선발대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하였습니다. 일차 선발대의
대부분이 몰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지금 혈마사를 따라 화
산파로 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선발대에 사파(邪派)가 섞여 있다는 보고는 이미 받았소."
경재학이 짧게 말을 받았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
다는 뜻이 분명했다.
"최근에 멸문한 청성파의 생존자 가운데 현문(玄門)이라는 도
사가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흑도방파에서 활동하던 사람인데, 황
금에 눈이 먼 동료들의 배신으로 죽을 뻔했었죠. 생사지경(生死之
境)을 헤매는 그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
강호에서 살다 보면 살고 죽는 게 다반사라 지금 저 얘기가 무
슨 의미를 가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뭔가 중요하다고 믿
고 있으니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리라. 경재학은 조
금씩 지루해지는 마음을 애써 달래야 했다.
"오늘 아침 그가 찾아와 청성파에서 강북제일마존 마광옥을 보
았노라고 말했습니다."
늘어져 있던 경재학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경재학의 상체
가 목불인을 향해 기울어져 갔다.
경재학의 반응을 확인한 목불인이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아무래도 마교가 혈마사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
다."
지난 며칠 간 경재학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먹구름이
서서히 사라졌다. 혈마사의 행보 속에 마교의 수작이 섞여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나름대로 대처할 방법이 있다. '혈마사의 힘이
그처럼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는 위로를 얻을 수 있으며, 이 기회
에 마교에 대한 적의(敵意)를 확실히 불태울 수도 있다.
지금까지 무림맹의 사람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무림의
명문정파를 멸문시키고 있는 혈마사에 대해 무한한 신비와 공포
를 느끼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혈마사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하
룻밤에도 천 리를 이동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목불인의 보고
를 듣고 나니 혈마사와 마교의 행보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총관의 덕이 오늘 나에게 큰 힘이 되었구려. 오늘 오후에는 무
림의 형제들 앞에 다시 나서야겠소."
경재학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 차 오르자 목불인도 덩달아 기분
이 좋아졌다. 정주의 천하제일가에서 주군을 따라 하남으로 나온
사람이 모두 열 명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자신처럼 주군의 얼
굴에 미소가 떠오르게 하기 위해 대륙 전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맹주님의 인덕(人德)이지요."
경재학의 얼굴에 떠오른 만족스런 미소를 확인한 목불인이 읍
(揖)을 하고 물러났다.
목불인이 방에서 나가자 경재학은 곧 모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전신으로 몰려들었다.
'비라도 한바탕 쏟아 부으려나.'
아직은 빗방울이 내비치지 않았지만 조만간 제법 많은 비가 내
릴 것처럼 하늘은 잿빛이었다.
'그렇군, 이 년 전에도 이런 날씨였지.'
돌이켜 보니 당고립산맥의 이름없는 산중에서 장염과 처음 손
을 섞었을 때가 이랬다.
'그날 폭우가 쏟아지지만 않았던들…….'
그랬다가 두고두고 뒤가 개운치 않은 일이 없었을 것이다. 천지
를 뒤덮은 먹구름과 앞을 내다보지 못할 만큼 쏟아 붓던 빗줄기.
그 바람에 장가촌 일당을 한 번에 일망타진하지 못했다. 어디 그
뿐이랴! 마교 교주와 연합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염마저 놓치고 말
았다.
'장소, 이놈! 감히 어수선한 틈에 남북지약(南北之約)을 내팽개
쳣단 말이지.'
이 년 전 청해성에서 헤어지며 강북 이남으로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장소는 혈마사로 분장하여 보란 듯이
강호 전역을 휘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어
차피 장소를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이 기회에 정파 무림인들을
규합하여 혈마사와 마교를 쓸어버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무림맹에 있는 장염과 천마후를 생각하면 지금 마교가
설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마교가 설치고 있다
는 것은 무림맹에서 천마후를 잡아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것은 장염을 상대해야만 하는 경재학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와
도 같았다.
"하하핫- 하늘이 이처럼 나를 돕는데 어지 이루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경재학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숙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웃
음소리와 더불어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경재학은금세 굵어지는 빗방울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요즘 들
어 부쩍 적적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른바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것인가.'
어언 일갑자(60세)를 넘긴 경재학에게는 아직 후사가 없었다.
그동안 무공과 무림 경영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 후회없이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었건만, 이렇게 사정없이 비라
도 몰아치는 날이면 뜻밖에도 교하국의 공주가 떠오르곤 했다.
경재학이 문득 돌이켜 보니 자신의 인생에 있어 여자를 가까이
해 본 적이 있다면 오직 그때뿐이다.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그 이
후로 지금까지 주변에 여자란 없었다.
'제법 표독스런 눈빛을 하고 있었지.'
세상에 없는 사람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
거리기까지 했다. 어쩌면 바로 이 두근거림 때문에 아직 다른 여
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미 죽어버린 여자에게 무슨 미련이람.'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경재학이 빗줄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공이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들어선 경재학의 눈에 작고
섬세한 물방울은 선명하기만 했다. 이제는 사라진 교하국 공주의
눈동자처럼 말이다.
"사라져라!"
마음속에 들끓는 번민 때문일까? 경재학이 외마디 소리를 내지
르며 한 손을 휘젓자 거대한 돌개바람이 몰아쳐 갔다. 돌개바람은
거센 빗방울을 감싸 안고 하늘로 솟구쳐 어르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순찰을 돌던 사람들의 입이 쩍 버어졌다.
저 멀리 맹주의 숙소 위로 한줄기 돌개바람이 끝없이 뻗어 올라
가며 빛방울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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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1장은 끝임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겁게 잘 보고 있습니다
즐감
즐독요
즐감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