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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6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제1독서 : 1코린 6,1-11
복 음 : 루카 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공동생활의 축복祝福
-빛과 어둠이 공존共存하는 공동체-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떤 형태든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혼자서는 못삽니다. 고립단절의 순전한 혼자가 바로 지옥입니다.
아무리 튼튼한 하나의 다리로 못 걸어가듯 혼자서의 삶은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불편하더래도 두 발이 있어야 하듯 최소한 둘은 되어야 공동체 삶입니다.
좋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좋은 공동체는 그대로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그러니 공동체를 가꾸고 돌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서로 돌보고(care), 나누고(share), 섬기고(serve), 떠받쳐주는(support) 공동생활의 노력입니다.
이상적인 엘리트 유토피아 공동체는 환상입니다.
내 몸 담고 있는 현재의 공동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실적 지혜입니다.
아주 예전 면담 중 어느 자매와의 문답 내용도 잊지 못합니다.
“서로 미워하고 죄지으면서 함께 사는 것보다 이혼하여 혼자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천만에요. 결국은 내가 문제입니다.
죄짓더라도 함께 살아야 구원이지 혼자서는 아무리 잘 살아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상처도 받지만 위로도, 치유도 받습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공동체입니다. 모두가 건강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똑똑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부지런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문제 많은 공동체입니다.
오히려 문제없는 것보다 문제 있는 공동체가 건강한 정상적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상호경쟁, 각자도생이 아닌 상호보완, 상호협력의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수도생활 역시 별것이 아닙니다. 저는 항상 수도생활을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수도생활은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함께 사는 것이다.
수도생활의 어려움은 함께 사는 것이다. 함께 사는 것이 도닦는 것이다.’
이렇게 함께 살면서 서로를 알아감으로 둥글둥글 원만해지는 내외적 사랑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어제에 이어 제1독서는 코린토 교회 공동체의 어둠이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어제는 코린토 교회 공동체 내의 ‘불륜에 대한 단죄’ 였고, 오늘은 교우끼리의 송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로 이것이 살아있는 공동체의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통해 성장, 성숙해 가는 공동체입니다.
특히 어제 불륜을 저지른 형제는 공동체에서 내쫓으라는 구절에 대한 주석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1코린5,5)
이 구절에 대한 주석입니다.
‘사탄의 힘을 막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공동체에서 내쫓김으로써,
그 죄인은 사탄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 벌은 치료의 성격을 지닌다.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고통을 받으면 회개를 하여 주님의 날,
곧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사탄의 힘을 막을 수 있는 힘을 지닌 공동체요 이 공동체에서 벗어날 때
사탄의 세력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살아계신 주님께서 공동체의 중심에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깨닫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오염시키고 파괴시키는 어제의 불륜에 이어 오늘은 교우들의 송사에 관한 것입니다.
웬만하면 세상 법정에 가지 말고 좀 손해를 보더라도 자체적으로 성도聖徒답게
조용히 지혜롭게 해결하라는 강력한 권고입니다. 이 모두가 사탄의 유혹에 빠진 결과입니다.
공동체 밖은 물론이고 공동체내에서도 사탄의 유혹은 끝이 없습니다.
이래서 분도 수도회의 모토인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공동체의 하느님 중심의 일치에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한결같은 항구한 공동기도가 공동체는 물론 개인을 사탄의 유혹에서, 분열의 유혹에서 구원해 줍니다.
기도할 때는 찬미 감사이지만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불평불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기도의 모범입니다.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후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 부르십니다.
열두 사도는 순전히 주님의 기도의 열매입니다.
열두 사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주님이십니다.
이어 예수님을 중심으로 무수한 이들이 모여들었으니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은 낫게 되고 예수님께 손을 댄 이들은
모두 그분에게서 나온 힘으로 고침 받았다 합니다.
이 모두가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은 미사장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모여 함께 기도할 때 평화와 기쁨, 위로와 치유의 선물입니다.
좋은 미사가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 주고, 좋은 공동체에 속한 것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인간은 약하나 하느님은 강하십니다.
사실 한없이 약하고 부족한 우리 수도공동체가 이렇게 내외적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음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제1독서의 마지막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미사은총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1코린6,11참조)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혹시 틴트(Tint)를 아십니까?
틴트는 입술에 바르는 화장품의 일종으로 립틴트라고도 하는데,
입술에 선명한 색상을 넣어주는 화장품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를 며칠 전에 난생처음 들어보았습니다.
성지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온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입술 색깔이 모두 밝은 빨간색으로 다 똑같은 것입니다.
제 눈에 모두 똑같이 보이니 아이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지요.
“누구 루주로 다 똑같이 발랐니? 왜 입술 색깔이 다 똑같니?”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요즘 아이들은 ‘루주’를 바르는 것이 아니라, ‘틴트’를 바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틴트와 루주는 엄연히 다르다고 하면서,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들 세계에서 볼 때는
무식이 통통 튀는 모습이라고 하더군요.
또한 똑같은 색이 아니라 모두가 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는 색을 골라서 바른다는 것입니다.
저의 관심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아무리 봐도 도토리 키 재기처럼 별 차이가 없는데, 아이들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이나 봅니다.
하긴 저의 눈에서는 학생들이 입는 교복이 다 똑같아 보이는데, 나름 다 차이가 있다는 말도 합니다.
왜 아이들의 눈과 제 눈은 차이를 보일까요? 바로 관심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 차이를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사도적 전통의 토대가 될 열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이름 지어 주시고자
외딴 곳으로 가시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걱정이 많이 되셨을 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들이고, 실제로 자신을 배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가 세상 인간의 지혜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시고자,
어부와 세리 같은 사람들을 세상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할 이들로 지목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상의 것을 제자들에게서 발견하실 수 있었던 것은 따뜻한 사랑으로 관심 있게 보셨고,
이를 토대로 기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은 과연 나의 이웃들을 향해 어떻게 다가섰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따뜻한 사랑보다는 세상의 판단을 적용시키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무조건 틀렸다면서 주저앉혔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었을까요?
사랑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어 뽑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누가 뽑혔느냐보다 누가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습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열둘을 뽑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사도로 뽑힐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가진 자들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혔기에 거룩해지게 된 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한 마디로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뽑힌 후에도 특별한 내력을 그다지 전해주지 않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그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 없고,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교회의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처럼,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이들을 당신의 사도로 부르시고 파견하고 계십니다.
겸손한 이들은 세상에 녹아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합니다.
우리도 오늘 겸손한 자 되어,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오니, 주님!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고,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는 겸손함을 주소서!
이름 없이도 사랑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부르심의 시작은
언제나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기도의 관계로 맺어졌습니다.
기도의 삶이란
진리이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진리의 삶입니다.
기도와 삶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삶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성장의 삶임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눔은
언제나 기도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직접 해봄으로써
깊어지는 내면의 기쁨입니다.
기도의 시간을 통해
벌거벗은 우리의 본모습을
주님께 봉헌하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부르심의 토대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형제에게,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겁니까?
교회의 일을 세상에게 심판받다
전삼용 요셉 신부
얼마 전 서울 서초동 초대형 교회의 오정현 담당 목사를 반대하는 교인 9명이
오 목사가 속해있는 소속 노회(가톨릭으로는 ‘교구’정도로 생각하면 됨)를 상대로
“위임결의무효확인 등 청구소송”을 서울 지방법원에 제기하였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오 목사가 실질적 목사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음을 모르고
동서울노회가 그를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로 결의했음을 재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서울지법에서는
“종교단체가 목사의 자격기준을 설정하고 해석하는 것은 고도의 자율권에 해당한다”고 밝히며
그들의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그 이유를
“국가사법기관이 이에 개입하려면 정의 관념에 대하여 현저히 반하거나 자의적이라는 점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이번 건이 그 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라고 들면서
“소송비용을 모두 원고 측에 부담하라”고 판시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왜 종교의 일을 자신들에게 재판해 달라고 하냐는 것입니다.
타 종교의 교파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가톨릭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 의하면 코린토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라며 나무랍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고 이 세상과는 분명 구별되는 공동체인데도 자신들을 탈출시킨
그 세상에서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이 개탄스러웠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이 힘들다고 다시 파라오에게 가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주님께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불림을 받아 이제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 백성입니다.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
그런데 이런 일상의 송사가 일어날 경우에도,
여러분은 교회에서 업신여기는 자들을 재판관으로 앉힌다는 말입니까?”
바오로는 그것으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르고 아직 세속에 자신들을 심판해 달라고 매달리는 것 자체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남의 잘못을 탓하는 것부터가 이미 의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당신 아드님의 피로 씻으시고 가죽으로 덮어주셨듯이,
상대의 잘못을 우리 희생으로 덮어주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임신하고 돌아온 성모 마리아를 의로운 요셉이 모른 척 파혼하여 넘어가려 했던 것입니다.
벌거벗은 노아를 보고 비웃었던 아들 함은 저주를 받았고 그 몸을 보지 않았던 나머지 두 아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무슨 의로운 일을 했기에 남을 심판한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세상에 판결을 의뢰하는 사람은 스스로 교회가 아닌 세상에 속해있음을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물론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많은 송사가 있지만 그 대부분은 교회 안에서 해결됩니다.
교구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교황청이 해결해줍니다.
그 모든 송사가 영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산이나 상속권에 대한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세상 심판에 맡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좀 극단적일 수 있지만 사람의 송사를
어떻게 동물들에게 가서 판결해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세속 자녀들에게 판결해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물들에게 당신 피로 새겨진 이름들을 주시며
사람의 지위로 높여주셨습니다.
교회는 그 구성원이 이미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 우리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상 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면
오늘 독서를 꼭 들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품이 커서 스승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는 가끔 저의 신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신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죄도 허물도 많고, 뛰어난 능력도 없고, 잘난 것이 없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도구로 쓰고 계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감사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웁니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루가6,12)나서 제자들을 선택 하셨는데
그 중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격정적인 성품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에 의해 온화해 질 것입니다.
겁이 많은 필리보와 바르톨로메오,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성격이 우울하고 회의적인 토마도 있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비유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후에 배반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습니다. 사도들 중에도 배교자가 있었습니다.
뽑힌 이들 조차도 합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뽑은 결과입니다.
저 같으면 그들은 쏙 빼놓았을 텐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품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남들보다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품이 커서 스승입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속 끓일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밥맛 떨어지고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자격입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응답한다면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감히 저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크신 자비가 저를 지탱하게 합니다. 오늘 날 우리 사제들도 다양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사제들을 일치시키는 끈입니다. 주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주님께는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큰 품과 온유함이 있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능력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한 8,28-29).
거기에서 기적의 힘이 나왔습니다.
기적의 힘은 사람의 유능이 아니라 철저한 무능, 온전한 의탁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거기에 생명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모여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응답은 곧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나의 부족함을 무릎 쓰고 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10,1)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당신의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분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안보여서 다행인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리의 피부를 이루는 세포들입니다.
만일 세포들을 볼 수 있다면 조금은 이상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몸에서 배출되는 가스들입니다. 트림과 방구가 색깔이 있다면 이상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입니다. 누군가 나의 생각과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세상 살아가는 재미가 덜 할 것 같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아주 유쾌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오히려 안 좋을 것 같습니다.
절망 중에 삶을 포기할 수도 있고, 정해진 삶이기에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보지 못하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은 ‘뜸’을 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배고프다고 미리 밥솥을 열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의 상처도 아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급한 성격에 상처를 만지거나 뜯어 버리면 상처가 더 커질 수도 있고, 덧나기도 합니다.
약간 보기 싫어도, 상처 난 부위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물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즐겨보는 스포츠도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재미가 있고, 긴장이 있고, 흥미가 있기 마련입니다.
짜릿한 역전의 묘미도 있고,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스포츠는 한편의 드라마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함부로 상대방을 평가하거나, 비난하지 마십시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하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어진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저의 신학생 때가 떠올랐습니다. 함께 했던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똑똑하고, 건강하고, 능력이 있는 친구들이 신학교를 떠나곤 했습니다.
규칙을 어기고, 과도한 음주로 기도시간에 빠졌던 친구들이 사제가 되어서 기쁘게 사는 것도 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들의 생각과 판단 기준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방에는 많은 전자제품들이 있습니다.
방을 밝히는 등, 시원한 물을 마시게 하는 냉장고,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는 텔레비전,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는 컴퓨터, 더위를 피하게 하는 에어컨, 이웃과 대화를 하게 하는 전화기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저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이것들이 없는 생활은 아주 불편할 것입니다.
전자제품들 모두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원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기능이 많고, 멋진 제품이라 해도 전원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제자들 모두는 각자의 능력과 재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능력과 제자들의 힘은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