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nasikāra 注意기울임(attend).
<ekattaṃ> manasi karoti → cittaṃ <ekattaṃ> pakkhandati <~>에 作意하면 / <~>으로 주의 기우리면 → 心은 <~>에 들어간다. |
…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animittaṃ cetosamādhi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tassa animitte cetosamādhimhi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 하나만을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의 마음은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manaṃ, bhikkhave, yoniso manasi karotha; … 마노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라.
“tiṭṭhatu tāva sottaṃ. handāhaṃ idameva manasi karomi —
iti mano anicco, dhammā aniccā, manoviññāṇaṃ aniccaṃ, manosamphasso anicco,
yampidaṃ mano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aniccaṃ”.
잠에 빠진다 할지라도 나는 이와 같이 마음에 잡도리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마노는 무상하다. 법은 무상하다. 마노의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마노의 감각접촉은 무상하다. 마노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라고.
manasikārasambhavā sabbe dhammā 모든 법은 마음에 잡도리함을 근원으로 하며
manasikārasamudayā dhammānaṃ samudayo; manasikāranirodhā dhammānaṃ atthaṅgamo”ti.
마음에 잡도리함의 일어남이 바로 법의 일어남이고
마음에 잡도리함의 소멸이 바로 법의 소멸이다. <憶念集 則 法集 憶念滅 則 法沒>
so tasmiṃ āsane nisinno tassā kathāya ādimpi manasi karoti,
majjhampi manasi karoti, pariyosānampi manasi karoti;
vuṭṭhito ca kho tamhā āsanā tassā kathāya nevādiṃ manasi karoti,
na majjhaṃ manasi karoti, na pariyosānaṃ manasi karoti.
그는 그곳에 앉아 있을 때에는 그 설법의 처음도 마음에 잡도리하고
중간도 마음에 잡도리하고 마지막도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어날 때에는 그 설법의 처음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중간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마지막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는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assa ucchaṅge nānākhajjakāni ākiṇṇāni —
tilā taṇḍulā modakā badarā. so tamhā āsanā vuṭṭhahanto satisammosā pakireyya .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사람의 허리에 달린 주머니에 깨와 쌀과 사탕과 건포도 등
여러 가지 먹을 것을 넣어두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때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쏟아버리는 것과 같다.
“ucchaṅgapañño puriso, seyyo etena vuccati.
abhikkhaṇampi ce hoti, gantā bhikkhūna santike.
“ādiṃ kathāya majjhañca, pariyosānañca tādiso.
nisinno āsane tasmiṃ, uggahetvāna byañjanaṃ.
vuṭṭhito nappajānāti, gahitaṃ hissa mussati.
통찰지가 허리에 달린 주머니와 같은 사람
그는 이 사람보다는 나아서
자주 비구 곁에 가서 자리에 앉아서는
법문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이해지만
일어설 때 뜻과 문장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
[manasi<mano의 처격.-kāra,BSk.manaskāra,manasīkara,manasikara] 作意.
注意 : 특별(特別)한 사항(事項)에 대(對)한 경계(警戒)나 주목
注目 : 시선을 모아 봄.
<心이> 意에서 / 意쪽으로 manasi-karoti 起動(어떤 상태로 - 움직이다).
그 결과는 意를 대상으로 하거나, 意處(man-āyatana)가 되고 이어서 法處(dhammāyatana)가 된다.
<ekattaṃ> manasi karoti → cittaṃ <ekattaṃ> pakkhandati < ~ >에 作意하면 / < ~ >으로 주의 기우리면 → 心은 < ~ >에 들어간다. |
處(āyatana)란 心이 들어간(入) 자리(處)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nagaraṃ gacchati 마을을 간다. → 마을로/마을에 간다.
bhagavantaṃ upasaṅkamitvā … 세존을 다가가고서 → 세존으로/세존에게 다가가고서 …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가 對格(nimittaṃ)을 취하듯이 manasi-karoti도 起動(cvi, 쯔위)이므로,
'對格을 주의를 기울인다.'라고 번역하지 않고
'對格으로/~에 주의를 기울인다.'라는 방향 (목적격)의 의미라고 생각된다.
subhanimittaṃ, bhikkhave, ayoniso manasi karoto anuppanno ceva kāmacchando uppajjati
uppanno ca kāmacchando bhiyyobhāvāya vepullāya saṃvattatī”ti.
비구들이여, 아름다운 표상을<*~으로 / ~에>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하여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은 증장하고 드세어진다.
ayoniso manasi karoto : 不淨/無常/苦/無我를 淨/常/樂/我(상락아정)으로 心이 대상을 對面.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싫어하는 것이 있게 된다. 즉 같은 처지의 다른 표현이 다음 내용.
paṭighanimittaṃ, bhikkhave, ayoniso manasi karoto anuppanno ceva byāpādo uppajjati
uppanno ca byāpādo bhiyyobhāvāya vepullāya saṃvattatī”ti.
비구들이여, 적의의 표상을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하여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의가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악의는 증장하고 드세어진다.
ayoniso, bhikkhave, manasi karoto anuppannā ceva vicikicchā uppajjati
uppannā ca vicikicchā bhiyyobhāvāya vepullāya saṃvattatī”ti.
비구들이여,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심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의심은 증장하고 드세어진다.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 idaṃ vuccatāvuso, nāmaṃ;
도반들이여, 느낌, 인식, 의도, 감각접촉, 마음에 잡도리함을 정신[名]이라 하고,
cattāri ca mahābhūtāni, catunnañca mahābhūtānaṃ upādāyarūpaṃ —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과 그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들[所造色]을 물질[色]이라 합니다.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감각접촉[觸], 느낌[受], 인식[想], 의도[思], 마음[心],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
열의[欲], 결심[信解], 정진, 마음챙김[念], 평온[捨], 마음에 잡도리함[作意]의 법들이 있는바 …
… 이하 참고자료 …
“tena hi, brāhmaṇa, suṇāhi, sādhukaṃ manasi karohi; bhāsissāmī”ti.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잘 듣고 마음에 잡도리하라.<*pay attention! 注目!> 이제 설하리라.
so khvāhaṃ, āvuso,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ṃ.
tassa mayhaṃ, āvuso, iminā vihārena viharato vitakkasahagatā saññā manasikārā samudācaranti”.
도반들이여, 그런 나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물렀습니다.
도반들이여, 그런 내가 이와 같이 머물 때
일으킨 생각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잡도리함이 일어났습니다.”
“atha kho maṃ, āvuso, bhagavā iddhiyā upasaṅkamitvā etadavoca —
‘moggallāna, moggallāna, mā, brāhmaṇa, ariyaṃ tuṇhībhāvaṃ pamādo,
ariye tuṇhībhāve cittaṃ saṇṭhapehi, ariye tuṇhībhāve cittaṃ ekodibhāvaṃ karohi,
ariye tuṇhībhāve cittaṃ samādahā’ti.
도반들이여, 그때 세존께서 신통으로 다가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갈라나여, 목갈라나여, 성스러운 침묵에 대해서 방일하지 말라.
바라문이여, 성스러운 침묵에 마음을 안주시켜라. 성스러운 침묵에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라.
성스러운 침묵에 마음이 삼매에 들게 하라.'
asubhanimittaṃ, bhikkhave, yoniso manasi karoto anuppanno ceva kāmacchando nuppajjati
uppanno ca kāmacchando pahīyatī”ti.
비구들이여, 부정의 표상을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여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은 일어나지 않고, 또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은 버려진다.
mettaṃ, bhikkhave, cetovimuttiṃ yoniso manasi karoto
anuppanno ceva byāpādo nuppajjati uppanno ca byāpādo pahīyatī”ti.
비구들이여, 자애와 함께하는 마음의 해탈을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여
<*mettācittaṃ manasi karoti 자애의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의는 일어나지 않고, 또 이미 일어난 악의는 버려진다.
yoniso, bhikkhave, manasi karoto anuppannā ceva vicikicchā nuppajjati
uppannā ca vicikicchā pahīyatī”ti.
비구들이여,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심은 일어나지 않고,
또 이미 일어난 의심은 버려진다.
vicikicchā :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여 (의심하거나,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유예猶豫.
ayoniso, bhikkhave, manasi karoto anuppannā ceva akusalā dhammā uppajjanti
uppannā ca kusalā dhammā parihāyantī”ti.
비구들이여,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들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선법들은 버려진다.
yoniso, bhikkhave, manasi karoto anuppannā ceva kusalā dhammā uppajjanti
uppannā ca akusalā dhammā parihāyantī”ti.
비구들이여,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들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불선법들은 버려진다.
ayoniso, bhikkhave, manasi karoto anuppannā ceva bojjhaṅgā nuppajjanti
uppannā ca bojjhaṅgā na bhāvanāpāripūriṃ gacchantī”ti.
비구들이여,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하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은 일어나지 않고,
또 이미 일어난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은 닦아서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yoniso, bhikkhave, manasi karoto anuppannā ceva bojjhaṅgā uppajjanti
uppannā ca bojjhaṅgā bhāvanāpāripūriṃ gacchantī”ti.
비구들이여,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은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은 닦아서 완성에 이른다.
ayoniso, bhikkhave, manasi karoto anuppannā ceva micchādiṭṭhi uppajjati
uppannā ca micchādiṭṭhi pavaḍḍhatī”ti.
비구들이여,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삿된 견해는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삿된 견해는 굳세어진다.
yoniso, bhikkhave, manasi karoto anuppannā ceva sammādiṭṭhi uppajjati
uppannā ca sammādiṭṭhi pavaḍḍhatī”ti.
비구들이여,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바른 견해는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바른 견해는 굳세어진다.
parato ca ghoso, yoniso ca manasikāro.
ime kho, bhikkhave, dve paccayā sammādiṭṭhiyā uppādāyā”ti.
다른 자의 소리를 듣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상태 念→作意>과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은 바른 견해를 일으키게 한다.
sato sampajāno uṭṭhānasaññaṃ manasi karitvā,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正念正知] 일어날 시간을 인식하여 마음에 잡도리하여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물질[色]에 대한 인식(산냐)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so tadassādeti taṃ nikāmeti tena ca vittiṃ āpajjati,
tatra ṭhito tadadhimutto tabbahulavihārī aparihīno kālaṃ kurumāno
ākāsānañcāyatanūpagānaṃ devānaṃ sahabyataṃ upapajjati.
ākāsānañcāyatanūpagānaṃ, bhikkhave, devānaṃ vīsati kappasahassāni āyuppamāṇaṃ.
그는 이 선(禪)을 즐기고, 이것을 바라고, 이것에 만족을 느낀다.
그는 여기에 굳게 서고 여기에 확신을 가지고 여기에 많이 머물고 이것으로부터 물러섬이 없고
죽은 뒤에는 공무변처에 도달한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공무변처에 태어난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2만 겁이다.
tattha puthujjano yāvatāyukaṃ ṭhatvā yāvatakaṃ tesaṃ devānaṃ āyuppamāṇaṃ
taṃ sabbaṃ khepetvā nirayampi gacchati tiracchānayonimpi gacchati pettivisayampi gacchati.
거기서 범부는 그 신들의 수명의 한계만큼 거기 머물다가
그 수명이 모두 다하면 지옥에도 가고 축생의 모태에도 가고 아귀계에도 간다.
bhagavato pana sāvako tattha yāvatāyukaṃ ṭhatvā yāvatakaṃ tesaṃ devānaṃ āyuppamāṇaṃ
taṃ sabbaṃ khepetvā tasmiṃyeva bhave parinibbāyati.
그러나 세존의 제자는 그 신들의 수명의 한계만큼 거기 머물다가
그 수명이 모두 다하면 바로 그 [무색계의] 존재에서 반열반에 든다.
sace, bhikkhave, adhicittamanuyutto bhikkhu ekantaṃ samādhinimittaṃyeva manasi kareyya,
ṭhānaṃ taṃ cittaṃ kosajjāya saṃvatteyya.
sace, bhikkhave, adhicittamanuyutto bhikkhu ekantaṃ paggahanimittaṃyeva manasi kareyya,
ṭhānaṃ taṃ cittaṃ uddhaccāya saṃvatteyya.
sace, bhikkhave, adhicittamanuyutto bhikkhu ekantaṃ upekkhānimittaṃyeva manasi kareyya,
ṭhānaṃ taṃ cittaṃ na sammā samādhiyeyya āsavānaṃ khayāya.
비구들이여, 만약 높은 마음을 닦는 비구가
오직 삼매의 표상만을 마음에 잡도리하면 그의 마음은 자칫 게을러질 수 있다.
비구들이여, 만약 높은 마음을 닦는 비구가
오직 정진의 표상만을 마음에 잡도리하면 그의 마음은 자칫 들떠버릴 수 있다.
비구들이여, 만약 높은 마음을 닦는 비구가
오직 평온의 표상만을 마음에 잡도리하면 그의 마음은 번뇌를 멸하기 위하여
자칫 바르게 삼매에 들지 않을 수 있다.
yato ca kho, bhikkhave, adhicittamanuyutto bhikkhu kālena kālaṃ samādhinimittaṃ manasi karoti,
kālena kālaṃ paggahanimittaṃ manasi karoti, kālena kālaṃ upekkhānimittaṃ manasi karoti,
taṃ hoti cittaṃ muduñca kammaniyañca pabhassarañca,
na ca pabhaṅgu, sammā samādhiyati āsavānaṃ khayāya.
비구들이여, 그러나 높은 마음을 닦는 비구가 때때로
삼매의 표상을 … 정진의 표상을 … 평온의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면
그때 그의 마음은 부드럽고 적합하고 빛나고 부서지지 않고
번뇌를 멸하기 위하여 바르게 삼매에 든다.
yassa yassa ca abhiññāsacchikaraṇīyassa dhammassa cittaṃ abhininnāmeti abhiññāsacchikiriyāya,
tatra tatreva sakkhibhabbataṃ pāpuṇāti sati satiāyatane.
그래서 최상의 지혜로 실현시킬 수 있는 법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최상의 지혜로 그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가 마음을 기울이면
그런 원인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處(āyatane)에 대한 念(sati)이 있으면(sati)
自內證(abhiññā ← sati)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법을 실현하기 위해
마음을 기울이면(abhininnāmeti) 실현할 수 있다.
界와 作意를 같이 설명한 경문.
dhātukusalatā ca manasikārakusalatā ca. ime kho, bhikkhave, dve dhammā”ti.
요소[界]에 대한 능숙함과 마음에 잡도리함에 대한 능숙함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법이 있다.
sabbanimittānañca amanasikāro, animittāya ca dhātuyā manasikāro.
ime kho, āvuso, dve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ti.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과 표상이 없는 요소[界]를 마음에 잡도리함입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sādhu vatāyasmā anuruddho ime tayo dhamme pahāya,
ime tayo dhamme amanasikaritvā amatāya dhātuyā cittaṃ upasaṃharatū”ti.
아누룻다 존자는 이러한 세 가지 법을 버리고 이러한 세 가지 법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고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하십시오. <*upasaṃharatū>
idha, bhikkhave, rañño nāgo yamenaṃ hatthidammasārathi kāraṇaṃ kāreti —
yadi vā katapubbaṃ yadi vā akatapubbaṃ —
taṃ aṭṭhiṃ katvā manasi katvā sabbacetasā samannāharitvā ohitasoto suṇāti.
evaṃ kho, bhikkhave, rañño nāgo sotā hoti.
비구들이여, 여기 왕의 코끼리는 코끼리 조련사가 어떤 일을 시키더라도
- 전에 한 것이건 전에 하지 않은 것이건 -
그것을 깊이 새기고 마음에 잡도리하고 모든 마음을 다하여 몰두하여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왕의 코끼리는 듣는다. <*samannāharitvā>
na kho, bhaddāli, eseva hetu, esa paccayo.
api ca me tvaṃ, bhaddāli, dīgharattaṃ cetasā cetoparicca vidito —
‘na cāyaṃ moghapuriso mayā dhamme desiyamāne aṭṭhiṃ katvā
manasi katvā sabbacetaso samannāharitvā ohitasoto dhammaṃ suṇātī’ti.
“밧달리여, 이것만이 원인이 아니고 이것만이 이유가 아니다.
밧달리여, 나는 오랫동안 내 마음으로 그대의 마음에 대하여 알고 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은 내가 법을 설하더라도 뜻을 파악하고 마음에 잡도리하고
온 마음으로 몰두하고 경청하지 않는구나.'라고, <*samannāharitvā>
<*ajjhattikañceva, āvuso, cakkhuṃ aparibhinnaṃ hoti,
bāhirā ca rūpā na āpāthaṃ āgacchanti,
no ca tajjo samannāhāro hoti,
neva tāva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도반들이여, 안으로 눈이 손상되지 않았지만
밖에서 형색이 눈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고,
그곳으로 전향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samannāhāro>
그것에 상응하는 알음알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katamā ca, bhikkhave,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ñāṇadassanappaṭilābhāya saṃvattati?
idha, bhikkhave, bhikkhu ālokasaññaṃ manasi karoti, divāsaññaṃ adhiṭṭhāti —
yathā divā tathā rattiṃ, yathā rattiṃ tathā divā.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삼매 수행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지와 견을 획득하게 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광명상(光明想)을 마음에 잡도리한다. '낮이다'라는 인식에 집중한다.
낮에 [광명을 본 것]처럼 밤에도 [광명을 보고],
밤에 [광명을 본 것]처럼 낮에도 [광명을 보는] 인식에 집중한다.
sakkāyanirodhaṃ manasi karoti.
그는 자기 존재[有身, 五蘊]의 소멸을 마음에 잡도리한다.
evameva kho,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gāmasaññaṃ, amanasikaritvā manussasaññaṃ,
araññasañña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그와 같이 비구도 마을이라는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숲이라는 인식 하나만을 마음에 잡도리한다.
tassa araññasaññ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그의 마음은 숲이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puna caparaṃ,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ṃ,
amanasikaritv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aṃ,
animittaṃ cetosamādhi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tassa animitte cetosamādhimhi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 하나만을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의 마음은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tassa avijjāppabhedaṃ manasi karoto
avijjāppabhede cittaṃ na pakkhandati nap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ādhimuccati.
그가 무명을 잘라버림을 마음에 잡도리 하지만
마음이 무명을 잘라버림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것에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그것에 안정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한다.
* 無明제거로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無明제거에 心은 확정하지 못하고<nādhimuccati> 편안히 서있지 못하고<na santiṭṭhati>
확실히 앉아 있지 못하고<nappasīdati> 뛰어 들어가지 못한다.<入處가 되지 못함. na pakkhandati>
“pañcimā, bhikkhave, nissāraṇīyā dhātuyo. katamā pañca?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벗어남의 요소<*界를 벗어남>가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idha, bhikkhave, bhikkhuno
kāmaṃ manasikaroto kāmesu cittaṃ na pakkhandati nap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a vimuccati.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감각적 욕망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그의 마음은 감각적 욕망들에 들어가지 않고 <nādhimuccati ← na vimuccati>
[감각적 욕망들에]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안정되지 않고 확신하지 않는다.
nekkhammaṃ kho panassa manasikaroto
nekkhamme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vimuccati.
그러나 그가 출리를 마음에 잡도리할 때
그의 마음은 출리에 들어가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안정되고 확신한다.
tassa taṃ cittaṃ sugataṃ subhāvitaṃ suvuṭṭhitaṃ suvimuttaṃ suvisaṃyuttaṃ kāmehi;
이런 그의 마음은 [대상에] 잘 몰입되고 잘 수행되고
[감각적 욕망들로부터] 잘 나오고 잘 벗어나고 잘 풀리게 된다.
ye ca kāmapaccayā uppajjanti āsavā vighātapariḷāhā, mutto so tehi, na so taṃ vedanaṃ vediyati.
그리고 번뇌들은 감각적 욕망들을 조건으로 일어나고 속상함과 열병을 초래하는데,
그는 그 번뇌들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그런 느낌을 느끼지 않는다.
idamakkhātaṃ kāmānaṃ nissaraṇaṃ.
이것을 일러 감각적 욕망들을<*界> 벗어남이라 한다. …
kāmanandiyāpi ananusayā, byāpādanandiyāpi ananusayā, vihesānandiyāpi ananusayā,
rūpanandiyāpi ananusayā, sakkāyanandiyāpi ananusayā.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niranusayo, acchecchi taṇhaṃ,
vivattayi saṃyojanaṃ, sammā mānābhisamayā antamakāsi dukkhassa.
그에게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도 잠재해 있지 않고, 악의를 즐기는 것도 잠재해 있지 않고,
잔인함을 즐기는 것도 잠재해 있지 않고, 물질을 즐기는 것도 잠재해 있지 않고,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을 즐기는 것도 잠재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일러
'비구는 잠재성향이 없다. 갈애를 잘라버렸다. 족쇄를 풀어버렸다.
자만을 바르게 관통하여 마침내 괴로움을 끝냈다.'라고 한다.
imā kho, bhikkhave, pañca nissāraṇīyā dhātuyo”ti.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벗어남의 요소가 있다.<*界-潛在를 벗어남>
“‘saṃvāsena, bhikkhave, sīlaṃ veditabbaṃ, tañca kho dīghena addhunā, na ittaraṃ;
manasikarotā, no amanasikarotā; paññavatā, no duppaññenā’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비구들이여, 계행은 함께 살아야 알 수 있다.
그것도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알 수 있고, 그렇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것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에 의해서 알 수 있고, 그렇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것은 통찰지를 갖춘 사람에 의해 알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에 의해서는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이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말했는가?
idha, bhikkhave, puggalo puggalena saddhiṃ saṃvasamāno evaṃ jānāti —
‘dīgharattaṃ kho ayamāyasmā khaṇḍakārī chiddakārī sabalakārī kammāsakārī,
na santatakārī na santatavutti ; sīlesu dussīlo ayamāyasmā, nāyamāyasmā sīlavā’”ti.
비구들이여, 그러나 여기 사람이 사람과 함께 살 때 이와 같이 [서로를] 알게 된다.
'이 존자는 오랫동안 계행이 훼손되지 않고 뚫어지지 않고 오점이 없고 얼룩이 없다.
그의 계행은 시종일관되고 계행을 가지고 머문다. 이 존자는 계행을 갖춘 자이다.
이 존자는 계행을 파한 자가 아니다.'라고,
seyyathāpi, bhikkhave, daharo kumāro mando uttānaseyyako dhātiyā
pamādamanvāya kaṭṭhaṃ vā kaṭhalaṃ vā mukhe āhareyya.
tamenaṃ dhāti sīghaṃ sīghaṃ manasi kareyya;
sīghaṃ sīghaṃ manasi karitvā sīghaṃ sīghaṃ āhareyy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아무것도 모르고 [뒤척이지 못하고] 반듯하게만 누워 있는 갓난아이가
유모가 소홀히 한 틈을 타서 막대기나 자갈을 입에 넣는다면
그 유모는 즉시에 그것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즉시 주의를 기울인 뒤에 그것을 끄집어낼 것이다.
yathā yathā, bhikkhave, bhikkhuno aññataraṃ samādhinimittaṃ suggahitaṃ hoti
sumanasikataṃ sūpadhāritaṃ suppaṭividdhaṃ paññāya
tathā tathā so tasmiṃ dhamme atthapaṭisaṃvedī ca hoti dhammapaṭisaṃvedī ca.
비구가 어떤 한 가지 삼매의 표상을 잘 취하고
마음에 잘 새기고 잘 호지하고 통찰지로 잘 꿰뚫을 때,
그는 그 법에 대해서 의미를 체득하고 법을 체득한다.
paccavekkhaṇānimittaṃ suggahitaṃ hoti
sumanasikataṃ sūpadhāritaṃ suppaṭividdhaṃ paññāya.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반조의 표상을 잘 취하고
마음에 잘 새기고 잘 호지하고 통찰지로 잘 꿰뚫는다.
buddhānaṃ sāsanaṃ manasi kātuṃ 부처님 교법을 마음에 잡도리하기
saṅgaṇikavihāre kho pana sati ākiṇṇavihāre na sukaraṃ buddhānaṃ sāsanaṃ manasi kātuṃ
무리지어 살고 혼잡하게 살면 부처님 교법을 마음에 잡도리하기가 쉽지 않을 것
yasmiṃ, bhikkhave, puggale āghāto jāyetha, asatiamanasikāro tasmiṃ puggale āpajjitabbo;
evaṃ tasmiṃ puggale āghāto paṭivinetabbo.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마음챙기지 않음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evamevaṃ khvāvuso, yvāyaṃ puggalo aparisuddhakāyasamācāro parisuddhavacīsamācāro,
yāssa aparisuddhakāyasamācāratā na sāssa tasmiṃ samaye manasi kātabbā,
yā ca khvāssa parisuddhavacīsamācāratā sāssa tasmiṃ samaye manasi kātabbā.
evaṃ tasmiṃ puggale āghāto paṭivinetabbo.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몸으로 짓는 행위는 청정하지 못하지만
말로 짓는 행위는 청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몸으로 짓는 청정하지 못한 행위는 마음에 두지 말고
그때는 그가 말로 짓는 청정한 행위만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도반들이여,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원한을 제거해야 합니다.
‘ aho vatāhaṃ rattindivaṃ jīveyyaṃ, bhagavato sāsanaṃ manasi kareyyaṃ,
bahu vata me kataṃ assā ’ti.
evaṃ kho ahaṃ, bhante, bhāvemi maraṇassatin”ti.
' 참으로 나는 하루 밤낮밖에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교법을 마음에 잡도리하리라.
그러면 참으로 지은 것이 많을 것이다. '라고,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습니다.
“idhāvuso, bhikkhu vivicceva kāmehi ... pe ...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tassa ce, āvuso, bhikkhuno iminā vihārena viharato
kām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samudācaranti, svassa hoti ābādho.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 초선(初禪)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만일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머물 때 감각적 욕망이 함께한
인식과 마음에 잡도리함이 일어나면 이것은 그에게 병입니다. <*samudācaranti>
puna caparaṃ, bhikkhu, yasmiṃ samaye bhikkhu
yaṃ nimittaṃ āgamma yaṃ nimittaṃ manasikaroto
anantarā āsavānaṃ khayo hoti taṃ nimittaṃ nappajānāti
다시 비구여, 여기 비구가 어떤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그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면
즉시에 번뇌들이 다하게 되는 그러한 표상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yadevassa divā samādhinimittaṃ manasikataṃ hoti tadevassa tasmiṃ samaye samudācarati.
tasmā so asamayo manobhāvanīyassa bhikkhuno dassanāya upasaṅkamituṃ.
그 시간에는 그가 낮동안 마음에 잡도리하고 있던
삼매의 표상이 아직 그에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samudācarati>
그러므로 그 시간은 마음 닦는 비구를 친견하기 위해서 다가가기에 좋은 시간이 아닙니다.
ojaṭṭhāyissa tasmiṃ samaye kāyo hoti phāsussa hoti buddhānaṃ sāsanaṃ manasi kātuṃ.
tasmā so asamayo manobhāvanīyassa bhikkhuno dassanāya upasaṅkamitun”ti.
그 시간에는 그의 몸이 기력이 충만하여
부처님의 교법을 마음에 잡도리하기에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마음 닦는 비구를 친견하기 위해서 다가가기에 좋은 시간이 아닙니다.
idha panāhaṃ, nāgita, bhikkhuṃ passāmi āraññikaṃ araññe pacalāyamānaṃ nisinnaṃ.
tassa mayhaṃ, nāgita, evaṃ hoti —
‘idāni ayamāyasmā imaṃ niddākilamathaṃ paṭivinodetvā
araññasaññaṃyeva manasi karissati ekattan’ti.
tenāhaṃ, nāgita, tassa bhikkhuno attamano homi araññavihārena.
나기따여, 나는 여기서 숲에 머무는 비구가 숲속에서 졸면서 앉아있는 것을 본다.
나기따여, 내게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이 존자는 수면과 피로를 제거하고
숲이라는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여 전일(全一)하게 될 것이다.'라고,
나기따여, 그래서 나는 숲에 머무는 비구를 기뻐한다.
idha, panāvuso, ekacco puggalo sabbanimittānaṃ amanasikārā
animittaṃ cetosamādhiṃ upasampajja viharati.
도반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에 들어 머뭅니다.
sappāyāsappāyesu kho panassa dhammesu hīnappaṇītesu kaṇhasukkasappatibhāgesu
nimittaṃ suggahitaṃ hoti sumanasikataṃ sūpadhāritaṃ suppaṭividdhaṃ paññāya.
도움이 되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법들에 대해, 저열하거나 수승한 법들에 대해,
검거나 흰 부분을 가진 법들에 대해 표상을 잘 취하고
잘 마음에 잡도리하고 잘 간직하고 통찰지로 잘 꿰뚫는다.
itthī, bhikkhave, ajjhattaṃ itthindriyaṃ manasi karoti —
itthikuttaṃ itthākappaṃ itthividhaṃ itthicchandaṃ itthissaraṃ itthālaṅkāraṃ.
sā tattha rajjati tatrābhiramati.
비구들이여, 여기 여자는 안으로 여자의 기능을 마음에 잡도리하고 여자의 행위와 여자의 외관과
여자의 자만과 여자의 의욕과 여자의 목소리와 여자의 장식을 마음에 잡도리한다.
sā tattha rattā tatrābhiratā bahiddhā purisindriyaṃ manasi karoti —
purisakuttaṃ purisākappaṃ purisavidhaṃ purisacchandaṃ purisassaraṃ purisālaṅkāraṃ.
sā tattha rajjati tatrābhiramati.
그녀는 거기에 매혹되고 그것을 기뻐하여, 밖으로 남자의 기능을 마음에 잡도리하고 남자의 행위와
남자의 외관과 남자의 자만과 남자의 의욕과 남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장식을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녀는 거기에 매혹되고 그것을 기뻐한다.
sā tattha rattā tatrābhiratā bahiddhā saṃyogaṃ ākaṅkhati.
yañcassā saṃyogapaccayā uppajjati sukhaṃ somanassaṃ tañca ākaṅkhati.
itthatte, bhikkhave, abhiratā sattā purisesu saṃyogaṃ gatā.
evaṃ kho, bhikkhave, itthī itthattaṃ nātivattati.
그녀는 거기에 매혹되고 그것을 기뻐하여, 밖으로 속박을 갈구한다.
이러한 속박으로 인해 생긴 행복과 기쁨이 그 어떤 것이건 그것을 그녀는 갈구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여자의 성을 기뻐하고 집착하여 남자의 속박에 묶인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하여 여자는 여자의 성을 넘어서지 못한다.
tasmātiha, moggallāna, evaṃ sikkhitabbaṃ —
‘na uccāsoṇḍaṃ paggahetvā kulāni upasaṅkamissāmī’ti. evañhi te, moggallāna, sikkhitabbaṃ.
sace, moggallāna, bhikkhu uccāsoṇḍaṃ paggahetvā kulāni upasaṅkamati,
santi hi, moggallāna, kulesu kiccakaraṇīyāni.
yehi manussā āgataṃ bhikkhuṃ na manasi karonti,
tatra bhikkhussa evaṃ hoti — ‘kosu nāma idāni maṃ imasmiṃ kule paribhindi,
virattarūpā dānime mayi manussā’ti.
itissa alābhena maṅkubhāvo, maṅkubhūtassa uddhaccaṃ, uddhatassa asaṃvaro,
asaṃvutassa ārā cittaṃ samādhimhā.
목갈라나여, 그러므로 그대는
'나는 [자만으로] 거들먹거리면서 신도 집에 가지 않으리라.'라고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목갈라나여, 그대는 참으로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만일 비구가 자만에 취해 거들먹거리면서 신도 집에 가는데 그 가정에 해야 할 일이 많아
사람들이 비구가 온 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비구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누가 지금 이 집에서 나를 혼란케 하는가?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구나.'라고,
이렇게 해서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되어 의기소침하게 된다.
의기소침하면 들뜨고 들뜨면 단속하지 못하고, 단속하지 못하면 마음은 삼매로부터 멀어진다.
ayoniso manasikāro kho, mahāli, hetu,
ayoniso manasikāro paccayo pāpassa kammassa kiriyāya pāpassa kammassa pavattiyā.
마할리여,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함[非如理作意]을 원인으로 하고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함을 조건으로 하여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한다.
yoniso manasikāro kho, mahāli, hetu,
yoniso manasikāro paccayo kalyāṇassa kammassa kiriyāya kalyāṇassa kammassa pavattiyā.
마할리여,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如理作意]을 원인으로 하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조건으로 하여 선업을 짓고 선업을 행한다.
iti kho, bhikkhave,
asappurisasaṃsevo paripūro asaddhammassavanaṃ paripūreti,
비구들이여, 이처럼 참된 사람을 섬기지 않음을 갖추면 정법을 배우지 않음을 갖추게 된다.
asaddhammassavanaṃ paripūraṃ assaddhiyaṃ paripūreti,
정법을 배우지 않음을 갖추면 믿음 없음을 갖추게 된다.
assaddhiyaṃ paripūraṃ ayonisomanasikāraṃ paripūreti,
믿음 없음을 갖추면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함을 갖추게 된다.
ayonisomanasikāro paripūro asatāsampajaññaṃ paripūreti,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함을 갖추면 마음챙기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함을 갖추게 된다.
“tamenaṃ tathāgato vā tathāgatasāvako vā jhāyī samāpattikusalo
paracittakusalo paracittapariyāyakusalo evaṃ cetasā ceto paricca manasi karoti —
‘ kiṃ nu kho ayamāyasmā aññaṃ byākaroti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 ’ti?
여래나 혹은 禪을 닦고 [삼매의]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 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는,
자기 마음으로 [그의] 마음을 대하여 주의를 기울입니다.
‘무슨 이유로이 존자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꿰뚫어 안다.'라고 구경의 지혜를 설하는가?'라고.
“idhānanda, bhikkhu evaṃ manasi karoti —
‘etaṃ santaṃ etaṃ paṇītaṃ, yadidaṃ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evaṃ kho, ānanda, siyā bhikkhuno tathārūpo samādhipaṭilābho yathā
na cakkhuṃ manasi kareyya, na rūpaṃ manasi kareyya ... pe ...
yampidaṃ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vicaritaṃ manasā,
tampi na manasi kareyya; manasi ca pana kareyyā”ti.
4.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빛바램[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이렇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아난다여, 이렇게 해서 비구는
눈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형상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귀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소리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코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냄새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혀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맛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몸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감촉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땅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물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불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바람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공무변처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식무변처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무소유처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이 세상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저 세상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지만,
그러나 마음에 잡도리함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
“idha, bhikkhave, 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padhānamanvāya anuyogamanvāya appamādamanvāya sammāmanasikāramanvāya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katamañca, kevaṭṭa, anusāsanīpāṭihāriyaṃ?
idha, kevaṭṭa, bhikkhu evamanusāsati —
‘evaṃ vitakketha, mā evaṃ vitakkayittha, evaṃ manasikarotha, mā evaṃ manasākattha,
idaṃ pajahatha, idaṃ upasampajja viharathā’ti.
idaṃ vuccati, kevaṭṭa, anusāsanīpāṭihāriyaṃ.
께왓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가르침의 기적[敎誡神變] 인가?
께왓다여, 여기 비구는 이와 같이 가르친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는 생각하지 마시오.
이와 같이 마음에 잡도리하고 이와 같이는 마음에 잡도리하지 마시오.
이것은 버리고 이것은 구족하여 머무시오'라고
께왓다여, 이를 일러 가르침의 기적이라 한다.
‘kimhi nu kho sati jarāmaraṇaṃ hoti, kiṃpaccayā jarāmaraṇan’ti?
atha kho, bhikkhave, vipassissa bodhisattassa yoni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abhisamayo —
‘jātiyā kho sati jarāmaraṇaṃ ho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에게 이런 생각이 들이다.
'무엇이 있을 때 늙음 · 죽음이 있으며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 죽음이 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은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를 통해서
마침내 '태어남이 있을 때 늙음 · 죽음이 있으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 죽음이 있다.'라고
통찰지로 분명하게 꿰뚫어 보았다.
“kathaṃbhūtā pana, bhante, bhagavā devatā manasikarotī”ti ?
세존이시여, 그러면 세존께서는 어떠한 신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십니까?
“cattāri sotāpattiyaṅgāni --
sappurisasaṃsevo, saddhammassavanaṃ, yonisomanasikāro, dhammānudhammappaṭipatti.
네 가지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sotāpattiyaṅga) -
바른 사람을 섬김, 바른 법을 경청함,
지혜로운 주의,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dhamma-anudhamma)을 닦음.
ayoniso, bhikkhave, manasikaroto
anuppannā ceva āsavā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vaḍḍhanti;
yoniso ca kho, bhikkhave, manasikaroto
anuppannā ceva āsavā na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hīyanti.
비구들이여,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들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증가한다.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들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없어진다.
manasikaraṇīye dhamme nappajānāti, amanasikaraṇīye dhamme nappajānāti.
so manasikaraṇīye dhamme appajānanto amanasikaraṇīye dhamme appajānanto,
ye dhammā na manasikaraṇīyā, te dhamme manasi karoti,
ye dhammā manasikaraṇīyā te dhamme na manasi karoti.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는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알지 못하여,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고
마음에 잡도리해야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는다.
yassa, bhikkhave, dhamme manasikaroto
anuppanno vā kāmāsavo uppajjati, uppanno vā kāmāsavo pavaḍḍhati;
anuppanno vā bhavāsavo uppajjati, uppanno vā bhavāsavo pavaḍḍhati;
anuppanno vā avijjāsavo uppajjati, uppanno vā avijjāsavo pavaḍḍhati —
ime dhammā na manasikaraṇīyā ye dhamme manasi karoti.
비구들이여, 어떤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欲漏]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가 증가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존재에 기인한 번뇌[有漏]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존재에 기인한 번뇌가 증가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명에 기인한 번뇌[無明漏]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증가하면,
그 법들은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지만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이다.
yassa, bhikkhave, dhamme manasikaroto
anuppanno vā kāmāsavo na uppajjati, uppanno vā kāmāsavo pahīyati;
anuppanno vā bhavāsavo na uppajjati, uppanno vā bhavāsavo pahīyati;
anuppanno vā avijjāsavo na uppajjati, uppanno vā avijjāsavo pahīyati —
ime dhammā manasikaraṇīyā ye dhamme na manasi karoti.
비구들이여, 어떤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欲漏]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가 없어지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존재에 기인한 번뇌[有漏]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존재에 기인한 번뇌가 없어지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명에 기인한 번뇌[無明漏]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없어지면,
그 법들은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고 있지 않지만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이다.
‘ahosiṃ nu kho ahaṃ atītamaddhānaṃ? na 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iṃ 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athaṃ 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iṃ hutvā kiṃ ahosiṃ nu kho ahaṃ atītamaddhānaṃ?
bhavissāmi nu kho ahaṃ anāgatamaddhānaṃ? na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iṃ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athaṃ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iṃ hutvā kiṃ bhavissāmi nu kho ahaṃ anāgatamaddhānan’ti?
etarahi vā paccuppannamaddhānaṃ ajjhattaṃ kathaṃkathī hoti —
‘ahaṃ nu khosmi? no nu khosmi? kiṃ nu khosmi? kathaṃ nu khosmi?
ayaṃ nu kho satto kuto āgato? so kuhiṃ gāmī bhavissatī’ti?
'나는 과거에 존재했을까? 아니면 나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에 어떠했을까?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에 존재할까? 아니면 나는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에 어떻게 될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할까?
지금 현재에 대해서도 안으로 의심한다.
나는 존재하기는 하는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가? 이 중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라고”
“so ‘idaṃ dukkhan’ti yoniso manasi karoti,
‘ayaṃ dukkhasamudayo’ti yoniso manasi karoti,
‘ayaṃ dukkhanirodho’ti yoniso manasi karo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oniso manasi karoti.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tassa evaṃ yoniso manasikaroto tīṇi saṃyojanāni pahīyanti —
sakkāyadiṭṭhi, vicikicchā, sīlabbataparāmāso.
ime vuccanti,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그가 이와 같이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면 세 가지 족쇄들이 제거되나니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와, 의심[疑]과,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라 한다.
“yā imā, bhante, anekavihitā diṭṭhiyo loke uppajjanti —
attavādapaṭisaṃyuttā vā lokavādapaṭisaṃyuttā vā —
ādimeva nu kho, bhante, bhikkhuno manasikaroto evametāsaṃ diṭṭhīnaṃ pahānaṃ hoti,
evametāsaṃ diṭṭhīnaṃ paṭinissaggo hotī”ti?
세존이시여, 여러 가지 견해들이 세상에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은 자아에 대한 이론과 연관되어 있거나 세상에 대한 이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막 마음에 잡도리하는 비구에게도
이런 견해들이 제거되고 이런 견해들이 완전히 버려집니까?
“yā imā, cunda, anekavihitā diṭṭhiyo loke uppajjanti —
attavādapaṭisaṃyuttā vā lokavādapaṭisaṃyuttā vā —
yattha cetā diṭṭhiyo uppajjanti yattha ca anusenti yattha ca samudācaranti
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 so attā’ti —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 passato evametāsaṃ diṭṭhīnaṃ pahānaṃ hoti,
evametāsaṃ diṭṭhīnaṃ paṭinissaggo hoti.
쭌다여, 참으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세상에 일어난다.
그런 것은 자아에 대한 주장과 연결되어 있거나 세상에 대한 주장과 연결되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이 어디서 일어나고 어디서 잠재해 있고 어디서 움직이더라도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
이러한 견해들이 제거되고 이러한 견해들이 완전히 버려진다.
tatrāvuso, yvāyaṃ puggalo anaṅgaṇova samāno
‘natthi me ajjhattaṃ aṅgaṇan’ti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tassetaṃ pāṭikaṅkhaṃ —
subhanimittaṃ manasi karissati,
tassa subhanimittassa manasikārā rāgo cittaṃ anuddhaṃsessati;
so sarāgo sadoso samoho sāṅgaṇo saṃkiliṭṭhacitto kālaṃ karissati.
도반이여,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흠이 없으면서도 '내 안에 흠이 없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그는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할 것이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기 때문에
탐욕이 그의 마음을 오염시킬 것이라는 것이 예상됩니다.
그는 탐욕을 가지고 성냄을 가지고 어리석음을 가지고 흠을 가지고
마음이 오염된 채로 죽을 것입니다.
“tassa ce, bhikkhave, bhikkhuno tesampi vitakkānaṃ ādīnavaṃ upaparikkhato uppajjanteva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pi dosūpasaṃhitāpi mohūpasaṃhitāpi,
tena, bhikkhave, bhikkhunā tesaṃ vitakkānaṃ asatiamanasikāro āpajjitabbo.
tassa tesaṃ vitakkānaṃ asatiamanasikāraṃ āpajjato
ye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pi dosūpasaṃhitāpi mohūpasaṃhitāpi
te pahīyanti te abbhatthaṃ gacchanti.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비구들이여, 그가 그 사유들의 위험을 면밀히 관찰하더라도
탐욕과도 관련되고 성냄과도 관련되고 어리석음과도 관련된, 나쁘고 해로운 사유들이 일어나면,
그 비구는 그 사유들을 마음챙기지 말아야 하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가 그 사유들을 마음챙기지 않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을 때
탐욕과도 관련되고 성냄과도 관련되고 어리석음과도 관련된,
나쁘고 해로운 사유들이 제거되고 사라진다.
그런 것들이 제거되기 때문에 마음이 안으로 안정되고 고요해지고 전일해져 삼매에 든다.
seyyathāpi, bhikkhave, cakkhumā puriso āpāthagatānaṃ rūpānaṃ adassanakāmo assa;
so nimīleyya vā aññena vā apalokeyy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눈을 가진 사람이 시야에 들어온 형색을 보지 않으려고 하면
눈을 감거나 다른 것을 쳐다보는 것과 같다.
“tasmātiha, bhikkhave, imaṃ kakacūpamaṃ ovādaṃ abhikkhaṇaṃ manasikarotha.
taṃ vo bhavissati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ā”ti.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이 톱의 비유를 통한 교훈을 매 순간마다 마음에 잡도리하라.
그대들에게 이것은 긴 세월을 이로움과 행복이 될 것이다.
“manasi karohi, aggivessana; manasi karitvā kho, aggivessana, byākarohi.
na kho te sandhiyati purimena vā pacchimaṃ pacchimena vā purimaṃ.
악기웻사나여, 마음에 잡도리하라. 악기웻사나여, 마음에 잡도리하고서 설명하라.
그대의 말은 먼저 한 말은 뒤에 한 말과 일치하지 않고
뒤에 한 말은 먼저 한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vedanāsu vedanāññatarāhaṃ, bhikkhave, evaṃ vadāmi yadidaṃ —
assāsapassāsānaṃ sādhukaṃ manasikāraṃ.
비구들이여, 이 들숨날숨을 잘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은
느낌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의] 느낌이라고 나는 말한다.
tassa mayhaṃ, anuruddhā, etadahosi —
‘amanasikāro kho me udapādi, amanasikārādhikaraṇañca pana me samādhi cavi.
samādhimhi cute obhāso antaradhāyati dassanañca rūpānaṃ.
sohaṃ tathā karissāmi yathā me puna na vicikicchā uppajjissati na amanasikāro’”ti.
아누룻다들이여, 그때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이 나에게 일어났다.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으로 인해 나의 삼매는 사라져버렸다.
삼매가 사라져버리자 광명이 사라지고 드러난 형색들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는 의심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렇게 하리라.'
tassa mayhaṃ, anuruddhā, etadahosi —
‘yasmiñhi kho ahaṃ samaye rūpanimittaṃ amanasikaritvā obhāsanimittaṃ manasi karomi,
obhāsañhi kho tasmiṃ samaye sañjānāmi, na ca rūpāni passāmi.
아누룻다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온 밤을 혹은 온 낮을 혹은 온 밤낮을
형색의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광명의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했을 때에는
광명을 인식하였지만 형색의 표상은 인식하지 못했다.
yasmiṃ panāhaṃ samaye obhāsanimittaṃ amanasikaritvā rūpanimittaṃ manasi karomi,
rūpāni hi kho tasmiṃ samaye passāmi na ca obhāsaṃ sañjānāmi —
kevalampi rattiṃ, kevalampi divaṃ, kevalampi rattindivan’”ti.
내가 광명의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 하지 않고
형색의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했을 때에는
형색의 표상은 인식하였지만 광명을 인식하지 못했다.'
“idhānanda, 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ātappamanvāya padhānamanvāya
anuyogamanvāya appamādamanvāya sammāmanasikāramanvāya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amuṃ puggalaṃ passati
— idha pāṇātipātiṃ adinnādāyiṃ kāmesumicchācāriṃ musāvādiṃ pisuṇavācaṃ pharusavācaṃ
samphappalāpiṃ abhijjhāluṃ byāpannacittaṃ micchādiṭṭhiṃ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passati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nirayaṃ upapannaṃ.
아난다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몰입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하여 이러한 마음의 삼매에 도달한다.
즉 마음이 삼매에 들어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중상모략을 하고,
욕설을 하고, 잡담을 하고, 탐욕스럽고, 악의를 가지고, 삿된 견해를 가진 자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본다.
idha, gahapati, ariyasāvako paṭiccasamuppādaññeva sādhukaṃ yoniso manasi karoti —
‘iti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장자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연기를 지혜롭게 잘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
viññāṇaṃ, bhikkhave, yoniso manasi karotha, viññāṇāniccatañca yathābhūtaṃ samanupassatha.
viññāṇaṃ, bhikkhave, bhikkhu yoniso manasi karonto,
viññāṇāniccatañca yathābhūtaṃ samanupassanto viññāṇasmiṃ nibbindati.
nandikkhayā rāgakkhayo, rāgakkhayā nandikkhayo.
nandirāgakkhayā cittaṃ vimuttaṃ suvimuttanti vuccatī”ti.
… 알음알이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고 알음알이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비구들이여, 알음알이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고 알음알이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알음알이에 대해서 염오한다.
즐김이 멸진하기 때문에 탐욕이 멸진하고 탐욕이 멸진하기 때문에 즐김이 멸진한다.
즐김과 탐욕이 멸진하기 때문에 마음은 해탈하나니 이를 두고 잘 해탈하였다고 한다.
“sīlavatāvuso, sāriputta, bhikkhunā katame dhammā yoniso manasikātabbā”ti?
“sīlavatāvuso, koṭṭhika, bhikkhunā pañcupādānakkhandhā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yoniso manasi kātabbā.
도반 사리뿟따여, 계를 지키는 비구는 어떤 법들을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해야 합니까?
도반 꽂티따여, 계를 지키는 비구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를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쇠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해야 합니다.
“rūpaṃ disvā sati muṭṭhā, piyaṃ nimittaṃ manasi karoto.
sārattacitto vedeti, tañca ajjhosa tiṭṭhati.
형색을 보고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습니다.
manaṃ, bhikkhave, yoniso manasi karotha; manāniccatañca yathābhūtaṃ samanupassatha.
manaṃ, bhikkhave, bhikkhu yoniso manasikaronto,
manāniccatañca yathābhūtaṃ samanupassanto manasmimpi nibbindati.
nandikkhayā rāgakkhayo; rāgakkhayā nandikkhayo. nandirāgakkhayā cittaṃ suvimuttanti vuccatī”ti.
… 마노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고 마노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비구들이여, 마노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고 마노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마노에 대해서 염오한다.
즐김이 멸진하기 때문에 탐욕이 멸진하고 탐욕이 멸진하기 때문에 즐김이 멸진한다.
즐김과 탐욕이 멸진하기 때문에 마음은 잘 해탈하였다고 한다.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amuṃ telapattaṃ amanasikaritvā
bahiddhā pamādaṃ āhareyyā”ti? “no hetaṃ, bhante”.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그 사람이 그 기름 단지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밖으로 방일한 채 가져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upamā kho myāyaṃ, bhikkhave, katā atthassa viññāpanāya. ayaṃ cevettha attho —
samatittiko telapattoti kho, bhikkhave, kāyagatāya etaṃ satiyā adhivacanaṃ.
비구들이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비구들이여, 기름으로 가득 찬 단지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ye me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eyyu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세속에 대한 나의 기억과 사유를 모두 제거하리라.'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ādittaṃ, bhikkhave, celaṃ vā sīsaṃ vā ajjhupekkhitvā amanasikaritvā
anabhisametānaṃ catunnaṃ ariyasaccānaṃ yathābhūtaṃ
abhisamayāya adhimatto chando ca vāyāmo ca ussāho ca ussoḷhī ca appaṭivānī ca
sati ca sampajaññañca karaṇīyaṃ.
katamesaṃ catunnaṃ?
비구들이여, 차라리 옷이 불타거나 머리가 불타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겠지만
아직 관통하지 못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관통하기 위해서
그는 아주 강한 열의와 노력과 관심과 분발과 불퇴전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무엇이 넷인가?
첫댓글
界, 相, 想, 念, 作意라는 표현이 많이 나타나서
일부 편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