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의 대의 앞에 속절없이 스러져간, 法國의 중전을 위로하며…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어!" 그녀를 조롱하려 지어낸건 아닐까
사치와 허영의 왕비였을지 모르나 그런 말을 할 푼수는 아니였으리
로베스피에르 31세, 당통 29세, 생쥐스트 21세, 루이16세 35세, 마리-앙투아네트 34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9세.
프랑스대혁명을 점화시킨 바스티유 습격의 날(1789년 7월 14일), 이 혁명의 불길에 제 삶을 사를 운명이었던 사람들의 나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은 혁명의 주체와 그 대상들은 오늘날 한국으로 치면 소위 386세대보다 더 젊었다.
이들은 그로부터 4년 안에, 군인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제외하곤, 모두 죽었다. 자연스럽게 죽은 게 아니라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한 때의 제 신민(臣民)에게 살해되거나, 한 때의 제 동지에게 살해되었다.
그것도 격식을 갖춘 죽음을 맞은 것이 아니라,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고 머리와 몸의 분리를 겪어야 했다. 뒷날 혁명을 탈취해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만이, 비록 대서양 외딴 섬에서 쓸쓸하게나마, 고종명했다. 그래봐야 50대였지만.
사실 이들은 모두 살인자들이었다. 루이16세 부부는 하필 흉년이 연이어 오던 시절 국가경영을 엉망으로 함으로써 수많은 신민을 굶겨 죽였다. 이 점과 관련해, '철없는' 왕비 마리-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것 아냐!"(Qu'ils mangent de la brioche!)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널리 퍼져있다.
본디 출처가 어디인진 모르겠으나, 누군가가 그녀를 조롱하고 그녀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기 위해 과장하거나 지어낸 얘기가 아닌가 싶다. 마리-앙투아네트는, 총명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푼수덩이는 아니었다.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는 혁명의 이름으로 수많은 '시민들'을 단두대로 보냈다. 그들에게 죽은 사람은 국왕의 신민(sujets)이 아니라 공화국의 시민(citoyens)이었다. 그들 가운덴 한 때의 굳건한 혁명동지 당통도 있었다.
당통 역시, 이들만큼 과격하진 않았으나, 혁명정부의 법무부장관으로서 시민들의 불법 학살과 무질서를 수수방관했다. 그러나 이들이 죽인 사람 전부를 합해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죽인 사람 수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코르시카 출신의 이 키 작은 군인-황제는 프랑스혁명의 공화주의 이념을 제가 짓밟아놓고도, 혁명의 이념을 유럽 전체에 전파한다는 구실로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수십만 유럽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들 펄펄 끓는 젊음이 이상주의 또는 복고주의와 결합해 온건함과 절제의 자리를 없애버린 것일까? 이 학살자들 가운데 가장 수동적이었던 사람은 마리-앙투아네트였다. 사실 그녀에게는 순진한 데가 있어서, 혁명이라는 것이 일어날지, 그 혁명에 자신과 왕족의 운명이 휘말릴지, 그리고 결국 그 혁명의 정점에서 자신이 단두대에 오를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리-앙투아네트는 열네 살에 어깨동갑인 프랑스 왕세자 루이-오귀스트(뒷날의 루이16세)와 결혼했다. 그 당시 왕족 사이의 결혼이 흔히 그렇듯 정략결혼이었다. 독일어식 이름으로 마리아 안토니아였던 마리-앙투아네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부부의 막내딸이었다.
그녀 어머니는 유럽 최강국의 하나였던 오스트리아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자였고, 아버지는 그 오스트리아제국을 핵심으로 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리고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랜 숙적이었다.
인척 관계로라도 두 집안을 맺어놓지 않으면,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몰랐다. 그래서 마리아 안토니아는 부모의 뜻에 따라 적국 왕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과 함께 이름도 프랑스식으로 마리-앙투아네트가 되었다. 그녀만이 정략결혼을 한 게 아니다. 그 결혼 앞뒤로 그녀의 자매들도 외국 군주나 왕위계승자와 차례로 결혼했다.
마리-앙투아네트는 4년 동안 왕세자빈 노릇을 하다가, 시아버지 루이15세가 죽은 뒤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처음부터 궁중 안팎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마리-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결혼의 정략이 외려 그 결혼의 약점이 되었다.
궁중 안팎 사람들만이 아니라 일부 신민들도 마리-앙투아네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시누이들은 등 뒤에서 그녀를 이름이나 직위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여자'(오트리시엔)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그녀를 심지어 '오트뤼시엔'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타조'를 뜻하는 '오트뤼슈'와 암캐를 뜻하는 '시엔'을 합한 말이다.
사람들은 대개 마리-앙투아네트라는 이름에서 사치와 허영과 불륜과 아둔함을 떠올린다. 실제와 어긋나지 않는 연상이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의 프티 트리아농을 아름답게 개조해 거주하면서 파티를 즐겼다.
그녀는 사치스러운 의상과 보석에 눈을 팔았고, 경마에도 손을 댔다. 확인할 수 없는 염문들이 끊임없이 그녀 둘레를 맴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부부가 제 딸을 프랑스 왕세자에게 시집보낸 목적, 즉 오스트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우호적 태도는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정치에 거의 관여할 수 없었다. 관여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어려서부터 반(反) 오스트리아 교육을 받은 루이16세를 바꿔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루이16세를 뒤바꿔놓은 것은 혁명이었다. 부르봉가와 합스부르크가의 대결 구도를, 프랑스의 혁명 '폭도들'과 루이16세를 포함한 유럽 군주들의 대결로 바꿔놓은 것이다.
사실 루이16세가 혁명주체들에게 조금만 양보했다면, 그는 혁명세력의 지롱드파(온건파)와 합세해 프랑스에 입헌군주제를 수립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것을 굴욕으로 받아들였고,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처가로 피신하다가 잡혀 '국사범'으로 투옥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자기들을 마다하고 적국으로 피신하려던 사람을 자기들의 절대군주로든 입헌군주로든 받들 수 없었다. 혁명의 분위기는 더욱 과격해졌고, 공포정치가 극으로 치닫던 1793년 국왕은 반역죄로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왕비가 마찬가지 운명을 맞은 것은 그로부터 한 해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럽의 군주들은 격앙할 수밖에 없었고, 대(對)프랑스 동맹은 더욱 견결해졌다.
프랑스혁명이, 비록 우여곡절을 겪긴 했으나 성공한 혁명이었으므로(무엇보다도 이 혁명은 인류사를 옥죄고 있던 신분제를 철폐했다), 우리는 이 혁명의 좋은 점만을 보려 한다. 그리고 마리-앙투아네트의 죽음도 그럴만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인정하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을 존중한다. 그런데 그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피를 뿌려야 했을까? 그런 급진적 사회혁명 말고, 영국식의 점진적 정치혁명을 택할 수는 없었을까?
당대의 유럽 군주들이 제 나라로 프랑스혁명이 수입될까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792년 9월 학살의 예에서 보듯, 프랑스혁명은 피로써 피를 씻어낸 혁명이었다. 당시 마리-앙투아네트는 남편과 함께 파리 탕플 탑에 유폐돼 있었다.
9월 3일 살해된 사람들 가운데는 어려서 시집온 마리-앙투아네트가 친언니처럼 따랐던 랑발 공작부인이 있었는데, 파리 시민들은 공작부인의 머리를 창끝에 얹어 탕플 탑까지 운반한 뒤 왕비 거처의 창(窓) 앞에 전시했다. 마리-앙투아네트는 창에 꽂힌 랑발 부인의 머리를 직접 보지 못했으나, 나중에 그 얘기를 듣고 혼절을 했다 한다.
나는 지금 루이16세 부부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 와중에 조국을, 자신의 신민을 배신하고 외국 군주에게 제 몸을 의탁하려 했던 군주 부부의 처신은 보기에 따라 사형감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단두대여만 했을까? 국왕 부부에게만 다른 방식으로 죽는 특권을 베풀었어야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는 단두대를 생각할 때마다 프랑스혁명의 명예를 부정하고 싶어진다.
프랑스인들은 혁명기의 이 무시무시한 발명품(스코틀랜드인들의 발명품이라던가?)을 1981년 사형제가 폐지될 때까지 유지해 왔다. 200년 동안 프랑스에서는 군인을 제외한 수많은 사형수들이 처형의 순간 머리와 몸통의 분리를 겪었다.
처형방식의 강온이나 명예/불명예를 거론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참수형은 가장 모욕적이고 야만스런 방식의 처형이다. 나는 교살이나 총살이, 그리고 그 뒤에 발명된 가스실이 참수보다 덜 끔찍하다 여긴다.
그리고 국왕 부부를 꼭 죽여야 했을까? 종신형을 선고해 가둬놓거나, 이를테면 아메리카로 추방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민족주의에 깊이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마리-앙투아네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여자였고 반역자였다.
그리고 루이16세는 그 오스트리아 여자의 남편이었다. 프랑스혁명이 일깨운 민족주의는 외국인 적에 대한 관용의 여지를 줄였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이 '반역자 부부'에 대한 군중의 민족주의적 증오를 관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마리-앙투아네트의 목은 단두대에 올려졌다.
당시엔 혁명광장으로 불렸던 오늘날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공화주의자의 자부심을 잠시 접고, 끝내 이방인이었던 왕비의 한을 위로한다. 편히 쉬어요, 법국(法國)의 중전이여. 글쓴이: 고종석
첫댓글 로베스피에르 31세, 당통 29세, 생쥐스트 21세, 루이16세 35세, 마리-앙투아네트 34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9세. 나폴레옹을 빼곤 운명을 달리한 그들,
바로 그들이 프랑스를 바꿨다---
대한민국의 열사들은 더 처절하게 나라를 위해 왜놈과 싸웠는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