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국외 배치 안 된다” 성명 무시하고
푸틴, 벨라루스에 전술핵 배치 선언
중국도 무기 지원 약속 안하고
가스관 추가 건설 합의도 거절
지난 3월 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월20일부터 22일까지 2박3일간 러시아를 국빈 방문했죠. 세 번째 주석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러시아로 달려간 건 중·러 관계가 시진핑 집권 3기 중국 외교정책의 중요한 축이라는 걸 의미합니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체포령을 내릴 정도로 고립된 러시아로서는 시 주석의 방러가 ‘가뭄 속 단비’ 역할을 했죠. 크렘린궁에서 성대한 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양국은 정상회담 후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어떤 형태의 패권주의, 일방주의, 강권정치에도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공동의 적인 미국을 상대로 함께 대항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겁니다.
하지만 시 주석 방러 이후 상황을 보면 양국 정상회담이 겉으로 보는 것처럼 순탄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양국은 공동성명에서 “어떤 핵무기도 국외에 배치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푸틴 대통령은 시 주석 귀국 사흘 뒤인 3월25일 벨라루스에 전술핵을 배치하겠다고 전격 선언했죠. 시 주석 역시 러시아가 고대했던 ‘시베리아의 힘 2′ 가스관 건설 프로젝트에 합의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겉으론 의기투합했지만 각자 제 갈 길 가는 모습이에요.
러시아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한 후 공동선언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있다./로이터 뉴스1
◇부글부글 중국 “시 주석 체면 먹칠”
중국은 벨라루스 전술핵 배치에 대해 부글부글 끓는 분위기입니다. 시 주석의 체면에 먹칠을 했다는 거죠. 시 주석의 이번 방러 명분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재였습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2월 하순 독자적인 중재안을 내놓기도 했죠.
중러 공동성명도 이 중재안을 언급하면서 “위기가 더 악화해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 걸 막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작년 1월에 나온 핵보유 5개국 정상의 핵전쟁 방지 공동성명을 거론하면서 “모든 핵보유국은 국외에 핵을 배치해서는 안 되며 배치된 핵무기도 철수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갔어요.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궁지에 몰린 푸틴 대통령이 공공연히 핵위협을 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긴장 완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중러 공동성명의 핵무기 관련 부분. 푸른색 부분에 “모든 핵보유국은 국외에 핵을 배치해서는 안 되며 배치된 핵무기도 철수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그런데, 이 공동성명에 서명한 지 불과 나흘 만에 푸틴 대통령이 여기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조치를 내놓은 거죠. 3월21일 시 주석과 함께 서명한 중러 공동성명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겁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3월27일 브리핑에서 “작년 1월 핵보유 5개국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핵전쟁은 누구도 이길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핵보유국 간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면서 “각국은 우크라이나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집중해야 하며 함께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완곡하게 반대의 뜻을 밝힌 거죠. 중국 소셜미디어 위챗의 한 공중계정 운영자는 “자기가 한 말조차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라(러시아) 자신은 난처하지 않겠지만, 중국은 난감한 입장”이라고 했습니다.
◇가스관 추가 건설 합의도 무산
사실 시진핑 주석도 이번 방러 기간에 어려운 처지인 러시아의 등을 두드려줬지만, 실질적 지원을 해준 건 거의 없었습니다. 이번 방러를 앞두고 미국은 중국이 러시아에 살상용 무기를 지원할 가능성에 대비해 강력하게 경고를 했죠. 시 주석은 결국 무기 지원을 약속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에 대한 무기 지원은 미국이 그은 ‘레드라인’을 넘는 것으로 중국은 러시아와 비슷한 수준의 경제 제재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중국 수출의 36%가량을 차지하는 미국·유럽연합·일본시장을 잃는다면 경제적 타격이 크겠죠.
러시아 아타만스카야 부근을 지나는 '시베리아의 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첫번째 가스관으로 2019년 개통됐다. /조선일보DB
러시아가 내심 큰 기대를 걸었던 건 ‘시베리아의 힘 2′ 가스관 건설 사업이었습니다. 러시아와 몽골, 중국을 잇는 2600㎞의 가스관을 건설해 중국에 매년 500억 세제곱미터(㎥)의 천연가스를 수출한다는 계획이죠.
서방 제재로 전체 천연가스 수출량의 80%를 차지하는 유럽 판로가 막힌 러시아로서는 중국을 그 대안으로 생각했습니다.
◇갑을 바뀐 중·러 관계
푸틴 대통령도 기대를 숨기지 않았어요. 3월21일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시베리아파워-2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에 합의했으며 프로젝트와 관련된 여러 변수에 대한 상의가 끝났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공동성명에는 “계속 연구하고 협의한다”고만 돼 있어요. 가스관 건설 비용은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 공급가격은 얼마로 할 것인지 등에 대한 최종 합의가 불발된 겁니다. 답답한 처지인 러시아에 가격을 더 내려 달라고 요구하는 중국 특유의 상술을 발휘한 거죠.
지난 2월 모스크바 외곽 노보 오가리요보 대통령 집무실에서 푸틴 대통령이 알렉산드르 루카센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오는 7월까지 벨라루스에 전술핵을 배치할 것이라고 3월25일 발표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번 정상회담은 표면적으로 중러 밀착을 더 강화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에 대해 이미 ‘을’의 입장이 된 러시아의 처지를 확인한 자리였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3월22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중러 관계를 ‘정략결혼’으로 평가하면서 러시아가 ‘아랫사람(junior partner)’이 됐다고 했죠.
푸틴 대통령이 양국 공동성명을 무시하고 벨라루스 전술핵 배치 카드를 꺼내 든 데는 이런 러시아의 처지에 대한 분노와 자괴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