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45
“어머 불길해. 역시 새 황후마마를 둘씩이나 들이는 게 아니었어.”
“누가 아니래. 그러니까 이런 사단이 나지.”
“정말이래? 정말 동궁 황후가 그 자리에 있었대?”
“그래. 누군진 몰라도 마침 지나가던 궁인이 그 장면을 봤다잖아.”
“봤대? 동궁 황후가 소용을 찌르는 걸 정말 봤대?”
“아니래. 소용이 자살하는 걸 황후께서 보신 거라던데.”
“아냐, 동궁 황후가 소용을 찔렀다고 했어. 그 자리에 단도를 들고 서 있었다잖아..!”
“흐흠!”
한 무리의 궁인들이 모여서 쉬쉬하듯 입방아를 찧고 있었고, 우겸이 그 곁을 지나다 멈춰 서자 궁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당황하여 앞을 보지도 못했다. 우겸은 한 마디 훈계라도 하려다 그만 걸음을 돌려버렸다. 궁인들은 앞을 다투어 사라진다. 그리고 그가 곧장 향한 곳은 황제궁. 황제의 방문 앞으로 무거운 표정의 우겸이 선다.
“폐하, 지원입니다.”
“들어오라.”
제 뒤로 조용히 고 환관이 따라 들어섰다. 정중히 예를 갖춘 우겸이 먼저 입을 연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미 늦어버렸군.”
“검시 후 태의들의 결론으로는, 단도로 찌른 뒤 즉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하였습니다.”
황제가 무거운 한숨을 쉰다. 자진인지 타살인지 모르는 후궁 내에서의 죽음. 게다가 그 일에 은이 관련되어 있었다. 은은 결백을 주장했고, 그곳에 있었다던 궁인은 은의 손에 쥐어진 단도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입후 겨우 열흘 남짓 만에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듯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원은 들으라.”
“하명하십시오, 폐하.”
“당장 정전으로 가 소용의 장례를 치를 준비를 서두르라 이르고 오도록.”
“명 받드옵니다.”
우겸은 곧 자리를 비웠다. 고 환관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폐하, 동궁 황후마마를 음해하려는 자들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옵니다.”
황제는 답하지 않았다. 그런 가설이야 얼마든지 품을 수 있지만 물증도 심증도, 아무것도 없는 지금으로선 맥락을 찾기가 힘들었다. 물론 은이 그런 일을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연의 일치로 소용이 자결하는 순간 은이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이라면, 참으로 기막히고도 어이없는 우연일 수밖에.
“소신이 동궁에 다녀오겠습니다, 폐하.”
말없는 황제의 등에 대고 꾸벅, 절을 한 고 환관이 조용히 방을 빠져나온다. 곧장 동궁으로 향하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 이번 일로 떼를 지어 득달같이 은을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을 반대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최악의 각본은 그 선봉에 진 대인이 서 있을 경우.
...
그 시간 동궁에는, 그리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마마, 서궁에서 찾아오셨습니다.”
잔뜩 신경이 곤두선 은의 귀로 흘러드는 장 상궁의 조심스런 말이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심신이 불편하시니 좋은 날 다시 오시라 전하오리까.”
“괜찮으니 드시라하게.”
장 상궁이 문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은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방 안에 어지러진 곳이 없는지를 살폈다. 다만 추스를 수 없는 것은 제 마음이었으며, 다스릴 수 없는 것은 얼굴 표정이었다. 소홍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잰걸음으로 다가와 덥석, 은의 양 손을 잡았다.
“얼마나 놀라셨어요.”
제게 힘주어 단도를 쥐어주던 소란의 작은 손이 다시 보였다. 누군가에게 손을 잡힌다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게 될 정도라니. 은은 자연스레 손을 빼내며 앉기를 권한다.
“찾아와 주시다니 고맙습니다. 어서 앉으세요.”
벌써부터 피곤함마저 느끼는 은이었지만 억지로 웃어보려 애를 썼다. 마주 앉은 소홍이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애 쓰실 것 없어요. 그런 일을 겪으셨는데 힘들지 않으실 리가 없지요.”
“심려하여 찾아와 주신 것은 고맙습니다만, 전 괜찮습니다. 되도록 빨리 잊으려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은이 말했다. 그것은, 간신히 잊으려 노력하는 와중에 찾아와 그 끔찍한 일들을 다시 상기시키게 하는 소홍에 대한 불만이 섞여있는 의미이기도 했다. 눈치 빠른 소홍이 그것을 이해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은은 그녀의 앞에서 자꾸만 느끼는 열등의식을 이겨내려 스스로를 채근하고 있을 뿐이었다.
“태의는 다녀갔는지요?”
“태의라니요.”
“당연히 입진을 받으셨을 줄 알았는데. 태중의 아이가 괜찮을는지 입진을 받아보셔야지요.”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은의 말이 맺어지는 것에 맞춰, 궁인이 차를 들고 들어섰다. 다기들을 내려놓는 것을 지켜보는 은의 미간이 다시 좁혀지고야 만다. 찻잎, 다기들, 그런 모든 것들이 다시 소란과의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매개가 되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생각나자 역한 기분이 들어 금세 고개를 돌려버렸다.
“장 상궁!”
“찾아계시옵니까.”
“당장 모두 치우게.”
장 상궁이 궁인과 함께 모든 것들을 챙겨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은은 소홍을 챙겼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니요, 괘념치 마세요. 그러고 보니 피곤하실 텐데 제가 눈치 없는 짓을 했군요.”
“별 말씀을.”
“다음에 다시 들르지요. 다음번에는 꼭 좋은 차 한 잔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소홍은 오자마자 돌아가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조금도 어두운 기색 없이 동궁을 떠났다. 은은 그녀에 대해 더 이상은 신경 쓸 여력도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아직도 속은 매슥거렸고, 온 몸 구석구석이 불결한 것 같은 기분과 함께 계속해서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괴로웠다. 아마도 그 일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일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에 무거운 한숨을 내려놓았다. 이마를 괸 채 은은 괴로워했다. 마음적인, 몸적인 많은 것들로 인해서.
제 짐을 내게 짊어지라니. 저로 인해 먼 길 떠나는 수고를 겪어야하는 일말의 미안함까지도 가지고 있었건만 이렇게 배신을 던져줄 줄이야. 많은 이들을 속이는 셈이 되었어도 옛 정이 있어 아이만은 곱게 길러줄 것이라 다짐까지 했는데, 소란, 네가 나를 이렇게...!
“좀 괜찮으십니까.”
이마를 괴고 있던 손을 거둬내자 고 환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결에 와 있었는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은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고 환관을 맞은편 자리로 권했다.
“괜찮아 보이십니까.”
“황공하옵니다.”
자신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이 흘러나왔다. 은은 고 환관에게 그리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곧 사과의 표시를 했다. 물론 고 환관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폐하의 심려도 이만저만이 아니신 터라,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진 대인은 신이 나 있겠군요.”
“그렇지도 못하지요. 진실은 마마께서만 알고 계실 뿐 아무도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니 그들도, 이쪽에서도 공격은 불가합니다.”
“나는 피해자라고 말했습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그러나 마마나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이 일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니 염려 마십시오.”
“무슨 뜻입니까.”
“마마께서 지금 천하를 호령하는 대제국의 안주인이신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고 환관의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런 은을 앞에 두고 고 환관은 일어서려다 문득 생각난 듯이 다리 자리에 앉는다.
“얼마 전, 고려에서 제게 인편을 보내왔습니다.”
“고려라니, 누구 말입니까.”
“제게 연통을 보낼 곳이야, 황후마마의 본가댁 말고 또 있겠습니까.”
은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 말고 반가워하거나 기쁜 감정은 없었다.
“아마도 진즉에 마마의 입후 소식을 들었겠지요. 마마와 황제폐하께 여쭈어, 제국의 황후가 된 저들의 막내딸을 꼭 한번 배알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
“어찌하시겠습니까.”
저와는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 먼 땅에 홀로 내던져두더니, 황후가 된 이제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취해온 가족들의 얼굴이 모두 일그러진 채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찌하겠느냐는 고 환관의 물음에 은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어찌하다니요. 천만부당한 일이라 전하세요! 제가 있는 이 땅은 고려인에게 아주 박하고도 박한 땅이라 한 걸음 들여놓기도 어려울 줄 알라 이르세요!”
은은 힘껏 고함쳤다. 심신, 모든 것이 극도로 자극되어 몹시 좋지 못한 상태에서 허약할 대로 허약해져버린 은은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첫댓글 에구.........여러가지 문제가 생기겠네요..아이도 그렇고....
혹시...은이 정말 임신하게 된건가요? 그렇다면 문제가 조금은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에휴.. 우리 은이가 힘들어지면 안되는데.... 정말 임신한거라면 좋겠지만 왠지 모르게 꼭 그게 좋은것만은 아닌듯 싶어요...
여러가지 복잡하네요;;; 근데;; 임신인건가요??? 긴가 민가 헷갈리네요 ㅜㅜ 다음화 전보다 애타게 기다리게됬네요 ㅜㅜ
임신,,,이군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