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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누가복음 11:14-28
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17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 11:14-28 / [예수와 바알세불; 마 12:22-30, 막 3:20-27] 예수께서 벙어리가 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니 그가 말을 하게 되었다. 군중은 이것을 보고 놀랐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귀신을 쫓아낸다고 신통해할 것 없어. 틀림없이 귀신의 두목인 바알세불에게서 그 힘을 얻었을 테니까' 하고 말하고 16)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떠보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이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내란이 생기면 망하고 가정도 불화가 생기면 기운다. 18) 너희는 내가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데 만일 사단이 서로 싸우면 어떻게 그 나라가 남아나겠느냐? 19) 내가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느냐? 너희는 그들도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것으로 너희가 공연한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 아니냐? 20)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 21) 힘센 사람이 완전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키고 있을 때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진 자가 그를 공격해 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 가진 모든 재산을 다 빼앗겨 버리지 않겠느냐? 23) 누구든지 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고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흩트리는 사람이다. 24) [귀신이 되돌아오면;마12:43-45]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물 없는 빈들을 헤매며 쉴 곳을 찾았다. 그러나 찾지 못하자 그가 나온 그 사람에게로 되돌아갔다. 25) 그리고 전에 있던 집이 청소되고 잘 정돈된 것을 보고 26)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모두 그 사람에게로 들어갔다. 그렇게 되면 그 불쌍한 사람은 전보다 훨씬 더 비참하게 되는 것이다.' 27) [참된 복]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가운데서 한 여자가 소리쳐 말하였다. `당신을 낳고 젖을 먹인 여인은 참으로 복받은 여인입니다!' 2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더 복받은 사람이다.'
두 가지 시선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부정하려는 사람과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14-20) 예수께서 사람을 지배하고 있던 귀신을 쫓아내자 말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이런 일을 했다고 비방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께서 무엇을 하시든 믿음으로 나오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사탄도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 할 때, 서로 분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상식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들에게 공정하게 판단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바리새인들 중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사역을 평가하듯이 예수님의 사역도 공평한 관점에서 판단하라고 지적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런 판단은 어려운 사고가 필요하지 않은 상식적인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여 귀신과 귀신의 지배가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안전한 집(21-28) 강한 자가 지배하던 곳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을 가진 자가 필요합니다. 사탄의 세력이 물러난 것은 더 강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기에 사람에게서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 다른 나라,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 편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정하는 것이고, 반대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지 않는 사람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24). 사탄은 반드시 그에게 들어가 그의 형편을 더 심하게 만듭니다(26). 이러한 영적 비밀은 어떤 나라에 속할지 결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경고가 담긴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편에 사는 사람은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복을 넘어 말씀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릴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나라는 사탄이 지배하는 곳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크리스천 운동선수는 이기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든 지든 하나님께서 내가 경기를 뛸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이고,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 크리스천 운동선수입니다.[스테판 커리, NBA 최우수 선수]
< 설 교 >
호크마 주석
=====11:14
한 벙어리 귀신 -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는 귀신 축출에 관한 기사가 없고(막 3:22), 마태복음(마 12:22)에 의하면 이 귀신은 그 사람을 벙어리가 되게 했을 뿐 아니라 눈까지 멀게 했다. 귀신을 좇아내는 과정은 일체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 내고 그 사람이 온전해졌다는 기사(奇事)만 간략하게 서술함으로써 이어지는 바알세불 논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고 묻는 모습이 나온다(마 12:23).
=====11:15
그 중에 더러는 -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일단의 무리들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되어 있고(마 12:24),
마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라고 되어 있다(막 3:22). 서기관의 대다수는 바리새인이었으므로 사실상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일치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 - 바알세불이 귀신의 왕이라고 불리어지게 된 기원과 '바알세불'이라는 이름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이 다만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왕하 1:2에 근거하여 '바알'이 에그론(Ekron)에서 숭배되던 우상인 '바알세붑'(Baal-Zebub)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한편 이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공동 번역의 '베엘제불'(Beelzebull)에서 'Beel'은 'Baal' 즉 '주'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며 뒷 부분인 'Zebull'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❶ '집', '높은 곳'을 뜻한다고 보면(왕상 8:13;사 63:15) '거주의 주' 또는 '높은 곳의 주'가 된다(Foerster). ❷ 발음이 유사한 '똥'이라는 의미의 Zebel로 보면 '똥의 왕'의 된다(Hendriksen). ❸ 이를 '파리'로 해석하여 '파리의 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Bengel, Tyndale). 이 가운데 비교적 많이 인용되는 것은 ❶ 의 설명이다. 아무튼 본문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유대인들(좁게는 교권자들)이, 예수가 귀신을 좇아낸 사건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정당하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무능력을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진리를 매도하려 했던 것이다.
=====11:16
시험하여...표적을 구하니 - 마가는 여기서도 적대자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마 12:38). 이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마 12:23), 즉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담당할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귀신 축출 사건을 신적 권위의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귀신을 축출하는 것이 신적 권위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을만큼 흔한 일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예수에게 더 무리한 요구를 하여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의도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들이 말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a sign from heaven, NIV)에 대해서는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 류의 이적을 요구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왕상 18:1).
=====11:17
아시고(* , 디아노에마타) - 이는 '깊이 생각하다', '구분하다'의 의미를 갖는 '디아노에오'(* )에서 나온 말로 의도나 목적을 간파 하였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분쟁하는...무너지느니라 -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전혀 논리에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나라나 집은 없다.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비유 앞에 적대자들의 논리는 산산이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11:18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 앞절에서는 진리에 대한 일반 놀리로 이끌어 내었는데 여기서는 그 일반 논리를 특수한 문제에 적용시키고 있다. 나라와 집이 그러하듯이 사단도 자기들 끼리 싸우면 그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입은 것이며, 싸움은 사단의 세력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만 있을 뿐이다(고후 10:4).
=====11:19
너희 아들들은...재판관이 되리라 - 적대자들의 비방에 대한 예수의 반대 논리는 매우 철저하며 집요하다. 이제는 적대자들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는지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귀신 축출 행위(逐出行爲)를 사단의 힘입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일하게 그들의 추종자들의 귀신 축출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자기들 스스로를 부정하고 악마화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의 재판관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들'(followers, NIV)로 번역된 '휘오스'(* )는 '추종자', '제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며(히 12:5;벧전 5:13), 예수 당시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행 19:13).
=====11:20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 여기서 '손'으로 번역된 '다크튈로스'(* )는 '손가락'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며(46절) 이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출 8:19; 31:18; 신 9:10). 그러나 더 흔하게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출 7:4, 5; 9:3, 15). 한편 마 12:28에는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삶의 초기부터 성령께서 함께하셨다는 의미에서(3:22; 4:1, 18) 마태의 서술도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영'이 의미상 거의 동일하였다고 할 때(대상 28:12, 19) 누가와 마태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적대자들의 비방은 완전하게 부정되며 예수는 오로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었다는 사실이 선언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임하였느니라 - 예수의 말씀은 단지 적대자들의 비방을 반박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임재함을 말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임하였느니라"로 번역된 '에프다센'(* )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 동사의 의미는 '앞서 오다'의 뜻도 있고(살전 4:15), '방금 도착했다', '도달한다'는 뜻도 있다(Lenski). 이 동사의 의미를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곧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 되고 현재적인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이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라면 적어도 그 순간 하나님의 권세가 사단의 권세를 물리쳤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이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증거해주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선취(先取)를 보게 된다는 해석은 가능하다. 이 견해를 지지해주는 더 결정적인 단서는 '너희에게'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분명히 지금 예수앞에 있는 청중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미래의 청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11:21
강한 자가...안전하되 - 전통적으로 본문의 '강한 자'(a strong man, NIV)는 사단으로 설명되어져 왔다. 그리고 '집'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세상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Lenski). 한편 사단이 지키고 있는 '소유'에 대해서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여 갖추어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빼앗은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단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더 강한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소유는 안전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의 안전을 파괴할 것이다.
=====11:22
더 강한 자가...이길 때 - 일반적으로 '더 강한 자'는 예수를 지시한다. 여기서 '이길 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❶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긴 것을 뜻한다. ❷ 지금까지 예수께서 일으켰던 귀신 축출 사건들을 가리킨다(14절; 4:1-13; 8:26-39; 9:37-45). ❸ 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하나님의 승리를 가리킨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옳다고 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총체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믿던 무장을 빼앗고...재물을 나누느니라 - '믿던'(* , 에페포이데이)은 '설득시키다', '믿게하다'는 의미의 '페이도'(*) 제2과거완료 능동태로 '매우 유용하다고 신뢰하던'의 뜻이다. 무장(* , 파노플리안)은 방패, 검, 창, 투구, 무릅받이, 흉배 등으로 완전 무장한 상태를 나타낸다. 사단이 아무리 강하고 완전한 무장을 하고 있더라도 예수는 사단을 궤멸시켜 그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의 소유를 빼앗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이는 죄와 사망의 포로로 잡혀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와 새생명을 누리게 됨을 뜻한다(요 5:24). 바야흐로 인간을 약탈하던(9:39) 사단이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의해 도리어 약탈을 당하고 파멸의 종국을 맞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가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11:23
함께 아니하는...모으지 아니하는 - 이 말씀은 매우 급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즉 예수와 사단과의 전쟁은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에서 중립적인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의 편에 서든지 사단의 편에 서든지 결단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를 시험하거나 비방하는 자는(15,16절) 반대하는 자요 사단의 편이요 성령의 훼방하는 자들인 것이다(마 12:31). 마찬가지로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흩어놓는 자이다. 이것은 양떼를 모으는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데(요 10:12), 위급한 상황에서 양떼를 모으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 자는 양떼를 죽이는 일에 협조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 말씀이 9:50의 말씀과 모순이 된다고 하나 그것은 문맥, 또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인 이해에 얽매이는 데서 오는 오류이다(마 12:30 주석 참조). 9:50의 상황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대해 중립적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셨고 또 하려고 하는 일을 그가 행했던 것이고, 여기서는 선과 악, 진리와 반(反)진리가 싸우는 상황에서 중립지대는 없으며 분명히 어느 한편에 서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11:24
더러운 귀신이...돌아가리라 -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체험하긴 했지만 그 속에 성령이 거하시지는 않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귀신이 나간 이후 한동안 공백 상태가 지속될 뿐 성령을 영접해 들이지 않음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영적 파탄에 빠지게 된 경우인 것이다. 도덕적 파국의 심각성은 26절의 '거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토이고'가 '정착하다', '영구히 거주하다'란 의미를 지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11:25
소제(掃除)되고 수리되었거늘 - 본문의 평행 구절(마 12:44)에는 그 집이 '비고'라는 표현이 더 첨가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으로 채워져 있지 않음으로 결국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적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사단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틴데일(Tyndale)은 본문의 의미를 도덕적인 청소가 되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헝클어졌던 마음이 정리되고 그런 결과로 생활이 좋아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1:26
더 악한 귀신 일곱을...거하니 - 집이 소제되고 수리됨으로 말미암아 예전에 거했던 한 악령이 들어가기에는 저항력(抵沆力)이 강했다고 본다면 이 악령이 다른 일곱 귀신을 데려온 것이 이해가 된다. 여기 일곱 귀신은 막달라 마리아를 괴롭힌 일곱 귀신을 연상 시키는데(8:2), 그 숫자도 엄청나게 불었거니와 그 악함이 전에 있던 한 귀신보다 더 심하다는 묘사는 이 사람이 일곱 귀신이 들었을 때의 상태가 얼마나 극심하였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이유는 악령이 나간 자리를 하나님의 선한 영으로 채우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악령이 축출된 자리는 빈 공간으로 두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마샬(Marshall)은 이 이야기가 귀신만을 축출해 놓고 그 자리에 아무것도 채워주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킨 유대인 귀신 축출자들에(19절)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고 보는데, 이 이야기가 적대자들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태는 평행 구절에서 이 귀신들린 자가 바로 '이 악한 세대' 즉 '유대인' 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세례 요한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던 유대 백성들이(마 3:1-6)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완악해져 예수를 거역(마 12:24)했던 상황과 연관될 것이다(Hendriksen, Lenski).
=====11:27
당신을 밴 태와...복이 있도소이다 - 엘리사벳이 예수를 수태한 마리아를 보고서 찬양한 내용과(1:42) 유사하며, 렌스키는 여기서 1:48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의 여인은 단순히 한 선생의 달변(達辯)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 배후에 있는 신적인 권위를 발견한 듯하다. 본절의 의미는 "당신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bless, NIV)을 받았음에 틀림없다"로 보면 될 것이다(Marshall).
=====11:28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 예수는 여인의 찬사에 대해서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곧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복되다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데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Lenski, Tyndale). 그러니까 '오히려'(* , 메눈)는 여인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뒤의 이야기, 즉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전에 하신 말씀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모친과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말씀과(8:21) 동일 선상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신실성의 문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헌신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이다. 여기서 '지키는'(* , 퓔라쏜테스)은 '파수하다', '준수하다'는 의미의 '퓔라쏘'(* )의 현재 분사형으로 복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임무로 아는 사람임을 뜻한다.
좋은 일꾼이 되는 길
눅 11장 14~26절 / 이한규목사
< 자기 일을 즐기며 하라 >
사명이 큰 것보다 사명에 충실한 것이 더 중요하다. 사명을 따라 자기 맡은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할 때는 즐겁게 하라. 어떤 사람은 짜증내지 않고 맡은 일을 취미처럼 즐겁게 한다. 그런 사람이 결국 인정과 사랑을 받는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 일에 연연하지 말고 즐겁게 살면서 내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한과 상처를 씻어 주시고 문제도 해결해 주시고 더 큰 축복도 안겨 주실 것이다.
몇 년에 걸쳐 매주 2회 방영되는 대하 역사 드라마를 위해 매주 원고지 약 200매 분량의 대본을 써야 한다. 일반인은 “매주 어떻게 그 많은 분량의 대본을 쓸까? 스트레스가 엄청나겠다.”라고 생각하지만 탁월한 드라마 작가는 그 일을 즐기며 한다. 필자도 <성경전권강해>를 완성하려면 매주 원고지 약 200매 분량의 말씀 원고를 한 주도 빠짐없이 30년을 써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목사님!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나요?” 그러나 즐기면서 하니까 큰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약 85%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매달 <월간새벽기도> 한 권 집필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독자들이 힘을 얻는 얘기를 들으면 힘이 난다. 또한 후원금을 보내면서 “말씀에 감사해요.”라는 글을 보내오면 역시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힘이 나면서 즐겁다. 자기 일을 즐기면서 하라. 사람들은 자기 일을 즐기면서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더 좋아한다. 더 나아가 남이 피하는 일을 기꺼이 꾸준히 감당하는 사람은 가장 좋아한다.
< 좋은 일꾼이 되는 길 >
좋은 일꾼으로 잘 준비된 사람을 깊은 만남의 대상으로 삼고 자신부터 잘 준비된 사람이 되라. 좋은 일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표적 신앙을 버리라
예수님이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자 무리들이 놀랐다(14절). 그때 몇몇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을 비하하며 말했다.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15절).” 그때 다른 몇몇 사람은 예수님을 시험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화려한 표적을 구했다(16절). 그것은 그들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의 기적을 하찮게 여겼다는 암시다. 또한 당시 예수님의 대적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행했다. 그것은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나 표식이 아님을 잘 말해준다. 그래서 표적 중심적인 믿음은 위험하다.
예전에 한 대형교회 지교회에서 대형교회 담임인 A 목사가 부흥회를 할 때 많은 동네 사람이 몰려왔다. 그때 한 교인이 특송으로 가곡을 하자 A 목사가 수많은 교인이 지켜보는 데서 지교회 목사 뺨을 무섭게 때렸다. 그때 A 목사 주위로 7-8명의 우람한 경호원이 있었고 뺨을 맞은 지교회 목사는 무릎을 탁 꿇었다. 그 모습을 보고 수많은 교인이 상처를 입고 환멸을 느꼈다. 절대 왕조의 왕 같은 모습 때문이었다. 그때 한 성도가 말했다. “아무리 기적을 일으켜 준다고 해도 저는 그분에게서 안수 받지 않겠습니다.”
기적 중심적인 신앙을 추구하다가 더욱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라. 목사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목사의 타인 감수성과 인간성도 중요하다. 외적인 것만 보고 사람을 우상화하지 말고 먼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영혼의 시력을 좋게 만들라. 보이는 표적에 휩쓸리지 말라. 사탄은 표적으로 예수님도 미혹했다. 보지 않고도 진실하게 믿는 것이 훨씬 복됨을 깨닫고 교회를 섬길 때도 화려하게 섬기기보다 은밀하게 섬기기를 즐기라.
2.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라
본문 23절을 보라.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서 중립적 자리는 없다는 암시다. 사람간의 정치적 주장에서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없기에 각자가 조금 더 선하고 바르게 여기는 편을 선택한다. 또한 오늘은 이쪽 편이라도 내일은 저쪽 편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서 선택할 때는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라.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는 것이 사탄 편에 선 사람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진멸하라는 뜻은 아니다. 사탄이 진멸 대상이지 사탄 편에 선 사람이 진멸 대상은 아니다. 사탄 세력의 앞잡이와 사탄 세력에 미혹당해 사로잡힌 영혼은 다르다.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은 죽기 전에 얼마든지 예수님 편으로 돌아올 수 있기에 극단주의를 버리고 조금의 회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진멸하기보다 회개시키려고 하라.
영어에서 파트(part)는 ‘일부’란 뜻이고 파티(party)란 ‘일부 무리’ 혹은 ‘일부 무리가 모인 것’이란 뜻이다. 모두가 다 어울릴 수 없기에 일부 뜻이 맞는 사람끼리 어울려 지낼 수 있다. 그러나 파티가 극단화되어 우리 외에 남들은 다 열등하거나 나쁘다고 여기는 같은 어원의 파쇼(fascio), 파시스트(fascist), 파티잔(partisan,빨치산)은 되지 말라. 극단주의는 교만의 산물이다. 삶의 극단주의는 피하되 구원의 진리 문제에서는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라. 인간관계에서도 좋은 친구라고 확신하면 그 친구 편에 확실히 서 주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둘 다 좋아요.”라고 하는 것은 폭넓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불의도 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친구 편에 확실히 서려고 다른 친구를 어쩔 수 없이 멀리해야 하면 멀리하되 그 멀리하는 친구를 경시하거나 미워하지 말라. 시련 중에 남들이 다 떠날 때 찾아와주는 친구는 가까이하고 외면하는 친구는 더 이상 연연해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지 말라. 어쩔 수 없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는 과감히 바른 편을 선택하라. 그처럼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라.
3. 모으려는 태도를 가지라
예수님은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23절). 이 말씀에서 ‘헤친다’는 말은 ‘해를 입힌다(해친다)’는 말이 아니라 ‘흩어놓는다’는 말이다. 예수님께로 사람을 모으는 태도가 없는 것은 결국 흩으려는 태도다. 내가 선택한 공동체가 바른 편에 있는 공동체라고 확신하고 선택했으면 최대한 흩으려는 태도를 버리고 모으려는 태도를 가지라. 그래서 공동체 선택은 처음부터 신중하게 하라.
어떤 사람이 신중하게 교회를 선택했다. 선택해 보니까 잘 선택한 것 같았다. 교회가 완벽하지는 않고 약점과 허물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바른 길로 가는 것이 분명했고 교회 및 담임목사의 비전과 철학도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열심히 모으려는 태도를 가지고 20년 이상 교회를 섬겼다. 그런데 후임 목사가 와서 바른 길로 가는 것 같지 않아 자신에게서 조금씩 흩으려는 태도가 나왔다. 결국 깊은 고민과 기도 끝에 모으려는 태도를 새롭게 가지려고 교회를 옮긴다면 그 선택을 하나님은 좋게 여겨 주실 것이다.
교회를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계속해서 모으려는 태도를 가지려고 기도하고 노력해도 본의 아니게 자꾸만 흩으려는 태도가 나오면 깊은 고민과 성찰 끝에 모으려는 태도가 나오게 되는 교회로 옮겨도 된다. 그 결정에 대해 남도 정죄하면 안 되고 나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신중하게 선택한 공동체에서 모으려는 태도를 힘써 실천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에서 모으려는 태도를 바탕으로 공적인 모임을 사적인 모임보다 앞세우라. 교단에서도 마찬가지다. 교단에서 힘 있는 목사가 총회에는 잘 참석하지 않으면서 공감과 소통을 위해 다른 기도 모임을 따로 만들자는 것은 본의 아니게 흩으려는 태도가 될 수 있다. 교회 야유회는 가지 않고 개별 산행 모임을 따로 만들거나 주일성수는 하지 않고 개별 기도 모임을 따로 만들지 말라. 기본적으로 공동체에서 모으려는 태도를 삶의 틀로 삼으라.
4. 성령 충만을 사모하라
불신자에게 귀신이 쫓겨나간 것은 영구적인 상황이 아니기에 귀신은 언제나 불신자에게 다시 들어올 수 있다(24절).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귀신이 쫓겨나갔다고 안심하거나 교만하지 말라. 오히려 깨끗하게 청소된 심령에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으면 나간 귀신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가 나중 형편이 이전 형편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26절).
불교에서는 비우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성도는 나쁜 것을 비우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좋은 것을 채우는 것은 더 잘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빈 곳에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채워지게 되어 있다. 권력도 좋은 권력이 무책임하게 자리를 내놓으면 나쁜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해 나쁜 일을 벌인다. 그러므로 좋은 리더가 권력을 얻도록 다니엘처럼 기도하고 성도답게 행동하라. 늘 깨어 경성해서 좋은 것을 영혼과 공동체에 채우라. 영혼과 공동체를 깨끗하게 비워 놓고만 있으면 나쁜 힘이 들어와 지배당한다.
가만히 넋 놓고 있지만 말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악과 싸우고 선을 채우라. 무엇보다 성령 충만을 간절히 사모하라. 다만 은사가 나타나고 병을 고치는 것을 다 성령 충만의 표식으로 오해하지 말라. 마태복음 24장 24절을 보면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성도들을 미혹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말세에 가까워질수록 표적과 기사를 선전하고 과시하는 것을 지극히 주의하고 이단 교주를 잘 분별해 내도록 성령 충만의 증거를 표적과 기사에 두지 말라.
참된 성령 충만은 힘써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에도 위축되지 않고 감사가 넘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화해의 역사도 일으키고 분위기도 밝게 만든다. 또한 교회와 교우에게 기쁨을 주려고 소리 없이 헌신하기에 아름답게 보이고 심지어는 불신자도 아름답게 본다. 잘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다르다. 돈이 많으면 잘사는 것이지만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면 잘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얻고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면서 잘 사는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라.
누가 예수를 바알세불의 하수인이라고 하는가?
눅 11장 14~23절 / 이병일목사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이따금 소로 보이는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로 알고 때려 잡아먹고 보면 사람이었습니다. 어떨 때에는 소로 알고 잡아 먹고 보면 제 아비고 어미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비가 쏟아져 잠시 비를 피했는데, 웬 송아지가 따라들어오길래 잡아먹고 보니까 자기 동생이었답니다. 기가 막히죠. 하도 놀랍고 무서워서 엉엉 울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보따리를 싸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사람이 소로 보이지 않고 사람으로만 보이는 곳을 찾아 길을 떠났고, 넓은 세상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동안 큰 강물에 떠내려가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고, 깊을 산 속에서 길을 잃어 호랑이의 밥이 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새 그 사람의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 때, 파란 바람이 부는 한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 마을의 사람들은 사람을 소로 보아 잡아먹는 일 없이 너무나도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한 평생동안 찾아헤매던 바로 그 마을 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마을에 사는 노인에게 ‘이 마을 사람들은 사람을 소로 알고 잡아먹는 일이 없어서 좋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웬걸요. 우리도 옛날에는 사람을 소로 알고 잡아먹는 일이 이따금 있었는데, 사람들이 파를 먹으면서 눈이 맑아져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고 소가 소로 보여서 그런 일이 없어졌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파씨를 얻어서 고향으로 돌아와 자기 집 텃밭에 씨를 심었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그 사람을 만나러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친구들에게 자기가 겪은 이야기와 파를 먹으면 사람이 사람으로만 보이고 소가 소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친구들이 ‘웬 소가 이상한 소리를 내는군!’ 하면서 도끼를 들어서 그 사람을 잡아먹고 말았습니다. 파씨를 얻어온 그 사람은 친구들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며칠 후 그 사람의 텃밭에는 파가 올라왔습니다. 사람들은 파의 독특한 향기에 이끌려 파를 뜯어먹었습니다. 파를 먹은 사람들의 눈이 맑아져서 더 이상 사람을 소로 보는 일이 없어졌고, 아무도 사람을 소로 알고 잡아먹지 않았다고 합니다.”<이현주,『성서와민담』>
옛 이야기들은 쉬우면서도 그 상징을 생각할수록 재미와 의미가 더해집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곱씹어 볼 몇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소로 보았다는 것과 그 소를 잡아 먹은 후에야 사람인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가 사람들의 눈이 맑지 못해서라는 것, 자기 동생을 잡아먹는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만 보는 곳을 찾아서 길을 떠났다는 것, 마침내 사람이 사람으로만 보이는 파란 바람이 부는 마을에 도착하였다는 것, 그 마을 사람들은 파를 먹고 눈이 맑아져서 사람이 소가 아니라 사람으로만 보게 되었다는 것, 그 사람은 파씨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씨를 심고 친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 다른 사람들도 파를 먹고 사람을 사람으로 만 보게 되었다는 것. 등등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가장 중요한 재산이기에 사람을 소로 본다는 것은 사람을 돈이나 재산으로 보는 세상의 풍조를 반영합니다. 난데 없이 나타난 소는 얼른 잡아먹어야 흔적도 남지 않고, 내 소가 아니기에 손해볼 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은 소로 보이는 사람들을 잡아 먹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사람의 눈이 맑지 못해서 인데, 사람의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과 어울리는 대목입니다. 눈이 맑지 못하므로 그 눈으로 들어오는 사물과 사건에 대한 정보는 비뚤어진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수하고 맑지 못한 눈으로 시작된 사람들의 죄악이 극이 달하고 겉잡을 수 없이 나락으로 치닫습니다.
자기의 동생을 소인줄 알고 잡아먹은 한 사람이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는 세상을 찾아 떠나는 것은 모두가 그러니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돌이키게 합니다. 누군가가 끊어야 하는 고리를 끊으려는 사람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명의 위협과 오랜 세월을 이겨야 합니다. 마침내 그 사람은 파란 바람이 부는 마을에서 자기가 찾아 헤매던 세상을 발견합니다. 파란 바람이 부는 세상, 그것을 성서적 용어로 해서하자면 거룩한 영의 기운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상식이 통할 때 비로소 사람이 사람으로 보여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를 먹었을 때에 사람들의 눈이 맑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귀하고 좋다고 하는 약초나 음식을 마다하고 파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파는 유화알릴이라는 성분이 있어 신경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작용을 하고, 파의 씨는 눈을 밝게 하고 속을 따뜻하게 하며 정액을 보충시킨다고 합니다. 특히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따뜻한 파차를 마시면 잠을 청할 수 있습니다.
파의 성분보다는 그 쓰임새에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파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거의 모든 음식이 들어가기 때문에 매일 먹게 됩니다. 굳이 비싸게 주고 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라도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습니다. 또한 파는 아무데서나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채소입니다. 깊은 산 속에서 어렵게 구해야 하거나 키우기가 까다롭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파밭이 있습니다. 파는 어느 음식이라도 잘 어울리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는 곳에 거의 없는 기본양념입니다. 누구나 쉽게 구해서 먹을 수 있고,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매일 먹고 있는 것이 파입니다.
파의 이러한 특징은 무엇을 말합니까? 누구나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것이기에 상식(常食)이요, 따라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상식(常識)입니다. 파를 먹고 눈이 맑아졌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저마다 상식(常識), 곧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바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에 비로소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지식이나 변칙보다는 상식이 통할 때에 비로소 사람이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회유하는 악한 세력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이 말 못하는 사람의 말문을 터주었습니다.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가 귀신의 두목인 바알세불을 등에 엎고 악한 영을 내쫓는다고 비난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하늘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러한 말을 한 사람이 누가복음에는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이고, 마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율법학자들이고, 마태복음에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누가 말했든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병고침과 귀신축출을 문제 삼았던 것입니다.
바알세불은 주인이라는 의미의 바알과 사당이라는 의미의 세불의 합성어이며, 신들이 거주했던 사당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때로는 ‘오물의 주’, ‘주거의 주’ 등을 나타내면서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때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추종자 혹은 하수인으로 몰아붙인 데에는 여러 가지 음모가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 거라사의 군대귀신으로 대표되는 악한 세력들은 예수님을 “더없이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를 인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능력과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유혹의 손짓입니다.
그들은 ‘예수,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 당신은 대제사장들과 함께 성전에서 있어야지,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저 오클로스들과 함께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에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만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탄의 관계는 숙명적인 적대관계
이제 그들은 자기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 모함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개인은 언제나 규격품처럼 집단의 정체성에 따라 이해되었기 때문에, 특정 집단이나 신분의 특성들이 개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지금의 ‘한총련’처럼) 바알세불에 신접하여 그의 힘을 행사한다는 것은 사회 질서를 일탈한 자에게 붙는 최악의 꼬리표였습니다. 단순히 귀신이 들린 것이 아니라 귀신의 추종자나 하수인이라는 모함은 생매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일단 그렇게 꼬리표가 붙고 나면, 그 이미지를 벗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빨갱이’란 꼬리표)
무리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한 일들을 보았고, 죽음의 세력에 억눌려 고통받던 많은 사람들을 죄악으로부터 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활동이 자신의 권위를 침해한다는 생각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과 다르거나 반대되는 모든 것들은 사탄입니다. “나의 것과 다르면 모두 사탄이고, 우상이고, 적이고, 빨갱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학자연하는 신학자들만의 사유물이 아니고, 하느님의 정의는 강한 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비난하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인간에게서 귀신을 내어쫓는 예수님의 활동은 귀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며, 구조와 제도를 깨뜨리고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은 바알세불의 역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능력의 놀라운 구현이고 진정한 인간 해방의 거룩한 활동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은 사탄을 결박하고 그의 집을 약탈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제국주의적 억압의 구조로 구현되고, 예수님의 거룩한 사역이 힘의 재조직화라면, 예수님의 투쟁 대상은 바알세불적 제국주의와 억압적 권력구조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힘의 논리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사탄의 관계는 숙명적인 적대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집을 뚫고 들어가 그를 결박하고 그에게 억눌린 인간을 해방시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결박하고 그의 소유를 빼앗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사탄에게 결박된 인간을 놓아주기 위함이며, 모든 사탄적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 위함입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사람들
지난 주일 ‘하늘뜻펴기’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너희’가 말하는 ‘우리’의 영역을 확대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자기를 대적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두 말씀은 그 대상과 상황을 무시하고 들으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잘 읽어보면 분명히 그 상황과 말씀을 듣는 대상이 다릅니다. 그 속에서 말씀의 의미도 더 확실해 지겠지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 말은 부족하지만, 완전하게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함께 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충고이자 위로입니다.
이 말씀이 충고인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대범하고 넓은 마음으로 공동체를 품으라는 뜻이기 때문이고, 위로인 것은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의도적으로 사악한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심판과 저주의 말씀입니다.
자기의 지식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음해하고 거룩한 영의 활동을 모독하는 것, 즉 예수님 안에서 일하는 거룩한 영을 더러운 영과 혼동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파란 바람인 거룩한 영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은 선을 악으로 바꾸고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사탄의 파괴적 행위와 바꾸는 것이며,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바알세불이 거주하는 그 억압적, 파괴적, 사탄적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일, 즉 생명과 평화를 위한 일인데, 그 일을 악마적인 것이라고 왜곡하는 것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순간적으로 오해하는 자들은 용서받은 수 있지만, 자기들의 지식을 이용하여 진정한 인간 해방의 거룩한 사역을 추악한 그 어떤 것으로 말하는 자들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함으로 '바알세불의 하수인'으로 왜곡되는 사람들
오늘 우리의 세상은 생명과 평화를 향한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바알세불의 하수인이나 추종자로 왜곡되어 탄압받고, 빨갱이로 매도되는 세상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소나 돈으로 보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건과 폭력이 일어나는 세상입니다. 생명의 땅을 전쟁기지로 만드는 권력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돈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평화를 지키려고 희생하는 사람을 몰지각한 정치꾼이나 반미주의자로 몰아부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수단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하수인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정작 바알세불의 하수인은 세상의 평화를 깨뜨리고 전쟁을 일으켜 수 많은 생명을 학살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지만, 하느님의 정의와 거룩한 영의 활동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파란 바람이 부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처럼 바란 바람을 맞고 파를 먹는 일입니다. 거룩한 영을 거스르지 않고 예수님의 편에 서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고 언제나 먹을 수 있는 파를 먹는 것처럼, 상식(常識)이 통하는 마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돈과 권력이 만능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감동할 수 있는 사랑이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이해하고 품어주는 가운데 예수님의 ‘우리’가 되는 일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네가 거기에 있기에 내가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정하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일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하수인이라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함하고 매도하고 탄압하고 생명을 위협할지라도 기어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변함없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살면서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면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우리에게 새 새명을 주고, 사람들의 눈이 맑아져서 세상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눅 11장 14~26절 / 노경모목사
예수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습니다. 사람 속에 들어가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입니다. 이 귀신이 나가자 그 벙어리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 것을 보고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블의 능력을 의지해서 벙어리 귀신을 내어 좋았다고 말합니다. 15절을 볼까요.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이것은 참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지요. 귀신의 왕인 바알세블이 자기의 부하인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귀신의 세계가 무너지지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저들의 이야기를 일축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귀신의 왕인 바알세블을 힘업어서 귀신내어 좋았다고 말하는 저들에게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고 도리어 질문을 던지십니다. 19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너희의 아들들'이란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의 추종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도 귀신을 좇아내는 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나 그들의 추종자들중에는 귀신을 내어쫓는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물, 연기 또는 마케루스라는 나무 뿌리를 이용하여 귀신을 내어 쫓고, 곧 이어 솔로몬이 비방으로 남겨 두었다는 주문을 외워 그 귀신이 다시 그 사람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들의 이러한 행위는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유독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는 이적에는 도리어 비방을 했습니다. 에수님의 이적은 자기들의 주술적인 방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했기 때문에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예수님을 따를까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의 제자들이나 추종자 중에서 이렇게 귀신을 쫓는 자들의 능력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물어셨습니다. 귀신을 쫓는 그들의 능력의 원천을 묻는 에수님의 이 질문은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게 하는 날카로운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의 귀신 추출 행위가 귀신의 왕 바알세블을 힘입은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인 자기 자신들을 비난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와 반대로 그들의 귀신 추출 행위가 바알세블을 힘입은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그들의 행위는 인정하면서 유독 예수님의 행위는 인정하지 않는 자기들의 부당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 쫓은 기적은 인정하지 않고 자기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이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은 인정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은 것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에 대한 옳고 그름을 바리새인 너희들 스스로가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판단한다면 너희들이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 중 귀신을 내어 좇은 자들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절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주 날카로운 답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바리새인 제자들이나 추종자들 중 귀신을 내어 쫓은 자들이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동조한다면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이 되고 반대로 그 비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 선생들을 비난하는 것이 되는 동시에 예수님을 변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는 것 본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란 엘리야가 기도해서 제단에 불이 떨어진 기적이라든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고 함께 광야길을 갈 때 불기둥이 나타난 기적을 말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귀신을 내어 쫓는 기적 보다 더 큰 기적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귀신은 내어 쫓은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쫓아내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20절,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단이 강하더라도 더 강한 예수님 자신이 사단을 내어 쫓고 자유와 믈질과 건강과 바른 삶을 찾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21절,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그리고 에수님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4-26절.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귀신이 나간 사람은 나간 빈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빨리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먄 더 악한 귀신이 더 많이 들어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맏는 우리들도 우리 속에 무엇이 채워져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채워져 있어야 할 것이 과연 채워져 있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진정으로 채워져야 할 것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빨리 채워야 합니다. 채우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나의 간절함과 사모함이 필요합니다. 나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요?
첫째, 성령으로 채워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 속에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고린도전저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말씀은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마음껏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항상 갈등과 싸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느냐, 성령의 소욕을 따르느냐' 입니다.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강제적으로 이 문제에 개입하셔서 성령의 소욕을 따르도록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 위해서 의지를 발동해야 하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로 성령으로 우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채우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은 명령형입니다. 계속형입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서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간구해야 합니다.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 받지 않으면 우리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마음껏 일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성령께서 일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영적으로 점점 말라 죽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우리의 육의 행실이 점점 말라 죽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3절을 봅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래서 성령으로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으로 채우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가 없는 것이지요.
둘째,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양식입니다.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점점 메말라가고 병들어 갑니다. 우리의 믿음이 견고히 서시 못합니다. 즉 우리의 신앙기반이 약화됩니다. 선악에 대한 분별과 판단이 흐려집니다.
세상의 거짓 교훈과 유혹과 미혹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우리를 채울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그것은 다 응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는 어두움의 세력들이 거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말씀은 능력이 권세요 영적인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를 채워야 합니다. 말씀으로 체우는 것도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투자가 필요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 시간도 투자해야 합니다. 사모해야 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의자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으로 채워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그 사람의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비어 상태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 음란, 미움, 열등감, 권력, 욕심으로 채워지는 것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빨리 우리 속에 성령으로 채웁시다. 말씀으로 채웁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 있는 자
눅 11장 14~28절 / 허남길목사
◈ 서 론 ◈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여러분과 저의 찬양을 들으심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은혜와 응답을 주심을 믿는다.
1.영적 사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사실들이 있다.
1)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온 우주에 가득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제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고 계시는 줄 믿는다. 성도들이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일어나고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어떤 분들은 집에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고..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서 복음의 비밀을 알아가기도 하고..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역사 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인 줄 믿는다.
◑어떤 성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예배드리고 말씀을 듣는 중에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으로 자기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한다. 만약에 제가 무슨 능력이 있었다면 그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모른다. 저와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역사 하셔서 일하심을 보게 된다. 저는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많이 체험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지금도 주 예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가는 줄 믿는다.
2)하나님의 성령은 사실로 역사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했다. 마가 다락방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역사 하셨더니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방언의 역사도 일어나고..구원의 역사도 일어나고..변화의 역사도 일어나고..성령은 지금도 사실적으로 역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중에 요14:16절에 보면 "보혜사 성령 그가 오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며.."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할 것이며..말씀을 전할 때 기억나게 할 것이며..성령이 오면 감화 감동이 되게 할 것이며..우리에게 평안한 마음이 있을 것이며..하나님의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요3장에 예수님께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난자는 다 이와 같으니라.."라고 하셨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을 통해서 현장에 일어나는 줄 믿는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 감동이 되고..힘이 나고..이 사실들이 믿어지고 깨달아 지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인 줄 믿는다. 이 영적인 사실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없으면 깨달아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을 기록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된 것이라 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무슨 말씀인지 모르고 믿어지지 않는다.
◑저는 과거에 복음을 전하다가 어떤 자매를 만났는데 그 자매 말이 자기 스스로 마귀를 믿는다고 했다. 자기 스스로 마귀를 찬송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미운 사람은 마귀이름으로 저주를 해 버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경을 끼고 교회 가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행복해 보여서 성경을 샀다고 한다. 서점에 가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성경을 판매한다. 마귀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성경을 판매한다. 성경을 큰 것으로 가지고 다닌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다. 성경을 가지고 자세하게 이 자매가 읽어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이 구백 삼십 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거짓말이고..홍해가 육지와 같이 갈라졌다고 하는데 거짓말이고..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하는데 순전 거짓말이고..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거짓말이고..하나도 안 믿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 순간부터 믿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고 일하심이 믿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자꾸 새롭게 되어지고..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성장되고..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성령은 지금도 사실적으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3)천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사도 있다. 히1:14에 "모든 천사는 구원받은 후사를 위해 섬기라고 보냄이 아니냐.."라고 했다. 천사는 구약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에도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이 되는가..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이 천사를 움직여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계8:3-5절에 보면 성도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셔서 성도들의 기도를 금 쟁반에 담는다고 했다. 이것은 영적인 사실들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는 가끔 복음을 전하면서 눈에 안 보여서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사람이 있으면 정신이 보이냐고 한다. 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랑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생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앉아 있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냥 보기에는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은 집에 갔다가..놀러 갔다가..안 보이니까 다 똑같은 줄 안다. 그런데 결과로 나타난다.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것이다. 믿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영적인 힘이 있고..승리하는데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연이어서 자기 생각대로 계속 다닌다.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다고 하면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보다 정확하고 바른 줄 믿는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저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증거 할 수 있다. 성령이 실제로 역사 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할 수 있다. 그런데 천사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믿는다. 왜..성경말씀대로 이루시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성경에는 말씀해 놓고 있다. 그것을 믿고 가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갈 방향을 알지 못했지만 말씀하셨기 때문에 간 것이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는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런데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지게 많이 고기가 잡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빨리 탈피해야 될 것은 내 육신이나 감각을 보고 느끼는 것만 믿겠다는 생각을 빨리 버리시기 바란다. 자기의 느낌이나 감각이 없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참 된 믿음이다. 열 두 정탐꾼을 가나안땅에 보냈더니 열 사람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거기에 가면 죽는다는 것이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지만 그곳의 아낙 사람들은 장대 같이 큰데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하면서 벌벌 떠는 것이다. 이 열 사람이 보고를 했는데 온 백성이 벌벌 떠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으니 저들은 우리의 밥입니다."라고 했다.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다.
◑저는 천사를 잘 모르겠다. 놀아본 적도 없다. 그런데 믿는다. 기도할 때 주의 사자가 기도를 받고 응답을 가지고 온다는 것을 믿는다. 왜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다. 바울이 어려움을 당할 때 주의 사자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마리아가 아기를 배었을 때 주의 천사가 와서 알려 주었다.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4)귀신
성경말씀대로 귀신도 존재하고 있다. 악한 영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시다. 악한 영에 왕이 마귀이다. 귀신은 지금도 역사하고 일하고 있다. 불신자를 잡아 종으로 부리고..성도를 넘어뜨리기 위해 찾아다니고..잘 안 믿는 사람..의심하는 사람을 찾아다닌다. 요10장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라고 했다.
◑마귀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악한 영이라고 했다. 언뜻 보면 좋은 것을 주는 것 같지만 사람을 속여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을 모르도록 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한다. 육신 적으로 보게 한다. 세상을 위해서 살다가 멸망하도록 한다. 이것이 마귀가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받게 하신다.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새 힘을 주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시고 주 앞에 기도하게 하신다. 이 마귀는 불신자를 사로잡고 부리다가 지옥까지 끌고 간다.
2. 그리스도의 삼 직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중요한 일을 하셨다. 그리스도는 무슨 직분을 가지고 계신가..삼직을 가지고 계신다.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 죄를 속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 보이는 하나님께서 대신 증거하기 위해 이 세 가지 직분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 하게 하셨다.
◑선지자는 자기의 말을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자이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하나님께 속죄하는 직분이다. 짐승을 잡아서 대신 피 흘리게 해서 속죄하고 용서받고..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제사를 지내면 하나님 앞에 큰 벌을 받았다. 사울이 이렇게 하다가 큰 벌을 받았다. 각각 직분이 다르다.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보호하고..지도하고..인도하고..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직분이다.
◑하나님께서 왜 구약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 직분을 주셨는가 하면..이 직분의 참 된 실체가 이 땅에 오신다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참 선지자..하나님을 알게 하는 참 말씀으로 오실 분이 계신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한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된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심을 알게 된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한이 없으심을 알게 된다. 모든 만물도 명령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분임을 알게 된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정확하고 바르게 나타내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고 예물을 드린 분이 있는데 멜기세덱이다. 이를 성경에 영원한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자라고 했다. 학자들은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장은 죽으면 다른 제사장이 또 세워진다. 제물도 양을 자꾸 잡아야 하는데..예수님은 그런 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그러면 제사장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제물도 양으로 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화목 제물로 드려서 제사를 끝내 버리셨다. 더 낳은 제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는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양을 잡고 피를 뿌리고..이렇게 하지 않는다. 아직도 자꾸 양을 잡고 피를 부려야 된다고 하는 사람은 굉장히 악한 자이다. 그래서 바울은 초대교회에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전한 복음 외에는 혹 천사가 와서 전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라"라고 했다.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저주받는 것이다. 무엇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완성하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단번에 드리심으로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 모든 인류의 죄를 다 해결하신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그 그리스도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게 하심으로 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롬8:1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다."라고 했다. 불신자였을 때 어떤 가운데 있었다고 할 지라도 예수 믿는 순간 해방인 것이다.
◑불신자는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가...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인 것이다. 어둠에 있는 자들이다. 죽은 자들이다. 사망에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 살인자가 예수 믿고 교회 오게 되면 예수 믿기 전에 모든 것을 교회에서는 불문율에 붙인다. 왜 그런가..사망에 있던 자가 해방된 것이다. 예수 믿으면서 살인을 하면 안 된다.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나라 말로 표현하면 인간 취급을 안 한다. 예수님이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다. 사람은 사람이지만 영이 죽은 자들이다. 사단에 속한 자이고 흑 암에 속한 자이고 죄 아래 있는 자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여기에서 해방을 받는 것이다. 과거에 믿었던 죄가 예수 안에서 다 용서함을 받은 것이다.
◑어떤 분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예수 믿기 전에 죄를 지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은 받지만 죄의 대가는 다 받는다고 한다. 천만에 말씀이다. 그러면 해방 받았다는 말씀이 맡지 않다. 저주에서 해방을 받았다는 말씀이 틀린 말씀이 아닌가...그런데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았다고 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온전케 된 것이다. 이 말은 예수 믿고 죄를 또 지으라는 말이 아니다. 구원은 받지만 사단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 이 땅에서 어려움을 당한다. 자꾸 사단에게 속아 종노릇하게 되는 것이지..구원은 받는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만 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셔서 사단의 머리를 단번에 깨트리시고 승리자가 된 줄 믿는다.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세관을 늑 탈 할 수 있게냐고 말씀하셨다.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실 분은 왕이신 하나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 하셨다.
3. 본문(14-28)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첫째 둘째 말씀의 내용보다 셋째 의 말씀에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여기까지 말씀을 드린 것이다.
1)병을 고치심
**14-17절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예수님께서 벙어리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벙어리 귀신을 좇아 내서 고치셨다. 귀신을 쫓아내신 분은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시고 승리하실 분만 이렇게 하실 수 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마귀와 싸우신 적이 한번도 없으시다. 명령하셨다. 쫓아 내셨다. 거라사지방에 광인이 귀신이 들려서 미쳐 있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귀신에게 떠나가라고 말씀하셨지 싸우신 적이 없다.
◑계12장에 마귀와 싸운 자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리는 천사군대와 그의 장관 미가엘이다. 미가엘을 보내 사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용으로 더불어 싸울 세 용이 이기지 못하여 하늘로서 내어 쫓김을 받았는데 옛 뱀이요 용 곧 마귀라고 하기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자인데 이는 온 천하는 꾀는 자라고 했다. 그래서 공중에 다니면서 모든 불신자의 아비가 된 것이다. 요12:31절에 보면 마귀를 세상 임금이라고 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미가엘 천사가 아니다.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골1:15에 눈에 보이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 만드신 분이시다. 빌2:5절 이하에 보니까 그는 하나님의 본체라고 했다.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하나님 나라의 길을 여시고..사단의 머리를 깨트리시고..승리하신 줄 믿는다. 그래서 우리도 이 땅에 승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는 이유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는 예수님 때문에 승리하게 된 줄 믿는다.
◑신앙은 우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여러분 속에 계시는 완전하신 주님을 믿는 자는 승리한다. 우리는 무식하지만 최고의 지식 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승리한다. 사람들이 왜 자꾸 좌절하는가..자기를 보고 좌절한다. 사람들이 왜 자꾸 교만해 지는가..자기를 잘 못 봐서 그런 것이다. 자신은 괜찮은 사람인 줄 착각하는 것이다. 정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살아나시고 구원하신 것을 믿는 사람은 교만할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교만해 지는가..낙담하고 좌절하지도 않는다. 왜 전능하시고 살아 계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세가 자기를 믿었을 때는 힘을 내서 애굽 사람을 처 죽였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 때는 자기를 보고 또 낙담을 했다. 가시떨기 나무에 불타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승리한 줄 믿는다. 불신자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교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산에서 요 근래 지하철에서 사람이 두 명 자살을 했다고 한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살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왜 다른 말로 하면 낙담을 해서 그런 것이다.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인생을 돌이킨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불신앙이다. 어떤 환경 속에 있다고 할 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키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그 주님을 믿으면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승리했다. 환경적으로는 이길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했더니 승리한 줄 믿는다. 우리가 그 주님을 믿는 것이다.
2)사람들의 말
귀신을 쫓아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이신데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보고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고 뭐라고 하는가..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바보들아 스스로 분쟁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 아니냐..그렇다면 지금 마귀의 나라가 어떻게 흥할 것이냐..라고 하신 것이다.
**18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원수 마귀는 지혜가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굉장히 우둔하고 바보 같다. 가장 낮은 이치도 이해하지 못한다.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여호와 증인들이 오면 이기는 방법을 말씀을 드렸다. 이들이 오면 도망가지 말고..물어 보시기 바란다. 하나님을 믿는지 예수님을 믿는지 물어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지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지 물어보면 금방 다닌 사람은 잘 모르지만 한참 다닌 사람은 함정에 걸린다 싶어서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성경 보자고 하면 된다. 성경에는 누구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가..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에게 예수님이 피조물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피조물을 믿는 것은 우상숭배인데 십계명 중 일, 이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다. 믿는 다는 것은 아내와 남편이 서로 믿는 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신앙하는 것이다. 피조물을 신앙하면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옛날 마귀나 지금 마귀나 비슷하다. 말이 안 맞는 말을 한다.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들 자녀는 누구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느냐..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지금 틀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20절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12장에는 성령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니라..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있으면 하나님의 나락 임함 것이라는 말씀이다.
◑지난주에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가르치셨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심이다. 우리 속에 성령으로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예수님이 증거 되고 영접해서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주님이 교회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면 그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여러분 집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여러분 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신다. 소원하신다.
◑여러분 지역과 직장과 만남 속에 왜 자꾸 영적 가족 가운데서 날마다 은혜를 받고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가..여리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줄 믿는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영적 가족 속에서 영적인 생명도 일어나고 양육도 되고 기도에 응답이 되고 기쁨도 있고 승리하게 되고 감사도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줄 믿는다. 우리가 그냥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나누고 은혜를 받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난다. 구원의 역사..변화의 역사..응답이 있고 흑 암의 권세는 무너지게 되고..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되고..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21절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강한 자가 누구인가..사단을 말하는 것이다.
**22절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더 강한 자가 누구인가..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단은 불신자를 다 장악하고..세상 임금과 같이 강한 자이다. 그 마귀보다 더 강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단의 머리를 깨트리고 승리하셨다. 지금도 예수님 이름으로만 귀신이 떠나가는 이유는 승리자이시기 때문이다. 사단의 머리를 깨트리고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의 전리품들이다. 전리품이 되어도 마귀의 재산보다 주님 것이 되는 것이 낳은 것이다. 불신자는 마귀의 재산이다. 불신자가 많을수록 마귀는 재산이 많은 것이다. 인도와 같은 나라는 마귀의 재산이 많다. 중국도 많이 있고..아프리카에도 많이 있다. 필리핀도 많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 마귀를 깨트리시고 주의 이름으로 우리를 흑 암의 권세에서 건지셨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경에 보니까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23절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영적 사실에 대한 분명한 말씀을 하시고 있다. 영적인 것은 중간상태가 없다. 빛과 어둠이지 빛과 어둠의 중간 상태는 없는 것이다. 사람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여기에 붙었다가 저기에 붙었다가 하는 사람을 보고 무슨 인간이라고 하는가..회색 인간이라 한다.
◑제가 옛날에 서울에 살다가 부산에 오니까 깜짝 놀랐다. 왼 아줌마들이 회색 옷을 입고 그렇게 많이 다니는지..새벽부터 회색 옷을 입은 아줌마들이 왜 그렇게 많이 다니는지..이런 풍경을 부산에서 밖에 보지 못했다. 서울에는 그런 것이 없다. 서울은 눈 밟고 다니고 그러지 회색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없다. 마귀는 회색을 좋아한다. 뱀의 색이 정확하지 않다. 알쏭달쏭 하다. 마귀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뭐라고 하는가.."먹지 말라 하시더냐.."먹으라는 말인가 먹지 말라는 말인가..하나님은 "먹지 말라 정녕 죽으리라.."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사기꾼일수록 말을 알쏭달쏭하게 한다. "부자 될 것 같은데..""누가 그랬나.."이렇게 말한다. 분명한 책임을 지는 사람은 분명한 말을 한다. 그러니까 말을 야릇하게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이런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란다.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예, 예 아니라, 아니라 하라..하셨다. 믿으면 믿고 안 믿으면 안 믿는 것이지..옛날에는 믿었는데..그러면 지금은 뭐라는 말인가..믿는다는 말인가 안 믿는다는 말인가..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분명하게 해야 하는데 그냥 자기도 교회 다닌다고 한다. 믿는다는 말인가 안 믿는다는 말인가..이렇게 하면 안 된다. 분명하게 믿는 것이다. 누구 앞에서든지 분명하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부끄러워하면 나도 너희를 부끄러워하리라.." 하셨다.
◑영적인 것은 중간 상태가 없다. 하나님 안에 있는 빛에 거하던지 어두움에 거하던지..그래서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라 했다.
**24-26절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스님 중에도 그렇고 무당 중에도 그렇고..귀신을 쫓아내는 자가 있다. 자기들끼리 싸워서 쫓아낸다. 그런데 나중에 더 많은 귀신이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굿은 하면 할수록 자꾸 귀신에게 심하게 잡히게 된다. 처음에는 귀신이 나가고 조금 낳은 것 같은데 나중에는 더 많이 들어간다. 그 다음에 더 큰굿을 하게 되고 그 다음에 귀신이 더 많이 들어가게 된다. 그 다음에는 완전히 귀신에게 잡히게 된다. 제사도 마찬가지이다. 한번 두 번 지내면 자꾸 귀신에게 잡히게 된다. 물 떠놓고 비는 것도 그렇고..부적을 써 붙이는 것도 그런 것이다. 옛날에는 일년에 한번 붙였다가 나중에는 육 개월에 한번..두 달에 한번..나중에는 15일 만에 한번 붙이게 되고..그러다가 교회 오신 분이 계신데 얼마나 불안한지..전화를 해서 "선생님 불안해 죽겠습니다. 부적을 하나 써 붙여 달라고" 하니까 목욕재계하고 기다리라 해서 그것 하나 받으려고 목욕하고 기다리고..예수 믿고 나니까 얼마나 편안한지..부적을 써 붙일 일도 없고..너무 편하다는 것이다. 귀신의 역사이다.
◑소제되고 청소되고..귀신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가 하면 마음이 진실하고 깨끗하고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더럽게 만들어 버린다. 무당들도 자기들을 깨끗하게 잘 간수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한다. 왜..귀신 충만 하려고..그래서 기도 많이 할수록 귀신이 충만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부인하고 기도하면 성령 충만해 진다. 그래서 영적인 것을 모르면 절에 다니는 사람도 성경 보면 비슷한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다. 자신을 부인하라..자신을 없애라..이런 것들을 보면 굉장히 통하는 것들이 있다. 불교에서 수준이 높은 것이 자기를 없이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귀신 충만한 경지인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도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를 처 복종케 하고..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면 성령이 충만해 지는 것이다. 모습들이 비슷하게 나타난다. 비슷하지 않다. 극과 극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부인할수록 기도할수록 성령에 충만해 진다. 하나님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불신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섬길수록 더 귀신 충만해 지는 것이다. 귀신 충만해 질수록 악한 영의 역사가 있어서 고통과 괴로움과 저주가운데 잡혀 버린다. 성령은 충만할수록 평화가 있다.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즐거움이 있다. 하나님의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4.한 여인
**27절 이 말씀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것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한 여인이 예수님을 향하여서 당신이 참 복이 있는데 왜 복이 있다고 하는가..당신을 밴 태와..먹인 젖이 복이 있다고 했다.
**2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 여자가 보기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를 밴 배와 먹인 젖이 복이 있다고 했다. 이것도 복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육신이다. 예수님께서 진짜 복을 말씀하셨다. 그 육신보다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킨 사람이다. 마리아가 아이를 배었을 때 요셉이 어떻게 했는가..가만히 끊고자 하여..라고 했다. 약혼을 했는데 왜 이렇게 하고자 했는가..결혼을 안 하고 약혼한 여자가 아이를 배면 그 당시 율법에서는 이 여자를 돌로 처 죽였다. 그러니까 보통 남자 같으면 소문을 내서 처 죽여야 하는데 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고 했다. 조용히 파혼이나 하려고..하나님이 주의 사자가 "요셉아 너의 아내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라고 했다. 아내가 잉태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했다.
◑한 여자가 시집을 가지 않고 아이를 배는 것은 맞아 죽을 일이다. 그것도 약혼한 여자가..그런데도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서 아이를 배어 온 것은 순교할 마음으로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진짜 더 복이 있는 사람은 육신의 것들이 아니라 마리아가 복이 있는 이유가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던 자이기 때문에 복이 있는 자라고 했다.
◑우리가 육신으로 좋은 것들을 가진다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좋은 것이다.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가진 것 보다 더 복이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고 발견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더 복이 있는 것이다. 믿음이 더 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더 복이 있는 사람이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권력을 가지고 돈을 가지는 것 보다 더욱 진정한 성공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인 줄 믿는다. 회장님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돈 많은 사람만 된다. 대통령도 그렇다. 노씨가 아니면 안 된다. 국회 의원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도 좀 해야 된다. 다는 아니지만 이 의원들이 백성들, 국민들을 위해서 진짜 진심으로 회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얻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 진짜 복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인데..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돈이 없는 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낫고 천한 자도 할 수 있는 것이고..병든 자도 할 수 있는 것이고..무식한 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장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통해서 주의 이름이 증거가 되고..주님의 기쁨이 되고..주의 뜻이 이루어지면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다. 왜..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정말로 복이 있는 사람은 육신의 좋은 것도 나쁠 것이야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는 자인 줄 믿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기준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기준을 삼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헐벗고 가난하다고 무시할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고 주의 복음을 전하면 참으로 귀한 자인 줄 믿는다. 한 사람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이해하시고 들으시기 바란다. 차량관리를 하시는 김영보 집사님..저는 이분을 볼 때마다 참 귀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 이야기하지 않으시고..은혜 받는 모든 시간은 항상 와 있다. 우리 교회에 나오신 지 수년이 되었는데 한번도 개인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가끔 제가 간증을 들었다. 일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응답..기뻐하고 복음 전하고..우리 교회에서 이분 이야기를 처음 한다. 그런데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 성심 성의껏..은혜 받는 일에 마음을 드리고..참 귀한 분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한 다면 참 복이 있는 자이다.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은 육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가치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음을 알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해방의 예수님
눅 11장 14~28절 / 오창우목사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우리 나라가 일본 사람들에게서 해방받은지 57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오늘은 해방기념 주일이기 때문에 해방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 해방을 통한 자유, 또 진정한 해방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해방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가 무엇입니까?
한 탐험가가 경험한 일입니다. 외국 여행 중에 새 몇 마리를 선물 받아 가지고 배를 타고 집으로 오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 새들을 새장에 가두어 놓았는데, 이 새들이 이 새장이 얼마나 답답한지 자꾸만 나갈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머리를 문에 박기도 하고, 몸부림을 치고, 열광을 하는 겁니다. 날개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 탐험가가 이 것을 보다가 너무나 애처로와서 놓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늘을 향해서...날아가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참 자유롭겠다. 얼마나 답답했냐!` 그리고는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새들이 다시 돌아 온 것입니다. 얼마나 이 새들이 지쳤는지, 사방을 다니다 온 것 같습니다. 힘이 지쳐 가지고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쓰러져서 이 새들이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 새들이 자유를 얻기는 얻었는데, 그리고 어디론가 가기는 갔는데, 앉을 데가 없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누릴만한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배로 돌아왔고, 이 탐험가는 이 새들을 다시 새장 안에 가둘 수밖에 없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해방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해방이라고 하는 것은 해방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해방 이후의 참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이 것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해방이라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두 단계입니다.
첫째 단계는 말 그대로 해방의 단계입니다. 解(풀릴 해) 放(놓여질 방) 풀여서 놓여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는 해방 이후에 얻은 자유를 지키고 누릴 수 있는 단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것처럼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소설에 보면, 그 노예들이 참 해방을 달라고 자유를 달라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그렇게 야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인의 속박에서 풀려나서 뿔뿔히 흩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갈 데가 없습니다. 농사지을만한 땅이 있습니까? 먹고 살 돈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를 누릴만한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우리는 언제나 결혼, 그러면 결혼식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결혼하고 나서 잘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학교 입학! 입학 중요합니다. 그러나, 입학한 다음에 학생이 공부 잘해야 합니다. 이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라 이 백성들이 해방을 얻었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유를 얻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것 참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벙어리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 우리는 벙어리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 이 말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귀신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 귀신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런 귀신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면 큰일이 납니다. 우리 마음에 더러운 생각을 주입시켜 가지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귀신이 사람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악한 말과 사악한 행동을 하고 불신의 마음 안에서 일을 하고, 그리고 옛사람에게 속한 마음, 교만하고 자기 일과 의무에서 이탈한 게으른 마음과 더러운 양심, 권위를 무시하는 마음, 우상 섬기는 그런 마음 속에서 살아 가는 것입니다. 특히 귀신이 역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게 되면 땅의 것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귀신들이, 술먹고 도박하고 마약하고 음란한 곳에 가서 성적인 타락과 거짓말과 도적질하고 폭력하고 탐심 ...이런 속에서 귀신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봅니다. 귀신이 마음을 자리잡고 있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이 벙어리 귀신 들린 사람도 말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구실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이런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자요, 해방자라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에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쫒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제는 자기 기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한가지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 하는 것은 어떤 상태냐? 우리 속에 있는 귀신이 이 마음 속에서 쫒겨 난 것.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가복음1장21절에도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막 외치다가 예수님의 딱 한마디에 잠잠하고 나오라 그 말씀 한마디에 이 귀신들이 큰 소리 지르면서 이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의 권세를 제어하시고 우리들에게서 쫒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에게도 귀신을 쫓아 낼만한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었을 때에 어떤 귀신도 우리에게 다 쫒겨 갔다 하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간과해서 안될 사실이 무엇입니까? 해방받고 난 다음의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이 나가면 그 사람의 마음이 소제가 되고 청소가 돼서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을 빈 채로 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컵이 있습니다. 이 안에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물을 마시는데, 이 물을 버립니다. 이렇게 버리면 이 안에는 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물을 다 버렸으면 이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안에는 물 대신 공기가 지금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진공상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이 쫒겨가면 진공상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마음을 비워라 그러는데, 여러분 마음을 비우면 꼭 무엇이 들어옵니까? 그의 마음에는 더러운 귀신이 아니면 하나님이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고 귀신이 쫒겨 갔는데, 우리의 마음속에 지금 누가 자리잡고 누가 역사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을 오늘 성경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원 이후에 귀신이 들어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진정으로 죄에서 귀신에게서 해방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마음에 또 다른 일곱귀신이 들어와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4-26절까지 있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없는 곳을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니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마음을 빈 채로 두면 악한 귀신이 꼭 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이 타락하면 이 어려운 지경에 있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의 귀신을 내어쫓으셨습니다.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힘으로 가능한가? 이것은 하나님의 힘이 아니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바리새인들 타락한 신앙인들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예수가 귀신을 내어쫒는 것은 저가 귀신의 왕 바알새불의 힘을 입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알새불은 귀신의 우두머리입니다. 귀신의 우두머리를 통해서 저 귀신을 내어쫒았다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한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원을 받아도 그 마음에 일곱귀신이 들어와서 역사를 하면 엄한 이야기만 하고, 어리석은 이야기만 하고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듣고 내 생각엔 껄걸 웃었을 것 같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아무리 귀신이라 해도 자기가 자기편을 쫒아내는 수가 있겠느냐 서로 싸우다가는 둘다 망하는 것이다. 귀신이 어리석어도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는 말씀이 귀신이 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만이 귀신을 내어 쫒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 이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20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아멘. 우리가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쫒으면 우리의 마음이 빈 상태가 아니라 이 빈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시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느니라 이에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3장에서 너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고 너희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알 것은, 우리가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시간이 지나서 신앙경력이 쌓아지면 상당히 내가 똑똑하고 믿음이 좋은 것처럼 생각이 되서 어떤 상황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고 이겨낼 것 같지만 사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해서는 안됩니다. 얼마든지 사탄과 귀신한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룟유다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삼년동안 예수님과 동거동락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사탄이 들어가니까,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 아닙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집을 팔아서 하나님의 교회에 절반을 바쳤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 마음에 사탄이 들어가니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고 마는 것 아닙니까?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 이야기 못하는 것 이야기 해가지고 예수님께 칭찬받고 네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한순간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지적을 받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그 속에 일곱 귀신이 찾아와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서 늘 내 속에서 두 개의 마음이 싸우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사탄의 마음 이 악한 영의 마음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법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늘 이 싸움에서 이길려든지 늘 그렇게 애쓰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찾아 오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키심을 받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지키심을 받아야 합니까?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아멘 강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무장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줄 때 내가 가진 소유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도 안전하고 내가 가진 돈도 안전하고 내가정도 안전하고 내 교회도 내 민족도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적인 싸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면 안전하다는 그 성령의 소리와 아니야, 돈이 있어야 안전하다는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습니다. 농사를 지었습니다. 풍년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이 돼서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이렇게 많으니, 창고를 다시 짓자, 크게 짓자, 그리고 거기에 쌓아놓고 1년이고 2년이고 잘 먹고 잘 살자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지키심을 바라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오늘밤 네 생명을 가져 가시면 그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사람들은 어리석습니다. 돈이 나를 지켜 주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지식이 나를 지켜주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명예, 권력이 나를 지켜 주는 것처럼 생각해서 이것을 믿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데, 이것을 믿는 단 말입니다. 일곱귀신은 자꾸만 돈믿으라, 지식 믿으라, 권력믿으라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처럼 자꾸만 시험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 소유가 안전한데, 언제 안전하느냐, 강한 자가 지켜줄때만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돈이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실 때 그 돈도 안전하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했습니다.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해방을 받고 어디를 갔습니까? 광야 사막길을 갔습니다. 제가 성지 순례에 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갔던 그 길을 쭉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걸어 가지 않고, 좋은 버스를 타고 가는데도 얼마나 더운지 에어컨을 아무리 쐬고 쐬도 더운 것입니다. 머리가 너무나 뜨거운 겁니다. 그 정도로 광야 사막길이 아주 뜨겁습니다. 그래서 운전기사 가이드에게 그랬습니다. 잠깐만, 내려달라고 내가 이 길을 발로 밟고 걸어가고 싶다고, 그래서 내려 가지고 10m를 못 걸어가겠어요. 이 모래가 얼마나 뜨거운지, 한 발짝 뜰때마다 얼마나 먼지가 나는지 막 숨이 콱콱 막히는 것입니다. 덥지요, 뜨겁지요, 발이 따갑지요, 먼지 나지요, 그런데 저희 집사람이 같이 걸었는데, 먼지가 더 나는 겁니다. 저 뒤에서 어느 교회 집사님들이 따라 오는데 거기도 먼지가 엄청 나는 겁니다. 바람이 한번 부니까, 먼지가 휘익..코안으로.... 빨리 갑시다...빨리 갑시다...하나님께서 이들을 이 고난의 길로 해방이후에 가게 하시는데, 거기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뜨겁지? 내가 구름 기둥 줄께...진짜, 이 구름 기둥 없으면 못 걷습니다. 밤에 제가 시내산 밑에 가서 잤습니다. 저는 추운걸 잘 못 견딥니다. 특히 잘 때, 그런데, 담요를 세장을 덮었는데, 그래도 춥습니다. 밤에 얼마나 추운지 모릅니다. 불 기둥 없으면 절대 못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농사를 짓는다고요? 천만에요. 사막에서 무슨 농사를 짓습니까? 못 짓습니다. 하나님이 만나 주시고, 하나님이 메추라기 주시고, 여러분 우리 생각엔 만나 줫겠나? 메추라기 줫겠나? 구름기둥, 불기둥 무슨 그런 이야기.... 가 보시면 아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 길 가게 하면서 이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나를 지키셔야 내가 살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깨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해방이 되고 나니까, 참 저 잘난 것처럼 하나님이 자유에 대해 주신 믿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 네가 옳다. 공산당 해야 한다. 민주주의 해야 한다 하면서 싸움질을 해 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6.25 전쟁이 터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분들이 그러더라구요. 6.25 전쟁때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정말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지 않았습니까? 뭘 할수 있었습니까? 공산당 쳐들어 오는데 할 수 있는게 무엇이 있습니까? 가서 죽는것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제발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시지 않으면 못 사는 것입니다. 6.25 전쟁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된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야기 하더라구요. 해방 이후에 우리가 정말 하나님은혜 감사하고, 그 하나님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되겠다. 그래야 하는데, 다 자기 잘난 맛에 내가 잘했다. 내가 해야 한다. 결혼하면 내가 주도권 잡아야 한다. 여러분, 주도권 아무리 잡으면 무엇합니까? 하나님이 복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그 가정 안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그 나라가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 들이질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히 하나님이 훈련하시면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산다..이것을 깨달으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들은 해방받고 난 다음에 그런 일을 하지 못하니까, 6.25 동란과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해방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수가 있습니다. 해방 자체만이 해방이후에 얻은 자유를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 하나님만이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어떻게 잘 지켜 나갈 수가 있느냐.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일곱귀신 몰아내시기를 바랍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악한지 예수님이 29절 말씀에, 무리가 모였을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그랬습니다. 이들은 늘 신앙이 좋은 것처럼 그러면서 하나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면서 하나님의 표적이 보여졌는데 그 표적을 표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3-36 말씀에 사람들은 등불을 켜서 보면 사방을 비쳐서 다 보게 되는데, 눈이 먼 사람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는 것입니다. 눈 먼 사람이 빛이 있는지 없는지 낮인지 밤인지 알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들이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표적을 보여주어도 하나님의 표적으로 보지 못하고 귀신이 한일이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악한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일곱 귀신이 들어 가지 않고는 안되는 일이라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그 신앙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서 하나님이 다스려서 영적인 눈이 뜨여져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봐야 하는데 하나님의 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이 그랬다.. 영적인 눈이 다 지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가 악한 세대라..표적을 구하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이 악한 세대에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이다.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나가 니느웨성에 가서 여러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그 이야기 했더니, 그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다 구원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회개해야 합니다. 니느웨 성이 꼭 망해야 할 성이지만,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속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지만, 회개가 그 성을 살린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망했습니다. 의인 롯도 있고 천사의 방문도 받았지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집을 소지하는 것만으론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영적인 눈이 밝히 뜨고 있는지, 아니면 감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을 한번 돌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볼 수 있는 사람. 좋은 것을 좋게 볼 수 있는 사람, 감사를 감사로 볼 수 있는 사람, 고난 중에도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교회 안에서 고쳐야 할 병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떤분이 나도 이런 병이 있는데... 그런 이야기인데요.
교회내 난치병 6
1. 습관성 주보 탐닉증: 설교가 시작되면 으레히 주보를 뒤적이는 사람.
2. 습관성 찬송 추월증: 찬송중 망상의 나래를 펴고 이것저것 헤매는 사람.
3. 습관성 예배 지각증: (좀 찔리죠?)
4. 습관성 안면 철판증: 성가대 연습 없이 성가대 가운 입는 사람.
5. 습관성 제발 저림증: 찔리는 설교를 들으면 나를 씹는 군 하고 생각하는 증상.
어디에 내놔도 주로 말이 꿀리지 않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6. 습관성 만사 비딱증: 모든 일을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증상.
면이 고르지 않은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모든 것이 굽어 보인다.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우리가 고쳐야 할 병 가운데 하나인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가 정말 쫒아내야 할 귀신이 무엇이냐. 지난 8. 6 대천덕 신부. 예수원에서 평생 봉사하시던 개신교 목사님이고, 신부님. 토레이라고 하는데, 한국이름은 대천덕이라고 하는데요. 이분이 한국 사회가 정말 회개해야 할 것 있다. 이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하는 분입니다. 이 분이 지적하는 것은 이 나라의 독재다. 부정부패다. 이런 일이 있지만,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땅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 홍콩, 싱가폴, 대만 이런 나라들은 땅의 주인이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땅값 오르는 것 기대 안합니다. 땅은 언제든지, 나라 것이니까, 임대료만 있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일을 열심히 해도 집한칸 사기가 쉽지 않습니다. 땅가진 사람들은 땅만 가지고 있어도 십년, 이십년 가만히 가지고 있음 땅값이 올라서 일한 사람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독재정권이 부패했다..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정권만 잡으면 땅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압니까? 정권을 위반하는 사람들이 알지 않습니까? 자기들끼리 땅 먼저 사놓고는 그리고 거기 개발한다 발표해 놓고 땅값 오른 후에 자기들끼리 돈을 갖는 것...이 것이 부정부패 아닙니까? 토레이 신부님은 이것을 마음에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한남동의 땅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건축비가 한평을 지을려면, 한 300만원 든다 그러면, 지금 땅값이 너무 올라서 집 한칸 마련하기 쉽지 않지 않습니까? 중국에는, 땅에 농사지을려면, 보통 30년 임대를 합니다. 임대료니까, 비싸지 않습니다. 사는게 아니기 때문에, 공장 2천, 3천 평 짓는데, 땅 값 별로 비싸지 않습니다. 공장 짓는게 더 많이 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집 짓는 값보다 땅 값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토레이 신부는 성경대로 하자.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희년이 되면 땅을 돌려주자. 제대로 임대해 주고 다시 살아라..하는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평생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이 회개해야 한다. 이 나라가 땅 때문에 망하고 있다라고, 부르짖다가 하늘나라 가셨습니다만은, 참 이러한 여러 가지 일곱귀신들이 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 귀신들린 민족과 영혼을 부둥켜 안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텐데, 우리도 언젠가 모르게 세속적이고 물량적인 사고 귀신에 사로잡혔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크냐, 일할 사람도 보면, 돈 많은 사람부터 찾고, 능력있는 사람부터 찾고 여러분, 과부의 동전 두닢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한 달란트 가진 사람 충성하지 말란 말 언제 들어 봤습니까? 우리가 한 달란트 받아도 다 충성해야 하는데, 이 것 버리고 다섯달란트 받은사람만 찾고 있단 말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할 교회가 정말 세속적인 삶에 너무나 집착되어 가지고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하지 않아요,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이 나라를 지키시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은혜 주실줄 믿습니다. 회개하십시다.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못 산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말 못하는 귀신 들린 사람을 벙어리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오늘 본문 앞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고 계속해서 가르쳐 주시는데, 하나님 앞에 간청해라, 그러면 네 요구대로 주신다, 그러면서 구하라 주실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11절에 가면 아버지 된 자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 뱀을 주며...하면서 아들이 필요한 것을 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아버지 앞에 생선 달라 하면 생선 주고 알 달라 하면 알 주지 전갈 안 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할 때에 성령 주시지 않겠느냐...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것 가운데, 최고의 기도의 목표, 기도의 축복이 무엇이냐..
성령 받는 것입니다. 무엇 받는 것입니까? 성령 받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 드린 내용을 잘 정리해 보십시오. 우리 마음에 예수님 때문에 귀신이 쫒겨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 쫒겨 나갔으니까,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까? 안 임했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됐습니다. 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졌습니다. 이 나라 누가 통치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통치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 내 마음을 지배하시고 통치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성령이 우리를 통치하고 성령이 우리에게 충만하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 갈수 가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기도할 때 성령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래서 제자들이 성령받고 성령 충만한 다음에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에 권력이 무섭지 않습니다. 세상에 가난이 무섭지 않습니다. 세상에 고난이 무섭지 않습니다. 왜? 성령이 나를 지키시니까, 그러니까,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서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니까, 자기를 묶고 있던 수갑이나, 발을 묶고 있던 착고나, 그리고 매를 맞은 거나 그 압박감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압박감 속에도 성령이, 그 마음에 충만하니까, 찬송하고 기도하고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그때 그의 손에 수갑과, 발의 착고를 다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감옥 문을 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병들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나를 주장하시면, 병도 이기고, 가난도 이기고, 고난도 이기는 승리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눈에 가치관이 달라 지는 것입니다. 이전엔 내가 볼 때 가난한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진짜 부끄러운 것은 무엇이냐? 내가 주님의 뜻 안에서, 성령 안에서 살지 못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의 역사하심만 받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왜 신경쇠약에 걸립니까? 우리가 왜 그렇게 고민하고 있습니까? 성령이 나를 인도하시고, 성령이 나를 지키시는데, 왜 그렇단 말입니까?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수백만명을 건너가게 하신 주님, 오늘도 내게 닥치는 일들이 홍해 바다와 같다 할 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건너가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괜히 염려하고 괜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셔서,, 나를 다스려 주시기를 원합니다.
나를 지혜롭게 해주시기 원합니다. 나를 용기있게 해 주시기 원합니다. 나를 기쁨 충만하게 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좋은 남편이 되고, 좋은 아내가 되고, 좋은 부모가 되고, 좋은 자식이 되고 성령이 내 안에 주장하실 때 그렇습니다.
반대로, 일곱 귀신이 우리를 주장하면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일곱 귀신이 자꾸 유혹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곱귀신이 못 오게 하기 위해서도, 성령을 주시길 간구하고 이 성령 안에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연변에선... 이런 이야기들이 유행 아닙니까?
옌벤에선...장로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이 저보고 장로냐고 묻습니다. 근디 저는 장로감에도 못 낍니다.
주일에 얼른 예배만 드리고 잽싸게 집으로 오는 사람은 절대로 장로 못함다.
울교회같은데서 고저 일주일에 교회 세 번은 가야 이제 교회좀 나오는구나 함다.
울교회에서는 고저 일주일에 교회 다섯 번 정도는 나와야 집사를 줌다 그 정도는 되야~ 교회 어디를 가야 먹을 것이 나오나 알 수 있슴다 그래야 새 신자들에게 이리 가면 먹을 것이 있고 저리 가면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줄수 있슴다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나올 정도가 되면 이제 권사를 줌다 권사님들은 고개만 슬쩍 돌려도 교회 식당에서 밥을 했는지 국수를 했는지 암다 예배후 5분도 안되어 새로 나온 분들과 밥있게 밥을 먹고 있슴다 어릴 적 일이었슴다....갑자기 교회에서 와장창...하는 소리가 들렸습다..
저는 누가 싸우는 줄 알았슴다...그런데,,,아니었슴다.. 그것은 ... 하루에도 열두번씩 나오는 장로님이 식당에서 설거지 하시다가 접시를 떨어뜨리는 소리였던 것임다...
그런데, 아닌게 아니라 연변에 가게 되면, 정말 교회에서 뜨겁습니다. 성령 안에서 얼마나 뜨거운지, 우리가 생각할 때 중국은 가난하지만, 예수믿는 중국사람 절대 가난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지 제가 지난번 갔을 때 예배 드렸던 그 교회는 비가 많이 오는 날 불도 어두컴컴하고 예배 1시간 40분을 얼마나...뜨겁게 예배를 드리는지 제가 입을 뻥긋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두...아멘 소리가 많이 나와서.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령이 우리를 다스릴 때 마귀도 임하지 않을뿐더러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며 살면 잘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며 살면, 잘 살 수 있다.
예수님께서 37절에 바리새인 집에 가서 초대를 받아 점심을 드시는데,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손을 씻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주인은 손님을 초대하면 당연히 물그릇에 손을 씻게 합니다. 그런데, 물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데서나 손을 씻지 않습니다. 옛날에 우물이 있는 집이 몇집이나 됩니까? 더군다나, 이스라엘 땅엔 우물이 있는 집이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우물 자체가 부자니까, 그러니까..물을 모아놓았다가, 쓰는데, 주인이 물을 가져다 주지 않으면 손을 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으니까, 바리새인들이 대뜸 하는 소리가 성경에 손을 씻고 먹으라 했는데, 더럽게 손을 씻지 않고 그냥 먹느냐며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뜸 하시는 소리가 너희는 겉은 깨끗하고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이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드시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구제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화있을진저..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사랑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비판을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살고 성령 안에 사는 것은 비판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려고 성령 안에 살고, 우리 마음에 귀신 내쫒고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저주를 받는 한이 있어도 내 형제가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모세는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 백성 구원해 달라... 하는 이런 마음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간, 또 우리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 온 글 하나 소개하고 마칠려고 합니다.
어떤 두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이 돼서 천신만고 끝에 무인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 빨리 집에 가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밖에 믿을 곳이 없다. 그래서, 너는 동쪽에서 기도하고 나는 서쪽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이 어디서 올지 모르니 열심히 기도하자 이러는 겁니다.
동쪽에 있는 사람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먹을 것 주세요. 기도했더니...머리 위의 나무에 과일이 주렁 주렁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야...기도가 잘 응답되네.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가 혼자 있으니 외롭습니다. 결혼하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어디서 또 표류해왔는지 여자가 와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 생각이 나고,,, 하나님 집에 가도록 배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웬걸요. 배가 또 어디서...나타나는 겁니다. 기도응답이 잘되지요? 이만하면 괜찮지 않습니까? 그래 가지고, 하나님이 역시 날 사랑하는 구나! 거기서 과일도 싣고 부인도 싣고 집으로 향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너 어디 가느냐" "집에 갑니다.“
무엇이든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
눅 11장 20~25절 / 이종윤목사
오늘 우리 성도들은 흔히 기적의 신앙을 구하나 본문은 신앙의 기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는 기적은 사도들만 아니라 사도적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기도의 바퀴가 빠진 마차를 타고 가는 이는 억지로 불평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필요한 의식주나 어떤 가치 있는 것보다 더 귀한 기도를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Ⅰ. 하나님의 말씀(본문)을 주목하라(Look at the text).
①우리가 구하는 것에 정확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막11:24) 분명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높으신 분께 나아갈 때엔 준비 없이 목적 없이 갈 수 없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②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차가운 기도, 열정이 없는 기도는 입술에서 죽어버리게 됩니다. ③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견고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주 속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음으로 우리는 오직 믿고 기도하면 됩니다. ④기대가 현실화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는 기도한 것은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뿐만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는 목적을 갖고, 진심으로 구하되,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Ⅱ. 당신을 둘러보라(Look about you).
①공 기도시간에 어떤 이는 서툰 말로 기도하지만 어떤 이는 설교를 합니다. 오늘 거룩한 심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복을 세워보면서 드리는 기도라면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감화 감동을 따라 열심히 아버지하나님께 정직하게 드리는 기도에는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②개인기도에서 기도문(prayer doar)을 사용치 않아 복이 쓸고 거미줄이 쳐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서울교회는 내일부터 2005년 사명자대회 특별새벽기도회를 진행합니다. 모든 이들이 특별새벽기도회 기간 중에 전보다 더 능력 있고 효과적인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를 위해 24시간 연속기도와 중보기도를 쉬지 말고 해야 합니다.
Ⅲ. 위를 보라(Look above).
①위를 보면서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능력의 무기를 주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녹슬게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힘, 생명, 빛 보다 더 나은 ‘기도’라는 선물을 주셨건만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고, 사용했다 하더라도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결국은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②다시 위를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③위를 보고 당신의 기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로멘틱한 소설이나 지루한 의무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산을 들어 바다로 던질 수 있는 진정 능력과 즐거움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맺는말.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막 11:24)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고 기도함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의 축복을 다 받으시고 누리시는 우리 서울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귀신을 쫓아내라
눅 11장 24~26절 / 조용기목사
옆에 계신 분들에게 “ 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인사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하지 않습니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귀신을 쫓아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 24절로 26절에 빈집의 우환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한 사람을 집으로 삼고 있던 귀신이 쫓겨 나가고 밖에 물 없는 곳에 돌아다니며 괴롭습니다. 사람을 떠나서 밖으로 나간 귀신은 물 없는 광야와 같은 곳을 헤맵니다. 그래서 도로 돌아와야 되겠다고 떠난 집에 와보니까 집이 빈집인데 수리되고 잘 정돈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귀신을 쫓아내기는 했으나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더러운 귀신이 나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그 사람을 강점을 하니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빠졌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집입니다. 우리 영혼이 거하는 집 뿐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든지 마귀가 와 있던지 영적으로 거하는 집인 것입니다.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주인으로 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내버려 놓으면 그 마음의 공간에는 원수 마귀의 영이 와서 점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든지 마귀의 영이 와서 점령하던지 사람은 영적으로 점령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집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거하시든지 귀신이 와 있던지 와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마귀와 귀신의 관계
마귀와 귀신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왜 도대체 이 세상에 마귀와 귀신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원래 마귀는 천사장 중에 하나였습니다. 계명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장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 미카엘 천사, 계명성 이 천사인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늘의 천사 3분의 1를 꾀어서 모반을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서 마귀가 되고 귀신들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 14장 12절로 15절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하나님의 보좌를 빼앗아 그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늘의 천사 3분의 1를 꾀어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하나님께 쫓겨나서 지금은 지옥의 귀신이 되고 만 것입니다.
단테(Alighieri Dante)는 그가 쓴「신곡」에서 지옥을 묘사할 때 “배신자”를 지옥의 맨 밑바닥에 두었습니다. 배신자로는 예수를 판 가룟 유다(Judas Iscariot)와 로마 황제 줄리어스 시저(Gaius Julius Caesar)를 암살한 브루투스 (Brutus, Marcus Junius)와 카시우스(Gaius Cassius Longinus )를 넣어 놓았었습니다. 단테는 남에게 피해를 줄수록, 특히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줄수록 지옥의 밑바닥에 넣었는데, 이를 통해 인간이 짓는 죄 중에 가장 나쁜 죄가 ‘배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배신을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악 중에서 가장 밉고, 더럽고, 비열한 최대의 죄악으로 본 것인 것입니다. 배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에게 해를 끼치고, 탐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평소의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정말 배신보다 더러운 죄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을 하고 많이 도와주고 이끌어준 그 사람이 돌아서서 물고 협박하고 공격을 할 때 그 배신은 정말 더러운 것입니다. 왜 배신이 그렇게 더러우냐. 바로 마귀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므로 배신의 근본은 마귀에게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당하는 고통 중에 가장 괴로운 고통이 내가 정말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아주던 사람이 돌아서서 물고 찢고 상처를 입히는 배신의 행동을 할 때 가장 괴롭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배반한 타락한 천사장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 스스로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를 도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파괴하며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귀신들인 것입니다. 마귀를 따라서 타락한 귀신들이 인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해서 마귀의 귀신이 하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사랑, 믿음, 소망, 의, 평강, 희락 모든 아름다운 정신적인 요소를 도적질하고 빼앗고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하와이에서 성회를 인도할 때 마흔이 넘은 “도비”라는 남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얼마나 신앙이 좋은지 성령으로 충만하여 앉으나 서나 예수님 말씀을 늘 전했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알고 보니 그 동안 그는 너무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이혼을 하여 친척 집에서 자랐습니다. 친척은 그가 하도 우니까 밉다고 젖 대신 안약을 주어서 온 위가 다 헐고 입이 다 헐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집 저 집 양자로 다니면서 초등학교도 못 나온 채로 천덕꾸러기가 되어, 하루는 개 집에 들어가서 자며 그곳에서 개와 더불어 울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그의 마음에는 사회에 대해 심한 반발이 생기고 46세가 되도록 결혼도 하지 못했습니다. 집도 없고 생활이 공중에 떠있었습니다. 그는 말했었습니다. “사람 죽이는 것만 빼고 모든 죄를 다 지어보았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죄 짓는 일에 모두 다 써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늘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가득차서 몸부림쳤는데, 추수감사절에 한 한국 부인이 그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발심이 있었지만, 그 부인이 어찌나 자상하고 상냥하던지 그 사랑에 감동되어 교회에 따라 나갔습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데, 처음에는 꼭 죽을 것만 같이 갑갑하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섰다가 앉았다가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와 그 마음속으로 싹 들어 왔습니다. 잠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마음이 감동이 되어서 그는 통회하고 자복하고 울고 뒹굴며 회개했고, 그 동안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 귀신이 다 쫓겨 나가고 성령이 그 대신 그 마음을 점령해서 하루 만에 천사처럼 변화되고 만 것입니다. 그의 얼굴은 온화해져서 이제는 조금만 죄악의 생각이 들어와도 마음에 가책이 되어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와이에 갔을 때 자기 소원이 나를 만나는 것이라며 일주일간 휴가를 내어 제 집회에 따라 다니면서 도와주고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저를 만나고 난 다음 얼마나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난 46년 동안 귀신에게 잡혀서 온갖 죄악 가운데 살았는데,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이 오시자 귀신이 쫓겨나가고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귀신의 종인 마귀의 종인 귀신을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며, 우리 삶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지만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귀신은 쫓겨나가고 그 회개한 자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와서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대왕이시고 귀신은 사망의 왕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2. 귀신이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하는 일
귀신이 이 세상에 사람과 하도 오랫동안 친숙하게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귀신이 자기 곁에 있는줄도 모릅니다. 완전히 친구가 되고 완전히 가족중에 한 맴버처럼 되어있고 온 사회 함께 행동하고 살았기 때문에 귀신이 왔는지 안왔는지 누가 귀신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이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어떠한 형태로 있느냐면 제일 처음 단계는 'Obsession'이라고 해서 귀신이 붙어 다닙니다. 몸에 붙어 다녀요. 이 사람이 시장에 가면 시장에 붙어가고 학교에 가면 학교 붙어가고 집에 오면 집에 붙어 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4절로 7절에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귀신이 예수님을 모시게 되니까 견디지 못하여 고함을 치고 나갔던 것입니다.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보혈 앞에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는 귀신들이 예수님 앞에서 고함을 치고 쫓겨나갑니다. 오늘 여러분 모르지만 여러분에게 붙어있는 귀신도 있습니다. 10년, 20년 붙어있는 귀신이 있습니다. 하도 오랫동안 붙어 있기 때문에 귀신인지도 모르고 친구인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 담배 피는 귀신이 붙어서 10년 동안 담배를 피웠으니 담배는 자기가 피우는 줄 알지만 귀신이 피우도록 뒤에서 종용한 것입니다. 10년, 20년 술주정뱅이가 된 자도 술주정뱅이가 자기가 된줄 아는데 귀신이 붙어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에게 붙어서 귀신 성격을 그대로 옮겨 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단계는 귀신이 우리 몸에 붙어서 우리 몸에 생명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귀신은 붙어 다니다가 좀 더 힘을 얻으면 'Oppression'이라고 해서 압박을 가합니다. 압력을 가해요. 붙어 다닐때는 내게 끌려 다니는데 그게 오랫동안 붙어 다니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끌고 다닙니다.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끌어 당깁니다. 'Oppression' 압박단계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내가 가고 싶지 않은데도 가야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먹기 싫은데도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억압단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단계는 'Depression' 나중에는 슬픔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압박을 당해서 이제는 도저히 자기 힘으로 착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선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올바른 길로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Oppression' 압박단계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되면 얼마있지 아니하여 곧 'Depression' 마음에 우울하고 침울하고 억압당하여 인생이 살기 싫고 자살하는 사람도 생기고 패배자가 되어 완전히 마귀에게 잡힌 'Possession' 소유단계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에 보면은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예수님 가는 곳마다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나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하고는 꼭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도 우리가 예배하러 모일 때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안하지요. 오늘날 목사들은 교육을 너무 많이 받아서 예수님 말씀을 미신으로 생각하고 안합니다. 세상 교육은 잘 받았는지도 몰라도 하늘나라 교육은 잘못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하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리인 것입니다. 오늘날 그렇기 때문에 귀신들이 자유롭게 교회에 출입을 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병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다시 회개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불광동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 처음 귀신과 만났습니다. 하루 교회 옆에 움막집을 짓고 그곳에 살았는데 토요일날 저녁에 예배를 준비한다고 준비하고 있는데 아! 천막교회에서 막 웃는 소리가 들려요. 깔깔깔깔... 웃는데 소름이 끼쳐요. 보통 웃음이 아니고 귀신이 웃는 것 같아요. 그러더니만 조금 후에 문을 두드려 “들어보시오.” 그러니까 들어오는데 모 종합병원 소아과 과장 부인이 들어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때 제일 잘사는 분이었는데 한쪽 몸이 마비가 되어서 몸을 끌고 이렇게 다녔습니다. 그 남편이 의사이기 때문에 고치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병이 낫지 않았었습니다. 얼굴이 새하얗게 되어서 들어오면서 “이것 왜 그렇지요 전도사님? 내가 스스로가 웃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는데 속에서 이 웃음이 나오고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데 이것 어떻게 하면 됩니까? 왜 이렇습니까?” “나도 모르겠어요.” 겁이 털컥 납디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의사 선생님의 부인인데 교회 왔다가 미쳤다고 하면 그 책임을 내가 어떻게 감당합니까? 그래서 빨리 집에 가라고 너무 수고하지 말고 집에 가서 쉬라구..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하구요?” “교회는 당분간 나오지 마십시오.” “언제는 교회를 나오라고 하시더니만 내가 웃으니까 이제는 교회 나오지 마라니 이게 왠일입니까?” “아 그래도 좀 마음이 불안한 것 같으니까 집에서 쉬시라고...” 그리고 난 다음에 그 부인이 떠나고 난 다음 제가 하나님께 “하나님, 저 여자 교회 안 나오게 해주시옵소서.” 도저히 제가 겁이 나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저렇게 무섭게 웃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그 다음 월요일날 아침 새벽기도를 나가니까 새벽에 나와서 앉아 있어요. 제가 진땀이 바짝납디다. 이 어찌하나 싶어서. 그래서 막 새벽기도 설교를 시작했는데 벌떡 일어나더니만 웃기 시작합니다. 아하하하하... 막 웃으니까 한 사람 두 사람 일어나서 신발들고 다 도망쳐 버렸어요. 나하고 그만 남았습니다. 그래 내가 가서 “자매님, 교양이 있고 교육을 많이 받은 훌륭한 분이 어떻게 예배 드리는 대중 앞에서 그렇게 웃을 수가 있습니까?” 하니까 딱 나를 쳐다보더니만 “뭐 어째 이 자식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하니까 “이 자식아 내가 이 몸에 10년 동안 집을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를 꾀어 와가지고서 나를 쫓아내려고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마라.” “그런데 당신 누굽니까?” “누구긴 누구라. 나는 귀신이다.” 그래서 내가 “아이 귀신같은 소리하지 마십시오. 뭐 귀신이 들어왔게?” “허, 이것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것도 새파란 놈이 이 짓을 한다. 내 손에 죽으라.”고 하면서 일어나서 내 멱살을 잡습니다. 붙잡혔다가는 죽겠습디다. 그래서 떨쳐 버리고 내가 천막 안에서 도망을 치니까 따라옵니다. 그런데 나는 도망치고 따라오고.. 술래잡기처럼 합니다. 도망치다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라고 했는데 진짜 이것 귀신이 아닌가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딱 돌아서서 “이 귀신아 앉아라. 앉아.” 그러니까 “뭐? 귀신아 앉으라고? 그래 앉을게 어떻게 할래?” 그래서 나도 같이 앉아 가지고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오라!” “안나간다.” “나오라!” “안나간다.” 여름철이었습니다. 새벽에서부터 나오라고 고함친 것이 저녁 7시가 될 때까지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고 나오라고 하면 안나오겠다고 정말 답답해 죽겠습니다 나중에는... 아무리 나오라고 해도 안나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얼마 안있으면 남편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부인이 없으면 교회로 찾아올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자기 부인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조바심이 나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니 나오라!”고 고함을 치니까 나중에 저보고 하는 말이 “요 새파란 놈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네가 나를 쫓아내려고?” 내가 “새파랗던지 빨갛던지 그것은 둘째 문제다. 나는 예수 이름으로 나가라고 하지 내 힘으로 나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새파라도 상관없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오라!” “알기는 똑똑히 아네.” 그러더니만 쓰러지더니 고함을 치기 시작합니다. 고함을 아주 벼락같이 치는데 제가 예수 이름으로 계속해서 나오라고 명령을 하니까 입을 열더니 토하기 시작해요. 막 토하더니만 나중에 푹 거꾸러집니다. 내 속으로 보니까 죽었구나. 이것 차라리 고함치고 웃는 것이 낫지 죽는것보다 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 정말 무릎이 떨리고 하늘이 아뜩합디다. 그래서 일어나십시오. 일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하나님이여 이 여자가 죽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깨어나게 해주십시오. 한참 그러니까 부시시 일어나면서 “안죽었습니다. 이제 귀신이 다 나갔습니다.” 내내 전도사님이 귀신하고 싸울 때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전도사님이 명령하는 것을 듣고 귀신이 대답하는 것 듣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귀신들이 말하기를 ‘이 놈이 진짜 뭘 알기는 알고 있다. 안 그랬으면 벌써 그만 두었을 것인데 진짜 예수 이름을 알고 있으니 우리 못견딘다. 나가자!’ 그러면 대장이 ‘너부터 먼저 나가고 둘째 네가 나가고 셋째 네가 나가고 순번대로 나간다. 하나, 둘, 셋..’ 그러면서 떠나기 시작해서 나중에 마지막 대장이 나가고 평안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빨리 집으로 가세요. 남편 들어오기 전에 빨리 집으로 가세요.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빨리 가세요.” 그래 이제 천막교회를 떠나서 나혼자 앉아서 숨을 좀 돌이키고 있는데 또 고함을 치고 또 고함을 치고 돌아옵니다. “아이고 하나님, 또 옵니까? 이것 어떻게 합니까?” “전도사님~” 그러면서 고함을 치고 오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 날라갔다. 이제는 또 돌아섰으니 이제 교회가 어떻게 견디겠나.” 그런데 내 앞에서 깡충깡충 뛰는데 보십시오. 내가 반쪽이 반신불수였는데 이제는 보통 사람처럼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습니다. 완전히 건강하게 되었어요. 그 남편이 얼마나 감동을 했던지 그 다음 수요일날 교회에 나왔어요. 나와서 예수를 믿겠다고 하고 간증을 하기를 “우리 집사람을 내가 고치려고 좋은 병원에 안데려간데가 없고 좋은 약은 안먹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건강한 몸으로 저녁에 집에 돌아왔는데 이 교회 와서 그렇게 되었으니 무엇이 이 교회에 있기는 있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집사람이 건강하게 되었으니 나도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래서 온가족이 구원받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여러분 귀신이 초기 단계에는 우리에게 붙여 다니다가 그 다음에는 억압에서 우리를 강제로 끌고 다니고 그 다음에는 억압하고 그 다음에는 완전히 우리를 점령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화초나 채소를 기를 때, 식물이 잘 자라다가 어느 날부터 잎사귀가 누렇게 뜨고 죽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 때 잎사귀를 뒤집어보면 뒤에 진딧물이 잔뜩 붙어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진딧물이 잎사귀의 생명줄인 물기를 다 빨아 먹습니다. 그러므로 잎사귀가 누렇게 뜨고 그 다음 말라죽게 되는 것입니다. 수맥을 다 점령하여 물과 양분을 빨아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초나 채소의 잎사귀에 물과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누렇게 뜰 수밖에 없지요. 오늘날 진딧물 같은 귀신이 우리 마음을 점령하면 자꾸 내 마음 속에 생명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나쁜 생각이 마음을 점령하고 죄를 짓게 하고 마음에 간직한 믿음, 소망, 사랑, 평안, 기쁨을 빼앗아 가고 우리 삶이 누렇게 떠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회개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사라지고 마음이 늘 우울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마음에 진딧물이 붙었습니다. 귀신이 붙어서 생명을 빼앗고 도둑질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신이 쫓겨 나가고 마음에 평안을 회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성경에 기록된 귀신의 행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훨씬 더 많이 우리가 귀신의 영향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 눈에 안보이니까 그러나 우리 가운데 있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계속하고 있으니까 이것을 진리를 우리가 깨달으면 대적해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귀신은 배후의 세력입니다. 눈에는 안보이고 뒤에서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정해서 그 사람이 행동으로 나오는 것을 볼 때 어떤 귀신이 뒤에 서 있는지 추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가 귀신인데 거짓말 자꾸하는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이 나뻐서 거짓말하는 것보다 그 뒤에 거짓의 아비인 귀신이 붙어 있습니다. 귀신이 붙어 있으면 자꾸 거짓말해요. 거짓말하는 귀신이 붙어 있으면 자나 깨나 거짓말해요.
요한복음 8장 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거짓의 아비가 되어가지고서 사람에게 붙어서 거짓말하도록 자꾸 압력을 가하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하루는 부모님이 어린 딸을 데리고 왔는데 얼마나 때렸던지 온몸에 멍이 시퍼렇게 들고 얼굴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자식을 때려도 이렇게 때릴 수가 있습니까?”그러니까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이 놈이 얼마나 거짓말을 하는지 아무리해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지갑은 다 들춰내고 엄마 지갑도 다 들춰내서 만화가게에 가든지 과자가게 가든지 가서 다 없애버리고 학교는 가지 않고 능청스럽게 학교 갔다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아무리 때려도 안되니까 여기 교회에 데리고 왔으니 목사님이 좀 어떻게 살려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얘가 자꾸 거짓말하는 것은 거짓말 귀신이 붙어서 그렇다고 아무리 때려도 귀신은 아프지가 않다. 딸만 아프다. 그러니 이 애를 일주일 동안 내게 맡겨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걔가 교회에서 먹고 자고 있으면서 저에게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열심히 안수기도를 해주었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난 다음에 귀신 쫓겨나가고 그가 다시는 거짓말을 안하겠다고 하고 또 거짓말도 안하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10년의 세월이 지나서 제가 미국에 부흥회를 갔는데 로스엔젤레스에서 성회를 하는 동안에 한국 음식점에 음식을 먹으러 갔는데 아주 이쁜 여성이 한국 옷을 입고 내게 와서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저를 알아 보겠습니까?” 그런데 쳐다보니까 도저히 몰라 보겠어요. “나 누군지 모르겠는데요” “왜 한때 제가 귀신 들려가지고 거짓말 많이 하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게 끌려서 얻어맞고 목사님 서대문 교회에 간적 있지요?” “아 있지..” “목사님 일주일 동안 안수해 주고 날 고쳐줬지 않습니까?” “아.. 그 자매..” 그런데 그 자매 보니까 “그때 이후론 귀신이 쫓겨나가고 내가 거짓말 안해요. 좋은 남편 만나 시집와서 로스엔젤레스에 와서 조그마한 식당을 경영하고 있는데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목사님 덕에 내가 이렇게 살았으므로 늘 목사님 생각을 하는데 오늘 우리 식당에 오셨으니까 대접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서 대접 잘 받고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가 어렸을 때 거짓말 하는 것은 배후에 거짓말하는 귀신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일 거짓말하는 귀신을 내쫓지 않았으면 이 여자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삶을 낭패 짓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그 귀신들린 병을 나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든지 우리를 우리의 삶 속에 비정상적인 일이 나타나면 귀신이 뒤에서 조정하는 줄 알고 귀신을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미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할 때 내가 미워하는 줄 아는데 미워하는 귀신이 우리 뒤에 붙어 있어서 우리를 미워하도록 사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앉으나 서나 미워합니다. 가족을 미워하고 이웃을 미워하고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은 미워하는 귀신이 붙어서 사주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안미워하려고 해도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미워하는 귀신을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너 미워하는 귀신아 물러가라! 물러가라! 쫓아내면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의 영을 부어주시므로 마음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인한 자도 자기도 모르게 살인한 사람이 많습니다. 살인하는 귀신이 붙어서 귀신의 사주를 받아서 살인하는 것입니다. 살인하는 귀신을 쫓아내지 않는 이상은 계속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란한 귀신이 붙으면 음란합니다. 아무리 음란 안하려고 해도 안할 수가 없습니다. 음란의 귀신이 붙어서 자꾸 사주하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지 않으면 끌려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란의 귀신아 물러가라! 내 마음에서 물러가라! 나의 생각에서 물러가라! 내 환경에서 물러가라! 대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 21절로 23절에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 귀신이 집어넣어서 그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고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만 산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눈에 안보이는 귀신이 인격자가 되어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을 자기 성격대로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가 마음 속에 그것을 알아야 돼요. 세상의 유혹도 귀신이 들어와서 우리 마음을 세상의 여러 가지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까지도 유혹하려고 했으니까. 너 배고프지? 이 떡을 돌덩이를 변하여 떡을 만들어 먹어라. 유혹인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을 높은 뾰충탑에 데리고 가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천사가 와서 네 발을 손에 바쳐서 돌에 안부딪히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치고 너를 존경할 것이니 그렇게 하라. 유혹하지 않습니까? 산위에 들어가서 온 천하 만국 영광을 보이면서 내게 절하면 이것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을 유혹한 귀신이 여러분과 나를 유혹 안할턱이 있습니까?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 보는 것을 통해서 느끼는 것을 통해서 우리 생각을 통해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 유혹이 달콤하니까 넘어가서 나중에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합니다. 유혹은 낚시와 같습니다. 고기가 낚시가 먹이인줄 알고 물때까지는 좋았는데 물리고 나서 잡히면 그 다음 끌려 나갑니다. 목숨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귀의 유혹에 걸렸다고 하면 충만한 고통을 당하고 그 댓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다음 참소하는 마귀가 붙으면 참소를 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다.”
밤낮으로 남의 결점을 지적하고 있는 말, 없는 말 다 만들어 내고 참소하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참소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참소하는 귀신이 붙었어요. 그 귀신 쫓아내지 않고는 그 사람 늘 참소의 대왕이 되어서 참소만 하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또 마음의 불화, 시기, 분노, 질투, 불화도 배후에 마귀가 붙어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로 16절에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시기와 다툼, 불화 이 모든 것은 배후에 귀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비정상적인 느낌을 마음에 가질 때 귀신이 와서 마음을 노립니다. 저는 이런 체험을 종종합니다. 비정상적으로 마음이 불안합니다. 불안할 일도 없는데 마음이 불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왜 이렇게 불안할까? 그래서 노래도 틀어서 들어보고 왔다갔다 운동도 하고 해도 마음에 불안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때야 아~ 이 귀신이 붙었구나. 예수 이름으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불안의 귀신은 물러가라! 쫓아내면 귀신이 고함을 치면서 나갑니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종종 불안해지거나 어떻게 마음에 미운생각이 들어오거나 마음에 정욕이 생기거나 이상한 비정상적인 것이 마음을 누를 때 이것은 귀신이 와서 누른다고 생각하고 대적하면 틀림없이 귀신이 나가고 마음에 성령이 평안을 갖다주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느낌,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정상적으로 만들지 비정상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언제나 마음이 비정상적이 되면 귀신이 붙어서 비정상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 이름으로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39절에 보면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니라”
귀신이 갑자기 붙어서 경련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음에 비정상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단과 사설도 귀신이 가져온 것입니다. 귀신이 이단과 사설을 우리에게 믿게 해서 신앙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병든 것도 모두다 귀신이 주는 것이 아니지만 많은 병이 귀신에게 눌려서 병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32절로 33절에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이 사람은 내내 말 못하는 벙어리였는데 그저 병이 들었는가 싶어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데 예수님은 귀신이 들려서 말 못하게 하는 것을 알고 계셔서 귀신을 쫓아내니까 곧 말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가 와서 사람들을 눌러서 병들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1절로 13절에도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곱추가 되어 있는 여자인데 주님이 안수하니 즉시로 귀신이 쫓겨나가고 곱추가 건강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귀신이 하는 일을 보면 이렇습니다. 귀신은 우리를 더럽게 만들고(마 10:1), 온갖 질병을 일으키게 하고(마 9:32,33), 시험에 빠지게 하며(욥 1:6,7), 기도를 못하게 합니다(마 26:41). 또 귀신은 사람의 심령을 혼란에 빠뜨리며(눅 22:31), 매사에 의심을 잘 품게 하고(딤전 4:1),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며(마 13:19), 택한 자들도 미혹하여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일을 귀신이 합니다(벧전 5:8, 엡 6:12). 또 귀신은 거짓 교훈을 유포하고(딤전 4:1),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복음을 방해하는(고후 4:1)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오늘날도 두루 다니며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방법을 동원해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하고 미워하고 살인하게 하며, 음란과 방탕하게 하고 세상 유혹에 따라 살게 하며 참소하고 불화하게 하며, 비정상적인 느낌을 갖게 하고 병들게 하고 이단사설에 빠지게 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타락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서 날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 우리 배후에서 역사하는 귀신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대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4. 귀신에 대한 주님의 말씀
누가복음 10장 17절로 19절에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우리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낼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귀신은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이 있어요.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싸워서는 우리가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권세는 익수지아라고 헬라어로 말하고 권능은 두나미스라고 말하는데 6톤 트럭이 건축 자재를 싣고 달려오면 굉장한 능력이 있습니다. 두나미스 아주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지요. 사람이 도저히 그 트럭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찰관이 몸이 빼빼하고 키가 조그마한 경찰관이 호르르륵... 하면 그렇게 힘이 센 트럭이 꿈쩍 못하고 옆에갖다 덜컥 댑니다. 왜, 경찰관은 능력은 없어도 권세는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가 준 권세가 있습니다. 아버님이 90살, 아들이 70살인데 70살 먹은 아들은 90살 먹은 아버지 보다는 능력이 있다 말입니다. 힘이 있다 말입니다. 그러나 90살 먹은 아버지가 허리가 다 구부러지고 겨우 걸으면서 “어어 아들아 여기 좀 오너라.” “예~” 그러면서 70살 먹은 아들이 아버지 앞에 가서 “예.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시렵니까?” 뭐 90세 먹은 저 늙은이는 저 바람같은 아버지를 명령에 따라 가나.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버지는 아버지로써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아들은 능력이 있지만 권세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는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몸에 진동도 안오고 감동도 없고 힘도 없어서 나 같은 사람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기도 못합니다. 잘못 생각인 것입니다. 여러분 권세는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인 것입니다. 90세 먹은 할아버지가 아들 부르는데 힘이 있어야 부릅니까? 힘이 없어도 권세가 있으니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예수 믿을 때 여러분에게 모두다 귀신을 제압할 권세를 주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느끼든 아니 느끼든 상관할 것 없어요. 여러분은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 이름으로 마귀를 제압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권세 있는 자처럼 행동해야 되는 것입니다. 권세가 있는 사람이 벌벌 떨고 마귀에게 예예~ 잘못했습니다. 네. 물러가겠습니다. 그러면 안돼요. 가슴 쫙 펴고 야, 이 마귀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주님이 내게 권세를 주셨다. 그러면 한길로 왔다가 입곱 길로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자기가 권세가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모르면 안되는 것입니다. 알고 명령을 하면 마귀가 대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예수 이름에 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권능, 권세 즉 익수지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나미스. 힘은 없어도 힘은 없어도 권세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권세자라는 것을 알고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귀신을 늘 쫓아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귀신하고 같이 살라고 말 안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귀신하고 오랫동안 같이 사는데 귀신을 쫓아내라고 명령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매일 귀신을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너희 원수 귀신아 나에게서 떠나가라. 우리 가정에서 떠나가라. 나의 일터에서 떠나가라! 나를 훼방하지 말라. 꼭 쫓아내면 이 귀신은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귀신에게 훼방을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쫓아내야 돼요. 여러분에게 지금도 붙어있는 귀신 있으면 쫓아내야 돼요. 집안에 귀신이 있으면 우환, 질고가 끝나지 않습니다. 쫓아내야 돼요. 그냥은 안 나갑니다. 여러분이 명령을 해야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조지 쿨만(George Colman)은 “모든 의사를 다 찾아가도 고치지 못하는 병이 있다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라.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만 있다면 그대의 병은 완전히 고침을 받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신학자 칼빈(Jonh Calv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에는 마귀와 죄악이 모두 소멸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예수 이름’으로 모든 질병과 마귀의 세력을 쫓아낼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결론>
귀신은 마귀의 정체를 온 천하 만인에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귀신은 마귀가 얻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귀신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귀신을 쫓아내야 돼요. 주기도문에도 주님이 마지막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시험이라는 것은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악은 악한 마귀에게 놓여나게 해달라고 주기도문에 그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 성령이 늘 같이 계심과 동시에
귀신이 늘 같이 따라 다닌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안믿는 사람은 말할 필요없이 귀신이 주인으로 마음속에 들어앉아 있고 생활에 따라 다니면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귀신이 꼭 따라다니고 우리에게 들어오려고 말하고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오는데 항상 우리는 눈에 안보이더라도 귀에 안들리더라도 손에 잡히는게 없더라도 진리를 알고 깨달았으면 귀신을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같이 귀신을 쫓아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고개를 숙여서 주님 편안히 잔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귀신이 나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곁에 있는 귀신은 물러가라! 내게 붙어 다니는 귀신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우리 가정에서 물러가라! 우리 가족에게서 물러가라! 귀신을 쫓아내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도 귀신을 쫓아냅니다. 귀신을 몸에서 털어버립니다. 귀신은 먼지와 같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 전에 털어내 버리고 옷을 입을 때도 털어야 되는 것입니다. 때를 샤워해서 씻어버리는 것처럼 매일같이 귀신은 샤워해서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자유를 얻고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너무나 이야기를 안합니다. 귀신의 존재를 이야기 안하고 귀신에 대해서 안가르쳐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과 더불어 삽니다. 그래서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항상 쫓아내고 귀신에게서 해방과 자유를 얻고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내 삶의 주인은
눅 11장 24~26절 / 서정호목사
신앙은 철저한 결단과 헌신을 할 때 제값을 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가까운 사람이나 또는 주변의 친지들이 말리다가 마지못해 허락하면서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되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는 충고입니다. 그런 말씀은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만합니다. 먼저 신앙에 깊이 빠진다는 것을 그분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이단 집단이나 사교에 빠져서 가족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주위에는 있습니다. 또 집을 나가서 집단생활을 하며 집문서, 땅문서 모두 바쳐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도를 통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고 신앙에 깊이 빠진다고 하면 정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깊이 빠지는 것은 그만두고 아예 시작하는 것도 말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깊이 빠지지 말라고 했을 때에 어떤 배경이 있을까요? 유교를 믿는 사람들은 중용의 도를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열중할 필요도 없고 또 지나치게 냉담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남이 하는 만큼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나 생각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이어야 할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설교도 결단을 강요하며 부담을 주는 설교보다 평안한 마음으로 부담 없이 앉았다가 일어설 수 있는 쪽을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 신앙은 그 시작부터 중립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미지근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미지근하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상태를 싫어합니다. 성경적 신앙은 철저한 결단과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고 그 때 신앙은 제값을 합니다. 결단 없는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으며 헌신 없는 신앙생활은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물방울은 결국 큰물이 된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 하나의 물방울이 생겼습니다. 그 물방울이 뭉쳐 북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라인강을 타고 북해로 흘러 들어가게 되고, 동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다뉴브 강을 통해 흑해로 흘러 들어가게 되고, 남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로네 강을 통해 지중해로 흘러가게 됩니다. 물방울은 똑같은 곳에서 시작되었지만 극히 미소한 방향의 차이로 말미암아 수 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다른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이 갈라지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차이가 점점 뚜렷해지다가 결국 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또 한사람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한번 뿐인 인생이 후회 없는 인생, 낭비 없는 인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방향을 잘 잡아서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인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인생이 펼쳐질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들의 삶은 진정 보람 있고 축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수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를 아끼시며 병자를 고쳐주시며 외로운 자를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가슴을 가지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의 주인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리고는 이웃집 아들을 의심했습니다. 걸음걸이를 보아도 안색을 보아도 말투를 들어도 도끼를 훔친 것 같았습니다. 모든 동작과 태도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골짜기를 지나다가 그는 잃었던 도끼를 찾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이웃집 아들을 보니 동작과 태도가 전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에 따라 동일한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때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주인은 정의와 진실에 가까운지 한 번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한 뒤 계속적으로 양육되지 못할 때 파괴적인 결과가 따라올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쉴 곳을 찾아 거하기 위해서 계속 헤매다가 전에 살았던 사람에게 돌아와 보니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서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려다가 거하여, 그 사람의 형편이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귀신을 쫓아내심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그 유익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람의 형편이 전보다 더 악하게 될 것입니다. 이같이 말씀하실 때 한 여인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예수님을 낳고 키운 어머니가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참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지키는 자에게 있으므로 그분의 가르침에 바르게 반응할 것을 요구하셨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관계를 맺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위험을 "빈집"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들어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이 한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그 귀신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고 다시 자기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깨끗하게 소제되고 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들까지 집에 데려와서 거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이 집을 점령하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 상태보다 훨씬 심각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 우상숭배는 버렸으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했으므로 영적 동공상태가 되어 그들의 심령에는 더 악한 귀신들이 들어와서 살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의 심령은 비워둘 수가 없습니다. 악은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것은 개인으로 말하면 회개한 상태를 말하고 옛날의 잘못된 것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마음을 청소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 마음을 지배할 주인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우리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생각이 사람을 만듭니다. 즉 좋은 생각을 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쁜 생각을 안 해야 하지만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 생각을 선한 일, 좋은 일을 계획하고 선한 일로 생각을 채우면 악한 생각이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모든 행위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행위의 결과도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생각 자체도 귀하게 보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기독교의 진리는 '하지 말라'의 진리라고 오해하는데 기독교의 진리는 '하라'의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주신 계명은 아주 적극적인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마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선으로 악을 이기며 악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안일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되고 주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을 보고, 행동도 합니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들려지기도 하고 안 들려지기도 하고, 이렇게 듣기도 하고, 저렇게 듣기도 하고, 이렇게 깨닫기도 하고 정반대로 깨닫기도 합니다. 내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하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16장에 보면,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다'고 했고,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느 용사보다 더 위대하다고 했는데, 사실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걸 인정하면서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이제 바른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윤리학에서는 생각과 마음이 함께 하지 않는 행위를 행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몸만 움직인 거니까요.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게 하거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
사람의 건강을 잃어버리게 하기도 하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사회학적으로는 몇 가지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많은 사람에게 내가 필요치 않다고 느낄 때, 고독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서며 그 마음이 병들게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때입니다.
그런가 하면 중요한 사건에 부딪힐 때입니다. 바로 배우자를 잃거나 자녀를 잃는 것과 같은 엄청난 사건에 부딪힐 때, 그만 감당을 못합니다. 또한 자신감이 없고 자기만족이 없을 때, 그리고 일에 대해서 불만할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내가 왜 이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생의 의미를 잊어버릴 때, 그만 점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건강이 허약해 질 때, 허약해지기 시작하면 가속화되면서 점점 무너져 내려갑니다. 그리고 비관주의가 그 사람의 마음을 자리 잡게 되면 만사가 어둡고, 만사가 괴롭고, 만사가 짜증이 납니다. 도대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벌써 자살을 하게 됩니다. 정신적으로 이미 죽었기에 죽음을 위한 행동을 과감하게 거침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살고 싶지 않으니 남의 생명도 해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 마음을 누가 다스릴 수 있습니까? 이 같이 기울어진 마음에서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일까요?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해야 될 사람이 쓰러지고 또 쓰러질 때, 졸고 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음에는 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하고 마음과 의지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말씀입니다.
이성과 마음은 별도라고 합니다. 지식과 감성이 다릅니다.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 또 의지와 마음이 별도로 갑니다. 이 따로따로 노는 괴리를 인정하고 바로 터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감성이라고 하는, 이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과 의지보다 더 원초적입니다. 내 마음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별도이며, 이 속 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것보다 더 깊은 세계, 더 원초적인 그런 속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이란 오직 성령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네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 말은 의지 이전의 말입니다. 내 생각이나 의지로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의 영이 내게 함께 해서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을 주장해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먼저 깊은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의 주인 노릇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주권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나를 맡기고 있습니까? 그 분의 거룩한 영으로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지배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기에 감히 더러운 귀신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 되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히 성령께서 그 마음에 들어와 계시지만 누구나 다 자동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주님이 도전하셨습니다. 약속을 믿고 간구할 때에 주님께서는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시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우리는 생기가 넘치고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사람의 생각을 초월한 평강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체험합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나아가서 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먼저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거룩한 능력의 부으심이 없이 우리의 마음 상태는 유령 같은 빈 집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성령께서 내 속에 충만하게 임재하시면 주님께서 원치 않는 것들을 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내 속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아니 적극적으로 주님께 서원하시는 것들,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들을 내가 찾아서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립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십니까? 성령의 충만함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을 장악하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그 마음은 더러운 귀신이 다시금 접수한 집처럼 더 심각한 자리로 전락할 것입니다.
어느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교인들의 95%의 상태를 한 시간 동안 예배를 드리면서 의자의 앉은 자리를 따뜻하게 하고 돌아가는 정도의 사람에 불과하고, 단 5%만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은 어떨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심각한 영적 도전을 합니다. 하나님께 철저하게 돌아오지 않고서 약간의 변화에 만족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에 나옴으로 약간의 변화가 주어집니다. 주일에는 전에 없이 일찍 일어나서 머리도 빗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도 나오고 구역예배, 남성다락방, 부부다락방에도 참석하고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 가지고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회개만 할 것이 아니고 참 믿음을 가져야 하며 옛 삶을 청산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새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를 이제 맺었다는 것에 머물러 있지 말고 그 주님의 기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이제 주님이라고 불렀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새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성령의 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소제되고 수리된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주인을 모시고 철저하게 새 주인의 지배를 받을 때에 여러분이 변할 수 있고 여러분이 새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다음은 회개의 글을 소개합니다.
“주님, 우리의 괴로운 호소를 들어주소서. 자기 속에 갇혀 죄수가 되어 있는 흉한 꼴에서 건져주소서. 자기 자신의 소리밖에 못 듣는 우리의 귀, 자신의 모습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 자신의 아픔밖에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무딘 감각을 세련되게 해주소서. 주님, 우리를 이 욕심스러운 몸에서 해방시켜주소서. 내 창자를 얼마나 채울 것인지, 나를 남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온종일 연구하는 이 욕심스러운 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소서. 주님, 우리를 이기적인 마음에서 풀어놓아 주소서. 내 마음은 내 생각, 내 아이디어, 내 의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의견은 들을 귀가 없으니 이러한 이기적인 마음에서 해방시켜주소서.”
주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주님을 입술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고 행하고 있습니까? 악한 영은 보이지 않는 환경의 배후에, 내 인격의 배후에, 삶의 부분 부분에 믿는 자나 교회에 나오는 자일지라도 두루 삼킬 자를 찾으며 나의 약점을 잘 알고 그것을 틈타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그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으로 채움 받을 때에 악한 죄, 환경, 자신, 사탄을 믿음으로 이겨 나갈 수 있으며 그래야 바른 삶, 능력 있는 삶, 이기는 삶을 살며 믿음생활에 새로운 경험이 시작되며, 참된 기쁨을 체험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활의 부분에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성령의 통제를 받는 성숙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수문장
눅 11장 24~26절 / 조용기목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빈 집의 우환’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집에 귀신들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 귀신들을 말끔히 다 내어쫓아 버리고 집을 정리하고 손질했는데 주인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집에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쫓겨난 귀신이 와 보고 그집에 주인이 없는 것을 알게되자 나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오니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흉악해졌더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집은 사람을 비유한 것이고 수리된 집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에 세상에 속해서 귀신과 함께 살고 귀신의 집이 되었던 사람이 회개하고 자복하고 다 귀신을 내어 쫓고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수선을 했으나 확실하게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있음을 말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받아 들였는데 아직 자기 중심에 서고 예수님을 확실하게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지킬 힘이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귀신을 대적해 이기지 못합니다. 주인되신 예수님이 확실히 마음에 와서 계시지 않기 때문에 세상 귀신이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오므로 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등지고 마귀의 종이 된 아담과 후손
오늘 인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등지고 마귀의 종이 된 아담 때문에 모든 비극이 우리에게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확실하게 주인으로 섬기며 에덴동산을 돌보고 지키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 되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지음을 받을 때부터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종이요, 머슴이요, 일꾼이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자기를 섬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 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에덴동산을 잘 다스려서 가꾸고 또 지키라고 했습니다.
원수가 오지 않는다면 지킬 필요가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벌써 마귀가 에덴동산을 침범해 올 것을 아시고 아담에게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에덴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마귀의 출입을 허락했습니다. 마귀가 수시로 에덴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도록 내버려 놓은 것입니다. 그 결과로 마귀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의 말을 좇아 마귀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을 주셨다 할지라도 그것을 잘 돌보고 가꾸고 지켜야만 유지되는 것입니다. 지키지 아니하면 마귀에게 도로 빼앗겨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 스스로를 마귀의 종으로 내어준 결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든지 마귀를 주인으로 받들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 23절로 24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덴에서 세상으로 쫓겨 나오는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마귀를 주인으로 섬기고 마귀의 종이 된 아담과 그 후손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버림받았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잃어 버리고 잘못된 종교와 귀신의 가르침을 좇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60억이 살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모두다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만 따라 사는 잃어버린 존재인 것입니다. 스스로의 존재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물건을 잃어버려도 안타까운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존재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자신을 잃어버린 존재에 불과합니다. 어린아이가 손에 맛있는 빵을 잔뜩 가지고 좋은 모자 쓰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구두를 신고 있으나 산중에 길을 잃어버리고 버림받았다면 그 아이가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의 실상을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장 28절로 3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이것이 오늘날 잃어버린 인생, 우상과 사신의 종이된 인간들의 도덕적인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3절에도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누굽니까?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던 사단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사단은 천사 3분의 1과 함께 쫓겨나서 공중에 자리를 배설하고 권세를 잡고 인류들을 점령하고 사단의 뜻대로 인간을 이끌어서 하나님을 반역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지 아니한 사람은 이 공중의 권세잡은 악의 영들에게 잡혀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2. 우리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 우리들이 어떻게 다시 복구될 수 있습니까? 사단의 종이 되어서 끌려가는 인생들은 세상에서 잘사는 것 같이 보여지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스스로 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단과 싸우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마귀와 싸워서 당신의 몸을 찢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악을 대속하시고 죄를 빌미로 해서 인간을 포로로 잡고 있는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해지하시고 율법을 철폐하시고 인간을 구출하는 대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5절로 10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은혜는 거저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을 잘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적으로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일하시고 짐을 짊어지시고 피땀을 흘리시고 고생을 하셔서 이루신 일을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내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부활하심으로써 실제 우리 속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신 이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폭력으로 그렇게 하셨습니까? 법과 질서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리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님을 희생제물로 바쳐서 몸을 찢으시고 피를 쏟게 하셔서 인류의 죄를 다 청산하게 하시고 난 다음 그 대속의 합법적인 기반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내고 사단의 올무에서 건져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빌미로 우리를 점령한 귀신을 쫓아내시고 사단의 무장을 해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그 이름과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 속사람을 깨끗게 하신 것입니다. 귀신과 마귀를 쫓아내시고 우리의 심신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로 15절에 우리 마음의 청소를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라는 것은 율법인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는 마귀의 정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주권과 마귀의 정부와 마귀의 무장을 다 해제해 버리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게 하심이라고 하셨는데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속에 있는 마귀의 일을 다 멸하여 버려 주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우리 영혼을 구원하여 길을 찾게 해주시고 우리 마음에 주님을 중심으로 섬기게 해주시고 그리스도의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모든 부정과 부패를 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다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지으신 다음에 아담과 하와에게 이를 가꾸고 지키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의 심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시고 난 다음에 이제는 우리 심신을 가꾸고 돌보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을 선물로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 자신을 가꾸고 돌보고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로 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마귀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마귀에게 끌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되고 자유를 얻었은즉 예수님의 이름과 그 보혈을 의지해서 우리 마음도 지키고 우리의 삶도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절대 주인으로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보혈로 씻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을 절대 주인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그냥 인본주의적으로 살면 일곱 귀신이 다시 찾아 오는 것입니다. 주인없는 집에 우환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든지 마귀를 주인으로 따라가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마음이 청소된 사람은 주인을 확실히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공명을 주인으로 삼고 우상으로 삼고 절하고 따라 다니면 일곱 귀신이 반드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늘 맺고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계명을 꼭 마음속에 지켜야 합니다. 계명이라는 것은 우리를 해치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키키 위해서 준 것입니다. 계명이라는 것이 괴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으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에 앞서 물질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십일조를 꼭 드리고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성수주일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늘 맺고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구만리 장천에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주인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으로 더불어 우리 속에 와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주소는 바로 우리의 주소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소는 내 주소요, 나의 주소는 하나님의 주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좋은 교통과 교제가 있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성수주일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로 27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비바람을 안 만날 수는 없지요. 언제든지 태풍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리 잘 정비해 놓으면 큰 홍수는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인생에 시험과 환난을 많이 만나게 되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면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훌륭한 수문장이 되라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가꾸고 마귀의 유혹과 침입을 막는 수문장이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성경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하셨으니 예수님을 모시고 의지하면서 내 스스로를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로 18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날 우리 스스로를 잘 지키기 위한 수문장의 무장을 알아봐야 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진리로 허리띠를 띠어야 합니다. 진리는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마음의 허리띠를 띠어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환상을 봤다’ ‘특별한 묵시를 받았다’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교회에 소속하지 않고 이름도 주소도 없는 산 기도원을 세워 놓고 또 기도처를 세워 놓고 자신이 신령하다고 하고 기도하고 계시받았다고 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마다 ‘당신은 십일조 도둑질했다’ ‘당신은 무슨 죄를 지었다’ ‘당신은 당장 돈을 얼마 가져와야 된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무리들이 우리 한국에 수없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에 속아 넘어가면 패가망신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진리의 말씀 위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 가지 계시와 환상과 마귀적인 예언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는 말씀에 비추어 보고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받아들이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의 흉배를 붙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용서와 의를 얻은 사실을 가슴에 명심해야 됩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율법적인 행위가 나쁘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엉터리 같은 공격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고 값없이 의로움을 얻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보혈을 의지하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진리를 마음속에 채워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육간에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것을 우리가 알고 믿고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용서와 구원과 천국을 예비해 놓지 않았습니까?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놓으셨으므로 그것을 우리가 신발로 신으면 됩니다. 신을 신는 것은 행위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와서 ‘너는 이제 망한다’ ‘너는 절망이다’ ‘ 너는 좌절이다’ ‘너는 이제는 끝장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셨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폭풍우가 불고 회오리 바람이 쳐도 내 앞길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나간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믿고 안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또 감각이나 이 세상 삶의 관습을 통하여 다가오는 의심이나 공포나 불신앙을 믿음의 방패로 이겨야 합니다. 마귀는 환경을 통해서 또 관습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의심을 갖게하고 불안에 떨게 만드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불안에 떨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기로 작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믿음으로 산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불안과 의심을 막아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우리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대속의 은혜인 오중복음으로 투구를 쓰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말미암아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용서와 의와 구원을 받았다’ ‘나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받았다’ ‘나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치료와 건강을 얻었다’ ‘나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부활과 영생과 천당을 얻은 사람이다’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오중복음은 하나님이 일하시고 짐을 지시고 피땀을 흘리셔서 이루어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의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에 끊임없이 부정적이고 좌절하고 절망적인 생각과 의심을 불어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의 전쟁에서 우리는 오중복음으로 무장하고 이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마귀가 추호도 틈타지 못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말씀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이나 감정이나 감각으로 싸워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일곱 귀신이 다가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으로 공격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했는데 이 강력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으로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문장은 언제나 그 마음가짐을 올바르게 해야 됩니다. 자기 힘으로 인생을 승리하고 살지 못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곁에 계시도록 한 것이 보혜사 성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늘 의지하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와 지금 같이 계신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성령 보혜사인 것입니다.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할지라도 성령은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를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돌보아 주고 어린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처럼 성령께서우리를 품고 우리를 돕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과 성령 보혜사,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어떤 마귀와 귀신보다 크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가장 강한 자가 우리와 같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안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만 역사하는 것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 일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는 자가 이렇게 이르노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내가 응답하겠고 너희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여 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게을리하면 안됩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로 36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그치면 영적으로 잠이 들고 마는 것입니다. 기도만이 영적인 잠에서 우리를 깨워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골로새서 4장 2절에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기도는 마귀와의 씨름이기 때문에 항상 힘이 듭니다. 그러나 기도를 해야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깨어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언제 마귀에게 잡힐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위기에 처했을 때 기도로써 우리를 지키고 영적인 전쟁에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행이 안 다가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시험과 환난도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전쟁에 이기면 우리속에 계신 자가 우리와 함께 역사하사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으로 무장해야 됩니다. 말씀이 영적인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하고 담대하여 원수를 대적하는 수문장이 되어야 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원수마귀가 오는 대로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잘 가꾸고 돌보고 지키면 어떠한 마귀도 우리에게 손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옛 에덴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며 마음을 잘 돌보고 가꾸며 확실하게 무장하고 마음을 지켜 다시 마귀가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하셔서 우리의 삶은 젖과 꿀이 흐르는 동산이 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 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온 세상이 마귀에게 속해서 사람들을 점령하고 영적으로 방향감각을 잃고 마음에는 무신론이 꽉 들어 차고 육체는 부정하며 희망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값주고 사주시고 마귀의 무장을 해제하시고 죄를 빌미로 포로잡은 마귀를 척결하시고 해방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고 성령과 동행하여 하나님이 예비한 모든 은총을 누리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내 영혼의 인테리어
눅 11장 24~26절 / 박근호목사
지난 주간 지구촌 뉴스의 초점은 노벨상 수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 화제의 인물은 올해의 노벨 화학상을 받음으로서 일본에 그 부문 3연 연속 수상의 신화를 이어간 서른 세살의 일본인 다나카 고이치 씨였습니다. 지금 일본 열도가 이 일로 인해 흥분과 감동의 도가니라고 합니다.
몇일 전 노벨 물리학상도 일본 모 대학 교수인 한 과학자가 받았는데 그때는 이런 반응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냥 받을 수 있는 자가 받았다는 차분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나카 씨가 박사도 아니고 석사도 아니며 또 유수한 일류대 출신도 아닌 지방대학 출신이며 시마즈 제작소라는 중소기업의 연구소 주임으로 일하는 연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역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140여명 중 138명이 박사이거나 대학교수였는데 그는 그런 출신도 아니고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전공은 전기공학인데 자기 전공과는 다른 화학상을 수상한 것입니다. 그는 회사에 취업해서부터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벨상을 탄 겁니다.
보통 사람의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실 있게 살아간 한 인생의 개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겐 그 어떤 화려한 간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고 일본인들은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온 일본 열도가 흥분의 도가니가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학사학위 정도로는 취업이 어려워 석사에 박사까지 받고도 제 길을 못 찾는 사회적 학력 낭비현상이 심하지 않습니까? 무늬만 대학생인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한 대학졸업자가 입사후 전공을 바꿔가며 연구해서 노벨상을 탈 수 있게 하는 일본의 과학교육 수준이 놀랍습니다. 그가 근무하는 회사가 중소기업이긴 하지만 130년의 전통에다 대학보다 더 학구적인 연구풍토를 가지고 있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요즈음 우리나라 의대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학과가 성형외과라고 합니다.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리는 병원이 성형외과라는 얘기입니다. 성형외과가 성행하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입니까?
서울 사는 어느 여집사님이 경험담입니다. 어느날 보니깐 자기가 사는 동네에 성형외과가 들어와 있더라는 겁니다. 시내 한복판도 아니고 사람이 붐비는 곳도 아닌 우리 동네에 어찌 이런 병원이 들어섰을까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이 집사님이 '우리 동네에서 저 병원 문을 두드릴 사람'을 한번 떠올려 보았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떠오르는 얼굴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빠삭한 또래의 다른 여집사에게 그런 자기의 느낌을 털어놨더니 그 여집사가 대뜸 '어디 딴 세상에서 왔느냐'며 웃더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요즈음 왠만큼 산다는 집치고 딸 얼굴 뜯어고치지 않는 집 없고 보톡스 주사 안 맞는 사람이 없다'라는 겁니다. 이 집사님이 '보톡스 주사'라는 말을 처음 들어서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주름살 펴는 주사'라고 하더랍니다. 원래는 그게 독인데 그걸 이용해서 각진 턱도 갸름하게 하고, 울퉁불퉁한 근육질 다리도 매끈하게 하고 주름살을 펴게 해서 눈가의 세월도 싸악 지워진다는 겁니다.
사실 요즈음 TV를 보면 아나운서나 탈렌트들 중에 표정이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을 느끼실 겁니다. 그게 다 피부를 당기고 턱을 깎고 입술을 도톰하게 만드는 성형수술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긴 이왕이면 예뻐보이고 젊어보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입니다. 이 사회가 예쁨과 젊음을 특별히 대접하는 그런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지금 맞고 있는 이 성형 열풍은 일종의 광기라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모가 인생을 결정한다'는 마술에 한꺼번에 걸려있습니다. 얼굴에 무슨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자기만의 매력을 가진 얼굴들인데 그런 얼굴에 칼을 대서는 아무 개성도 없는 이른바 '표준 얼굴'로 바꾸는 이런 바보같은 짓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게 올바른 시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한쪽에서는 주장합니다. 자신감이 없던 사람이 얼굴을 뜯어고침으로써 자신감을 얻는다면 그건 단지 육체적 성형이 아니라 정신적 치유행위가 되는 것이라고... 그러나 인간의 자신감이란 게 작은 눈을 큰 눈으로 바꾼다고, 콧대가 세워진다고 금방 회복될 만큼 단순한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머지않아 여성의 외모에 대한 생각과 기준이 바뀔 것이라는 겁니다. 여성 스스로가 자신감을 회복하게 됨에 따라 스스로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지 몸을 뜯어고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닌 겁니다. 잠언 기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어떤 여인이 진주보다 더 귀한 여인입니까? 그는 잠언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모를 바꾸는 데 있는 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고운 것? 다 거짓된 겁니다. 얼마나 덧씌우고 두드리고 그려넣은 것입니까? 아름다운 것? 다 헛된 겁니다. 그러므로 진정 아름다워지려면 조급한 마음으로 얼굴을 뜯어 고칠 게 아니라 속을 채워가야 하는 겁니다. 내면은 가꾸지 아니하고 외모만 신경쓰는 세상은 건강한 세상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영혼의 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건물'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의미합니다. 24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그랬습니다. 이건 회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회개는 자기중심이란 귀신을 쫓아내고 성령으로 모시어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회개가 일시적 현상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적지않다는 겁니다. 회개했다고 뉘우치고 눈물흘리는 순간은 갖는데 어느 순간에 다시 옛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더 심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회개란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돌아섰으면 뒤돌아보지 말고 새로운 방향으로 향해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되돌아서는 겁니다. 어느새 과거의 자기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주인이 바뀌지 않은 겁니다. 아니 쫓겨났던 옛주인이 다시 돌아온 겁니다.
회개가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다른 것에 의해 즉 새로운 영에 의해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이 더 강한 힘을 갖고 돌아와 옛 집을 점령하게 된다는 겁니다.
보십시오. 이 집은 깨끗하게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습니다.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말은 새로운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새주인을 맞고 새생활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손님을 맞질 않습니다. 그냥 비어져 있습니다. 그러자 나갔던 귀신이 다시 돌아와서는 그 집이 여전히 비어있는 것을 보고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영들'을 데리고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 '일곱 영들'이란 표현은 악과 부정의 전체성과 완전성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니 그 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그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하늘백성들은 끊임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전, 주님을 모시기 전 사탄의 지배를 받던 존재였습니다. 우리 속에서 우리를 주관하던 것은 사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반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실존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탄이 쫒겨나고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 중심에 내주하시며 우리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새사람이 되게 하신 겁니다. 이런 실존적 역사가 일어나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구원의 역사 중에 쫓겨난 사탄이 결코 쉽게 포기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사탄은 쫓겨난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순순히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24절 말씀처럼 자꾸 돌아옵니다.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자꾸 컴백을 하는 겁니다. 자꾸 와서 틈새를 엿보는 겁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집이 비어있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 안에 존재하시질 않는 겁니다. 그랬을 때에 저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함으로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안에 채워져 있어야 할 것이 채워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주인을 온전히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영혼의 집의 상태는 어떤 모습입니까? 무엇으로 그 집이 채워져 있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단장되어 있습니까?... 현대는 인테리어 시대요 디스플레이 시대입니다. 보이고 보여주는 시대입니다. 아주 아름답게 치장하고 가꾸고 드러내는 시대입니다. 성형 열풍도 그런 시대적 흐름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아바타 성형수술'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아바타(Avatar)'란 말은 화신(化身) 곧 '몸을 바꾼다'는 뜻인데 인터넷 속의 '나'가 바로 '아바타'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알몸에 가까운 '낯 뜨거운' 속옷 차림의 아바타로 사이버 공간을 헤매다가는 왕따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이 아바타에게 명품 브랜드 옷을 입히고 얼굴을 성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아바타 성형과 인테리어로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는 전문 디자인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아바타를 가꾸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바타 하나를 가꾸려면 2000∼3000원 정도가 듭니다. 커트, 염색 등 아바타의 머리를 치장하는데 500∼2000원이 듭니다. 그리고 옷은 10원에서 4500원, 장식 악세사리는 500원에서 1000원 정도... 그리고 단순한 치장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기본 캐릭터를 고치는 '아바타 성형'도 인기가 있어서 사이버 머니로 한 30만원이 있어야 성형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해서 얼굴을 바꾼 사용자도 전체의 30% 정도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런 세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고 그 고귀함이 진정한 고귀함인가 하는 것입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연구실습팀이 전국 여섯개 대학 교수팀과 함께 대학생 2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을 했는데 거기 소위 '명품 소비의식' 항목에서 이런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명품을 구입해 봤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33.2%가 `구입 경험이 있다'고 했고 모조품을 구입한 경험이 있다고 밝힌 응답자는 62.4%였습니다. 그러니까 97.2%가 명품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왜 구입했느냐'는 질문에는 `질이 좋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 이어서 `명품의 이미지와 디자인', `서비스', `유행', `사회적 지위' 등의 이유 때문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명품 오리지날을 구입한 경험이 있는 학생들 중 84%는 `명품 구입 후 만족했다'고 답했고 '불만족했다'는 응답은 3%에 그쳤습니다. 또 '향후 명품 구입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절반에 가까운 45%가 `필요하면 구입할 것'이라고 답했고, 38%는 `돈이 있다면 구입할 것이다' 그리고 2%는 `앞으로는 명품만 구입할 것'이라고 응답을 했습니다. `구입할 생각이 없다'는 응답은 12%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돈이 없을 때 사고 싶은 명품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43%가 포기한다고 답했지만 20%는 '살 때까지 돈을 모은다', 4%는 '신용카드로 일단 구입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도 시대의 조류에 발맞추어 명품을 하나 갖고 삽니다. '까르띠에'라는 시계인데 저도 하나 차고 집사람도 하나 찹니다. 한 300에서 500만원 정도하는 시계입니다. 그런데 진짜는 아니고 가짜, 이미테이션입니다. 제것은 인터넷 중고장터에서 엉겹결에 3만원에 산 것이고 집사람 것은 모양이 예뻐서 제가 10만원 주고 하나 사준 겁니다. 그런데 제 것은 작아서 차지 못하고 그냥 벗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니 명품을 차신 분들은 '우리 목사님네도 나와 같은 명품을 차는구나' 하고 동질감을 느끼시기 바라고, 명품을 못차신 분들은 '우리 목사님 명품은 짜가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들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이게 바로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는 바울의 목회비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회가 쉽지 않은 겁니다. 이 수준에도 맞춰야 하고 저 수준에도 맞춰야 하고... 어떻게 보면 삐에로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외형의 장식에는 신경을 많이 쓰면서 정작 내면의 장식에는 소홀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형을 하고, 명품을 걸치고, 집의 인테리어에 신경쓰며 살아도 정작 자신의 속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만큼 신경을 쓰고 가꾸고 사느냐는 겁니다.
때때로 집정리 하나 안해놓고 외모에 신경쓰며 나돌아다니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넌센스적인 이야기입니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게 아닙니다. 자기 몸부터 잘 가꾸어야 그 다음 가정을 돌볼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얼마 전부터 향수를 쓰고 있습니다. 전에는 왠지 사치스러운 것 같고 해서 누가 선물을 해도 쓰질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내가 향기를 발해야하는 사람'이라는 자기확인 같은 것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알아보니 한 3만원 정도면 적어도 1년은 쓸 수 있으니 하루 10원 정도의 투자 밖에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향수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향을 뿌려놓고 그 향을 맡으면서 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다. 이 향기만큼 좋은 삶의 향기를 이웃에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뿌려야지...'
우리가 이런 일상적 영성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신는 신발의 이름만큼 내 발걸음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울까... 내가 차는 시계의 값어치만큼 나의 시간관리는 하나님 앞에 멋진 것일까... 내가 사용하는 화장품의 브랜드만큼 나의 영혼다듬기는 하나님 앞에 어여쁜 것일까... 내가 끼고 있는 반지의 변치않음만큼 나의 하나님을 향한 약속은 신실한 것일까...'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영혼의 집에 삶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존재가 되도록 그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는 겁니다.
그 비결이 바로 성령충만이요 말씀충만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사탄은 늘 컴백합니다. 'I will be back', 그건 터미네이터가 늘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헝클어뜨려놓고 엉망진창이 되게 합니다. 한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오늘의 나의 삶이 헝클어져 있습니까? 어지럽습니까? 그건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말씀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별 수 없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무리 중의 한 여자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라고 외칠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대꾸하십니다. 여인의 외침은 외모에 초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외침은 내면에 초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영혼이 채워져 그 말씀을 지키며 사는 자, 그가 복이 있다...' 관점이 다르고 초점이 다릅니다. 우리의 삶의 관점과 초점은 어디에 맞춰져 있는 겁니까? 육체입니까, 영혼입니까?...
요즈음이 한 해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둘러보는 사방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다음 주 화요일에 갖는 청량산 산행에 많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건 저들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성형을 압니까, 꾸밈을 압니까. 그냥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겁니다. 가까이 다가서보면 결코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늙어갑니다. 쇠하여 갑니다. 그러나 거기에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겉꾸밈이나 저항없이 창조주의 섭리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사를 좀 바꾸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을 세상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채워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주는 순간의 쾌락보다도 위로부터 오는 진정한 희락을 누리는 삶을 맛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엇보다 '내 영혼의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다 헛될 뿐'입니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 그가 진정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겨울이 다가옵니다. 겨울 전에 우리 영혼의 집을 한번 대청소하십시다. 구석구석 더러운 것들, 쌓인 먼지들, 찌든 때들을 훌훌 다 털어내십시다. 그리고 성령을 모시고 말씀으로 그득 채워진 영혼으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을 다 털어버리고 복된 삶을 살아가십시다. 그리해서 여러분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좋아지는 은총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3절 말씀처럼 주님과 함께 일하고 주님과 함께 힘쓰는 여러분되셔서 이런 복된 은총이 오늘과 내일에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눅 11장 24~28절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 첫 절 바로 앞에 있는 23절에 보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시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 즉 귀신의 왕 혹은 마귀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자라고 몰아세운 적이 있습니다(눅11: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이 거짓이고 논리적으로 모순임을 지적하시며 그들을 공박하시고 자신을 오히려 바알세불을 굴복시키시고 무장해제하시는 더 강한 이로서 그와 대립하는 위치에 세우셨습니다(눅11:17-22). 그리고 하신 말씀이 바로 23절의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하신 것은 마귀의 세력과 이를 물리치시는 예수님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예수님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귀편도 아니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마귀의 권세에 맞서 싸우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사탄에 협력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며 따름으로써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모으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합력하지 않으면 곧 하나님나라 백성을 흩어지게 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4-26절은 예수님께서 23절 말씀의 의미를 다시 비유적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에게서 쫓겨 나간 더러운 귀신이 자기가 거할 만한 곳을 찾아다니다가 찾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는 와서 보고, 그 집이 깨끗이 청소되고 수리되기는 했는데 거기 들어와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살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나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은 중립지대로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거하시지 않으면 사탄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지 그냥 비어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으면 더러운 귀신을 다시 불러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한 귀신이 아니라 일곱 귀신 즉 온갖 귀신이 함께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삶의 상태는 전보다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논리적으로 대단히 설득력 있고 적대자들의 주장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파괴력이 큰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감동 받은 한 여인이 무리 중에서 소리쳤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쉬운 말로 하면 "뉘 집 아들이신지 참 훌륭하십니다. 선생님의 어머님은 얼마나 행복하시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소리친 그 말까지도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계속하실 기회와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28절 말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이 말씀 자체의 의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복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낳으셨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랐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사는 다윗의 자손 요셉의 약혼녀인 마리아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했습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하자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러자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그 말씀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눅1:26-38). 상식적으로는 믿을 수 없는 말씀을 듣고 믿었을 뿐 아니라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질 때에 그녀의 약혼자와 양가의 가족들과 주위사람들로부터 오해와 의심의 눈길과 비난과 냉대를 받을지 모르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몸을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 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러 갔을 때에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1:41) 마리아를 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1:45) 했다고 누가복음의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마리아의 복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데에 있음을 강조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본문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본문 27절은 "이 말씀을 하실 때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27-28절이 그 앞의 말씀과 긴밀히 연결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선 23-26절 말씀의 요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마귀의 세력과 이를 물리치시는 예수님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마귀의 권세에 맞서 싸우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지 않는 자이며 결과적으로 마귀의 역사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중립지대로 머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거하시지 않으면 마귀가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으면 더러운 귀신을 다시 불러들이게 되며 그 때에는 한 귀신이 아니라 온갖 귀신이 함께 들어와 우리의 마음과 삶의 상태가 전보다 더 악화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을 마귀의 권세가 다시 차지하지 못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거하시게 할 수 있는 길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 것입니다. 그 답을 예수님께서는 28절의 말씀을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알기만 할 뿐 아니라 그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청소하고 수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청소되고 수리된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마귀의 공격로부터 우리를 지켜내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하나님나라 백성의 모임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날마다 더 좋아지는 행복의 길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는 삶은 깨끗이 청소하고 수리한 후에 다시 더 더럽고 더욱 악한 귀신들이 들어와 우리를 다스리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는 삶은 결국 마귀의 편에 넘어가고 말 삶입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더 상황이 나쁠 것이라 했습니다. 실제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더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졌으면서도 말씀 따라 살지 않아온 사람들은 더 뺀질뺀질해서 돌려세우기가 힘듭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아는 사람들이 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종종 봅니다. 예를 들면 네 형제를 용서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말라고 하는 가르침을 일찍부터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못합니다.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개인적으로 "누구누구는 내가 절대로 용서 못해"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들은 것이 목사들에게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형제를 용서하기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욕하고 다니며 일러바치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복수하고야 말겠다고 이를 갈며 파당 만들고 자기 파당에 들지 않으면 왕따 만들고 못살게 구는 행태를 일삼으며, 그러지들 말라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해도 눈곱만치도 변화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나라 백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열심히 모으시는 백성을 헤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시험 들어서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일입니다. 마귀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려는 일을 거드는 일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일을 하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함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눅6:47-49에 보면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시고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다" 하셨고,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할 삶의 길을 가는 어리석고 불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만이 지혜롭고 영원히 안전하고 복된 삶의 길을 걷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종류의 땅에 뿌려진 씨의 비유를 통해서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눅8: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천국비유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보려고 찾아왔으나 많은 무리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밖에 서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말씀하시기를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기도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이라 일컬음을 받고 하나님나라의 식구가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삶이 아닌지를 냉철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달아 안대로 행하기를 힘쓰는 것이 진정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특히 그동안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품고 지냈던 모든 미움과 질시와 오해와 좋지 않은 감정과 독기 서린 말들을 깨끗이 걷어냄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청소되고 수리되기를 바랍니다. 그 청소되고 수리된 마음에 또 다시 더 악하고 독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언어가 들어차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신령한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은사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육적 혈통과 영적혈통
눅 11장 27~28절 / 김홍도목사
20여 년 전에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고 났더니 고향에서 제 부모님과 가까이 지내시던 분이 찾아와 은헤를 많이 받았다고 하시면서 본문의 말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한 말씀을 하시면서 “자당님은 참 복받은 분이다”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도 이런 인사를 하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말씀에는 얼마나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느 날 귀신에 대한 설교를 하시고 났더니 어떤 여자가 큰소리로 외치기를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했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복음 11장 28절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육적인 혈통보다 영적인 혈통이 더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6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날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에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들어와 전하기를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 서 있습니다” 하고 어서 만나보시라는 뜻의 말씀을 드리니까 예수님께서 말하는 사람에게 대답하시기를 “누가 내 모친이며 나의 동생들이냐” 하고 꾸짖듯이 말씀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12장 49~50절에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육신의 혈통(blood family)보다 영적인 혈통(spiritual family)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시는 말씀입니다. 육신은 잠시 살다가 죽으면 싸늘한 시체로 변하여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지고 맙니다. 피가 그렇게 중요하지만 숨이 멈추면 덥던 피가 싸늘해지고 썩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의 영혼은 영원한 것입니다. 천 년, 만 년이 아니라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영적 혈통이 천 배, 만 배 더 귀중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예수님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하신 말씀도 잠시 살다가 죽어버리고 마는 육신의 혈통보다 영원한 관계, 영적인 혈통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때에는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간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 살 때에는 이 세상에서 살던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이 함께 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함을 얻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게 되는 것이지 썩어 없어질 육신의 혈통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육신의 혈통보다 영원한 영적인 혈통을 더 귀중히 여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찬들의 삶을 보면 대부분이 잠깐 있다가 썩어 없어질 육신의 혈통을 소중히 여기며 삽니다. 그것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총선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지도급 목사님들이 국회를 복음화하고 정치에도 참가하여 정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한국기독당”을 창당해서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저는 한독당 창당을 반대하고 참여하지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세계적인 목사님들이 피땀 흘려 한 표를 부탁했는데 1,200만 성도라고 하는데 23만 표도 나오지 않아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고 단 한 석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육신의 혈통, 학연, 지연, 인맥을 중히 여겨서 설교할 때는 아멘, 아멘 해도 행동할 때는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한마디로 영적인 혈통보다 육신의 혈통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목사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육신의 고집대로 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라도 사람이 다음 대통령이 된다고 하면 크리스찬들도 다 그 당을 찍고 경상도 사람이 주권을 잡는다고 하면 무조건 그쪽을 찍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과 가까운 교제를 하는 면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해산 후에는 젖을 먹이고 품에 안고 키웠다는 점에서 얼마나 복된 여자입니까? 과연 “당신을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도다” 한 찬사는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을 낳고 젖 먹여 키우고 품에 안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뽀뽀를 했다고 해도 마리아도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으로 죄 사함 받지 않았다면 멸망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날마다 기도하며 주님과 교제하는 일이 더 복되고 귀중한 일입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과 함께 잠도 자면서 3년 동안이나 가깝게 교제하며 지냈는데도 영적으로 거듭나 주님과 한 가족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너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다”라고 책망을 받고 결국 영원한 멸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신 말씀은 지나친 말씀도 아니고 몰인정한 말씀도 아닙니다. 육신의 혈통보다 영적 혈통, 영적인 family line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2. 예수님을 알고 이해하는 면에서
예수님은 무슨 비밀이라도 모친 마리아에게 다 말씀드렸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비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외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어렸을 때 흙을 빚어서 새를 만들었는데 그 새가 살아서 푸드득 날아가는 것을 마리아가 보았다는 것입니다. 외경이니까 정경처럼 믿을 것은 못 되지만 어쨌든 예수님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그 마음을 잘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는 얼마나 복된 여자입니까?
그러나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했다고 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리아 때문에 예수님을 알았다고 하지도 않았고 마리아 때문에 3층천에 가보았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또 3층천에 올라가보고 온 바울만큼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영화가 좋긴 좋은데 마리아를 은근히 예수님보다 높이는 부분이 있어서 천주교인이 만든 작품의 특색이 나타나는 안 좋은 면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와 같은 죄인이고 성경을 보면 예수님 다음에 동생들을 낳았는데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신격화해서 거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4위일체로 생각하며 마리아 우상 앞에 절하기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십계명 중에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없애버렸습니다.
어쨌든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는 사람이 마리아보다 더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육신의 혈통보다 영적인 혈통이 더 중요합니다. 영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고 육신적인 것은 일시적이고 잠시 잠깐 후에는 끝나는 것인데 사람들은 썩어질 육신의 것만 따라가서 영원한 것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면에서도 영적으로 거듭나서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더 잘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주님을 아는 것이 마리아가 육신적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보다 더 깊이, 더 많이 아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돌보고 도와주는 면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젖 먹이고 밥을 먹여 키워준 면에서, 또 예수님의 부족을 채워준 면에서 참으로 복된 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예수님을 그렇게 가까이 모실 수 있다면 나는 집을 팔아서라도 잘 돌봐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돕는 것이나 주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영혼을 구원하고 선교하는 일을 돕는 것이 육신적으로 예수님을 도와드린 것보다 백 배, 천 배 더 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 이하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육신적으로 예수님을 돌보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드린 것보다 오늘날 영적으로 예수님을 돕고 예수님의 일 돕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됩니다.
4. 예수님께서 모친의 간청을 들어주신 일에 대하여
가나 혼인 잔칫집에 초청을 받아 갔을 때 그만 포도주가 다 떨어진 것을 보고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께 가서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고 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주라는 뜻으로 간청할 때에 처음에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들어줄 의사가 없으신 것처럼 대답하셨으나 돌항아리 여섯에 물을 가득히 채운 후에 그것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모친 마리아는 큰 특권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 복받은 여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거듭난 성도들은 이보다 더 큰 특권을 가졌습니다. 모친 마리아의 간청과 응답보다 더 큰일도 기도를 통하여 응답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하셨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셨고, 13절에는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고, 14절에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께 간청하여 응답 받은 특권보다 크리스찬 들이 영적으로 거듭나서 기도하여 응답 받는 특권이 더 큰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도 육신의 혈통보다 영적인 혈통(spiritual line)이 더 귀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5. 영적인 것을 더 귀중히 여기는 믿음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영적인 것을 더 귀중히 여기느냐 세상적인 것, 육신적인 것을 더 귀중히 여기느냐 하는 것을 관심 깊게 바라보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 즉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에 속한 것은 육신이 썩어질 때 없어지고 말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영원히 남는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의 혈통보다 영적인 혈통을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영의 음성을 듣고 혈육의 정을 끊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 가장 귀한 것, 자기 생명보다 귀한 것을 제단에 바칠 때에 하나님은 창세기 22장 16~17절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축복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의 혈통보다 영적 혈통을 더 귀중히 여긴 믿음의 모범이 된 사람입니다.
전에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를 척결할 때 많은 핍박을 받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자기가 나온 신학교의 교수를 내쫓느냐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살부지죄(殺父之罪)와 같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저는 “내 육신의 아버지가 이단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하더라도 나는 싸워서 척결했을 것이고 그 대신 육신의 아버지는 아버지로 잘 모셨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영적인 것을 더 귀중히 여기고 육신에 속한 것과 상충이 될 때에는 육신에 속한 것을 부인해야 주님 뜻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교수를 척결할 때 교단의 지도급 목사님, 감독님들이 이단교수 편을 들고 감싸고도는 바람에 큰 고통을 받고 지금도 척결하지 못하고 있는 이단교수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37절부터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 찾아왔다고 하실 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며 “나의 모친과 동생들을 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혈통에 속한 것은 잠시 있다가 죽으면 끝나지만 영적인 혈통에 속한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혈통을 부인할 때 부인하고 영적인 혈통을 앞세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듣고 지키는 자
눅 11장 27~28절 / 채규현목사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을 접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하나님.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접한 그 하나님에서 더 이상 진전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고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 하나님과 교제하는 관계 속에서 있습니다. 천국이 천국 됨은 많은 보석이 있어서가 아니고, 물이 흐르고 많은 나무가 있어서가 아니고, 어디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명이 우리와 연결이 될 때 그것을 비로소 우리에게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뒤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 되고,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 안에서 살아가야 됩니다. 점점 하나님을 아는 관계가 깊어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 좋은 뜻도 알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도 가지 못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할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시면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진정 천국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고 하면서도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가, 그것을 한번 잘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제일 첫 번째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인 하나님-하나님이 어떠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그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안 읽기 때문에, 성경을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요. 성경은 끊임없이 통독해 나가야 합니다. 한 번에 여러 장씩을 읽어서 전체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또 그 중의 일부는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혼자 할 것이 아니고 좀 더 성경을 조직적으로 하는 공부도 또한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는 바로 그 하나님이 수 천 년 전부터 인간을 만드시고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그 이후에, 인간이 죄를 지은 그 이후에도 어떠한 뜻을 가지고 계시는가, 인간이 수없이 다양한 반응을 보일 때에 그러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행하시는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성경에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부터 공부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내 삶속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고 하면서, 이리저리 예언하는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기도하면서 직통계시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뭐하려고 이 성경을 주셨겠습니까? 1,500년 기간 동안에 수십 명의 저자들을 통해서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기록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성경을 성경답게 보존하신 것도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을 때에 이해되게 하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주셔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제일 먼저 성경을 봐야죠. 성경을 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성경부터 읽고, 성경부터 묵상하고, 성경부터 외우고…, 이렇게 하면서 성경말씀을 좀 더 가까이 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참 이상한 책입니다. 성경은 성경을 몰라서는 성경이 이해가 안 됩니다. 성경의 다른 지식이 없으면 이렇게 한 두 구절을 읽어가지고 그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저도 처음에 예수님 믿을 때 저를 전도한 분이 제게 조언을 해서 누가복음부터 읽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처음 1장에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읽다가 포기하게 된다고 나중에 읽으라고 하셨고, 마가복음은 상당히 행동적인 복음이라 처음 읽으면 자칫 메마른 것처럼 보일 수가 있다고 해서 누가복음부터 보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감탄사도 많이 나오고 형용사도 많이 나오고 좀 다양한 표현이 있어서 재미있다는 거예요. 읽어보니까 정말 그래요. 그런데 중간에 모르는 것 투성이예요. 모르니까 그 분을 계속 좇아다니면서 성경 말씀을 물어봤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예수님 믿게 했으니까 A/S까지 끝까지 책임지라고 했습니다. 그 분들이 아는 것은 가르쳐 주고 모르는 것은 못 가르쳐줘요.
나중에 저한테 하는 말이 지금은 이해가 안 되더라도 우선 성경을 한번 읽어보라는 거예요. 한번 다 읽고 나서 그 다음에 읽으면 많이 이해가 될 거라고 해요. 실제로 다 읽고 또 오니까 훨씬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마치 성경은 몸 하나와 똑같기 때문이에요. 모든 말씀이 우리 몸이 연결된 것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유기적 통일성(organic unity)이라고 해요. 손끝이 벌에 쏘였을 때 손끝만 아픈 게 아니라 우리 몸이 다 아파요. 그 것이 유기적 연관성, 유기적 통일성입니다. 한 군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 전체의 지식을 동원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한 두 구절만 보고 그것만으로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지속적으로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이 수고와 땀이 있어야 하나님을 이해한단 말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사랑해서 결혼해도 사실 서로를 잘 모릅니다. 10년, 20년, 30년 살면서 비로소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것이죠. 그만큼 서로를 알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계속해서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상대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성경 말씀 모르는 게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계속 공부해야 됩니다. 여러분도 계속 공부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위해서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부한다는 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한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선 하나님에 관하여 먼저 공부는 해야 합니다. 이 공부를 안 하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처음에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 도대체 강의가 안 들려요. 어떡하면 강의가 들릴까 생각하다가, 그 다음에 미리 내일 할 것을 예습해 갔습니다. 책을 미리 보고, 모르는 단어도 찾고, 내용이 뭔지를 다 알고 갔습니다. 예습을 하고 가서 들으니까 이제 좀 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죠? 마찬가지로 그림도, 좀 아는 만큼 그림을 이해하는 것 같아요. 들리는 것도 아는 만큼 들려요. 꼭 같은 것은 아닌데,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이해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우선 공부를 해야 해요. 공부를 하는데 여러분이 분명히 이 두 가지는 구분을 해야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인 J. I. Packer(제임스 패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Knowing God」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말로도「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그 책에서 J. I. Packer라는 학자는 “오늘날 많은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는 많이 아는데 실제 하나님을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지식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백날 성경 공부해도 사람이 변하지를 않아요. 아무리 성경 공부를 많이 해도 성경의 지식만 늘어나지, 그것이 오히려 남을 비판하거나 무시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사람의 품성이 변화되는 능력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변화되는 품성은 하나님을 만나야 돼요.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가운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게 달라요. 그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아!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구나.’ 하면서 그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성경에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나오면 ‘내가 믿는 하나님이 치료하는 하나님이구나.’ 하면서 그 하나님께 치료를 위해서 간구하고, 내 병이 아니면 다른 사람의 병을 위해서 함께 간구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게 필요해요. 우리가 양육 훈련하고 제자 훈련하는 그 모든 것도 물론 한 가지는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그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면의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목적으로 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큐티(Q.T)도 하고…. 어떤 사람을 보면 참 답답해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전혀 하나님과의 대면이 없어요. 그게 큐티를 하게 되면 나타납니다. 큐티하고 나눠보면 그 분은 답답해요. 하나님과의 대면이 없어요. 하나님 안에서 내 마음에 은혜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에 관해서만 논의하기를 좋아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내게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로 이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잘못 되었을 때 하나님께 쉽게 나아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혹시 지난날의 어떤 죄가 있을 때, 지금 현재 죄적인 삶을 살 때에, 아직도 회개하지 않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지나치게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거나, 이럴 때에 하나님을 쉽게 경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무서우니까 가까이 못 가는 것입니다. 실제 하나님은 모든 믿는 백성들에게 무서운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믿는 백성은 하나같이 죄인입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죄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믿어서 우리의 죄 된 것을 보지 않을 뿐이지 우리의 수준은 내내 죄적인 수준입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죄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죄지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죄를 지었을 때, 내가 잘못되었을 때 더 빨리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씻음을 받고, 다시 새 출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할 때도 보면 전혀 하나님에 대해서 엉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복음을 전하면 “아, 좋지요. 나가야 되죠. 그런데 죄가 워낙 죄가 많아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현재 지금 제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이 있거든요(대개 술 먹거나 담배 피거나 그런 일들이에요). 그거 해결하고 가야죠.”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러한 것을 진짜 해결하려는 능력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되죠. 나오기 전에는 해결이 안 되죠. 은혜를 받으면 저절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은혜 없이 내가 억지로 하려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담배 끊는 것, 하나님께 맡기세요. 술 끊는 것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제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술 끊어라, 담배 끊어라.” 별로 이야기한 기억이 없습니다. 은혜 받으면 끊어요. 집사가 되려면 끊어야죠.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그렇게 말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먼저 받아야 되니까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변화될 능력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의식, 열등의식, 이런 것들도 하나님 앞에 먼저 어떻게든 나와야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나오기 전에는 해결이 안 됩니다.
해결하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오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잘못했다고 관계가 끊어집니까? 잘못되어도 끊어질 수가 없죠. 그래도 사랑하며 기다립니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사랑하며 기다립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행사가 있어서 갔더니, 쟁쟁한 목사님들도 많이 모여 있고 목사님 방에 다 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목사님들이 많이 모여 있는 데에는 성도님들이 얼씬도 안 해요. 그런데 옆의 문이 빼곡하게 열리면서 조그만 아이가 하나 들어옵니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살금살금 가더니 냉장고를 열고 콜라 하나를 싹 가져가더라고요. 그 교회 목사님의 막내딸이에요. 그 아이한테는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이 안 보여요. 자기 아버지 방이에요. 곧잘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누구 쳐다도 안 보고 관계없이 왔다 가는 거예요. 그 엄마 되는 사모님은 그 아이한테 아버지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그렇게 교육을 하나 봐요. 그런데도 엄마 눈만 피하면 아버지 방에 들어와서 마실 것 하나씩 가져가는 거예요. 그냥 목사님 방이라면 누가 그렇게 들어오겠습니까? 들어올 수가 없죠. 아버지 방이니까 들어오는 겁니다. 마찬가지에요. 잘했건 잘못했건 하나님이 나를 자녀라고 부르신다면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께 매달리고….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주님께 매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분의 자녀이니까, 그 분의 아들 그 분의 딸이니까요. 우린 너무 점잖게 하나님 믿는 것 같아요. 제가 처음 예수님 믿을 때에 학교 안에 신앙인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우리 한국 학생들도 있었고 미국 학생들도 있었어요. 기도회를 매주 하는데, 각자 기도 제목을 놓고 같이 기도하는데, 한 친구가 갔다 와서 황당해 하면서 왔어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하는데 너무 미안해서, 구하는 것을 좀 절제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 친구는 뭐라고 기도제목을 내 놓았냐면 “제가 이번 학기에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오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제목을 내 놓았는데, 미국 학생 하나가 “하나님, 제가 차가 없는데 공짜로 자동차 한 대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더래요.
그러니까 ‘아무리 뻔뻔해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온 거예요. 어떻게 공짜 차를 달라고 하냐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 한국 사람들은 너무 하나님 앞에 점잖게 예수님 믿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면을 뒤집어 보면 그게 이해가 가요. 아버지니까 차 사달라고 하죠. 대학 다니는 우리 아들도 차 고장 났다고 저한테 차 사달라고 그래요. 왜 저한테 그러겠어요? 그 아이는 분명히 공짜 차 사달라고 하는 것 아니에요? 아버지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맞아요. 하나님께 공짜 차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요. 그것보다 더 큰 것도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어요. 왜요? 아버지니까요. 하나님께 너무 격식 차려가면서 나가지 맙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서,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오히려 더 쉽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을 자녀로 두신 하나님입니다.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교제하시기를 원하실 때, 여러분의 현재 상태를 보고 돌아서지 마십시오. 그냥 주님 앞에 가십시오. 계속 밖으로 도는 사람은 영원히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믿음이 마찬가지에요. 열심을 내서 주님을 붙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모를 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잘못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으니까 하나님 뜻을 알지 못하고, 세 번째는 알려고 해도 훈련이 안 되어 있을 때 하나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어느 날 갑자기 주님 앞에 앉아서 하나님 뜻 알겠다고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가 제대로 되나. 잘 안 됩니다. 이것이 계속적으로 좀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훈련은 대개 혼자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렇게 훈련이 잘 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프로그램을 합니다. 양육 프로그램도 있고, 계절용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훈련시키는 거예요. 말씀도 가르치지만 하나님과 대면하는 법을, 내 경험도 이야기하고 함께 나누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서는 장로님들 참 은혜롭습니다. 지금 제자훈련, 장로님들이 제일 앞서 있어요. 사역훈련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역훈련 할 때 지난 봄 학기에 로마서 8장을 다 외웠습니다. 한 주에 서 너 구절 씩 외워가면서 8장을 다 외웠습니다. 그런데 외우면서 우리 장로님들과 함께 느낀 것이 많습니다. 그냥 읽을 때 보다 외우니까 완전히 말씀이 달라져요. 제가 성경 말씀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해 드리고, 그 이해한 가운데서 외우니까 그 말씀 하나 하나가 계속 은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이 훈련이 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삶의 변화가 거기에서도 올 수가 있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이야기해요. “아, 제자훈련…, 암송만 없으면 좋겠다.” 그런데 암송 없는 제자훈련은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암송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까 그것을 통해서, 그것을 매체로 해서 하나님과 교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점점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적절한 때에, 특정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요. 그래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살아있는 교제, 생명의 교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훈련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어려움이 따릅니다. 훈련이 뭡니까? 습관이 안 된 것을 새로운 습관으로 만들 때까지 계속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훈련입니다. 금년의 우리 교회 표어가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가르침의 목적은 지키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 지킬 때는 어떻게 해요? 하여튼 귀에 박히게 가르쳐야 해요. 지킬 때 까지요. 그게 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육’이라는 말보다 ‘훈련’이라는 말을 더 좋아해요. 왜냐하면 훈련을 습관을 바꾸는 거니까요. 교육은 잘못하면 정보의 전달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훈련이에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훈련,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 이 훈련을 계속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비로소 점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알아지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순종하려는 결단입니다. 말씀도 순종하려는 자세로 성경을 읽어야 이해되고, 실제로 순종을 해 봐야 이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순종해 봐야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알게 돼요. 성경에 수많은 하나님의 명령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명령은 초점이 그 명령을 지키는 행함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행함을 통해서 관계-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저 사람과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것을 혼동해요. 이것을 혼동한 사람이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이에요. ‘내가 이것을 행함으로 복 받는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부모님이 심부름을 시킵니다. “가게에 갔다 와라.” “아니, 나 싫은데, 나 지금 텔레비전 이거 봐야 하는데.” “갔다 와. 갔다 오면 천원 줄게.” 그러면 가기 싫어도 천원 받기 위해서 가게 심부름 갔다 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할 때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 어렵고 힘들고 지키기 힘들지만 이것을 지켜야 천원-복을 받으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는가?’이겁니다. 그 뜻이 아니에요. 많은 경우에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열심히 하나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돈도 주실 것이고, 내가 원하는 지위도 주실 것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형통하게 하시리라.’ 그게 아닙니다. 여기에서 복은 “내가 A라는 행동을 하면 내가 원하는 B라는 축복을 주시리라.” 그게 아닙니다. A라는 행동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봅시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지키기 조금 힘들죠? ‘원수’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는 원수는 없어.’ 하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러분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과의 관계가 문제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다 넓은 의미에서 원수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 관계를 다 회복시키라는 겁니다. 그 잘못된 관계, 서로 미워할 수밖에 없는 그 관계조차도 먼저 그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계를 회복해야 내게 천국이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왜 스트레스 쌓입니까? 항상 인간관계에서 고민하니까 스트레스 받아요.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평안함을 못 누립니까? 거의 대부분이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평안함을 못 누리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은 사탄이 속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국가별 행복지수를 볼 때 1위가 방글라데시에요. 스스로 자기들이 생각할 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오히려 훨씬 하위권에 드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들이에요.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제일 높은 나라가 스웨덴, 노르웨이라는 말입니다. 있고 없고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서 행복할 때 우리는 행복한 것인데, 그 관계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되죠. 하고 싶지도 않죠.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주님 앞에 서 보십시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제가 목사로서 언제가 제일 괴로웠냐면 제가 제일 사랑을 쏟아 부은 사람에게서 배신당할 때, 그때가 제일 괴롭더라고요. 처음부터 저에게 막 나쁘게 말하면서 괴롭힌 사람은 괜찮아요. 마음으로 접고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려니 하고 불쌍하게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막 사랑을 쏟아 부었는데 그 사람에게서 배신당했다고 느낄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사랑을 부은 만큼 정신이 없어요. 기도도 안 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이 배신감에 미움으로 막 가슴이 끓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목사에게 목사의 목을 죄는 것은 점점 주일이 다가온다는 겁니다. 마음이 이런 상태로 이 영광스러운 강단에 설 수가 없어요. 누군가와 마음이 거리낀 상태로 제가 여기 설 수가 없습니다. 그 전에 해결해야 될 것 아니에요? 제가 뭔가, 누군가에게 미운 마음으로 여기 서면, 사람은 영물이라 묘하게 이게 전달이 되요. 제가 그것을 전염시킨다니까요. 그것을 다 녹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리는데, 너무 마음이 그러니까 기도도 안 돼요. 다리도 쭉 뻗고 퍼져 있으면서 “주여…!” 할 말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참 있다가 “주여…!”하고는 또 가만히 있어요. 이렇게 며칠을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갑자기 마음을 탁 치는 생각이 있었어요. 주님께서 제 마음에 주신 말씀이 “너는 나한테 뭐냐?” 하시는 겁니다. “네? 저는 지금 이 사람 때문에 지금 기도하고 있는데 너는 나한테 뭐냐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예수님께 웬수에요, 웬수. 주님께 잘못하고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의 호의를 접고 다른 길로 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거예요. 그게 막 갑자기 생각이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의 관계는 젖혀놓고 주님께 실컷 회개하고 울었어요. 얼마만큼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된 존재였던가를 실컷 회개하고 나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나한테 하라는 게 아니고 먼저 그게 하나님의 품성이더라고요.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실 때에는 이미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한 분입니다. 여러분이 다 하나님의 원수였어요. 하나님을 떠나가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원수 된 우리, 끊임없이 원수 된 우리에게 주님이 다가오셔서 생명까지 주셨잖아요? 그것을 일반적으로만 이야기했는데, 내가 그렇다는 것을 그 날 확 느끼기 시작한 겁니다. 실컷 회개하고 나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한 것은 내가 주님한테 한 것에 비하면 새 발에 피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용서하려고 막 억지로 할 게 없어요. 저절로 이미 없어진 거예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어떡하든지 지키려고 하는 가운데,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주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관계도 그냥 회복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몰라요, 저 혼자 그냥 가슴이 뭉그러진거지. 제 마음 다 해결되고 그 다음부터는 사랑으로 안을 수 있게 됐어요. 그 뒤로도 몇 번씩 그러한 사건들이 있는데 이제는 마음에 그런 면에서 굳은살이 딱 박혀서 아프지도 않아요. ‘원래 사람이 그런 존재지, 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시험도 안 들어요. 원수가 안 만들어지니까 세상이 너무 편해요. 그게 최고의 축복이라고 느끼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원수가 크면 클수록, 그 원수를 용서하기 힘들면 힘들수록 나를 용서하신 주님의 마음이 그만큼 이해됩니다. 내가 경험하는 만큼 경험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만큼 경험하고 나면 저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원수 될 일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 마음에서 녹아지기 시작하니까 마음이 편한 거예요.
천국이 임하게 되고 ‘아, 하나님이 이래서 내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거구나.’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면 ‘하나님, 제가 약 먹었습니까? 저 사람을 사랑하게….’ 이런 생각밖에 안 들어요. ‘왜 하나님은 제게 손해 보는 짓을 하라고 합니까?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왜 나만 사랑해야 합니까? 왜 나만 손해 봐야 합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혀 손해 보는 것이 없어요. 내가 꿋꿋이 용서하지 않을 때 나만 괴롭지 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말씀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서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순종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가 없습니다. 깊이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셔서 복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29절에 보면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특히 순종하는 면에서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어요.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니느웨로 안 가고 다시스로 갑니다. 가다가 죽을 뻔했죠? 돌이켜서 하나님 뜻에 순종할 때 다시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원래 죽은 목숨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듣고 돌이켜서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할 때에 그 속에 진정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한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순종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점점 그 속에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이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이 새롭게 바뀔 거라 이겁니다. 그냥 ‘하나님 뜻도 모르겠다, 알려고도 안 한다. 그냥 내 맘대로 산다.’ 그렇게 생명 없는 삶 살지 마십시오.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그 심령 속에 성령께서 흔들면서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라고요. 그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말씀을 보면서 그 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하시고, 열심히 그러한 훈련을 통해서 순종하려는 각오를 하면서 이 훈련에 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실제 삶 속에서 천국으로 역사하실 줄을 믿습니다. 바로 이 은혜가 충만한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