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햇살이 창문의 유리를 통과하여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녀들이 열심히 닦은 가구들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3일이나 자고 있던 소년의 눈꺼풀이 나비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소년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밝아지며 하얀 천장이 보였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방 안을 훑어보았다.
하얀 휘장이 쳐진 침대 밖으로 어렴풋하게 가구들이 보였다.
소년은 경계심으로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상처 하나 없이 말짱한 몸을 살펴보자니 떠올리기 싫은 일이 떠올랐다.
- 더러운 놈.......
- 피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이 주제에......... 왕족의 피가 반쯤 흐른다고 잘난 체 하지 마!
- 네 녀석이 고귀한 왕족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걸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린다. 죽어버려!
- 혼혈아 주제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 앞으로는 절대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해주마.
머릿속을 스쳐가는 장면들과 독기어린 목소리들이 심장을 쿡쿡 찔렀다.
소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과거의 고통이 하나, 둘씩 되살아나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때.
- 내가 죽일만한 가치가.........네게 있긴 하냐? 난 살릴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만 살리고, 죽일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만 죽이거든.
기억 속에서 하얀 소녀가 떠올랐다.
‘이름이 리체, 그러니까 베아트리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가늘고 고운 은발이 마치 은을 녹여 뽑아낸 것 같아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보랏빛 눈동자도.
벌컥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진 소년을 일깨우는 소리가 났다.
소년은 열려 있는 문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하얀 옷자락과 고급스러운 신발이 보였다.
“어라? 깨어 있었네.”
긴 은발의 소녀가 소년을 보고 놀란 듯 중얼거렸다.
소년은 낯이 익은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너는.........”
소녀는 경계심에 잔뜩 곤두선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경계하지 말라는 듯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어, 3일 만에 깨어난 소감이 어때?”
소녀는 친근한 이를 대하듯 가벼운 표정으로 물었다.
소년은 다른 것보다 ‘3일 만에 깨어난’이라는 말에 흠칫 놀랐다.
오랫동안 자고 있었던 탓에 시간 감각이 많이 깨어져 있는 터라 3일이 훌쩍 지나버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금방 적응하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기는 어디지?”
“대신전이야. 내가 마족의 아이들에게 왕창 당하고 쓰러져 있던 너를 치료하고 여기까지 업어서 데려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고맙게 생각해.”
소년은 저도 모르게 ‘거짓말’이라고 하려다 말았다.
그가 보기에 소녀에게는 그의 가볍지 않았던 상처를 치료할 만한 능력이 없어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가느다랗기만 한 손목으로 보아 소년을 업을 만한 힘은커녕 화분 하나 들 만한 힘도 없을 것 같았다.
“방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
소녀가 가늘게 뜬 눈으로 소년을 흘겨보며 따지듯 물었다.
소년은 왠지 ‘그래.’라고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소녀가 눈썹을 꿈틀했다.
콩!
“아얏!”
소년은 얼얼한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며 소녀를 노려보았다.
소녀는 그의 눈빛이 가소롭다는 듯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린 것이 누구 앞에서 거짓말이야?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나 정도 되면 너 같은 어린애들 생각 읽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야.”
“무슨.........너 죽고 싶어?”
화가 난 소년이 으르렁거리며 이불을 치우고 침대 아래로 내려와 소녀를 노려보았다.
소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콩!
“윽!”
방심했다가 두 번째로 꿀밤을 얻어맞은 소년은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미 한 번 맞았던 자리를 또 맞았기에 더욱 얼얼해서 눈앞에 별이 보일 지경이었다.
“야!”
소년이 소리를 높이며 소녀의 머리카락을 잡아채었다.
소녀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놔! 안 놔? 이게.........또 맞고 싶어?”
“먼저 손을 휘두른 건 너야.”
“웃기시네! 난 네 은인이자 주인이니까 널 때려도 돼! 하지만 네가 이러는 건 엄밀히 말해서 하극상이라고!”
“뭐.........?”
소년은 기가 막혀서 소녀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그의 기억 속 어디에도 소녀가 그의 주인이 되는 장면이 없었기에 황당함이 밀려왔다.
“네가 왜 내 주인인데?”
“내가 쓰러져 있던 널 주웠으니까. 원래 떨어져 있는 물건은 먼저 주운 사람이 임자잖아, 안 그래?”
“..........아니, 뭐 이런 구제불능의 인간이.........”
“난 네 주인이라니까? 말 곱게 써.”
“흥, 싫은데? 난 네 노예 따위가 아니거든.”
이번에는 소녀의 얼굴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봐, 내가 널 주웠다니까? 너에게는 거부할 권리가 없어.”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지. 내가 왜 한낱 인간의 것이 되어야 한단 말이야?”
“내가 말했잖아. 쓰러져 있던 널 치료한 게 바로 나라고. 그러니까 네 생명은 내 거야.”
소년은 뺨을 실룩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얽혀들었다.
“내가 치료해달라고 한 적 없잖아. 그렇다고 날 주워 달라 한 적도 없지, 안 그래? 네가 날 살려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겠지만, 너를 내 주인으로 여길 순 없겠어.”
“뭐라?”
소녀의 입술이 비틀렸다.
소년은 순간적으로 오싹한 느낌이 드는 바람에 움찔했다.
소녀의 손이 움직였다.
소년은 소녀가 자신을 향해 손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언제든지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몸을 긴장시켰다.
“아으─! 이런 은혜도 모르는 까마귀 자식! 괜히 살렸어─.”
긴장했던 소년이 무안하게도, 소녀의 손은 그녀의 머리로 향했다.
소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발을 굴렀다.
그러고는 소년을 노려보았다.
“너, 다시 산송장으로 돌아가.”
“뭐?”
다소 치사함이 느껴지는 말에 소년이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소녀는 팔짱을 끼고 비뚤어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살려주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든지, 내게 은혜를 갚든지 선택해. 난 대가도 안 받고 누군가를 살려주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공짜로 살아난 너를 그냥 둘 수가 없어.”
“무슨 그런 치사한.........”
“치사한 게 아니라 꼼꼼하게 잘 챙기는 거야. 원래 나 같은 사람이 나중에 성공한다고들 하지.”
소년은 말을 잃고 한숨만 쉬었다.
어이없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지만 소녀에게 도움을 받은 처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좋아. 네가 내 주인이니 어쩌니 하지 않는다면 은혜는 갚겠어. 됐지?”
“응.”
소녀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활짝 펴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조금쯤 마음속의 불편함을 풀었다.
그때 소녀가 입을 열었다.
“자, 은혜 갚기의 시작은 주스 한 잔 가져오기야. 어서 주스를 가져와. 덤으로 주방장이 구워서 숨겨둔 빵도 티 안 나게 한, 두 개만 훔쳐서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