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2차대전 후에 제국주의국가들의 식민지들이 하나하나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영국이 점령한 이란은 그 중 한나라 였는데 2차대전 당시에는 영국군의 주둔지겸 군사원유 공급지 였다.동시에 이란인들로 고용된 군인들도 영국의 지휘하에 이탈리아와 독일의 아프리카 전투부대와 전투를 벌이던 나라이다.
영국이 이나라에서 가고 무하마드 모사데가 대통령에 오른다.국가주의 적인 그는 영국과 미국의 석유 기업들의 개발에 의해 만들어진 석유산업을 국가소유로 만들었다.
그러자 미국의 CIA는 아이잭스 게획을 세우고 그를 제거 한뒤 1960년대 무하마드 팔레비 샤 왕이라는 미국의 꼬봉을 왕의 자리에 올린다.그러나 그역시 석유를 혼자서 독차지 하려 하자 이번에는 당시 샤에게 쫓기던 아야톨리 호매이니를 보내어 정치쿠테타를 벌이게 도와준다.물론 이때도 CIA가 추측이 되었다.
호매이니가 이란으로 오기전 미 CIA는 이라크의 후세인의 바트당이 여당을 이길수 있게 8억달러상당의 지원금을 지원하였다.그리고 1968년 이라크의 후세인은 이라크의 독재자가 된다.
그리고 미CIA는 여러차레 후세인과 만나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한다.그리고 후세인은 CIA의 빌려준 자금으로 당시 남미 지역에서 CIA가 운행하는 카딜락 공사라는 화학회사에서 독가스나 탄저균등을 구입하여 자국내 쿠르드 난민을 학살하는데 사용하여왔다.
미국이나 국제 기구들은 이러한 사실을 일반에 알리지 않았으며 언론등도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였다.
그리고 1980년 후세인에게 이란이 호매이니라는 이슬람주의자로 인해 샤정권이 붕괴되고 이란의 형세가 약해지니 이란을 침공하라는 지시를 미국이 간접적으로 전한다.
그러자 후세인은 알았다면 이란을 침공하는데 이 이란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어서 전쟁은 8년동안 질질끌다 끝이난다.
이란 이라크 전쟁으로 모든것을 잃은 후세인은 쿠웨이트의 유전을 탐내게 된다.그리고 이때부터 걸프전의 내막은 시작된다고 할수 있다.
걸프전쟁 1991년에 일어난 이전쟁은 당시 초등생이던 내가 뉴스시간에 발을 놓지 못하게하는 사건이며 후세인,부시,스커드,패트로이트라는 단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그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행정부들은 모두 텍사스에 석유회사의 사주이거나 대주주 혹은 그 석유회사의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는데 유념하여야 한다.조지 부시 전대통령 역시 텍사스석유기업의 사주이며 당시 국무장관 제임스 배이커도 마찬가지 였다.
1991년 7월 조지 부시 대통령은 영국의 랭커스터하우스라는 곳에서 나토 회의를 열게된다.그리고 런던 선언을 하게 되는데 다음과 같은 발표문을 연설하였다.
"과거 구소련의 압박을 받고 있던 동유럽 여러국가들이 구소련 정권이 붕괴되어 이젠 우리들과 함꼐 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이들의 나토 영입을 추진하며 동시에 우리 나토군의 군사작전 범위를 유럽과 북대서양에서 중동으로 늘리기 로 하였다."
이것의 소위 이른바 치외범위에서의 군사 확장 이라는 런던선언으로 이 회의의 결과가 만장일치로 처리되아서 나토군이 걸프전때 중동에 파견될수있었던 것이다.
1991년 7월 17일 주 이라크 미대사관의 에이프릴 크리스린 대사가 사담 후세인대통령을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희 대통령께서는 당신나라와 이웃국가들의 대립에 개입하지 않으며 그럴 생각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라크를 벗어나 여행을 떠났다고 하며 당시에는 이라크군인들이 쿠웨이트 국경지에 상당수 배치되어있던 상황이었다.
1991년 7월 20일 미 대통령 조지 부시와 당시 국무장관 제임스 배이커 ,국가 안보 고문이던 배런트 스코티프코티 CIA국장 윌리엄 웹스터은 비밀회의를 열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때 러시아가 개입하지 않게 해달라고 고르바쵸프에게 보낼 서안을 작성한다.
7월 28일 CIA전용기인 SR-71 기 4대를 타고 제임스 배이커와 배런트 스코티프코티는 미하일 고르바쵸프와 만나 회의를 하고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때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온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종사였던 해군 정보 요원이 1991년 12월에 밝힌것으로 당시 작성된 개선된 쿠웨이트의 향후 미군 민간업무에 관한 보고서 라는 것이 1991년 12월에 공개되었는데 이것은 제임스 배이커 국무장관이 기록한것으로 어떻게 하면 쿠웨이트의 노후된 유전을 많이 파괴하고 전후 쿠웨이트 유전의 일부를 다국적 석유기업들에게 넘길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이것은 현재 공개보고서로 되어있다.
그리고 1991년 8월 2일 걸프전이 시작된다.한 미국의 하원의원과 반국가행위 조사자들은 1992년에 걸프전의 숨겨진 내막을 알기 위하여 조사 한 결과 1989년 미국은 이라크에게 수십억 달러를 지원해준것으로 되어있었다.미국의 거대 은행은 사담 후세인에게 돈을 백악관이 보증을 써서 빌려주었다고 하였다.그리고 백악관은 후세인이 그돈으로 미국산 농산물을 산다는 보증하에 빌려준것이라 하였다.그러나 후세인은 그돈으로 이란이나 이집트에서온 구소련 무기를 구입하고 있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쿠웨이트 쪽으로 가지 않았다.바로 옆국가인 사우디에 군대를 파견하였다.그결과 쿠웨이트의 유전 상당수가 이라크군대에 의해 파괴되었고 세계 유가는 폭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조지 부시와 배이커등은 올라가는 유가를 보고 좋아했었을리 틀림없다.
걸프전이 시작되고 미군이 주둔한 시기는 몇주일 밖에 되지 않는다.이라크군은 모두 쿠르즈 미사일과 B2 스텔스 폭격기의 공격과 아파치 헬기의 공격으로 모두 진압되었다.사우디에 주둔중이던 미군병사는 그냥 소풍이나 나온것이었다.
전후 미군측 사상자는 없었다.대신 이라크 희생자의 수는 1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한때 미국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후세인은 이전쟁으로 인해 미국무부가 지정한 테러지원국가라는 낙인을 받게 되며 CNN이나 서구 언론등은 모두 이라크의 후세인 독재자를 비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글을 보고 과연 걸프전이 단순히 후세인이 쿠웨이트 유전을 차지 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생각하기를 바란다.
한가지 확신할수 있는것은 미국의 진정한 우방국은 없다는 말이다.영국,프랑스,독일등 일부국가만이 미국의 우호국이며 나머지 국가는 미국의 이득에 위반이 되면 바로 테러국가로 지목되어버린다.
첫댓글 역시는 역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