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노송, 정영 스님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다. 넘어야 할 산도 많고 건너야 할 강도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렵고 힘든 일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온전하게 지키고 산다는 것이며, 처음 세운 뜻을 마지막까지 변질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특히 뜻을 세워 출가한 수행자가 일평생 한눈팔지 않고 외길을 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며 또한 값진 일이다. 일평생을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출가하여 사문이 된 이후는 오로지 수행자의 외길만을 걸어온 분이 있다.
정영 스님은 언제 보아도 웃는 얼굴이다. 나는 그 분 곁에 있으면 한없는 평화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더없이 높게만 여겨지는 산이고 넓은 바다다.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다. 사람의 향기는 코로 맡는 향기가 아니다. 사람의 향기는 마음으로만 맡을 수 있는 향기다. 인격이 고매하고 학처럼 고고한 사람에게서만 맡을 수 잇는 향기다. 나는 늘 정영 스님의 향기에 취한다. 그 향기는 교만하여 잘난 체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독하고 매운 향내가 아니다. 흡사 오월의 산과 들에서 피어나는 찔레꽃의 순하디 순한 향기다.
올해로 세수 예순 여섯 살인 스님은 산 언저리쯤에 홀로 서서 지나가는 나그네의 피곤한 다리에 쉼터가 되고, 무더운 여름날 들에서 일하다 더위를 식히는 농부의 그늘이 되어주는 노송과 같은 분이다.
우거진 숲 속의 나무가 아니라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고독한 노송, 그 분에게서는 항상 외롭고 쓸쓸한 수행자의 고독이 진하게 느껴진다. 정영 스님은 나의 큰 사형님이시다. 그러나 나는 이 분에게서 은사 스님께 받지 못한 부분, 이를테면 수행자로서의 자세라든지 마음 씀씀이 같은 것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말하건대 나는 현존하는 스님들 중에서 이 분만큼 훌륭한 스님을 보지 못했다. 내가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분이다.
나는 수행 중에 어려움을 만나 갈등을 겪고 있을 때마다 정영 스님이 무심히 던지는 한마디 말에서 큰 힘을 얻곤 했다.
1980년 10. 27 법난이 있은 후였다. 나는 그 때 토굴에서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신문도 안 보고 방송도 안 들어서 10. 27법난이 있었다는 사실을 몇 달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사실 나는 5.10 광주 항쟁도 소문으로만 알았다.
산 속 토굴에서 도를 닦고 있는 그 순간에 세상에는 가공스러운 역사의 격변이 있었던 것이다. 뒷날 나는 이 문제로 인해 심한 갈등과 고뇌에서 헤어나지 못한 적이 있다.
그 때 정영 스님은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했다. “진실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뜨는 법이다.”
너무나 평이하고 간단 한 이 말이 나에게는 답답한 가슴을 탁 틔게 해주는 감로의 말씀이었다. 어떤 선지식의 활구 법문보다 더 기운찬 사자후의 말씀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지금 당장 내가 몸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 진실은 잠들고 요괴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설쳐대고 있다.
스님은 일생을 병고와 싸워 오신 분이다. 전에 경북 문경군 소재 김룡사의 금대라는 암자에서 토굴 생활을 오랫동안 하셨다. 본래부터 키가 크고 목이 길어 폐를 약하게 타고 나신 데다가 먹는 것이 부실한 탓으로 영양실조에 걸려 가슴앓이 병이 더욱 깊어졌다. 병원에서는 폐 속에 동전만한 구멍이 두 개가 생겨났다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가 회복이 어려운 중증이라고 하여 걱정했는데 병원에 두어 달 입원 치료를 받는 등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때 인천에 있는 하은자 보살의 간호와 치료비 등의 보시가 있었다. 스님에게는 유일한 신도며 재가 제자다.
스님은 이북이 고향이다. 집안은 중농 정도의 살림에 형제가 많았다. 아버지는 매우 근면하셨으며, 할아버지는 서당의 훈장을 하셔서 인근 고을에 가지 제자들이 많이 있는 학자였다고 한다. 민족의 역사적 수난은 스님에게도 인생의 큰 불행 하나를 안겨 주었다. 국토가 분단되면서 홀홀 단신 혼자 몸으로 서울에 남게 되었다. 6. 25사변 직후라 사회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타향에서 일가친척 하나 없이 혼자 고학으로 대학을 다녀야만 했던 스님은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었다고 한다. 잠시 후면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고향의 부모는 지금까지도 영영 이별이 되었고, 스님은 배를 굶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언젠가 한번은 스님을 모시고 서울 창경궁엘 구경 간 일이 있었다. 그 때 스님은 옛날 고학으로 고생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요일이면 가정교사 일도 쉬고 하여 갈 곳이 없어서 창경원에 와서 풀밭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주린 배를 달래며 낮잠을 잤다고 한다. 한번은 따뜻한 봄날이었는데 일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싸와서 풀어놓고 먹으면서 놀고 있었다. 학생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는 같이 먹자고 하더란다.
그래서 그 날은 배불리 음식을 얻어먹었다고 하면서 그 때의 고마움과 당시 사람들의 인심을 그리워했다.
스님은 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지금도 수학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학문이라고 가끔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상공부 특채 시험에 합격하여 고급 공무원 노릇도 잠시 하셨다. 그러나 당시는 자유당 시절이라 공무원 사회는 부정과 부패가 심했다고 한다. 그것을 또한 견디기 힘들었다. 당시 스님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장관이 국비 장학금을 지원할 테니 외국 유학을 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중, 고등학교 교사로 직업을 바꾸었다. 하지만 교직자 사회도 부패하기는 마찬가지더라는 것이다. 다시 무역 회사에 조금 다니다가 이내 출가하여 스님이 되셨다고 한다.
언젠가 나에게 “나는 사회가 부패한 것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사람인데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 보니 절집안은 더욱 혼탁한 것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그렇더라도 나는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고 하면 역시 스님을 할 것이지만 불교 이 외의 학문을 선택해야 한다면 수학이고 다음이 음악이다. 수학은 가장 정직한 학문이며 음악은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라고도 하셨다.
언젠가 태백산 각화사라는 절의 주지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 때 은사이신 소천 노스님으로부터 주지 자리를 그만두고 당신의 처소에 와서 살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즉시 주지직을 사임했다. 그 이후로는 한번도 주지를 하신 일이 없다. 실로 생각해보면 주지도 하고 복수용을 했더라면 몸의 건강도 돌보며 편안하고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정하고 결백한 성품이 수행자로서의 삶 이외의 어떤 것도 허용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생을 고독하고 청빈한 삶을 사셨다.
경북 상주 남장사의 중궁암에 계실 때다. 그 때 나도 잠깐 모시고 살았는데 나는 당시 아동문학 같은 것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마음을 기울여 공부를 해 볼 생각을 했었다.
하루는 나를 불러 하시는 말씀이 이랬다. “동쪽으로 가운 나무는 동쪽으로 넘어지는 법이다.” 사문된 자, 어디까지나 불도수행에만 전념할 일이요, 딴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자의 학문이란 사용처를 따져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의 학문도 뒷날 써먹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겠거늘 출가한 사림이야 따로 말할 것이 무엇이냐? 근자 너의 공부하는 태도를 절에서 살펴보니 우려되는 점이 많았는데 이제 보니 무슨 아동문학을 한다고 하는구나.
이는 공부를 도구로 삼아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하는 말이다.”
지금도 이 말씀을 늘 마음에 새겨두고 있다. 나는 스님 곁에 있으면 평상의 삶 속에서 큰 깨우침을 얻는다. 자상한 마음 씀씀이와 동서고금을 꿰뚫어 보시는 해박한 지식은 항상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해 주신다. 이제 스님은 세속 나이 육십의 중반을 넘기셨다. 평소 쇠약한지라 몸에는 살점 하나 없이 깡마르고 기운은 이미 쇠잔해졌다. 내가 처음 스님을 뵌 때가 이십 전의 청소년기였는데 벌써 나도 귀 밑에 흰머리가 보이는 불혹을 몇 년이나 넘어선 나이가 되었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간다. 수행자의 청춘과 인생도 세월 따라 한 점 구름같이 흘러가는 것이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정영 스님도 나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아무리 수행자의 길이 고달프더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은 구도의 열정과 신심의 순수성이다.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