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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무상사(學無常師)
배움에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뜻으로, 누구든 장점이 있으면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學 : 배울 학(子/13)
無 : 없을 무(灬/8)
常 : 항상 상(巾/8)
師 : 스승 사(巾/7)
출전 : 논어(論語) 자장(子張)
위(衞)나라 대부 공손조(公孫朝)가 공자(孔子)는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는지가 궁금해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에게 물었는데, 자공은 공자의 스승이 없다는 대답을 했다.
위(衛)나라 공손조(公孫朝)가 자공(子貢)에게 물었다. '중니(仲尼)는 어디에서 배웠소?'
衞公孫朝問於子貢曰 : 仲尼焉學?
자공이 말했다. '주(周)나라 문(文)왕과 무(武)왕이 걸어가신 길(道)이 아직 땅에 떨어져 없어지지 않았고 그 세례를 받은 사람이 남아있습니다. 현자라면 그 문화의 핵심을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문화의 자잘한 조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문임금과 무임금이 걸어가신 길(道)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어디서인들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또 어찌 영원한 스승이 따로 있겠습니까?'
子貢曰 :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
자공의 말, '어찌 영원한 스승이 따로 있겠습니까?'에서 학무상사(學無常師)가 유래했다.
학무상사(學無常師)
비전의 스승은 없다.
모든 걸 가르쳐주는 절대적인 스승은 없다.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는 일도 중요하다.
배우기는 '나' 밖에 있는 것을 '나' 안으로 가져오는 정신적 활동이다. 배움은 다른 어떤 정신적 활동보다 어렵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의미를 깨치고 완전히 나의 것으로 소화시키려면 실패와 좌절을 맛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거나 생각을 깊이 하는 등의 배움과 연관된 활동을 학교를 떠난 후엔 '먹고살기 바빠서 그만두었다' 라고들 말한다.
배움이 학교 안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학교를 떠난 뒤에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언행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배울 수 있고 인문학을 접하며 '아직도 만나지 못한 나'를 찾을 수 있다.
학교 졸업 이후에 배움을 관두기 때문에, 우리는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있고 올바르고 행복한 삶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공자도 학교만을 다니고 졸업 이후에 배우지 않았다면 동아시아 문명에서 '최초의 스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논어(論語) 자장편(子張篇) 22章
(二十二章)
衞公孫朝問於子貢曰 : 仲尼焉學?
위(衛)나라 공손 조(朝)가 자공에게 물었다. '당신의 스승 중니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子貢曰 :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
자공이 대답했다. '주(周)나라의 건국 영웅 문(文)임금과 무(武)임금이 걸으신 길이, 아직 땅에 떨어져 없어지지 않았고,
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현인이라면 그 문화의 핵심을 기억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이라도 문화의 자잘한 조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임금과 무임금이 걸으신 길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어디인들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또 어떻게 영원한 스승이 따로 있었겠습니까?'
(家苑 註)
공자가 모르는 것이 없다는 소문이 자자하자 위나라의 대부가 사신으로 온 자공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도대체 공자는 누구를 스승으로 삼았기에 그리도 많이 아는가?' 하고 묻자 자공이 답하는 내용이다.
자공의 답변은 자한편 5장에서, '문왕이 이미 돌아가시니 문(文)이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文王 旣沒 文不在玆乎)'라는 공자 말씀의 연장선상이다.
훗날에 자사가 중용에, '중니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할아버지로 지으시고, 문왕과 무왕을 법으로 문장하시며, 위로는 하늘의 때를 법으로 삼으시고, 아래로는 수토를 익히셨니라(仲尼祖述堯舜 憲章文武 上律天時 下襲水土)'라고 쓴 것과 비슷하다.
곧 옛날 요순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도가 문왕과 무왕 때에 크게 발현되었고, 그 내용들이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전해져왔기에 스승인 공자께서 어느 곳에서인들 배우지 않았겠으며, 어느 누구인들 스승이 아니었겠느냐는 반문이다.
'일정하게 이 사람이 스승이다' 하고 내세울 수 없을 뿐이다. 더욱이 문무의 도는 하늘의 음양의 도에 기초하고 땅에 나타난 오행의 이치를 따른 것이기에 천지자연의 모든 것이 스승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에 대해 술이편 19장에서, '나는 나면서 아는 자가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민첩함으로써 구하는 자라(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고 했고, 공야장편 27장에서,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도다(不如丘之好學也)'고 했다.
또한 술이편 21장에서, '세 사람이 감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그 불선한 자가 있으면 고친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라고 하여 반면교사도 배우는데 일조하였으니 어느 곳에선들 배우지 아니함이 없었던 것이다.
(朱子)
公孫朝는 衛大夫니라
공손조는 위나라 대부니라.
文武之道는 謂文王武王之謨訓功烈과 與凡周之禮樂文章이 皆是也라
문무의 도(道)는 문왕 무왕의 가르침과 훈계함과 공(功)과 열렬함과 더불어 무릇 주나라의 예악과 문장이 다 이것이라.
在人은 言人有能記之者라
사람에게 있다는 것은 사람이 능히 기록한 것이 있음이라.
識는 記也라
지(識)는 기록함이라.
(釋)
*公孫朝(공손조) : '公孫朝'는 위(衛) 나라의 고위 공직자에 해당되는 대부(大夫) 신분이다.
*文(문) : '文'은 주나라 건국의 기틀을 닦은 문(文)임금을 가리킨다.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창(昌)이다. 그는 당시 은나라에 상응하는 군사력과 정치력을 지녔지만 은나라와의 전면전을 벌이지 않았다.
*武(무) : '武'는 주나라의 왕업을 이룩한 무(武)임금을 가리킨다.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발(發)이다. 그는 동쪽 강태공과 연합하여 당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은나라를 목야(牧野)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墜(추) : '墜'는 떨어지다, 영향력이 없다의 뜻이다.
*於(어) : '於'는 어조사로 뜻이 없는데, 장소 앞에 쓰이면 ~에서, 비교 앞에 쓰이면 ~보다를 나타낸다.
*識(지) : '識'은 '알다', '기억하다'의 뜻이면 '식'으로 읽고, '기록하다', '적다'의 뜻이면 '지'로 읽는다.
*學無常師(학무상사) : '學無常師'는 원문에 없지만 제일 마지막 구절을 새롭게 조합해서 널리는 쓰이게 된 말이다. 배움의 길에는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언제나 이끌어주는 절대적 선생은 없다는 말이다. 원효와 지눌 등 독창적인 세계를 개척한 사람들의 학문을 상징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자유로운 교육과 출세의 도구
공자는 학문이 이해와 욕망 등의 세속적 가치로만 환원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으로 회귀하여 심신을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올바름을 옮겨야 한다고 보았다.
공자는 교육과 관련해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공자 이전에 교육은 왕실에서 왕족과 귀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품위를 유지하고 세계를 관리하는 일종의 제왕학(帝王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오경(五經)' 중 하나인 '역경(易經)'은 바로 이러한 제왕 교육을 위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은 과거로부터 집성된 기성의 지혜를 특별히 제왕의 후보자에게 전해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공개되지 않는 지혜를 비밀리에 전수하는 형태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오경'이 인도의 초기 철학을 담은 문헌으로 널리 알려진 우파니샤드(Upanisad)와 상통하는 지점이다. 우파니샤드는 대부분 스승과 제자의 문답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사제 간에 무릎을 맞대고 가까이 앉음'이란 뜻이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은 학생이 스승이 앉은 자리에 가까이 앉아 스승에게 직접 전수받는 신비한 지식을 뜻하게 되었다.
공자는 관료의 길이 확정되지 않는 민간의 젊은이를 상대로 질문과 탐구를 통해 진리를 찾아갔다. 이런 측면에서 공자의 교육은 이전 오경과 우파니샤드의 교육과는 다른 질적 차이를 갖는 반면 플라톤의 교육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 중에는 관직 진출을 위해 전문 능력과 경력을 쌓기 위해 공자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론 관직 진출을 아예 접고 학문 자체를 위한 학문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공자는 학문과 정치의 선순환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학문 자체의 즐거움에 매료된 제자를 바라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공자는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자유롭게 진리를 탐구하는 민간인 중의 지자(智者)였다. 아울러 공자 학교는 플라톤이 그리스 아테네에 세웠던 아카데메이아(Acadēmeia)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공자의 교육과 학문이 후대의 그것과 달라지는 측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공자는 교육에서 자유로운 학문 탐구를 중시했다.
반면 그의 학문이 한 제국에서 관료 진출을 위한 지침서가 되고 송(宋) 제국 이후의 과거 시험에서 필수 교재로 되면서 자유로운 특성을 잃게 되었다. 학자보다 관료의 특성이 부각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현실 정치의 참여를 배제하지 않지만 학문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현실의 정치가 학문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으면 두 세계의 긴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제국이 수립된 뒤로 공자의 학문을 현실에 실현하고자 했던 유자(儒者)들은 현실 정치의 참여를 지상 목표로 설정하면서 정치에 의한 학문의 종속을 가져왔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자들은 과거 합격을 위한 학문과 성인(聖人)되기를 위한 학문을 엄격하게 구분하고서 '현실 정치로부터 거리'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들은 거리를 확보하는 논리를 '논어'에서 찾았다.
논어 헌문편 25장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의 영혼을 돌보려고 했지만 오늘날의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돌보려고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얼핏 생각하면 남을 위한 공부가 뭐가 그리 나쁘냐고 의아하게 여길 수 있다. 여기서 초점은 배워서 남을 돕느냐 돕지 않느냐에 있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공자는 학문이 이해와 욕망 등의 세속적 가치로만 환원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으로 회귀하여 심신을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올바름을 옮겨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학문관은 송나라 이후 과거제가 실시되면서 다소 흔들리기도 했다. 예컨대 주희(朱熹)나 이황(李滉)과 같은 바로 공자의 후배들도 과거 공부가 출세의 수단이며 당파의 이익을 지키는 도구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그들은 과거가 더 이상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아니라 위인지학(爲人之學)에 불과하다며 출사를 포기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남명 조식(曺植)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조식은 관직이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회가 아니라 사화(士禍)처럼 정쟁으로 변해버린 것에 실망했다.
아울러 그는 관직에 있지 않기 때문에 현실 정치가 유교의 이상과 어긋날 때 과감하게 상소를 올려 시정을 요구했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명종을 대신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조식은 문정왕후를 '과부'라 부르며 현실 정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단성소 丹城疏)
공자와 노자의 만남
공자는 신도 아니고 신의 대리인(사자)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다. 그는 도대체 누구로부터 무엇을 배워서 고대 사회에 면면히 내려오던 지식의 물길을 통합해 낼 수 있었을까? 이 물음은 오늘날 사람도 묻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 당시 사람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위나라의 공손조는 그렇게 궁금해 하던 사람을 대표해서 질문을 던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을 풀어주는 이야기가 '사기'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 나온다.
노자는 주(周)나라 왕실 도서관을 관리하던 사관으로 재직했다. 공자는 주나라 뤄양(洛陽)으로 가서 노자를 만나 예(禮)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조선시대 중기 노숙한 이황과 신예 이이의 만남처럼 많은 관심과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공자가 예(禮)에 대해 질문하자 노자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한 수 지도를 하듯이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성현이란 이미 죽어서 몸과 뼈가 썩어버렸고 단지 말만 전해질 뿐이다. (…) 그대는 교만과 탐욕, 허세와 탐욕을 버리도록 하시오. 이러한 욕망은 모두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요. 내가 그대에게 해줄 말은 다만 이것뿐이오.'
압축적으로 말하므로 말의 양은 작지만 뜻은 깊다. 공자가 말하는 성현은 이미 죽고 말만 남았다는 것은 애지중지 여길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아울러 공자가 자신의 가치를 믿고 세상을 구하겠다고 덤비는 것도 어리석다는 말이다.
공자는 노자의 말을 듣고서 풀이 죽거나 기가 꺾이지 않았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만남의 결과를 제자들에게 전했다.
공자가 이르기를, '달리는 동물은 그물로 잡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로 잡고 나는 새는 화살로 잡을 수 있다. 용은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을 오르니 나는 용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오늘 내가 노자를 만나니 그는 마치 용과 같은 사람이구나!' 라고 했다.
공자가 노자를 만났느냐를 둘러싸고 믿을 수 있다, 없다는 논란이 있다. 설혹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하더라도 공자는 노자에게서 무엇을 배웠다고 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의 가치와 방향이 워낙 달랐던 터라 공자는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더욱 단단하게 벼릴 수 있을지언정 새로운 것을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자는 젊어서부터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람을 찾아가 물었다. 또 그는 '세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그 속에 나의 스승이 있다'고 말하듯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 사람이 모두 공자의 스승인 셈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제자들이 공자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어떤 시점과 수준에 이르면 더 나아가지 않고 답보 상태를 보인다. 좋은 질문은 지적 자극을 주기에 충분한 요소이다. 적절한 질문을 받으면 그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기존의 지식에서 답을 찾으면 질문은 그 자체로 해결되지만 답을 찾지 못하면 기존의 지식을 철저하게 재검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재검토는 공자로 하여금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진리를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그래서 가르치기와 배우기가 완전히 다른 별도의 과정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시경' 열명(說命) 편에서 '효학반(斅學半)'이라고 하고, '예기' 학기(學記) 편에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 다 가르치기와 배우기가 서로 맞물려 있고 선생과 학생이 모두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후생가외(後生可畏), 편집을 넘어 창조로
공자는 사람이 개인과 공동체의 범위에서 올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교육 영역'에 포함했다.
오늘날 우리는 분명히 전인 교육이나 인성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현실에서는 내신, 수능 등에서 좋은 성적을 얻게 하는 선생님이 가장 좋은 선생님일 것이다.
내신에 필요하다고 하면 단시간 안에 뜀틀, 줄넘기, 공놀이까지 배우느라 과외 선생님을 찾는다. 이 때문에 학교 선생님보다 학원 선생님의 말이 더 중요시되고 있다.
우리가 교육의 영역을 오직 성적이라는 좁은 방식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오늘날 우리와 달리 교육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만큼 넓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교육 영역'에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거나 고전을 읽어낼 수 있는 학습 능력을 기르는 것만을 포함하지 않았다.
공자는 사람이 개인과 공동체의 범위에서 올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교육 영역'에 포함했다. 이처럼 교육의 영역이 넓다 보니 학교라는 교육이 특정한 공간, 생업에 종사하기 이전의 특정한 시간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온전한 인격을 가꾸는 존재로 살아가려면 자연히 평생 교육을 해야 하고, 내가 겪는 모든 상황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나를 가르쳐주는 외부의 선생만이 아니라 나의 갈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내부의 선생을 만나게 된다.
내부의 선생은 지금까지 있었던 선배들의 성과와 정보를 암송하거나 편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상황을 개척하려면 분류와 편집이 아니라 파괴와 창조의 작업이 필요하다.
아울러 후배는 선배가 걸어간 삶을 밑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선배는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후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후생가외(後生可畏)인 것이다.
공자는 자신이 모든 것이 할 수 없고 후배들에 의해 다음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노자는 공자의 스승이었을까?
공자, 노자를 만나다
子曰 :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저절로 다스린 이는 순임금이시라. 대저 무엇을 하셨겠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하시어 임금의 자리를 지키셨을 뿐이다.'
(위령공편 4장)
1. 공자의 스승
공자는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묵묵히 이해할 뿐(默而識之; 술이편 2장), 결코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그의 지식은 저절로 밖으로 드러났다. 수십년을 함께 한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 아닐까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는 제자들이 타고난 재능을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할까 염려하여 자주 이렇게 말했다.
공야장편 27장, '열 집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나만큼 성실하고 신의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술이편 19장, '나는 결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하는 자일 뿐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어떤 이들은 공자의 학문적 배경과 교수법의 원천을 궁금해 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런 의문을 가진 제자들에게 진지하게 말하곤 했다.
술이편 23장, '그대들은 내가 감춰놓고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 하시는가? 나는 결코 그런 일이 없네.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나, 구(丘)의 본 모습일세(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공자에게는 따로 계통을 지을만한 스승이 없었다는 사실을 종내 믿으려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공자 자신도 이런 질문이 종종 지겨웠던지 자한편 6장에서, '어려서 비천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것 저것 줏어들은게 많았지(吾少也賤 故多能鄙事)'라고 말하며 웃어넘기곤 했다.
누군가 그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을 때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술이편 21장,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스승을 삼을 만한 사람이 있는 법, 좋은 점을 보면 본받아 배우고 나쁜 점을 보면 반성하면서 배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스승이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을 때는 이렇게 말했다.
위정편 11장,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안다면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훗날 제자 자공은 공자가 학문적 문파가 없음을 의아해 하는 어떤 자와 이런 대화를 남겼다.
자장편 22장에서, 위나라 대부 공손조가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어디서 배웠습니까(仲尼焉學)?'
자공이 이르기를, '문왕과 무왕의 가르침이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그 가운데 큰 것을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작은 것을 배우게 되지요. 위대한 성현의 도가 없는 곳이 없는데, 왜 선생님이 배울 곳이 없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따로 스승이 없으셨습니다(子貢曰 文武之道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
2. 노자는 공자의 스승인가?
자공의 분명한 회고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공자에게 스승이 있었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공자에게 예(禮)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사람은 노자(老子)라고 존칭되는 어떤 인물이다. 훗날 도가(道家)에 의해 자신들의 비조(鼻祖)로 추앙된 바로 그 철인(哲人)이다.
노자가 공자의 스승이었다는 설은 노자를 높이고 공자를 낮추려던 도가 우위 시대의 산물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사상투쟁이 낳은 조작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노자가 '공자의 동시대인으로 실존한 인물'이라는 믿음은 매우 오래동안 지속되었다.
어떤 설화가 생겨나 수천년을 전승할 때는 반드시 그럴만한 '실체적 진실'이 계기가 되었기 마련이다. 나도 그 '설화의 실체적 기원'이 궁금하여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전설의 진원(震源)과 진위(眞僞)를 추적한 적이 있다.
동양사상의 양대 거봉인 공자와 노자는 정말로 조우한 적이 있는가? 그랬다면 두 사람은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을까? 노자는 역사와 설화가 공히 전하는 '노담(老聃)'이라는 바로 그 인물인가? 이 이야기는 이런 궁금증을 좇아 중원 일대를 떠돈 한 늙은 순례자의 후일담이다.
3. 공자가 존경한 노팽
공자가 따로 스승이 없이 대성(大聖)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공자 생전에도 그렇고, 사후의 사람들에게도 매우 경이롭게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자의 어록과 행적을 근거로 공자가 영향을 받았음직한 사람들을 꼽아보기도 했다.
공자가 고대 관제(官制)에 밝은 것은 젊어서 담자(毯子)에게 배운 탓이고, 음악에 정통한 것은 장홍(萇弘)과 사양자(師襄子)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또 공자가 존경한 현자로는 주(周)나라의 노자(老子), 위나라의 거백옥(거伯玉), 제나라의 안평중(晏平仲; 안영), 초나라의 노래자(老萊子), 정나라의 자산(子産), 노나라의 맹공작(孟公綽) 등이 꼽혔다.
이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사람이 '노자(老子)'이다. '노자'는 열거된 현자(賢者) 가운데 유일하게 실존 자체가 의문시되는 사람임에도, 공자에게 직접 '예(禮)를 가르치고, 일종의 도덕적 각성까지 촉구한 언술을 남긴 사람'으로 사서(史書)에까지 올라 있다.
게다가 유가와 쌍벽을 이룬 도가(道家)의 비조로 추존되고 있으니, 만약 그가 공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사상을 교류하였다면 이는 인류문화사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후대 사람들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정작 공자의 어록에는 노자라는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논어'에는 이름이 비슷해 후대의 일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바로 노자가 아닐까 추정한 노팽(老彭)이라는 사람이 딱 한번 등장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술이편 1장에서, '서술하되 짓지 않음은 옛 것을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니, 나는 이를 몰래 우리 노팽과 견주어보노라.(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내가 노팽이라는 사람에 대해 고제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유사(儒士) 출신의 제자들은 대개 이 노팽이라는 '고대인'을 알고 있었다. '노팽은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고대 무축(巫祝; 원시 제정일치 사회의 군장이자 제사장. 무당의 원류)의 한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열명의 대무(大巫) 중 네번째 서열을 가진 무팽(巫彭)이란 분이며, 축도문을 낭송하고 이를 전승하는 집단인 사무(史巫)의 원조격이다. 고천의식(告天儀式)을 치를 때 훌륭한 무사(巫史)는 하늘의 뜻을 정확히 전달할 뿐, 사사로히 의미를 더하거나 빼지 않았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위대한 전통은 여기서 비롯되었으니, 선생님께서는 저 위대한 현자에 당신의 구도(求道) 정신을 견주어 겸손하게 자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노팽(老彭)의 노는 무팽(巫彭)의 존칭인가요?'
'노(老)란 나이가 많고 경험과 지식이 풍부해 남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을 뜻하지. 주 왕실에서도 임금의 스승을 '삼로(三老)'라 했다. 여러 제후국에서도 주나라의 예를 따라 종종 '나라의 삼로(三老)를 존중한다'며 고을의 현명한 노인들을 우대하였는데, 이때의 '삼로' 역시 '나이 많은 현자들'을 가리켰다.'
노팽이 노자가 아니라면 노자는 그러면 누구를 존칭하는 것인가?
4. 사실(事實)과 사실(史實)
공자의 어록에 언급이 없음에도, 노자라는 사람이 존재하여 공자에게 예를 전수했다는 이른바 '문례(問禮)설화'가 역사적 사실로 공인된 데는 역사가 사마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사마천은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사서에 노자를 실존인물로 다룬 후부터 사마천을 신뢰하는 후학들이 대부분 그 기록을 따랐다.
만약 사마천이 문례설화를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면, 공자와 노자의 조우(遭遇)설은 필시 하나의 '설'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기 공자세가에서, 노나라의 남궁경숙(南宮敬叔)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자 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 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낙양)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는 이때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사기 노자한비열전에서,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史官)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
이를 종합하면, 노자는 주나라 사관(史官)을 지낸 사람으로, 공자가 노나라 군주의 명을 받아 주나라 낙양에 갔을 때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예를 배웠다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는 이 '문례(問禮) 설화'는 매우 유명하여, 역사가 사마천이 생존했던 시대에도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말하는 사람치고 한두번 화제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장주(莊周)를 비롯한 후대 사상가들이 공자와 노자의 대화를 내세워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게 되면서 사상사의 측면에서도 노자의 실존이 확고해졌다.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쟁명을 거쳐 진한(秦漢) 시기의 통치이념 수립 과정에서 공자와 노자의 사상은 치열하게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고, 공자 사후 3백여년 뒤의 사람인 사마천이 살던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양립불가(兩立不可)의 세계로까지 여겨졌다.
사마천은 당시 두 학파간의 대립이 얼마나 심했는 지를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사기 노자한비열전에서,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世之學老子則絀儒學 儒學亦絀老子 道不同不相爲謀 豈謂是邪).'
그러나 내가 공문의 일꾼이 되어 여러 문도들과 생활할 때 그 누구로부터도 노자라고 존칭되는 현자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만약 공자보다 나이가 많고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노자라는 저명한 현자가 있어서 공자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전수하였다면, 민간 학숙으로서 학생들을 유치해야 하는 공문(孔門)의 입장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텐데 말이다.
공자 생전이든 사후이든 노자라는 인물이 존숭되거나 혹은 폄하된 흔적이 공자의 어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노자가 후대에 도가 사상의 비조로 떠받들어졌을지라도, 적어도 이 시기에 노자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설령 그런 현인이 있었다 해도 그는 '여러 현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사상도 당시에는 공자 사상과 대립 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호적인 통섭의 관계였을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이 논구한대로 공자가 살던 시기는 여러 사상들이 아직 완전히 분화되기 전이었다. 유가와 도가는 후대로 가면서 점차 사상적 분화과정을 밟았지만, 한동안은 자신들도 어쩌지 못할 동출이명(同出異名; 이름이 다르지만 연원을 같이 함)의 혈통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사마천이 '사기'에서 말한 노자는 도가의 원조가 된 노자, 바로 그 사람이지만, 도가의 원조인 노자라는 사람이 공자와 같은 시대를 살며, 공자에게 예를 교수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는 사마천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사마천은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를 산 주나라 사관 노담이라고 해놓고 뒤에 가서는, 어쩌면 초나라 사람 노래자, 혹은 훗날의 주나라 태사 담이 노자일지 모른다는 식의 여운을 남겼다.
사마천의 시대에 벌써 노자는 그 실존 여부를 규명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해야 할 사가로서 노자라 불리는 대사상가의 생몰조차 적시할 수 없자, 그를 그냥 은군자(隱君子), 즉 '숨어사는 군자'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사기 노자한비열전)
내가 추적 결과, '최초의 노자'는 분명 노담이었다. 내가 여러 고제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공자가 주나라 수도 낙양에 갔을 때 노담을 만났으며, 그가 훗날 노자라는 인물을 형성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비록 사마천은 시대적 한계로 인해 노자의 실체를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은 '노자'가 여러 세대에 걸쳐 창조된 '역사화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에 실존한 노자'는 '최후에 완성된 노자'가 아니지만, 노자라는 인물의 기원이 된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란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렇지 않다면 '노담'이 '노자'라는 등식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성립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며, 공자 사상에 비판적이었던 경쟁자들이 노담의 존재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활용하지는 않았으리라.
노담이 '최초의 노자'일 것이란 물증도 있다. '노자' 또는 도덕경(道德經)이라는 5천 자의 짧은 책의 존재이다. 이 책 내용을 분석해 보면, 공자보다 훨씬 후대에 여러 사람의 참여로 형성된 위작(僞作)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책의 기본 뼈대나 원천 사상의 표현방식은 한 사람의 일관된 관점이나 집필이 아니면 나오기 어려운 측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는 적어도 이 책이 최초에 쓰여질 때는 단일 저자의 작품으로 출발했음을 의미한다.
그 최초의 저자가 바로 최초의 노자라면, 그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현재까지 노담을 제외하고는 달리 상정할 만한 인물이 없다. (김용옥, 노자철학 이것이다)
그렇다면 노담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공자를 만났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공자는 그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이에 대한 사서의 언급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유가의 경쟁자들이 남긴 진술은 일방적이어서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나는 두 사람이 나눈 육성이 궁금해 한동안 잠을 못이룰 지경이 되었다. 견디다 못해 어느날 부터인가는 자로와 안연 등 당시 낙양에 함께 갔던 고제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고제님들, 공자님과 함께 낙양에 갔던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도 낙양에 꼭 한 번 가보고 싶군요.'
'선생님과 함께 주례를 수입하려고 갔던 주나라 낙양에서의 일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나요?'
5. 공자, 낙양에 가다
다시, 사마천의 기록에 주목해 보자.
노나라의 남궁경숙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자 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는 이때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사기 공자세가)
공자가 노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고증하기 위해서는 이 기록이 제시하는 역사적 장면들을 꼼꼼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기록에서는 특정되지 않았으나 공자 일행이 낙양에 간 시기가 언제인지도 매우 중요하다.
시점에 따라 공자와 노자의 나이 차이, 학문적 수준 정도 등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사상의 전수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분석 조건이다.
'제가 듣기로 선생님이 주나라 수도 낙양에 가서 노자를 만난게 17~30살 사이거나, 34, 35살 때의 일이라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다. 선생님이 20대를 전후한 시기에 유(儒)의 일원으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상례(喪禮)를 수집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낙양에도 들렀을 수 있겠지만, 남궁경숙과 함께 낙양을 공식방문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또 선생님이 34살 때는 맹손씨의 수장인 맹희자의 3년상이 치러지던 때라 그의 아들인 남궁경숙이 먼 여행을 할 수 없었던 때였다.'
제가 고제들의 여러가지 증언과 당시 시대적 상황, 공자의 행적 등을 종합해 보건대, 선생님이 주례를 배우러 낙양을 방문한 시기는 노정공 4년 즉 서기전 506년 즈음이었다. 이때는 선생님이 제나라 망명에서 돌아와 곡부에 학숙을 다시 연지 4년째 되던 해로, 선생님의 나이 45~46살 때였다.
서기전 507년 노정공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 노나라는 각종 국가의식을 치르기 위한 예법과 시설물을 다시 상고(尙古)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때 노나라 집권당인 삼환은 내부 논의 끝에 주나라 왕실이 비전(秘傳)하고 있는 주례(周禮)에 관한 고례전장(古禮典章)을 구해 올 사절단을 낙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때의 일을 자로는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조정과 삼환은 심각한 정통성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공께서 7년을 망명해 있는 동안 조정과 공실의 예법이 많이 망실되고 흐트러져 있었고, 임금 자리에 소공의 아드님 대신 동생인 금상(노정공)이 삼환의 손에 옹립되면서 임금의 정통성도 많이 취약해져 있었다.'
염백우가 수염을 쓸며 말을 이었다. '정공이 즉위한 이듬해 궁궐 남문의 양관(兩觀)이 불에 탔지(좌전 노정공 2년). 알다시피 궁궐의 남문인 치문 양쪽에 망루가 있지 않은가. 양관은 국법과 조정의 정사문을 게시하는 곳인데 이곳을 방화했다는 것은 명백한 반체제 시위였지. 게다가 임금께서 진(晉)나라에 조공을 갔다가 황하도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오자 삼환도 더 이상 이 상황을 방치해선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
삼환 세력은 정국의 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취약해진 공실의 정통성을 조속히 안정시킬 필요성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 방책의 하나가 국가 예법의 복구였던 것이다.
주례(周禮)를 다시 전수해 옴으로써 주공(周公)의 아들 노공(魯公; 이름이 백금이다)이 봉건된 나라라는 전통을 재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주나라로서도 노나라 사절의 방문은 환영할 일이었다. 주나라는 십여년 전 왕실 내란에서 패배한 서왕 세력이 주나라 왕실의 고대 전적들을 가지고 초나라로 망명하는 바람에 예법시행에 중대한 공백을 맞고 있었다.
주왕실은 내란이 수습되고 낙양이 안정되자 동성(同姓)의 제후국들이 소장한 주왕실 관련 전적들을 왕실도서관에 바치도록 했다.
주나라 왕실 입장에서 보면 주공의 봉국으로 유일하게 왕례(王禮)로 제사하고 있는 노나라의 사례는 가장 밀접한 상고 대상이었을 것이며, 삼환의 입장에서도 노나라 역사서인 노춘추(魯春秋)와 천문과 역법을 담은 '역상(易象)'등 노나라가 개찬한 전적을 바쳐 주나라 왕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리라.
'아, 그렇게 되어 노나라 사절단이 주나라 도읍 낙양에 가게 된 것이군요. 그런데 그 일을 남궁경숙과 공자가 맡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때 집정인 계평자는 낙양사절단의 임무를 삼환의 큰집인 맹손씨에게 일임했다. 맹손씨가 대대로 사공(司空)의 벼슬을 세습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이지. 사공(오늘날의 국토건설부장관과 상공부장관 정도를 겸직하는 벼슬이다)은 국가 주요시설들인 궁궐과 성곽, 조정의 묘당과 묘역 등의 건설과 보수를 담당했으므로, 그에 따른 예법을 정비하고 관리하는 업무도 관할했다. 맹손씨가 주례를 수집하는 일을 맡은 것은 이런 연유때문이지.'
'정공 원년(서기전 509년)에 낙양의 성주(成周) 성을 새로 쌓을 때 여러 제후국들이 역부(役夫)와 물자를 바쳤는데, 우리 노나라에서는 사공인 맹의자가 이 일을 맡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지.'
'선생님이 이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맹의자와 남궁경숙은 쌍동이 형제로 이때 나이가 25~26살이었습니다. 맹의자는 이 중요한 임무를 동생 남궁경숙에게 맡겼는데, 아직 예법 전반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던만큼, 사절단을 자문하고 지도할 예악 전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에 띈 분이 스승님 말고 누가 있었겠습니까?'
안연이 조용히 당시의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맹의자와 남궁경숙 형제는 일찌기 아버지 맹희자가 임종하면서 자식 교육을 공자에게 맡길 것을 유언(좌전 노소공 7년)한 바로 그 형제이다. 즉 공자는 이들 형제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또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맹손씨 가병이 참여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인연(좌전 노양공 10년)으로 두 집안이 친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런 인연도 공자가 사절단의 자문관으로 선발되는데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맹의자 형제가 사절단의 일원으로 공문의 참가를 정공에게 보고하자, 임금께서 선생님의 참가를 격려하시기 위해 특별히 수레 한 대와 말 두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선생님에게 하사하기도 하였지.'
자로가 안연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어린 시종이 바로 저 사람 안연일세. 하하하.'
공자는 낙양 사절단에 공문의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갔다. 이때 공자를 수행한 제자로는 자로를 비롯해 염백우, 안연의 아버지 계로(안로) 등 초기 제자들이 있었고, 안연이 시종 자격으로 이 여행에 참가했다.
안연은 이때 나이가 15,16살로 곡부의 사족(士族) 사이에서는 이미 수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공자는 공문의 미래이자 자신이 아들처럼 사랑한 안연을 데리고 가 낙양의 높은 문물을 직접 보고 배울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훗날 안연의 후학들이 유가의 여러 유파 중 가장 ‘철학적’인 학단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안연이 이 여행에서 노담을 만났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6. 공자, 노담을 만나다
노나라의 문례사절단이 낙양에 도착한 것은 서기전 506년 공자 46살때였다. 낙양은 이때 동왕(東王)과 서왕(西王)간의 왕위 다툼이 동왕의 승리로 일단락된 지 10년이 지나고 있었다.
왕실 내부의 갈등이 진화되고 성주성 등 왕도의 주요 시설들이 재정비되는 등 전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사절단의 선발대로 먼저 낙양의 동정을 살펴본 자로가 보고했다. '우리의 임무 상으로 볼 때 낙양에서 꼭 만나보아야 할 인물은 장홍이라는 대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는 태사(太史)로서 천문과 귀신의 일에 능통해 3대에 걸쳐 왕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
남궁경숙이 말했다. '장홍이라면 3년 전 형님이 낙양 성주성 축성에 참가했을 때 축성 책임자였습니다. 그때 우리 집안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니, 그를 잘 활용하면 어렵지 않게 이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장홍은 음악 분야에도 뛰어났는데, 이때 공자는 장홍에게서 주나라의 궁중음악과 주나라가 여러 제후국으로부터 수집한 시(詩)에 대해 많은 견문을 얻을 수 있었다. '장홍이 현직에 있는 가장 뛰어난 지식인이라면, 재야 인물로는 노담이란 전직 태사가 으뜸이라고 합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따로 말하였다. '제가 낙양에 먼저 와보니 일반 사관들이 한결같이 노담을 대석학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편찬한 책들을 주왕실이 소장케 하는데는 노담의 감수가 지름길이라고들 합니다.'
공자도 낙양에 들어와 여러 경로로 노담에 대해 더 알아본 뒤 남궁경숙에게 말했다. '낙양의 재야에 노담이라는 노사(老師)가 계시다는데,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가 옛 일을 넓게 알고 지금 일도 모르는 것이 없으며, 예악의 근원에 능통하고 도덕의 귀추에 밝다고 말합니다. 사절단이 가르침을 받을만 한 듯 하니, 노담과 따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자가어 관주편)
노담은 태사를 지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왕실로부터 장로(長老)의 예우를 받은 이래 자신도 그 존칭을 물려받아 '노담'이라 불리었다. 노담은 일찌기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계와 절연한 뒤 주왕실도서관장으로서 오직 고도(古道)를 지키고 전승하는 일에만 전념하다가 얼마전에 60여세의 나이로 은퇴했다고 한다.
훗날 자로가 회상하기를 '노담을 만나보니 석학이 따로 없었다. 선생님의 박학이야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노담의 박학 또한 대단했다. 나이많은 철인답게 사물을 초월적 경지에서 인식하는 심미적 직관도 빼어났다. 사관으로 오래 재직하면서 여러 정치적 사건을 경험한 탓인지, 치술治術)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는 듯 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시종인 관계로 스승과 노담과의 대화를 곁에서 들을 수 있었던 안연도 노담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듯 했다.
'제가 보기에 노사(老師)께서는 궁정생활을 경험하고 또 동시에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여 정치의 양면에 대해 깊은 철학적 통찰을 얻은 듯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 분을 뵈었을 때는 이미 깊은 명상생활의 묘리를 체득한 듯 했습니다. 마치 끝모를 해저를 유영하는 바다용 처럼, 구만리 장천을 나는 천룡처럼 도의 심연을 노니는 듯 했습니다.'
공자 일행은 노담과의 만남이 주선되자, 노담이 살고 있다는 낙양의 북망산 아래 초옥으로 찾아갔다. 공자와 노담은 이때 나이차가 20살 안팎이었다. 이때 나눈 대화의 내용이 후세의 서책 즉 '사기 공자세가'와 '노자한비열전', '장자 외편' 등에 실려 전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가탁(假託)의 흔적이 농후해 진위 자체가 의심스럽고, 어떤 것은 너무 단편적이어서 전후 맥락을 알기 어려워 후대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도 바로 그 공백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주제와 내용이었다. 과연 두 사람은 무슨 말을 주고 받았을까?
▶️ 學(배울 학, 가르칠 교, 고지새 할)은 ❶회의문자로 아이들이 양손에 책을 들고 가르침을 본받아 깨우치니 배우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學자는 '배우다'나 '공부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學자는 臼(절구 구)자와 宀(집 면)자, 爻(효 효)자,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갑골문에 나온 學자를 보면 집을 뜻하는 宀자 위로 爻자를 감싼 양손이 그려져 있었다. 한자에서는 爻자가 무늬나 배움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고 있으니 이것은 '배움을 가져가는 집'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의 學자는 집이나 서당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子자가 더해지면서 '아이가 배움을 얻는 집'이라는 뜻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學(학, 교, 할)은 (1)철학 또는 전문적인 여러 과학을 포함하는 지식의 조직체. 곧 현실의 전체 또는 그 특수한 영역 및 측면에 관하여 체계화된 지식의 계통적 인식 (2)학문(學問) 등의 뜻으로 ①배우다 ②공부하다 ③흉내내다 ④모방하다 ⑤가르침 ⑥학교(學校) ⑦학문(學問) ⑧학자(學者) ⑨학통(學統) ⑩학파(學派) 그리고 ⓐ가르치다(교) 그리고 ㉠고지새(되샛과의 새)(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닦을 수(修), 익힐 련(練), 익힐 습(習),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가르칠 교(敎), 가르칠 훈(訓), 가르칠 회(誨)이다. 용례로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을 학교(學校),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일을 학문(學問), 사물을 배워서 익히는 일을 학습(學習), 학문에 능통한 사람이나 연구하는 사람을 학자(學者), 학문의 실력이나 역량을 학력(學力), 공부하여 학문을 닦는 일을 학업(學業), 학문의 사회나 학자의 사회를 학계(學界), 한 학년 동안을 규정에 따라 나눈 수업 기간을 학기(學期), 출신 학교에 따른 연고 관계를 학연(學緣), 학문의 기술 또는 학문의 방법이나 이론을 학술(學術), 공부한 이력을 학력(學歷), 공부하는 데 드는 돈을 학비(學費), 배워서 얻은 지식을 학식(學識), 한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벗을 학우(學友), 학생의 무리 또는 학문을 닦는 사람을 학도(學徒), 학업을 닦음을 수학(修學),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배우지 못함이나 학문이 없음을 불학(不學), 일정한 목적과 방법으로 그 원리를 연구하여 하나의 체계를 세우는 학문을 과학(科學), 인간이나 인생이나 세계의 지혜와 궁극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을 철학(哲學), 언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어학(語學), 학교에 들어감을 입학(入學), 개인의 사사로운 학설 또는 개인이 설립한 교육 기관을 사학(私學), 외국에 가서 공부함을 유학(留學), 학문에 나아가 닦음 또는 상급 학교로 나아감을 진학(進學), 학교에서 학기를 마치고 한동안 수업을 쉬는 일을 방학(放學), 방학을 마치고 다시 수업을 시작함을 개학(開學), 다니던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옮겨가서 배움을 전학(轉學), 학문에 힘써 공부함을 면학(勉學),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뜻으로 배운 것을 항상 복습하고 연습하면 그 참 뜻을 알게 됨을 이르는 말을 학이시습(學而時習), 학문은 미치지 못함과 같으니 쉬지 말고 노력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학여불급(學如不及), 배우는 일에 정성을 다해 몰두함을 일컫는 말을 학업정진(學業精進), 배움이란 마치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는 말을 학여역수(學如逆水), 외고 읽을 뿐으로 이해하려고 힘쓰지 않고 또 실천하지 못하는 학문을 일컫는 말을 기송지학(記誦之學), 배우지도 못하고 아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불학무식(不學無識), 널리 공부하여 덕을 닦으려고 뜻을 굳건히 함을 이르는 말을 박학독지(博學篤志) 등에 쓰인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를 이르는 말을 무원고립(無援孤立), 끝이 없고 다함이 없음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무궁무진(無窮無盡),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능(無所不能), 못 할 일이 없음 또는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엇이든지 환히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불통지(無不通知), 인공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기를 일컫는 말을 무위자연(無爲自然),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념무상(無念無想), 아버지도 임금도 없다는 뜻으로 어버이도 임금도 모르는 난신적자 곧 행동이 막된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부무군(無父無君),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또는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위도식(無爲徒食), 매우 무지하고 우악스러움을 일컫는 말을 무지막지(無知莫知), 자기에게 관계가 있건 없건 무슨 일이고 함부로 나서서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불간섭(無不干涉),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치(無爲而治), 몹시 고집을 부려 어찌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가내하(無可奈何),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용지물(無用之物) 등에 쓰인다.
▶️ 常(떳떳할 상/항상 상)은 ❶형성문자로 㦂(상)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수건 건(巾; 옷감, 헝겊)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尙(상; 더하다)으로 이루어졌다. 아랫도리에 입는 속바지 위에 받쳐 입는 긴 치마라는 뜻에서 길다, 전(轉)하여 오래 계속하다, 항상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常자는 '항상'이나 '일정하다', '변함없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常자는 尙(오히려 상)자와 巾(수건 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常자는 본래는 '치마'를 뜻했던 글자였다. 그래서 常자는 집을 그린 尙자에 '천'이라는 뜻을 가진 巾자를 결합해 집에서 항시 두르고 있던 옷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집에서 항시 편하게 입는 옷이라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후에 '항상'이나 '변함없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은 尙자에 衣(옷 의)자가 더해진 裳(치마 상)자가 '치마'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常(상)은 ①떳떳하다 ②항구(恒久)하다, 영원(永遠)하다 ③일정하다 ④범상하다, 예사롭다, 평범하다 ⑤숭상(崇尙)하다 ⑥(변함없이)행하다 ⑦항상(恒常), 늘, 언제나 ⑧늘 ⑨일찍이(=嘗), 애초에 ⑩도리(道理) ⑪법도(法道), 규율(規律), 통례(通例) ⑫평소(平素), 평상시(平常時) ⑬범상(凡常) ⑭길이의 단위(單位) ⑮천자(天子)의 기(旗) ⑯나무의 이름 ⑰땅의 이름 ⑱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떳떳할 용(庸), 떳떳할 이(彛),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나눌 반(班)이다. 용례로는 일정한 직무를 늘 계속하여 맡음을 상임(常任), 항상 살고 있음을 상주(常住), 두루 많이 있는 일을 상례(常例), 늘 준비하여 둠을 상비(常備), 늘 고용하고 있음을 상용(常傭), 매일 일정한 시간에 근무함을 상근(常勤), 보통 때의 모양이나 형편을 상태(常態), 임시가 아닌 관례대로의 보통 때를 상시(常時), 일반인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보통의 지식을 상식(常識), 날마다 보는 업무나 보통 업무를 상무(常務), 떳떳하고 바른 길을 상궤(常軌),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설비나 시설을 갖춤을 상설(常設), 늘 하는 버릇을 상습(常習), 일정한 직무를 늘 계속하여 맡음 또는 맡은 사람을 상임(常任),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을 심상(尋常), 내내 변함없이나 언제나 또는 자주나 늘을 항상(恒常), 날마다 또는 늘이나 항상을 일상(日常), 예사롭지 않고 특별함을 비상(非常), 정상이 아닌 상태나 현상을 이상(異常), 특별한 변동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정상(正常), 특별하지 않고 예사임을 통상(通常), 계속하여 그치거나 변하지 않음을 경상(經常),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을 범상(凡常), 괴이하고 이상함을 괴상(怪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인정 또는 생각을 이르는 말을 인지상정(人之常情), 인생이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인생무상(人生無常), 집에서 먹는 평소의 식사라는 뜻으로 일상사나 당연지사를 이르는 말을 가상다반(家常茶飯), 만년이나 오래도록 항상 푸르다는 뜻으로 언제나 변함이 없다는 말을 만고상청(萬古常靑), 덕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뜻으로 마주치는 환경이나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수행에 도움이 됨을 이르는 말을 덕무상사(德無常師),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하며 일정하지 않거나 일정한 주장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반복무상(反覆無常), 열에 아홉이란 뜻으로 열 가운데 여덟이나 아홉이 된다는 뜻으로 거의 다 됨을 가리키는 말을 십상팔구(十常八九) 등에 쓰인다.
▶️ 師(스승 사)는 ❶회의문자로 师(사)의 본자(本字)이다. 왼쪽(지층의 겹)과 오른쪽(골고루 돎)의 합자(合字)이다. 옛날에는 언덕에 사람이 모여 살고 또 군대(軍隊)가 주둔했으므로 사람이 많다에서, '군대'의 뜻이 되었다. 또 사람의 모범이 되어 남을 이끄는 사람에서, '선생'의 뜻이 되었다. 사람이 많다는 뜻에서 '수도(首都)'도 師(사)라 한다. ❷회의문자로 師자는 '스승'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師자는 阜(언덕 부)자와 帀(두를 잡)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帀자는 '빙 두르다'라는 뜻을 표현한 모양자이다. 그러니 師자는 언덕을 빙 두른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師자는 본래 군대 조직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로 고대에는 약 2,500명의 병력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니 師자는 군인의 수가 언덕 하나를 빙 두를 정도의 규모라는 뜻이었다. 師자는 후에 '스승'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는데, 가르침을 얻기 위해 스승의 주변을 제자들이 빙 둘러 앉아있는 것에 비유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師(사)는 (1)스승 (2)고대(古代) 중국의 군제(軍制)에서, 여(旅)의 5배, 곧 2천 500인을 이르던 말 (3)조선시대 때의 세자사(世子師)를 달리 이르던 말 (4)조선시대 때 세손사(世孫師)를 달리 이르던 말 (5)고려 때 세자사(世子師)를 달리 이르던 말 등의 뜻으로 ①스승 ②군사(軍士), 군대(軍隊) ③벼슬아치 ④벼슬 ⑤뭇 사람 ⑥신령(神靈), 신의 칭호(稱號) ⑦전문적인 기예를 닦은 사람 ⑧악관(樂官), 악공(樂工) ⑨육십사괘의 하나 ⑩사자(獅子) ⑪스승으로 삼다, 모범으로 삼다 ⑫기준으로 삼고 따르다, 법으로 삼게 하다 ⑬수효가 많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스승 부(傅),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우 제(弟)이다. 용례로는 모든 행동과 학덕이 남의 스승이 될 만한 모범이나 본보기를 사범(師範), 스승으로 섬김을 사사(師事), 학예에 뛰어나 남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사장(師匠), 스승과 제자를 사제(師弟), 스승의 의견이나 학설을 사설(師說), 가르침의 은혜가 높은 스승을 아버지처럼 높이어 일컫는 말을 사부(師父), 학식과 덕행이 높아 세상 사람의 표적이 될 만한 사람을 사표(師表), 스승의 집을 사가(師家), 스승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사법(師法), 스승과 벗을 사우(師友), 스승의 은혜를 사은(師恩), 학술이나 기예를 가르치는 스승을 교사(敎師), 병을 진찰 치료하는 사람을 의사(醫師), 학교의 부탁을 받아 강의하는 교원을 강사(講師), 은혜를 베풀어 준 스승이라는 뜻으로 스승을 감사한 마음으로 이르는 말을 은사(恩師), 으뜸 장수 밑에서 작전을 짜고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을 군사(軍師),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길을 감 또는 스승과 제자가 한 마음으로 연구하여 나아감을 일컫는 말을 사제동행(師弟同行), 군사를 출정시킬 때에는 엄한 군법으로 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사출이율(師出以律), 자기의 생각만을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사심자시(師心自是), 스승이 엄하면 자연히 가르치는 道도 존엄해짐을 이르는 말을 사엄도존(師嚴道尊),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법이 이어져 전해 감을 일컫는 말을 사자상승(師資相承), 덕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뜻으로 마주치는 환경과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수행에 도움이 됨을 이르는 말을 덕무상사(德無常師),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나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세상일은 무엇이나 내 몸가짐에 대한 깨우침이 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똑같다는 말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후세까지 오래도록 모든 사람의 스승으로 숭앙되는 덕과 학문이 높은 사람을 일컫는 말을 백세지사(百世之師), 어찌 일정한 스승이 있으리오 라는 뜻으로 성인에게는 일정한 스승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하상사지유(何常師之有), 책 상자를 지고 스승을 좇는다는 뜻으로 먼 곳으로 유학감을 이르는 말을 부급종사(負芨從師),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은 제자를 사랑한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존사애제(尊師愛弟)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