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 그리고 해피
이경한
10월의 마지막 토요일이다.
모처럼 에세이스트 문우회에서 정선 세미나 겸 단풍놀이를 가는데 아침부터 줄기차게 비가 내린다. 하필이면 이런 날 비라니. 음울한 하늘만큼이나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낯선 이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고 싶어 일찌감치 노포동 종점으로 갔다. 긴 여행이라 넓고 안락한 차를 기대했는데 낡고 공간도 좁아 보이는 스타렉스가 비를 후줄근히 맞고 있다. 에이! 저 차야?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긴 시간을 동행할 일행들은 전혀 불평이 없어 보인다.
자칭 베스트 드라이버인 이영민 총무님을 빼고는, 일행 모두가 나보다 한참 연상으로 보였는데, 누구도 차에 대한 불평은 없다. 빗길에 나서는 먼 여행인데도 무엇이 좋은지 모두가 싱글벙글 웃고만 있다. 아무래도 불편한 장거리 여행이 살짝 걱정 되지만 에이 나도 모르겠다. 케세라 세라다.
중년의 여자가 겁도 없이 이미 새로운 모험은 시작되었으니. 어쩌겠는가. 존경하는 대선배님들 속에 끼어든 것만으로 고마워해야지. 어쩌다 팔자에 없는 글을 배워 보겠다고 대한민국에서도 쟁쟁하다고 소문난 <에세이스트>에 가입 한 것부터 내게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김종길님의 <정신분석, 이 뭣고>라는 에세이집에서 감명을 받은 것이 동기가 되었다. 어쩌면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두려워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출발은 좀 어색하고 서먹하게 시작되었지만 속도 무제한, 푸른 불만 켜진 언어의 난무 속에서 엉뚱하게도 울적한 마음을 달래준 것은 예상치 못한 ‘키스’라는 말이였다. 식사를 못한 허기를 권경자님께서 준비한 따끈한 모듬배기 떡으로 채우고, 달콤한 순대엿, 후식으로 과일까지 챙겨 오신 안귀순님덕분에 차내 분위기가 훈훈해 졌다. 역시 사람은 배가 불러야….여기에 피로회복제로 김병기 선생님이 보내온 비타민 씨까지 마셨으니 차내는 은근히 에너지가 살아나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은 조광현님께서 웃으며 농을 걸었다.
“불참한 사람도 비타민을 주는데 변 샘은 무엇을 줄래여?”
“키스!”
느닷없이 튀어나온 단어에 깜짝 놀랐다. 아니 이 당돌한 여인을 봤나. 부끄러움 유전자 결핍의 돌연변이? 갑자기 그녀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혹시 일부러 매력을 흘리는 여자? 아니면 차내 분위기를 위해 일부러 던지는 센스 멘트?
정말 놀라웠다. 수련을 통해 단련된 날카로운 언어놀이의 고수? 입놀림으로 편견을 까부수는 내공에 기가 눌렸다. 순간 이상하게도 분위기가 확 풀린다.
나도 용기를 내어 며칠 전 남편과의 말다툼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신사가 해결책을 간단하게 처방한다. 담담하게 자신이 ‘나의 애인’이 되어주겠단다. 헉, 언제 봤다고?! 그저 분위기를 밝히는 재치 있는 농담인데, 창밖의 아름다운 단풍에 취해서일까, 나의 본능은 소리 없이 문을 열면서 어둑한 차내에서도 감추지 않고 희열을 느꼈다. 목젖을 드러내며 크게 깔깔 웃기 시작했다. 정선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슬슬 즐겁게 풀려나갔다.
정선에 들어서니 꼬불꼬불한 산길이 안개를 휘감고 나와 우리를 반긴다. 어제의 먼지들을 말쑥하게 씻어내고 원색의 단풍들이 섹시한 눈짓을 보낸다. 가슴이 벌렁거린다. 역시나 강원도 가을은 부산과는 다르구나 싶었다.
세미나장인 가스공사 연수원에 들어서니 단풍보다 더 화사한 얼굴들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열정적인 인사에 들떠 있었다. 그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게 신통하다. 이는 또 무슨 조화인지. 안영훈님은 무거운 나의 짐을 번쩍 들어주시면서 반겨 주시고, 조정은님은 스스럼없이 포옹부터 했다. 기분 좋은 스킨십이다. 더 좋은 것은 한방을 쓰는 룸메이트다. 하루 밤을 같이 보내는 명부를 보니 조한금님, 문혜영님, 안귀순님. 문단의 대 선배님들과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다니. 행운이 겹치는구나 싶었다. 자상한 권경자님과 밝은 미소의 김베로니카님까지. 세미나에서 정선 아리랑의 가락에 마음이 아리다가, 예쁜 지은희님의 황홀한 춤사위에는 살짝 질투가 난다. 강병기님의 화사한 미소도, 스스럼없이 내미는 손들도 모두 정겹다.
김종완 선생님의 강의가 인상적이다. 예쁜 것을 예술이라 착각 하지 말라. 곱고 예쁨을 추구 하지 말고 진실을 바탕으로 개성 있는 글을 쓰라. 모두가 어리둥절하다. 등단 작가도 아니면서 정선까지 온 내가 정상인가. 노래 가사를 못 외워서 바보가 되고, 기꺼이 같이 바보가 되어 주신 김채영님과 지은희님도 고맙다.
겁도 없이 주사위를 던진 나를 자책하지 않으련다. 같은 날에 부산에서 타오르는 불꽃축제를 보지 못해도 아쉬움은 없다. 내 마음에 이미 붉은 불꽃이 환하게 타오르는 것을…. 오가는 차창 밖의 단풍도 내 용기에 환하게 박수를 보내는 듯.
안토시아닌이 빨간 색조를 낸다고 했던가. 나무는 푸름을 붉음으로 바꾸었지만, 나는 청춘이 불타면서 빨개지는 거라며 억지를 부린다. 김신우님 조차 마음은 단풍으로 물들었던가. 휴게소에서 노신사는 살짝 여자회원들에게만 커피를 사겠단다. 노신사는 단풍의 감동, 설레는 마음을 그리 다스렸을 것이다.
자칭 베스트 드라이버 이영민님은 베스트로 공인되었다. 말없이 침착한 드라이빙. 스타렉스는 운전자의 분신인 양 순하게 말을 잘 들었다. 안락한 버스의 기대는 포근한 현실로 대체되었다. 그의 노련한 운전 덕분이다. 앞자리에서 무쌍하게 변화하는 주제들로 대화를 주고받던 여러 고수 선생님들 덕분에 나는 행복하였다.
글 동네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은 몰랐다. 예술은 고뇌라고만 배웠는데. 어쨌든 찌든 현실로부터 잠시 도피하는 맛, 맛을 탐닉하는 즐거움도 참 좋다. 토속음식이라는 곤드레 비빔밥, 황기족발, 콧등치기 메밀국수 등이 이채로웠다. 행사가 끝나고 준비된 회식은 송어회가 단연 백미다. 모두 맛깔스러웠고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 함께 했던 분들께 두루 감사드리며, 막내라고 숙제로 맡겨진 너절한 여행기를 이만 줄인다.
(추신; 귀하신 선생님들 존칭을 모두 생략했습니다. 양해하시길.)
( 에세이스트 가을 세미나 참관기)
첫댓글 창밖에는 비가 내렸지만 자동차 속은 웃음소리가 왁자하였지요.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여행기 맛있게 읽었습니다. 이경한 샘 신참 신고식 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저로서는 벅차고 힘든 숙제였는데, 많이 도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꾸벅^^. 아직도 단풍이, 아리랑이, 꿀맛같은 사과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글이...처음 내신 것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모난 곳을 많이 깎고...그러면서도 원래의 취지와 쓰시고자 하는 바는 고스란히 담겨 있고....뭐 그런 수련하려고 글모임 하는 것이지요 ㅎㅎ 좋은 참관기 잘 감상했습니다. 더욱 정진하셔서 재미있는 글 많이 쓰세요~~~.
선생님.. 보시는 눈이 정확하시내요..투박한 제 초벌구이를 안귀순선생님과 김종길선생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처음 선을 보일때 화장하고 꾸미고 싶은 제 마음을 다 읽으시더라고요..호호,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데, 1초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이 경한 선생님을 본 순간,,,수십 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친밀함이 확.....여행기 한 편으로도 천년약속의 저력이 느껴집니다.
류영하선생님! 부족한 저를 그렇게 잘 봐주셨다니 감사드립니다..댓글의 통로를 통해,선생님을 향한 저의 마음이 다가가는 소리가 들리시지요? 다음번 만나 뵐 날을 손가락 세면서 기다리게 만드시네요..선생님께서는요...
덕분에 정선을 다시 한번 느껴봅니다. 후기 쓰시느라 애 많이 쓰셨겠지만 보는 사람으로서는 추억을 다시한번 떠올릴 수 있어 감사하네요. ~~~ 다음에는 노래 가사 꼭 외워서 두엣으로 멋지게 한번 불러 보아요. ㅎㅎㅎ
예, 저와 같이 바보가 되신 분이죠? 크크...좋은 생각입니다..정선에서 재미있었고 감사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입가에 미소가 벙긋 번집니다.
좁은 차에 귀하신 선생님을 모시게 된 게 꼭 내 죄인것 같아 송구스러웠는데 과찬을 해 주시고 즐거웠다 하시니 이틀간 운전으로 다소 피곤했던 일들이 다 기쁜 추억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이게 또 문학의 힘!
정진하셔서 등단의 관문도 쉽게 뚫으시고 작가로서의 길에 문운이 활짝 열리길 바랍니다.
총무님, 에세이스트에 쓰신 글을 읽고 많이 감동 받았습니다... 늘 초보시라고 하시더니만, 너무 겸손하셨습니다.저는 등단, 작가 이런 소리는 차마 듣기에 민망해서 숨고 싶고요..총무님께 문운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예비 막내(?)가 동참하지 못한 자리를 채워 주셨네요. 글내용에도 들어가지 못하고...ㅎㅎㅎ 11월 모임에서 뵙겠습니다. ^^
호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저도 그날 일이 어떤 힘에 끌려서 참석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내요..11월 모임에서 무설자님을 뵙고 싶습니다
오랫만에 만난 반가운 누이 같았던 분... 잔잔한 미소로 연신 마음속 이야기를 전해 주시던 분... 몇마디 건네지 못 한 아쉬운 속내가 이 글속에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좋은 시간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
그동안 격식과 편견에 눌러 답답하다가, 진솔하고 순수한 마음들을 정선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만나면서 울적한 마음이 밝은색으로 채색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안영훈 선생님이 계셔주셨습니다.. 추억이라는 아름다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참이 글을 이리 잘 쓰니 , 참 내 . 샘 글 덕에 저도 고물 스타렉스에 올라 탑니다. 계속 오라잇!
글 칭찬에는 제가 부끄럽습니다..저와 함께 스타렉스에 승선해 주셔셔 너무 감사합니다..귀걸이님...
샘, 이 분이 누구지 모르지예!
ㅋ 최정임 샘이라예. ㅋㅋㅋㅋ
허~ 이경한 선생님 문장이 좋군요. 자신의 느낌을 글이 흐르는 대로, 시선이 머무는 대로 잘 풀어 놓으신데다, 그 동안 잘 지키셨던 알을 탁 깨보는 맛을 맛깔나게 적어 놓으셨습니다. 안에선 이경한 선생님이 밖에선 에세이스트가 서로의 줄탁의 순간을 잘 포착한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이 잘려지는 순간을 저도 구경 잘 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의 시선이 가는대로 느낌을 글로 적어보았습니다. 그 찰라의 순간이 저의 기억에서 가능한 오래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요..너절한 글을 읽어 주시고 , 저의 순간을 멋진 댓글로 용기를 붇돋아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