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의 수행자, 도현 스님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의 삶은 이야기 거리가 없다.“ 이 말은 저 유명한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말이다.
도현 스님의 이야기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니 문득 이 말이 생각난다. 진실하고 성실한 수행자에겐 별다른 이야기 거리가 없다는 말이 적용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 도현은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가장 성실하고 진실한 수행자이다. 그는 남들이 바랑을 지고 만행을 하러 다닐 때도 선원서 좌선삼매에 들어 있었고, 나이 들어 도반들이 하나둘 주지를 하기 위해 선원을 떠났을 때도 그는 홀로 남아 좌선삼매에 빠져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한 줄이면 충분할 것이다. ‘한 수행자가 출가 이후 줄곧 선원에서 좌선만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이다.
나는 지난 해 여름 백양사 운문암으로 그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더위가 더할 수 없이 기승을 부렸다. 운문암을 올라가는 길은 마침 포장공사를 하고 있어서 걸어가야 했는데 우리들 일행은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올라갔을 뿐 아니라 내려올 때는 또 가뭄을 예감하는 소나기를 만나서 물에 빠진 쥐꼴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고생을 한 끝에 도반 도현을 만났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 수행자로 만나서 이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도반의 사이로 지내오고 있지만 근자 수년 동안 그렇게 자주 만나지 못했다. 특히 나는 그를 우리들 동갑나기 도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수행자로 생각하고 있는 터인데도 어쩐 일인지 자주 만나지 못했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회상해보니, 하도 오래되어서 기억조차 아련하다. 칠십 년대 초두였다.
나는 범어사 청풍선원에서 시작하여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 등에서 안거를 지내고 해인사 가야총림 선원에 방부를 들여놓고 여름 안거를 지내려 하고 있었다.
하루는 아주 어려 보이는 선객 하나가 선원 원주실로 바랑을 지고 들어 왔다. 얼굴은 마치 어린아이 같이 둥글어 관세음보살 앞에 합장하고 있는 선재동자이 모습만 같은 그런 스님이었다. 내 눈에 그의 나이가 나보다 적어도 서너 살은 아래일 것으로 보였다. 어찌 저토록 어리고 귀여운 사람이 발심하여 무상대도를 닦겠다고 스스로 운수의 길에 나섰는고. 아! 선재로다! 선재로다!
얼굴이 동안인 것과는 달리 그는 나이보다 더 점잖고 의젓했으며 초지일관하는 수행자였다. 그 때 그는 이미 해인사 선원에서만도 한 철을 지낸 납자였다. 나는 처음 그를 대할 때 약간 무시하고 내가 더 구참이고 어른인 것같이 행동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나이 치기를 우습게 알았고 가끔은 나의 경솔한 행동이 있을 때 충고를 하기도 했다.
사람이 외길 인생을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특히 수선납자의 외길은 실제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어려운 고초를 알지 못한다. 외길을 가기 위해서는 수없는 갈등과 고뇌를 겪어 내야 한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잠시만 한 눈을 팔아 달라고 유혹하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일이 년 그리고 한 두 번은 이런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지만 수십 년 내지는 일평생을 이런 유혹을 이겨내고 외길을 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일평생 운수납자로 살아온 스님들이 존경스러운 것이 이 때문이다. 도현 스님은 이런 외길을 걸어온 것이다.
나는 가끔 불자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다. 스님들은 참 좋으시겠어요.
내가 무엇을 보고 스님들이 좋겠다고 하냐고 물어보면 아무 걱정이 없지 않느냐고 한다. .또 다시 스님들이 어떻게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물어보면 세속 사람들은 돈 벌 걱정, 처자식 먹여 살릴 걱정 등 잡다한 걱정거리가 많지만 스님들이야 혼자 몸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냐는 것이다.
솔직히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그들의 아둔함에 분노를 느낀다. 어찌 이다지도 인생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은가?
이것은 불자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스님들 특히 수도하는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일이다. 어찌 처자식 거느리고 돈벌고 출세를 꿈꾸는 사람에게만 인생의 근심과 걱정이 있다고 하겠는가? 인간에게는 처자식 먹여 살리는 일보다 더 근원적인 고뇌가 있는 것이다. 이런 우치한 사람들은 자기의 처자식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먹여 주고 입혀주는데 도대체 무엇이 불만이며 무슨 고민을 하느냐고,,,’ 인간의 고뇌와 갈등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 평소 고뇌할 줄 모르는 사람과는 더불어 인생을 이야기하고 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고뇌보다 근원적인 수행자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한다.
도현은 아주 어린 나이에 법주사 탄성 스님 앞으로 출가를 했다. 그리고 그는 출가 이후 지금까지 외길 운수납자로만 살아왔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는 한번 운수납자로 바랑을 짊어진 이후 한번도 옆길을 걸어본 일이 없는 선객이다. 내가 그를 우리들 나이의 도반 가운데 가장 훌륭한 수선납자로 존경심을 아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고통이 늘 수선납자에게는 따라다닌다. 도현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견디어 낸 것이다. 수없는 날들 속에서 몰려오는 고독과 인간적 고뇌의 갈등을 그는 화두와 씨름하면서 선원의 좌복 위에서 버텨 낸 것이다.
그와 나는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에서 함께 겨울을 난 일이 있다. 그 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그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인생에 대하여 절절히 고민했다고 한다. 그 때 학교 공부는 뒤로 미뤄둔 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와 나는 나이도 동갑이고, 출가한 시기도 비슷한데 나는 덤벙대고 충동적인 행동을 잘하는 반면 그는 언제나 차분하고 안정된 태도이다. 그와 이야길 나누어 보면 의외로 독서량이 많음에 놀라게 된다. 언젠가 송광사객실에서 만났을 때 그에게 많은 도움의 말을 들은 일이 있다.
나는 그 때 병역 관계로 깊이 고민하고 있었고 고민은 위험 수위에 달해서 몹시 초조해 있었다. 도현 스님은 이때 이미 군대를 제대하고 나와 다시 운수납자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그 날 밤 나에게 군대 생활 동안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고 역시 군대에서 이것저것 책을 많이 읽었고 수행자로 여러 가지를 많이 생각했노라고 했다. 나는 그 때 모처럼 마음의 찌꺼기를 후련하게 털어놓고 속이 시원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군대 생활 동안도 그는 여전히 수행자이며 선객이었던 것이다.
선원은 안거 동안에 엄한 청규가 있다. 오늘 결재 중에 운문암을 찾아간 불청객인 우리들은 조실 스님을 찾아뵙고 저녁공양을 하고는 이내 하산을 해야 했다. 실로 오랜만의 만남임에도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다. 본래 선객이란 많은 말이 필요 없기도 하지만,,, 해가 긴 여름날이라 저녁공양을 하고 난 뒤인데도 어두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왔던 길을 내려오는데 도현 스님이 물통 하나를 들고 우리들 뒤를 따라 나섰다. 물을 길어 날라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제 구참납자이니 젊은 후배 스님들한테 시키면 안 되느냐고 했더니 운동 삼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석양에 그의 얼굴을 보니 귀밑에 흰머리가 많았다. 동안의 그도 어쩔 수 없이 늙었고 스무 살 안팎의 미소년이 사십 중년의 장중한 수행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동안이었다. 아니 동안에다가 중후한 멋이 보태졌다.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