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경향, 국제, 전북, 동아, 한경, 조선, 세계, 부산, 불교, 한국, 영남, 농민, 광남, 전남매일, 한라, 무등, 머니투데이, 뉴스N제주)
경향신문
노이즈 캔슬링 / 윤혜지 시인
우리는 한껏 미세해진 우리를 내려다보며 기내식을 먹었다 책을 뒤적거렸다 구식(舊式) 동물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그것은 동물들이 있다,로 시작된다
유기인지 실종인지 자연발생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구식의 동물들이 발견되었고
그들은 제각기 살고 있다
매일 똑같은 구절을 읽어줘도 너는 언제나 놀라워한다
연하게 와서 끊임없이 훼손되는 마음으로
침목(枕木)을 고른 적이 있다 비를 맞고 볕을 쪼이길 반복한 나무토막들 위로 뜨거운 기차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달렸다 모든 것이 멈추면 아웃렛에 가서 새 셔츠를 사고 카페에 앉아 아주 뜨겁고 단맛이 나는 차를 마셔야지 하다가 자신이 데려올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영영 잊어버린 사례도 있었다 이것이 소음으로 소음을 지워내는 방식입니다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각자 잊어버린 것을 접어올리고 등받이를 세우고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가팔라지는 날개
여러 개의 의자에 앉아야만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이국의 빛과 온도
잎사귀와 해변의 선량한 사람들
규칙적인 것은 예상 가능해서 지울 수 있다 다만 어떤 통화 소리
바빠, 계속 바빠서 그래 배회하듯 하는 사과
그것은 틈입니다
나 좀 안아줘, 같은 말은 꼭 돌아누우면서 하는
어떤 나쁨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꼭 대낮 같다
물결이 물결로
공들여 썩는 냄새를 맡았다
그것을 생각할 때
깨끗한 공기 속으로 무언가 빠르게 나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에서 파도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저마다의 계단처럼
국제신문
고독사가 고독에게 / 박소미 시인
나는 자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태동을 알아채는 침묵 이전의 기억 밑으로, 웅크리고 있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재생에 몰두한다 어느 애도가 부재를 지나 탯줄로 돌아올 때까지, 타자의 몸속을 오가는 이 반복은 고고학에 가깝다 생환의 뒷면은 그저 칠흑덩어리일까 벽과 벽 사이 미세한 빗살로 존재할 것 같은 한숨이 어둠 안쪽 냉기를 만진다 사금파리 녹여 옹기 만들 듯 이 슬픔을 별자리로 완성케 하는 일, 아슴푸레 떨어지는 눈물도 통로가 될까 북녘으로 넘어가는 해거름이 창문 안으로 울컥, 쏟아져 내린다 살갗에 도착한 바람은 몇 만 년 전 말라버린 강의 퇴적, 불을 켜지 않아도 여기는 발굴되지 않는 유적이다 잊기 위해 다시, 죽은 자의 생애를 읊조려본다 그래 다시, 귀를 웅크리지 태아처럼, 점점 화석이 되어가는 기분이야 떠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 방 안이 점점 어두워진다
박소미: 1966년 전남 목포출생, 김포문예대학 수료, 시품, 달詩 동인
전북일보
저녁의 집 / 유수진 시인
아침이라면 모를까
저녁들에겐 다 집이 있다
주황빛 어둠이 모여드는 창문들
수줍음이 많거나 아직 야생인 어둠들은
별이나 달에게로 간다
불빛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건
다 저녁의 집들이다
한 켤레의 염치가 짝짝이로 돌아왔다
수저 소리도 변기 물 내리는 소리도 돌아왔다
국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설거지를 끝낸 손가락들이
소파 한 끝에 앉아
어린 송아지의 배꼽, 그 언저리를 생각한다
먼지처럼 버석거리는 빛의 내부
어둠과 빛이 한 켤레로 분주하다
저녁의 집에는 온갖 귀가들이 있고
그 끝을 잡고 다시 풀어내는 신발들이 있다
적어도 창문은 하루에 두 번 깜박이니까 예비별의 자격이 있다
깜박이는 것들에겐 누군가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다
매번 돌아오는 관계가 실행하는 수상한 반경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고
스위치를 딸깍, 올리면 집이 된다
별은 광년을 달리고 매일 셀 수 없는 점멸을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도
어수룩한 빛들은
얕은 수면 위로 귀가한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열한 분의 작품이 올라왔다. (응모자의 인적 사항이 없이 응모 번호만 맨 앞에 적혀서 보내왔다.) 심사위원들은 코로나19로 만나지는 못하고 각자 좋은 작품을 뽑기 위해 숙독을 하고 다시 각각 세 분의 작품으로 압축했다.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없는 것은 없다」 외 2편, 「흙냄새 향수」 외 4편, 「저녁의 집」 외 3편이었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세 분의 작품들은 모두 소위 신춘문예 풍조에 물들지 않고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시의 위의와 진정성을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먼저 「없는 것은 없다」 외 2편의 작품은 대담한 언어 구사와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언어를 부리는 기교가 겉으로 너무 드러나면 소통과 감동에서 약간 멀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비록 오타였다 하더라도 “맡겨”를 “맞겨”로 쓴 실수는 마지막 퇴고나 맞춤법에 신경을 쓰지 않았구나 하는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 「흙냄새 향수」 외 4편에서는 시적 진술과 이미지를 이끌어가는 힘이 좋았다. 그러나 일상을 읽는 독법이 평이함으로써 참신한 감각, 즉 신선미가 떨어진 듯하여 아쉬웠다. 「저녁의 집」 외 3편은 요즘처럼 세상이 코로나19로 어수선할 때 너무나 소중해진 당연한 일상을 따뜻하게 보듬고 위로가 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차분하면서도 치열한 시적 사유와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 돋보인다. 동시에 다른 응모작들도 고른 수준을 견지함으로써 앞으로 좋은 시인이 되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러기에 심사위원들은 「저녁의 집」을 최종 당선작으로 결정하자는 의견이 서로 일치했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위원: 허형만 시인, 김영 시인
동아일보
여름의 돌 / 이근석 시인
나는 토끼처럼 웅크리고 앉아 형의 작은 입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선 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한테선 지난여름 바닷가 냄새가 나, 이름을 모르는 물고기들 몇 마리 그 입속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무너지는 파도를 보러 가자, 타러 가자, 말하는
형은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미래를 이야기했다. 미래가 아직 닿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형을 들뜨게 했다. 미래는 돌 속에 있어,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이야기가 번져있어, 우리가 미래로 가져가자, 그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그동안 우리는 몇 번 죽은 것 같아. 여름, 여름 계속 쌓아 올린 돌 속으로 우리가 자꾸만 죽었던 것 같아. 여기가 우리가 가장 멀리까지 온 미래였는데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져온 돌 속으론 지금 눈이 내리는데
내리는 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내리는 눈 속으로 계속 내리는 눈 이야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우리가 우리들 속으로 파묻혀가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계속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이근석: 1994년 충남 논산 출생.
한경 신춘문예
유실수(有實樹) / 차원선 시인
너의 눈 안에는 열매를 맺으려 하는 나무가 있다
너의 눈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저기 소각장에 앉아 있다
자신의 옷을 다 태우고도 헐벗은 너를 보고 있다
멀뚱히 있는 너와 떨어진 잎을 한데 덮는다
앙상해지도록
베고 누웠다
잔향 더미로 만든 모래시계
마른 낙엽을 주워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왜 내 얘기를 듣고 있어요?
낯선 사람인가 봐 쓸쓸하다고 하면 데려갈 텐데
그대로 있어요
반딧불이 무리지어 올리는 온도
올라가는 건물
빈 곳은 비어있었던 적이 없고
마지막으로 옮긴 불씨 조각이 다 자란 나무의 잎에 옮겨붙는다
오랫동안 그를 알았다
열매를 남긴 나무, 앨범에 적히고
눈 안에 마른 씨앗을 품던 자리가 바스러져 날아간다
몇은 땅으로 몇은 모를 곳으로
<심사평>
본심에서 네 분의 시를 다뤘다. ‘전래동화’ 외 네 편은 직설적인 언어로 기성세대와 맞서는 자세가 만만치 않았다. 다만 그것이 사회와 깊이 부대껴서 얻은 것은 아니어서 시야가 좁고 다소 막연해 보였다. ‘가장 내밀한 스펙트럼’ 외 네 편은 흡입력과 호소력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시에서 흐름을 끊는 직접 발화를 자주 사용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리지 못했다. ‘어둠’ 외 네 편은 과감한 생략과 거침없는 반복 등 난숙한 화법으로 이목을 끌었다. 다만 논리가 시를 압도하는 지점이 가끔 눈에 띄었다. 최근 시의 스타일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침윤된 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 받았다. ‘유실수’외 네 편은 각각의 시마다 이미지를 극적으로 쌓아가면서 심화시켜 가는 상상력이 돋보였다. 본적 없는 기교와 비약이지만 우리는 이 상실에 맞닥뜨린 자의 눈에 비핀 낯설고 속절없이 슬픈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유실수’ 외 네 편을 응모한 차원선 씨를 당선자로 정했다. 게임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우리는 차씨가 익숙한 새로움을 되풀이하기보다 낯선 전환점을 만드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인숙 시인, 손택수 시인, 장이지 시인.
조선일보
단순하지 않은 마음 / 강우근 시인
별일 아니야, 라고 말해도 그건 보이지 않는 거리의 조약돌처럼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고 작은 감기야, 라고 말해도 창백한 얼굴은 일회용 마스크처럼 눈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눈병에 걸렸고, 볼에 홍조를 띤 사람이 되었다가 대부분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병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걸어오는 우리처럼 살아가다가 죽고 만다.
말끔한 아침은 누군가의 소독된 병실처럼 오고 있다.
저녁 해가 기울 때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감자튀김을 먹는 사람들은 축구 경기를 보며 말한다. “정말 끝내주는 경기였어.” 나는 주저앉은 채로 숨을 고르는 상대편을 생각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아서
밤의 비행기는 푸른 바다에서 해수면 위로 몸을 뒤집는 돌고래처럼 우리에게 보이다.
매일 다른 색의 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고 있다.
버스에서 승객들은 함께 손잡이를 잡으면서 덜컹거리고, 승용차를 모는 운전자는 차장에 빗방울이 점점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편의점에서 검은 봉투를 쥔 손님들이 줄지어 나오지.
돌아보면 옆의 사람이 없는, 돌아보면 옆의 사람이 생겨나는. 어느새 나는 10년 후에 상상한 하늘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쥐었다가 펴는 손에 빛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보고 있지 않아도 그랬다.
내가 지나온 모든 것이 아직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세계일보 변혜지, 한준석 (공동수상)
언더독 / 변혜지 시인
이 세계를 네가 구했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폐허가 된 도시에 둘러싸여서, 꿈속의 나는 아름다웠다. 나의 아름다움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
눈을 빼앗길 만한 장면이어서 나는 이 세계와 어울리는 음악을 마련하였다.
화관(花棺) 속에 두 손을 가슴에 모은 내가 누워있었고,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행렬로 거리가 잠시 가득 찼다.
나는 어떻게 이 세계를 구했나. 나의 궁금증이 이 세계와 무관하였다.
연인이 내게 입을 맞추며 엄숙하게 사랑을 맹세하였고,
잠들었던 관객이 영화의 결말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듯이, 나는 영문 모를 격정에 휩싸였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소리치자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행렬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의 격정이 나와 무관하였고, 화관에 누운 내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비로소 이 꿈의 구성방식을 알 것 같았고,
나는 이 세계에 두고 나가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변혜지: 1991년 서울 출생, 동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수료.
세계일보
돌고래 기르기 / 한준석 시인
미소는 돌고래로 기르기 좋습니다
돌고래의 주파수를 라디오로 들어요
나는 무심하게 시작되어집니다
축축하게 연필심이 밤새 헐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에 좋습니다
나는 웅크리기 좋은 무게로 태어났어요
돌고래의 고도는 새떼의 무게 같아요
새들이 흩어지는 사이로 연필 소리가 들립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가는 새를
잃어버렸다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에 없는 새들을 세어보는 일은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고
두 팔로는 충분한 일입니다
돌고래를 기르기에는 남해에 사는 당신이 좋습니다
눈 내리는 남해로 가는 버스 창밖
길러 본 적도 없는데
둥글게 헤엄치는 돌고래를 바라봅니다
나는 당신의 웃음을 빌려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일기예보에 오늘 아침은 잔기침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안정은 멀리 있습니까
나는 이런 예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눈 감으면 버스의 흔들림만 남겨집니다
나는 돌고래가 아닙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릴 줄 압니다
잘 가, 돌고래는 휘어지는 몸짓으로 수평선을 밀어내고 있어
끝에서 끝이 부드럽게 멀어져야 좋은 미소
나는 돌고래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를 기르기에 좋습니다 슬픔을 조심합니다
세계는 서로를 미끄럽게 기를 줄 알고
나는 입김에서 햇빛으로 조용하게 옮겨집니다
나는 한 종류의 돌고래가 됩니다
한준석: 1990년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작품마다 상처 치유코자 대변… 과장되지 않은 비유·상징어 눈길”
저마다 고립된 외딴섬처럼 단절과 멈춤이 뼈저렸고, 과연 우리가 우리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까, 물음만으로도 버겁고 지난했던 시기. 예심을 거친 스물다섯 분의 시편들이 공통적으로 시절의 무력감에 대응하며 상처와 아픔을 치유코자 대변하고 있었으니, 왜 문학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을 안기며 시대의 가늠자 역할을 자임하는지 여실히 실감케 했다.
최종 논의로 하연, 김성백, 홍진영, 변혜지, 한준석 씨의 작품을 주목했다.
하연의 작품은 익숙한 표현과 소재들이란 점이 아쉬웠다. 김성백의 경우 팬데믹 시대를 겪고 있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엿보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지만 감정과 표현이 곰삭을 시간이 필요하리라 여겨졌다. 홍진영에게서는 시어와 이미지를 다룰 줄 아는 기본적인 능력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몇 개의 서툰 문장들이 심사자의 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장래를 위해서 올해의 보류가 본인들에게 더 큰 득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긴 시간 변혜지의 ‘언더독’과 한준석의 ‘돌고래 기르기’를 놓고 토론을 벌였으나 아쉽지만 당선에 준하는 가작 2편을 뽑기로 합의했다.
변혜지의 ‘언더독’은 남다른 사유의 깊이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과장되지 않은 비유를 제대로 다룰 줄 알았고, 절제된 수사의 미덕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어 모자람을 찾기 어려웠다. 막힌 혈로를 뚫듯 날카롭고 예민하되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아우르는 너끈한 묘사력을 겸비했으니, 이만한 사유의 세계라면 우리 시단을 풍요롭게 메우고도 남으리란 믿음에 선작(選作)으로 민다. 언제까지 무거운 짐을 걸치고 거침없이 나아갈지 모두가 기대를 걸고서 지켜보리라.
한준석의 ‘돌고래 기르기’는 ‘돌고래’라는 상징어를 넣어 이미지가 보일 듯 말 듯 그려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미소는 돌고래를 기르기에 좋습니다”의 표현이 말하듯 시가 기본적으로 비유의 장르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돌고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불분명하지만 시 내용으로 보아 사랑, 꿈, 슬픔, 기쁨까지 다 아우르게 한다. 돌고래 자리에 이 단어들을 집어넣고 읽어보면 금세 느껴질 것이다.
두 분을 축하하며 최종심에 오른 분들도 조만간 지면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위로의 말씀을 얹는다.
심사위원: 김영남·이학성 시인
부산일보
변성기 / 김수원 시인
접시는 바꿔요
어제 같은 식탁은 맞지 않아요
초승달을 키우느라 뒷면이었죠
숨기고 싶은 오늘의 숲이 자라요 깊어지는 동굴이 있죠
전신거울 앞에서 말을 터요
알몸과 알몸이 서로에게
내 몸에서 나를 꺼내면
서로 모르는 사람
우리는 우리로부터 낯설어지기 위해 자라나요
엄마는 앞치마를 풀지 않죠
지난 앨범 속에서 웃어야지 하나, 둘, 셋, 셔터만 누
르고 있죠
식탁을 벗어나요
눈 덮인 국경을 넘어
광장에서의 악수와 뒤집힌 스노우볼의 노래, 흔들리
는 횡단열차와 끝없이 이어지는 눈사람 이야기, 말을
건너오는 눈빛들과 기울어지는 종탑과 나무에서 나무
와 나무까지 밝아지는
모르는 색으로 달을 채워요
접시에 한가득
마트료시카는 처음 맛본 나의 목소리
달 아래, 내가 나를 낳고 나는 다시 나를 낳고 나를 낳고
내가 누구인지 누구도 모르게
*행갈이는 틀릴 수 있습니다(인터넷신문으로 확인이 어려움)
<심사평>
올해 응모작들은 폭넓은 시적 탐색을 담고 있었다. 생활의 감정을 담은 시편들은 진정성은 있으되 대체로 상식적이거나 평이했고, 현란한 언어와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편들은 수사(修辭)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는 시들은 삶의 내면과 그 너머를 응시하는 눈길이 매혹적이었으나 미학적 형상화가 부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에 남은 작품들은 ‘위시본’ ‘흑백극장’ ‘물사람’ ‘그후’ ‘변성기’였다. 심사자들의 기대가 높았던 탓이었을까? 꽤 오랜 시간 숙의를 해야 했다. ‘위시본’은 흥미로운 제재를 입체적으로 펼쳐 내는 상상력을 보여주었지만 다소 현학적이고 사변적이었다. ‘흑백극장’은 간명한 언어와 이미지의 전개가 장점이었는데, 입체적 확산의 힘이 모자랐다. ‘물사람’은 차분하되 정서적 흡인력이 강했다. 잘 익은 서정의 세계를 보여주었으나 소품으로 그친 게 아쉬웠다. ‘그후‘는 남다른 시적 깊이와 인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마지막 2행- 결말이 아쉬웠다.
‘변성기’는 일견 조금 서툴고 추상적인 시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가 있다. 호흡과 이미지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고, 상상력의 폭이 크다. 심사자들은 기존의 문법에 익숙한 잘 다듬어진 시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를 선정하기로 했다. 시는 카오스의 세계에서 코스모스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한다. 보다 힘찬 모험을 통해 유니크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박태일 전동균 시인
불교신문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 백향옥 시인
부풀어 오르는 흙이 좋아 맨발로 숲을 걸었다
바닷물에 발을 씻다가 만난 돌은
손바닥에 꼭 맞는 매끄러운 초승달 모양
열병을 앓을 때 이마를 짚어주던 당신의 찬 손
분주하게 손을 닦던 앞치마에 묻어 온 불 냄새, 바람 냄새, 놀란 목소리
곁에 앉아 날뛰는 맥을 지그시 눌러 식혀주던 손길 같은
차가운 돌을 쥐고 있으면 들뜬 열이 내려가고
멋대로 넘어가는 페이지를 눌러두기에 좋았는데
어느 날 도서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몸 깊은 곳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놓친 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동강 난 돌을 잇대보았지만
깨진 돌은 하나가 될 수 없고
가슴에서 시작된 실금이 무섭게 자라났다
식었다 뜨거워지는 온도 차이가
돌 안쪽에 금을 내고 있었던 걸 몰랐다
이제 그만 됐다고 따뜻해진 돌이 속삭였다
그날, 달빛 밝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깨진 돌을 가만히 놓아주었다
달에게 돌려주었다
<심사평>
“불교시의 미래 열어가길 기대”
올해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대한 사부대중의 관심이 뜨거웠다. 반조(反照)의 시편들이 다수였고, 인과와 무상, 적멸을 노래한 시편들이 많았다. 그만큼 불자들의 응모가 많았다는 점은 뚜렷했다. 신행의 두터운 지층으로부터 돌올하게 솟은, 푸르고 서늘하고 생동하는 깨달음의 노래가 곧 불교시(詩)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마지막까지 살펴본 작품들은 ‘만다라화 어머니’, ‘파종’, ‘천 권의 책을 귀에 걸고’, ‘가로수 아래서’,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였다. 구태여 각각의 구실을 찾고자 할 뿐이지 이 작품들은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만다라화 어머니’는 처염상정의 꽃인 연꽃을 어머니의 생애에 견준 시조 작품이었다. ‘예토’, ‘화엄’과 같은 시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파종’은 아름다운 서정을 담은 산문시였다. 한 알의 씨를 뿌릴 구덩이 그것이 곧 우주 생명 세계라는 인식에는 공감을 했지만, 파종의 풍경이 가족사와 연결되는 대목은 자연스럽지 못했다.
‘천 권의 책을 귀에 걸고’는 아버지의 돋보기 그것을 연륜과 지혜의 안목 자체라고 바라본 작품이었다. 좋은 작품이었지만 앞에서 뒤에 이르는 동안 시행이 반복된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가로수 아래서’는 인연이 된다면 후속작들을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고심 끝에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삶의 열기를 식혀주는 찬 돌에 대한 생각을 섬세하게 담되, 옛일을 함께 회상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앞치마’에 묻어 있는 것이 불과 바람의 냄새뿐만 아니라 ‘놀란 목소리’라고 쓴 대목은 감각 내용의 확장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경계가 없는 감관의 활용은 대체로 신예가 갖기 어려운 덕목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게 했다. “깨진 돌”을 달의 빛 속으로 방생하는 대목도 지극히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불교시의 미래를 열어가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문태준 시인
한국일보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 / 신이인 시인
오리너구리를 아십니까?
오리너구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아에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듯
강의 동쪽을 강동이라 부르고 누에 치던 방을 잠실이라 부르는 것처럼
나를 위하여 내가 하는 일은
밖과 안을 기우는 것, 몸을 실낱으로 풀어, 헤어지려는 세계를 엮어,
붙들고 있는 것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안팎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이름이 안팎일 수 있냐며 웃었는데요
손아귀에 쥔 것 그대로
보이는 대로
요괴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겁니다
부리가 있는데 날개가 없대
알을 낳지만 젖을 먹인대
반만 여자고 반은 남자래
강물 속에서도 밖에서도 쫓겨난 누군가
서울의 모든 불이 꺼질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기슭에 떠내려오는 나방 유충을 주워 먹는 게 꽤 맛있다는 거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내 무릎에 올려두었던 수많은 오리너구리
오리가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나
진짜도 될 수 없었던 봉제 인형들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
끊어낼 수 없는
주렁주렁
전구 없는 필라멘트들
불을 켜세요
외쳐보는 겁니다
아, 이상해.
<심사평>
개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개성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각자의 고유성을 얼마간은 지니고 있으며 생활과 사유 곳곳에서 그 고유함은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숨기려 해도 얼핏 내비치는 사투리처럼, 감추려 해도 별안간 나타나는 표정처럼. 시는 나도 모르게 드러나는 개성을 서랍장 곳곳에 잘 수납하고 연과 행에 맞춰 잘 구획하는 관리자일지도 모른다. 혹은 반대로 가끔 얼굴을 비추는 고유성을 극대화해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는 난동꾼일 수도 있다.
심사에서는 완벽한 관리자와 특별한 난동꾼 중 하나라도 그 자리에서 나오길 바라게 된다. 관리자이면서 난동꾼이 될 수 있는 시인이 등장하길 차마 바랄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잘 없으니까. 그 어려운 일이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일어났다.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은 정돈되면서 어질러진 시였다. 익숙한 지명을 동원하고 친숙한 어투로 말을 건네어 귀를 붙잡아 두면서도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 같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정리된 채 구성된 이미지 속에서도 곳곳에 돌출하는 의외성이 시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지금의 시만큼 앞으로의 시 또한 기대된다. 기대하는 자의 설렘을 담아,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함께 마지막까지 이야기한 작품은 '새, 하고 열린 옷장', '언젠가 부하들은 반란의 내색을 비춘 적 있다', '한국어 감정' 등이다. '새, 하고 열린 옷장'은 사소한 장면을 일시정지 상태로 만들어 더 이상 사소하지 않게 하는 미덕이 있었다. '언젠가 부하들은…'은 유머러스하고 의의성 있는 진행이 돋보였다. '한국어 감정'은 언어와 언어가 부딪쳐 생기는 감각과 진폭을 그리는 주제 의식이 담백했다. 모두 당선되지 않을 이유보다 당선될 이유가 더 많았으나, 약간의 행운이 부족했던 것으로 오늘의 아쉬움을 갈음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당선자에게 다시 한번 축하의 말씀을 건넨다.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세계 어딘가에서 역시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들을 껴안으며 써나가 주실 것이라 믿는다. 관리자가 될 것인가, 난동꾼이 될 것인가? 그런 생각할 겨를 없이 시는 당신을 끌고 어딘가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만나면 좋겠다.
심사위원: 서효인 시인, 장석주 시인, 김소연 시인
영남일보
해감 / 설현민 시인
새벽 물때다 사촌들과 바지락을 캐러간다 이모를 도와야 했다 엄마, 엄마, 나는 한 번도 이모를 본 적 없는데요 가족이잖니 단숨에 알아차릴 거다
모래사장은 구덩이로 가득하다
저 안에서 움직이는 게 보이니 저기 너희 이모가 있잖아 움직이는 게 너무 많은걸요 네 이모처럼 움직이는 것은 하나뿐이란다
등을 돌려 앉은 엄마는 쇠갈쾡이로 발 밑을 푹푹 퍼올린다
나는 양동이를 끌어안고 움푹한 바닥을 들여다본다
모래 속에는 모래가 들어 있다
어린 사촌들은 껍데기를 손에 쥐고 땅을 헤집는다 또 다른 껍데기를 주워 자랑한다
바지락을 얼마나 더 캐야 하나요 노인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아직 모자라구나
이모는 왜 그렇게 깊이 파들어 가죠 깊은 곳엔 먹을 게 없잖아요
네가 그렇게 태어났지 모래를 툭툭 털고 너를 꺼냈단다
바지락이 쌓여간다
나는 그것을 씻어 다른 양동이에 옮겨 담는다 빈 껍질을 골라낸다
아이들은 조개껍데기를 묻어 성호를 긋고
너는 어쩌면 이렇게도 다 커버렸구나 이젠 무엇도 몰라보겠구나
검은 천으로 양동이를 덮는다
내 입안에 서걱거리는 것이 들어있다
나는 이모가 엄마를 닮았다고 말했다 이모는 엄마보다 많이 늙어 있었다고
저기 모래를 뱉고 있는 것이 있다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심사평>
"자신의 존재성 확인, 고백의 언어로 풀어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세 분의 응모작 중 실험적인 작품이나 형식의 파격을 보이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대상을 관조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특성을 보여서 서정의 밀도와 품격을 유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개별 작품에서 맞춤법에 어긋난 어구의 사용이 꽤 많이 눈에 띄었는데, 시도 한글 문장의 규범 안에서 창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세 분의 작품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래가 그래'는 응모 작품 중 드물게 생태학적 사유를 동원하고 있어서 문제의식의 진지함이 주목을 받았다. 고래 내장에 축적된 폐기물로 생태계의 위기를 표현한 착상은 새로웠지만 그 주제가 시적인 언어로 유연하게 형상화되지는 못하였다. '우리 집은 기상청 지부'는 아버지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면서 그사이에 연민의 정서를 적절히 병치하는 솜씨를 보였고, 감정을 절제하고 대상과의 거리를 조절하면서 삶의 내력을 표현한 점도 뛰어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후'의 의미가 모호해서 공감의 폭을 확장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리빙 포인트' 외 2편을 투고한 분의 작품 중에서는 '리빙 포인트'보다 '해감'에 더 눈길이 갔다. '리빙 포인트'가 일상적 삶의 무료함을 다양한 형상의 교차를 통해 새롭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 다양함이 시상의 집중을 방해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해감'은 어릴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평범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고백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풀어가고 있어서 그의 시적 재능이 앞으로 더 발전하리라는 예감을 받았다. 이에 '해감'을 당선작으로 밀며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강은교 시인, 이숭원 문학평론가
농민신문
국수 / 박은숙 시인
허리가 굽은 노인이
식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국수 한그릇을 시킨다
네명의 자리에 세명을 비워두는 식사
아마도 매 끼니를 빈자리들과의
합석이었을 것 같다
잘 뭉쳐져야 여러 가닥으로 나뉠 수 있는 국수, 수백번의 겹이
한뭉치 속에 모이는 일, 뜨겁게 끓인 다음에 다시 찬물에 식혀야
질겨지는 음식, 그 부피를 많이 불리는 음식은 힘이 없다지만,
그래서 여럿이 먹어도 한가지 소리를 내는 국수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저 노인의 슬하는
이남 삼녀의 망종(亡種)
꽃 핀 곳 없는 행색이지만
한때는 다복했었을 것이다.
잇몸으로 끊어도 잘 끊어지는 빗줄기 같은 국수,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 풀어 헤친다
치아도 없는 노인이 먹는데
후루룩, 비 내리는 소리가 난다
비 오는 날 마루에서 들리던 엄마의 청승같이
뚝뚝 끊던 빗소리,
맑은 물에 헹군 국수발 같은 주름이
입안에 가득 고인 빗소리에
바람이 흩날리며 든다.
박은숙: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한국문인협회화성지부 부지부장.
<심사평>
국수 소재로 화려한 수사 없이 삶을 담백하게 빚어내
천연두 치환한 ‘빗방울 화석’ 참신
‘흙벽’ 신선한 묘사력 빼어나 눈길
<농민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총 스무명의 시가 공히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었다.
속도의 저편으로 밀려난 삶의 그늘과 소외의 풍경을 그려내고, 타자들에 대한 저버릴 수 없는 관심을 어떻게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재구성할 것인가에 시선이 모아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밀행> 외 4편, <고라니> 외 4편, <노루발> 외 4편, <국수> 외 4편의 응모자들을 최종심에 올려놓고 집중적인 토의를 했다.
소재에 밀착하면서도 시적 인식의 확대를 도모한 <노루발>과 <국수>를 주목했다.
<노루발>은 경쾌한 어조와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였으나 동봉한 작품들의 에코페미니즘적 모성 서사가 익숙한 회로를 맴돌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국수>는 설명적 진술과 어색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동봉한 작품들의 안정감이 깊은 신뢰를 줬다.
특히 천연두를 <빗방울 화석>으로 치환한 비유의 참신함, 삶의 악천후를 품은 균열을 신체화한 <흙벽>의 신선한 묘사력, 문명의 맥을 짚은 <멸종의 거리> 같은 작품들은 당선작 못지않게 빼어난 시편들이다.
어쩌면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소재를 선택해 삶을 빚어내는 솜씨를 보며 우리는 시의 독창성이 어떤 유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질감의 문제이기도 함을 알게 된다.
과잉된 감각들과 화려한 수사의 먼지를 벗겨낸 자리에서 ‘맑은 물에 헹군 국수발 같은 주름’처럼 담백하게 씻긴 말들이, 겨우 존재하거나 잔상으로만 남은 부재의 측근들과 늘 함께 있기를 바란다.
새로움을 애써 여의면서 발효돼 나오는 시는 그때 굳이 새로움의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심사위원: 나희덕 시인, 손택수 시인.
광남일보
길찾기 / 김진환 시인
차창 너머 낯선 가게들
잠시 눈 감은 사이에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나
인터넷 지도로 확인한다
버스의 노선과 파란 점의 위치를
나는 길 잃지 않았다
인터넷 지도에 따르면
이 길은 내가 아는 길
매일같이 지나는 왕복4차로
거기서 나는 흰색과 붉은색 보도블록의 배열을 배웠고
넘어져 뒹굴며 무릎으로 손바닥으로 아스팔트를 읽었는데
보도블록의 배열이 다르다
아스팔트의 굴곡이 다르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한다
버스가 정거장 몇 개를 지나는 사이
파란 점은 아직도 아까 그 길에 있다
멀리 손 뻗어 손바닥의 살점 패인 자리를 보면
핏기와 죽은 피부의 흰빛이 구분되지 않는데
하차 벨 소리가 울린다
흰 버튼 위로 붉은 등이 들어와 있다
뒷좌석 사람이 내 뻗은 팔을 보고
대신 눌러 주었다며 손짓한다
버스에서 내려 아스팔트를 만져본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이 길은 내가 아는 길이거나
거기로 이어지는 길
걷다 보면 낯익은 가게들도 보일 것이다
김진환: 1996년용인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전공 재학
<심사평>
“문화사적 맥락 속 독창적인 목소리 확보”
양보할 수 없는 시의 미학적 규범의 하나가 상투성과의 싸움이다. 어디서 한번은 본 듯한 기계적인 언어의 조합이나 문장, 누구나 알 수 있는 흔해빠진 생각과 당연시해온 사회적 통념과의 치열한 대결이 개성적인 작품 탄생의 기본 조건이다. 그러지 않는 작품들은 이미 누군가 힘들여 개척해 놓은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가는, 그러나 결국엔 모방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한 아류작亞流作에 불과하다. 무한히 사본을 뽑아낼 수 있는 사진의 음화陰畵를 의미하는 ‘클리세’ 내지 복사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코로나 정국으로 인한 우울하고 답답한 시대상황 탓일까? 막연한 불안과 절망 의식, 실업과 빈곤 등의 주제나 소재가 다수를 차지하는 응모작들을 보면서 소감 중의 하나가 그렇다. 각자 절실하고 소중한 주제나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미 공유된 명백한 사실들이나 타성화된 담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그 표현방식이 이미 한국시의 스테레오 타입화된 기성 시인들의 어법을 닮아있다는 것은 유감이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경향 각지의 응모자가 보내온 1129편의 시들을 꼼꼼히 살펴본 후, 심사자는 김재언의 ‘물 저울’ 외 4편, 정두섭의 ‘가족의 탄생’ 외 5편, 황명희의 ‘황금냄비’ 외 4편, 장윤덕 ‘그늘의 역사’ 외 4편, 김진환의 ‘길찾기’ 외 5편 등을 최종 심사 대상으로 삼았다. 이 응모작들 모두 다행히 그런 상투성의 혐의(?)를 슬기롭게 피해가고 있다. 특히 이들 작품들은 언어를 필요 이상으로 학대하거나 당대 사회의 관습이나 윤리도덕을 의심 없이 추종하는 데서 오는 감상적인 휴머니즘 차원을 벗어나 있다.
하지만 심사자가 최종 심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장윤덕과 김진환의 시들이었다. 그리고 장윤덕의 경우, 유장한 리듬과 활달한 문장 전개 속에서 펼쳐 보이는 시대정신과 민중의식이 여느 기성 시인 못지않은 시력(詩歷)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심 끝에 심사자는 결국 섬세한 관찰력과 그에 바탕한 정치(精緻)한 시적 패턴 읽기에 기반하고 있는 김진환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일견 소박하게 보이나 막강한 힘으로 군림하는 시적 영향이나 생각의 통속성을 벗어나는데 그치지 않고, 바로 자신만의 세상읽기와 사유를 정직하게 펼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당선작으로 뽑은 김진환의 ‘길찾기’는 길 찾기 맵과 실재, 인터넷 지도와 실제 삶 사이의 괴리에 대한 설득력 있는 알레고리화를 통해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필요 이상 시적 장식이나 세련된 수사의 남용보다 자신의 체험과 그 영향에 대한 성실한 반성 및 성찰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삶의 감각과 실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비둘기 낙서’와 더불어 당선작은 이미 진부해진 기존의 생각이나 문체들을 자기 것 인양 포장하기보다 그것들을 시대적이고 문화사적인 맥락 속에서 저만의 독창적인 목소리를 확보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최종심에 오른 5명의 응모작들은 여느 문학매체들에 응모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수작들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기에 너무나도 아쉽게 당선의 문턱을 넘지 못한 예비시인들에게도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특별히 당선자에겐 늘 정진하는 시인의 한 명으로 오래 한국시단에 기억되길 바라면서 축하의 꽃다발을 건넨다.
심사위원: 임동확(시인)
전남매일
개미들의 천국 / 현이령 시인
아버지가 아침 일찍 공원 숲으로 간다. 노란 조끼를 입고서, 숲이 아닌 것들은 모두 줍는다. 나무와 나무 사이 아버지와 아버지 사이 쓰레기를 줍다가 잘못 건드린 개미집에서 후드득 쏟아져 나오는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를 물고 개미는 개미를 물고 이끼처럼 들러붙어 저녁을 먹는 우리 집. 아버지의 집에는 아버지도 모르는 집들이 많아. 나는 개미처럼 더듬이가 자라고 발로 툭 치면 무너져 내리는 불안들.
바닥을 잘 더듬는 내력이 우리의 유전자에 있지만 나는 한낮에도 까만 개미가 무섭다. 땅바닥을 쳐다보다 땅이 되는 게 꿈인 아버지가 떵떵거리지 못하는 건 기우뚱한 어깨 때문.
개미는 개미에게 의지하고 의지는 의지에 기대고 아버지의 몸을 기어 다니는 수많은 개미 떼. 아버지는 밤마다 방을 쓸어내지만 개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었다 허물었다 오롯이 사라지는 비밀의 집.
새집을 달아 주러 온 나는 새 운동화로 개미를 밟는다. 거대한 발자국 아래 무너진 한 뼘 그늘. 머루 열매 같은 눈알을 꼭꼭 숨긴 아버지.
나는 울먹이며 신발을 턴다. 자꾸만 들러붙는 개미들의 그림자. 숲이 사라져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현이령: 1980년 충북 보은 출생, 서일대 영어과 졸업,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시옷문학회 동인.
<심사평>
“고통 받는 존재에 대한 공감 시인의 중요 덕목”
700여 편의 응모작들을 읽었다. 코로나 시대의 어둡고 우울한 사회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고향이나 농촌을 배경으로 한 생활 시편들이나 자연 친화적인 서정시들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보니 너무 직설적이거나 감상적인 경우가 많았고, 타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언어적 모색이 아쉬웠다. 그런 중에 발견한 <커튼콜>, <긴장의 재구성>, <개미들의 천국> 등은 참신한 발상과 시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수작이었다.
<커튼콜> 외 4편은 경쾌하고 발랄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고 독특한 소재와 형식을 통해 다채로운 시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적 인식이 충분한 깊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재치에 머무르거나 낭만적 우화에 그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긴장의 재구성> 외 4편은 사유의 폭이 넓으면서도 집중도가 있고 시적 대상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돋보였다. 현실의 문제를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사유는 독창적이지만, 전달력이 떨어지거나 거칠고 어색한 문장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개미들의 천국> 외 4편은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간결하고 섬세한 언어로 삶의 비애와 불안을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는 어떤 간절함을 지니고 있으나 감정을 함부로 발산하거나 낭비하지 않는다. 당선작인 <개미들의 천국>에서 공원 청소부인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의 슬픔은 절제된 표현에도 불구하고 먹먹하게 읽힌다. 힘이 없고 고통 받는 존재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은 시인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점에서 당선자의 시선과 마음에 신뢰가 갔다. 그 마음의 힘으로 앞으로도 아름다운 시의 길을 열어가시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나희덕 시인
한라일보
도서관 / 신윤주 시인
커다란 눈이 하늘을 올려다봐요. 수백의 실핏줄들이 네모난 바스켓을 움켜쥐어요. 하늘로 날아올라요. 바다의 표지는 잔잔해지고, 파도가 물러간 페이지마다 떠밀려온 해인초들이 엉겨 붙어요. 해인초가 손끝에서 잘게 부서져요. 낮과 밤을 알 수 없는 시간이 이어져요. 키잡이는 가시 박힌 손으로 안개를 더듬으며 항로를 찾고 있어요. 날씨만 도와준다면 오늘 안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그곳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요. 시커먼 해초들이 대서양을 밀고 들어와 바다의 귓속에 이야기를 풀어 넣어요. 귀를 막아도 노랫소리가 들려요. 저기 범고래 떼가 몰려와요. 표류하는 낱말 조각들을 등에 실어 해안선으로 날라요. 실핏줄이 터지고, 열기구가 휘청거려요. 행운이 문단 밖으로 달아나려 해요. 숨이 차요. 하강하고 있어요. 저 멀리 익숙한 초록색 대문이 보여요. 마당에는 안개꽃이 흐르고요. 열린 창문으로 파도가 들이쳐요. 파란 잉크가 옷에 튀어요. 발목이 잠겨 첨벙거려요. 이만 돌아가야 해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손끝으로 모래의 지문들을 털어내요. 숨을 크게 들이쉬어요. 한없이 부풀어 올라요.
신윤주: 1986년 제주 출생, 제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심사평>
“상상력의 탄탄한 근력과 섬세한 서정”
한라일보 신춘문예 본심에 오른 시 작품들을 차근차근 읽었다. 서정적인 작품들이 다수 있었고, 고유한 제주 체험에 기초해 창작한 작품들도 여러 편 있었다.
한 편의, 새로운 시의 탄생은 하나의, 초유의 관점의 탄생일 것이므로, 한 편 한 편에 과연 시적인, 유의미한, 최초의 발견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생각의 단순한 열거에서 벗어나 그 생각들이 유기적으로 상관하고 있는지도 꼼꼼하게 살폈다.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살구나무', '감자꽃', '그리고 '도서관'이었다. '살구나무'는 무위(無爲)를 노래한 작품이었다. 살구나무의 순연한 생명 운동을 번거로운 잡사(雜事)에 시달리는 사람의 형편에 대조해서 바라본 작품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이 작품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감자꽃'은 제주 4·3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감자가 자라는 땅속 어둠의 공간을 피신한 공간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 공간이 "검은 봉지"의 공간으로 갑자기 전환되는 대목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고심 끝에 시 '도서관'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시는 해역(海域)을 책 혹은 도서관의 공간에 견준 작품이었다. 바다의 파도와 해초, 해안선 등을 한 권의 책의 표지와 책 속에 담긴 서사로 치환했다. 상승과 하강,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의 경계를 내내 활발하게 허무는 점이 신선했다. 첫머리에서 끝자락에 이르도록 산문시 시행을 끌고 가는 상상력의 탄탄한 근력뿐만 아니라 풍경을 드러내는 섬세하고 서정적인 화자의 목소리가 돋보였다. 그리고 함께 응모한 작품들 전편에서 유니크한 시적 화자를 만날 수 있었던 점도 새로운 신인의 출현을 한껏 기대하게 했다. 앞으로 서두르지 않고, 심지 굳게 자신만의 시세계를 열어 나가길 바란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허영선·문태준 시인
무등일보
붕어빵 안에는 배고픈 고래가 산다 / 조효복 시인
아이의 웃음에선 생밀가루 냄새가 났다
접시 위에 수북이 담긴 고기를 자랑하는 아이
가쁜 숨을 내쉬며 조그마한 얼굴이 웃는다
콧등을 타고 오른 비음이 아동센터를 울린다
해를 등지고 앉은 언니는 아빠를 닮았다
그늘진 탁자에는 표류 중이던 목조선 냄새가 비릿하게 스친다
구운 생선을 쌓아두고 살을 발라낸다
분리된 가시가 외로움을 부추긴 친구들 같아 목안이 따끔거린다
흰 밥 위에 간장을 붓고 또 붓는다
짜디짠 바람이 입 안에 흥건하다
훔쳐 먹다 만 문어다리가 납작 엎드린 오후
건너편 집 아이가 회초리를 견딘다
튀어나온 등뼈가 쓰리지만 엄마는 버려지지 않는다
매일 다른 가족이 일기 속에 산다
레이스치마를 입은 아이가 돈다
까만 유치幼齒를 드러낸 아이가 수틀을 벗어난 실처럼 돌고 있다
귀퉁이를 벗어난 아이들이 둘레를 갖고 색색으로 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뱃구레 속에 고래가 산다
골목은 높낮이가 다른 파동들이 그려놓은 바다 놀이터
제자리가 두려워 아래로만 내달리는 모난 고래들
풍덩 골목 아래로 제 몸을 던진다
가라앉은 먼지위로 고래가 헤엄친다
팥물 묻은 고래 비탈을 구른다
천막 아래 등이 굽은 엄마가 붕어빵을 굽는다
<심사평>
“상처와 희망 공존 진실 통찰의 힘 돋보여”
전국에서 응모한 1천100여편이 넘는 시를 읽으면서 삶과 진솔하게 맞서는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과거의 회고에 치우치거나 르포처럼 서술된 작품이 많았다. 지금 여기의 삶과 마주하는 긴장이 아쉬웠다. 또 다른 경향은 상상력을 발휘했지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시어가 모호한 경우다. 바꾸어 말하면 시어가 모호한 것은 창작자의 생각과 감정이 정확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수사를 따라갈 때 발생한다. 시의 언어는 모호한 것이 아니라 적확하다는 기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어를 정확하게 구사하는 작품이 기대보다 적었다. 이 가운데서 시어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여백 속에서 정서와 의미를 생성하는 시의 본디를 갖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한 끝에 조효복의 '붕어빵 안에는 배고픈 고래가 산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이 작품은 삶의 굴곡을 상상력을 통해 묘사하면서도 상처와 희망이 공존하는 진실을 통찰하는 힘이 있다. 궁핍이 가져온 상처를 그리면서도 상처를 넘어서는 순수한 삶의 활달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실을 참신한 감각으로 묘사하면서 입체적으로 조형하는 능력을 갖추어 앞으로 창작될 시를 기다리게 한다.
아쉽게 당선작이 되지 못한 이미영의 '디스코 팡팡'도 활달한 언어로 사실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힘이 있었다. 다만 시 세계가 사실을 넘어서는 삶으로 확장하는 진폭을 늘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 다른 작품으로 노수옥의 '감당'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을 통해 삶의 진실을 포착하고 있었으나 마무리가 아쉬움을 주었고, 김태훈의 '애인의 애인'은 감각적 묘사력이 돋보였으나 언어를 꽉 채우다보니 주제가 뚜렷하게 전경화 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김영의 '뼈를 추리는 바람'은 사물에 인간의 심성을 부여하는 감수성을 갖추었으나 군데군데 수사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당선작을 포함한 위 작품들은 감수성과 언어를 다루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있어 시인으로서 태도를 갖추었다. 모두가 꾸준하게 창작할 때 신진 시인으로서 빛을 발휘하리라는 믿는다. 하나 덧붙이자면 답답하고 때로는 울분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시대에 당대의 시인으로 독자들에게 예리한 충고와 따뜻한 위로를 주는 위의를 세워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노철 시인, 전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모천(母川) / 김철 시인
청계천 골목 어디쯤
모천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양양의 남대천이 아닌
뜨끈한 국수를 파는 국수 집 근처 어디라고
국수 발 같은 약도 적힌 메모를 들고 찾아간
미물도 명물로 만든다는 그 만물상
주물 틀에서 갓 나온 물고기 몇 마리 사왔지
수백 마리 수천 마리 붕어빵 구워낼 빵틀
파릇한 불꽃 위를 뒤집다 보면
세상의 모천을 찾아오는 물고기들
다 중불로 찍어낸 붕어빵 같지
한겨울 골목 경제지표가 되기도 하는
천원에 세 마리, 구수한 해류를 타고
이 골목 입구까지 헤엄쳐 왔을
따뜻한 물고기들
길목 어딘가에 차려놓으면
오고 가는 발길 멈칫거리는 여울이 되는 것이지
파닥파닥 바삭바삭
물고기 뛰는 모천의 목전쯤 되는
영하의 파라솔 아래
엄마가 하루 종일 서 있던 그곳
<심사평>
“상상력과 상징, 현장성 돋보이는 수준작들”
경제신춘문예 응모작들의 소재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일반문예 수준으로 올라온 듯하다. 수필이나 수기보다 소설 쪽 수준이 높았다.
'페니 스탁 스캠'은 제목 그대로 1페니의 주식을 작전으로 부풀려 고가에 파는 사기방식과 거기에 얽혀 있는 이상한 명상수련 단체의 이야기를 두 축으로 하는데 우선 소설의 문장이 거칠고, 사건의 전개 방식도 치밀하지 않다.
'발효 초콜릿'은 장학재단 설립과 이 재단에 대한 국제송금이 주 이야기를 이루는 작품으로 일단 긴장감 있게 읽히는 장점이 있다. 후속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나, 기대하며 끝까지 읽히게는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다 읽고 났을 때 작품의 완결도가 떨어진다.
산문 부분 대상작으로 뽑은 '초파리들'은 외국계 반도체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반도체의 특성, 세계 반도체 시장 움직임의 특성, 그리고 이 외국계 회사의 본사와 지사의 움직임, 그에 따른 내부 인력들의 경쟁과 협력, 협잡 등을 아주 리얼하고 현장성 있게 다루었다. 한 편의 기업소설이자 경제소설로 제목 초파리의 상징성까지 두루 잘 구성하고 또 형상화해냈다. 앞으로 작가로서 좋은 활동을 바란다.
시 부문에서는 예년에 비해 응모작이 적었다. 본심에는 김철씨의 '모천', 송종관씨의 '트럭에게 빗길이란', 정소망씨의 '폐차장 풍경', 권수진씨의 '흔들의자', 최명진씨의 '나룻배'가 올라왔다. 이 가운데 최종 경합은 동반작품들도 우수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모천'과 '폐차장 풍경', '나룻배'가 벌였다.
'나룻배'는 함께 출품한 '홍시'와 함께 시적 수련이 잘된 분의 작품 같았다. 그렇지만 시적 정조가 아련하긴 한데 신인에게 기대하게 되는 참신성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폐차장에서 자동차가 해체되는 과정을 다소 과격하게 그려낸 '폐차장 풍경'은 "삶은 때론 멈춘 곳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라는 마무리가 시적 긴장감을 배가 시켜주고 있다. 그런데 출품작들 곳곳에서 가끔 튀어나오는 "의문의 도로", "노동자의 손" 같은 어색한 관형격 조사 '의' 표현들이 마음에 걸렸다.
응모작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의'와 관련한 오용이나 남용은 글을 어색하고 딱딱하게 만든다는 점을, 특히 시 쓰는 분들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남은 김철씨의 '모천'을 당선작으로 선정키로 했다. 경제신춘문예라는 주제에도 걸맞고 엄마가 파라솔 아래 붕어(빵)와 하루 종일 서 있던 그곳이 곧 모천이라는 시적 상상력 또한 돋보였다. 춥고 삭막한 겨울, 아름답고 따뜻한 작품이었다. 앞으로 시를 향한 정진을 기대할 만하다. 응모하신 모든 분들께 분투를
기원 드린다.
심사위원: 이순원(소설가), 이희주(시인)
뉴스N 제주 신춘문예
발포진 랩소디* / 서동석 시인
하늘에도 물길이 있어요 비와 바람이 드나드는 길목이죠
낙엽도 허공에서 노를 저어요
겨울나무들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허공 깊이
닻을 내리는 법을 알죠
좌현 쪽으로 기울던 오동나무 잎이 다급히
우현으로 몸을 틀어요
놀라지 마요
이곳에선 파도치고 배가 드나들 듯 흔한 일이죠
운이 좋으면 좌초된 해초 한 줄기에
당신의 오후가 생포될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그를 알아볼 순간이 필요해요
어쩌면 어선 위에서
젊은 어부가 되어 양식한 물김을 뜯고 있거나
또 모르지요 누각에서 홀로 일기를 쓰고 있을지도
해풍이 부는 밤바다에서 어떤 그림자를 보거든
신호를 보내듯 말을 걸어야 해요
이렇게 물어보는 건 어때요?
혹시 12라는 숫자를 좋아하세요?
아니면 푸른 버드나무 냄새가 훅, 스치거나
정강이 어디쯤을 조금씩 절고 있는지 재빨리 살펴요
그가 조금만 망설여도
당신은 바로 돌아서는 것을 잊지 말아요
고독한 수염 과묵한 입술과 눈빛
밤이라면 횃불 하나는 오른 손에 꼭 챙겨요
가끔은 내 안에서도 횃불이 번지긴 해요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몰라요
우리는 서로를 모르기에 낯익은 사람들
물가에 가면 *두정갑옷을 입은 듯 몸이 무거워요
온 몸이 비늘이에요 두드러기처럼 매일 철갑이 돋아나요
발포진에서는 환한 귀가 필요해요
깊은 밤 물가에 서서 눈 감고 하나, 둘, 셋, 세어 봐요
바람 속에서 갑옷의 기척이 먼저 말할 거예요
손 내밀 거예요
발포만호의 손에서 물비린내 날 거예요
손바닥에 짠 내 밴 굳은살이 쓸쓸할 거예요
밤이면, 그날의 수군(水軍)들이 지금도
송판으로 판옥선을 만들고 돛을 달아요
거북선 위에서 망치질 소리 들려와요
잠깐, 포구 저쪽이 술렁여요
순시를 마치고 돌아온 그가 한쪽 손에 등채*를 들고
나를 향해 걸어와요
그의 한쪽 가슴에 활 맞은 자국이 보여요
설마 그의 눈에 내가 보이는 건 아니겠죠?
아직 나를 들켜선 안 돼요
붉은 두정갑옷이 내 앞에 당도 했어요
해풍의 냄새를 맡은 장군 어깨의 견룡이
구름을 박차고 날아올라요
내 말을 아무도 믿지 않겠죠? 심장이 터질 듯한 밤이에요
*발포진-전남 고흥에 있는 바닷가 지명으로 이순신 장군이 수군으로 첫 부임했던 곳
*랩소디-서사적. 영웅적. 민족적인 색체를 띠고 있다
*등채-조선시대의 무관이 구군복 차림 때 손에 든 지휘봉
*두정갑옷-이순신 장군님의 갑옷이름
서동석: 전남 해남 출생, 1961년생, 방송통신대학교 영문과 3년 중퇴,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시 창작과정 수료
<심사평>
"전인적 인식과 반응을 포괄한 창조적 작품”
예심을 통과한 작품 139편을 넘겨받은 강희근 시인과 나는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심사방법으로 각자 자기 집에서 최종적으로 두세 편씩 골라 온라인으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꼼꼼하게 작품을 살펴볼 여유가 있어서 심사하는데 오히려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 모두가 김순애씨의 「백사장 리사이틀」(접수번호 412번)과 서동석씨의 「발포진 랩소디」(접수번호 4번)를 고르는 겁니다.
음악을 제재로 삼은. 하지만 염두에 둔 당선작은 각기 달랐습니다. 저는 파도에 대한 감각을 형상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려는 김순애씨 작품을 내심으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강 선생님은 예심의 기준에 ‘현실감과 역사성’을 추가하자면서 서동석씨의 작품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호의 ‘발포진’이 ‘포진(疱疹)’을 연상시켜 접어뒀던. 그런데, 선생님으로부터 ‘발포진(鉢浦鎭)’은 전라남도 고흥군 포구 가운데 하나로 선조 14년 5월에 이순신 장군께서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처음 부임한 곳이라고 귀띔을 받는 순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도 물길이 있어요 비와 바람이 드나드는 길목이죠’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자연과 인사’를 융합해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문장율’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현대화라는 명분으로 ‘우리’를 외면하는 시단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발포진 랩소디」를 당선작으로 올리기로 합의했습니다.
당선을 축하합니다. 시는 ‘전인적(全人的) 인식과 반응을 다 담아 또 다른 존재를 창조하는 장르’니 이 점을 평생 기억하면서 좋은 작품을 많이 쓰시고 부디 대성하시길 빕니다.
본심위원: 강희근 시인, 윤석산 시인(글)
예심위원: 윤석산 시인, 현달환 시인, 강정림 시인
자료출처 : 시산맥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