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이다. 동한 때 대학자였으며 24 효자 중 한 사람인 육적(陸績)의 여섯 살 때 구강에 사는 원술(袁術)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원술이 육적을 반가이 맞으며 손님 접대로 귤을 내놓는다.
육적은 먹는 시늉을 하면서 품속으로 귤을 집어넣는다.
세 개의 귤을 가슴에 품고 있다. 잠시 더 이야기를 하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원술에게 머리를 굽혀 절을 하는 순간 귤 세 개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당황한 육적은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원술이 묻는다.
“육랑은 손님으로 와서 어찌 귤을 가슴에 품었소[陸郞作賓客而懷橘乎].”하고 묻자 “집으로 돌아가거든 어머니께 드리려고요[欲歸遺母].”라고 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 말을 들은 원술은 그 효성이 지극하여 매우 칭찬을 하였고 그 이후부터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로 육적회귤(陸績懷橘)이라고 썼다고 한다.
다른 말로는 회귤고사(懷橘故事)를 쓰기도 한다.
육적(陸績)은?
육적은 여강태수를 지낸 육강(陸康)의 아들로 187년에 출생하였다. 자는 공기(公紀)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원 5촌 조카 육손과 함께 자랐다. 부친이 원술과 대적하게 되어 그의 가족은 오나라 손권에게 가 피신을 했다.
아버지 육강은 손책과 벌인 전투에서 사망했다. 육적은 학문을 좋아해서 많은 책을 즐겨 읽었다. 곧은 성격 탓에 주장은 강경했다. 손권의 휘하에서 벼슬은 하였으나 지방으로 좌천되어 울림태수(鬱林太首)를 지냈다. 젊은 나이 32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원술(袁術;? ~ 199)은 중국 후한 말기 무인으로써 제위(짧지만)까지 한 사람이다. 자는 공로(公路)이다. 여남(汝南;河南省 南水縣)에서 출생하였다. 사촌형[從兄]인 원소(袁紹)와 더불어 그 시대 명문거족(名門巨族)이다. 동탁이 황제를 폐위시킬 계획에 같이 동참시키려고 하자 후환이 두려운 나머지 남양으로 탈주하여 손견과 결탁하고 동탁을 쳐부순다.
그 후 요동(遼東)의 공손 찬(公孫 瓚)과 손을 잡고 있을 당시 한쪽에서 원소와 형주(荊州)의 유표(劉表)가 대립하게 되자 유비·조조도 이 때 서로 휘말려 일진일퇴를 하게 된다. 조조와 원소에게 패하여 양주(揚州)로 근거지를 옮기고 197년 구강(九江)에서 제위한다. 2년도 못돼 세력이 약해지면서 임금의 자리를 원소에게 물려주고 원소의 아들 원담(袁譚)에게 의탁하게 된다. 결국 유비(劉備)의 방해로 강정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첫댓글 문자도 효에는 왕상빙어(王祥氷魚), 맹종읍죽(孟宗泣竹), 황향선침(潢香扇枕), 순(舜)임금의 오현금(五鉉琴), 육적회귤(陸績懷橘)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삼국지를 읽다보면 육적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옵니다.